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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이 어려워서 누가 읽을까 싶지만 책(『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이 절판되서 혹시나 그 내용이 긍금할까 싶어서 결론(웨인 그루뎀)을 모두 타붙하여 올립니다. 판단과 분별은 독자들 각자의 몫으로 맡기겠습니다.
결론(웨인 그루뎀)
이 글은 이 책의 마지막 글이지만 분명 논의의 마지막은 아니다. 중요한 차이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의 필자들은 또한 몇몇 중요한 의견 일치의 영역을 공유하고 있고 이런 점들을 분명하게 진술하며 그런 점들에 대해 고맙게 여기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 의견 일치의 영역
1. 성경에 대한 확신.
필자들은 오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자 우리가 논의한 모든 문제들에 있어 우리의 절대적 권위로서의 성경에 대한 확신에 동의했다. 실제적인 관점에서 이는 이 논문집의 필자들이 자신들과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은 지속적으로 생활과 사역의 모든 영역에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재확인시켜 주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2.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
필자들은 이런 문제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로서 함께 토론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주 감사의 뜻을 표했다. 우리의 이틀에 걸친 토론회의 중요한 성과 가운데 하나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를 향한 참된 사랑과 우리와 생각이 다른 이들에게서 발견한 교회의 순수성에 대한 관심을 더 크게 인식하며 토론회를 마쳤다는 점이었다. 나는 소시 박사가 끝맺는 말에서 “교회는 남아 있는 쟁점들을 계속해서 공동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은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토론회가 끝날 때 우리 모두는 이 책을 이런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한 기초로 사용할 이들에게도 주님이 그와 비슷한 경험을 허락해 주셔서 그들도 이런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해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발견되는 그리스도께 대한 헌신의 깊이와 교회의 유익을 구하려는 소망에 대한 인식에 있어 자라가기를 소망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3.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경험하는 일의 중요성.
이 책의 모든 필자들은 매일의 신앙생활에 있어 참되고 핵심적이며 인격적이며 관계적인 하나님에 대한 체험, 기도하며 예배하는 일과 우리의 모든 구체적인 삶의 상황 속에서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에 함께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을 포함하는 체험의 중요성에 대한 확신을 공유했다. 기적에 대해 모든 필자들은 우리가 지금껏 경험한 가장 위대하고 가장 놀라운 기적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일이며 다른 논의의 맥락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이 일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는 점에 동의했다. 성령의 능력에 대해서도 우리는 거룩함과 믿음에 있어서의 개인적인 성장은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고 있다는 하나의 분명한 증거이며 이 진리를 결코 소홀히 여겨선 안 된다는 데 동의했다.
4. 기적과 성령의 사역에 대한 구체적인 각론에 있어서의 상당한 의견 일치.
필자들은 여러 세부 사항과 강조점과 기대의 문제에 있어 의견 차이를 보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에 있어 몇 가지 구체적인 세부 사항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a) 치유와 기적: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일으키신다.
(b) 인도하심: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하지만 이 문제에 있어 성령이 우리의 느낌과 감정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c) 능력 주심: 성령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여러 사역을 위한 능력을 주시며 이러한 능력 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거룩해지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하는 성령의 내적 변화의 사역과 구별될 수 있는 활동이다. 이러한 성령의 능력을 주시는 사역은 새로운 교리가 아니다. 이전 세대에서는 이를 때때로 "도유" 또는 "기름 부음" 이라고 불렀다. 성령님은 설교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기도, 전도, 상담, 그 밖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교회에서 하는 다른 활동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다양한 정도로 그런 사역을 위한 능력을 주신다.
(d) 계시: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 안에서 (i) 때때로 그 순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구체적인 성경 말씀을 떠오르게 하실 뿐만 아니라 (ii) 우리에게 갑작스런 통찰력을 주셔서 특정한 상황에 말씀을 적용하게 하심으로써, (iii) 우리의 느낌과 감정에 영향을 주심으로써, 그리고 (iv) 우리에게 우리가 일상적인 수단을 통해서는 얻지 못했던 실제적인 상황에 대한 구체적 정보를 주심으로써 (개핀 박사는 비록 이 마지막 범주는 매우 예외적이어서 이를 기대하거나 추구해선 안 된다고 믿으며 이 네 요소를 묘사하는데 “계시” 이외의 용어를 선호하지만) 구체적인 것들을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게 하실 수 있다. 이 구체적인 요점에 대해서는 네 필자 사이에 최소한의 의견 일치가 있었다.
● 의견 차이의 영역
건설적인 신학적 대화의 한 가지 특징은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결국 각자의 의견 차이가 무엇이며 그런 차이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합의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진정한 의견 차이가 아직도 남아 있는 구체적인 영역을 명확히 함으로써 이 네 편의 논문과 토론에서 유익한 결과를 얻었다.
1. 기대.
필자들은 성령께서 교회 시대에 일상적으로 역사하시는 방식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의 차이로 인해 성령께서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역사하셔서 병을 고치시고 인도하시며 기적을 일으키시고 사역을 위한 특별한 능력을 주시며 어떤 것을 머리에 떠오르게 하실(또는 어떤 것을 우리에게 계시하실) 것을 우리가 얼마나 자주 기대해야하는지에 대한 기대에 있어서도 서로 상당히 달랐다.
2. 권면.
필자들은 오늘날 성령이 어떤 일을 하실 것으로 기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의 차이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날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구하고 이를 위해 가도하도록 얼마나 많이 권면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였다.
3. 이런 것들을 어떻게 지칭해야 하는가?
필자들은 하나님이 때때로 어떤 것을 갑자기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게 하실 수 있다는 점에 동의했지만 스톰스 박사와 오스 박사는 이를 예언의 은사라고 부르기를 선호하는 반면 개핀 박사는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개핀에게 있어 예언의 은사는 하나님이 성경적 특성을 지닌 말씀을 주시는 일에만 국한되며 이는 신약 정경이 완성되었을 때 끝이 난 은사다. 소시 박사에 따르면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어떤 생각을 머릿속에 떠오르게 하실 수 있지만 이는 보통 예언이 아니라 개인적인 인도하심이라고 불러야 한다. 그러나 소시는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영감“ 되고 오류 없는 예언을 주실 수 있는 (희박한) 가능성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정경의 일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정경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필자들은 하나님이 지금도 (신유를 포함한)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다는 데 동의했지만 스톰스와 오스는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그런 은사를 소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개핀은 그런 은사를 사도시대에만 제한하며, 소시는 오늘날에도 그런 은사가 존재할 "가능성은 인정하지만 기적에 대한 주장은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검토하고자 한다(소시는 역사적으로 말해 기적은 교회가 개척되는 상황에서 특별히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방언 및 통역의 은사에 대해서는 개핀과 소시에 따르면 이 두 은사는 하나로 합쳐지면 성경과 같은 특성을 지닌 성령의 계시를 구성한다. 개핀은 이 두 은사가 신약 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열린 정경"의 상황에서만 기능했다고 믿는다. 오늘날 방언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하느냐고 물으면, 개핀은 확신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런 활동은 단지 무의미한 말을 내뱉을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의 능력에 불과할 것이라고 믿는다. 개핀은 또한 이런 활동이 어떤 이들의 기도 생활에는 유익하다는 성경을 근거로 한 주장은 수용하지만 여전히 이를 방언의 은사라고 부르려 하지는 않는다. 소시가 보기에는 성경에서 오늘날 방언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의 많은 방언 현상은 성경적 관행이나 방언의 목적에 들어맞지 않는다.
반면 스톰스와 오스는 방언이 하나님에게서 나온 계시가 아니라 일종의 인간적인 기도와 찬양이라고 믿는다. 방언은 말하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통해 그리스도인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이 시키시는 방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성경과 같은 성질의 말씀은 아니지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오스는 덧붙여 말한다. 스톰스와 오스는 또한 통역의 은사는 단지 방언을 하는 사람이 그런 기도나 찬양의 말 속에서 무엇을 말하는지를 이해하는 능력일 뿐이라고 믿는다.
회심 이후 성령의 능력 부여 사역에 대해 오스는 처음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이를 "성령 세례"라고 부른다. 나머지 필자들은 성령에 의한 능력 부여나 충만이나 기름 부음 같은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이어지는 내용을 보라).
4. 기적의 주된 목적.
필자들 모두 기적에는 여러 목적이 있을 수 있다는 데 동의했지만 개핀과 소시는 1세기에 있었던 복음의 메시지의 첫 확증을 기적을 일차적인 목적으로 보는 반면 스톰스와 오스는 복음의 메시지를 모든 시대에 증언하는 일, 하나님의 백성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일, 오늘날에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과 같은 다른 목적도 똑같이 강조해야 한다고 믿는다.
5. 회심 이후에는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사역이 단 한 번 존재하는가?
오스는 사도행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회심과는 구별되는 성령의 능력 부여 사역(또는 성령 세례)을 단 한 번 경험하는 패턴을 발견하며 방언을 이 사역을 나타내는 표징으로 보는 반면, 다른 필자들은 그런 패턴을 발견하거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회심과도 구별되고 신앙생활 중에 여러 번 일어날 수 있는 능력 부여의 체험과 구별되는 그런 단 한 번의 체험을 추구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6. 우리는 신약 시대의 교회 생활을 어느 정도까지 오늘날 본받도록 노력해야 할 모범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 문제는 아마도 필자들 사이에서 가장 근본적인 의견 차이가 나타난 문제일 것이다. 스톰스와 오스는 우리의 대화 내내 (전도, 도덕적 행동, 교리, 교회 정치, 사역 등과 같은) 신앙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신약 시대의 패턴을 오늘날 우리 삶 속에서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계속 강조했다. 두 사람은 개핀과 소시에게 왜 유독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의 영역에서만 신약을 오늘날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본보기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지 설명할 것을 요구했다.
반면 개핀과 소시는 사도들에게 유일무이성이 있었다는 점, 즉 오늘날에는 더 이상 (초대 교회를 세우고 성경 말씀을 직접 기록하거나 기록된 글을 확립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라는 의미에서의) 사도가 없다는 점에 모두가 동의했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켰다. 사도들의 존재는 "열린 정경"의 상황과 더불어 신약 시대를 오늘날과는 무언가 다른 시대로 만드는 요인인데도 스톰스와 오스는 몇 가지 중요한 면에서 신약 성경은 우리를 위한 본보기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개핀과 소시는 지적했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고 스톰스와 오스도 심지어 신약 시대에서조차 사도들의 생애 속에서 초자연적 능력이 비상하게 집중된 때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왜 그들은 오늘날 구체적으로 이 초자연적 활동이라는 영역, 사도들 자신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된 이 영역에서의 중대한 차이를 인정하기를 주저하는가?
우리는 오늘날 신약 시대에 사도들의 생애에서 발견되는 것과 똑같은 기적의 빈도와 능력을 기대해야 하는가? 스톰스와 오스는 그보다 약간 못한 정도로는 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시는 상당한 정도로 적게 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핀은 소시보다 더 적게 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은 교착 상태에서 끝났다.
7. 교회 생활에서의 결과.
앞에서 말한 이와 같은 여섯 가지의 의견 차이 때문에 구체적인 사역 형태와 교회 생활에 대해 토론할 때 우리는 이런 다양한 견해를 믿고 배우는 교회들은 서로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점을 인식했다. 스톰스와 오스가 옹호하는 견해를 고수하는 교회들은 교인들에게 초자연적인 은사들(치유 에언, 방언 및 통역, 기적, 영분별, 그 밖에 다른 여러 은사들)을 받기 위해 기도하고 그런 은사들을 추구하며 사용하도록 더 많이 가르치고 권면한다. 그러나 개핀이 대변하고 소시도 어느 정도 대변한 견해를 고수하는 교회들은 교인들에게 이런 은사들을 추구하거나 받기 위해 기도하도록 권면하지 않으며, 보통은 교회 생활 속에서 대예배나 그보다 규모가 작은 구역 모임에서 그런 은사들이 나타날 "공간"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각 필자가 한 교회의 목회자라면 발휘했을 리더십의 종류는 초점과 강조점 면에서 서로 다르다. 이 문제는 교회 생활에서 약간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이 분명하다.
● 마지막 두 가지 질문
이 책 말미에서 나는 편집자로서 마지막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논평하고자 한다.
- 이 영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절실한 관심사는 무엇인가
몇 달에 걸쳐 이 책을 편집하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기 시작했다. "이 영역에서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무엇인가?"(#)
| (#) 이 질문과 이에 대한 대답은 존대반 출판사의 편집장인 책 쿠하첵이 우리가 이 책에 대한 계획을 논의할 때 내게 처음 제기했다. 그러나 나는 본서를 위해 이 결론을 쏘기 전까지 이 질문의 근본적인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
우리가 이 네 견해에 의해 대변되는 교회들-하나님의 말씀을 정기적으로 배우고 믿는, 성경을 믿는 교회들에 속한 대다수의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들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성령과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이 모든 토론에서 그들의 가장 절실한 관심사는 무엇인가?
나는 우리의 교회들 가운데서 우리가 보통 논의하는 견해 차이・가 그들의 가장 절실한 관심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목사가 정장을 입는가, 스웨터를 입는가, 가운을 입는가, 아니면 교회가 성공회 전례를 따르는가, 침례교 예배순서를 따르는가, 은사주의적으로 자발적인 방언과 예언을 허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이 교회에서 찬양 인도에 오르간을 사용하는가, 기타를 사용하는가, 또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는가 하는 문제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문제들은, 물론 중요하기는 하지만 가장 큰 관심사는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매주 교회 생활에 참여할 때 개인적으로 더 깊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싶어 한다. 그들은 단지 45분간의 기도 요청과 5분간의 기도로 끝나지 않는 기도 시간, 긴 기도 제목들을 빨리 훑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서두르지 않고 충분히 오래 기도할 수 있는 그래서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아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증언하시는 하나님의 고요하고 작은 음성을 듣는 시간을 원한다. 또한 그들은 찬양할 때 긴 시간 동안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할 수 있고 아무도 그들에게 주위를 둘러보며 인사하라거나 더 큰 소리로 찬양하라거나 광고를 잘 들으라거나 성가대의 찬양에 귀 기울이라거나 회중석에서 등록 카드를 작성하라며 예배를 방해하는 일이 없는 그런 예배 시간을 원한다. 물론 그런 일들도 나름대로 필요하지만 그런 일들은 우리의 초점을 하나님한 분에게서 우리 주위의 사람들로 옮겨지게 하고 하나님 한 분만을 예배하는 시간에 하나님께 가장 깊은 경외심을 표현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시선과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의 임재 외에는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오래 하나님께 주의를 집중할 수 있고, 자신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또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침묵하며), 자유롭게 하나님을 향한 강렬한 사랑을 느끼고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영혼 속에서 감지하며 하나님의 자녀들의 찬양을 기뻐하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 속에 있기를 갈망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에 와서 자신이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음을 영혼 안에서 느낄 때까지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
교회들이 교인들에게 그런 긴 기도와 예배의 시간을 갖게 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갈망은 충족되었고 그런 교회들은 놀랍게 성장했다. 어떤 교파나 영적인 은사에 대한 견해도 그런 예배와 기도의 시간에 대해 독점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 은사 중지론적인 교회와 "신중 수용론"적인 교회는 오순절, 은사주의, 제3의 물결교회와 더불어 각 교회가 나름의 형식으로 영적인 은사에 대한 각자의 교리적 신념을 보호하는 지침 안에서 그런 기도와 예배의 시간을 제공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건전한 성경의 가르침에 대해 우리가 부여하는 중요성을 축소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가르침 속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많은 교회에서는 이 일이 잘 이루어진다. 반면 어떤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섭취하지 못해서 매주 영적인 허기를 느끼며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많은 교회가 그런 가르침과 더불어 충분히 길고 방해받지 않는 기도와 예배의 시간을 더 많이 강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냈음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기를 갈망한다고 생각한다.
- 우리는 함께 섬길 수 있을까
나의 두 번째 논평은 나 자신과 나머지 네 필자들을 선례로 삼아 이런 주제들에 대해 서로 견해가 다른 목회자들 사이에 좋은 관계를 맺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필자들이 지금까지 쓰고 말한 모든 내용을 검토하면서 나는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로 우리 다섯 사람이 한 교회에 모여 그 교회에서 다섯 장로가 되고 우리 사이에 동등하게 강단 사역을 함께 하기로 합의한다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다.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함께 사역할 수 있을까, 아니면 불가피하게 서로 다른 다섯 교회로 분열될까?
다른 필자들은 어떻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겠다. 내 생각에 우리는 장로들로서 교회 생활 속에서의 특정한 체험과 현상을 언급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어떤 "가치중립적인 어휘를 찾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는 서로 강조점이 다르고 형태가 다른 (그리고 아마도 벌어지는 일도 다른!) 다양한 구역 모임을 허용하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는 교회의 전반적인 초점이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확장에 모아지도록 규칙적으로 몇 시간씩 함께 기도하며 진지하게 토론해야 할 것이다. 내 생각에 우리는 특정한 교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견해가 다르지만 각자의 은사와 사역에 큰 고마움을 느낀다는 사실을 회중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다른 네 필자도 나와 같이 생각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진실로 이 일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함께 살고 섬기며 기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각자와 각자의 가족을 목자와 같이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교회의 사역을 위해 함께 자주 깊은 중보 기도의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가운데 누구도 알지 못한 가장 흥분되고 유쾌한 사역의 시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주님도 이 일을 기뻐하시며, 우리와 교제를 누리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편). |
리처드 개핀 외 3인 공저, 『기적의 은사는 오늘날에도 있는가』(부흥과개혁사), pp.454~466.

첫댓글 웨인 그루뎀은 침례교 신자이지만 침례교가 아닌 초교파 신학교에서 교수로 봉직했습니다. 개혁주의에 기운 듯하지만 그렇지 않은 행보도 보이며, 지속론에 기운 복음주의 신학자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
사도나 선지자 급의 특별한 은사는 오늘날 없고, 현 시대에 맞는 정도의 일반적인 은사 정도는 남아 있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 공감합니다 😁
소개에서 밝히신 것처럼 내용이 쉽지 않네요. 틈틈히 읽어 보겠습니다^^
핸드폰 📱 화면으로는 조금 불편해요. 노트북이나 pc로 보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
글이 길지만 일치점과 차이점에 포인트를 두고 읽으니 조금 이해는 됩니다. 저번 게시물 댓글에 달린 고경태 목사님의 지속▪︎중지론 용어 이해도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