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捕虜)와 피로인(被虜人)-[피로인=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일반 국민이 강제로 납치(피랍)되어가는 일].
정유재란때 1597년 8월16일 남원성이 함락당하고 이어서 전주성이 함락당한다.
남원성안에는 7천여명의 군민들과 1만1천여명의 관군, 의병들이 있었고,
명나라군 부총병 양원이 3천명을 이끌고 싸운 전투였다.
군민 7천여명은 보급을 담당하고 식사를 마련하는 군민들이었기 때문에
피로인이 될 수가 없다.
엄연히 왜군에게 잡혀간 1만의 남원성 관민과 의병들은 전쟁 포로였다.
이때 남원 도공들이 모두 끌려가 일본 도자기 문화에 혁신을 이루게 된다.
영상에 나온 심모씨도 남원 도공의 14대 후예였다.
심씨일가는 전쟁 포로이지 피로인이 아니다.
남원성 전투에 돕겠다고 자원하여 성에 남은 군민이었기 때문에 전쟁 포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전주성은 의병의 관군화 정책으로 지킬 병력이 없자, 전주 부윤이 관민들을 이끌고 도피해버린다.
김제 금산사, 금구 금촌 저수지, 완주군 이서 등으로 전주 성민이 달아나 피신한다.
왜군은 금촌 저수지에서 전주성민 3천~5천을 학살하고 코를 베어갔다.
금촌 저수지까지 왜군이 추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넋놓고 있다가 모두 당한다.
남원성을 중심으로 전주성, 천안 직산전투에 이르기까지
포로와 피로인들이 잡혀가게 되는데
남원성에서 잡혀간 사람들은 피로인이 아니라 전쟁 포로였다.
의병의 관군화 정책을 실시한 정권은 동인정권이다.
1593년10월 서인 정철을 강화사신으로 명나라에 보내 강화도에서 병사 처리하였고,
한양환도 사흘후 10월27일 서인정권을 밀어내고 다시 동인 주리학파 정권이 들어선다.
싸울 병력도 없는 동인이 정권을 잡아서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는 것이다.
서인정권 때는 호남 관의병군 10만이 싸울의지를 가지고 살아 움직였다.
류성룡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칠천량 해전 패전이후,
동인 주리학파에서 남인으로 분파하여 본격적으로 대변하게 된다.
서인에서 남서인화된 이순신을 견제하기 위해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학파 원균을 내세웠는데.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자, 이순신이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면서 동인 주리학파에서 분열하여
남인을 대변한다.
[이순신은 서인 주기학파이고 원균의 칠전량 해전 패전 이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고문을 당한 후
백의종군하며 남인지역에서 왜란을 겪으면서 1597년 정유재란 때 자연스럽게 남서인화되는 것임].
전쟁 발발책임[1592.4.13]과 개전초기 패전책임, 몽진책임, 한양 수도함락 책임을 물어
1592년 6월12일 한양함락[6월9일]에 맞춰 평양 몽진지에서 서인정권이 들어선다.
이때부터 호남군이 군세를 발휘하여 1592년 7월7일 이치, 웅치, 슬치 전투를 치루며
금산전투, 상주전투, 성주군 성주성 전투, 진안산성 전투, 성주봉 성주성 전투, 죽산성 전투,
동향 성산 전투, 창녕 성산 전투, 거창 지레 사랑암 전투, 영덕전투, 울산 전투, 함안 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며, 진주성 제 1, 2차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쳐 간다.
남해안에서는 서인 호남 중심의 주기학파 이순신이 수군 전투마다 승전한다.
1593년 10월 정철에게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라고 사주하여 광해군을 싫어했던 선조에 의해
서인정권을 실각당하고 명나라 강화사절로 보내 강화도에서 병사처리하여 죽이고
한양환도[1593년 10월24일]사흘 후 10월27일 동인정권이 들어선다.
이때부터 강화시기로 접어든다.
강화시기에 1596년 김덕령이 왜군을 토벌하자 한현, 이몽학의 난으로 엮어 죽인다.
이순신 역시 파직되고 백의종군하며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 패하고
사태수습이 불가능해지자 이순신을 다시 내세운다.
동인 주리학파 정권 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전쟁후 동인정권은 포로와 피로인 소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잘못된 자들이 정권을 잡았는데 제대로 굴러갈 수가 있었겠는가?
동인이 권력을 잡았으면 동인병력을 내세워 전쟁을 지휘하고 전투를 수행해야 하는데
평양이북에서 몸만사리기에 급급하였고 강화만을 주장하며
정권만 잡고 호남 의병군과 남인 호남 수군만을 움직이려 하였으니
제대로 전투 수행이 되었겠는가 이말이다.
간양록을 지은 강항(영광)이 정유재란때 남원성 전투를 지원하다 중과부적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이순신의 수군진영으로 합류하려다가 일본군의 포로로 잡혀가 성리학을 전수하고 돌아와 포로와 피로인을 귀환시키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았던 것은 서인정권이 아니라 동인정권이었기 때문이었다.
선조때 동인 성리학 원리주의 주리학파 정권과 광해군 때 대북 성리학 이단파 도교정권이
장악한 상황에서 무엇을 더 기대하리오...
간양록은 조용필이
남원성 전투에서 죽은 관의병과 군민, 도공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지은 노래이다.
그뜻과 의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남원성 전투에 참여한 군민들은 피로인이 아니라 전쟁포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전쟁 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자국으로 돌려 보내주어야만 하는데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일본 교토(경도)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에도막부와 덕천가강(도쿠가와 이에야스/동경)의 에에도 막부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후 전쟁 포로 귀환에 그 어떤 노력도 제대로 하지않은 양광도 동인 주리학파와
광해군의 조식학파 도교정권에 그 책임을 질책하기 위해 비판을 가하는 것이다.
양대 왜란후 양광도 동인 주리철학 원리주의 국가에 이어 조식학파 정권에 의해 도교국가로 한단계 더 추락하여
성리학이 노장철학,제자백가(백이숙제)철학시대로 돌아가 정신철학이 상고대기로 회귀해 버리는 것이고,
이로인해 조선후기는 대북 조식학파의 도교정권에 이어 양광도 서인 주자학 원리주의 주자학파(노론학파)와
남인 윤휴/허목학파(양광도 동인 주리철학 원리주의+노장철학,제자백가철학 융합학파)와의 권력투쟁을 거치며
법학(한비자의 법가사상-신분질서 양반, 중인, 상민, 노비 구체화),예학(강상의 법도), 주자가례 등이 구체화되어
더욱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일제시대가 오기 전까지 정신철학이 더욱 퇴보하며 고착화되어 간다.
서인 정권시기 1593년 6월21~29일에 벌어진 진주 제2차 전투를 실례로 들면
진주성 총사령관 김천일 창의사. 진주성 우도절제사.
최경회 경상도 병마절도사 진주성 좌도절제사.
황진 충청도 병마절도사 진주성 도순성장 유격대장
장윤 순천 승주부사 진주성 임시목사.
임희진 의병장
고종후 복수대장(기병 선봉대장 고경명아들)........
모두 호남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경회의 경상도 병마절도사 병력은 이치에서 살아나온 고경명 창의사 휘하의 호남 관의병인
문홍헌, 최홍재등 (참모 문홍헌 선봉부장(전부장 )송대창,후방부장 허일,좌부장 고득뢰,우부장 권극평)등의
병력이 주축이었고, 황진 충청도 병마절도사 병력은 전주성에서 모집한 웅치 승전 병력이었다.
감투만 충청, 경상도 병마절도사 감투를 쓰고 싸웠던 것이다.
(참모 이외에 선봉부장 이상 부장급은 종5품, 종4품, 종3품까지 과거급제한 현직 무관 출신들임)
p/s
순자의 성악설(性悪説 /성오설).
인간이 태어날때 이성도 함께 태어나는데 본성이 악하게 태어난다는 것이 성악설이다.
인간의 이성이 처음부터 악하게 태어난다기 보다는 그릇되게 태어나기 때문에
그릇된 이성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예"와 "법"을 통해 바로잡아 보자는 학설이다.
한비자가 순자의 제자로 "법"사상의 영향을 받아 법가사상을 창시하였다.
그런데 애초에 성오설(성악설)을 기반으로 이성이 그릇되게 태어난 자들이 배움을 얻어
"예학"과"법학"만으로 그릇된 이성을 가진 제자들을 가르친다고 바로잡아지겠느냐 이말이다.
성선설을 기반으로 이성이 선하고 반듯하게 태어난 자들이
성악설을 기반으로 그릇되게 태어난 자들을 가르쳐 잘못된 이성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