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하나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틈새 없는 믿음” すきのない信仰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바울은 “모든 사람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바울은 얼마나
좋은 상황에 있길래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냐 하면, 어떻습니까.
지금 현재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결박된 상태로 끌려 나와서는 죄인 된 신분으로 심문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그가
말하기를, 자신이 이처럼 결박된 것만 뺀다면 모든 사람이 나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의 인생이 어땠습니까. 젊은 나이에 고급 관리로 등용된 그는 자신의 업무에 충실히 임했습니다. 시키는 일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서 하는 열성을 보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그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는 그에게 있어서 당연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
“3.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私は、キリキアのタルソで生まれたユダヤ人ですが、この町で育てられ、ガマリエルのもとで先祖の律法
について厳しく教育を受け、今日の皆さんと同じように、神に対して熱心な者でした。
빌립보서 3장 5절~6절
“5.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私は生まれて八日目に割礼を受け、イスラエル民族、ベニヤミン部族の出身、ヘブル人の中のヘブル人、律法についてはパリサイ人、
その熱心については教会を迫害したほどであり、律法による義については非難されるところがない者でした。
그는 철저한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으로 본다면 좋은 학교에서 율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22장 27절에 의하면 그는 로마 시민으로 태어났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로마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으며, 또한 노예제도까지
있는 상황에서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지배계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었겠지요.
다시 말해서 그는 본인의 뛰어난 능력 뿐만 아니라 환경 면에 있어서도 많은 혜택을 받을 만한 위치, 말하자면 기득권 계층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좋은 집안 좋은 환경에 있었고 유대교에 대한 교육도 철저하게 받아왔던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직
예수님의 복음을 알지 못했던 그가 보기에는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탄압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4절에 의하면 그는 이와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そしてこの道を迫害し、男でも女でも縛って牢に入れ、死にまでも至らせました。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결박하고 옥에 넘겼을 뿐만 아니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권력을 탐하거나 돈을
바라거나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것이 옳은 일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인 줄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을 탄압하던 그가 이제 예수님을 전파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파하게 되는 삶으로 완전히 뒤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까 어떤 일들이 벌어지냐 하면, 이제 양쪽으로부터 쫓기게 됩니다. 그렇겠지요. 기득권층에게 있어서는 이제 바울은
배신자입니다. 배신자를 잡아야 한다고 바울을 추격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가족이나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바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기 때문에 복수를 해야 한다고 그를 잡으려고 합니다.
그가 받은 고통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 중반부~27절
23.......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労苦したことはずっと多く、牢に入れられたこともずっと多く、むち打たれたことははるかに多く、死に直面したこともたびたびありました。
ユダヤ人から四十に一つ足りないむちを受けたことが五度、
ローマ人にむちで打たれたことが三度、石で打たれたことが一度、難船したことが三度、一昼夜、海上を漂ったこともあります。
何度も旅をし、川の難、盗賊の難、同胞から受ける難、異邦人から受ける難、町での難、荒野での難、海上の難、偽兄弟による難にあい、
労し苦しみ、たびたび眠らずに過ごし、飢え渇き、しばしば食べ物もなく、寒さの中に裸でいたこともありました。
이처럼 유대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로마인들에게 체포되어 결박 당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인간적으로 본다면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자기 편이 없다는 것은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같아지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는 진정한 자유를 알았기 때문, 진정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あなたがたは真理を知り、真理はあなたがたを自由にします。」
우리는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진리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イエスは彼に言われた。「わたしが道であり、真理であり、いのちなのです。わたしを通してでなければ、だれも父のみもとに行くことはできません。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진리인 것입니다. 그 누가 2중 3중으로 결박을 한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알게 되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또 바울은 말합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私を強くしてくださる方によって、私はどんなことでもできるのです。
즉, 참된 진리 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라고 하는 사실을 그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 의로운 것, 자랑할만한 것은 하나도 없고 죄로 시작하여
죄로 끝날 수 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자존심도 버리시고, 하늘의 영광도 버리시고 목숨까지도 버리신 예수님의 진정한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입에 달면 먹고 입에 쓰면 뱉어버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할렐루야 하고 찬양을 하다가도,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거나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그랬던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애굽을 탈출했던 광야 1세대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찬양을 몰랐나요? 감사를 몰랐나요?
아니에요. 알았습니다. 출애굽기 15장 1절~2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고 그들을 무사히 건너게 해주신 놀라운 역사를 보고
찬양도 하고 감사도 했습니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그랬어요.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마실 물이 떨어지자 그
감사와 찬양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오로지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돈이었나요? 제물이었나요? 아닙니다. 오로지 순종이었습니다. 나는 너희를
이처럼 놀라운 역사로 애굽에서 인도해낸 하나님이다. 그러니 순종하라. 그러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해주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어려운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만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에덴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래요? 나를 위해서 밤낮없이
열심히 일을 하래요?
여러분, 에덴이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는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만을 골라서 한 곳에 모아 놓은 곳입니다.
무엇을 위해서요? 예,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 놓으신 곳이 바로
에덴입니다. 에덴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함께 하는 공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16절~17절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神である主は人に命じられた。「あなたは園のどの木からでも思いのまま食べてよい。
しかし、善悪の知識の木からは、食べてはならない。その木から食べるとき、あなたは必ず死ぬ。」
다른 것은 다 해도 좋아. 어디를 가든, 무엇을 먹든, 내가 다 지켜줄게. 단,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그것만 따먹지 말아.
이것 하나만 지키면 돼. 이것 하나만 지키면 너희들이 나한테 온전히 순종한 것으로 쳐줄게. 나를 온전히 사랑한다고 쳐줄게. 딱 이거
하나만 지키면 돼. 그리고 그 보상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영원히 너희한테 다 줄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요즘 뭐 가성비…라고 하지요? 아주 작은 것만 지키면 이 세상
모든 것을 영원히 주시겠다고 하는데, 이런 가성비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귀가 하와를 유혹합니다. 그 때의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창세기 3장 1절 후반부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さて蛇は、神である主が造られた野の生き物のうちで、ほかのどれよりも賢かった。蛇は女に言った。「園の木のどれからも食べてはならないと、神は本当に言われたのですか。」
이에 대한 하와의 대답이 흥미롭습니다.
창세기 3장 2절~3절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女は蛇に言った。「私たちは園の木の実を食べてもよいのです。
しかし、園の中央にある木の実については、『あなたがたは、それを食べてはならない。それに触れてもいけない。あなたがたが死ぬといけないからだ』と神は仰せられました。」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셨던 말씀, 그리고 하와가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 이 두 말씀을 비교해보면 빠진 단어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반드시”입니다.
“반드시”는 예외가 없다는 뜻입니다. 예외 없이, 틀림없이……라는 뜻이 “반드시”입니다. 그런데 하와의 말에서는 이 “반드시”라는
단어가 빠져있었습니다.
여러분, 물이 어떤 곳에서 샙니까. 그렇죠. 작은 틈새에서 새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몇 방울입니다. 어쩌면 그 정도라면 처음에는
물이 새거나 안 새거나 별로 차이가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그렇게 새기 시작하면 그 틈새는 점점 더 벌어져서
나중에는 물 전체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노릇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100%라고 한다면 이는 100%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1%가 빠지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는 마치
하와가 “반드시”라는 말을 빼먹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라고 하는 1%가 빠지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마귀는
그 틈새를 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작은 틈새로 인하여 하와만이 아니라 아담까지도 타락하게 되고, 그 아름다운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고 만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에베소서 4장 27절
“27.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悪魔に機会を与えないようにしなさい。
(新共同訳:すき)
우리는 이 틈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들이 조금은 불평 불만을 하면서도 그나마 순종하면서 모세를 따라 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
점령을 앞둔 상황에서 12명의 정탐꾼들 중 10명이 말합니다.
민수기 13장 31절~33절
31.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しかし、彼と一緒に上って行った者たちは言った。「あの民のところには攻め上れない。あの民は私たちより強い。」
彼らは偵察して来
た地について、イスラエルの子らに悪く言いふらして言った。「私たちが行き巡って偵察した地は、そこに住む者を食い尽くす地で、そこで見た民はみな、背の高い者たちだ。
私たちは、そこでネフィリムを、ネフィリムの末裔アナク人を見た。私たちの目には自分たちがバッタのように見えたし、彼らの目にもそう見えただろう。」
여러분, 모세가 가나안 땅으로 보냈던 정탐꾼이 총 12명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10명이 이처럼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나머지 2명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공격하자고 하지요.
자, 여기서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12명의 정탐꾼 중에서 10명이 부정적, 그리고 2명이 긍정적이라고 하면, 10명이 다수
의견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착각입니다.
여러분, 이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 때까지 하나님의 역사를 안 본 게 아닙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만이
아니라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메마른 광야에서 물을 주시고 만나를 주셨습니다. 그들이 믿기에는 너무도 충분한 기적들이 넘쳐났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몇 명입니까. 성인 남성만이 60만명, 전체 수는 200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200만 명
중에서 10명이면 몇 프로입니까. 그렇습니다. 200만분의 10. 퍼센트로는 0.0005프로입니다. 그야말로 바늘구멍 정도도 안 되는
틈새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나머지 99.9995프로인 1,999,990명이 0.0005프로인 10명한테, 무슨 소리야. 놀라운
역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탈출시켜주셨고 홍해도 갈라 주셨고, 물도 주시고 만나도 주시면서 이 곳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약속해 주셨잖아! 우리는 할 수 있어! 라고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그 많은 무리들이 이 바늘구멍 정도도 안 되는 0.0005프로의 틈새로 인하여 어떻게 됩니까.
민수기 14장 1절~5절
1.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すると、全会衆は大声をあげて叫び、民はその夜、泣き明かした。
イスラエルの子らはみな、モーセとアロンに不平を言った。全会衆
は彼らに言った。「われわれはエジプトの地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あるいは、この荒野で死んでいたらよかったのだ。
なぜ主は、われわれをこの地に導いて来
て、剣に倒れるようにされるのか。妻や子どもは、かすめ奪われてしまう。エジプトに帰るほうが、われわれにとって良くはないか。」
そして互いに言った。「さあ、われわれは、かしらを一人立ててエジプトに帰ろう。」
そこで、モーセとアロンは、イスラエルの会衆の集会全体の前でひれ伏した。
참 가지가지 합니다. 단 10명의 틈새로 인하여, 0.0005프로의 틈새로 인하여 200만 명의 믿음이 순식간에 무너진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무려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그 틈새를 주어버린 당시
성인들은 모두 죽게 되어 영원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어땠습니까. 아무리 고난을 당하더라도 아무리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는 조금이라도 믿음의 틈새를 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의 믿음은 강해집니다. 그래서 당시 바울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결박을 당하고 심문을 받고 있는, 참으로
인간적으로 보면 부끄럽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할 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5장 36절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イエスはその話をそばで聞き、会堂司に言われた。「恐れないで、ただ信じていなさい。」
여러분, 아무리 믿음이 좋은 분이라 하더라도 시련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서신을 바울이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만, 그 중에서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서신이라고 해서, 또 다른 말로 이를 바울의 유언이라고도 합니다.
그 디모데후서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あとは、義の栄冠が私のために用意されているだけです。その日には、正しいさばき主である主が、それを私に授けてくださいます。私だけでなく、主の現れを慕い求めている人には、だれにでも授けてくださるのです。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처럼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 바울의 참 뜻은, 자기처럼 결박 당하기를 바란다는 것도 아니요, 자기처럼
매를 맞거나 쫓겨 다니거나 하기를 바란다는 것도 아닌, 모든 사람들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 틈을 주지 않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의
면류관을 받기를 원한다는 뜻이라는 것을 믿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어떤 어려움이 닥쳐 온다 할지라도, 아주 작은 틈새도 주지 않은 강한 믿음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틈새를 노리는 마귀
사탄과 싸워 이기고, 마침내 의로운 재판장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모두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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