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최고 악질 매국노 송병준(宋秉畯)
1. 개요 조선과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헷갈리는 것 중 하나인데 송병준은 을사오적 명단에 포함되지 않는다. 대신 정미칠적 명단에 송병준의 이름이 있다.
2. 생애 ⑴ 본관은 은진(恩津)이며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출생했다. 법을 가르치는 관리인 율학훈도 송문수와 기생 홍씨 사이의 얼자(孼子 : 양반과 천민 여성 사이에서 낳은 아들)다. 송병준은 한양에 왔다가 민씨 척족의 거물 민태호의 눈에 띄어 민태호의 애첩인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고 1871년 무과에 합격하여 수문장청에 배속되었다. 1873년에는 도총문 도사, 사헌부 감찰 등을 지내다가 1884년 갑신정변 후 밀명을 받고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지만 도리어 설득되어 김옥균의 동지가 되었다. 귀국하여 그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태호의 양아들인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하였고 영월군수, 흥해군수, 은진군수, 양지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체포령이 내려져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김옥균이 암살당하자 조선에 반감을 품고 노다 헤이치로(野田平治郞)로 창씨개명하고 조선인임을 포기했다.
⑵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郞)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 후 야마구치현의 하기(萩)에서 양잠업에 종사하다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하였다. 이 때부터 친일파로 돌아서기 시작했는데 귀국 즉시 윤시병(尹始炳)과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다시 이용구(李容九)와 함께 일진회를 만들어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기 위한 전초 작업을 시작하였다.
⑶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후에는 황제 양위 운동을 벌여 친일 활동에 앞장섰고 순종 즉위 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과 내부대신을 역임해 국권 피탈을 위한 상주문과 청원서를 제출하는 매국 행위를 했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 피탈을 위한 매국 외교를 하여 나라를 팔아먹었다.
⑷ 1910년 국권 피탈 후 일본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수여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으며 자작에 이어서 1920년 다시 백작에 올랐다가 1925년 2월 1일 죽었다. 사망 전날인 1월 31일 다이쇼 덴노의 특별 교지에 따라 정3위로 승서되었고 사망 후에는 욱일동화대수장이 추서되었다. 다이쇼 덴노는 포도주 12병을 내려 조의를 표했고 조선총독인 사이토 마코토는 "세인이 공지하는 동양 평화의 공헌자"라고 조문했다. 송병준의 작위는 장남 송종헌이 이어받았다.
3. 고종 협박하고 훈장 받은 송병준 ⑴ 송병준(1858~1924)은 어떤 계기로 친일파가 됐을까? 송병준은 1871년 무과에 급제해 벼슬에 올랐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의 민씨정권은 청나라와 가까웠다.
⑵ 1904년 러일전쟁 때 그는 일본군 병참감 오타니 기쿠조 육군소장의 군사통역을 맡으며 친일파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독립협회 출신 윤시병과 같은해 8월18일 유신회를 조직하고 이틀 뒤 일진회로 이름을 바꿨다. 일진회는 이용구의 진보회와 통합하고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제병합당할 때까지 일제를 돕는데 헌신했다.
⑶ 1904년 12월 송병준은 일본군 마쓰이시 대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을사늑약을 모의했다. 한국인이 나서 나라를 빼앗아 달라고 애걸한 것이다. 1907년 친일신문 ‘국민신보’의 2대 사장을 맡았고, 이완용 내각에서 농공상부대신을 역임했다. 일제가 고종을 물러나라고 하자 송병준·이완용 등은 이에 앞장섰다.
⑷ 정교 ‘대한계년사’의 한 대목이다. “고종이 물러나지 않자 이완용, 이병무, 송병준은 모두 다그치며 물러날 것을 요청했다. (1907년) 7월21일 이완용과 송병준은 공손하지 않은 말씨로 수없이 황제의 낯빛을 어둡게 했고, 이병무는 칼을 빼들고 황제를 위협했다. 황제는 마지못해 할 수 없이 그 일을(양위) 허락했다.”
⑸ 송병준은 고종 퇴위와 정미7조약 체결에 앞장선 공로로 같은해 10월 일본 정부에 훈1등 욱일장을 받았다. 1911년 자작 작위, 1920년 한 등급 위인 백작으로 승작됐다. 백작 작위는 장남 송종헌이 물려받았고, 송종헌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송종헌의 아들 송재구는 일본 메이지대학을 나온 뒤 홋카이도 땅을 불하받았다.
3. 여담 ⑴ 순종과 함께 기차를 타고 지방 순시를 하던 도중 술을 먹고 궁녀가 탄 기차 칸에 침입하여 그들을 성희롱하다가 당시 시종 무관이었던 어담과 드잡이를 벌인 적이 있다고 한다. 송병준이 취하여 칼까지 빼들었다가 그에 맞서 어담[8]도 칼을 빼들었지만 주위 사람들이 말려서 겨우 끝나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이 대신 사과했지만 이 사건이 기사화되어 전국에서 '황제가 타고 있는 기차에서 어찌 감히 난동을 부리는가'의 상소가 빗발쳤다고 한다. 결국 둘은 사이좋게 해고되었다.
⑵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⑶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자신의 작위를 습작받은 아들 송종헌과 함께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⑷ 2007년 5월 2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친일파 송병준과 송종헌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는 2007년 11월 22일 제3차 재산 환수 대상자를 선정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송병준이 매국의 대가로 얻은 급부, 부정축재로 얻은 재산을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가 소유로 재산을 환수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제3자에게 처분한 송병준의 재산에 대해서도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⑸ 원래 송병준 묘가 있는 땅은 송병준의 증손자 송돈호의 땅인데 그걸 다른 사람에게 판 뒤 떠나버린 것으로 송병준의 묘를 이장하라는 분묘 개장 공고를 봤을 텐데 왜 조상의 묘가 파헤쳐지고 시신이 화장당하게 방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후손에게도 버림받은 셈이니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⑹ 송병준의 증손자인 송돈호는 재산 국가 귀속 결정에 반발하여 2008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 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2011년 5월 패소했다. 송병준의 증손자인 송돈호는 송병준의 매국 행위에 대해 반성하거나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증조부는 애국자!"라는 등 궤변을 늘어놓았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송병준의 재산과 땅을 되찾겠다며 여러 차례 소송을 걸고 있다. 송병준의 증손자인 송돈호가 송병준의 일본 땅도 되찾겠답시고 변호사 등을 통해서 알아보고 있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는데 여기에 대해 송돈호가 해명하기를 "땅 소재지를 찾아주겠다는 브로커에게 이미 사기를 당했었다"며 언론 보도 내용을 부인했다.
⑺ 이완용보다도 더한 인간 말종이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이완용과는 달리 무덤은 파이지 않고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추계1리에 잘 누워있다가 무연고자 묘로 분류되어 땅 주인에 의해 임의로 화장되었다. 이후 죽고 나서 선산에 묻혔는데, 후손이 선산을 매각할 때 묘를 이전하지 않아서 선산의 소재지인 경기도 용인시에서 무연고 분묘로 간주하고 행정처분해버렸다.
⑻ 2003년에 일제 때 미쓰비시제강 공장이 있었던 인천광역시 부평의 미군기지 'Camp Market'이 철수한 후 부평 공원이 들어서자 송병준의 후손들이 그 땅을 돌려달라고 소송했는데 문제는 이 땅이 원래 민영환이 경영했던 '목양사'의 토지라서 민영환의 후손과도 충돌하기 시작했다. 결국 2005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의해 패소 선고를 받았고 2011년 5월 13일 대법원에서도 패소했다. 전술한대로 원래 민영환 땅이라서 양측이 다퉜으나 2005년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양쪽의 의견 모두를 기각했다. 구체적으로 민영환의 후손들은 '독립 당사자 참가인' 자격으로 소송에 참여해 소유권을 주장하였으나 법원은 이를 이유 없다고 본 것이다. 어쨌든 결론은 국가 땅.
⑼ 송병준이 민영환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석방된 덕이 있어서 <대한매일신보>에서 을사조약 때 이런 논평을 내면서 송병준을 욕했다. "병준아, 네가 민충정(閔忠正) 문하에 들어가 여러 해를 지내어 충정공이 턱 끝으로 가리키면 네가 그대로 하며 손끝으로 부르면 네가 ‘예 예’하던 놈이 아닌가."
⑽ 삼일운동을 조직하고 계획 했던 민족대표들이 송병준을 섭외 시도를 하기도 했다. 물론 삼일운동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측에서, 미리 이러한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일제에 밀고 하지는 않은 듯 하다. 참고로 손병희는 이완용도 섭외 시도를 했다. 알고 보면 이완용보다 더 악질인 인물이다. 최소한의 눈치는 보고 행동한 이완용과는 달리 단순 무식이라 여기 저기 다니면서 양아치짓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친일문제는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사다. 꺼진 불씨가 되살아나듯, 무덤 속의 시체가 관 뚜껑을 열고 무덤에서 걸어 나온 듯,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불거져 세상을 뒤흔들어놓는다. 친일 문제는 여전히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물이요, 살아서 파닥거리는 갓 잡아 올린 생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