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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념(死隨念, 빠알리어 maranā-sati ― 죽음 관찰)>
죽음을 주제로 한 수행법에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즉 사수념(死隨念)이 있다.
초기경전 한역 <증일아함경>, 남방 빠알리어 경전 <앙구따라 니까야>에 나온다.
죽음에 대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명상법이라 할 수 있다. 즉, 죽음에 대한 관찰 ― 숙고(熟考)를 말한다.
<대념처경(D22)>은 죽음(死)을 ‘오온의 부서짐, 생명기능이 끊어진 상태’라고 정의한다.
죽음 명상은 바로 그런 죽음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는 명상법이다.
죽음명상은 빠알리어로 ‘마라나사띠(maranas-sati)’라고 한다.
‘마라나(marana)’는 ‘죽음(死)’이고
사띠(sati)는 ‘마음챙김(念)’이다.
그래서 사념(死念) 혹은 사수념(死隨念)이라고 한다.
죽음이란 한 생의 한정된 생명기능(命根, jīvitindriya)이 끝나는 것이다.
즉, 죽음이란 인습적으로 사람, 동물, 개인, 자아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생명체의 정신과 물질 현상이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정신과 물질의 결합인 몸이란 세포분열로 매순간
계속 분해되고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사람에게 죽음이란 매 순간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수행방법의 하나로 사수념을 활용한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나는 죽지 않는다.」라는 전제로 자신의 인생설계를 한다.
이와 같이 완전하게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세운 계획은 실패로 결말이 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행복해지고 싶다」라고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고,
번뇌, 괴로움이라는 결과로 끝난다. 그러면서도 체념하지 않는다. 또 다음의 계획을 세운다.
그것이 괴로움(苦)의 악순환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나는 죽지 않는다.」라는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세운 계획이 때문이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자기 죽음을 예견한다. 그럴 때 그에 한발 더 나아가 눈을 감고 자신이 어떤 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상상해보는 것이다. 숨이 점점 멈춰간다든가, 의식이 점점 사라져간다든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면, 오감이 점점 맑아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것이 사수념이다.
즉, 자신의 죽음을 상기하면서 마음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수행법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무상(無常)ㆍ고(苦)를 관하는 것이 수행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사수념(死隨念)이란 죽음의 위험이 언제나 우리를 넘보고 있음을 상기하거나,
그 죽음의 공포에 자신이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숙고하며, 혹은 남들의 죽음에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되돌아보는 등의 공부이다.
그리고 그렇게 죽음에 대해서 숙고를 하면
죽음을 맞아서도 당황하지 않고 공포에 떨지 않게 된다.
사수념에서는 자신의 죽음을 염(念-사띠/sati)하며 확인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는 불가하다. 자신에게는 죽음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실행방법으로서 타인의 죽음을 보고,「자신도 반드시 동일한 운명이 된다.」라고 염(念)해 본다.
장례식을 올린다고 하자. 안치돼 있는 시체를 보고 합장하며 명복을 빈다. 이것은 일반인의 상식적
(그러나 지극히 무지한) 습관이다. 남이 명복을 빌었다고 해서 고인이 성불(成佛)할 리 없다.
그렇게 될 수만 있다면 타인에게 부탁해서 명복을 빌게 하면 만사는 매우 간단히 끝난다.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강할수록 고인에 대해「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기를…」하고 기원하며
자신을 속인다. 사후에 영원한 천국이 있다고 순진하게 믿고 있다면 자신의 죽음을 잊으려고 할 이유도,
싫어할 이유도 없다. 자기 자신은 가능한 한 오래오래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어 한다. 자신은 가능한 한
뒷전으로 미루고 싶은 영원의 천국을 고인에게는 가도록 기도한다.
사수념(死隨念)을 명상하는 사람은 그와는 다르다.
시체를 보고「이 사람은 죽어서 시체가 돼 있다. 나도 분명히 이와 같이 된다.
나에게도 죽음이 찾아온다.」라고 염한다. 합장을 하고 마음속으로 하면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는다.
이와 같이 타인의 죽음을 관(觀)하고 그것을 자신의 죽음으로 바꾸어보는 것이 사수념이다.
사수념 명상의 경우에는 실천방법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감정적으로 관찰하면 역효과가 나서 마음이 망가져버린다.
이성을 바탕으로 해서 사수념을 실천해야 한다.
「태어난 생명은 반드시 죽는다. 이것이 보편적인 현실이다. 누구도 멈출 수는 없다.」라는
이해를 기반으로 실천해야 한다.
「사람이 죽었다. 슬프다. 나도 죽는다. 불안해서 견디기 어렵다.」라는 마음이라면
사수념을 완전히 착각하고 있다. 그것은 사수념이 아니고 ‘무지수념(無知隨念)’이다.
사수념에 의해서 사람은 밝은 성격이 된다.
집착이 옅은 사람이 된다.
번뇌하지 않는,
괴로워하지 않는,
성내지 않는,
질투하지 않는,
집착하지 않는,
마음 편하게 살아가는 인간이 된다.
이것은 명상이지 선정(禪定)에 이른 것은 아니다.
위빠사나 명상으로 필요한 지혜(知慧)를 개발하는 예행연습이라 하겠다.
선정 삼매는 정신 집중으로 무아의 경지에 들어간다.
때문에 현실을 관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빠사나는 깨어있는 상태에서 관하는 것이므로 사수념(死隨念)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해탈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라도
사수념을 실천하면 이성(理性)이 있는 인간이 된다. 인격이 향상된다고 한다.
이처럼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을 닦는 비구는 항상 게으르지 않고, 목숨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
무상(無常)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며 따라서 괴로움에 대한 생각과 무아(無我)에 대한 생각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죽을 때 두려움도 몽매함도 없이 죽는다.
만약 이 생에서 불사(不死)를 얻지 못했다면 죽은 후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한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경(A8:73)>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죽음명상을 많이 닦고 많이 수행하면 큰 결실과 이익이 있고,
불사(不死, 열반)에 들어가고 불사를 완성한다. 그러니 죽음명상을 많이 닦아야 한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어떻게 죽음명상을 닦는지 말해보라고 질문하신다.
그러자 제자들은 붓다께 다음과 같이 보고한다.
“참으로 저는 ‘하루 밤낮밖에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세존의 가르침대로 열심히 수행하리라’ 이런 마음으로 죽음명상을 닦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저는 ‘하루 낮밖에…
저는 한나절 밖에…
저는 밥 한 번 먹는 시간 밖에…
저는 밥을 반쯤 먹는 시간밖에…
저는 네다섯 입의 음식을 씹어 삼키는 시간밖에…
저는 한입의 음식을 씹어 삼키는 시간밖에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세존의 가르침대로 잘 수행하리라’며 죽음명상을 닦는다”고 각각 보고했다.
그러자 붓다는 죽음이 올 시간을 그렇게 길게 잡고서 수행하는 것은 죽음명상을 둔하게 닦는 것이라고 했다.
반면에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는 시간밖에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닦는 것이 번뇌를 멸진하기
위해 죽음명상을 예리하게 잘 닦는 것이라고 격려했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80살까지는 살겠지. 앞으로 최소한 20년은, 혹은 40년은 더 살 거야.’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죽음이 언제 올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평소에 죽음에 마음챙기는
수행을 하거나 죽음을 숙고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 삶을 좀 더 생생하게 잘 살기 위해서,
죽음과 직면하는 순간에 황망하게 허둥대지 않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또 다른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경(A8:74)>은
죽음을 가져올 많은 조건이 있음을 숙고하라고 한다.
뱀이나 전갈, 지네가 물어서 죽을 수도 있고 장애가 될 수도 있다.
길을 가다가 넘어질지도 모르고, 음식 때문에 탈이 날 수도 있다.
몸에서 담즙이나 가래, 풍기가 많아 장애가 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
또는 사람들이 공격할 수도 있고,
비인간들이 공격해서 그것으로 인해 죽을지도 모르고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처럼 강한 의욕과 분발,
강한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으로 수행하라.
그렇게 수행해 번뇌가 없음을 알게 되면 희열과 환희로 머물 것’이라고 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죽음을 가져올 조건들은 아주 많다. 자동차 사고나 열차,
비행기 사고가 날 수도 있고, 코로나나 여러 질병으로 죽을 수도 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의 비극도 그 어느 누가 예상을 했겠는가.
죽음은 우리에게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죽음을 자꾸 뒤로 밀쳐버리지 말고
친숙해질 필요가 있다. 잘 살기 위함이다. ― 일중 스님
그리고 일중 스님이 게송을 제시한다.
"삶은 휩쓸려가고 생명은 덧없고
늙음에 휩쓸린 자에게 보호란 없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직시하면서
행복을 가져올 공덕을 지으시라.
이 생에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자제하고
살면서 공덕을 지은 것
그것이 죽을 때
그에게 행복을 가져오리.”
집이 불 탈 때
가져나온 소유물과 타지 않은 것
그것은 집주인에게 크게 쓸모가 있듯이
그와 같이 세상이 늙음과 죽음에 불 탈 때
보시로써 자신을 지켜라.
이생에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자제하고 살면서 공덕을 지은 것
그것이 죽을 때
그에게 행복을 가져오리. ― 두 바라문 경(A3:51-52) 중에서
마하시 사야도(Mahāsi Sayadaw, 1904~1982)는
미얀마의 근대 불교 역사에서 불교 명상 분야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명상 스승이다. 그는 말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과정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수념(死隨念)에 대한 숙고를 통해
본격적인 수행에 앞서 심신의 안정을 꾀한다.
정신적 해이와 육체적 졸음에 대한 극복방법은 사수념(死隨念)이라 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거나 무상⋅고를 관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즉, 우리는 모두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른다. 지금 당장 죽음이 와도 후회하지 않겠는지를 물어보라.
그리고 모든 것은 무상함을 관하라. 정신이 번뜩 들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분발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여덟 가지 각성제를 상기함으로써 분심을 일으켜야 한다.
여덟이란 생, 노, 병, 사, 삼악도의 고통, 윤회에 기인한 과거세의 괴로움,
윤회로 기인한 미래세의 괴로움 그리고 자양을 구하는 데 기인하는 현생의 괴로움이다.
“지금은 젊지만 나는 곧 늙음이 찾아 올 것이다. 늙음에 짓눌린 자 정진하기 어렵다.
또, 지금은 병도 없고 아프지도 않다. 소화도 잘되고 몸은 균형 잡혀 있다.
그러나 이 몸이 병마에 사로잡힐 때가 오리라.
병든 자 수행하기 어렵다. 지금은 양식이 풍부하다.
그러나 곤란해 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는 수행에만 힘 쏟기가 어렵다.”고
생각하고 수행할 수 있는 지금 있는 힘을 다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한다.
태어난 자는 언젠가 죽기 마련이다.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까?
이에 대해 전재성 선생은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용감하게 맞닥뜨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죽음과 맞서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이와 같이 ‘나는 밤에 나에게 죽음을 초래하고
나에게 장애가 되는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지 못했는가?’라고 성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성찰하면서 이와 같이 ‘나는 밤에 나에게 죽음을 초래하고
나에게 장애가 되는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지 못했다.’라고 안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기 위해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곧바로 올바로 알아차려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옷이 불붙고 머리가 불붙었는데,
그 옷이나 머리의 불을 끄기 위해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곧바로 올바로 알아차려야 하듯,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그 수행승은 악하고 불건전한 원리를 버리기 위해
극도로 의욕을 일으키고 노력하고 정근하고 불퇴전하고 새김을 확립하고
곧바로 올바로 알아차려야 한다.”(A6.20)
2010년 자살자는 15,566명이었다. 매일 42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있는 것이다.
OECD 통계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에서 한국은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자살자가 가장 적은 그리스가 2.8명이고 자살률 2위인 일본이 19.7명인데 한국은 28.1명으로 집계됐다).
답은 하나다. 이제까지 우리가 행복이라고 믿고 추구해왔던 것은 행복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쾌감을 느끼는 기회는 분명 늘어났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사용하는 많은 것들은 대개 쾌감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쾌감이 곧 행복이라는 믿음 속에서 모두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기 위해 열심히 달려왔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들은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왔다. 행복하다고, 그러나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자,
낙담한 나머지 죽음을 택한 것이다. 약하고 자신 없는 자 스스로를 속인다.
우리는 좀 더 솔직하고 거짓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려는 노력을 해야 하겠다. 그것이 강해지는 길이다.
1) 현재 이 순간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재인식해야 한다.
2) 자잘한 번뇌 망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스스로 모색해야 한다. 그 길은 얼마든지 있다.
3) 너무 안이하면 나태해진다. 적당한 삶의 목표를 정해 깨어있는 삶을 살고자 해야 한다.
4) 죽음명상을 통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 하겠다.
5) 죽음의 순간에도 마음챙길 수 있다면 그 선한 마음이 내생을 결정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