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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또 뭐 하나를 놓친 것 같아요. 우리 성민 자매 한 20일 가까이 필리핀 선교 다녀왔는데 여기 자리에 있나요? 일어나면 박수로 한번 잘 다녀왔다고 감사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유다의 마지막 때의 이야기입니다. 서론 부분이 조금 어렵긴 해요. 역사적인 부분을 좀 다뤄봐야 해서 여러분이 평소에 들어보지 못한 이름들이 막 나열돼요. 그래도 조금 집중해서 새벽 기도를 오신 분들은 좀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오늘 본문은 우리나라의 비교하면 일제 강점기에 해당합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한 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예요. 바벨론의 식민지가 된 유다 백성들에게 간절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뭘까요? 당연하죠. 독립. 바벨론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그래서 이스마엘이라는 사람을 필두로 해서 많은 사람들이 쿠테타를 일으켰어요. 그래서 바벨론에서 유다의 총독으로 파견한 그다라라는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그다라만 죽인 것이 아니라 그다라를 돕던 많은 유대인들, 그러니까 그 나라의 통치를 도와주던 많은 유대인도 죽이고, 그리고 그데라와 함께 유대를 통치하던 바벨론의 군사들도 죽이게 됩니다.
하필 이때 북쪽 이스라엘에서 한 80명 정도의 사람들이 남쪽에 무너졌지만 성전에 예배하러 이렇게 오게 돼요. 근데 이 이스마엘이라는 사람이 이것이 발각될까 봐 한 10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70명을 또 죽이게 돼요. 그러니까 이게 일이 너무 커져버린 거예요. 이렇게 클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데 바빌론의 적도 되고 또 북쪽 이스라엘의 적도 되고 자기 주변에 적으로 둘러싸이게 됐습니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요아난이라는 사람이 또 등장을 해요. 이 요아난의 군대와 이 이스마엘의 군대가 만나게 돼요. 같은 이게 유대 유대 사람들이죠. 근데 요한을 만나자 이스마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요한나를 따르기 위해서 이스마엘을 배신합니다. 그래서 이 이스마엘은 8명의 작은 사람들만 데리고 그의 정치적인 배경이 된 암모니아는 나라로 도망을 가게 돼요.
문제는 이렇게 원인자인 그다라를 총독을 죽인 원인자인 이스마엘이 도망을 가도 유다가 바벨론을 향해서 쿠테타를 일으키고 총독을 죽였다는 사실은 안 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벨론의 입장에서는 유다라는 나라가 자기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밖에 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스마엘이 사라졌지만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었어요. 특별히 이제 이스마엘과 요아난이 싸워서 전쟁은 하지 않지만 요아난이 이기게 되니까 이게 이제는 이게 요아난의 문제가 된 거예요.
요아난의 문제가 너무 커진 것을 알게 되고 이제 이 문제를 두고 이제 하나님께 묻기 시작합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물었어요. 14절 14절은 요한한 일행을 향한 하나님의 응답이에요. 그러니까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14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
또 너희가 말하기를 아니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도 들리지 아니하며 양식의 궁핍도 당하지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들어가 살리라 하면 잘못되리라.
하나님의 응답은 애굽 땅에 들어가지 않는 거였어요. 그냥 가나안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으면 살고 애굽으로 가게 되면 재난으로 인해서 남는 자가 한 명도 없게 될 거라 그랬어요. 실제로 애굽으로 도망갔던 이 유대인들은 한 명도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지 못해요. 애굽 땅에서 다 죽게 됩니다. 17절 하반절을 보면 곧 칼과 기근과 전쟁에 죽을 것인 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난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
애굽 땅으로 가지 말고 가나안 땅에 나무를 앓는 것이 하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답이 분명하면 그 답을 따라야 하잖아요. 근데 요아난과 요한의 일행들은 하나님의 답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애굽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애굽으로 가는 것이 잘못된 삶이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삶이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리고 애굽으로 피하게 되면 하나님이 내리신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인해서 너희는 죽게 될 것이고, 너희 중에 한 사람도 다시 유다로 돌아오는 이가 없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어요.
하나님의 응답을 빼고 나면 그냥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위기는 피하는 게 상책이에요. 여러분 누가 위기를 맞닥뜨려서 그거와 싸워서 이길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할 수만 있으면 위기는 피하는 게 상책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답은 가나안 땅에 바벨론의 식민지인 유다 땅에 지금처럼 위기에 노출된 대로 그대로 살라는 거였어요. 여러분 잘 이해되지 않잖아요. 이 장면을 우리가 매일 아침 이렇게 묵상하는 매일 성경에 보면 이렇게 기록해 놨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삶의 양식을 지키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삶의 양식, 삶의 방식을 지키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라는 거예요.
인간적으로 보면 애굽으로 도망가는 것이 애굽으로 피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처럼 보이지만, 가나안 땅에 남아 있는 것이 식민지로 사는 것이 식민지에 핍박받는 백성으로 사는 것이 유다 백성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가장 합당한 삶의 방식이라는 거예요. 유다의 긴 역사 속에 거기는 하나님의 심판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와 이스라엘 법들의 범죄와 하나님의 사랑이 다 섞여져서 마지막 하나님이 내린 결론이 이 가나안 땅에 유다 땅에 그냥 머물러 있는 거였어요.
단순히 한두 가지 사건으로 가나안 땅에 머물라는 게 아니에요. 언약의 관점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관점으로 봤을 때 지금 지금 유다 백성들은 애굽으로 도망가지 않고 가나안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삶의 방식 존재 방식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위기를 피하려고 혹은 편안함을 쫓으려고, 부유함을 쫓으려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떠나지 말라는 거예요. 오히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떠나면 재난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있기를 원하는 자리에 하나님이 있기 원하는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애굽에 가지 말고 황폐한 땅 가나안에서 바벨론의 식민지 땅인 가나에서 그대로 있기를 원하셨어요. 바벨론의 통치를 받으면서 가나안 땅에 있으라는 것입니다. 독립을 반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좀 더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원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바벨론의 식민지인 그 땅에 그냥 그대로 머물러 살라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주전 609년 요시아 왕이 전쟁에서 죽은 이후에 정말 계속해서 전쟁에 시달렸어요. 반면에 애굽은 애굽 땅은 전쟁과 상관없는 대개 평화로운 곳이었어요. 그러니까 누가 봐도 가나안 땅은 계속 전쟁이 있었던 땅이고, 누가 봐도 애굽 땅은 편안하고 전쟁이 없는 땅이었어요. 유다 백성들이 보기에는 애굽은 전쟁도 없고 식량의 궁핍도 없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피하면 살 수 있는 것, 피하면 안전한 곳처럼 보였어요.
근데 하나님이 그 땅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거예요. 애굽을 허락하지 않고 그대로 가나안에 있으라는 거예요. 만약에 너희가 애굽으로 피하면 내가 애굽을 순식간에 죽음의 땅으로 바뀌게 할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에요.
너희가 안전해서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피하면 너희가 넉넉하다고 생각해서 피하면 그곳을 내가 즉시 죽음의 땅으로 바꾸게 할 것이다. 바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7절 하반자를 다시 한 번 보면
곧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난을 벗어나서 남을 자가 남을 자 없으리라.
애굽 땅은 애굽 백성들에게는 비록 평화로운 땅이었지만, 유다 백성들이 그곳에 가는 순간 유다 백성들에게는 살지 못하는 땅 한 명도 목숨을 건지지 못하는 땅으로 바뀔 것이라는 거예요.
내가 지금 너에게 허락한 이 자리에서 이 모습으로 그대로 있으라는 거예요.
한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그대로 있으라는 게 아니에요. 언약의 관점에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범죄와 또 하나의 유다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와 이 많은 과정들이 복잡하게 얽혀서 하나님이 마지막 그들에게 내린 답이 가난에 그대로 머무는 거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사는 길은 비록 이스마엘이 총독 크다라를 죽인 것으로 인해서 큰 위기를 맞았지만 그대로 가나안에 있는 것입니다. 위기 중에 그대로 있으라는 거예요.
참 이해가 안 되죠. 여러분 위기는 피해야 정상이잖아요. 위기는 달아나야 정상이 어쩌면 소나기는 피하고 우박도 피의 정상이 데 하나님이 때때로 우리에게 말도 되지 않게 그 자리에 그곳에 그대로 있으라고 하실 때가 있다는 거예요. 모든 답이 하나님이 그대로 있으라고 아닐 때는 있지만 지금 이 유다 사람들에게는 이 남쪽 유다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이 허락한 이들의 삶의 존재 방식은 식민지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고, 식민지 백성으로 그대로 이렇게 사는 것이고, 하나님 예배함이 자유 없는 땅에서 그대로 있는 것이었어요.
하나님은 어떤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으로 살게 하셨어요 이 400년 동안 종으로 사는 것도 하나님이 그들이 허락하신 유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존재 방식이었어요.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으로 살게 하셨어요.
근데 이제는 하나님이 애굽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거예요. 슬프지만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으로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종이 이들의 존재 방식이라는 거예요. 이 종으로 사는 것이 최고이고 종으로 사는 것이 최선이고 종으로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한 것이고 종으로 사는 것이 가장 합당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이걸 깨달으면 믿음은 많이 성숙했다고 봐도 될 것 같아요. 오늘 말씀을 여러분이 듣고 이 말씀을 깨달으실 수 있으면 여러분은 좀 성숙했다고 스스로를 그렇게 여겨도 될 거예요.
물론 이렇게 머리가 똑똑해서 이해하는 것과 내가 믿음으로 이해하는 건 다르죠. 제가 말하는 이해는 믿음으로 이해하는 거죠. 믿음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애굽의 애굽으로 종으로 400년을 살게 하신 하나님은 이제 또 광야에서 40년을 살게 해요. 400년 동안 애굽의 종으로 애굽의 통치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살게 하셨어요. 종으로 400년 살게 하시다가 이제는 하나님이 또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몰아가셔요.
그러니까 광야가 또 그때는 그들의 존재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사막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존재 양식이었어요. 사막 백성처럼 사는 것. 궁핍하고 물 없어 목말라 하고, 구름이 없으면 말라 죽고, 밤에 불기둥이 없으면 맹수의 공격을 당하는 그 땅에 40년 동안 사는 것이 하나님이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허락한 존재의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만나를 먹고 사는 것, 광야에서 사는 것, 불기둥과 구름 기둥을 벗어나면 살 수 없는 땅에서 사는 것이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가 잘 사는 길이 뭘까요? 하나님을 이기고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잘 사는 게 아니에요. 성도가 잘 사는 길은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해 준 삶의 존재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이 성도가 가장 잘 사는 길이에요.
하나님이 어떨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400년 동안 애굽의 종으로 살게 하셨어요 어떨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의 유목민으로 살게 하셨어요. 어떨 때 하나님이 바벨론으로 종으로 살게 하셨고, 또 바벨론에 끌려가지 않는 남겨진 사람들은 황폐한 성전에서 예배하는 자로 하나님이 그냥 살게 하셨어요. 예루살렘 성전이 다 무너졌어요. 성전의 기구도 다 빼앗겼어요. 예배할 도구가 없어요.
그런데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우리가 보기에는 형편없는 예배를 계속 드리는 것이 그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허락하신 삶의 양식이었던 거예요. 그곳에 있어야 사는 거예요. 평안한 땅 애굽으로 달아나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폐허가 된 유다 땅에 사는 것이 그 당시 유다 백성들이 허락했던 삶의 양식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세상을 잘 사는 길이 뭘까요? 하나님 여러분과 저에게 항상 좋은 길, 안전한 길, 평안한 길을 주실까요? 우리가 우리에게 삶에 닥치는 삶을 다 이해할 수는 없어요.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삶을 결코 다 이해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지금 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슬픔을 허락하시면 슬픔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며 내가 살아가고, 하나님이 나에게 절망을 주셨으면 절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다시 나를 회복시키길 기대하면서 그 자리에 살아가는 것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삶의 존재 방식들을 내가 이해하고 그대로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세상을 잘 사는 비결인 거예요.
요한난과 유다 백성들은 이스라엘이 만든 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삶을 선택하려고 했습니다. 실제로 선택하고 애굽으로 갔어요. 모든 것이 풍부한 위기가 없어 보이는 애굽이 자신이 살아야 할 땅으로 자신의 삶의 존재 방식으로 보였어요. 눈으로 보기에는 애굽이 자신들의 삶의 존재 방식이었던 거예요. 가나안이 아니라.
그런데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이들이 들어가자마자 애굽은 이들을 징계하는 땅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다시 유다로 돌아올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사는 것 바벨론의 식민지로 사는 것 바벨론의 지배를 받으며 사는 것이 유다 백성들의 삶의 방식이 지금 그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될 삶의 방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적장 시대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창세기 13장 10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수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소돔과 고모라는 에덴 동산 같았고 애굽 땅과 같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롯이 그곳으로 갔던 거예요.
근데 그곳은 롯이 가면 안 되는 땅이었어요. 소돔과 고모라는 죽음의 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거할 땅이 아니었어요. 모든 것을 잃게 하는 땅이었습니다. 이처럼 유다 백성들에게 애굽은 희망적으로 보였지만 희망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거하면 안 되는 땅이었어요. 비록 종으로 살지만, 비록 멸시를 받으며 살지만, 비록 조롱을 받으며 살지만 성전은 다 무너졌지만 가나안 땅에 이사했던 거예요.
우리는 안목의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존재 방식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욕망 때문에 우리의 욕심 때문에 잘못된 가치관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내게 허락하신 삶의 존재 방식.
우리가 이유는 다 알 수 없어요. 왜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이런 삶을 허락했는지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지만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아마 천국 가면 그때는 알 거예요.
여러분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우리가 우리 교회나 가정에 일어난 일들을 다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없어요. a로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하다 보면 또 막혀요. b로 설명할 수 있고, 다 설명하다면 또 막혀요. ab를 다 동원해서 설명하다 보면 또 막혀요.
이게 세상에 일어난 일들이에요. 우리가 다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그대로 머물며 하나님의 자녀 자녀로 살기를 소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눈물의 땅에 메마른 땅에 있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고통으로 인해 잠을 자지 못하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고, 근심이 뼈를 녹이고 괴로움으로 인해서 마음의 짐이 없는 상황에 처하기도 합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다 무너지고 친구들이 다 배신하고 병으로 인해도 고통스럽지만 내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은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지금 나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삶이기 때문인 거예요.
하나님은 저에게도 기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순간을 주셨어요. 근데 하나님이 그곳에서 나를 구출해 내지 않으시더라고요.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운명을 달리하는 아픔도 주셨어요. 저는 그곳에 1년을 더 있기로 맹세하고 1년 더 전방 군 생활을 연장하고 거기에 있었어요.
왜 하나님이 많은 병사들이 내 앞에 죽은 그 땅에서 내게 그걸 피할 땅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인 거예요. 그 땅을 섬겨야 할 땅이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서 GOP에 정말 긴 3년 동안 제가 장교로 근무하고 다시 후방으로 한 2년 하고 5년을 군 생활하고 전역을 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아 잠을 자지 못할 때도 있었어요. 근데 하나님이 그곳에서 나를 구출해내지 않으시더라고요. 사람들이 나를 욕하고 떠나갈 때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목회에 다 있었던 일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그곳에서 구출하지 않으셨어요. 하나님이 나를 괴로움의 땅에 계속 머물게 하셨습니다.
왜요? 그게 나에 대한 나에 대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삶이었기 때문이에요. 다 인정할 수는 없어요. 다 이해할 수는 없어요. 왜 내가 피하고 싶은데 못 피하게 했는지 난 다 모르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나는 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는 거예요. 난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지도 않고 그는 하나님을 다 알 수도 없다는 거예요.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도 주셨어요. 어제까지 나를 반기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얼굴이 바뀌는 순간도 주셨어요. 돌아버린 이 모든 순간은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해서 나에게 허락하신 나의 삶의 존재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곳에 계속 머물게 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나의 삶을 이끌어가시고 그리고 큰 구원의 역사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살게 하신 땅에 살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살게 하신 방식으로 살아가면 지금 힘들고 죽을 것 같지만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혼자 두지 않으셔요. 하나님이 머물러가는 삶의 그 땅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 부단히 애쓰는 우리를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고 결코 혼자 두시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시간을 살면 하나님의 때를 살면 하나님의 장소에서 살면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여러분에게 허락한 삶의 존재 방식이 어떻습니까? 너무 힘드십니까? 달아나지 마시고 그곳에서 잘 머물러 계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꼭 이기게 하시는 겁니다. 할렐루야
저는 피하고 싶은 순간이 참 많았어요. 근데 하나님이 한 번도 피하게 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왜요? 그건 저에게 허락한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하신 것은 여기가 이곳이 이 땅이 여러분의 삶의 장소요. 삶의 시간이고 여러분의 삶이기 때문인 거예요. 이곳에 믿음으로 이겨내시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구원을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맛본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좀 특별한 찬양을 할 텐데, 저도 실은 이 찬양을 여러 번 듣고 불러봤지만 여전히 익숙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우리가 한번 좀 이렇게 불러보도록 할 텐데 첫 번째는 우리가 우리 찬양단 자매가 이렇게 천천히 부를 거예요. 가사 한번 잘 생각해 보시면서 함께 찬양했으면 좋겠습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