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지명귀(實至名歸)- 실질적인 것이 어느 경지에 도달하면 이름은 저절로 따라온다
조선시대 인물 가운데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으로 잘 알려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빼어났고, 기지(機智)가 있었다. 젊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 여러 관직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는 임금 선조(宣祖)를 모시고 의주(義州)로 피란 가서 어려움 속에서 난국을 잘 수습한 공로로 호성일등공신(扈聖一等功臣)에 책록(冊錄)되고,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역사상 관운이 가장 좋은 분이라 할 수 있다. 나중에 그 후손 가운데도 영의정이 여럿 나왔다. 이시영(李始榮) 초대 부통령도 이 분의 후손이다.
이 분은 호를 백사(白沙)라고 했는데, 동시대에 평안도관찰사로 있던 윤훤(尹暄)이라는 분이 이미 백사라는 호를 쓰고 있었다. 어느 날 백사 윤훤이 백사 이항복을 만나 “내가 이미 백사(白沙)라고 호를 쓰고 있으니까, 당신은 백사라는 호를 쓰면 안 되오”라고 했다. 그러자 이항복은, “백사라는 호를 당신만 쓰라는 법이 어디 있소? 옛날 사람 가운데도 같은 호를 쓴 사람이 많이 있소. 당신은 당신대로 백사라고 쓰시오. 나는 나대로 백사라고 쓰겠소. 나중에 누가 더 유명해지는지 한번 봅시다”라고 웃으며 대꾸했다.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백사(白沙) 윤훤(尹暄)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이름이 사람을 유명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이름을 훌륭하게 만드는 것이다. 똑같은 이름인데도 훌륭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형편없는 사람도 있다.
원래 이름의 기능은 그 어떤 사람을 표시하여 다른 사람과 구별하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나 동시대에 다른 사람과의 구별이 가장 큰 기능이다. 각각의 개체가 이름을 갖는 것은 사람만이 그렇다. 동물이나 식물은 소, 말, 호랑이 등 종족만 이야기하지, 각각의 동물이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식물이나 다른 사물도 마찬가지다. 한자는 묘한 것이 5만 자의 한자 가운데서 실제로 쓰이는 1만여 자를 가지고 두 글자씩 합쳐서 사람의 이름을 지으면 무수하게 많은 이름을 지어낼 수 있다.
주변의 아는 사람 가운데 간혹 지금 가진 자기 이름을 쓰면 운수가 트이지 않는다 하여, 새로운 이름으로 바꾸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잘 안 되는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아 고치려고 하지 않고,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바꾸면서 잘돼 보겠다고 의도하지만, 실제로 이름을 바꾸어 잘된 사람은 거의 없다. 이름을 바꿀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정신상태를 바꾸고 생활습관을 바꾸어 새로운 길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정당은 이름을 자주 바꾸기로 유명하다. 세계적으로도 정당 이름 자주 바꾸기로 소문이 나 있다. 여당 야당 다 마찬가지다. 평균 10년도 못 간다. 미국, 영국,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정당 이름이 몇 백 년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정당 이름을 자주 바꾸는 것은 능력이나 업적은 없으면서 허욕(虛慾)을 부리기 때문에 그렇다. 자기 당의 능력이나 업적보다 더 높은 지지율을 확보해 보겠다는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민의힘이 또 당명을 바꾼다고 한다.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똑같은 구성원에 그 사고방식, 그 대처능력을 가지고, 이름만 바꾼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될까?
*實 : 열매 실. *至 : 이를 지.
*名 : 이름 명. *歸 : 돌아갈 귀.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