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칼럼 19_이지영
<!--[if !supportEmptyParas]--> <!--[endif]-->
“모든 여성이 진정 어머니가 될 수 있다면 세상 구석구석은 향기로움과 다정함으로 행복해질 것이다.”
「여인은 사랑을 만들고 어머니는 기적을 일으킨다」는 책(김현옥)에 담긴 말이다. 주님께서는 내 심령에도 어머니의 마음을 담기 위해 소박한 일상 가운데서 계속 교훈하고 계시다.
지난주일 1학년 남자아이를 데리러 가기 위해 산호아파트로 향했다. 초겨울 바람이 살갗을 제법 매섭게 때렸다. 먼발치 계단 위에서 티셔츠 하나만 달랑 걸쳐 입고 혼자 놀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내심 반가움에 큰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집을 방문하면 으레 할머니의 문전박대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아이가 음료수 한 컵만 마시고 갈게요, 라며 발걸음을 뗐다. 그럼 조금 있다가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하자, 음료수 뚜껑을 열수 없다고 하면서 뚜껑을 열어달라고 하였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어 집에 와도 괜찮다는 말에 문을 살며시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거실 바닥에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이불과 계수대에 설거지를 하지 않은 채 쌓아놓은 그릇들이 보였다.
아빠는 일찌감치 일을 나가시고 할머니마저 병원에 계시니 마음이 괜히 짠했다. 음료수를 컵에 따라 준 후 “혹시 설거지해도 되겠니?”라고 물어보자, “네”라고 짧게 대답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탓인지 말라붙은 밥풀과 반찬 양념들이 잘 씻기지 않았다. 몇 번이나 박박 문질러 설거지를 끝내고 현관문으로 나오는데, 무언가 끈적끈적한 게 달라붙었다. 아이가 자신이 어제 오후에 쏟은 음료수라고 하였다. 엷은 분홍빛 액체가 바닥 이곳저곳에 엉겨 붙어 있었다. 왠지 여기저기 엄마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아이의 쓸쓸한 마음이 들여다보이는 듯 마음이 아프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아이가 먼저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셨네요.”라고 말을 건넨다. “와우! 전도사님이 하고 싶은 말을 우리 이준이가 먼저 말했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해주셨다면, 에이! 우연이지요, 라고 하던 아이가 뜻밖에도 그런 말을 했기에 차가운 살갗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이의 손을 꼭 잡으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붙여주신 영혼이구나!’ 느껴지면서 화살기도가 흘러나왔다. “하나님, 이 가정을 긍휼히 여기사 할머니의 마음을 가난하게 하시어 주님 앞으로 나오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게 하옵소서.”
기하급수적인 이혼의 증가로 결손 가정이 점점 늘어난다고 하지만, 유독 하나님께서는 내게 이러한 아이들을 붙여주셨다. 친척 집에 얹혀사는 아이, 문화적 차이로 아빠와 헤어져 엄마와만 사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 병약하신 할머니 손에 키워지는 아이, 가정의 잦은 불화로 상처를 입어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아이 등. 사실 나에게도 7살 때 엄마를 잃은 어린 조카의 눈물과 아픔을 보았는지라 그러한 아이들에게 더 시선이 가기도 했다.
점심시간에는 낯설 환경을 두려워하며 나만 졸졸 따라다니는 유치부 여자아이의 밥을 챙겨주고, 아이들의 이런저런 주문에 대응하며 물을 떠주다 보니 정신이 온데간데 없다.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잘 모르겠다고 혼자 말처럼 중얼거리자, 옆에 계시던 권사님이 “애기들 챙기느라 엄마가 정신이 없지.”라고 하시었다. 오늘따라 엄마, 라는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렸다. 아이를 한 번도 낳아보지 않은 처녀가 말이다. 그러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이 강하게 뇌리를 스쳤다. “환성을 올려라, 아기를 낳아 보지 못한 여인들아! 기뻐 목청껏 소리쳐라, 산고를 겪어 본 적이 없는 여자야! 너 소박맞은 여인의 아들이 유부녀의 아들보다 더 많구나. 야훼의 말씀이시다”(사54:1).
순간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엄마로 불리기에는 영육 간에 함량미달인 이 죄인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커서. 언제나 주님은 나를 자궁 속에 품은 아이처럼, 가시더미 속에서도 붉은 피를 흘리시며 고통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자애롭게 품어주셨다. 쉴 사이 없이 투덜거리고 원망불평하며 엉겨 붙어도 단 한시도 귀찮다고 뿌리치지 않으셨다. 힘에 겨워 아이들의 손을 놓아버리려고 했던 연약한 나의 손을 꼭 붙드시고, “내가 너의 아픔과 눈물을 보았다. 다시 힘을 내어 이 거친 광야를 나와 함께 걷자구나.” 위로하시던 주님이 계셨기에, 난 지금 이곳에 아이들과 함께 서 있다.
1년 전 교회이전을 하고, 아이들을 중고등부로 올려 보내고 유치부 아이 달랑 한 명만 남았을 때 나 자신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그동안 해왔던 어린이사역에 마침표를 찍을까 하는 마음이 수십 번 엎치락뒤치락 하였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고달픔이 싫었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안감이 가시마냥 계속 찔러댔다. 사람들의 눈이 왜 그렇게 의식되는지 모든 성도들의 시선이 마치 내게만 고정되어 있는 듯해 쥐구멍으로 자꾸 숨고 싶었다. 하지만 산고를 겪어 본 적이 없는 나를, 하나님은 이 광야 길에서 고통과 아픔과 수치와 굴욕감을 맛보게 하시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가르치고 계셨다. 사람들에게는 소박맞은 부끄러운 여인마냥 얼굴을 들 수 없었지만, 나를 끊임없이 제자리로 갖다 놓으셨다. 이는 거룩한 주님의 신부로, 진정한 어머니로 만들기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자애로운 손길이리라.
명예와 위신과 체면의 너울이 한 꺼풀 벗겨지자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작고 작은 동산에도 머물고 계심이 보였다. 아직은 아이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아낌없이 순수하게 희생하며 전하는 데는, 새내기 엄마처럼 허둥대고 서툴기만 하다. 하지만 이제는 스스로를 다그치거나 불안해하지 않으련다. 하나님이 내 삶 가운데 행하실 일들을 믿기에 목청껏 소리치고 싶다. 주님만이 나의 진정한 기쁨이요 소망이라고.
마더 테레사(Mother Theresa, 1910-1997)의 말이다. “나는 숫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지요. 내가 신뢰하는 것은 단 하나,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말씀」, p34). 하나님의 나라는 머리 숫자가 아니다. 하나님을 닮는 자녀로 양육하는데 진정한 가치가 있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마더 하우스에 걸린 나무 문패에는 아직도 '마더 테레사'라는 글씨가 적혀 있고, '자리에 있음'과 '자리에 없음'을 나타내는 표시에 늘 '자리에 있음'으로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났지만 지금도 살아서 일하고 있다는 뜻이란다. 나는 없어도 주님이 곁에 계시다면 내 삶 헛되지 않으리라. 나 비록 구로치 못한 자일지라도 사랑을 낳는 여인으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리에 있음’이라는 문패를 걸어놓고 아이들의 바람막이가 되어줄 “마더 하우스”로 서 있고 싶다.
오후 예배를 마친 후 여느 때보다 더 밝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 아이의 해맑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거리에서 소년소녀들이 가득하여 뛰어노는’(슥8:5) 그날을 꿈꾸어 본다. 우뚝 솟은 자리가 아닌 낮은 동산에서 나를 진정한 어머니로 빚어 가실 하나님의 손길이 있기에 난 정말 행복하다.
첫댓글 멋지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소망이 넘치는 사역자이십니다 ^^
그런 사역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