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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사이드선교사, 호남의 선교의 별이 되다
선교사는 순례자다. 땅에 속했으면서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자들이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별을 찾아서 나그네 길을 떠나온 사람들이다. 그들의 떠남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타인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으로 살고자 인생을 모험하는 자들이다.
선교사들이 자기 고향과 본토와 친척과 친구들을 떠나 선교지로 가는 일은 일단 문화와 풍습이 다른 곳으로, 도시의 발달과 문명의 이기 사용이 열악하고 낮은 곳으로 가기 때문에 자기 포기와 비움 없이는 어렵다. 그렇다고 모든 선교사가 초월적인 성자의 삶을 산다는 뜻은 아니다. 보다 풍요롭고 편안한 세계를 포기하고 떠나온 자로서 가난하고 불편한 세계에 적응하며 두 세계에 사이의 미디어로서 양쪽 세계에 희망과 구원이 되도록 긴장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교사의 삶은 순례자의 삶이며 고독과 끊임없는 자신의 욕망과의 싸움이다. 땅에 속했으나 하늘에 속한 자로 살아야 하는 운명, 본국보다 이방의 선교지를 더 사랑해야 하는 당위성, 본국에 의존되어 있으며 일은 이국에서 해야 하는 이중적 지위 그리고 일이 끝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으로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하며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한국사 근대사에서 선교사는 위대하였다.
갑오농민혁명과 청일전쟁, 을사늑약과 러일전쟁, 일본의 조선 병탄으로 나라가 망하였다. 주자가례에 의존되었던 반상의 신분사회, 조선사대부들의 관료사회, 수탈적인 조세 사회가 폭삭 무너져 내렸다. 조선 양반 관료들은 물론이고 상민과 천민들이 공황상태에 빠졌을 때 선교사들은 복음으로 조선의 망국민들을 품고 바닥으로 내려가 그들과 함께 아파하며 근대 교육과 의료 봉사와 복음으로 사람이 사람으로 살만한 세상을 위해 수고하며 독립에의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1940년 일제에 의해 모든 선교사들이 강제로 철수를 당할 때, 각 장로교 선교부에서 운영한 선교스테이션은 만주를 포함하여 37개가 있었으며 모든 선교부에는 남녀 학교와 병원, 사회복지 시설과 직업훈련원 등이 있었다. 이 말은 기독교와 선교사가 한반도 곳곳에서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근대화와 새로운 문명에로의 전환과 의식의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말이다. 선교사들과 한국 교회가 독립운동과 여성 운동은 물론이고 짐승으로 취급되었던 백정운동을 주도하고 이끌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는 기독교의 영향을 폄하하고 왜곡하고 공로를 다른 집단에 돌린다. 이는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타락한 서구 자본주의, 제국주의를 매도, 비판을 하면서 기독교를 아편으로 정의한 것을 한국의 운동가들과 사회주의 지식인들, 극 보수민족주의 사가들이 한국 기독교와 교회에 그대로 적용한 결과이다.
왜 우리는 우리 역사의 팩트와 지금도 진행 중인 엄청난 영향을 무시하고 사회주의가 비판하는 대로 한국의 기독교와 교회가 마치 그런 것처럼 선교사들의 헌신과 공로를 같이 싸잡아 무시하며 외면하는가?
기독교를 마치 비정상적인 범죄자처럼 취급하며 우롱하는 유튜브들과 네거티브 언론인들, 교회를 자신들의 정적으로 취급하며 음해하는 정치언론인들과 정치인들에게 포사이드 (Forsythe, Wiley Hamiltion 1904~ 1911) 선교사의 짧은 사역의 고난과 사랑의 수고를 증정하는 바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거듭난 이보한과 최흥종의 스토리를 덤으로 주고 싶다.
포사이드 선교사의 짧은 선교 ( 1904년 9월~ 1911년 )
포사이드 (Willy H .Forsythe)선교사는 1904년 9월에 남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로 다니엘, 조셉 놀란 의사와 함께 내한하여 전주 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일하는 중에 괴한에게 칼침을 맞은 사건으로 1906년 봄에 치료차 미국으로 돌아갔다.
1907년 치료를 마치고 다시 한국에 돌아온 그는 전주 선교부에서 활동하다가 1909년부터 목포 선교부에서 의사로서 전도와 의료봉사를 겸하였다.
1909년 4월, 그는 급성 폐렴에 걸린 광주 선교부의 오웬 의사를 치료하기 위해 광주로 가는 길목에서 신음하고 있는 나병환자를 만나 자신의 말에 태워서 광주기독 병원인 제중원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해 주었다. 그 후 그는 스프루 라는 열대 풍토병에 걸려 1911년 치료차 다시 미국으로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1918년에 소천 하였다.
포사이드의 한국 사역은 5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사건으로 호남 선교의 별이 되었으며 조선인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 되었다.
그는 1873년 미국 켄터키주 해로스버그에서 태어나 1894년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하고 1898년 루이빌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군의관으로 참전하였다가 1904년 남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지원하여 그해 9월에 내한하였다. 그는 안식년으로 출국한 잉골드 선교사를 대신하여 전주 예수병원을 의료사역을 담당하며 한 편으로는 전킨 선교사와 함께 거리에서 걸식하는 아동들을 데려다 보호하였다. 그는 전주 선교부의 교우들 가정에 고아들을 위탁하였고 그들로 하여금 선교부 산하의 논을 경작하여 자립하도록 이끌어 주었다.
1905년 3월 그는 익산 목천포 당뫼1)에 사는 양반 가문의 강도당한2) 환자를 치료해달라는 부름을 받았다. 강도당한 자는 전주 이 씨 양반에 속하는 ‘이경호’ 라는 자였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그를 치료하고 시간이 너무 늦어 그 집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강도들이 다시 몰려와서 벽에 걸린 그의 옷을 보고 경찰로 오인을 하여 그를 칼로 마구 찔러 그의 머리와 귀, 목 등 여러 군데 깊은 상처를 입히고 달아났다. 포사이드는 밤새 이 씨 가족의 돌봄으로 겨우 생명을 부지하였고 곧 이어 군산선교부의 다니엘 의사의 응급 처치를 받았다. 그 후,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지만 회복이 되지 않아 미국으로 돌아갔다.3) 그러는 사이에 전라 관찰사가 사건의 범인을 잡고 그에게 범인 처벌에 물었을 때 그는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한다’고 하였다.
이 사건으로 전주지역의 양반들이 앞을 다투어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조지 톰슨 부라운의 ⎾한국 선교 이야기⏌ 97쪽은 이를 증명해 준다.
그해의 도시선교는 앞선 해와 비교할 때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1905년 2월까지 교회에 모인 남자들은 완전히 중산층 상이이거나 농부가 아니면 하층 짐꾼들이었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기독교를 반대하거나 무관심했었다. …… 포사이드 박사가 상처를 입은 한 달 뒤, 상당수의 고위층과 부유층의 이 씨 문중 사람들과 집안의 가장들이 큰 길에서 가마를 내려서 예배드리는 외국사람 집에 가는 것을 보고 이것이 그 도시의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 이 사건이 본이 되어 교회에 나오는 것이 더 이상 체면이 깍이는 일이 아니었다.
이에 더하여 또 하나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포사이드 선교사가 자기 집에 왕진을 와서 강도들에게 린치를 당하고 치료받는 과정을 지켜 본 ‘이경호’의 서자인 ‘이보한’이 자원해서 교회에 나온 것이다. 그는 부친이 포사이드 선교사에게 진 마음의 빚과 테이트 선교사와 한 약속을 지키려고 자신을 대신하여 교회에 나갈 사람을 찾을 때 자신이 교회에 나가겠다고 선뜻 자원 하였다.4) 포사이드 선교사의 감화를 받은 그는 전주교회에 나와 전킨 선교사의 지도 아래 성경과 영어를 배웠으며 예수를 믿은 지 1년 만에 전주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거듭난 이보한 이‘거두리’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포사이드는 선교사는 치료 차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치료를 마친 후, 전주 선교부로 돌아왔으나 1909년 목포 선교부의 프렌치병원의 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 147쪽은 포사이드 선교사의 목포사역을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목포의 포사이드 의사는 멀리까지 넓게 알려졌는데 병자에 대한 열정뿐 아니라 강렬한 복음의 열심 때문이었다. 강도를 만나 받은 상처는 치유되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와 혼과 몸이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뛰어들었다. 목포의 길거리를 오르내리며 한 손으로는 복음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다른 손으로는 약을 나누어 주었다. 그의 이름은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전설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그의 신앙을 위한 열심과 죄인들을 위한 측은한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회자된다. 그러나 그의 사역을 찬란했지만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1911년 장흡수부전증으로 그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결코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여 1918년 켄터키 주 루이빌에 있는 본가에서 사망했다.
포사이드는 그렇게 죽었지만 그는 선교 역사상 가장 극적인 그리고 그리스도와 같은 예화를 한국 선교사에 길이 남겼다. 1909년 4월, 장흥지역에서 순회활동을 하던 오웬(Owen, Dr. Clement Carrinton) 박사가 급성 폐렴으로 광주 제중원으로 이송 중일 때 윌슨( Wilson, Dr. Robert Manton) 박사가 목포에 있는 포사이드를 광주로 불렀다. 그는 말을 타고 출발하였다. 배를 타고 올라와 영산포에서 내려 광주로 오는 길에 노상에서 다 죽어가고 있는 나환자 여인을 만났다. 그는 나환자를 자신의 말에 태우고 자기가 말의 고삐를 쥐었다. 그는 환자를 태우고 천천히 걸어오느라 사랑하는 친구 오웬의 진료는커녕 임종도 지켜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슬픔을 삼키며 환자를 제중원 의무실에 입원시키고 친히 치료를 하였다. 나병을 겁내는 제중원의 입원 환자들의 항의로 윌슨 박사는 병원 건축을 위해 만들었던 버려진 벽돌 가마에 그의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두 주 동안 환자를 지켜보고 그에게 서투른 한국말로 자기가 누구 때문에 그를 도와주었는지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그리고 그는 목포로 돌아갔다.
당시 유진 벨(Bell, Rev. Eugene) 선교사의 부탁을 받고 포사이드 선교사를 영산포에서 광주읍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효천까지 마중 가서 영접해온 두 사람의 조사가 있었다. 그들은 포사이드 선교사의 나환자를 대하는 격의 없는 행동과 두려움 모르는 사랑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하였다. 그 중의 한 명인 최흥종은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영혼이 근저로부터 흔들렸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환자를 돌보는 윌슨 박사의 조수를 자원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땅 1,000평을 광주 선교부에 기증하여 봉선리에 나환자 치료소(광주 나병원)을 세우게 하였으며 평생을 지극히 작은 자들인 나환자들과 걸인들, 결핵환자의 벗으로 살았다.
45세로 소천한 포사이드 선교사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30년을 준비하였으나 선교 현장에서 활동한 기간은 겨우 5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이 한국 선교사에 주는 의미는 자못 크다.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은 그의 사랑이 별이 되어 십자가의 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가 ‘칼침을 당하고 용서한 사건’과 ‘나환자 여인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말고삐를 잡고 오십 리 길을 걸어간 사건’이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며 새로운 차원의 삶, 타인을 위한 존재로 살도록 우리를 강권한다.
포사이드 선교사에 의해 변화된 특별한 두 사람, 전북의 레전드, ‘거두리’ 이보한과 전남의 성자, 오방 최흥종의 생애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전북의 레전드, 전주의 문화 유산 ‘거두리’ 전도인 이보한 (1872~1931)
이보한은 이경호의 서자지만 장남으로 1872년에 익산 목천포 당뫼에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열병을 앓아서 왼쪽 눈이 실명하였고 후처의 아들로서 주변의 눈총을 받으며 외롭게 자랐으나 성격이 호방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이었다.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후, 복음 전도인, 사회적 약자들의 친구 겸 보호자, 불의에 저항하는 자, 독립운동가로서 예수 닮은 삶을 사는데 영향을 준 사람들이 있었다.
이보한을 변화시킨 사람들
그 첫째는 테이트 선교사이다.
어느 날 테이트(Tate, Rev. Lewis Boyd)선교사는 전주 유지로 잘 알려진 이보한의 아버지 이경호에게 복음을 전하러 그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는 다짜고짜 이경호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며 한국식으로 넙죽 엎드려 절하였다. 그러나 주자학의 소중화 의식에 빠져있는 그의 부친은 서양 오량캐가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내심 못마땅하였다. 그런 이경호의 속내를 파악하지 못한 테이트 선교사는 이경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귀볼을 만지며 잘 생겼다고 칭찬을 하였다. 이미 심기가 불편해진 그는 모욕감으로 떨며 종들을 시켜 무례한 서양 오랑캐 테이트 선교사에게 몰매를 가하였다. 그러나 이경호가 외국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일이 전주 감영에 보고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감옥에 갇혔다. 전주 이 씨 문중의 기둥인 그가 옥에 갇히자 문중이 발칵 뒤집혀졌고 그의 석방을 위한 일가들의 의견이 분분하였다. 그러나 테이트 선교사는 단 하나의 용서의 조건을 제시하였다. ‘예수를 믿으면 방면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이경호로서는 양반의 위신과 체통을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감옥에서 속히 나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서양 오랑캐 피해자가 거는 조건이 고작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라’는 것이니 너무 맥 빠진 주문이었다. 양반이 덥석 대답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였지만 그는 우선 감옥에서 나오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테이트 선교사에게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피일차일 미루었다.
서자인 이보한은 테이트 선교사 폭력사건을 통해서 부친의 행패와 위선, 선교사의 겸손과 사랑을 지켜보며 내심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권위적이며 허세가 심한 양반의 정신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사는 테이트 선교사의 정신과 신앙에 눈을 떴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훗날, 이보한은 테이트 선교사를 전주 교회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가 포사이드 선교사 상해사건의 영향으로 이 씨 문중의 대표로 전주교회에 등록하였을 때 테이트 선교사가 그의 성경공부와 영어 공부의 교사가 된 것이다. 그는 테이트 선교사의 지도와 격려를 힘입어 1년 만에 전주 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지도자로 거듭 났다.
둘째는 포사이드 선교사이다.
앞에서 소개하였던 대로 1905년 3월 이보한의 집에 강도가 들어와 그의 부친이 난자를 당하여 사경에 이르자 이보한은 포사이드 선교사에게 왕진을 부탁하였다.5)
당시 포사이드는 전주 선교부에 도착한지 겨우 4개월 지난 풋내기 선교사였다. 그러나 전킨 선교사와 복음의 열정이 통하였던 그는 의사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틈나는 대로 시장이나 여관에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복음의 사람’이었고 그 복음을 전하려는 불타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었다. 6)
그 날 포사이드 선교사는 이미 많은 일과로 지쳐있었으나 그의 절박한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시골 길을 따라나섰다. 이경호의 치료 작업은 한 밤중에야 끝이 났다. 그는 밤길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선교부로 돌아가지 않고 이보한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운명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일이 밤사이에 일어났다. 그 강도들이 다시 몰려와서 포사이드 선교사를 자기들을 수색하러 온 경찰로 오인하고 칼로 마구 찔러 그의 머리와 귀, 목에 여러 군데 깊은 상처를 입히고 달아났다. 그는 피를 많이 흘려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지만 이 씨 가족의 극진한 간호와 마을 한의사의 응급조치로 겨우 생명을 부지하였다. 사건의 소식을 듣고 달려온 군산선교부의 다니엘 의사의 응급 처치를 받은 그는 군산 궁멀 예수병원을 거쳐 전주로 다시 돌아왔으나 쾌차하지 않아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결국 1906년 초 남장로회 선교부는 치료와 회복을 위해 그를 미국으로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서울과 미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사이에 전라 관찰사가 강도상해사건의 주범들을 잡고 그에게 사건에 대한 경과보고를 하며 처벌에 대하여 물었다. 그는 전후 사정과 모든 것을 거두절미하고 ‘아무 조건 없이 용서 한다’ 고 하였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강도 만난 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시골로 왕진을 떠난 일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강도들에게 상해를 당하여 그토록 열망했던 선교 사역을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 3년에 이르는 투병 중에 많은 좌절과 회의, 고난과 고독에 직면하며 다시 한국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분노나 증오에 빠지지 않고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 하였다.
포사이드의 ‘용서’는 완고한 전주 양반들의 가슴에서 수상한 기독교에 대한 무조건적인 거부감과 적개심의 응어리를 녹였다. 또한 그의 조건 없는 ‘용서’는 얼치기 양반 이보한의 상처투성이의 가슴을 따스하게 녹여주었다.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부친 이경호가 자신을 대신해서 교회에 나갈 사람을 찾았을 때 그가 바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파도처럼 자신을 덮쳐오는 포사이드의 사랑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그 사랑에 자신을 의탁하고 싶은 충동에 빠졌다.
셋째 전킨 선교사이다.7)
이보한이 전주 교회에 등록하였을 때 전킨(Junkin, Rev. William McCleery) 선교사가 담임 목회자였다. 그는 테이트 선교사로 하여금 성경공부와 영어공부를 지도하게 하였다. 그는 이보한의 복음에 대한 열망과 강렬한 변화에의 욕구를 감지하였으며 그가 1년의 과정을 마치고 교회의 대표적인 전도자가 되었을 때 그를 더욱 격려하며 지지하였다. 그가 전주 교회에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사실 확인을 위하여 교회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실로 그가 일으킨 파격적인 전도행각은 걸인들이 주요 대상이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제도권 안에 있는 교회의 암초가 될 수도 있었으나 전킨 선교사는 그의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한 전도를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로 받아들였다.
넷째는 그보다 먼저 크리스천이 된 백부의 둘째 부인인 큰 어머니였다.
서자로서 문중에서 천대를 받는 이보한은 억울하고 분하여도 하소연하며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전주 북문 안에 사는 큰 아버지 이건호의 집을 찾아가곤 하였다. 8) 사랑에 굶주린 그는 둘째 백모의 격의 없는 따스한 대접과 위로를 받으며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백모에게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백모를 따라 곧잘 무릎을 꿇었다. 백모는 그에게 어머니를 대신하는 사랑이었다.
그는 백모가 잘 부르는 찬송을 따라 부르게 되었는데 그 노래가 새 찬송가 496장인 ‘새벽부터 우리‘로 시작되어 ’거두리로다‘로 끝이 나는 곡이다.
백모에게 이 찬송가를 배운 그는 어디서나 이 노래를 불렀다. 특별히 전주 남문 밖 장터로 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찬송을 부르면 장터에 온 사람들이 다 그의 노래를 좋아하였다. 그의 찬송은 영감이 있었고 감염성이 뛰어나 사람들 가슴 속에 파고 들었다. 사람들은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로 반복되는 후렴 귀를 따라서 어느 덧 그를 ‘이 거두리’ ‘거두리 참봉’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한자로는 거두리 (巨杜裡)로 썼는데 “큰 뱃심을 부리며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9) 거두리는 전주뿐만 아니라 경계를 넘어서 다른 지역에 까지 널리 알려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보한이 ‘거두리’가 되어 산 삶은 문자 그대로 파격이었다. 예수를 만난 그는 비록 반쪽짜리 양반이었지만 알량한 양반의 기득권과 명예, 자존심과 권위를 포기하고 밑바닥으로 내려갔으며 사회적 약자가 되어 그들과 어울려 함께 살았다. 예수의 사랑에 미친 그는 예수의 마음으로 예수를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수도회와 거대한 종단에 속한 성 프랜시스나 캘커타의 마더 테레사보다 더 낮고 천한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며 걸인과 나무꾼, 사회적 약자들과 동고동락하였다.
이보한의 삶은 누가 봐도 확 달라졌다. 한 마디로 예수 사랑에 미쳐버린 것이다. 예수에 미친 그의 삶, 그의 히스토리가 너무 기이하고 거룩하고 충격적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자신들은 비록 그렇게 살지 못하지만 그를 기억하며 그의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그를 전주의 정신으로 기록하고자 하였다.
2019년 12월, 전주시가 미래 유산 지정을 위한 시민제안 공모를 통해 “전주천 매곡교 및 싸전다리 뚝방길, 이거두리 이야기”와 “전주 최초의 고아원 터” 등 2건을 전주 미래유산으로 추가 지정했던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10) 그의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에 매곡교와 싸전다리를 잇는 뚝방길 주변에서 있었던 그의 걸인과 동고동락한 사랑의 이야기이며 그와 걸인들이 민족적 자존심으로 1919년 3‧13 만세 시위를 벌인 나라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보한의 변화된 삶은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초월한 삶, 가난하고 초라한 삶이므로 보통 사람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우며 굳이 그렇게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하는 반발을 가져올 수도 있다. 또한 그의 삶을 빈민들에 대한 ‘동정’, ‘자비’, ‘선행’의 틀에 가두어 그의 성육신적인 삶을 착하게 살았다는 옛날이야기로 전락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믿고 실로 땅에서 하늘나라를 산 자유인이었다.
치열하게 임박한 종말론적인 삶을 산 그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이보한의 종말론적인 삶
첫째는 전도에 몰입한 삶의 이야기다.
개종 이후, 전도는 그의 삶이었고 그의 일상이 되었다. 그는 날마다 남문 밖 장터로 나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거두리로다’ 라는 찬송을 부르며 복음 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양반들과 부자들의 집에 가서 ‘거두리로다’와 판소리를 열창하며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끈덕지게 결단을 촉구하였다. 그의 복음 전파는 사생결단을 요구하는 단호함이 있었다. 종리에 사는 부친의 친구 이돈수 진사를 전도할 때 화암사로 도망친 그를 교회로 모시기 위해 화암사에서 종리교회까지 수 십리 눈길을 청소한 그의 일화는 그의 치열하고 진지한 전도의식을 잘 말해 준다.
그의 전도는 하나님 나라에의 초청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방향 전환을 요구하였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나오라고, 살길이 여기 있으니 헤매지 말고 믿으라는 절박한 외침이었다. 그는 예수의 도를 받아서 지긋지긋한 양반의 권위와 체통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우월감과 교만, 거짓과 위선, 음모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진실로 가문의 전통과 유교의 관혼상제의 허례허식이 준 모든 억압에서 해방된 그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자신을 해방시켜준 복음의 자유와 평화를 선물하고 싶었다. 그리고 세상에 그보다 더 소중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대로 찬양과 판소리와 온갖 수고와 헌신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둘째는 걸인들과 빈민들과 동고동락한 삶의 이야기다.
그가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구호한 이야기는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존중하였다. 그들을 열등한 자나, 낙오자, 언젠가 부자가 되어야만 하는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있는 그대로 천국의 백성들로 이해하였다. 그가 그들과 나누는 것은 우월감과 동정심으로 나누는 빵이 아이요, 사랑으로 예수님의 피와 살을 나누는 성찬이며, 하나님 나라 잔치를 배설하는 일로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고 공중 나는 새를 기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인이었다.
그는 잔치 집에서 판소리를 부른 삯과 소금을 판 이익금과 부자들에게 강제로 추렴한 구호금과 식량과 의복으로 싸전다리와 매곡교 주변에 사는 걸인들과 빈민들을 구제하였다. 그는 자기를 위해서는 인색하여 죽을 때까지 찢어진 모자와 초라한 한복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사용하였다.
가끔 상관의 나무꾼들이 땔감을 다 팔지 못하면 그에게 와서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면 그는 나무꾼들을 집합시켜 구령에 맞추어 전주 부중을 한 바퀴 돌며 시위를 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무꾼들을 데리고 부잣집에 들어가 강매를 하여 나무꾼들이 나무를 그대로 짊어지고 가는 일이 없도록 만들었다.11)
셋째는 걸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친 이야기다.
그는 걸인들을 데리고 만 다닌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들을 동원하여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는 전주 3‧13 만세 시위 때 걸인들을 끌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전라도 지역 태극기 운반책을 맡아 거지대장을 앞세우고 전라도 지방 곳곳에 장날에 맞추어, 골목에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나누어 주는 일을 하였다. 거지들이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장터에 사람들이 모여 들면 그가 장터 한복판에 나타나 만세를 외치면 걸인들이 함께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12) 그는 걸인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그들의 긍지와 애국심을 고양시켰다.
또한 그는 부자들과 기생들에게 돈과 금붙이를 거두어 독립운동자금으로 상해에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는 비밀리에 독립자금으로 모은 귀금속을 책보로 싸서 어린 손자 이중환을 데리고 지경역(대야역)으로 가서 전달하는 일을 자주하였다. 대개 한 번 전달할 때 2만 원 정도를 전하였다고 한다. 당시 쌀 한말이 70-80전이었고 남자 어른 하루 품삯이 1원인 것을 감안하면 그의 모금이 독립을 열망하는 그의 초인적인 활동이었음을 알 수 있다. 13)
예수를 믿고 전도를 본업으로 삼고, 걸인과 빈민들과 친구가 되었으며,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살아 온 그는 영생을 누리며 에녹처럼 하나님 동행하였지만 1931년 음력 8월 16일에 육신의 장막을 벗고 소천 하였다.
그의 소천 소식이 전해지자 전주의 거지들과 상관 골짜기 나무꾼들 2백여 명이 그의 집에 모여 영결식을 자기들 부담으로 ‘걸인장’으로 장례를 치루겠다고 하였다. 14)
전병호 저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5 쪽은 배윤숙이 정리한 당시의 장례식 광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거리의 지게꾼들은 생업을 전폐하였고 걸인들은 상여 채를 붙들고 뜨거운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전주의 신작로는 조문객들로 홍수를 이루었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걸인들은 다투어 상여를 매었고, 수백 장의 만장 깃대는 좁은 목에서 상관 색장리 까지 장장 십리나 뻗어 있었습니다. 그에게 은혜를 입은 걸인들은 장지에서도 삽을 쓰기를 거절하고 손으로 흙을 파서 봉분을 만들고 자갈 하나라도 들어가면 안 된다고 온 정성을 다해 안장을 하였습니다.
그 후, 나무꾼들과 걸인들은 1전씩 모아 120cm 높이의 비석을 만들었다. 비명은 ❮李公거두리 愛人碑❯라 하였고 비문은 “平生性質 溫厚且慈 見人飢寒 解衣給食” ( 한 평생 자비로운 성품, 굶주리고 헐벗은 자를 보면 옷을 벗어주고 밥을 먹여 주었네.) 으로 적었다.
전주 이씨 문중에서 추방당한 그는 문중의 선산으로 묻히지 못하고 죽림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지만 그는 땅에 묻힌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를 사랑하는 걸인들과 나무꾼들과 그를 지지하며 사랑했던 선교사들과 목회자들과 교우들의 가슴에 묻혔다. 그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살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강도 상해 사건의 후유증으로 많은 고생과 시련을 겪었으나 반쪽 양반 이보한의 가슴에 떨어진 씨앗이 되어 그를 성 프랜시스나 마더 테레사보다 더 겸허하게 걸인 속에 성육신 한 이‘거두리’ 로 만들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포사이드 선교사에 의하여 문둥병자와 걸인 속에 성육신한 최흥종의 히스토리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는 86 세로 장수하여 이보한보다 27년을 더 오래 살았으며 더 복잡하고 더 많은 일에 몰입하였다.
호남의 성자, 나환자의 아버지 오방 최흥종 목사(1880-1966)
최흥종의 개종 및 회심과 목회활동
최흥종 목사의 생애는 크게는 개종 전과 개종 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개종 후는 입교와 세례 시기, 회심과 목회 활동 시기 그리고 사망 선포와 은둔의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세 시기의 활동은 모두 다 목회와 구라활동 및 빈민운동, 독립운동 및 사회운동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의 섬김에는 성과 속이 따로 없었다. 그에게서 신음하는 모든 세계는 목회의 대상이었다. 그는 십자가 사랑으로 일제의 억압과 폭력, 불법 아래 있는 교회와 사회, 나라와 민족을 두루 품었으며 행동하는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였다.
그의 본이름은 최명종 이었으나 1907년 세례를 받은 후, 최흥종으로 개명하였다.
최흥종은 1880년 광주읍 불로동에서 최학신과 국씨 부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5세에 모친을, 17세에 부친을 여의었다. 그는 장터에 싸움꾼 ‘최망치’로 알려졌고 광주 장날에 장 보러오는 사람들에게 술값을 뜯기도 하며 20대 초까지 하는 일없이 무외도식 하는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개종 이전에 강명환과 결혼하였다.
1904년 24세 때 유성기 소리를 듣기 위해 유진 벨 선교사의 사택을 방문한 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그해 12월 25일에 유진 벨 선교사 집에서 거행된 광주선교부의 첫 예배인 성탄예배에 참석하였다. 이 때 그는 광주 선교부의 한국 측 책임자인 김윤수의 권유로 입교하여 광주 선교부의 최초의 신자가 되었다. 그는 유진 벨 선교사와 오웬 선교사의 감화를 받고 술과 담배 비롯하여 건들거리는 생활을 청산하였다.
1905년 무뢰배의 생활을 청산한 그는 김윤수의 권유로 순검이 되어 화순지역 의병 토벌작전에 출동하였다가 체포된 의병 12명을 압송하는 과정에 풀어주고 순검 생활을 사직하였다.
1907년 세례를 받았으며 광주농공은행에 다니는 중에 국책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서병기와 함께 대동의상회를 조직하여 광주지역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8년 양림교회 집사로 임직하였고 의사인 윌슨 선교사의 어학 선생 겸 조수로 광주 진료소에서 근무하였다.
실로 최흥종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1905년에서 1909년 3월 사이에 이전과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노력과 결단으로 외적인 생활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 깊이 회심하고 중생한 속사람의 체험은 없었다.15)
1908년 그는 제중원에 근무하면서 조사로서 박인원, 이경필, 이계수 등과 함께 영광군 염산리교회를 차례로 돌보았다. 16)
마침내 그에게 중생의 때가 이르렀다. 1909년 4월 어느 날에 그는 평생을 묵상하며 사모하게 된 예수로 한국 땅에 성육신 한 포사이드 선교사를 만난 것이다.
오웬 선교사의 부인은 당시의 상황을 내쉬빌 남장로교 선교 본부의 소식지에 기고하였다. 남편이 죽은 후, 포사이드 선교사가 나환자를 그 자신의 말에 태우고 양림리 선교부에 나타났다.
오웬 의사의 치명적인 질병치료에 대한 논의를 위하여 전보를 받고 광주에 도착하기 전 13마일쯤 떨어진 곳에서 포사이드는 길가에 누워있는 여자 나환자를 보았다. 자신에 대한 위험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께서 하신대로 행하려는 마음에서 그녀를 안아 말에 태우고 광주까지 걸어서 왔다. 진료소에서 이틀을 보낸 후 윌슨은 옛 벽돌 가마에 임시 숙소를 정하였다. … 벽돌 가마에 모인 사람들은 그녀가 길을 걷고, 힘든 곳에서는 포사이드 의사가 겁 없이 손으로 부축하는 것을 보았다. 포사이드 의사는 모든 점에서 신사이고 또한 신사복을 입었으나 전혀 개의치 않고 그 나환자의 손을 잡았다. 병으로 일그러지고, 더럽고, 돌보지 않은 그 손을. 그녀의 머리는 수개월, 수년을 빗지 않았으며, 그녀의 옷은 누더기로 더럽고, 손과 발이 부어올랐으며 견딜 수 없는 냄새를 풍겼다. 한발은 짚신이고 다른 한 발은 종이로 감았다. 걸을 때에도 심하게 절었다. … 17)
최흥종도 포사이드 선교사의 나환자에 대한 겸허하고 따스한 인간적인 관심과 돌봄에 녹아진 자신의 변화에 대하여 ⌜호남일보⌟에 ❮구라사업 50년사 개요❯ 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기고하였다.
그날도 ⌜우월순⌟ 의사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정오쯤 귀가하려고 나오는 도중에 차마 볼 수 없는 극흉한 나환자를 말 위에 태우고 와서 내려놓고 그 환자의 겨드랑이를 부액하고 오는 서양인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보니 역시 잘 아는 선교사 포사이드 의사이어서 한편 놀라면서 ⌜포⌟ 의사 오십니까? 하고 인사한즉 그가 ⌜예, 편안하시오⌟ 다정한 답례를 할 때 나환자가 마침 오른손에 들고 있는 참대 지팡이를 떨어트렸습니다. 포의사는 날보고 ⌜형님 저 지팡이 좀 집어주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허지만 나는 집어주는 것을 주저하였습니다. 지팡이에는 고름인가 핏물인가 더러운 진물이 묻어 있었고 환자를 살펴본즉 흡사 썩은 송장이요 다 없어지고 두 가락 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은 그나마도 헐어서 목불인견이었고 또 한 가지 까닭은 그 때만하여도 나환자의 수효는 희소하였으나 보이는 환자마다 이렇듯이 극으로 흉스러워 나환자에 대한 증오감이 대단한했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 18)
최흥종은 포사이드 선교사가 나환자를 대하고 섬기는 자세에서 성육신의 의미를 깨달았으며 영적인 천지개벽을 하였다. 그는 나환자의 지팡이를 바로 집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자신을 보며 ‘이게 무슨 신앙이냐’며 자신을 책망하였다. 두 번째 ‘지팡이를 집어주시오’ 라고 태연하게 요구하는 포사이드의 말에 그는 깊은 양심의 가책으로 회개하며 지팡이를 주우며 예수의 십자가의 요체인 ‘사랑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는 포사이드 선교사의 모습에서 예수를 보았으며 동시에 예수의 영, 사랑의 영에 사로잡혔다. 그는 포사이드 선교사를 통하여 일제의 억압과 망국의 한에 시달리는 가난하고 불쌍한 한국인들의 예수로 살아야하는 운명을 메시지로, 계시로 받았다. 그 후, 그는 윌슨 선교사의 보조자로서 기꺼이 나환자 치료에 헌신하였으며 1912년에는 자신의 땅 1,000평을 기증하여 봉선리에 나환자 치료소(광주 나병원의 효시)를 세웠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나환자 전문병원이었다.
그는 1912년 8월에 김윤수 집사와 함께 광주 최초의 장로로 임직 되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에 의하면 양림리교회가 신도가 점차 증가하여 북문 내에 예배당을 기와집을 짓고 김윤수와 최흥종을 장로로 장립하여 당회를 조직하였다.19)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봉선리에 나환자들의 교회를 우월순 선교사, 이만준 등과 함께 설립하였으며 3년 동안 봉선리 골짜기에 세워진 진료소에서 나환자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며 복음을 전하였다. 20)
1914년 그는 뜻한 바가 있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여 제때에 졸업하지 못한 상태에서 1919년을 맞이하였다. 그는 남대문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1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서대문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그는 1920년 6월 출옥하여 광주청년회와 광주 기독교청년회를 창설하였다.
그는 1920년 9월 4일 양동교회에서 회집된 전남노회에서 신학교 계속 수학을 허락받고 21) 같은 해에 학업을 마쳤다. 마침내 그는 1921년 1월에 신학준사를 인허를 받고 광부 북문외교회 노라복( Robert Knox) 선교사의 동사위임목사로 청빙을 받았으며 남문외예배당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921년 10월, 전남노회 임시노회가 그를 시베리아 선교사로 추천하여 1922년 9월 10일 11회 장로회 총회에서 김현찬과 함께 시베리아 선교사로 선정되었다.22)
1년 만에 시베리아에서 돌아 온 그는 남문밖교회에서 시무하였고 27년에 다시 시베리아 선교사로 떠났으나 소련 정부에 의해 곧 바로 추방을 당하였다. 그 후 그는 제주도 모슬포교회를 거쳐 광주중앙교회에 시무하였다.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와 교단들이 휘청거리는 1935년부터 그는 목회를 접고 은둔과 기행을 일삼았다.
1935년에 거세 수술을 받고 호를 5가지를 놓아 버린다는 뜻의 ‘오방(五放)’으로 짓고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가사로부터 방만(放漫), 사회로부터 방일(放逸), 경제로부터 방종(放縱), 정치로부터 방기(放棄), 종교로부터 방랑(放浪) 으로 시대에 저항하는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다. 그리고 오방(五放)으로 해방 된 자로 주께서 사랑하는 작은 자들을 섬기는 일에 집중하였다. 1937년 그는 어수선한 시국 속에서 자신의 사망통지서를 지인들에게 발송하였다. 그리고 ⌜성서조선⌟에 ❮교역자의 반성과 평신도의 각성을 재촉함❯를 기고해 목회자들의 타락을 비난하며 평신도들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또한 자칭 ‘유산각’이라 부르는 조선의 가마 모양과 같은 한 평 크기의 판잣집을 수레처럼 만들어 끌고 다니며 걸인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23)
해방 이후에 나환자들을 위해 무등산 신림교회를, 결핵환자들을 위해 무등원교회를 설립하였으며 1966년 5월 14일 86세를 일기로 소천하여 5월 18일, 그가 사랑했던 나환자들, 결핵환자들과 걸인들의 오열 속에서 ‘광주사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는 실로 광주선교부의 최초 개종자, 최초의 세례자, 최초의 집사, 최초의 장로였으며 한국인으로서 북문외교회의 최초의 당회장 목사였으며 전남노회의 최초 시베리아 선교사였다. 그는 우월순의 조수가 되어 나환자를 치료한 한국인 최초의 보조 의사였으며, 한국 최초의 나병원 건립을 위해 부친에게 물려받은 유산을 바친 자였으며 나환자 교회를 세운 최초의 목회자였다.
그는 교회와 사회와 나라를 구분하지 않고 일체로 파악하였으며 삼위일체를 위한 섬김에 자신을 온전히 관제로 부었다.
다음은 그의 삶을 격동시킨 작은 자들에 대한 그의 관심을 살펴보려 한다. 그는 회심 이후, 교회목회와 함께 사회적 약자인 나환자, 결핵환자, 걸인들의 치유와 자립을 위한 활동에 집중하였다.
사회 복지활동가로서 최흥종의 구라치료 및 빈민운동
그는 1909년 4월, 포사이드 선교사의 광주 제중원 방문 이후, 나병 진료를 시작한 우월순 (Wilson, Robert Manton) 선교사의 조수가 되어 회심의 모티프가 되어준 나환자들을 섬기며 구라(救癩)활동을 시작하였다. 1911년에는 광주 봉선동의 땅 1,000평을 광주 선교부에 무상으로 기증해 한국 최초의 나병원 설립(1912년)에 참여하였다.
그가 시베리아와 모슬포에서 사역하며 광주에 부재한 사이에 나병원은 광주 시민들의 항의로 여수반도 끝자락에 있는 율촌 마을로 내려가 ‘애양원’이 되었다. 그러나 ‘애양원’에서 치료 받은 환자들이 생활고로 말할 수 없이 많은 고난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이후로는 사회 및 정치 사업에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금일로 나환자들과 함께 하겠다.” 24) 고 자신의 소회를 밝히고 모슬포교회를 사임하였다.
그는 나환자들의 치료와 재활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고자 즉시로 활동을 시작하여 1932년에는 윤치호, 조병옥, 송진우, 김병로, 안재홍 등과 ⌜나환자 근절협회⌟를 만들어 서울에서 모금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성과가 좋지 않자 서울 환자들을 데리고 여수 애양원으로 내려왔다. 그 후, 나환자들의 병원 증원과 수용 시설 확보를 위해 ‘나환자 행진’이라는 비상의 수단을 강구하여 움직이지 않는 총독부를 압박하였다.
그는 1932년에 광주에서 나환자 150명을 이끌고 총독부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들이 열하루 만에 경성에 도착하였을 때 나환자 시위대는 400명에 이르렀다. 그는 환자들과 함께 총독부 앞마당까지 들어갔고 우가끼 총독을 면담하여 ‘전국 나환자 집단수용시설’과 ‘치료시설’을 요청하여 그로부터 소록도 재활시설 확장에 대한 확답을 받았다. 이것이 그 유명한 ‘나환자 대행진’이다. 25)
그가 나환자 시위대를 이끌고 경성에 가서 총독과 담판을 하고 있는 사이에, 광주 양동 주민들의 항의로 양동 장터에 있던 빈민촌 판잣집들이 철거되어 2백여 명의 걸인들이 순식간에 거리로 쫓겨났다. 최흥종은 즉시 경양 방죽가에 임시 거처를 만들어 걸인들을 수용하고 북문밖교회 교인들과 YMCA 회원들을 동원하여 구휼을 시작하였다. 구제 소식이 널리 퍼지자 전남 각지에서 걸인들이 광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광주 사람들의 비난이 거세졌고 노회와 광주 교인들 또한 그의 ‘빈민 목회’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비난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26)
가족들은 더 이상 그에게 가장의 역할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제도권 교회들도 그를 경원시하게 됨에 따라 그는 그의 호 ‘오방(五放)’대로 자유로운 삶을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후, 목포에 머물며 나환자 구호활동에 전력투구하였으며 일제 말기에는 무등산 증심사 골짜기에 칩거하며 나환자, 결핵환자, 빈민, 걸인들을 위한 활동에 몰입하였다.
해방이 되는 해, 1945년 9월에 ‘한국나병예방협회’를 창립하였으며 1948년에는 증심사 입구에 빈민자활촌 ‘삼애원‘과 ‘삼애학교’를, 1956년에는 음선나환자정착촌 ‘호혜원’을, 1958년에는 결핵환자 요양소인 ‘송등원’을 설립하였으며 결핵환자 치유를 위한 ‘백십자여명회’를 만들었고 1951년에는 한국사회사업회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최초로 나환자 치료를 시도한 광주나병원의 우월순 선교사의 최초 보조 의사였다. 그는 나환자의 자립과 재활, 그들의 삶의 질과 복지를 위해 활동한 최초의 사회복지 활동가였으며 최초의 나환자 교회, 결핵환자 교회를 세운 사회 사업가였다.
그는 사회주의자들보다 더 치열하게 사회적 약자, 병든 자, 가난한 자들의 생명과 존재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낮은 자리에서 묵묵히 섬겼다.
그는 장로로 임직 받은 이래로 이십여 년의 섬김과 목회로 방만해진 자신을 성찰하며 ‘오방’ 선언으로 영적혁명을 시도하였으며, 폭력 혁명이나 타도, 이념 학습이나 대립과 충돌이 아닌 자유와 포기를 통해 오는 사랑으로 작은 자들과 함께 사는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도모하였다. 그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초월한 세상을 이룩하고자 나환자들 속에 성육신하였다.
마지막으로 그의 또 다른 면모인 사회운동가로서 삶을 살펴보자.
사회 운동가로서 최흥종의 독립운동과 정치참여
최흥종의 독립운동과 정치 참여는 신앙고백의 연장이었다. 그는 일본의 부당한 폭력과 수탈에 하나님의 정의로 대항하였으며 때로는 치열한 투쟁으로 때로는 침묵과 은둔의 방식으로 시대를 심판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그는 서병기와 함께 대도의사회를 조직하여 광주지역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그는 광주의 3.1운동 거사 준비를 북문안 교인들과 YMCA 청년 등에게 모의하도록 주선하고 자신은 고종의 국장(國葬)에 참석하고자 상경하였다. 그는 3월 2일 전도사인 김필수, 김철과 함께 서울에서 김범수를 만나 광주지역 만세시위를 협의하였으나 광주에 내려가지 않고 3월 5일 남대문 역전에서 인력거에 ‘조선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불렀고 ⌜신조선신문⌟을 나누어 주며 연설하였다. 이어 대한문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6월, 출옥 후 문맹퇴치와 계몽활동을 위해 YMCA를 창립하여 배움에 목마른 청소년들을 위해 야학을 실시하였으며 유치원을 설립하고 여성만을 위한 야학을 따로 개설하였다.
1920년대에 그는 고통 속에서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로 치열한 투쟁을 벌이는 농민과 노동자의 생활과 인권 문제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1920년 8월, 그는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23년에 ‘광주소작인연합회’ 대표와 ‘광산회’ 총무로 그들의 소리를 대변하였다.
광주 지역사회는 매사에 사심 없이 정성을 다하는 그를 1921년 9월에 ‘광주청년회 의사원’으로, 1925년에 광주수해구제회 위원으로, 1926년에 광부여고보창립기성위원으로 선출하였다.
1927년 10월에 신간회 광주지회장으로 선출되어 항일운동을 재개하였다. 또한 동시에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마약퇴치운동, 금주-금연운동, 공창 폐지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에 재만동포옹호동맹위원, 1928년 광주교육보급회 이사와 광주철도기성회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어 광주는 물론 멀리 만주동포에 이르기까지 두루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그는 1930년대 중반에 호를 오방(五放)이라 짓고 자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호세아처럼 뜨거운 눈물로 사랑하던 교회와 사회와 나라를 위한 치열한 섬김과 개혁운동을 돌연히 중단하였다. 그는 나환자, 걸인, 결핵환자들만 옆에 두고 일체를 버린 채 무등산 증심사에서 해방의 날까지 은둔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마자 그는 좌익과 우익 세력의 추대로 전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추대되었고, 미군정청고문회 회장이 되었으나 이내 사임하였다. 1948년에 호남신문사 초대사장에도 취임하였지만 곧 사임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정치계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광주 YMCA를 재건하였으며 삼애학교와 축산전문학교를 설립하는 등 작은 자들에게 필요한 일에 마지막 정열을 쏟아 부었다.
1880년에 태어난 최흥종은 시퍼런 청년의 시기에 대한제국이 망하는 과정을 지켜 본 자였다.
그의 내부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망국 청년의 상한 마음, 좌절과 의분이 있었고 한 편으로는 그것을 넘어서는 성육신한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 사랑이 있었다. 두 마음과 생각은 서로 충돌하면서도 공존하며 그로 하여금 망설임 없이 나라 전체를 교회로, 선교의 장으로 섬기도록 인도하였다.
그는 상한 심령, 열망과 기도로 국채보상운동, 구라(求癩)운동, 3.1만세 운동, 야학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금연과 금주 운동, 공창 폐지운동에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간회, 전남건국준비위원회, 미군정청고문회, 호남신문을 통하여 정치사회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회 참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현하는 목회의 연장선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자리나 위치, 명예와 영광에 연연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자유롭게 물러섰으며 미련이 없었다. 그가 1909년 4월 포사이드 선교사를 만나 회심을 한 이래 그는 한국의 예수, 호남의 예수로서 가장 작은 자, 나환자, 결핵환자, 걸인 그리고 빈민들과 함께 살도록 운명 지워 있었던 것이다.
미래를 품은 과거
시공을 넘어선 영적 만남, 불꽃 튀는 만남의 이야기는 우주적인 공명을 일으킨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한국에 거주하였으나 백십 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리스도를 찾는 사람들에게 전율과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한지 몇 개월이 안 되어 강도에게 머리와 목의 부상을 입어 죽을 고비를 겪었으나 강도를 용서하였다, 그리고 몇 년 후, 강도로 인한 부상을 치료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광주행 길에서 만난, 썩어 문드러진 나환자를 서슴없이 가슴에 안고 병원으로 데리고 와 병자를 치료한 최초의 의사가 되었다. 격의 없는 그의 사랑이 전주 지역에서는 호남의 전설, 전주지역의 문화유산이 된 이보한, 이‘거두리’를 낳았고, 광주에서는 호남의 성자, 오방 최흥종을 낳았다.
이보한과 최흥종에게는 그에게 받은 공통된 영적 유전인자가 있다. 첫째는 두 사람 다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을 회심으로 경험한 것이다. 둘째는 그들은 유교사회의 가부장적 기득권과 가치관을 벗어 버리고 스스로 낮은 자리로 내려간 것이다. 셋째 그들이 골고다 사랑의 아픔으로 작은 자들을 주목한 것이다. 이보한은 걸인과 나무꾼, 품꾼들을 주목하였고 최흥종은 나환자, 걸인, 결핵환자를 주목하였다. 넷째 그들이 사랑을 위하여 제도권 교회 안에 머무르지 않고 미련 없이 제도권 밖으로 나온 것이다. 다섯째 기도와 끓는 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여섯째 작은 자들을 목적화, 대상화 시키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의 자녀로 함께 산 것이다.
포사이드 선교사는 한국에서 얻은 풍토병으로 비록 4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낳은 영적인 자녀들이 그의 하나님 나라 사역을 이어받았다. 지금도 그의 바통을 이어받은 누군가가 어디에선가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이보한처럼, 최흥종처럼 살고 있을 것이다.
참으로 한국 근대사 첫머리에 나오는 포사이드 선교사는 위대하였다.
2021.8.20.금
우담초라하니
미 주
1) 전병호 저 ⎾이야기 전킨 선교사⏌, 379쪽
2) 전병호 저 ⎾이야기 전킨 선교사⏌, 372쪽
3) 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 96쪽
4) 전병호 저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0, 381쪽
5) 블로그 행복한 김PD가 2014년 1월 23일에 올린 이거두리를 아시나요? 에는 북문 안에 살 고 있는 이보한의 큰 아버지인 이건호가 포사이드에게 왕진을 요청한 것으로 나온다.
6)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 저, 한인수 역 ⎾호남 선교 초기 역사 1892-1919 ⏌, 68쪽
7) 전병호 저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8 쪽
8) 전병호 저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2 쪽
9) 전병호 저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2 쪽
10) 블로그 ⎾ 쏠쏠한 일상⏌에서 인용
11) 전병호 저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3 쪽
12) 전병호 저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4 쪽
13) 전병호 저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4 쪽
14) 전북일보 2019년 12월 4일, ❮전주 최초 고아원 터, 이거두리 이야기, 미래유산 지정❯
기사에 나오는 동아일보 1931년 10월 3일자 신문
15) 차종순 저, ⎾양림교회 100년사 (1) ⏌, 215쪽
16) 차재명 원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330쪽
17) 차종순 저, ⎾양림교회 100년사 (1) ⏌, 215, 216쪽
18) 차종순 저, ⎾양림교회 100년사 (1) ⏌, 216, 217쪽
19) 차재명 원저,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175쪽
20) 양전백, 함태영, 김영훈 원저, 이교남 번역, 박용규 편집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307쪽
21) 같은 책, 521쪽
22) 같은 책, 75쪽
23) 문명호 정리 ⌜한국기독교장로회 광주양림교회 역사세부설명⌟, 23쪽
24) 인터넷, 나무위키 ⌜최흥종⌟
25) 연규홍 저, ⎾양림교회 100년사⏌, 54쪽
26) 같은 책, 54쪽
참고서적
전병호 저 ⎾이야기 전킨 선교사⏌, 382 쪽
조지 톰슨 브라운 저 ⎾한국 선교 이야기⏌, 동연, 2010
송현강 저 ⎾미국 남장교의 한국 선교⏌,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
애너벨 메이저 니스벳 저 ⎾호남 선교 초기 역사 1892-1919 ⏌, 도설출판 경건, 1998
차종순 저, ⎾양림교회 100년사 (1) ⏌, 양림교회 역사편찬위원회, 2003
연규홍 저 ⎾양림교회 100년사⏌, 한국기독교장로회 양림교회, 2007
차재명 원저, 이교남 번역, 박용규 편집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 한국기독교사연구 소, 2017
양전백, 함태영, 김영훈 원저, 이교남 번역, 박용규 편집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 한국기독교사연구소,
문명호 정리 ⌜한국기독교장로회 광주양림교회 역사세부설명⌟, 양림교회, 2019(비매품)
인터넷 (둘로스 블로그/ 쏠쏠한 일상 블로그/ 행복한 김PD/ 지식백과 향토문화전자대전)
인터넷 백과사전, 나무위키 ⌜최흥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