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모임 8주차
연설
최근 평창 올림픽에서 빙상연맹의 한 간부의 행동이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 경기를 앞두고 컨디션 조절을 위해 준비하고 있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를 비롯한 다수의 선수들을 불러 아침 8시부터 일장연설을 했다는 것이었다. 기자의 말에 의하면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들은 경기 전 컨디션을 최상으로 맞추기 위해 기상시간 또한 경기 전 몇시간 전으로 조절한다고 했는데, 이 간부의 연설을 위해 컨디션 조절을 실패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었다. 물론 그날 경기에 나선 이상화선수는 그때 이미 깨어있었으며 아침에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이 경기결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고는 말했다. 하지만 사실 국민들이 그러한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빙상연맹의 그동안의 실수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우리가 그동안 겪었던 수많은 일장연설의 경험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연설이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주장 또는 의견을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발표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연설은 자신의 의견을 통해 청중을 설득하는 것 또한 포함한다는 것이다. 청중의 행동이나 의견을 자신 쪽으로 가져오는 것이 연설의 가장 큰 목표이다. 일반적으로 지도자들이나 높으신 분들이 대중들을 설득해서 의견을 하나로 모으거나 바람직한 쪽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 연설을 사용한다. 대통령이나 장군들 혹은 한 무리의 지도자들은 기본적으로 높은 연설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좋은 연설을 보고 자라왔다. 저 멀리 미국의 게티즈버그 연설에서의 링컨의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문구는 지금까지도 민주주의를 가장 간결하게 요약한 말로 아직까지 전해진다. 또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도 꿈이 있습니다.”의 말은 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하고 여러 유명인들이 연설에서 인용하는 경우도 많은 유명한 문구다. 또한 멀리 갈 필요 없이 전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은 솔직하고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내용과 연설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안 좋은 쪽으로 본다면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능력과 영향력이 우리 인류에 끼친 악영향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히틀러 자신의 뛰어난 연설능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을 미혹시켜 끔찍한 2차대전까지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영화 ‘킹스 스피치(2011)’에서의 조지 6세가 왕이 되고 연설을 위해 말더듬이를 고치려 그렇게 노력하는 것을 보면 지도자에게 있어 연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 수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주변에 지도자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학창 시절에 교장 선생님들의 연설을 기억해 보자. 입학식 개학식 체육대회 방학식 등 모든 식들마다 학생들을 운동장에 줄맞춰 세워놓고 30여분이나 말을 이어나가던 기억을 다들 하나이상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필자 또한 그 시절 몸과 정신을 분리하여 정신만을 딴 곳으로 보내는 유체이탈의 능력을 처음으로 습득했었다. 학창시절이 끝났다고 해서 우리가 연설을 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회사에서 상사가 부하직원들을 불러놓고 일장연설을 한다거나 명절에 친척어르신들이 공부와 취업과 결혼에 대한 기나긴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정신이 아득해지곤 한다. 또한 친구들조차 가끔 술자리에서 술값을 낸다는 핑계로 자신의 의견을 가득 늘어놓는 연설을 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들은 알다시피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못된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높은 정신수준을 가진 것 또한 아닐 것이다. 고민도 하고 실수도 하고, 무언가 잘못도 저지르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너도 나도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있으신 그 사람들도 모두 평범한 사람인데 가끔 우리는 다른 사람을 좋은 쪽으로 바꾸어야한다는 사명감에 휩싸이고 말아 그런 의미도 없는 연설을 하고 마는 것이다.
상황과 장소를 고려하지 못한 연설은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연설이 아닌 소통과 대화가 훨씬 더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