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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장 16-21절. 화목케 하는 직분을 감당합시다. 요약설교
16-17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내용입니다.
16절.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러므로
1.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므로>란 뜻입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유대 나라의 통치에 대항하다가 민족 반역자로 처형당한 죄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복음서에 잘 말씀한 대로,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육신적인 안목으로 예수님을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실제로 예수님을 영적인 안목으로 보아야 올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도 바울을 육체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2. 바울의 대적자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이고, 예루살렘 교회 출신이고,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은 사람이라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원래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고, 예수님 살아생전에 예수님을 따라다니지도 않았고,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로부터 받은 추천서도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런 육신적인 안목으로 보아서는 안 되고, 영적인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영적인 안목으로 바울을 볼 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이고, 이방인의 사도로 파송 받은 사람이고, 성령님께서 능력으로 들어 사용하시는 사람이고, 많은 사람을 전도해서 교회들을 세웠고, 하나님 말씀을 기록한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오늘날은 이처럼 바울이 위대한 사도인 것을 다 믿지만, 당시에 고린도 교회의 반바울파 사람들은 바울을 이렇게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1. 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후부터는 사람을 육신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육신적인 잣대로 판단하여, 반드시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유대 나라 지도자로서 반국가적인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해, 예루살렘 교인들을 잡아 가두고, 스데반을 죽이고, 교회를 파멸하고, 유대 나라 밖에 다메섹에까지 가서 기독교인들을 박멸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 자신이 예수님을 믿고 보니 이제는 기독교인들이 너무나 귀중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당시에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던 노예일지라도, 예수 믿는 사람은 너무도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말씀한 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적인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나 여자, 자유인이과 노예라는 차별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26-28.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골로새서 3:9-11. 너희가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느니라.
2. 어린아이들은 내가 돈을 3만 원 가졌다고 자랑하고, 5만 원 가졌다고 자랑하지만, 수천억을 가진 부자 앞에서는 그런 몇만 원 차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위대한 신분 앞에서는 세상에서 자유인이건 노예라도 별다른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는 1층 집과 2층 집이 차이가 나고, 더구나 수 십층 빌딩은 엄청나게 커 보이지만,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보면, 다 거기서 거기로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적인 차별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즉 세상에서 자유인과 노예라는 커다란 차별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자녀라는 신분 앞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 세상적으로 예수님은 나사렛 촌 동네에서 출생하신 분이시고, 당시에 가말리엘 대학교도 나오시지 않았고, 유대 나라에서 말단 공무원도 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유대 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하고 있던 바울은 예수님을 하찮은 사람으로 알았고, 예수님을 이단적인 종교집단의 지도자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2. 그러나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본 후로는 더 이상 예수님을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와같이 바울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을 세상적인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평가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오네시모였습니다.
즉 과거에 주인의 것을 도적질하고 도망한 노예 오네시모를 바울은 예수 안에서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고 새롭게 평가했습니다.
빌레몬서:16.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3. 그래서 지금도 공직 사회에서는 상관과 부하라는 차별이 있고, 사회에서는 주인과 직원이라는 차별이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믿음의 형제요 집사님이요 장로님이요 권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4. 그 대표적인 예가 금산교회 조덕삼 장로와 이자익 목사입니다.
전북 금산에 있는 금산교회에 찾아가면 큰 감동을 받습니다.
1908년에 건축된 ‘ㄱ’ 자 형태의 목조 예배당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 교회는 진한 감동을 주는 미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한국 선교 초기에 전라도 지역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 구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인천을 떠나 군산으로 들어왔고, 전북과 전남 지역에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때 이야기입니다.
전북에 처음으로 들어온 데이트(L.B. Tate: 최의덕) 선교사가 사냥을 나왔다가 두정리 마을의 지주 조덕삼을 만났습니다.
부자인 조덕삼(1867~1919)은 서양 손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잘 대접했는데, 선교사는 고마워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부터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된 조덕삼은 주일마다 말씀을 듣기로 하고, 사랑채를 내주었습니다.
결국 조덕삼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여 신자가 되었고, 그의 마부 이자익(1882-1959)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 지역은 큰 절이 있어서 주민들 대다수가 불교 신자였지만, 교인이 많아지면서 금산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조덕삼은 창립 교인이 되었고, 지금도 그 때 예배당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조덕삼과 그의 마부였던 이자익의 관계가 특별합니다.
이자익은 경남 진해에서 형편이 어렵게 살았는데,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밥도 굶을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전라도 곡창 지대로 가면 밥은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먼 길을 걸어 김제까지 왔고, 마음씨 좋은 조덕삼 부자를 만나서 그의 마부가 되었습니다.
이자익은 그의 총명함과 성실함이 주인의 마음에 들어서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주인 조덕삼의 아들 조영호가 천자문과 한글을 배울 때, 이자익도 그의 어께 너머로 혹은 창 밖에서 보고 들으며 글을 터득했습니다.
조덕삼과 이자익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서, 1902년 가을에 함께 세례를 받고, 얼마 후에 집사직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1909년에는 금산교회가 최초로 장로 1인을 투표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교인들과 동네 사람들은 조덕삼 씨가 장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엉뚱했습니다.
즉 교인들이 이자익을 장로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조덕삼 집사는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이자익을 장로로 섬겼습니다.
그러자 교인들과 지역 주민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소작농이나 머슴은 비천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양민과 천민의 신분 구별이 철저했던 때였지만, 교회에서는 그런 차별이 없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에는 교역자들이 부족한 때라서, 선교사들이 오지 않으면, 이자익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자익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해도, 조덕삼 집사는 앞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조덕삼 집사의 믿음과 헌신과 겸손은 선교사들과 교인들과 지역사회의 칭송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테이트 선교사와 조덕삼 집사는 이자익 장로가 비록 머슴이었지만,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사람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는 이자익 장로에게 신학을 하도록 추천하고, 조덕삼 집사는 학비를 지원해서 이자익이 1910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자익은 5년 만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조덕삼 집사는 장로가 되어, 이자익 목사를 자기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래서 조덕삼의 머슴 신분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이자익은 조덕삼 장로가 시무하는 금산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조덕삼 장로의 신앙 인격은 참 성경적인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자익 목사의 신실한 목회와 덕스러운 생활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는 1924년 13회 총회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 되어서, 조선의 모든 교회들을 지도했습니다.
해방 이후로도 일제 강제 점령기 때 무너진 교회들을 재건하려면 이자익 목사의 지도가 필요하다고 해서, 이자익 목사는 1947년(33회)과 1948년(34회)에도 총회장을 맡았습니다.
이처럼 이자익은 세 차례에 걸쳐서 총회장을 맡았던 특별한 분입니다.
이와같이 비천한 이자익이 하나님의 종으로 크게 쓰임 받은 배후에는 믿음의 좋은 후원자인 조덕삼 장로가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 역사연구원장 김수진 목사는 “머슴 이자익이 목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실한 신앙뿐만 아니라 훌륭한 인격자였던 조덕삼 장로의 사랑과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그 후로 조덕삼 장로의 아들 조영호 씨도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손자 조세형 씨도 금산교회 장로가 되었으며, 그는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3대가 금산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서는 주인과 머슴이라는 절대적인 차별이 있었지만, 예수님 안에서 교회 안에서는 역전된 모습을 그대로 인정한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 조덕삼 장로의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 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세상에서는 차별이 많지만, 예수님 안에서 육신을 따라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평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서로 존경하고 귀하게 여기시기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1. <피조물>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존재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연계도 창조하시고, 동물과 식물도 창조하시고, 인간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천사들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는 타락한 인간을 소재로 해서, 예수님 믿게 함으로써,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창조하신 제2의 창조물입니다.
이 새로운 피조물인 하나님의 자녀는 이전의 인간과 다르고, 천사와도 다른, 전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요한복음 3장 5절에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인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가 바로 여기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녀는 육신의 눈으로 보면, 옛사람과 똑같지만, 종말에 부활하게 되면, 완전히 그 형태가 달라질 것입니다.
즉 예수 믿은 하나님의 자녀는 부활 천국에서 영생토록 행복한 생활을 하는 존재가 되고, 예수 믿지 않은 불신자는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히 불행하고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서 고생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 바로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2. <누구든지>라는 말씀은 자유인이든지 종이든지, 남자든지 여자든지, 유식한 사람이든지 무식한 사람이든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누구든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 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적으로 누구든지 차별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3:26-28.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골로새서 3:9-11.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이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새로운 피조물인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1. <새것이 되었다>는 말씀은 예수 믿은 후의 사람은 예수 믿기 이전 사람에서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나오기 전의 사람과 교회 나온 후의 사람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교회 나오면 어색하고, 불신자 친구들을 떨쳐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교회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자연히 세상 친구들이 멀어집니다.
왜냐하면, 세상 친구들은 주일날 놀러 가서 술을 마셔야 친구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면, 주일날 세상 친구와 어울려서 놀러가지 못하고, 또 술을 안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상 친구들과는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친구들은 술 아니면 친구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술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술을 먹지 않고는 세상 친구와 사귈 수 없습니다.
술친구들은 술은 안 먹고 안주만 먹는 사람을 제일 보기 싫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술 먹지 않고 교회 다니면 자연히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친구도 교회 친구가 새롭게 생깁니다.
이처럼 예수 믿으면,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2. 이처럼 세상에서도 예수 믿으면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데, 막상 세상 끝에 가면, 천국 가는 사람과 지옥 가는 사람으로 완전히 갈라서게 됩니다.
즉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천국 가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고, 예수 믿지 않는 불신자는 지옥 가서 마귀와 함께 죽을 고생을 하게 됩니다.
3. 나라도 예수 믿는 나라와 예수 믿지 않고 우상 숭배하는 나라가 서로 완전히 다릅니다.
원래 세상 나라들은 자유인과 노예의 신분 차별이 오랫동안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링컨이 예수님을 진실히 믿고 대통령이 되어서, 노예 해방 운동을 했습니다.
이 노예 해방 문제로 미국은 남과 북이 전쟁을 했습니다.
결국 링컨의 군대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노예 해방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자유인과 노예의 차별이 없어졌고, 남녀의 차별도 없어졌습니다.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도 양반과 상놈의 신분 차별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평가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안목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 존경하고, 서로 돕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18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1.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첫 창조를 하셨을 뿐만 아니라, 둘째 창조인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신 것도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창조하셨다는 말씀입니다.
2. 그래서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처음 창조하시고 섭리하신 것을 <일반창조>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창조하시고 특별 섭리로 돌봐주시는 것을 <특별창조>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일반 창조도 하셨고, 특별 창조도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일반 자연법칙도 잘 지켜야 하겠고, 특별법칙인 하나님의 말씀도 잘 지켜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특별법칙과 기적만 바라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일반창조 법칙과 자연과학을 무시하는 잘못된 신자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불신자들은 일반창조와 과학 법칙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특별 창조하신 것과 특별법칙인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섭리하신 홍해 기적이나 예수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같은 기적 사건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일반법칙도 잘 지켜야 하고, 하나님의 특별법칙인 성경 계시의 말씀도 잘 믿고 지켜야 하고,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신 천지창조나 인간 창조나 노아 홍수나 홍해 기적이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이나 오병이어의 기적도 믿어야 하겠고,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이나 물 위로 걸으신 기적이나 많은 병자들을 고치신 기적이나 귀신을 쫓아내신 기적들을 믿어야 하겠고,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를 감동하시면서 천국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원래 우리 인간은 아담과 하와 때로부터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에게 임하여 있습니다.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래서 우리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 속에서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모두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모두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3.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5장 18절의 말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자기와 화목케 하셨다”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4. 바울 사도는 개인적으로 이런 체험을 극적으로 했습니다.
즉 바울은 믿기 전에 예수님을 핍박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진멸하려고 한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을 하나님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즉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백번 죽어도 마땅한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받고, 이방인의 사도까지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극적으로 하나님과 화해한 생생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고린도후서 5장 18절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기와 화목케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고, 이 화목의 기쁨과 은혜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게 하셨습니다.
2. 이것은 바울에게서 분명하게 체험된 사건이었습니다.
즉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를 체험하고, 이어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했습니다.
3. 이러한 체험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를 체험하게 하시고, 나아가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해서,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를 체험하도록 전도하는 것입니다.
4. 이처럼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이 그만큼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고 전도할 수 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7장 47절에서 예수님은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성 여인은 예수님이 자신에게 영원한 생명수를 주시는 메시아이심을 믿고, 즉시 동네에 가서 전도했습니다.
바울 사도도 예수님과 교회를 핍박하던 큰 죄인이 그 큰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자기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순교하면서 죽기까지 예수님께 헌신 충성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도행전 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5.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은 그만큼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 충성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적게 체험하고 적게 감사하는 사람은 그만큼 적게 충성합니다.
일주일 동안 매일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시고, 맡은 직분에 충성하시고, 이웃 사람에게 선을 행하면서 전도하는 성도님들은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해서 그러신 줄 압니다.
6. 그런데 주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칭찬과 상급을 주시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책망하신다고 했습니다.
잠언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마태복음 25장에는 다섯 달란트 받아서 다섯 달란트를 남긴 사람에게는 칭찬과 상급을 주시고, 한 달란트 받아서 묻어둔 사람은 책망과 처벌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5: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마태복음 25:30. 이 무익한 종(한 달란트 받았던 종, 악하고 게으른 종) 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믿고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신 것을 하나님께 지극히 감사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고 은혜를 베풀어서 예수 믿게 하심으로써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잘 감당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9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1.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범죄 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은 절대로 화목할 수 없는 원수지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우리 인간에게 쏟아지고 있는 관계였습니다.
2. 어떻게 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받아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고, 모든 만물을 인간이 다스리도록 주셨는데,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마귀를 추종하고 마귀의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마귀가 뱀을 통해서 선악과를 먹으라고 한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3. 그러자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우리 인간에게 퍼부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담은 땀을 흘리고 고생해야 먹고 살게 되었고, 하와는 죽을 고생을 해야 아기를 낳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도 저주를 받아 가만두면 가시덤불이 온 땅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속죄의 피가 아니면, 영원한 지옥 형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마귀와 함께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4.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원수 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다시 한번 생명의 길을 마련해주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저주와 죽음의 형벌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이사야 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지옥에서 영생 천국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할렐루야!
5.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목을 하셨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원수 된 것을 용서받고 화목케 되었습니다.
6. 산에서 산불을 만나면, 불에 타서 죽게 됩니다.
그러나 저기서 산불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미리 자기 주변에 산불을 내면, 산불에 타서 죽지 않습니다.
즉 미리 바람의 방향을 보고, 자기 주변에 산불을 질러서 산불이 타고 지나간 자리에 들어가 있으면, 저쪽에서 불어오는 산불에 타서 죽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하나님과 화목하여 지옥에서 영생 천국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따라 죽이지 않으시고, 화목의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죄와 지옥 형벌을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 믿고,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에서 벗어나, 화목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자기 간증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화목의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2. 저도 예수 믿기 전에는 제가 가장 착한 사람인 줄 알았지만, 복음의 말씀을 듣고, 성령님의 감동을 받음으로써, 얼마나 내가 죄인인 것을 절감하고 몇날 며칠 동안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그 은혜와 사랑이 너무도 고마워서 눈물로 눈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가 고마워서 평생을 주님께 드리기로 헌신했습니다.
3. 이처럼 간증식 복음 전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무리 구원의 말씀을 하셨어도, 사람들은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고 하나님이시므로, 그 복음의 말씀을 실감있게 잘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죄인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하고 간증하면, 사람들이 실감있게 듣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의 복음을 천사들에게 부탁하시지 않으시고, 화목을 체험한 우리 인간에게 부탁하셨습니다.
3. 과부의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깡패가 예수님 믿고 전도하면, 깡패 전도가 잘 됩니다.
창녀가 예수님 믿고 전도하면, 창녀가 잘 믿습니다.
병자가 예수님 믿고 고침받아서 전도하면, 똑같은 병자가 전도를 잘 받습니다.
4.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도 자기 같은 죄인 괴수가 용서받고 구원받은 것은, 후대에 바울 같은 극악무도한 죄인도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표본이 된다고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15-16.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5. 이번에 우리 교회에서 전도 집회를 했는데, 집회 강사가 진맥도 안 하고, 사람의 병을 보고 다 안다고 하니까, 처음에는 사람들이 안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집회를 통해서 강사님이 교인들을 보기만 하고서도, 그 질병 상태를 일일이 말해주니까, 어떤 분은 놀라서 울기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즉 어떤 젊은 집사님은 아기를 갖고 싶어도 못 가져서 너무나 불행했는데, 강사님이 몸 상태를 설명해주면서 아기를 못 갖고 있다고 지적하니까, 제 앞에서 얼마나 통곡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 후로 이 집사님은 아기를 둘이나 낳았습니다. 할렐루야!
이 전도 집회 때 우리 지역 군수님과 모든 고위 공직자들이 다 오고, 전도 집회가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집회 후에는 강사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새벽에 일어나 물을 두 컵 마시고, 운동장을 도는 것이 우리 지역에 보편화되었습니다.
6. 이처럼 구원의 복음은 천사를 통해서 전하는 것 보다 우리와 같이 예수님을 통해서 죄 용서를 체험하고, 그 은혜에 감격한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천사는 이런 죄 용서와 구원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감동적인 복음 전도를 못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에게 복음 전도를 부탁하신 것이 아니고, 죄 용서를 체험한 우리 인간에게 복음 전도를 부탁하셨습니다.
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복음 전도를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이 복음 전도는 하나님이 위탁하신 것이며,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지상(至上) 명령입니다.
마태복음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복음 전도를 위해서는 병을 고쳐준다든지 돈을 준다든지 선행(善行)이 반드시 선행(先行)되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누가복음 9:1-2.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그리고 이 명령은 성령을 받고 성령을 충만히 받을 때, 실천 가능합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 충만 받고, 주님이 명령하신 복음 전도를 잘해야 하겠습니다.
이 복음 전도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부득불 해야 할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8. 우리는 어떤 약을 먹고 병을 고치게 되면, 그 약을 선전합니다.
우리가 부모님에게 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고 효도하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와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위탁하신 복음 전도를 잘해야 하겠습니다.
9.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때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명 양식을 집 안 사람들에게 잘 나누어주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45-46.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안에서 용서와 구원을 체험한 그 감격을 가지고, 화목의 복음을 전하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재림하시는 주님이 보시면, 칭찬하시고 큰 복을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20절.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러므로
1. “하나님께서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으므로”란 뜻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불신자들에게 하나님과 화목 하라고 전도할 뿐만 아니라, 이미 믿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과 화목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종인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비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종인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비방하므로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 대한 진노가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어서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1.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불신자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전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타오르고 있기 때문에, 장차 지옥 갈 불신자들에게 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화목 하라고 전도한 것입니다.
그래서 1차 전도 여행을 갈라디아 지방에서 했고, 2차 전도 여행을 헬라 지역에서 했고, 3차 전도 여행을 에베소에서 했습니다.
2.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해서 분노하고 계시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어서 하나님과 화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과 불화하고 있습니까?
네, 그것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종인 바울 사도를 향해서 거짓 사도라고 비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이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왜 나를 거짓 사도라고 욕하느냐고 하면서 싸우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향해 진노하고 계시기 때문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어떤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종 모세 비방하기를 너희가 두려워하지 않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화를 내시니까, 미리암은 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민수기 12:8-10.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여호와께서 그들을 향하여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려 눈과 같더라. 아론이 미리암을 본즉 나병에 걸렸는지라.
그 때 모세가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미리암의 나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종 바울을 비방하면,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처벌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진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이지 바울의 처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는 놓아두고,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1.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엄하게 명령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인들이 오해하여 바울이 자기는 옳고 고린도 교인들은 정죄한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했습니다.
2. 이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정죄하는 입장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말하지 않고, <간청한다>(δεόμεθα: we beg you)고 말하고 있습니다.
<간청한다>는 말은 겸손한 마음으로 간절히 요청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를 거짓 사도라고 비난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만, 직접 공격을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겸손히 간청했습니다.
3.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 사도의 겸손한 모습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바울 사도 같이 능력이 많고,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교회들을 설립한 사람은 얼마든지 당당하게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 많은 능력과 업적을 가지고도 겸손히 간청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바울 사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간혹 기도를 많이 해서 신령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바울처럼 겸손하지 않고, 매정하고 혹독한 모습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단 집단에서는 수만 명의 교인들을 거느린 교주가 교만한 태도로 반말을 하고, 욕을 하면서, 교인들을 비웃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 바울 사도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중직을 맡은 직분자일 수록 더욱 겸손하고 성도들을 섬기는 지도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5. 하나님께서는 능력과 은사를 받은 교역자가 교만하면,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교역자는 신유의 은사를 받았고, 수만 명의 대형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학교 교수가 그 교역자를 오해해서 신문에 이단이라고 명예를 훼손하는 글을 실었습니다.
이때 대형교회 교역자는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즉 작은 물고기가 큰 물고기를 시비하고 있는데,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고 상관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때 대형교회 교역자가 깨달은 것은 자기가 그동안 너무나 독선적이어서 주변의 교회들을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단 시비가 붙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대형교회 교역자는 그때부터 다른 교회 교역자들을 초빙해서 설교도 하게 하고, 다른 교회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대개 대형교회가 형성될 때는, 기존 교회 교인들이 수평 이동해서 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이 대형교회 교역자는 모든 교단 목회자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고, 이단 시비가 그쳤습니다.
6.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도 중직자나 어떤 특별한 은사를 받은 분들은 자칫 잘못하면 독선과 오만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많은 달란트를 받고, 중직을 맡은 분들일수록 더욱 겸손히 다른 사람들의 어려운 형편을 이해하고 겸손히 도우시기 바랍니다.
즉 자기의 은사와 직위와 인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보지는 않는가 생각해보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돌봐주시기 바랍니다.
장사하시는 분들도 자기 가게가 잘 되면, 반드시 시기하는 동종 사업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차 문제로도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같은 업종 사람들을 모시고 대접도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선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주변 주민들에게 불편과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시고, 주변 주민들에게 적절한 때에 선물도 잘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 지도자들을 초청도 하고, 약한 교회들을 많이 도와야 하겠습니다.
7. 이처럼 사람과 화목하는 것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불화했으면, 먼저 그 사람과 화목하고 와서 하나님께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이처럼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람들과 화목하는 성도는 모든 일이 평안하고 형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불화하거나 사람과 불화하면, 불안하고 형통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아내(남편)와 불화 한 남편(아내)은 기도가 막히고 예배가 하나님께 상달되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7. 남편들아 이와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말라기 2:13-14.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그러므로 불화하고 싸우느니 차라리 손해를 보고 화목하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6:7.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화목하고 사람들과도 화목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늘 평안하고 형통하시기 축원합니다!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1.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을 죄인으로 삼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근래에 어떤 사람은 커닝을 하지 않았는데, 커닝했다고 거짓 사진을 찍어서, 교수 회의에서 1년 정학을 맞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2. 정말 저도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해보았는데, 얼마나 화가 나는지 모릅니다.
고려 대학교를 나온 후에 저는 ‘고목회’라는 단체에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고목회란 단체에서 고려대학교를 나온 사람으로 목사가 된 사람들의 명단을 신문에 광고했습니다.
그 때 그 신문 명단을 본 어떤 사람이 제 이름이 그 명단에 없다고, 내가 그 대학교를 나오지 않았다고 교인들에게 문자를 모두 보냈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그 문자를 믿고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고목회란 단체가 고려대학을 나오고 목사가 된 사람들의 명단을 여러 명 빠뜨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없이 고목회에 가입을 하였고, 고목회에서 다시 교회로 가입된 사실을 통보해주었습니다.
그 후로 날 의심하던 교인들이 의심을 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죄인으로 몰리면 억울합니다.
3.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죄가 하나도 없는 분이신데, 죄인으로 사형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억울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죄가 없이 뺨을 한 대만 맞아도 분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죄 없이 뺨을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무서운 채찍을 맞으시고, 벌거벗김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찔려 돌아가셨습니다.
이 얼마나 억울하고 가슴 터질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부르짖었습니다.
4.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렇게 죄 없으신 분이 죄인 취급을 당하고 죽으셨습니까?
그것은 물론 유대교 지도자들과 로마 총독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 없는 예수님이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온갖 형벌을 당하시고, 죽음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1. 즉 예수님이 죄인이 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죄가 되게 하시고, 우리를 의가 되게 하신다는 표현은 대단히 강조하여 표현한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이 죄가 되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온통 죄악 덩어리가 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의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온통 의의 덩어리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2. 즉, 우리가 의가 되게 하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의를 조금 소유하면서 산다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말하는 것도 온통 의이고, 우리가 행동하는 것도 온통 의이고,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온통 의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성도들을 얼마나 아름답게 보시는지 잘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청춘 남녀가 서로 사랑하면, 서로에 대해서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말하는 것도 아름답고, 밥 먹는 것도 아름답고, 걸어가는 것도 아름답고, 심지어 하품하고 조는 것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또한 부모가 아기를 낳으면, 아기가 말하는 것도 예쁘고, 밥 먹는 것도 예쁘고, 잠자는 것도 예쁘고, 심지어 똥 싸는 것도 예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성도들을 온통 의로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즉 성도들이 기도하는 것도 의로 보시고, 하나님 말씀 읽는 것도 의로 보시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의로 보시고, 선행하고 전도하는 것도 의로 보시고, 교회에서 예배하고 봉사하는 것도 의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3. 정말 우리는 이러한 안목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모두 의로 보시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의롭게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기가 걸어가다가 실수해서 넘어져도, 부모가 예쁘게 보듯이, 우리는 성도들이 약간 실수하더라도 의롭게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모두 의로 보시기 때문에, 약간 실수한 성도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기보다는 용서하면서 양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보셨는데, 어찌 우리가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8:33-34.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4. 군대 가서 오랫동안 사람 구경을 못한 군인이 첫 휴가를 나와서 청량리에 내리면, 모든 사람들이 내 가족 같고, 모든 여자들이 내 누나나 여동생 같습니다.
그리고 멀리 외국에 가서 한국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족처럼 반갑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반대하는 나라에 가서 기독교인을 만나면, 형제처럼 반갑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성도들끼리 비난하지 말고, 서로를 의의 덩어리로 아름답게 보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5. 바울 사도가 그랬습니다.
아무리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거짓 사도니 도둑놈이니 흉한 말을 하고 비방해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하나님의 의로 본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라>
6. 그렇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이 잘못을 했어도 사랑의 눈으로 감싸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실수했어도,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 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십니다.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항상 기뻐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마귀의 정죄와 공격을 물리치고, 날마다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