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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사골의 찬바람(구례, 순천 , 광양) 7
시간이 점심을 지나고 있다.
화개면소재지에서 정금리로 오르다 우측에 식당이 있다.
"오늘 점심은 운전에 고생을 많이 하는 목사님을 위하여 제가 쏘겠습니다." 김실장의 제안이다.
지금 빨리 올라서 정금리 입구에서 산세를 보고 바로 "지리산 화전민 생활역사관"으로 가서 과거 모습을 보고 삼정까지 차로 올라 "빨치산 지리산 총 두목이라는 이현상이 죽어간 곳"을 근접에서 보고 바로 광양으로 달려 경찰묘지를 보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빠듯한 시간이다.
물고기들이 어항속에서 뛰어 놀고 있는 집에 들어가 시원한 콩국수를 주문했다.
하지만 이건 여름것이고 지금은 없고 대신 메밀국수로 준비해 준다고 하여 좋다고 모두 오케이다.
이곳은 모두에게 낯설지는 않다.
왜냐하면 쌍계사 벚꽃길이 전국적으로 유명하고 목통골 방향으로가면 토끼봉1534m 밑에 800고지정도 되는 곳에 칠불사란 절이 또 하나 있는데 신라 신문왕때 일곱 형제가 입산하여 모두 도를 이루었다는 설화가 있는 절로 여순반란사건 진압작전 과정에 다 불타버리고 지금 모습은 재건했다고 한다.
기다리는 사이에 90이 다 된 이00할아버지가 거들었다.
"서울 양반들같은데 이곳 전투 아주 심했어요. 가 보셨는지 모르지만 하동 쇳고개는 얼마나 죽었는지 시체가 많아서 걸어다니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어요. 대부분 국군과 미군이 피해를 보았고 인민군도 죽기는 수없이 죽어서 당시에 동네별로 부역을 나가서 여기저기 묻어버렸어. 내버려 두면 여우가 물어뜯고 개가 물어뜯고 미친개 되고 까마귀떼들 달려들고 말이 아니여.
화개장터 학도병 죽은데는 순천사람들이 몰려와서 파가고 나머지 유해만 별도로 그 위 계곡으로 옮겨 집어넣고 묻었어.
그러자 옆에 있던 83세인 주00아저씨가 부역으로 지리산 세석평전에 가 있었다며 목소리 올렸다.
"나는 어린 나이에 공비들이 와서 가자고해 짐을 메고 따라갔는데 지금 대피소가 있는 그 일대로 가서 몇일 있다 다시 그들과 내려와 또 지고 올라가고 몇번했지.
누가 이기고 지는지 어려서 모르겠고 공비들은 이 지방 사람들이 다 아니고 서울사람도 강원도 사람도 북한사람도 있는데 고향사람이 꼭 몇몇 있어요.
나는 주로 양식을 메고 따라다녔는데 산에 올라가니 땅이 넓은데 여기저기 땅굴처럼 파놓고 저장하는데 총도 있고 박격포탄도 많더라고.
나는 직접 토벌군이 올라와 공비들을 사살하는 것을 옆에서 목격했어요. 비참하고 무서워.
어쩌다 토벌군이 붙잡혀 오는 경우도 있어요. 총도 안쏘고 돌이나 죽창으로 죽여 눈알도 빼고 산 속 걸어다니는 곳에 매달아 놓더라고. 몇번 봤어.
그런데 토벌군이 세석평전에 올라와 전투가 벌어져 지금 약수터 근처에서 대부분 죽었고 군인들이 목을 잘라가더라고. 시체는... .
칠불사 아나요? " 네, 오전에 갔다 왔어요" 그 절도 사실은 공비들이 불태운 것이 아니고 '51년도 겨울인가 무슨 "백야사"(백선엽 장군이 사령관으로 그 휘하에 8사단 수도사단 서남사 경찰등이 배속된 공비토벌 부대 약칭)라는 부대가 왔는데 그해 눈이 엄청 내렸어요.
절이 꽤나 높은 곳에 있는데 게곡이 심해서 누구나 함부로 들어가지도 못해. 그런데 그 부대가 와서는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고. 뭐 은신처를 없앤다고 하면서.
골짜기로 이동하는 공비들. 그당시 능선으로는 비행기가 포탄을 쏘고 불이나 다 타버려서 너무 쉽게 보이니 밤에 게곡으로 다니는데 토벌군의 매복에 걸려 많이도 죽어 그대로 버려졌어.
공비라지만 내가 따라 다녀 보니 총도 몇자루 없고 실탄도 별로고 나보다 어린 학생도 있고 여학생들이 꽤나 있더라고. 밥하고 뭐 그런 것 하는지 몰라도."
그러자 그 옆에 한사람인 80 되신이00씨도 거든다.
"저 위에 정금리 안세요. 그곳은 여수순천사건때도 군인들이 진압한다고 왔다가 오히려 반란군에게 포위되어 11명이 죽었어. 내가 직접 보았지.
나중에 올라가니 철모 수류탄 M1소총 대검들이 그대로 있더라고." 이야기는 계속 된다.
주문한 음식이 차려지고 있다. 마지막 한분인 8세된 한00씨가 말한다.
"목통골에 옛날에는 연동마을이 있었어요. 화전민들이지.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마을 위로 청사골이라 하는데 공비들이 그곳에서 많이 죽었어. 토벌군이 그 위에 매복을 하다 이동하는 공비들을 기습하여 국군은 안죽고 공비들이 대량죽었는데 어떻게 처리 되었는지 모르지.
그런데 한 15년전에 한번 올라가 보니 큰바위 밑에 죽은 사람 뼈가 그대로 있더라고."
우리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점심을 먹는다.
사랑하는 연인이 이 쌍계사 벚꽃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소문,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오면 다시말해 부부나 가족등이 오면 더욱 사랑이 깊어진다는 믿거나 말거나 소문이 풍성하여 벚꽃 피는 4월초에는 초만원을 이루는 이곳이 지리산 능선을 오르기에는 가장 쉬운 코스라 아마도 공비토벌 작전간 피아간에 많이 활용 했으리리 본다.
여기서 넘어서면 화개재에서 바로 뱀사골로 이어지고 좌측으로는 삼도봉에서 노고단으로 우측으로는 토끼봉 1534m에서 삼각고지 1480m 벽소령 (이곳은 비포장이지만 경남 함양 마천 삼정리에서 차로 오를 수 있도록 도로망이 구축되어 있음)으로 이어지는 능선연결의 요충지다.
이현상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대한민국 남한의 금산이 고향으로 북한에서는 남조선 혁명가로 부리어 지고 있으며 지리산지역 빨치산 대장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전쟁 실패의 책임을 물어 남한내 남로당 총책 박헌영등 남로당이 숙청되는 과정에 이현상도 내부 강등되어 있다 전쟁이 휴전을 맞이한후 '53년 9월17일 이곳 계곡에서 사살 된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그 당시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총 지휘했던 경찰인 차일혁 총경의 회고에 의하면 이현상은 토벌대가 쏜 총탄에 죽은 것이 아니라 같은 빨치산간에 내부적 갈등에 의해서 피살되었을 가능성도 있단다.
그 이유는 총탄 자국이 가슴에 남겨져 있는데 뒤에서 맞았는데 너무 정직하게 총알이 가슴까지 직행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의 행적을 찾아보는 이유는 세월의 각인이다.
잊혀지지 않는 각인을 통해서 그들과 함께 움직여 다녔을 다른 빨치산의 생존을 향한 몸부림과 또 그들을 쫒는 경찰과 군의 숨막히는 열전 드라마같은 실상을 눈과 몸으로 봄으로써 어리숙한 시절의 그무모한 도전을 몸소 느낌으로서 이땅에 이런 비극적인 한 삶이 재현되지 않도록 하고자 왔다.
우리 옛말에 '알아야 면장 하지'라는 격언처럼 나도 말로만 여순반란 사건이니 공비토벌이니 이현상 부대니 들었지 이렇게 현장을 직접 돌아보는 것은 처음이며 정말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현장 교육이 되었다.
우리는 산 중턱에서 저 밑에 이현상이 죽었다는 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곳 탐사는 마치고 광양으로 가기로 했다. 지금까지 지리산에 들어와 12,000계곡이라 하는데 불과 6군데 계곡, 뱀사골 정금리 대성리 범왕리 문수리 청학동을 들어가 보았고 노고단을 올라서 보았다.
그렇다면 얼마 걸려야 다 돌아볼 수 있을까, 12,000을 6으로 나누면 2000이다. 아무것도 안하고 계곡만 다녀도 6년은 걸려야 된다.
오던 길로 내려간다. 말없이 화개천은 흐르고 있고 저기 계곡에 큰 바위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천년송이라해도 누가 뭐라하리... .
그런데 김실장이 화개면 탑리의 학도병 발글현장을 들렸다 내려가면 안되느냐고 물어본다.
그야 못갈거야 없지 가는 길목이고 별도 20분만 소요되면 되는데... .
차는 화개장터 우측으로 돌아서 바로 발굴현장으로 올라가는 입구에 섰다.
이곳은 6.25전쟁이후 차밭이 조성되어 전쟁의 흔적은 없다. 그러나 작은 고지에 올라서면 개인호와 당시 돌로 쌓아 만든 초소같은 것도 볼 수 있다. 이것은 학도병이 구축한 것이 아니고 경찰이 청방들의 도움을 얻어 만든 것으로 여순사건시 반란군을 경계하고 필요시 총격전을 하려 만든 것이다.
꼭대기에 올라서면 바로 남도대교가 우람하고 예쁘게 서 있고 그 밑으로 섬진강이 흐르며 북쪽으로 화개천 건너 3부 능선이 당시 북한군 박격포가 매복하고 있던 곳이다.
저기는 백운산 1216m이 보이고 밥봉 933m 이며 도솔봉 1127m이 훤하게 보인다. 저 한재를 넘어서 광양에서 하동으로 온다.
올라서니 돌을 이용한 경계호가 몇 개 남아 있고 초소도 엉성한 형태로 그대로였다.
옆을 돌아서니 바위에 조그맣게 학도병 위령비가 있고 바라보니 섬진강은 유유히 말없이 가을오후를 지나고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그 물줄기따라 우리 근현대사는 기쁨보다는 아픔으로 각인 되어 왔다. 지금 그 한 길목에 우리는 눈을 뜨고 잊혀진 역사를 돌아보고 있다.
계곡같은 곳에는 지금도 유해발굴 흔적이 남아있다.
누구도 알지못하던 곳을 자전거를 타고가던 아저씨 한분의 제보로 흙속에 파묻혀 있던 진실이 발굴 되고 많은 언론과 지역 기관장 그리고 그 당시를 실제 겪은 어른들이 찾이와 묵념을 했건만 진작 함께 해야할 당시 학도병은 정호명씨 외에 1명 밖에는 없다. 그 유족과 해당학교 학생이 나서서 이곳에 헌화를 올렸다.
남쪽으로 형성된 계곡을 따라 조금 내려서니 묘지가 있다.
안으로 들어가 살펴보니 바로 이 현장을 최초로 증언한 정호명씨등이 전쟁후 사비를 모아 이곳에 가묘를 만들고 비석을 세우고 나름의 먼저간 친구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남겼다.
그런데 왜 저기 바로 위에 10명의 친구는 찾지 못하고 그렇게 탄포를 메고 50여년을 암흙속에서 기다리게 했을까... .
학교별로 6.25전쟁당시 참가한 학도병의 숫자가 있다. 예를 들어 순천고는 17명 보성고는 13명등 하지만 그 인원이 실제 이곳전투에 참가하여 전사했는지 아니면 여차한 이유로 나중에 현역으로 가서 전사했는지 그걸 구분 하기가 쉽지않다. 너무 시간이 흐른 것이다.
최근에 해당 묘역 인근을 발굴작전을 진행했지만 유해는 찾지 못했다.
다시 차를 타러 내려서려는데 간판이 우리를 멈추게 한다.
낯설지 않은 간판이며 글귀다. "민간인 희생자 매장지역이다."
전쟁은 많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 갔다. 그중에도 뼈아프게 남아 가슴을 짓누르는 것은 동족간의 전쟁속에 같은 동네 같은 성씨의 사람사이에 손가락질 고발로 한편에서는 보도연맹이나 부여질을 이유로 죽어갔고 한편은 우익이나 지주 군경 또는 그 가족이란 이유로 죽어간 역사다.
이유야 어쨋든 내 국민임에는 틀임없기에 망자는 죄가 없다는 나름의 위안을 가지고 묵념을 하고 내려섰다. 왜 하필이면 같은 곳에 이런 아픔이 양립하는지... .
난 2000년 4월3일 6.25전쟁 전사자 유해발굴 첫삽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줄곧 이업무를 해오면서 많은 것을 느꼈고 알았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대규모로 젊은이들이 묶여서 끌려와 이미 글토된 지역에 꿇어안고 뒤에서 총을 쏴 앞으로 고꾸라지면 파놓았던 흙을 덮어버리는 좌익세력 집단 매장지를 몇군데 가 보았다. 죄는 미워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개똥철학의 미안함에 고개도 숙였다.
그러면서 기회가 있을때마다 이러한 발굴사업은 민간단체나 지자체가 할 것이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대국민정서통합"의 큰틀에서 발굴을 하고 위령비를 세우고 '잊지 말자'고 하는 것이 국가 통치행위 아닐까라며 여럿에게 말을 해 본 적도 있다.
지금와서 심판을 하고 다시 회초리를 대자는 것이 아니라 무려 전후 70년이 되어가는 마당에 삼천리 금수강산에 언제까지 이념적 소모 논쟁으로 편가르기를 할 것인가.
당연히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가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것은 기본이다. 하지만 일부 잘못된 사상과 전쟁에 따른 부역등이 가져온 연좌제등의 피해로 그 당사자 뿐만 아니라 2.3세대까지 피해를 안고 숨어살아야한다는 것은 지옥이다. 그러니 급진적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세력의 결집이 된다.
다시 그 시대로 테으프를 돌려 진위를 가릴 수도 없다.
우익이라해서 모두 옳고 바른 행동을 한 것도 아니다.
지난 20여년을 전국을 산골이나 섬까지도 찾아다니며 무려 3만여명의 인터뷰를 가져본 나는 그나름의 이유는 충분히 다 있었다. 하지만 죽어야하는 이유는 없다고 결론에 도달한다.
전쟁터에서 참여한 인원이야 명에 의해 총을 쏴야 했지만 우리 죽어간 많은 민간인 피해자들은 총도 없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살아야하니 물어보면 대답하고 먹을 것을 조달하고 가라는대로 짐을 지고 갔다. 물론 그것을 지시하고 통제하는 인원들은 별개의 성격이다.
지리산 자락에 있던 많은 부락의 청방이란 지역담당 경계보조자들 중에는 검문이란 이유로 못된 많이 한 경우도 있다. 잘못된 경찰이 저지른 악행이 어디에나 조금은 있고 그것이 일제시대 순사문화의 패단이 아니던가.
군인들도 못된짓 많이 했다. 심지어는 어느 곳에 가면 인민군은 돈도 주고 먹을 것 주고 중공군은 여자를 허벅지 살을 보이게하여 같은 방에 잠을 자도 건드리지 않고 오히려 밖으로 나가 잔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일부 군과 지원병력은 동네에 들어오면 적군부터 찾는 것이 아니라 '색시'하며 어린 애들을 앞장세우고 가가호호 찾아다녔다는 이야기 많다.
오죽 했으면 횡성에서는 똥통에 들어가 숨기도 하고 다리에 일부러 상처를 내고 그곳 중요한 곳에 인분을 발라 곪은 것처럼 했다는 어느 할머니의 눈물겨운 이야기도 종종 들어야 했다.
우리는 차를 달려 광양으로 간다. 시간이 오후 3시를 넘고 있다. 하기야 여기서 광양까지 40분 걸리고 지체시간 20분 그리고 서울로 올라서면 오후 5시정도 일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