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사람이고
사람은 곧 시다.
우리가 딛고 걸어가는 땅에서 우리의 시가 나오고
우리가 살아낸 시간이 우리의 시 속에서 살아난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시를 쓰고
우리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시가, 삶이 다르고
시가, 삶이 같기도 한 이유다.
불의와 모순 가득한 쟁투의 현장이면 어디에서나
온몸으로 저항하며 앞장서 투쟁하는 시인 송경동,
그 시인 송경동이 시집을 냈다.
『꿈꾸는 소리하고 자빠졌네』(창비)
시집을 받고 차례를 보고
시집을 넘기다가 시의 (소)제목들을 보았다.
「청소용역노동자들의 선언」, 「전국노점상대회에 부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며」, 「제9회 맑스코뮤날레에 함께 하며」, 「전국민족문주유가족협회 30주년을 기억하며」, 「삼성반도체 백혈병 희생자 황유미님 11주기 추모제에」, 「용산철거민 참사 희생자 7주기를 추모하며」, 「세월호 참사2주기 추모제에서」, 「백남기 농민 1주기 추도식에 부쳐」, 「고 김용균 청년비정규직 영결식에 드리는 시」, 「촛불 항쟁에 소신공양한 정원 스님을 축복하며」, 「2018년 종로고시원 쪽방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문정현 신부님께 드리는 시」, 「박래군 석방 촉구 문화제에 부쳐」, 「백기완 선생님 영전에 드리는 시」, 「한진중공업 김진숙 동지 37년만의 복직을 맞아」
우리 사회의 아픈 모순들이 응축된 현장을 담은,
투쟁하는 시인, 현장의 시인 송경동,
오직 그만이 쓸 수 있는 시들이 쟁쟁하다.
70년대를 지나 80년, 90년, 아니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꿈꾸는 소리나 하다 / 저 거리에서 자빠”질 수밖에 없는 암울한 현실이지만 송경동은 굴복하지도 쓰러지지도 않았다.
『꿈꾸는 소리하고 자빠졌네』는
암울한 현실을 온몸으로 부딪치며 관통해온 그의 삶의 자취이자
‘시인’ 송경동이 이루고자 하는 간절한 꿈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의 삶과 우리 역사의 아픈 기억들 모두 치유되고
“다시 시대의 봄이 돌아”오는 그때,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시를
세상에서 가장 전위적이며 불온한 시를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를
그에게 주고 싶다”는 그런 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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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난 편지를 써야겠어
송경동
전재산 삼만원
‘쏘주’를 스무병 정도 사서
뇌를 마비시켰다고 했다
남은 돈은 이천칠백원
일일이 동지들께 전화 드릴 돈이 없다고
만원도 이만원도 좋으니
조금씩만 부쳐주면 좋겠다는 메일이
마지막이었다 인천의 반지하 셋방
그는 문턱에 건 목을 길게 빼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빈 술병들은 나부라져 우리는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발전소 정규직 노동자로 혼자 잘 사는 게
미안하다고 그만두고 나와선
<노동의 소리>에서 현장 영상 활동가로 살던
닉네임 ‘숲속홍길동’이었다
묘 쓸 형편이 안 돼
마석 모란공원 납골당에 안치했다
오랜만에 전화한다고
감을 떼다 팔아보고 싶은데
충북 영동에 아는 사람 있으면
소개 좀 해달라고 했다
만성혈전증 하혈을 자주 해
아기용 기저귀를 차고 노점 일을 한다고 했다
치료비 없어 못 해 넣은 앞니 때문인지
전화기 너머로 쉰 쇳소리가 났다
저녁 아홉시 반까지는 하루치라도 내야
여인숙 달방에서 쫓겨나지 않는다고
여인숙 주인 핸드폰을 빌려
돈을 조금만 부쳐달라는 전화가
마지막이었다 반 열한시 경찰이 출동해보니
허름한 여인숙 방에 피를 쏟은 채
마른 사내 하나가 쓰러져 있었다 혁이었다
용산 참사 현장에서 ‘촛불국민연대’ 운영진으로 함께 살고
강남 성모병원 비정규직 투쟁
KTX 비정규직 여승무원 투쟁
비정규직 철폐 전국 자전거 행진도 함께 했던
씩씩하던 이
2009년 대한문 앞에 노무현 분향소를 차리고
시민 상주 역할도 했던 이
지금도 김이었는지 박이었는지 헷갈리는
혁이도 마석 모란공원 납골당에 안치했다
어느 날인가
문자 하나가 들어와 있었다
자신은 극단 산수유에서 연출하는 사람인데
내 시집 제목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으로
연극을 만들었다고 시간 되면
꼭 보러와 달라는 것이었다
연극이 끝난 후 그가
자신의 오빠가 ‘윤활유’라고 했다
윤활유는 2008년 광우병 촛불 항쟁 당시
항쟁의 중심이었던 ‘안티MB’ 카페지기였다
항쟁 후에도 MBC 정상화 투쟁 등
촛불 시민운동의 주요 리더로 헌신했다
시간이 흘러 일당 칠만원을 받으며
일요일도 없이 조경 일을 다닌다고 했었다
바쁜데 오지 말라더니 자신은 똑바로 세우지 못하고
간암으로 쓸쓸히 쓰러져갔다
촛불 시민들 마음을 모아
마석 모란공원에 간신히 봉분 하나를 만들어주었다
그러고보니 우리 모두가
왁자지껄 한자리에 모였던
잔치 같던 날도 있었다
2008년 10월 21일
기륭전자 앞에 기습적으로 망루를 쌓고 오를 때
숲속홍길동은 카메라를 들고 분주히 뛰어다녔고
혁이는 건설일용노동자 출신답게 망루 위로 뛰어 올라가
수많은 채증카메라 앞에서 구속을 각오하고
아시바를 받아 쌓던 단 한 사람이었고
윤활유는 치고 들어오는 용역깡패들을 막아서다
원투 펀치에 한 눈이 피투성이
실명되는 부상을 입고 앰뷸런스에 실려 갔다
나도 그 자리에서 표적 연행되었다가
구속연장 기각으로 간신히 나오긴 했지만
나는 지금껏 비겁하게 살아남았고
오늘도 여전히 비루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도 나중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게 될까
혹 만원이라도 이만원이라도
부쳐줄 동지들이 남아있을까
감을 싸게 떼다 팔 곳을 소개해줄
친구가 남아 있을까
조경 일이라도 같이 할 친구가
남아 있을까
“언제라도 힘들고 지쳤을 때
내게 전화하라고”*
전화카드 한 장을 건네줄
동지가 남아 있을까
*꽃다지의 노래 <전화카드 한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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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라는 도서관
송경동
다소곳한 문장 하나 되어
천천히 걸어나오는 저물녘 도서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말하는 거구나
서가에 꽂힌 책들처럼 얌전히 닫힌 입
애써 밑줄도 쳐보지만
대출 받은 책처럼 정해진 기한까지
성실히 읽고 깨끗이 반납한 뒤
조용히 돌아서는 일이 삶과 다름없음을
나만 외로웠던 건 아니었다는 위안
혼자 걸어 들어갔었는데
나올 땐 왠지 혼자인 것 같지 않은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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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송경동
기름 묻은 스패너가 투덜거린다
나는 왜 시의 소재가 될 수 없냐고
덩달아 밀링도 투덜거린다
내가 뚫은 수많은 요점들이
근래 한국문학에 제대로 인용된 것 있냐고
컨베이어도 투덜거린다
뺑이치며 이 세상 돌려줘봐도
우리에 대한 서사는 한줄도 없다고
잠자코 듣고 있던 미싱도
공작기계도 건설공구도 농기계도
어구도 한마디씩 하고 나선다
시끄러워 죽겠다
모두가 자기들 얘길 쓰는 거라고
니들 얘기는 니들이 쓰면 되지 웬 투정들이냐고
한마디 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