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마련한 영정사진
사랑하는 두 딸에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단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도 아름답지만 저녁노을은 더욱 아름답다’고,
마치 아빠의 인생살이를 함축해 표현해 놓은 듯하구나.
출생은 부모의 기쁨 이었겠지만 죽음은 누림 끝에 갈 곳을 아는 나 자신의 기쁨이기 때문이란다.
노을이 때론 황홀하리만치 아름답지. 내 삶의 끝자락도 그러하다고 아빠는 생각한다.
허니, 너희들은 세상을 떠나는 나를 두고 너무 애통해 하지 말거라.
이렇게 죽음 앞에서 당당히 얘기할 수 있는 삶의 요체는 다름 아닌 신앙인이기에 가능하단다.
만약 아빠가 죽음이 삶의 종착역이고, 너희와 헤어지는 영원한 이별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말로 표현치 못할 슬픔과 절망으로 인해 이렇게 차분히 유서를 작성할 수 있겠느냐.
때문에 신앙의 힘은 크다 못해 위대하단다.
육신의 옷을 입고 한 생을 살았던 나의 영혼이 왔던 곳으로 다시 가는데
그곳은 남들이 말하는 하늘나라 곧 천국이란다.
효선아! 인선아! 보석과도 같이 귀하고, 사랑스런 나의 딸들아.
너희의 바램을 충족 시켜주지 못했던, 세상에서는 무능했던 아빠를 이해하고, 용서해다오.
내 딸들은 참으로 훌륭하다고 아빠는 늘 생각하며 가슴 깊은 곳에선
언제나 자긍심에 혼자만이 느끼는 가슴 뿌듯함이 있었단다.
너희가 함께해 준 삶 이었기에 아빤 행복 하였단다.
돌이켜보니 굴곡 많은 삶 속에서 어린 두 딸과 함께 인생의 희노애락을 수 놓고 이제 가는구나~하고 느껴진다.
후세인들이 우리 가족의 지난 삶의 흔적을 보거나, 들어 알게 된다면
참으로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평가받게 되리라 믿는다.
그 만큼 너희들이 힘겨운 청소년기를 인내하며 희생으로 잘 견디어 왔기에 지금의 아빠가 누리는 행복이란다.
호스피스 교육 중에 들은 말이 생각나는구나. [육체의 흔적은 영혼에 남고, 영혼의 흔적은 육체에 남는다]
심오한 뜻이 내포 된 글 이다만, 간단히 요약하면 살아 있을 때 잘 하라는 말이다. 모든 면에서---.
보편적으로 바른 양심으로 선하게 생을 마감하는 사람의 시신은 죽은 모습도 잠자듯 고요하며,
평화롭게 보이거든,
또 육체를 갖고 숨 쉬며 사는 동안 죄에 노예가 되지 않고 바르게 살며 불우한 이웃에 선행을 베푼 영혼은
성경 말씀대로 당연히 천국에 오를 것이기에 그렇게 말하였다고 풀이 되는구나.
다시 한 번 그 음미를 묵상해 보려무나.
* 육체의 흔적은 영혼에 남고, 영혼의 흔적은 육체에 남는다.
확고한 믿음을 영육으로 체득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죽음은 삶의 끝자락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 태어나는 축제의 시작이란 점을 너희들에게 꼭 심어주고 싶단다.
때문에 지금 아빠는 천사들의 환영과 인도 속에서 곧 죽음이라는 문을 통하여
미지의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떠나려는 설레임에 내 영혼이 흥분이 되는 듯하다.
초등학교시절에 맞이했던 소풍 전날의 잠 못 이루는 밤이라고 생각해 봐라. 꼭 그 심정이란다.
가톨릭 신자가 되어 한 생을 마감하는 이 시점에 나의 지나온 삶에 대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후회는 없다.
단지 너희랑 주변에 더 많이,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랑을 쏟아 붓지 못한 것 외에는.
2. 행복하고 즐거웠다.
가난하였기에 부자였으며, 불행했었기에 행복을 누렸으니까. 부족 하였기에 만족을 알게 되었지.
=== 가며, 남기는 일곱가지 부탁. ===
* 첫째. 신앙인으로서 성실하고 반듯하게 살아라.
믿음의 생활에서 절대 벗어나지 마라, 주일미사 거르지 말고, 열심히 성당에 다닐 것이며,
성경공부도 게을리 하지 말거라.
* 둘째. 향후 결혼하게 된다면 신랑감도 같은 교우 중에서 선택 하거라.
가정의 평화, 부부의 행복은 배려와 일치에서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나, 국내 사회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가장 커다란 갈등은 종교적인 것이다. (개인관계도 마찬가지)
* 셋째. 어려울 때 우리를 도와 준 은인들의 감사함을 잊지 말고 기억하여라.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수모는 모래에 새기라’는 말이 있다.
어렵고 힘들었을 때 따뜻한 사랑과 도움을 베푼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너희도 자선과 봉사에 힘써다오.
* 넷째. 큰일과 시련 앞에서 당황치 말고 도움을 구하라.
손을 내미는 것도 겸손이며 용기란다. 힘겹다고 여겨질 때는 쌍문동 아저씨와 상의하여라.
그리고 시집갈 때가 되면 대모님께 도움을 청 하거라. 그분들은 어찌 보면 아빠보다도 더 너희들을 예뻐하고
사랑하시는 분들이니 부탁할 때 체면과 부끄러움은 아니가져도 된단다.
* 다섯 번째. 남겨진 채무에 대하여.
아빠가 남에게 받을 것은 없다. 다만 너희가 아는 대로 우리은행 광장동지점에 대출 받은 것 일천 팔백만원 있단다.
지금은 너희도 힘들테니 월 이자만 내다가, 상환하는 것은 효선이가 대학원 졸업한 후에 갚는 것이 좋겠구나.
동생은 금년에 대학 졸업하자마자 취업 했으니 하고 싶은 게 많을 것이다.
교사로서 봉급도 네가 많잖니? 언니가 희생하는 편이 낫다.
* 여섯 번째. 너희들 어미의 영혼을 옳은 길로 인도하여라.
너희의 엄마와 이혼하구 우리끼리 산지도 꽤나 오래되었구나.
한 때는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이제와 삶을 검증해 보니 아빠의 잘못 된 악습도
파탄의 원인임을 깨닫게 되었단다.
이제 용서하고 잊은 지도 오래된 일이란다.
어쩜 그 때의 그 고통이 거름되어 아빠가 스스로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으므로
결국 너의 엄마가 십자가를 대신지고 아빠의 영혼을 구원한 셈이구나. 원수가 아니라 은인인 셈이지.
그는 지금도 진리를 모르니 빛을 피하여 어둠(미신) 속을 헤메인다고 들었다.
미움을 거두고 사랑으로 감싸주어라. 불쌍하지 않느냐.
너희들의 관심과 노력으로 그 영혼도 영세 받고 거듭 태어나 구원되길 바라니 명심하여 실천해 다오.
* 마지막 일곱 번째. 아버지의 장례에 관하여.
화장을 하되 항아리에 넣어 납골당에 가두지마라.
생전에도 세상 틀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던 애비 아니냐.
유골은 곱게 빻아 안성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주변에 일부는 뿌려주고
나머지는 잔디 밑을 얇게 파서 땅속에 묻어다오.
흙으로 빚어 온 이 몸, 흙으로 돌아감이 자연의 순리라 여긴다.
사랑했다. 나의 딸 들아! 하느님 곁에서 너희의 수호천사가 되어 늘 지켜 줄께!
2008년 성탄이 가까운 시간에 아버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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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립니다.
상기 원고는 지난 2008년 12월18일
서울의료원 호스피스 행사 중 사전 유언장 작성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이 후안디에고(청담동성당)의 유서 내용입니다.
나 생전 큰 딸 클로틸다가 아빠에게 지어 준 별명입니다
[남 판단하지 말고 낮은 겸손으로 묵묵히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라고하는 뜻으로!]
첫댓글 사순시기를 맞아 스스로를 묵상해 봅니다.
나는 잘 썩고 있는가. 내가 죽지 않으면 어떻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
영광스러운 부활을 위해 오늘도 주님 안에서 기꺼이 죽으렵니다.
귀하고 아름다운 글 감사합니다.
눈물이 납니다. 아름다운 유서내용을 보면서 오늘 하루 너무 힘들고 벅차 기운이 없어 누워있다가
형제님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기운을 차려봅니다. 하느님은 저를 저버리지 안으시네요. 다시 기운을 차리게 해주시네요.
해가 지는 이시간 오늘하루 묵상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힘 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