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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레노포이오이
함석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목마르던 강산에 비가 내리고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자라지 못한 보리도 알을 가지고 병아리는 껍질을 깨치고 나왔습니다.
안녕을 물었지만 사실은 안녕이 없는 것을 잘 압니다. 삶 그 자체가 괴롬인 것은 그만두고라도, 사회의 모양사리가 이렇게 되고는 안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씨알에게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씨알에게 안녕이 없다면 어디는, 누구에게는 안녕이 있겠습니까? 복소무완란(覆巢無完卵)이라 둥지가 엎어지면 성한 알이 없습니다.
나는 일전도 늘 신변을 보호해 준다고 매일같이 동정을 살피는 어느 기관엣 분이 전화로 “안녕하십니까” 하고 묻기에 곧 맞받아서 “안녕이 어떻게 있겠습니까?” 한 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아니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더군요. 그래, “사람을 가만 아니 두고 이렇게 못살게 구는데 안녕이 왜 있겠어요?” 했습니다.
지나고 나서는 나도, 비록 쏴논 살이기는 하지만, 말에 너무 가시를 돋친 것 같아서 뉘우치기도 했습니다마는 정말 우리에게 안녕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반가운 듯이 인사 주고받는 것 보면 의심이 납니다. 진정일까 하고. 여러해 전 일입니다. 정부 어떤 부의 장관이, 지금은 고인이 됐습니다마는, 내게 연하장을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유사 이래 정부 장관이 내게 글 워리를 보낸 것은 그 사람이 첨이요 단 하나였으니 고맙다면 고마운 일이지만, 또 정말은 고맙기 때문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곧 회답을 보냈지요. 거기는 이렇게 썼었습니다. “먹을래도 먹을 것이 없고, 입을래도 입을 것이 없고, 일을 할래도 할 자리가 없이 만들어놓고는, 복을 받으라니 너무도 잔혹하지 않습니까?” 그가 국민생활에 대해 책임을 지는 정부 장관이 아니었다면, 또 그래도 대학을 나온 지성인이어서 민주주의니 어쩌구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도 그렇게 지독한 말은 아니 했을 것입니다. 세상이 애당초 껍데기인 줄을 모르지 않지만 책임을 알 만한 사람들이 일부러 거창하게 형식을 꾸며 없는 성의를 있는 체 보이려 하는 데는 정말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씨알끼리 주고받는 안녕에 죄 없습니다. 그러나 권력과 돈과 지식의 차이를 사회에 만들어놓고 그 높은 낭떠러지 위에서 대견한 선심으로 굽어보면서 하는 축복, 그것은 하나의 거짓일 뿐 아니라 인격의 모욕이요, 정신을 마비시켜 영원한 종으로 두자는 아편입니다. 제도적으로 부조리를 품은 사회에 도덕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도리어 반대입니다. 축복의 인사 대신 차라리 한탄의 넋두리를 같이 하고 싶습니다. 그 아픈 심정의 갈피 속을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언젠가 나는 요양소를 찾아갔다가 그 환자들 앞에서 차마 고운 말로 하는 위로의 소리가 나가지 않아서 “이 폐병장이들아, 이 저주 받은 것들아, 왜 살아 있느냐? 어서 돼져버려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도리어 기뻐하고 고마워했습니다. 그후 나는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위로의 말이나 매약방의 약 같은 철학, 설교로는 그들에게 별로 힘을 줄 수 없지만 내 마음이 뜨거워서 하기만 하면, 퍼붓는 욕설로 도리어 그들의 가슴을 가볍게 하고 소생하는 힘을 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랬습니다.” 살기는 뭘 살겠다고 밤낮 체온기를 꽂았다 뺐다 하느냐? 다 집어던지고 죽을 각오해라, 네가 무슨 죄 있느냐? 이 나라의 병을 네가 맡아서 앓는거다. 사회가 이렇게 되고는 어느 놈이 폐가 썩어도 썩게 마련이고 어느 년이 문둥이가 되어도 되게만 마련이다. 다만 그것이 네 등에 떨어졌을 뿐이다. 그러니 이왕 맡았으면 삼 년도 십 년도 실컷 앓다가 고스란히 죽을 생각해라. 그러면 가엾은 이 폐병장이 문둥이 나라의 짐을 하나 깨끗이 치워준 것 아니냐?” 무식한 욕은 도리어 굶어죽는 혼에 떡이 될 수 있지만, 발라바치는 간사한 위로는 칼보다도 더 아프게 생명을 갉아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안녕이라 할 때는 몸을 두고가 아니라 마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씨알은 이 세상에서 행복할 수 없습니다. 행복을 바랐다면 씨알의 대열 속에 있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씨알은 제가 그 행복에는 속할 수 없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행복케 해주마 약속하는 것들이 있지만 협잡입니다. 분칠 아니하고, 살조차도 붙이지 않고 드러내논 뼈다귀로 말한다면, 국민소득이 올랐느니 국가의 힘이 늘었느니 하는 말 다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말입니다. 몇 사람이 아마 양반이 되고 부자가 되고 유지자가 됐겠지요. 제도나 법에 차별이 있을 때 그것은 언제나 소수의 지배자를 옹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씨알은 참는 것입니다. 사회악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에 보람을 느끼며 참음으로 살잔 것이 씨알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자기에 있지 않고 전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클로버의 씨가 먹히는 대로 먹히어 소, 말의 밸 속을 통과하면서도 말이 없고 똥 속에서도 죽지 않고 있다가 새싹이 터온 들을 생명의 푸름으로 꾸미듯이 인간 씨알도 정치, 경제의 갖은 모진 과정을 통과하면서도 참고 살아나 세상을 건지는 것입니다. 억 만년 역사의 창자를 통과하고 나온 것이 씨알입니다. 오늘의 씨알이 아닙니다. 영원의 씨알입니다. 갖은 폭력에 대해 죽지 않음이 증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습니다. 참는 마음은 큰마음입니다.
씨알은 또 속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속듯이, 아들이 아버지께 속듯이 이것은 속는 줄 알고도, 모르고도 속습니다. 역사 있는 이래 모든 지배자 지도자들은 다 씨을 속였습니다. 행복을 약속했지만 주지 않았습니다. 그 힘을 빌고 싶을 때만 약속하고 일이 다 되면 속 알은 자기네가 집어먹고 씨은 늘 제 근본인 맨땅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런 줄 다 알면서도 차마 못하는 마음에 늘 속습니다. 무엇을 위해 차마 못합니까? 전체를 위해, 사람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차마 못하는 것입니다. 속는 마음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씨알은 어리석습니다. 어리석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대로 있는 것입니다. 하늘이 준대로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참의 나라로 사람을 불렀을 때도 어리석고 약하고 겸손하고 낮은 것을 불렀습니다. 플라톤이 이상의 나라를 그릴 때도 임금은 철학자를 앉히었습니다. 그 철학자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마 자기 선생 같았을 것입니다. 악한 꾀에 걸려 죽는 줄 알면서도 반항도, 변명도, 분해하지도 않고 어엿이 독약을 마시던 소크라테스 말입니다. 그러고서야 어리석은 씨알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패배주의 같거든 어서 주저 말고 씨알의 대열을 떠나십시오. 여기 있어서 행복할 것 없습니다. 씨알은 속는 줄 알면서도 참을 줄밖에 몰라서 참는 어리석은 바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역사는 이상 하게도 그 편입니다. “기지(其智)는 가급(可及)이니 기우(其愚)는 불가급(不可及)이라” 영웅 흉내는 낼 수 있어도 바보 흉내는 못냅니다. 그리고 그 바보가 마침내 이기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법황의 모든 궁전, 박물관, 미술관에 가보십시오. 그 모든 영화를 가졌던 것들은 하나 없이 다 죽을 뿐 아니라 심판을 받아 역사의 지옥에 떨어지고 그 모든 보물은 세계의 이름 없는 씨알들이 날마다 바다의 물결처럼 드나들면서 즐겁게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바로 된 일입니다. 이제 바로 제 주인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럼 누가 정말 살았고 이겼으며 누가 정말 역사의 상속자입니까? 제왕이요, 영웅이요, 정치가요, 지도자라던 것들입니까? 그들에게 장기 말 대접을 당했던 이름 없는 씨알들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비는 것은 첨부터 행복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 입니다. “안녕!” 할 때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란 말 아닙니다. 고통을 받고 억울을 당하면서도 마음의 평안을 지키란 말입니다.
마음은 자연이 아닙니다. 생명이 자기의 특별한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에게 특별히 넣어준 것입니다.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즉존(操則存) 사즉실(舍則失), 지키면 있고 버리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기 때문에, 자유기 때문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행복은 반드시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는 구하기만 하면 반드시 있습니다. 그것은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안은 만나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 짓는 것입니다. 만들지 않고는 없습니다. 이 점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예수가 산상수훈 가운데서 가르친 말입니다. 그는
복이 있다. 아이레노포이오이,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름을 받을 것이다.
했습니다. 아아레노포이오이란 아이레네 곧 평화라는 말과 포이에오 곧 만든다는 말을 한데 붙여서 만든 말입니다. 평화를 짓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씨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평화를 짓는 것은 씨알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에 평화가 없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전쟁 때문입니다. 전쟁은 왜 일어납니까? 역사를 보십시오. 환합니다. 그들은 밤낮 나라 위해서다,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다 하면서 전쟁을 합니다. 전쟁 중에 정의와 평화를 내세우지 않은 전쟁이 하나나 있습니까?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물어볼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이란 참 어리석습니다. 이렇게 환한 것을 이날껏 속아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욕심 때문입니다.
아이레노포이오이란 이점을 생각하면서 보아야 그 뜻을 압니다. 속에서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그냥 두고 마음의 평안 있을 수 없고, 마음에 평안이 없는 한 평화의 정치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짓는다는 말은 마땅히 마음의 밑바닥에 내려가서 내 혼의 평안을 지킨다는데 이르러서만 그 참 뜻이 드러납니다. 예수가 아이레노포이오이라 했을 때 정치가, 외교가, 군인 두고 한 말 아닙니다. 혼의 평안을 얻기 위해 골방에서 빈들에서 자기의 자아와 씨름을 하는 사람, 하나님과 대결을 하는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 씨름은 자아가 완전히 겸손해지기 전에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나서 온전히 혼의 평안을 얻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화해를 한 사람, 자아를 용서해준 양심입니다.
예수는 다른 조목에서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땅을 차지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샛말로 하면 역사의 계승자란 말입니다. 전쟁은 왜 합니까? 역사를 제가 계승하고 싶어서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역사를 이어받았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익살스럽게도 역사는 언제나 이름 없는 씨의 것입니다. 마치 무연한 벌판이 소나 말의 것이 아니고 풀씨의 것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말씀의 이 두 귀절은 서로 대조해 읽어서만 그 뜻이 더 밝아집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역사계승 역사창조의 자격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는 온유, 겸손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습니다. 내가 씨알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욕심 있고 건방져서는 씨알 노릇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못생기면서 그저 참아서만 씨입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세상은 악하면서도 밝아져가는 것이 있습니다. “땅은 농사꾼의 거다. “대통령은 민중의 공공한 심부름꾼이다.” 세상이 악해서 하나도 실행은 아니하지만, 이 진리를 감히 부인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저 주어진 것 아닙니다. 이루 헬 수 없는 학대로 많은 씨알이 죽고 죽어서 얻은 결과입니다. 영웅은 끝나는 날이 와도 씨알의 끝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직 말뿐이고 실현 아니되는 듯하지만 그대로 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잘난 것들은 잘나서 개개로 살지만, 우리는 못났기 때문에 전체로 삽니다. 이기는 것은 전체입니다.
흙, 씨알의 바탕인 흙이 무엇입니까? 바위의 부서진 것입니다. 바위를 부순 것이 누구입니까? 비와 바람입니다. 비와 바람은 폭력으로 바위를 부순 것 아닙니다. 부드러운 손으로 쓸고 쓸어서, 따뜻한 입김으로 불고 불어서 그것을 했습니다. 흙이야말로 평화의 산물입니다. 평화의 산물이기에 거기서 또 평화가 나옵니다. 씨가 흙 속에 떨어지기 전엔 평안 없습니다. 그저 불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절대로 자아를 열지 않습니다. 아구트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부드러운 흙 속에 떨어 질 때 거기서는 노래와 춤이 나옵니다. 새로 돋아나는 싹처럼 아름답고 위대한 예술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의 씨알도 그렇습니다. 겸손히 역사의 바닥에 내려갈 때 혼의 평안은 오고 혼이 평안을 얻을 때 거기서 우주의 영의 부름에 의한 활동이 기쁨과 영광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웅이라는 어리석은 아이들이 서로 치고 받아 그 피와 시체로 더럽혀놓은 역사의 동산을 다시 푸른 생활로 갱신시킬 수가 있습니다. 겸손한 자가 땅을 차지합니다.
아, 봄이 왔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십시오.
씨알의소리 1973년 4월 21호
저작집30; 8-105
전집20; 8-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