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께서 주신 상 / 박미숙
아버님 두 번째 기일이라 집 뒤 산소에 갔다. 아주 손질이 잘 되어 있다. 남편이 사흘돌이 와서 살핀 표시가 많이 난다. 절을 올린 후 묘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아버님, 어머님! 그곳에서는 아픔 없이 편히 계시지요? 우리 가족 건강하게 잘 지내게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나직이 인사를 드린다
부산에서 오래 살다 남편 일 때문에 광양으로 이사 온 지 10여 년 되었다. 원래 시부모님께서는 광주에 사셨는데, 우리가 오고 나서부터 거의 시골집에서 지내셨다. 연세가 많고 거동도 불편하셔서 아침, 저녁으로 반찬을 해서 가져다드렸다. 주말이나 방학 때는 좀 낫지만, 출근 전에 따끈한 국을 끓이고 생선도 구우려면 여간 바쁜 게 아니다. 퇴근 후에도 다른 일은 일절 못하고 집으로 바로 와야 한다. 게다가 부모님 뵙겠다고 시댁 식구들도 자주 오니, 뒤치다꺼리에 힘들어 광양으로 온 것을 후회하는 날이 많았다. 어머님이 아예 움직일 수 없게 되어 요양병원으로 가셨어도 아버님은 오랫동안 우리 집에 계셨다. 그러다 팔을 다쳐 수술 후 어머님과 함께 지내시게 되었다. 시부모님 수발을 들지 않아도 되니 여유가 생겼다. 퇴근 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기고 주말에는 동료와 함께 산에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뭐 하냐, 마지막으로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라고 하셨다며, 시댁 형제들이 우리보고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리라고 한다. 자기들은 단 하루도 모시기 싫어 팔 치료 끝내고 퇴원하시던 날, 수면제 드시게 한 후에 병원에 보내놓고서 말이다. 그전에 계실 때도 치매가 있어 아무 데나 소변을 보고 밤중에도 나가시려고 해서 힘들었는데, 더 심해진 지금 어떻게 하냐고, 못한다고 했다. 남편은 자기가 다 하겠다고 했지만, 도와준 적이 전혀 없었기에 믿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 든 단비를 정성껏 돌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다. 남편 눈치도 보였다. ‘강아지에겐 그렇게 하면서 아버님은 안 모시려고 하냐?’고 생각할 것만 같았다. 한 달을 고민하다 승낙했다.
아버님 상태는 매우 심각했다. 치매가 심해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많이 야위시어 기력이라곤 없었다. 물컵에 꽂은 빨대를 빨 힘이 없고, 등을 받치지 않으면 앉아 있지도 못하셨다. 기저귀를 제때 갈아드리지 못하면 손으로 똥을 파서 온 데다 발랐다. 냄새 때문에 방문을 열 수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아버님을 정성껏 씻기고 살뜰하게 챙겨드렸다. 행여나 침대에서 떨어질까 봐 방바닥에서 잠을 자며 지켰다. 옆에서 보던 딸이 “똥 기저귀를 갈면서 저렇게 다정하게 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라며 놀란다.
우리가 낮에는 일을 해야 하는데, 하루 서너 시간 도와주는 요양보호사로는 해결되지 않고 온종일 간병인을 쓰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아서 주간보호센터를 이용하였다. 그렇게 상태가 나쁜 데도 받아주니 고마웠다. 그곳에서 하루 종일 어떻게 지내셨는지 상세하게 문자로 알려주고 운동도 시켜 주며 병원 진료도 대신 가 주었다. 또, 모든 음식을 드시기 좋도록 갈아서 주는 것을 보고 따라 했더니 아버님의 건강 상태가 나날이 좋아졌다. 혼자 걸어서 화장실도 가실 수 있게 되었다. 볕이 따뜻한 날에는 마당에 나가 바람을 쐬고 개들 간식도 주면서 미소 지으시는 날이 늘어났다. 저녁마다 학교(주간보호센터)에서 무엇을 했는지 얘기를 나눈 후 공책에 적어보시라고 했다. 어느 날, ‘경래 내외는 나한테 잘한다. 더 이상 잘 할 수 없다’라고 쓰셨다. 그 글을 보고 가슴이 먹먹했다. 정신이 왔다 갔다 하여 내가 딸인지, 며느리인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알고 계셨다. 정성을 다하니 몸도 정신도 좋아질 수 있음이 놀라웠다. 잘 지내시다 코로나19 감염으로 갑자기 돌아가셔서 아쉬움도 컸지만, 차를 타고 센터를 오가는 동안 매일 매일 고향 산천을 가슴에 담으시고 품위 있게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아버님께서 주간보호센터 다니실 무렵, 건강보험공단에서 노인장기요양보험 체험수기 공모전이 있었다. 원장님이 밤에도 아버님을 보살펴 주셔서 어머니 장례식을 잘 치르는 등 센터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온 사회가 어르신을 돌본다>는 제목으로 응모하여 우수상을 탔다. 상금도 받았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몇 달이 걸렸는데, 그 사이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그 글을 보고 방송국에서 다큐를 찍자, 인터뷰 하자며 연락이 많이 왔다. 아마 아버님이 살아 계셨다면 우리 가족이 TV에 나왔을지 모르겠다. 돈을 표시나게 쓰고 싶어 로닉 믹서기를 샀다. 가열과 믹서가 동시에 되는데 비싸서 내 돈으로 선뜻 사기 어려운 제품이다. 그것으로 아침마다 당근, 양배추, 사과로 주스도 해 먹고 두유나 죽도 쉽게 만드니 아주 유용하다. 몸에 좋은 것 많이 만들어 먹으라고 아버님이 주신 상이라 생각하며 매일 열심히 사용한다.
첫댓글 그래도 마지막을 아들 며느리 보살핌을 받고 가서 참 다행입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효부시네요. 치매는 국가에서 책임져아 할 사회적 문제 같아요. 상 받으신 것도 축하합니다.
정말 효부시네요. 저라면 못했을 것 같아요.
돌봄 문제가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될 것 같습니다.
상 받으신 것도 축하드립니다.
직장 생활하기도 힘든데 아버님 살뜰히 챙기셨군요.대단하십니다.
정말 효부시네요. 이미 양로원에 가 계신 분을, 더구나 치매가 있는 분을
모셔와서 그렇게 집에서 간호하시다니 놀랍습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정말 뜻깊은 상을 받으셨네요.
자식의 도리를 다하셨기에 마음은 편하리라 생각합니다.
대단합니다.
우와, 정말 아버님이 선생님 예쁜 마음을 아셨나 봅니다. 선생님은 참 따뜻한 분인 거 같아요.
‘경래 내외는 나한테 잘한다. 더 이상 잘 할 수 없다’ 이 글이 다 말해주네요. 아버님도 행복하셨을 겁니다.
글을 읽는동안 제 자신도 반추해 보았답니다.
배울게 많네요. 저도 어머님을 어떻게 모시다 보내드릴까 궁리를 많이 한답니다. 잘 하셨어요. 그 상 덕분에 건강하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