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료예약 상담문의 02-900-8276
체질 다이어트 / 디스크,오십견, 관절염/ 만성난치질환/ 체질진료/전통 장침
스마트 한의원(4호선 쌍문역 3번)
1강 역사를 말한다 -동학에서 광주민중항쟁까지-
1. 5.18 광주항쟁의 의미
정말 뜨거운 함성, 뜨거운 박수소리를 들으니깐, 정말 제가 젊어지는 거 같고, 다시 한 번 80년대의 어떤 열기를 감지하는 것 같다.
조선인들의 기나긴 역사에서 호남지역이 너무도 중요한 역할을 해 왔기 때문에 저는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서 호남의 역사와 더불어, 우리 민족의 앞날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1980년 5월 18일은 일요일이었다. 저는 그때 미국 보스턴 하버드 대학의 학생이었다. 박사학위를 공부하고 있던 학생이었다.
5월 18일, 19일, 20일, 광주 지역의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신문, 방송은 침묵했고, 우리 역사의 엄청난 사건을 국민들은 일체 몰랐다.
그러나 제가 공부하고 있던 미국에서는 5월 18일부터 이미 보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상황을 알 수 있었지만, 어찌 할 수가 없었다.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미국에 앉아서 편하게 공부하고 있는 학생으로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때 그 심정이라고 하는 것은, 나의 편안함으로 인해서 역사에 끊임없는 죄책감을 느껴야 했고, 정말 처참한 심경이었다. 그래서 보스턴의 하버드에 있던 유학생 10여 명이 모여서, 미국의 도청 앞에서 시위를 했다. 미국은 절대 한국 사태에 대해 개입하지 말라고 시위를 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미국의 도청 앞을 빙빙 돌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여기 있는 젊은 학생들은 이런 말을 하면서 내가 왜 눈물을 글썽이는지 잘 모를 것이다. 물론 여러분들은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 알겠지만, 실감이 잘 안 날 것이다.
벌써 4반세기가 지났다. 25년이 지났으니깐, 이 학생들은 전혀 모른다. 물론 그 동안 청문회도 열었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고갔다. 그렇지만 그 일의 역사적 의미,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확연한 인식이 없다.
진압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총질이 오고갔다고 하면서, 청문회에서도 그렇게 끝냈다. 오늘날까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났고, 도대체 누가 한 짓이고,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른 체 지나가고 있다.
얼마 전 5,18 묘역에 가 보았다. 근사하게 만들어 놓았다. 묘역이라고 해서 여러 분들의 영령은 모셔놓았으나, 감동을 안 준다. 묘역이라고 해서 기념탑을 크게 만들어 놓고, 묘지를 근사하게 해놓고, 그 분들에게 몇 억씩 주었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 와서 다 지나간 일 가지고, 광주에 와서 희망찬 이야기나 하지, 왜 또 옛날이야기나 들먹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난 지금 그 이야기를 해야겠다!
왜냐하면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고, 현재의 이야기다. 그리고 잊혀질 수도 없는 이야기고, 잊혀져서도 안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이야기해야 하고, 우리 후손한테 이야기해야 하고, 만만세세로 이 일을 이야기해야 한다!
5.18광주민중항쟁은 과거사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사일 뿐이다. 그 의미는 끊임없이 되새겨져야 한다.
2. 역사란?
우리 호남의 역사적 특성을 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내 강의 제목이 ‘역사를 말한다.’인데, 역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역사라는 것은 시간이다. 우리는 ‘시간이 갔다’, ‘시간이 흐른다’는 말을 한다. 뭐든지 시간이 흘러가면 역사가 된다. 사람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만 가면 다 역사가 된다. 이 생수도 물병의 역사가 있다.
역사=시간=의미
역사라는 것이 대단한 게 아니다. 자연사 박물관이라는 게 있다. 자연도 역사가 있다. 나무도 역사가 있다. 시간만 흘러가면 다 역사가 된다. 모든 것이 시간만 흘러가면 역사가 된다.
지금 2006년 새해를 맞이해서, 1월 6일인데, 지금 1월 6일 이 시점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를 여러분은 다 쓸 수 있는가? 개똥이가 오줌을 눈 것도 역사고, 지나가는 남녀가 키스한 것도 역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따라서 이 순간의 역사만 쓰려고 해도, 다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라는 것을 이야기할 적에, 우리에게 뭔가 의미 있는 사건만을 골라서 쓰는 것이다. 역사를 기술할 때는 반드시 선택이 있기 마련이다. 그걸 선택하는 사람들은 자기 편의대로 자기 좋은 것만 선택한다.
지금 역사는 엄청 많아서, 그 역사를 다 쓸 길이 없다. 그래서 선택을 하는데, 만일 내가 선택을 한다면, 나한테 좋은 것만 선택한다.
즉 인간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선택된 역사이다. 그런데 그 선택된 역사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해석된 역사이다.
역사 → 선택 → 해석 → 사관(史觀)
그 해석의 체계를 우리는 사관이라고 부른다. 역사적인 사실이 있는 거 같지만, 그 역사적 사실을 알고 보면, 모두 누군가가 해석을 해 놓은 사실이다.
모든 역사적 사실은 해석된 사실이다.
3. 백제의 멸망 원인
예를 들어 삼국역사를 보면, 백제는 신라에게 망했다고 한다. 이 말이 과연 맞는가? 여러분들은 백제가 신라한테 망했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게 웃기는 이야기다. 백제는 신라한테 망할 수가 없는 나라였다. 그런데 어떻게 망했는가? 바로 당나라한테 망한 것이다.
지금 미국하고 이라크가 싸우고 있는데, 백제는 당시의 미국하고 싸운 것이다. 신라하고 싸운 게 아니었다. 우리가 역사에서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도 따져보면, 그건 사실이 아니다. 백제는 절대로 신라한테 망하지 않았다.
백제의 멸망은 당시 세계사적 국제 전쟁의 결과였다.
물론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백제가 그 당시에 망한 이유는 신라 자체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럼 백제 사람들이 망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의 백제인들은 신라인들을 깔볼 수가 있는 위치에 있었고, 그래서 자만했고, 국제 감각을 잃어버렸다. 신라는 자체 힘만으로 이긴 게 아니라, 가야를 병합하면서 국제적 감각을 획득하고, 외교 전술을 펼쳐서 당나라를 끌어들인 것이다.
지금의 부산 지역이 가야인데, 그 지역은 대구 경북과 또 달랐다. 신라와 가야는 아주 달랐다. 문화가 아주 달랐다. 그런데 가야를 먹으면서, 김유신과 같은 가야 사람들이 들어온다. 당시 가야인들은 굉장히 국제적 감각이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신라 삼국통일의 기초를 쌓을 수 있었다. 그래서 당나라에 가서 외교를 하고, 사방에서 외교전술을 펼쳤던 것이다.
가야는 당시 철기 문화의 최선진을 달린 개방적 국제문명국이었다.
지금도 전라도 사람들이 국제 감각을 상실하면, 또 망할 것이다. 세계를 멀리 봐야 하고, 인간의 역사를 폭넓게 봐야 한다. 광주민주항쟁이라고 하면, 민주항쟁만 보는 게 아니라 그 전체적 맥락을 봐야 한다.
광주민주항쟁도 지방사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사적 사건이며 그 총체적 결구(結構)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3. 호남 지역의 역사
그런데 광주 지역이 백제인가? 이것도 문제다. 마한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역사적으로 보면, 호남지역이라는 곳은 사실 백제문화권이 아니다. 백제의 중심지는 오히려 공주와 같은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이다.
전라도 하면 백제라고 무조건 등식화하는데, 사실 전라도는 백제가 아니다.
호남지역은 삼국정립시대이전부터 이미 독자적 정치세력단위를 형성하고 있었던 고문명이었다.
호남 지역의 구석기 유물은 10만년 전까지 올라간다.
영국의 솔즈베리에 가면, 스톤헨지라고 하는 근사한 유적이 있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취재차 가보았는데, 아주 근사하다.
스톤헨지(Stonehenge)
영국 월트셔주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석기시대유적. BC 1500년경 완성.
그런데 호남 지역의 유적에 비하면, 그건 새발의 피다. 호남 지방에는 고인돌이 2천군데, 2만여기가 있다.
@ 고인돌(Dolmen)
선사시대 무덤의 하나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 전라도에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한 곳에 수백기의 고인돌이 군을 이루고 있다.
전 지구상에 이렇게 고인돌이 많은 곳은 여기밖에 없다.
스톤헨지도 고인돌의 특수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고인돌 문화는 우리 한반도에서 가장 융성하게 발전하였고 그 중심이 호남이었다.
고인돌 문화는 청동기 시대라고 하는데, 그럼 청동기 시대, 이 지역의 문화를 생각해보자. 고인돌을 한 번 나르는 데 몇 명이나 소요되었겠나? 고인돌 하나가 큰 것은 몇 십 톤이다. 적어도 큰 것은 2-3백명은 필요했다. 자기 무덤 하나를 만드는데, 2-3백 명을 동원할 수 있다면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런 고인돌이 이 지역에 2만여기나 있다.
이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작은 나라들을 중국의 인류학자가 와서 보고, 기술해 놓은 ‘위지동이전’이라는 책에 마한이라고 써 놓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마한이라고 부르는데, 그 마한이라는 개념도 상당히 애매한 것이다.
위지동이전을 근거로 하는 마한(馬韓)이라는 개념 하나로 이 지역의 역사를 다 규정할 수 없다. 보다 포괄적이고 다양한 고고학적 개념설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 생각에, 이 지역은 예로부터 강력한 물적 토대가 있었고, 인구가 풍부했고, 족장체제를 갖춘 독자적인 문화 세력이 일찍부터 형성되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호남 지역은 역사적으로 중앙의 센터에서 권력을 발휘해 본 적이 거의 없다. 개성, 서울, 경주와 비교하면 여긴 거의 없었다.
단지 딱 한 번 있었다. 견훤이 후백제의 수도를 광주로 삼았었다. 그때 여기가 중심지였다.
견훤의 출생지가 상주가 아니라 광주였다는 설도 있다. 892년 무주(武州)에서 후백제를 세웠다. 무주가 곧 광주다.
견훤이 후백제를 여기다 건설했다가, 결국은 지금의 전주인 완산으로 옮긴다.
8년 후 완산주(전주)로 천도했다.
옛날에는 수로(水路)가 지금의 고속도로였다. 영산강이 목포 쪽으로 빠지는데, 그 유역에 광주와 나주가 있다. 그래서 영산포가 대단한 곳이었다. 지금은 나주를 우습게 아는데, 실제 전라도의 중심은 전주와 나주였다. 나주는 ‘천년 목사골’이라고 했다. 나주에 계속 목사(牧使)가 있었다. 광주보다 급(級)이 높은 지역이었다. 포구가 있어서, 중국, 일본 무역이 모두 영산포에서 이루어졌다. 영산포는 대단한 곳이었다.
나주 지역 사람들은 고인돌 시대부터 내려왔는데, 삼한 시대의 복암리 고분이나 반남면의 신촌리 고분에서 신라금관 같은 것이 막 나온다.
나주시 반남면(潘南面) 신촌리(新村里) 9호분에서 금동관(金銅冠)이 나왔는데 고대세력의 위상을 과시하는 찬란한 왕관이다.
이게 해석이 잘 되지 않는다. 지방의 조그마한 토호라고 하면, 그런 금관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러니깐 나주 지역에 독립된 거대한 정치체제가 있었다고 추정된다. 나는 그것을 왕국이라고도 충분히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왕국이 바로 마한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이 지역은 오래 전부터 독자적인 자기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견훤이 후백제를 세웠지만, 나주 사람들은 견훤한테 협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그 전부터 개경, 예성강 지역의 해상권 세력인 왕건과 계속 무역을 해서 왕건이랑 친했기 때문이다.
영산강 지역의 나주 사람들과 예성강 지역의 왕건 휘하 사람들은 국제무역으로 결합된 연합해상세력이었다.
그래서 견훤에게 협력을 하지 않았다. 견훤은 광주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나주는 견훤에 승복하지 않았다.
나주가 견훤에게 복속하지 않고 왕건과 결탁함으로써 후백제는 멸망케 되고, 왕건은 고려 건국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왕건은 나주의 오씨여자와 결혼하여 제2대 임금 혜종(惠宗)을 낳았다. 오씨여자가 장화왕후(莊和王后)이다.
결국 나주 사람들이 고려 왕건을 만든 것이다.
4. 훈요십조
따라서 고려 왕건은 나주를 어향(御鄕)으로 생각해서, 고려조부터 나주를 굉장히 평가했다.
그러니깐 고려 왕건이 훈요십조에서 전라도 사람들은 등용치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는데, 그게 이상한 이야기다.
훈요십조는 후대에 최제안이 최항(崔沆)의 집에서 발견하여 현종에게 바쳤다는 것인데 그 문헌의 진위도 확실치 않다.
훈요십조라는 것은 없어졌다가, 현종 때 최항이라는 사람 집에서 나온 문헌으로 나중에 고려 왕조 실록에 실렸다. 그래서 훈요십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알 수도 없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보면, 절대 호남지역 사람들이 등용에서 차별 받는 적은 없다. 역사가들이 훈요십조에 따라서 전라도 사람들을 차별 대우했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역사는 그렇지 않다. 현실적으로 통계를 내 보면, 절대 그렇지 않았다.
훈요십조에 의거하여 호남인 차별을 운운하는 것은 날조된 허위일 뿐이다. 박정희 시대에 인위적으로 조장된 영호남대립감정의 소산일 뿐이다.
고려사를 보면, 정확하게 ‘車峴以南, 公州江外’라고 했다. 정확한 표현을 보면, 호남이라는 말을 쓴 적이 없다. 그리고 ‘車峴以南, 公州江外’가 정확하게 어느 지역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대한 논의도 상당히 복잡하다.
車峴以南, 公州江外, 由形地勢, 竝趨背逆, 人心亦然.
[차현이남, 공주강 바깥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거꾸로 삐쳤으니, 인심 또한 그러하다.]
견훤은 논산 쪽에서 자기 아들인 신검한테 왕위를 빼앗기고, 나중에 왕건한테 가서, 왕건과 함께 자기 아들을 친다. 그래서 부자지간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 지역이기 때문에 그 좁은 지역에 한정해서, 부자지간의 비극이 있었던 지역에서 사람을 쓰고 싶지 않다는 정도의 이야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 신검(神劍)
견훤의 아들인데 견훤을 유폐시키고 스스로 왕에 올랐다. 견훤은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하여 아들 신검을 친다. <936년>
이런저런 이야기로 보아서, 나주 지역은 예로부터 뭔가 상당히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시대 때에도 독특한 아이덴티티가 유지되었으며, 거란에서 침략이 들어왔을 때도 고려 현종이 피난을 온 곳이 바로 나주 지역이었다.
고려 제8대 국왕 현종(顯宗, 1009~1031)은 제2차 거란침입시 나주로 몽진왔다. 왕의 사두마차가 건넜다는 사마교비(駟馬橋碑)가 남아있다.
5. 조선 건국과 나주
그리고 조선왕조를 건국한 것은 이성계라고 하지만, 실제로 브레인 노릇을 한 것은 정도전이다. 사실 이성계는 겉으로 추대된 것이고, 조선 왕조를 뒤에서 만든 사람은 정도전이었다. 그래서 정도전이 키운 사람이 이방원이었다. 물론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이기는 했지만, 결국 이방원도 정도전의 틀대로 간 것이다.
그럼 정도전은 어떻게 해서, 조선왕조 건국의 꿈을 꾸게 되었나? 그 사람이 바로 나주로 귀양을 왔었다.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반원친명(反元親明) 발언으로 재상 이인임의 노여움을 사, 나주로 귀양왔다. 당시의 귀양생활을 전하는 소중한 글들이 남아있다. 소재동기(消災洞記), 답전보(答田父) 등.
답전보라는 유명한 그 사람의 글을 보면, 그 지방의 부곡 사람들과 지냈다고 한다. 부곡이란 고려의 지방 행정체제로 중앙의 도시에서 밀려난 변방을 말한다. 옛날에는 노비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체가 낮은 일반 민중이 사는 곳이었다.
@ 부곡(部曲)
고려지방행정단위의 하나. 전통적으로 부곡을 천민(賤民)집단으로 규정했으나, 최근 정도전문학의 연구에 의하여 보통사람들이 살았던 곳임을 알게 되었다.
정도전은 부곡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살면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민중의 애환과 그들의 중앙에 대한 항거정신을 배우게 된다. 거기서부터 고려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세워야겠다는 새로운 비전을 굳히게 된다.
정도전은 호남민중들의 애환을 접하면서 비로소 토지개혁을 절감하고, 맹자의 역성혁명사상을 적극 수용한다. 호남민중의 혁명사상이 조선왕조를 건국케 한 것이다.
사실 정도전은 경상도 봉화 사람이지만, 그 바닥이 된 정신은 바로 호남의 민중들이 제공한 것이다.
6. 임진왜란과 호남
우리 역사에서 임진왜란만큼 어마어마한 사건이 없다. 그런데 그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뭐라고 하셨나? 호남이 없으면, 이놈의 나라가 있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若無湖南, 是無國家.
이순신 장군이 나가서 많이 싸운 곳은 경상도 앞바다였지만, 그 배는 모두 여수, 완도 등지에서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만든 사람이 누구인가? 다 전라도 사람이었다. 전라도 사람들은 원래 배 기술이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배 건조 실력과 항해술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호남인의 조선기술은 세계적이었다. 완도가 주요 건조장이었다. 이순신의 서남해안지배의 저력은 호남인의 실력을 주맥으로 하는 것이었다. 고려 조창(漕倉) 12개중 5개가 호남에 있었다.
그래서 바다에 아주 정통한 사람이 많았다. 배 건조에 필요한 목재도 이쪽 지역에 다 있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도와서 이 나라를 지키고, 이쪽 호남지역에 얼씬도 못하게 할 수 있었다. 이 호남지역을 지키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1910년도에 한일합방이 있었다고 하는데, 한일합방이라는 말은 쓰면 안 된다. 합방이라는 것은 나라를 합했다는 말이다.
합방(合邦)
나라를 합치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일본이 언제 나라를 합쳤나? 단지 강도새끼가 든 것이다. 우리 집이 있고, 우리나라가 있는데, 경술년에 강도가 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절대 일본과 나라를 합친 적이 없다.
지금 우리가 임진왜란이라고 하는데, 임진왜란만 해도 자그마치 7년을 간 것이다. 쉽게 생각해서, 36년 일제 통치라고 하는 것을 ‘경술왜란’이라고 해야 한다. 똑같게 생각하면 된다.
단지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이 호남을 지켰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안 없어진 것처럼 역사가 기술되는 것이고, 경술왜란 때는 이순신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가 없어진 것으로 기술된 것이다.
이순신이 선조(宣祖) 같은 새끼를 죽여 버리고, 새나라 만들었으면 우리나라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실력이 안 되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자기 운명을 안 것이다. 그렇게 애국적 행동을 하고서도, 나라를 뒤엎을 수 없으니깐, 결국 노량해전에서 자살을 한 것이다.
아마 왜병이 자기를 향해 쏘는 것을 봤을 것이고, 그 쏘는 순간에 감사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죽어야만 되는 운명임을 이미 감지하고, 노량해전에 나간 것이다. 이순신은 자살한 것이다. 자살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자살 안 하면 나라를 엎어버려야만 했다. 엎어버리지 않으면 자기는 더럽고 비참하게 죽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렇게 나라가 썩어 있었다. 경술왜란이 일어난 구한말도 마찬가지였다.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그런 역사 속에서도 우리 역사를 지켜간 것은 결국 호남의 민중들이었다.
7. 기축옥사와 호남인맥
담양에 가면, 송강 정철이 거닐었다는 식영정이라는 곳이 있다.
@ 식영정(息影亭)
그림자도 쉬어가는 곳이라는 뜻으로 담양 남면 지곡리에 있다. 1560년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었다. 송강 정철도 거닐었다.
정철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성산별곡 등을 지은 위대한 문학가이고, 전라도 사람의 자랑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정철은 원래 서울 사람으로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쪽으로 귀양 왔다가 장성의 하서 김인후라는 아주 훌륭한 대학자 밑에서 배웠다. 그러니깐 정철도 전라도에서 큰 사람이다.
@ 정철(鄭澈, 1536~1593)
본관 연인(延因), 호는 송강(松江). 서울출생. 사화로 담양 창평으로 이주. 김인후, 기대승의 문하생. 대표적 서인(西人).
@ 김인후(金麟厚, 1510~1560)
본관 울산. 호는 하서(河西). 해동 18현중의 한사람으로서 문묘에 배향된 사림파 대학자. 이기논쟁에서 퇴계보다 기대승의 주장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또 호남 지역 사람으로 정여립이라는 분이 있다. 참 좋은 사람이다. 전주 사람으로 정말 머리도 좋고, 기개도 있는 대단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당대에 혁신적인, 혁명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 정여립(鄭汝立, 1546~1589)
본관 동래. 출생 전주. 1570년 문과급제. 천하(天下)는 공물(公物)이라 생각했고, 왕의 세습제를 반대하는 급진적 사상은 있었으나 모반을 도모한 적은 없다. 정철이 동인을 때려잡기 위해 그의 모반설을 날조하여 기축옥사를 일으켰다.
그런데 정여립을 모반죄로 몰아서 죽인 사람이 바로 정철이다. 당시 정철이 너무 심하게 했다. ‘광주 사태 진상 조사위원회’라고 해 가지고, 정의롭게 투쟁한 사람들을 다 죽이는 것과 같은 식으로 다 죽였다.
@ 기축옥사(己丑獄事)
정여립모반을 날조하여 나주인 이발(李潑), 정개청(鄭介淸) 등 호남의 탁월한 인재를 1천여명 때려죽인 사건. 이로써 정철을 정점으로 하는 서인세력이 정국을 주도. 향후 호남인맥은 씨가 말랐다.
그때는 동서 분당(分黨)이 있었는데, 정여립이 동인들과 가까웠기 때문에 동인들을 잡아 죽였다. 천여 명을 죽였다고 한다. 그때 호남인맥의 위대한 학자들이 다 죽었다. 어마어마하게 죽었다. 그리고 서인들이 정국을 완전히 잡게 된다.
그런데 정여립 모반 사건은 완전히 날조된 사건이다. 그걸로 전라도의 정개청 같은 대단한 학자를 다 죽인 것이다. 호남 인맥을 싹쓸이 하다시피 했다.
정개청(鄭介淸, 1529~1590)
나주 출생. 호는 곤재(困齋). 서인 박순(朴淳) 문하. 예학과 성리학에 뛰어난 호남의 명유(名儒)
그리고 그 뒤로 임진왜란 때, 호남지역에서 의병이 가장 많이 일어났다. 왜란을 거치면서 남아있던 호남 인맥마저 싹 죽었다. 그래서 조선 중기 이후로는 호남 인맥이 끊어지는 것이다.
8. 김덕령 장군
임진왜란 때 호남 의병이 대거 일어났는데, 김덕령 장군이 누군지 아는가?
@ 김덕령(金德齡, 1567~1596)
광주 출생. 성혼(成渾)의 문인. 시호는 충장(忠壯). 광주 담양에서 의병일으킨 충용장(忠勇將). 혁혁한 무공에도 불구하고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음.
우리 광산 김 씨 할아버지다. 여기에 충장사라고 있다. 그래서 충장로도 그분의 시호를 따른 것이다.
@ 충장사(忠壯詞)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유적을 기리기 위해 1975년 세워진 사당
이 양반이 호남 지역의 의병장이었다. 덩치가 크고, 어마어마한 장수였다. 기골이 장대하고, 호랑이를 맨주먹으로 때려잡았다고 한다. 아주 어마어마한 칼을 휘두르고, 양 허리에 백 근이 넘는 철퇴를 차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왜병들한테 김덕령의 그림만 보여주어도 벌벌 떨면서 도망갔다고 한다. 그렇게 김덕령 장군은 대단한 분이었다. 그런데 이 분도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전라도 사람은 억울한 일이 참으로 많다.
이몽학이라는 사람이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것을 제압하러 가라고 한다. 그래서 곽재우랑 함께 갔는데, 가다가 난이 평정되었으니 돌아가라고 한다. 그래서 광주로 돌아왔는데, 반란군과 합작해서 모반을 했다고, 20일 동안 고문을 해서, 생으로 죽였다.
@ 이몽학(李夢鶴)
1596년 7월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난을 일으킴. 임진왜란중에도 탐관오리의 발호가 극심했던 민심을 반영한다. 이몽학이 김덕령 장군도 자기편이라고 떠들었던 헛소리 때문에 김덕령은 죽게된 것이다.
설화지만, 이 사람은 목을 칼로 쳐도 안 들어가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죽일 길이 없었다고 한다. 그때 이 사람이 어머니의 상을 당했는데, “나를 죽이려면 ‘만고충신 효자 김덕령’이란 비를 써 달라.”고 요구하여 그대로 하자, “내 다리 아래의 비늘을 뜯고 그곳을 세 번 때리면 죽는다.”고 알려 주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김덕령설화는 우리나라 아기장수설화와 구조적 유사성이 있으며 뛰어난 장수의 억울한 죽음을 비판하는 민중의 설움이 담겨있다. [연려실기술]에 수록.
이게 설화지만, 광주 사람들의 아픈 가슴을 나타내는 것이다.
9. 구한말의 의병
임진왜란의 의병으로 싸운 위대한 사람들이 그렇게 억울하게 죽었다. 그런 억울함 때문에 고경명의 자손 고광순 등, 그런 집안사람들은 구한말에 의병으로 안 나갈 수가 없었다.
@ 고광순(高光洵, 1848~1907)
담양 창평사람. 호는 녹천(漉川). 기우만(奇宇萬)과 함께 의병일으킴. 그의 슬픈 순절비가 구례 연곡사에 남아 있다.
임진왜란의 호남의병과 구한말의 호남의병은 구조적 연속성이 있다.
그래서 일본놈하고 싸우는 의병이 전부 이 호남에서 일어났다. 호남 의병이 그렇게 많이 일어나고, 워낙 거세게 나왔기 때문에 일본놈들은 ‘호남폭도대토벌작전’이라고 해서, 부안에서 하동까지 포위망을 치고, 해남 쪽으로 좁혀가면서 싸그리 죽였다. 군함까지 동원했다. 그러니깐 5.18 광주항쟁과 똑같다.
일본군이 작전정식명칭은 “남한폭도대토벌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이었다. <1909년 9월~10월>
조선의 독립운동사를 보면, 상해 임시정부에 전라도 사람이 별로 없다. 전라도 사람들이 독립정신이 없어서 만주에 가서 싸우지 않은 게 아니다. 이유는 간단한 것이다.
싸그리 죽어 버렸기 때문에 공백기가 있는 것이다. 인물들은 다 죽어버렸기 때문에 독립 운동을 할 여력도 없었다. 동학 때 싸그리 죽었고, 의병 때 싸그리 죽었다. 남은 게 뭐가 있었겠는가?
10. 아! 광주!
그래도 정신은 이어져서, 왜정시대 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난다.
@ 광주학생독립운동
1929년 10월 30일. 광주로 통학하는 나주학생들과 일본학생들이 한국여학생 희롱을 계기로 충돌. 1930년 3월까지 전국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주축이 된 광주고보는 광주일고의 전신이다.
결국 전국으로 퍼져나갔는데, 그때부터 광주 지역의 저항정신이 다시 머리를 들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게 5.18광주항쟁까지 오는 것이다.
5.18광주항쟁 때, 광주 인민들이 당한 것을 생각하면, 광주학생독립운동과 비교해보면, 일본놈들이 우리 광주사람들한테 한 것보다 전두환이 한 짓은 몇 천만 배 더 악독했다.
이러한 불행한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서, 호남 사람들만 맨날 짓밟히고 죽은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저 고인돌 시대부터 끊임없이 이쪽 사람들은 항거했고, 이쪽 사람들은 탄압을 받아서 아주 싹쓸이를 당한 것이다.
계속 그렇게 당하면서 왜 오늘까지 그러한 역사가 살아있을까? 거기에 대한 건 다음 주에 다시 한 번 더 강력하게 말하겠다.
11. 정의와 선(善)
정의란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영어로는 ‘Justice’다. 사실 정의에 대해 이렇게 물으면 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정의가 무엇인지 안다.
정의의 역사는 불의와 투쟁해온 민중의 역사다.
정의의 역사는 불의와의 투쟁의 역사이다. 그럼, 정의와 선은 어떻게 비교되나요?
정의(justice)와 선(goodness)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선(善)은 좋다는 것이다. 정의와 선은 서로 비슷할 거 같지 않은가? 같은 개념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 다른 게 있다. 선은 악을 용서할 수 있다. 불의는 악이지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선은 악을 용서할 수 있다.
정의(正義)는 불의(不義)를 응징한다. 응징의 원초적 방법은 보복이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그런데 정의는 불의를 용서 못한다. 불의를 응징한다. 그런데 이 보복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전두환이 여기에서 그런 짓을 했다. 그래서 우리가 전두환한테 보복한다고 해 보자. 그런데 전두환을 한 사람이 찔러 죽이는 것으로 보복이 되겠는가? 택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천만 명이 가서 천만 번을 찌른다고 하면 되겠는가?
지금 광주에서 희생된 사람이 200명인가? 웃기는 이야기다. 그때 못 죽어도 2,000명이상이 죽었다. 그런데 그 죽은 사람만 문제인가? 살아남은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여러분들 26일 밤, 두 여학생이 한 가두방송을 기억하는가?
27일 4시를 기해서 도청에 계엄군이 들어갔다. 그날 새벽 3시까지 광주 사람들의 가슴은 피멍이 들었다.
“계엄군이 들어옵니다. 들어옵니다. 나오지 마세요. 나오면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끝까지 광주를 사수할 겁니다. 이제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우리는 죽어갑니다. 계엄군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를 기억해주세요...”
광주 사람들 가슴에 그날 밤 피멍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갈 수가 없었다. 한 발자국만 나가면 죽음을 의미하니깐 나갈 수가 없었다.
보복이라는 것으로 이게 해결이 안 된다. 지나친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순환이 된다. 해결책이 아니다.
@ 보복의 한계
1)보복은 충분한 응징이 못된다.
2)보복은 또 보복을 부른다.
3)보복은 불의를 교정치 못한다.
보복이라고 하는 것이, 어떠한 악에 대한 응징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그런 악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정과 시정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보복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근대적인 시민 사회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법질서를 만들어서 항구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를 보장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광주 인민들은 용감하게 끝까지 싸웠다. 도청에 끝까지 있었다. ‘대학생들 다 나가라! 고등학생들 나가라!’고 했다. 도청에 끝까지 있던 사람들은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지금도 그 사람들의 이름은 없다. 나는 5.18 묘역에 가서, 무명용사의 비(碑)에만 절을 했다.
그러니깐 지금, 어떻게 하든지 보복을 하자는 게 아니다. 광주 인민들이 원하는 것은 정확한 정의의 논리를 이 사회에 밝히자는 것이다.
분명히 나쁜 새끼들을 나쁜 새끼라고 역사에서 확실하게 도덕적으로 응징을 해야 된다.
내가 노태우 들어서려고 할 적에 신동아에 쓴 유명한 글이 있다. 그때 내가 뭐라고 그랬는지 아는가? 그때 나보고 이런 말을 한다고, 미친 놈이라고 그랬다.
‘좋은 방법이 하나 있다. 무엇이냐 하면, 전두환을 도청 앞 금남로에 세워놓고, 많은 사람이 운집한 가운데, 손자와 자식을 잃어버린 할머니 한 분이 오셔서 전두환 다리에 회초리를 치게 하자’는 것이었다.
12. 해방과 독립
우리 민족이 8.15해방이 되었다고 하지만, 과연 우리는 진짜 해방이 되었는가?
우리는 1910년 경술년에 치욕을 당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경술국치라고 했다. 우리는 ‘한일합방’이란 말은 쓴 적이 없다. 을사보호조약도 보호조약이란 말은 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을사늑약이라고 했다. 늑탈을 해 간 엉터리 조약이라는 뜻이다.
@ 경술국치(庚戌國恥)
경술년에 당한 나라의 치욕
@ 을사늑약(乙巳勒約)
을사년에 강도놈들이 우리나라를 늑탈해간 조약
우리는 경술국치를 당해서, 우리 집에 들어온 강도새끼들한테, 억압을 당하다가, 1945년 8월 15일 풀려났다. 해방(解放)은 풀 解자와 놓을 放자로 이루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이라고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해방이 독립을 의미하는가? 독립(獨立)이라고 하는 것은 홀로 獨, 설 立이다.
독립 = 독(獨)+립(立) = 홀로서기
즉 홀로 서야 된다. 홀로 선다는 것은 내가 온전한 몸을 가지고, 홀로 설 수 있어야 된다. 다리가 잘리는 건 물론이고, 다리에 가시 하나 박혀도 홀로 서기가 어렵다. 하물며 반으로 잘라진 이 몸뚱이를 가지고, 우리가 홀로 설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8.15로 해방은 되었으나, 우리 민족은 8.15해방을 위해서 싸운 것이 아니라, 독립을 위해서 싸웠다. 독립을 위해서 피를 흘렸고, 독립을 위해서 싸웠다. 그런데 지금 독립이 되었는가? 우리나라는 독립이 안 되었다. 홀로 서 있지 못하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조선 민중의 독립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는 현재의 역사이다.
복잡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우리 독립의 역사, 그리고 독립의 역사와 호남의 역사가 어떻게 결부되며, 이것이 광주민주항쟁의 문제까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다음 주에 한 번 더 힘차게 강의하겠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