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이어준 첫사랑 영상
김 선 구
초가을이 되니 이웃들판에 메밀꽃들이 활짝 피었다. 문득 이효석의 작품 “메밀꽃 필 무렵”이 뇌리를 스쳐간다. 봉평에서 대화로 이어지는 길가 메밀밭에도 꽃이 만발했을 터인데, 그 사이로 허생원의 객기어린 헛기침소리가 들릴 것 같다. 물래 방앗간에서 맺었던 첫사랑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그의 마음이 환희로 차 있을 법도하다.
언제였던가. 아내가 동창회에 간다며 충청도 어딘가에 다녀오더니 느닷없이 한마디 던졌다. “나 이번에 당신첫사랑을 만났거든. 원래 심성이 착한 애였는데 옛날 모습 그대로더군요.”
나를 놀려대려는 것인지, 어떤 반응을 기대해 보는 것인지 묻지도 않은 말을 지껄였다.
“동창회에 가서 뭐 잘못 먹은 거라도 있어? 생뚱맞게 웬 첫사랑 타령이야.”
핀잔을 담은 질책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이번 동창회에서 M을 만났거든. 처음은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아 서먹했는데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더니 무척 반가와 하는 거야. 내가 좀 당황했거든. 그런데 하룻밤 같이 지내고나니 정이 많이 들었어.”
제주출신으로 육지에 나와 살고 있는 여학교 동창들이 한 곳에 모여 하룻밤을 같이 지냈단다. 거기에서 M을 만났던 모양이었다.
아내에게서 M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내 귀가 솔깃했다.
“뭐? 그래. 어떻게 지낸데. 잘 사는 것 같았어?
별로 큰 관심이 없는 척 하면서 슬쩍 말을 던졌다.
“잘 모르겠는데. 서울에서 치킨센터를 운영한데나! 늦게 결혼 했나봐. 아직 초등학생인 아들을 데리고 왔어. 애가 하나뿐이래.” 나의 양쪽 귀가 점점 더 곤두섰다.
M이라는 여인은 내 아내와 중 고등학교 동창이면서 나와 맞선을 보았던 사이였다.
청년시절 나는 장래가 막막하고 일에 쫓겨 지내다 보니 늦깎이 총각신세를 면치 못했다. 혼기가 늦어지고 보니 집에서 성화였지만 혼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신부 감을 구했으니 한번 만나보라”는 연락이 왔다. 신부 감은 나의 종숙부의 처가 쪽으로 조카뻘 되는 처자라 했다. “아들을 장가보내지 못해서 걱정”이라는 아버지의 하소연을 듣고 종숙모가 나서서 신부 감을 알선해 주었다. 그 때 만났던 아가씨가 바로 M이었다.
우리는 한 번 만난 후 서로 호감을 갖고 자주 만났다. 함께 탁구도 치고, 다방에 마주 앉아 오붓하게 얘기도 나누었다. 그녀는 가족들이 서울에 있었지만 제주에서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어느 조그만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사연인 즉 할머니가 제주에서 혼자 살고 있었으므로 일찍이 제주도에 내려와서 함께 살았다고 했다. 그녀의 효심과 착한 심성에 매료되어 나는 내심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데이트 장소에 갔더니 심각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나보다 더 낳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 하세요. 저는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습니다.”라 했다. 예상 밖의 통보에 나는 망연자실 했다. 자초지종을 따져보지도 못하고 냉가슴만 앓다가 헤어졌다. 나중에 종숙모를 통해 들은 얘기다. 처음 그녀는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의 만남에 응했다. 만남이 거듭 될수록 결혼을 서둘러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수용 할 만 한 처지가 되지 못했다. 아버지 사업도 시원치 않았고, 할머니 살림도 그렇고, 자신이 저축해 놓은 것도 별로 없고. 고민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란다. 조카를 혼내주려고 갔다가 마주 앉아 한숨만 쉬다가 왔다고 했다. 그 날 밤 나는 종숙부와 늦게 술을 마시며 시름을 달랬다.
그런 후에도 만남의 기회가 한 번 있었다. 서울 출장을 마치고 제주로 돌아가려고 공항에 가 있는데 누군가 나의 등을 콕 찔렀다. 뒤돌아보니 M이었다. 반갑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뜻밖이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당황해 하는 것과 달리 그녀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제주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에서 가족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했다. 나와 인연을 계속해보지 않겠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 속에서만 맴돌았다. 속이 타는 가운데 비행기 탑승을 알리는 방송 때문에 그냥 헤어졌다. 내 마음이 아쉬움으로 가득했고 그녀의 미소 띤 얼굴만이 눈앞에 어른 거렸다.
그 후 현재의 아내와 만남을 가졌다. 혼사문제가 거의 성사 될 무렵 아내를 데리고 종숙부의 집을 방문했다. 종숙모가 나의 아내를 보자마자“ 너 ○○아니가?” 하고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아내가 초등학교 시절 종숙과 이웃에 살아서 잘 아는 사이였다. 아내를 정식으로 소개하자 잘 됐다고 하면서도 내심 섭섭한 표정이었다. 종숙모는 자기 조카 일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넋두리처럼 옛 일을 되뇌는 바람에 M과의 일이 아내에게 알려졌다. 아내는 학창시절 M과 오래 동안 한 교실에서 지낸 관계로 그녀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를 동정하는 눈치였다. 그 이후 아내가 M을 나의 첫사랑이라고 낙인찍어 놓았다. 필요할 때면 나를 놀릴 요량이었다. 그렇지만 새 살림에 열중하다보니 관심에서 지워져 버렸다.
자녀들이 성장하여 혼기에 이르자 아내가 동창들을 만나는 일이 잦아졌다. 서로 상부상조 할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 출입이 많았다. 서울에서 동창들을 만나고 올 때면 나의 첫사랑 소식도 함께 가지고 왔다. “아 글쎄 오늘 예식장에서 M을 만났거든. 홀에 서 있는데 누가 내 등을 콕 찌르는 게 아냐. 돌아다보니 M이였어.” “그 애의 그런 행동이 반가움의 표시인가 봐” 아내가 M을 거론 하며 내 눈치를 살핀다. 그럴 때면 그녀의 모습이 영상처럼 떠오른다.
여차 했으면 내 인생을 바꿀 번한 여인이었다. 그래서일까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얘기들이 좀 있다. 잊혀질듯 하다가 다시 이어지는 첫사랑의 영상. 그 중개역할을 아내가 해준다. 언젠가 아내가 내게 물었다. “우리가 부부라는 사실을 M은 알고 있을까?” “글쎄!, 나도 궁금한 게 많은 데 언제 한번 만나보면 어떨까?” “글쎄!” 아내의 대답이 신통치 않다. 그래, 아니지! 그러면 첫사랑의 영상이 깨져버릴 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직도 숫처녀의 모습으로 닥아 온다. 아내의 주름살 너머로 선하고 해 맑은 얼굴로 미소 짓는다. 나는 들킬세라 허생원의 헛기침을 흉내 내며 아내의 얼굴을 쳐다본다.
첫댓글 달구벌 수필 카페에서 기 안면이 있는 글이지만 읽을수록 첫사랑의 향기가 묻어나는 글입니다. 아내의 친구이면서 아직 부부인줄 모르는것 같습니다. 아직도 숫처녀의 모습으로 닥아오는 첫 사랑의 영상을 길이 간직 하려면 평생 비공개가 좋을듯....아름다운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등을 콕 찌르며 환하게 웃는 그 분의 예쁜 모습이 떠오릅니다.
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시는 사모님께서 첫사랑의 영상을 묵인 해 주실것 같습니다.
첫사랑은 나만 간직하고 살아야 하는데 가장 가까운 분이 알고 중계하니 공개하여도 될것 같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같으면 어떻게 되었을것 같기도 하고, 순수한 순정만화 같기도 하여, 훗날 보물보다는 약한 문화재 정도는 될것 같습니다. 순수하고 좀 안타까운 첫사랑 영상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첫사랑 '여차하면 내 인생을 바꿀 뻔한 여인'의 이야기가 한 편의 가슴설레는 단편소설 이야기같습니다. 헤어짐을 선언한 후의 우연한 만남에서도 ' 등을 콕 찌르며' 아는체 하고 빙그레 웃는 M이라는 분은 성품이 맑고 석염선생님을 많이 좋아하신 것 같습니다. 사모님께서 첫사랑이라고 아시다가 첫선을 본 사이라는 것을 아시면 조금 다른 반응이 나올 것 같기도 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냥 계속 첫사랑의 영상을 간직하시고 가끔 아내분을 통해 소식을 듣는것에 만족하시는게 좋을듯합니다. 첫사랑은 이루지지 못할 때 더 애틋하기에 지금도 선생님 마음에 첫사랑의 선하고 해맑은 미소가 남아있지 않을까요.만나는 순간 그 영상이 깨져버릴것 같아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그 인연이 다시 싹트고 있음이 부럽습니다. 사모님도 응원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소년의 사랑과 노년의 사랑은 순수하기에 아름답습니다. 좋은 관계로 즐겁고 풍요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가슴아리도록 소중한 첫사랑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그리워하며 추억하는 것이 첫사랑이라고 하지요? 늘 곁에 계시는 사모님과의 행복한 삶이 첫사랑의 아림을 다 덮어주시겠지요?
남자는 첫사랑을 여자는 마지막 사랑을 가슴에 안고 산다고 어느 모임에서 들은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통해 첫사랑이 생각나서 피식 웃음이 나왔답니다. 비슷한 사연이었거든요. 친구 결혼식날 사회를 봐주고 신부 친구들과 따로 미팅을 했었는데 그 장소에 지금의 아내랑 첫사랑이 친구사이로 한자리에 같이 있었답니다. 나중에 알게 되어 둘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합니다. 모르는 게 약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옛 생각을 하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결혼을 전제로 맞선을 보고 만남을 이어 온 첫사랑 M.. M의 소식을 사모님을 통해서 듣는 아이러니함... 사모님께서 이어 준 영상을 통해 아닌척 그리움에 젖어보는 내용이 정말 한편의 소설같습니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 풀어내신 것 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순수했던 사랑이야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첫사랑은 언제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그때가 그리워지는 것 같습니다.
이루어지지 앉아서 애틋하기도 하고, 사람의 운명은 두갈래 길을 모두 다 가볼 수 없기에 미련이 남게 되고, 현재 회장님 내외분의 넉넉한 마음과 여유로움이 있어 친구의 첫사랑 영상을 유지시켜 주는게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사랑이야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