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농 오문복 선생과 인연을 떠 올리다
글/ 이승익
인연因緣이란 무었일까. 사전적 의미의 인연이라 함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사람이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 를 인연이라 하지요.소농 오문복 선생님과 나의 인연은 어떻게 이루어져 오늘일까.
특히 비학비천非學卑賤한 내가 소농선생님과의 인연은 칠순의 나이를 먹은 지금도 대단한 행운이며 일생의
멘토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소농 오문복 선생(이하 소농선생)을 안지는 꽤 오래됐다. 필자 젊은 시절 (80년대 초) 성산읍 고성리
성산면사무소 앞에서 농자재 유통사업을 할때 알았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40년이 넘은듯 하다. 아마 그당시
소농선생은 40중반으로 서귀포 소암 현중화 선생으로 부터 서예를 배우고 있었으며, 한편으론 '관광제주'란
월간지를 발간하여 그 대표를 맡고 있었다. 지금도 잡지 발행이 쉽지 않지만 그당시 잡지 발행은 물적으로
심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그런 저런 연유로 인하여 소농선생과 가까워 진듯하다.
서귀포문협을 대표하는 '서귀포문학' 39집 편집장이신 송인영 문우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소농 오문복' 평설을
쓰라고 하여, 아무리 생각해도 소농선생 평설을 쓸 준비가 전혀 없을 뿐 더러 그 실력 또한 갖추지 못함을
한탄하면서 나름대로 그간 소농선생과 나 사이 지나온 소소한 이야기들과 애피소드 또는 단편短篇적인 사항
들을 생각나는대로 두서없이 쓸까 한다.
ㅇ 창침정窓枕亭 건립하다
2011년 10월 29일 신풍리 천미천 변 작은 언덕에 창침정이란 정자를 세웠다. 이는 단순한 정자가 아닌 스토리가
있는 정자를 세워 잔잔한 감동을 주웠다. 성산읍( 그당시 읍장 고주영) 주관하에 故 윤춘광 제주도의원의 제량
사업비 기천만원을 투입하여 한옥형태로 그럴듯하게 세워 성대한 건립 현판식을 가졌다. 그당시 제주도내 각
언론사에 보낸 보도자료를 서술하여 창침정 정자의 의의를 밝히려 한다.
<성산읍 신풍리 천미천 냇가에 한옥 형태의 창침정窓枕亭이란 정자가 세워졌다. 이 정자가 있었던 곳은, 옛부터
신풍마을 중심으로 인근 마을인 삼달.난산.가시.토산의 문인들이 모여 송포희送泡戱를 하기도 하며 시회詩會를
열었다고 알려진 곳이다. 향토사학자 소농 오문복 " 시회가 시작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개 광무(光武) 연간으로
추측되며 시회의 명칭은 화천시사(花川詩社)였으며 왜정시대를 거처 광복 이후까지 유지되였다" 고 말한다.
이처럼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높은 곳에 정자를 세운 뜻은. 물질만을 앞세우고 정신을 뒤로 미루는 시대 풍조를
바로잡고 문풍을 일을키는 첫 걸음으로 이 내(川)를 시로 읊은 의청(毅淸) 오진조(吳眞祚 신풍출신 조선시대 유학자)
선생의 원필을 찾아 묵적비(墨跡碑)를 세운 곳에 정자를 지어 그 의미가 남다르며 정자의 이름을 '창문이 베개가 되는
정자 창침정(窓枕亭)이라 한것은 묵적비( 원시)의 제목 창앞에 흐르는 물 베개가에는 책 (窓前流水沈邊書)에서
첫 글자를 뽑은 것으로 '창문을 베고 물소리 들으며 보이지 않은 정신세계를 더듬는다' 는 뜻이라고 한다.>
이처럼 오묘한 뜻이 있는 창침정 건립과 현판식 전과정을 성산포문학회 주관으로 가저 뿌듯한 마음이다.
이는 소농선생의 향토관과 역사관을 아우르는 쾌거가 아닐 수 없다. 필자 또한 이 일에 깊게 관여하여 문화적
바탕을 우리 지역에 미력이나마 남기는대 일조를 했다는 자부심을 갖는 바이다.
ㅇ 소농선생 첫 전시회 素農 吳文福 詩書畵展 가지다
성산포문학회가 창립하여 1년쯤 된 어느날 성산포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소농선생 애제자인 한용택(서예가
호. 雲菴) 문우와 술잔을 기우리던중 다짜고짜로 "운암, 소농선생 전시회 열어드리면 어떨까" 라고 운을 떼자
운암도 싫지않은 모습이다. 그러면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듯이 아무날 날잡아서 서귀포시청 문화예술과에
가보자고하여 둘이서 난생 처음 문화예술과를 녹크하여 과장님과 전시회에 대하여 의논을 하였다. 그 당시
과장님은 이 외로 협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소농선생 이름이 널리 알려진 듯 매우 협조적이였다.약간의 보조금을
약속 받은 후 문학회 회의를 소집하여 소농선생 첫전시회를 성산포문학회 주관으로 열기로하여 제반 사항을 준비
하였다. 처음 겪는일이라 어떻게 행사를 진행 할지 매우 난감하였지만 주위의 도움을 받으면서 일을 진행 하였다.
특히 김순이(시인. 전제주문협 회장 역임) 시인의 협조가 큰 도움이되였다.김시인은 전시작품 판매에도 두각을
나타내였다. 전시회는 성황이였다. 전시기간 일주일 내내 사람들로 북적 거렸다. 전시기간 동안 가슴 떨린 날이였다.
그 당시 스크랩 기사를 보면 대성황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성산읍이 생긴 이래 대 성황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들을 하고 있다
<9월9일 오전 10시에 열린 개막식에는 우근민 전도지사.그리운바다 성산포의 이생진 원로시인.전방언 제주도
서예작가협회 이사장을 비롯해 150여명의 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하게 진행 되였다. 식전 축하 행사로는
강재천.진순애.강추자씨 등 국악인들이 출연하여 대금.판소리.민요등을 공연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소농선생 시서화전에는 각종 서체의 서예작품과 사군자를 비롯한 수묵화 100여점의 작품이 전시되였다.
전시회장을 찾은 관람인들은 제주의 빼어난 경치를 소개하는 10폭짜리 병풍 영주10경을 비롯해 부채 족자등에
담긴 소농선생의 한시등을 감상하며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전시기간 내내 회원들이전시장을 지키며 오는 손님들을
접대하며 분주하게 움직이였던 일이 주마등 처럼 떠 오른다. 지금 그일을 하라고 하면 할 수도 없을뿐만 아니라
그 열정을 살릴 수도 없지 싶다.성산포문학회의 큰 족적을 남긴 행사라고 자부하고 싶다.
ㅇ 경독재耕讀齋를 들여다 봄
소농선생 하면, 서재로 사용하는 경독재를 빼놀 수 없다. 경독재는 소농선생의 평생동안 집필과 서예의
산실이며 소농선생과 소통하는 모든 이들의 사랑방이다. 그리 높지않은 얕으막한 집은 옛날 모습 그대로다.
일설에 의하면 경독재 본체는 정의현 소재지였던 성읍리 여느 관청집(?) 이문간(드나드는 문) 이라 들었다.
어떤 연유로 경독재가 생겼는지 모르지만 소농선생과 썩 어울리는 집이 아닐 수 없다.
우선 경독재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서재 옥호가 눈에 띄는데 경독재耕讀齋란 글씨는 평생의 스승인 소암선생께서
직접 썼다고 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으로 소농서실素農書室 휘호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 역시 소암선생
글씨다. 다른 벽면엔 소농선생과 교유했던 이들 글과 그림이 걸려 있다. 특히한 점은 평생의 스승인 소암선생과
춘산이상학 선생 영정이 사이를 두고 걸려있다.
경독재 마당은 조선시대 선비집 모습을 닮았다. 눈에 띄는 나무만 보더라도 매화, 드릅, 비파, 오죽 등 여러가지
나무가 연못을 애워싸 선비집 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짐작컨데 경독재는 지금도 유명하지만 후대엔
우리지역 문화 산실로 메김되여 그 빛을 유감없이 발휘 할 것으로 유추한다.
ㅇ 나의 호 죽범竹凡 명명 일화
80년대 어느날 소농선생으로 부터 경독재(耕讀齋 소농선생 서재)에 소암 선생님 오셨으니 잠깐 다녀가란
전갈이다. 소농선생 부름으로 소암선생님을 처음 뵈였다. 양주 한 병과 약간의 안주(기억 안남)로, 소암께
소농선생의 간곡한 부탁으로 나의 호를 짖는데 첨엔 죽음竹陰이라 지었다. 그런데 그 호를 받고 음미
해보니 < 죽음---죽다---죽었다>라는 썩 내키지않은 이름이기에 불문곡직 '선생님 죽음竹陰이란 호는 조금은
거시기 합니다' 라고 중얼거렸다. 소암선생님께서는 금새 눈치 채시곤 한참 생각에 잠기시다 "그럼
죽범竹凡은 어떤가"? 하기에 '네, 선생님 황공 무지로소이다' 하고 얼른 받았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 땀이 주르르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죽범竹凡이란 호를 받았지만 아직은 사용(?)을 안한다.
그 이유인 즉 대나무는 오래 전부터 선비 사이에서 절개 혹은 굳은의지, 올곧은 기상을 상징하는 사군자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저에겐 가당치도 않고, 앞서 얘기한 절개.의지.기상하고는 한참이나 먼것 같아
쓰기를 망설이고 있음을 밝힙니다. 이젠 나이도 70을 넘겼으니 아주 조금씩 사용하면 어떨까 숙고 중입니다.
ㅇ 에필로그
지난 일을 돌이켜 보면 소농선생에게 가장많이 저둘린(괴롭히다?) 사람이 필자이다. 어느날은 한무리의
동인들을 선생께 인사 시키곤 휘호를 부탁하여 땀을 흘리게 하였고 어느 날은 선생을 모시고 행사(?)에 참석
하게하여 화선지에 글을 쓰시게 하여 곤혹스럽게 하였다. 미수를 코앞에 둔 소농선생은 한 때 열두엇명 휘호를
한 자리에서 거침없는 필력을 과시 한 적도 있었다. 아마 필자가 기억하기론 소암선생 작고 후 힐素에서 적을小
호인 小農을 사용 할때가 필력이 높지 않았나 감히 유추하는 바다.
평생 흐트럼짐 없이 살기가 쉽지 않은데 소농선생은 이날 이때까지 한 올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임하고 있다.
감히 지칭하건데 이 시대 마지막 선비라 할 수 있다. 소농선생은 평생의 스승으로 소암素菴현중화 선생, 의재
毅齋허백련 선생, 춘산春山 이상학 선생을 평생 스승으로 모시며 소암으로 부터는 서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소농은 오로지 소암의 길을 따랐다. 글씨에 관한한 좌고우면 하지않고 소암의 길을 따라, 소암에게는 수많은
제자가 있지만 소암의 으뜸 제자는 소농이라 하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소암素菴선생은 소농선생에게 서예만 일깨운 게 아니고 소암선생의 예술혼을 아낌없이 주신 분이다. 한예로
스승인 소암선생이 돌아가시자 3년동안 하얀 두루마기(상복)를 입어 스승을 추모했다. 한편으론 3년상 동안
素農호를 小農으로 낮추어 쓰는 모습을 보여 끝까지 예를 다하신 분이다.
소농선생은 초,중,고,대학을 전라도에서 다녔다. 소농 선친께서 전라도 지역 학교에서 교편을 잡은탓도 있지만
그 당시 제주도 시골 삶이 어려움과 함께 가정형편도 불안하여 선친이 계신 전라도 지방에서 학업을 마친줄 안다.
이러한 인연으로 광주에서 활동하는 의재毅齎 허백련의 문하에서 그림 공부를하여 평생의 스승으로 삼았으며
의재 문하의 제자들과 아직도 소통을 하고있다.
또한분의 스승 으로 춘산春山 이상학을 들수 있다. 춘산 이상학선생은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은 유학자로
평생 고향인 합천에서 상투를 틀고 도포에 갓을 쓴 차림으로 살며 제자를 길렀다. 소농선생은 1975년부터
춘산선생으로 부터 한시를 익혀 춘산선생의 맥을 고스란히 이여 받았다.
이렇듯 고매하신 스승을 둔 소농선생은 성산포문학회 고문으로 추대되어 문학회 스승으로 모시며 정신적 학문적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매년 5월15일 스승의 날엔 회원 전원이 경독재에 모여 소찬을 나누며 선생님의 작품(소품)
을 하나씩 받는 즐거움을 가진다. 위에 열거한 일들이 큰일들은 아니지만 필자 나름대로는 보람된 일이라 여긴다.
소농선생과 인연을 맺은 이후부터 저둘리기만 했다. 그 저둘림의 중심에 필자가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가끔씩 경독재 소농선생을 찾아 뵈면 건강한 듯 하지만 알게 모르게 불편한 듯한 모습을 보인다.
평생 술,담배를 멀리 하셨지만 나이는 못속인다는 말처럼 많이 야윈 모습이다. 다행인것은 소농선생 몇몇 제자
중심으로 마지막 시.서.화 전시회를 금년 12월 초 문예회관에서 갖는다고 한다. 아마 소농선생 평생 연마한
서예 작품이 집대성한 모습이 연출되지 않을까 기대가 된다. 이름하여 ' 素農 吳文福 米壽展', 큰 성황을 이루길
기원하며 어줍잖은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