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사(金蘭史) 선생(1872.09.01 ~ 1919.03.10.)은 독립운동가, 교육자. 이화학당에 입학해 수학했으며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을 도와 영어와 성서를 가르치면서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섰고, 이후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여성들의 자각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872년(고종 9) 평안남도 안주(安州)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이다. 원래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그밖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고, 란사라는 이름은 이화학당(梨花學堂)에 입학해 세례를 받은 뒤 영어 이름 ‘Nancy’(낸시)를 음역해 ‘蘭史’로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그녀는 가정에만 매이지 않고 서구 문명을 접하는 한편, 1896년에는 24살에 기혼자라는 이유로 이화학당에서 입학을 허락하지 않자 당시 교사로 있던 프라이(L.E.Frey)를 찾아가 결국 입학을 허락받았다.
졸업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도쿄[東京] 게이오의숙대학교[慶應義塾大學校]에서 수학했다. 김란사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학구열은 대단했다. 김란사의 남편 하상기는 당시 인천항의 통상 업무를 담당하는 감리서(監理署) 책임자였는데, 남편 덕분에 외국 문물을 자주 접할 수 있었고 신학문의 필요에 눈을 뜬걸로 생각된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남편의 뒷받침으로 자비를 들여 1900년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보고 듣는 새로운 사실에 비해 세상은 너무도 닫혀 있었다.
1900년 미국에 유학해 감리교 계통의 웨슬리대학에 입학, 1906년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후 줄곧 양장차림으로 활동한 그는 긴 소매가 끝에 가서 좁혀 주름잡히고 목 둘레도 꼭 여며진 웃저고리에, 발 뒷굽까지 내려오는 긴 스커트를 입고 채양이 넓은 둥근 모자에 검은 망사 그물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자가용차를 타고 외출하는 것이 예사인 우아한 품위있는 여인이었다."
이는 「이화 80년사」에 실려 있는 글이다.
어느 여성에 관한 이 글은 일찌감치 시대에 눈을 뜬 궁중의 여인이거나 한가한 상류층 여성을 연상케 한다. 미국 유학이니, 망사 그물이니, 자가용차라는 표현으로 봐서는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닌 듯도 하다.
하지만 이 글은 1908년경의 상황을 설명한 것이고, 그 주인공은 김란사(金蘭史)이다. 글의 첫 부분에 보이는 ‘미국 유학’은 자비 유학을 말한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의지로 미국에 유학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녀 이전에도 미국에 건너가 공부한 한국인으로는 서재필과 유길준, 김점동 등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에 의해 순수하게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한 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귀국과 동시에 미국 북감리교회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을 도와 영어와 성서를 가르치면서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섰고, 이후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자모회를 구성해 가정의학·육아법 등의 지도는 물론, 계몽강연을 통해 여성들의 자각을 촉구했다.
이화학당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영어를 가르치는 한편 선교사들과 학생들의 교량 역할을 했다. 그때 그녀는 학생들에게 틈만 나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꺼진 등에 불을 밝혀라"
그녀는 고종의 통역도 맡아 했다. 또 엄비와도 친교를 가져 엄비가 '숙명'과 '진명'을 개교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엄비: 광무제 제1후궁, 영친왕 출산 훗날 순비. (순헌황귀비)
특히 1907년부터 이화학당의 학생 자치단체인 ‘이문회’를 지도하면서 민족의 현실과 세계 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고, 1911년 이화학당 대학과 교수이자 기숙사 사감이 되었으며,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모금한 자금으로 정동제일교회에 한국 최초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그녀의 제자 중 유관순 열사가 있었다. 위대한 영웅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게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귀인을 만나고, 용기를 내고, 그런 선택들이 모여서 삶의 바뀌고, 개인적인 선택이 아닌 역사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운명이었다.
1910년 국권피탈(경술국치) 이후에는 독립운동가들과 수시로 왕래하며 이때 은둔 중이던 고종의 밀지를 받아 1919년 6월 파리 강화회담에 의친왕(義親王)을 파송할 비밀계획을 추진하다 갑작스러운 고종의 사망으로 실패하자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갔다.
고종의 사망은 훗날 일제의 독살로 판명 났다.
그러나 베이징에 도착한 뒤 교포들이 마련한 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이 잘못되어 결국 사망했는데, 단순한 병사나 자연사가 아니라 독살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분명하지 않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