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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14 충청도
예전 마한(馬韓) 지역인데 고구려와 백제가 그 땅을 나누어 차지하였다가, 뒤에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고려 성종(成宗) 14년(995)에 나라 안을 나누어 10도(道)를 만드는데, 충주(忠州)ㆍ강주(剛州)ㆍ환주(歡州) 등
13주(州)로 중원도(中原道)를 만들고, 공주(公州)ㆍ운주(運州) 등 11주로 하남도(河南道)를 만들었다.
예종(睿宗) 원년(1105)에 관내도(關內道)에 합하여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라 일컬었다가 명종(明宗) 원년
(1170)에 나누어 두 도(道)를 만들었고, 충숙왕(忠肅王) 원년(1313)에 다시 합하여 한 도를 만들어 양광도(楊廣道)
라 일컬었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1)에 충청도(忠淸道)로 일컫고, 신우(辛禑) 말년에 본도의 평창군(平昌郡)을
베어서 교주도(交州道)에 옮겨 붙였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4년(1395)에 양주(楊州)ㆍ광주(廣州)의 관할인 군ㆍ
현은 경기(京畿)에 붙이고, 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의 관할인 군ㆍ현은 그대로 충청도
(忠淸道)로 일컬어 각각 관찰사(觀察使)를 두었다.
공정왕(恭靖王) 원년(1398)에 영월군(寧越郡)을 베어 강원도(江原道)에 붙이고 강원도 영춘현(永春縣)을 본도에
붙였으며, 태종(太宗) 13년(1413)에 여흥(驪興)ㆍ안성(安城)ㆍ음죽(陰竹)ㆍ양성(陽城)ㆍ양지(陽智)를 베어 경기
에 붙이고, 경상도(慶尙道) 옥천(沃川)ㆍ황간(黃澗)ㆍ영동(永同)ㆍ청산(靑山)ㆍ보은(報恩)을 본도에 붙였다.
목(牧) 4, 군(郡) 12, 현(縣) 38개를 관할한다.
관원 관찰사(觀察使) : 한 사람이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두 사람인데, 하나는 관찰사가 겸한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두 사람인데, 하나는 관찰사가 겸한다.
병마우후(兵馬虞候) : 한 사람인데, 종3품(從三品)이다. 여러 도가 같다.
수군우후(水軍虞候) : 한 사람인데, 정4품(正四品)이다. 여러 도가 같다. 도사(都事) : 한 사람이다.
심약(審藥) : 두 사람인데, 하나는 관찰사도(觀察使道)이고 하나는 병마절도사도(兵馬節度使道)이다.
검률(檢律) : 한 사람이다.
[비고]
연산군(燕山君) 11년(1505)에 충공도(忠公道)로 고쳤다 : 진천(鎭川)ㆍ괴산(槐山)ㆍ평택(平澤)ㆍ아산(牙山)을
경기도에서 이속시켰다가 중종(中宗) 원년(1506)에 다시 환원했다. 명종(明宗) 5년(1550)에 청공도(淸公道)로
고치고, 광해주(光海主) 5년(1608)에 공청도(公淸道)로 고치고, 인조(仁祖) 6년(1628)에 공홍도(公洪道)로 고쳤
다가 24년(1646)에 홍충도(洪忠道)로 고치고, 효종 7년(1656)에 공홍도(公洪道)로 고치고, 현종(顯宗) 11년(1670)
에 충홍도(忠洪道)로 고치고, 숙종(肅宗) 6(1680)년에 공홍도로 고치고, 영종(英宗) 5년(1729)에 공청도(公淸道)
로 고쳤다가 7년에 충청도로 고쳤다. 정종(正宗) 원년(1776)에 홍충도로 고치고, 순조(純祖) 25년(1825)에 공충도
(公忠道)로 고쳤다가 34년에 충청도로 고쳤는데, 철종(哲宗) 13년(1862)에 공충도로 고쳤다.
모두 54읍(邑)이다. 《大東地誌》
고종(高宗) 33년(1896)에 좌우도를 남북도로 하였다.
북도는 충주(忠州)가 다스리는데 관할 영군은 17개이다. : 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옥천(沃川)ㆍ진천(鎭川)ㆍ
청풍(淸風)ㆍ괴산(槐山)ㆍ보은(報恩)ㆍ단양(丹陽)ㆍ제천(堤川)ㆍ회인(懷仁)ㆍ청안(淸安)ㆍ영춘(永春)ㆍ영동(永同)ㆍ
황간(黃澗)ㆍ청산(靑山)ㆍ연풍(延豐)ㆍ음성(陰城). 남도는 전에 공주가 다스렸던 37군이다. : 공주(公州)ㆍ홍주(洪州)ㆍ한산(韓山)ㆍ서천(舒川)ㆍ면천(沔川)ㆍ서산(瑞山)ㆍ덕천(德川)ㆍ임천(林川)ㆍ홍산(鴻山)ㆍ은진(恩津)ㆍ태안(泰安)ㆍ
온양(溫陽)ㆍ대흥(大興)ㆍ평택(平澤)ㆍ정산(定山)ㆍ청양(靑陽)ㆍ회덕(懷德)ㆍ진잠(鎭岑)ㆍ연산(連山)ㆍ노성(魯城)ㆍ
부여(扶餘)ㆍ석성(石城)ㆍ비인(庇仁)ㆍ남포(藍浦)ㆍ결성(結城)ㆍ보령(保寧)ㆍ해미(海美)ㆍ당진(唐津)ㆍ신창(新昌)ㆍ
예산(禮山)ㆍ전의(全義)ㆍ연기(燕岐)ㆍ아산(牙山)ㆍ직산(稷山)ㆍ천안(天安)ㆍ문의(文義)ㆍ목천(木川).
후에 오천(鰲川)을 더 두어 모두 38군이다. 《文獻備考》
충주목 忠州牧
동쪽으로 청풍군(淸風郡) 경계까지 28리이고, 남쪽으로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48리이고, 연풍현(延豐縣) 경계
까지 31리이고, 서쪽으로 음성현(陰城縣) 경계까지 51리이고, 경기도 여주(驪州) 경계까지 78리이고,
경기도 음죽현(陰竹縣) 경계까지 66리이고, 북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45리이고, 강원도(江原道) 원주
(原州) 경계까지 58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혹은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하고, 혹은 완장성(薍長城)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빼앗았다.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여 귀척(貴戚)의 자제와 육부(六部)의 호민(豪民)
을 옮겨서 채웠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성종(成宗) 2년(983)에 목(牧)을 두었다가 14년(995)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창화군(昌化軍)이라 이름
하여 중원도(中原道)에 예속하였다.
현종(顯宗) 3년(1012)에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로 만들었다가 9년에 8목(牧)의 하나로 만들었고, 고종(高宗)
41년(1254)에 승격하여 국원경(國原京)으로 만들었다가 뒤에 다시 목으로 만들었는데,
본조(本朝)에서 그대로 인습하였다. 세종(世宗) 31년(1449)에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파하였고,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진관 군(郡)이 셋이고 : 청풍(淸風)ㆍ단양(丹陽)ㆍ괴산(槐山). 현(縣)이 넷이다. : 연풍(延豐)ㆍ음성(陰城)ㆍ영춘
(永春)ㆍ제천(堤川).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각 한 사람씩이다.
군명 국원(國原)ㆍ대원(大原)ㆍ예성(蘂城)ㆍ중원(中原)ㆍ창화군(昌化軍).
성씨 본주 서(徐)ㆍ석(石)ㆍ최(崔)ㆍ유(劉)ㆍ강(康)ㆍ양(梁)ㆍ진(秦)ㆍ안(安)ㆍ박(朴)ㆍ매(梅) : 사성(賜姓)이다.
○ 중원 제남(中原 濟南)ㆍ해(嵇)ㆍ어(魚)ㆍ지(池)ㆍ노(盧)ㆍ연(延) : 모두 촌(村)이다. 견(堅)ㆍ정(鄭) : 모두 내(來)
이다. 덕산(德山) 석(石)ㆍ연(延). 소내림(所仍林) 석(石)ㆍ최(崔) 감물내미(甘勿內彌) 김(金)ㆍ노(盧)ㆍ유(劉)ㆍ
석(石). 이차탄(伊次呑) 채(蔡)ㆍ박(朴)ㆍ윤(尹). 익안(翼安) 지(池)ㆍ어(魚). 광반석(廣反石) 최(崔)ㆍ안(安).
풍속 백성의 풍속이 검소하고 인색하다. : 《지지(地志)》
형승 남쪽 방면의 요해처에 자리잡고 있는 땅이다. : 정인지(鄭麟趾)의 기(記)
산천 대림산(大林山) : 주(州) 남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말흘산(末訖山) : 주 북쪽 30리에 있다.
심항산(心項山) : 주 동북쪽 9리에 있다. 마산(馬山) : 주 서쪽 30리에 있다. 망이산(望夷山) : 주 서쪽 91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 주 동쪽 45리에 있다. 또 청풍군(淸風郡) 조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월악(月岳)을 보니 중원(中原)에 비껴 있는데, 한강의 물이 처음 발원했네." 하였다.
천룡산(天龍山) : 주 서쪽 50리에 있다. 정토산(淨土山) : 혹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한다. 주 북쪽 33리에 있다.
견문산(犬門山) : 주 서쪽 8리에 있다. 그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
풍류산(風流山) : 주 남쪽 23리에 있다. 가섭산(迦葉山) : 주 서쪽 45리에 있다. 국망산(國望山) 주 서쪽 51리에 있다.
장미산(薔薇山) : 주 서쪽 28리에 있는데, 옛 석성(石城)이 있다.
천등산(天燈山) : 주 북쪽 40리에 있다. 개천사비(開天寺碑)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당(唐)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세웠다." 한다. 비문은 닳아서 읽을 수가 없다.
오동산(梧桐山) : 주 동쪽 7리에 있다. 금봉산(金鳳山) : 주 동쪽 5리에 있다.
종당산(宗堂山) : 주 북쪽 13리에 있다. 이상한 돌이 생산되는데 세밀하여 비갈(碑碣)을 만들 만하다.
악현(惡峴) : 주 서쪽 음성현(陰城縣) 경계에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돌 길에 서성이니 하늘에 오르는 것 같은데, 게으른 종 입 벌리며 헐떡여 김 연기를
토한다. 올라 가서 머리 들고 바라보니 삼산(三山)이 오색 구름 가에 희미하게 보이는 것 기쁘기도 하네." 하였다.
연주현(連珠峴) : 주 남쪽 5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연주의 선녀가 풍류산(風流山)에 놀고 혹은 이 고개에서
놀았다." 한다. 그 골목의 이름을 지금까지 비선동(飛仙洞)이라고 일컫는다.
북진(北津) : 주 북쪽 10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온다.
금천(金遷) : 주 서쪽 10리에 있는데, 바로 북진(北津)의 하류이다.
월락탄(月落灘) : 주 서쪽 15리에 있는데, 바로 지금의 금천(金遷) 월탄(月灘)으로 우륵(于勒)이 놀던 곳이다.
○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금휴포(琴休浦) 어구에는 외로운 돛이 멀고, 월락탄(月落灘) 머리에는 흰 물결이 평평
하다." 하였다.
달천(達川) : 혹은 덕천(德川)이라 이름하고, 혹은 달천(獺川)이라 이름하는데, 주 서쪽 8리에 있다. 근원이 보은현
(報恩縣) 속리산(俗離山) 꼭대기에서 나와서 그 물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
배를 띄우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 본조(本朝)의 이행(李行)이 능히 물맛을 변별하는데, 달천 물을 제일이라 하여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 고려 고종(高宗) 때에 주의 노군(奴軍)이 난을 일으키자 이자성(李子晟) 등을 보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서 토벌
하게 하였다. 삼군이 달천에 이르러 물이 깊어 건너지 못하고 한참 다리를 만들고 있는데, 적이 말하기를, "반역의
괴수를 베어 나와서 항복하려 한다." 하니, 자성(子晟)이 말하기를, "그렇게 한다면 너희들을 반드시 다 죽이지는
않겠다." 하자, 적이 괴수인 중 우목(牛木)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니, 관군(官軍)이 드디어 남은 무리를 사로잡아
모두 베었다.
진포(辰浦) : 곧 북진(北津)의 상류인데, 주 동쪽 15리에 있다. 맑고 깊어 바닥을 알 수 없는데, 세속에서 용못[龍淵]
이라고 전한다. 하늘이 가물 때에 범의 두골(頭骨)을 던져넣으면 징험이 있다. 혹은 전회강(澶洄江)이라고도 한다.
토산 철(鐵) : 주연리(周連里)에서 산출된다. 잣[海松子]ㆍ송심(松蕈)ㆍ활석(活石)ㆍ수달(水獺)ㆍ봉밀(蜂蜜)ㆍ
자초(紫草)ㆍ조(棗)ㆍ인삼ㆍ사향(麝香)ㆍ안식향(安息香)ㆍ쏘가리[錦鱗魚]ㆍ석심(石蕈).
신증 석류황(石硫黃) : 노오(老烏)ㆍ시물(柴勿) 두 골짜기에서 산출된다.
성곽 :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6백 50척이고 높이가 8척이다. 가운데에 우물 셋이 있다.
봉수 : 대림산 봉수(大林山烽燧) : 남쪽으로 연풍현(延豐縣) 주정산(周井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마산(馬山)에 응한다.
심항산 봉수(心項山烽燧) : 동쪽으로 청풍군(淸風郡) 오현(吾峴)에 응하고, 서쪽으로 마산에 응한다.
마산 봉수(馬山烽燧) : 동쪽으로 대림산과 심항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음성현(陰城縣) 가섭산(迦葉山)에 응한다.
망이성 봉수(望夷城烽燧) : 동쪽으로 음성현 가섭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진천현(鎭川縣) 소을산(所乙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경기 죽산현(竹山縣) 건지산(巾之山)에 응한다.
궁실 : 실록각(實錄閣) : 객관(客館) 동남쪽에 있다. 본조(本朝)의 실록(實錄)을 보관하고 있는데, 3년마다 사관(史官)
을 보내 포쇄(曝曬)한다. 성주(星州)와 전주(全州)도 같다.
○ 강희맹(姜希孟)의 기(記)에, "세조(世祖)와 예종(睿宗)의 실록이 이루어지자 3건을 인쇄하여 지방 사고(史庫)에
나누어 두게 하였다. 계사년 가을에 신(臣) 희맹을 보내어 충주와 성주에 봉안(奉安)하고, 지사(知事) 신 양성지
(梁誠之)를 보내 전주에 봉안하게 하였다. 실록이 모두 71질인데 다섯 궤(樻)에 나누어 넣어서 간직하는 일이 이미
끝났다. 희맹이 가만히 생각건대, 예부터 성제(聖帝)와 명왕(明王)이 천하 국가를 다스리매 그 광대 광명(廣大光明)
한 체(體)와 성신 공화(聖神功化)의 묘(妙)가 곧 천지와 더불어 그 도량을 함께 하고 귀신과 더불어 그 운행(運行)을
합하니 진실로 얕은 식견으로 그 가장자리조차 엿보기 어렵다.
그러나 천지의 변화를 궁구(窮究)하여 성인의 마음을 보는 것은 《주역(周易)》이 아니면 다할 수 없고 성인의 정치
를 보아 성인의 마음을 보는 것은 전모(典謨)가 아니면 상고할 수 없으니, 이른바 전모는 바로 옛날의 실록이다.
당우(唐虞)로부터 내려와서 지금에 미치기까지 시대마다 각각 사적(史籍)이 있어서 실린 것이 실제 사적(史蹟)이
아닌 것이 없고 담겨 있는 것이 실제 마음 아닌 것이 없으니, 백왕(百王)의 정치를 보고 백왕의 마음을 궁구하려고
하면, 이것을 버리고서는 의거할 데가 없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세조 대왕께서는 하늘이 내신 용맹과 지혜로써 빠
진 것을 건져내고 어려운 것을 통하게 하여 집을 변화하여 나라로 만들었으니, 정일(精一)하여 중을 잡는 학문과
널리 베풀고 여러 백성을 구제[博施濟衆]하는 정치가 멀리 천고를 뛰어넘어 백왕의 으뜸이 되었으며,
예종대왕(睿宗大王)은 왕위(王位)를 이어받아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안일하게 놀지 못하였으니,
전후로 공적을 서로 이어 여러 세대 태평한 아름다움이 어찌 성왕(成王)과 강왕(康王)보다 많이 못하겠는가.
지금 사방 국경에 근심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두 베개를 편안히 하고 자며, 밭을 갈고 우물을 파서 날마다 마시고 먹
을 뿐이다. 어찌 두 성군(聖君)이 서로 이어 다스리고 하여 만든 것인 줄을 알겠는가.
그 정치 교화가 나온 곳을 궁구해 보면 또한 세조 대왕의 굳세고 강하여 해이하지 않은 묘(妙)함과 예종대왕의 공경
하고 두려워한 부지런함에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실록은 마땅히 이전(二典)ㆍ삼모(三謀)와 더불어 나란히 전
하여 썩지 않을 것이다. 슬프다, 진(秦) 나라의 불꽃이 한번 타매 육경(六經)이 남은 것이 없고,
《상서(尙書)》 여러 편(篇)은 급군(汲郡)의 무덤과, 공씨(孔氏)의 벽중(壁中)에 감추어 둔 것에 의거하여 그 만분의
일이나마 보충하였으니 이것이 우리 성조(聖朝)에서 사고(史庫)를 나누어 두어 실록을 봉안한 은미한 뜻이다.
뒤에 보는 자는 공경히 받들지어다." 하였다.
신증 남별관(南別館) : 서문(西門) 안에 있다. 신별관(新別館) : 남문 안에 있다.
누정 경영루(慶迎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는데, 예전 이름은 동루(東樓)이다.
○ 정인지(鄭麟趾)의 기에, "충주는 남방의 요충지를 질러 막은 곳에 자리잡았다. 지역이 넓고 호구가 많으며,
이 때문에 공문서가 구름처럼 쌓이고 빈객이 모여들어서, 참으로 현명하고 지혜로움이 남보다 뛰어난 인재가 아니면
그 번잡한 것을 다스릴 수 없다. 사군(使君) 김중성(金仲誠)은 공신(功臣)의 후사(後嗣)로서 사무 처리의 재간이 능
하여 사대부(士大夫)들의 추앙하는 바이다. 여기에 목사로 나온 지 3년 만에 정사가 이루어지고 백성이 화목해졌
으며 온갖 폐지되었던 것이 모두 새로워졌다. 그를 보좌하여 다스린 사람은 황영(黃永)이다.
정통(正統) 임술년(1442) 가을에 지금 임금께서 대신을 보내 우리 태조(太祖)의 영정(影幀)을 경주(慶州)에서 받들어
맞이하는데 길이 충주를 지나게 되었다. 사군(使君)이 고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조복(朝服)을 갖추고 고을 경계에
나가 맞이하였는데, 정청(正廳)이 낮고 누추하므로 객관 동쪽 누각에 모시고 엄숙하고 공손하게 우러러보며 향(香)
을 올리고 네 번 절하고 물러났다. 이튿날 교외에서 공경히 전송하고 돌아와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날 어용
(御容)이 잠깐 멈추신 것은 참으로 이 고을의 만나기 어려운 영광이니, 신자(臣子)로서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정성껏
받들어야 한다. 이 고을이 세워진 지 가장 오래되어 삼한(三韓)이 반드시 다투는 땅이 되었고, 신라에 있어서는
한강군(漢江郡)이 되었고, 고구려에 있어서는 국원성(國原城)이 되었는데, 예전 누각이 좁고 기울어져 관부(官府)
에서도 쉴 곳이 없다. 하물며 어용(御容)이 돌아오시는 날에 다시 여기에 모신다면 신자의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참으로 불안하다.' 하자, '그렇다면 어째서 새롭게 하기를 도모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감사 이익(李益)과 박 도사(朴都事)와 강이(姜履) 군에게 아뢰었다.
이에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재목을 베고 기와를 구어 산의 중 신정(信靖)이 그 일을 주간하고 고을 사람
민수(閔修)가 그 역사를 감독하여 한 달만에 공사가 끝나매, 이름하기를 경영루(慶迎樓)라 하였으니, 대개 어용을
받들어 맞은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예성(蘂城)은 아름다워서 예로부터 이름난 땅, 앞에 다가서는 산 빛이 자리 구석에 들어
온다. 바람과 달은 공부(工部 두보(杜甫))의 읊음이 얼마나 많았던가. 시내와 산 모두가 망천(輞川)의 그림일세.
사람을 침범하는 서늘한 기운 은하수가 가까운 듯, 땅에 깔린 푸른 그늘 들새가 운다.
날이 다하도록 올라가 노는 무한한 뜻은, 석양이 점점 푸른 들로 내려오네." 하였다. 신증 김종직의 시에, "진한(辰韓)
천 년의 국원(國原) 땅, 다시 층층 누각이 있어 동북 모퉁이를 눌렀다. 길은 옥구(玉鉤)로 나서 경계를 지었고, 땅은
금잔(金盞)을 나누어 그림을 이루었네. 웅풍(雄風)이 또 옷깃을 헤치고 받을 만하구나. 취한 글씨는 이마를 드러내고
부르짖는 것이 해롭지 않다. 서북으로 바라보니 어느 곳이 서울인가. 외로운 돛대 아득하게 푸른 들판에 닿았네."
하였다.
○ 성현(成俔)의 시에, "땅이 감추고 하늘이 아끼는 별다른 땅, 대울타리 초가집이 성 모퉁이를 눌렀다. 사방 산의
경치는 멀리 보는 눈에 아득하고, 만 리의 곤붕(鵾鵬)은 장한 계획을 펴리. 버드나무 늘어선 큰 거리에는 버들개지
날아 어지럽고, 줄과 부들 낭떠러지 언덕에는 저녁 새가 부른다. 동풍은 봄빛이 늙는 것을 아끼지 않고, 쇠잔한 붉은
꽃을 불어 흩어 푸른 들판 속에 점점하네." 하였다.
○ "사방 들판의 외밭이 토란밭에 닿았는데, 물은 맑고 모래는 희어 물고기가 환히 보이네. 낭간 대[琅玕竹]는 바람
앞에 잎을 나부끼고, 수놓은 비단같은 산은 비온 뒤에 그림을 펼쳤도다. 백 묘(畝)의 벼꽃은 가을바람에 한들거리고,
만 가구의 등불은 취하여 환호한다. 태평하여 조세를 재촉하는 것을 보지 못하니, 짖는 개는 긴 털이 나고 길에는
풀이 가득하네." 하였다.
○ "구슬 꽃[雲]이 번쩍번쩍 온 지경에 일렁거리니, 백옥(白玉) 봉우리가 자리 모퉁이에서 솟아오르네.
나무에 가득한 찬 매화는 새로 꽃송이를 터뜨리고, 뜰을 침노하는 밝은 달은 그림을 이룬다. 천 개 항아리에 넘쳐
가득한 술을 탐스럽게 보고, 만 개 구멍이 휘몰아쳐 부르짖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르는 곳마다 임금의 은혜
깊기가 바다 같으니, 삼경(三逕)이 날마다 거칠어진들 혐의할 수 있으랴." 하였다.
○ 양희지(楊熙止)의 시에, "명리(名利) 길 10년에 구구한 포부, 중원(中原) 땅 한 모퉁이에 목사로 왔네. 관사(官舍)
버들은 푸른데 도령(陶令)의 집에 연했고, 촌락 꽃은 붉어서 망천(輞川) 그림에 들어온다. 진흙이 골목 어귀에 깊었
으니 제비가 다투어 모이고, 해가 나루 머리에 저무니 사람들이 어지럽게 부른다. 벼슬 버리고 돌아갈 계책은 이루
지 못하고 몸은 또 늙었는데, 고향 동산의 솔과 국화는 이미 거칠어졌으리." 하였다.
○ 홍귀달(洪貴達)의 시에, "수려한 물 아름다운 산이 명승(名勝)의 땅 만들어, 만가(萬家)의 밥 짓는 연기 성 모퉁이
를 덮었도다. 마루와 창은 사람이 신선의 집에 누워 있는 듯, 바람과 비는 하늘이 수묵화를 이루었다.
꽃 속에서 회포를 읊으니 봄새가 화답하고, 술 옆에서 잠이 드니 미인이 부른다. 번화한 신세가 도리어 우습구나.
시골 전원이 반은 거친 것을 어이하리." 하였다. 만경루(萬景樓) : 주 서쪽 3리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만경(萬景)의 높은 누각 반공에 서 있는데, 올라와 보니 아름다운 흥치를 금하기 어렵
구나. 달천(獺川) 푸른 물은 금탄(金灘)을 접하였고, 조령(鳥嶺) 푸른빛은 월악(月岳)을 연하여 높도다.
물결에 뜬 백구(白鷗)와는 맹서가 친숙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황학(黃鶴)은 부(賦)를 지어 부를 만하구나.
남북으로 보내고 맞는 일이 어느 때나 끝나리. 산은 스스로 푸르고 물은 스스로 아득하도다." 하였다.
공신루(拱宸樓) : 바로 성의 북문루(北門樓)이다. 남풍루(南風樓) : 바로 성의 남문루(南門樓)이다.
망경루(望京樓) : 객관 서쪽에 있다. 신증 청연당(淸燕堂) : 객관 동쪽에 있다.
○ 홍귀달의 기(記)에, "중원(中原)은 남북의 요충(要衝)이다. 서울에서부터 남쪽으로 가는 사람이 물에 뜨고 육지로
달려 중원에 모여 길이 갈라져 두 고개(조령과 중령)를 넘어 이내 목적지에 도달하고,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가는
자도 또한 각각 두 고개를 경유하여 중원에 모여서 다시 물과 육지를 경유하여 서울에 도달하는데,
만일 남북의 손님이 서로 만나는 때를 당하면 관사(官舍)가 수용하지를 못하고, 본도(本道)의 세 사(使)는 벼슬이
높아서 품계가 같은데 혹 동시에 이르면 관사를 정해 대접하는 것이 실로 어렵다. 이것은 고을을 다스리는 자가
오래 불편하게 여기는 바였으나 당을 짓는 자가 없더니, 목사 최후(崔侯)와 통판(通判) 이군(李君)은 모두 당시의
어진 사람으로 뜻이 같고 기(氣)가 합하여 서로 더불어 백성에게 임하는 것이 도리가 있어, 지경 안이 흡연(洽然)히
따라서 감화되어 명령하는 대로 좇았다. 이에 비어 있는 땅에 터를 보아서 문의 동편에 들어가서 그 집을 높게 하여
연접시키고 칸수를 넓게 하여 청(廳)을 만드니, 여름에는 서늘한 마루가 있고 겨울에는 따뜻한 방이 있다.
손님이 오면 거닐고 편히 쉴 곳이 있고, 주인은 손님을 접대하고 정사를 할 곳이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된 뒤에 객사(客舍)가 비로소 부족하고 빠진 것이 없게 되었으니, 최후와 이군의 지어 만든 것이 보통보다
훨씬 뛰어난 줄을 알겠다. 준공이 된 뒤에 두 사람이 서울에 편지를 보내 나에게 누각에 대해 이름을 짓고 기를 짓기
를 청하니, 내가 사양하다 못하여 말하기를, '중원은 산수의 뿌리이니, 천지의 맑은 기운이 여기에 모였다.
묵은 관사가 퇴락되고 새로 짓는 것이 이미 성취되었으니, 이에 천지의 맑은 기운이 산수에 붙여 있다가 이 누각이
뛰어나게 일어나고 단청이 휘황찬란해짐에 미쳐서는 산수의 맑은 기운이 모두 처마와 기둥 사이에 옮겨졌다.
여기에서 연회의 예를 행하거나 조용히 휴식할 수도 있고, 여기에서 문서를 정리할 수도 있으니, 청연(淸燕)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다. 공사가 4월에 시작하여 석달 뒤에 끝났으니 어찌 그리 빠른가.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지 않고 6,7명을 부리는 것으로 충분하였으니 어찌 그리 간단한가.
최후의 휘(諱)는 인(潾)이요, 이후는 그 이름이 윤중(允中)이다." 하였다. 자경당(自警堂) : 객관 동쪽에 있다.
향사당(鄕射堂) : 서문 밖에 있다. 목사 이귀(李龜)가 세웠다.
학교 향교(鄕校) : 서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연원역(連原驛) : 주 북쪽 5리에 있다. 찰방(察訪)하는 본도(本道)의 속역(屬驛)이 14개인데, 단월(丹月)ㆍ
인산(仁山)ㆍ감원(坎原)ㆍ신풍(新豐)ㆍ안부(安富)ㆍ가흥(嘉興)ㆍ용안(用安)ㆍ황강(黃江) 수산(壽山)ㆍ장림(長林)ㆍ
영천(靈泉)ㆍ오사(吾賜)ㆍ천남(泉南)ㆍ안음(安陰)이다.
○ 찰방 한 사람이다. 가흥역(嘉興驛) : 주 북쪽 30리에 있다.
용안역(用安驛) : 주 서쪽 45리에 있다. 예전에는 음성(陰城)에 속했는데, 성종(成宗) 9년에 본 주로 옮겨 붙였다.
단월역(丹月驛) : 옛날 단월부곡(丹月部曲)의 땅으로, 주 남쪽 10리에 있다. 역 남쪽에 계월루(溪月樓)가 있다.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술이 취하여 베개를 기대니 그림 병풍이 나직한데, 꿈을 깨니 앞 마을에 첫 닭이 운다.
문득 생각하니 밤 깊어 비 구름이 흩어질 제, 푸른 하늘 외로운 달이 작은 누각 서쪽에 있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부서진 병풍 외로운 베개에 짧은 촛대가 나직하고, 취(醉)한 것 덜 깨고 꿈은 날치는데,
벌써 새벽 닭이 운다. 아전이 오경을 알리기에 창을 밀치고 나가니, 반 바퀴 밝은 달이 늙은 오동나무 서쪽에 있네."
하였다.
건태원(乾兌院) : 주 서쪽 3리에 있다. 약옹원(若翁院) : 주 동쪽 25리에 있다. 경희원(慶希院) 주 남쪽 40리에 있다.
용두원(龍頭院) : 주 서쪽 15리에 있다. 경제원(敬濟院) : 일명 대조(大棗)라고도 한다. 주 서쪽 30리에 있다.
우원(隅院) : 주 서쪽 65리에 있다. 도관원(都官院) : 주 서쪽 77리에 있다. 석원(石院) : 주 서쪽 85리에 있다.
금곶원(金串院) : 주 서쪽 10리에 있다. 주지원(注之院) : 주 남쪽 16리에 있다. 미륵원(彌勒院) : 주 서쪽 50리에 있다.
일명 광수(廣修)라고도 한다. 신창원(新倉院): 주 서북쪽 20리에 있다. 부구이원(釜拘伊院) : 주 서쪽 55리에 있다.
신증 금천참(金遷站) : 주 서쪽 15리에 있다. 가흥참(嘉興站) : 가흥역(嘉興驛) 옆에 있다.
창고 가흥창(可興倉) : 옛날에는 덕흥창(德興倉)이라 일컬었고, 또 경원창(慶原倉)이라 일컬었다. 가흥역 동쪽 2리에
있다. 예전에는 금천(金遷) 서쪽 언덕에 있었는데, 세조(世祖) 때에 여기로 옮기고 경상도 여러 고을과 본주(本州)의
음성(陰城)ㆍ괴산(槐山)ㆍ청안(淸安)ㆍ보은(報恩)ㆍ단양(丹陽)ㆍ영춘(永春)ㆍ제천(堤川)ㆍ진천(鎭川)ㆍ황간(黃澗)ㆍ
영동(永同)ㆍ청풍(淸風)ㆍ연풍(延豐)ㆍ청산(靑山) 등 고을의 전세(田稅)를 여기에서 거두어 배로 실어날라 서울에
이르는데, 수로(水路)로 2백 60리이다. 신증 예전에는 창사(倉舍)가 없었는데,
금상(今上) 16년에 비로소 집을 지었다. 모두 60칸이다.
신증 사창(社倉) : 주의 서쪽 80리에 있다.
불우 보련사(寶蓮寺) : 천룡산(天龍山)에 있다.
용두사(龍頭寺) : 말흘산(末訖山) 밑에 있다. 삼국시대 때에 북쪽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므로, 이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워서 기도하였다. 고려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승 법경자등탑비(僧法鏡慈燈塔碑)가 있다.
○ 이숭인(李崇仁)이 송도생상인(送道生上人)시에, "개천(開天) 서쪽 억정(憶井) 동쪽에 높직하게 이 절이 있다.
산은 평야를 둘렀으니 새벽 구름이 희고, 강은 성긴 숲을 둘렀으니 단풍잎이 붉도다. 상인(上人)은 오늘에 돌아가는
돛대를 움직이고, 노는 손은 옛날에 울린 종소리를 들었노라. 동방(同榜)인 비서(祕書)가 아마 잘 있을 것이니,
조만간 편지가 도달할 것이라 말하여 다오." 하였다.
개천사(開天寺) : 정토산(凈土山)에 있다. ○ 고려(高麗) 역대 왕조의 실록(實錄)을 처음에는 합천(陜川) 해인사(海印
寺)에 간직했다가 왜구(倭寇)로 인하여 선산(善山) 득익사(得益寺)에 옮기고, 또 이 절에 옮기고, 또 죽주(竹州)
칠장사(七長寺)에 옮겼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1390)에 그 땅이 바닥에 가까워서 왜구가 쉽게 이를 수 있기 때문
에 다시 이 절에 간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세종(世宗) 때에 고려사(高麗史)를 편찬하기 위하여 모두 서울로 운반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이 권 사군(權使君)을 보내는 시에, "정토산이 대단히 좋다. 개천사가 징거할 만하네.
문에 이르는 이는 속(俗)된 손이 없고, 벽(壁)을 향한 이는 높은 중이러라. 백 척 높은 대(臺)는 물에 임하고,
천 년의 나무는 등넝쿨에 누웠다. 그대 돌아가 여가가 있거든 하나하나 찾아보소." 하였다.
영곡사(靈鵠寺) : 대림산(大林山)에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 기대고 푸른 시냇물을 굽어보며 공중에 걸쳐서 누각을
지었다. 밑에서 바라보면 달아맨 것 같다.
○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천 길 바위 머리에 천년 묵은 절, 앞은 강물에 임하고 뒤는 산에 기대었다. 위로는 별
(星)에 닿았으니 집이 세 뿔이 났고, 반쯤 허공에 솟았으니 다락 한 칸이로다." 하였다.
○ 고려 진화(陳澕)의 시에, "이미 낭떠러지 구렁에 임하여 긴 소나무를 굽어보고, 다시 층층 사다리를 밟으며 여윈
지팡이를 짚는다. 도리어 우습구나, 노는 사람의 마음이 너무 조급하여, 한 번 와서 최고봉에 오르려 한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옛 절이 비고 서늘하여 땅에 먼지조차 없는데, 어느 해에 애써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무릅쓰고 집을 지었는고. 그림 누각은 그림자가 남호(南湖) 물에 떨어지고, 경쇠[磬] 소리 여운은 북령(北嶺) 구름
에 묻힌다. 날이 따뜻하니 갈대 시내에는 고기가 떼를 짓고, 사람이 돌아가니 버들 물가에는 학이 줄을 지었다.
중을 향하여 세상일을 말하려 하니, 단정히 앉아 말없이 냉정히 듣지 않네." 하였다.
김생사(金生寺) : 북진(北津) 언덕에 있다. 김생(金生)은 신라 사람인데, 부모가 미천하여 그 세계(世系)는 알지
못한다. 경운(景雲) 2년(711)에 났다. 어려서부터 글씨에 능하여 평생토록 다른 기예는 공부하지 않고, 나이 80이
넘었어도 오히려 붓을 잡고 쉬지 않아서, 예서(隸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어갔다.
지금도 가끔 진적(眞蹟)이 있는데, 배우는 자들이 전하며 보물로 여긴다.
숭녕(崇寧) 연간에 고려 학사(學士) 홍관(洪灌)이 진봉사(進奉使)를 따라 송(宋) 나라에 들어가서 변경(汴京)에 머물
때에 한림 대소(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칙령(勅令)을 받들고 관사에 이르러 그림 족자를 썼다.
홍관이 김생의 행서ㆍ초서 한 권을 보이니, 두 사람이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오늘에 왕 우군(王右軍 왕희지(王羲之))
의 친필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하자, 홍관이 말하기를, "그것이 아니라 이것은 바로 신라 사람 김생
이 쓴 것이다." 하니, 두 사람이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에 왕 우군을 제외하고 어찌 이런 신묘한 글씨가 있으랴."
하였다. 홍관이 여러 번 말하였으나 끝내 믿지 않았다. 김생이 두타행(頭陀行)을 닦고 이 절에 있었으므로 인하여
이름을 삼았다. 덕주사(德周寺) : 월악산(月岳山) 밑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덕주부인(德周夫人)이 이 절을 세웠기 때문에 인하여 이름하였다." 한다.
난초사(蘭草寺)ㆍ동가섭사(東迦葉寺) : 모두 가섭산(迦葉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주 북쪽 3리에 있다.
양진명소사(楊津溟所祠) : 견문산(犬門山) 밑 금휴포(琴休浦) 어귀에 있다. 사전(祀典)에 소사(小祀)로 실려 있다.
봄가을마다 향(香)과 축문을 내려 치제(致祭)한다.
월악사(月岳祠) : 월악산(月岳山)에 있다.
고려 고종(高宗) 43년(1256)에 몽고(蒙古) 군사가 주의 성을 무찌르고 또 산성(山城)을 공격하니, 관리들이 늙고
약하여 막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산사로 올라갔는데, 홀연히 구름 안개ㆍ비ㆍ우레ㆍ번개가 크게 일어나자,
몽고 군사들이 신이 돕는 것이라고 여겨 치지 않고 물러갔다.
여단(厲壇) : 주 북쪽에 있다.
총묘 권근(權近) 묘ㆍ권제(權踶) 묘ㆍ권람(權擥) 묘 : 모두 주 서쪽 미법곡(彌法谷)에 있다.
정인지(鄭麟趾) 묘 : 주 남쪽 30리에 있다.
이극감(李克堪) 묘ㆍ손순효(孫舜孝) 묘ㆍ김예몽(金禮蒙) 묘 : 모두 주 북쪽 30리에 있다.
고적 익안 폐현(翼安廢縣) : 주 서쪽 30리에 있다. 본주(本州)의 다인철소(多仁鐵所)인데, 고려 고종 42년에 그 지방
사람들이 몽고 군사를 막아내어 공이 있으므로 승격하여 현(縣)을 만들고, 인하여 예속시켰다.
대림산성(大林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천 6백 38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덕주산성(德周山城) : 주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만 2천 6백 70척이고, 안에 샘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페하였다.
동악성(桐岳城) : 주 동쪽 1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천 2백 80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봉황성(鳳凰城) : 주 서쪽 28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6천 1백 21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포모대(泡母臺) : 풍류산(風流山)에 있는데, 높이가 수십 장(丈)이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적에 장미(薔薇)라는 선녀
가 있었는데, 스스로 포모(泡母)라 이름하고 항상 그 위에서 놀아 향기가 골에 가득하였다. 당 명황(唐明皇)이 그 말
을 듣고 도사(道士)를 보내 맞아서 궁에 들이고 정완부인(貞完夫人)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상고건대, 신라 성덕왕
(聖德王) 22년(723)에 왕이 사신을 당(唐) 나라에 보내어 미녀 포정(抱貞)과 정원(貞菀) 두 사람을 바치니, 현종(玄宗)
이 말하기를, "여자가 모두 왕의 고모와 자매인데, 친속(親屬)을 떠나고 고국을 이별하였으니, 짐이 차마 머물러 둘
수 없다." 하고, 후하게 물건을 주어 돌려보냈다 하였으니, 정완(貞完)은 아마 정원(貞菀)이 잘못된 듯하다.
그러나 향기가 골에 가득하였다는 말은 심히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탄금대(彈琴臺) : 견문산(犬門山)에 있다.
푸른 벽이 낭떠러지라 높이가 20여 길이요, 그 위에 소나무ㆍ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를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于勒)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뒷사람이 인하여 그 대를 탄금대라 이름하였다.
단월부곡(丹月部曲) : 바로 단월역(丹月驛)의 옛터이다. 광반석부곡(廣反石部曲) : 주 동쪽 25리에 있다. 지금은
사을미(沙乙未)라고 일컫는다.
탄촌부곡(炭村部曲) : 주 남쪽 20리에 있다. 이차탄부곡(伊次呑部曲)ㆍ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 : 주 남쪽 45리
에 있다.
소잉림부곡(所仍林部曲) : 주 동쪽 65리에 있다. 청풍군(淸風郡) 남촌(南村)으로 넘어 들어간다.
덕산향(德山鄕) : 주 동쪽 55리에 있다. 청풍군 남촌으로 넘어 들어간다. 하맥곡처(下麥谷處) : 주 서북쪽 45리에 있다.
상맥곡처(上麥谷處)ㆍ연탄처(淵呑處) : 고을 서쪽 90리에 있다. 대조곡처(大鳥谷處) : 주 서쪽 90리에 있다.
명환 신라 춘부(春賦) : 진흥왕(眞興王) 26년(565)에 아찬(阿飡) 춘부(春賦)가 나가서 국원(國原)의 수령이 되었다.
김양(金陽) : 흥덕왕(興德王) 3년(828)에 중원 대윤(中原大尹)을 제수 하였다.
고려 김윤후(金允侯) : 산성방호별감(山城防護別監)이 되었는데, 몽고 군사가 와서 성을 포위한 지 70여 일이 되어
양식이 거의 다 되었다. 윤후가 사졸(士卒)들을 타일러 독려하기를, "만일 능히 힘을 다한다면 귀천을 불문하고 모두
관작을 제수하겠다." 하고, 드디어 관노(官奴)의 문서를 꺼내어 불사르고 또 노획한 소와 말을 나누어 주니, 사람들
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대전하자 몽고 군사가 차츰 꺾여 마침내 다시는 남쪽으로 오지 못하였다.
이지명(李知命) : 판관(判官)이 되었다. 박항(朴恒) : 판관이 되어서 치적(治績)이 최고이므로 불러서 우정언(右正言)
을 제수하였다. 김륜(金倫) : 목사(牧使)가 되었다.
황보항(皇甫沆) : 임춘(林椿)의 송행서(送行序)에, "내가 서울에 있으매 문을 막고 발을 늘어뜨리고 깊이 들어앉아
나가는 일이 적어서 드디어 사람들과 끊어졌으나, 그 나가고 처하는 것이 나와 어긋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나를
버리지 않는 이는 오직 안정(安定) 황보약수(皇甫若水)이다. 군은 학문을 널리 하고 그 뜻을 오로지 하며, 또 기억력
이 강하고 문장이 호방(豪放)하다. 군의 곧음은 거문고 위의 줄이요, 군의 맑음은 갑 속의 거울이다.
선비로서 귀하건 천하건 어질건 어리석건 모두 군을 종유(從遊)하지 못하는 것으로 부끄러움을 삼으니, 이것은 그
마음에 얻은 바가 과연 남과 다름이 있음이다. 이제 장차 조서를 받고 나가서 큰 번진(藩鎭)의 속관(屬官)이 되었다.
조정이 강좌(江左)의 지역으로 중요함을 삼으니, 그 징세(徵稅)를 완화하고 조세(租稅)를 개정하며 침체된 것을
진흥하고 간특한 것을 규찰하여, 가혹하게 거두고 독점하여 빼앗는 정사가 군으로부터 고쳐질 것이니,
이는 말할 것도 못 된다. 천자의 은택을 선양(宣揚)함으로써 한 방면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소리와 화한 기운을 소통
시켜, 서늘한 바람이 되고 엉키어 단비가 되게 함으로써, 따뜻하고 빛나서 신작(神雀)과 영지(靈芝)의 상서가 모두
지경 안에 모이는 것을 내가 군에게 바라지 않고 누구한테 바라겠는가. 무릇 군을 교유하는 자들이 모두 군의 떠남
을 아름답게 여겨 긴 말로 전별한다. 아, 고기는 강호(江湖)에서 서로 잊고 사람은 도술(道術)에서 서로 잊나니,
내가 군과 더불어 도술의 강호에서 잊고 지낸 지가 오래인데도 이 작별에서 침묵하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참으로
잊은 것인가." 하였다. 정책(鄭幘) : 목사로 나와서 정치하는 것이 엄하고 밝아 아전들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이순우(李純祐) : 의종(毅宗) 때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충주 사록(忠州司祿)에 제수되었다.
최유청(崔惟淸)ㆍ최운해(崔雲海) : 모두 목사이다.
본조 정도전(鄭道傳) : 고려 공민왕 때에 충주 사록이 되었다. 심덕부(沈德符)ㆍ유구(柳玽)ㆍ김사형(金士衡)ㆍ
하자종(河自宗)ㆍ맹사성(孟思誠)ㆍ권진(權軫)ㆍ김담(金淡) : 모두 목사이다. 이사관(李士寬)ㆍ
이익박(李益朴) : 모두 판관(判官)이다.
신증 정성근(鄭誠謹) : 목사가 되어 정사에 있어 청렴하고 신중한 것을 숭상하였다.
최린(崔潾) : 목사가 되어 치적(治績)이 최(最)임으로 당상(堂上)에 승진하였다.
박상(朴祥) : 목사가 되어 강직하고 밝게 정사를 하였다.
인물 신라 임강수(任强首) : 그 어머니가 꿈에 뿔 있는 사람을 보고 임신하였는데, 낳자 머리 뒤에 높은 뼈가 있고
또 사마귀가 있었다. 장성하자 아버지 석체(昔諦)가 묻기를, "네가 불도를 배우겠느냐, 유도를 배우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불도는 세상 밖의 교이고 나는 인간 세상의 사람이니, 어찌 불도를 배우겠습니가. 유도를 배우겠습
니다." 하자, 아버지가 말하기를, "네가 좋은 대로 하라." 하였다. 드디어 스승에게 나아가 《효경(孝經)》ㆍ
《곡례(曲禮)》ㆍ《이아(爾雅)》ㆍ《문선(文選)》을 읽어서 우뚝이 당대의 준걸이 되었다. 태종왕(太宗王)이 즉위
하자, 당 나라 사신이 와서 조서를 전하는데 해득하기 어려운 곳이 있었다. 왕이 강수를 불러 물으니 한 번 보고
막힘 없이 다 해설하였다. 왕이 놀라고 기뻐서 서로 늦게 만난 것을 한탄하고 회사표문(回謝表文)을 짓게 하니,
문장이 교묘하고 할 말을 다하였다. 왕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항상 임생(任生)이라고 칭하였다.
집이 가난해도 태연하였는데, 왕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해마다 신성(新城) 조세(租稅) 1백 석(石)을 하사하였다.
문무왕(文武王) 때에 사찬(沙飡)을 제수하고 녹봉(祿俸)으로 벼 2백 석을 더 주었다. 신문왕(神文王) 때에 죽으니
관가에서 그 장사를 치렀다. 대신이 그 아내가 먹고살기가 궁핍하여 시골로 돌아가기를 원한다는 말을 듣고 왕께
청하여 벼 1백 석을 내려 주니, 사양하기를, "첩은 천한 사람으로서 남편을 따라 입고 먹었으니 나라 은혜를 받은
것이 많습니다. 이제 이미 과부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다시 후하게 주심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받지
않았다.
고려 유긍달(劉兢達) : 태조(太祖) 때에 태사 내사령(太史內史令)을 증직하였다.
유희(劉羲) : 장원 급제하여 곧 한림원(翰林院)에 재직하였다가 계사년의 난에 무부(武夫)에게 해를 당하였다.
유충기(劉沖祺) : 희(羲)의 아들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국자감 대사성(國子監大司成)에 이르렀다. 문장이 넉넉
하고 몸가짐이 고결하여 아버지의 풍도가 있었다.
유진(劉瑨) : 후비(后妃)로서 성이 유씨인 자는 모두 그 종족(宗族)에서 나왔기 때문에 대대로 척리(戚里)가 되었다.
사람됨이 청렴 결백하고 풍채가 아름다웠다.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최홍사(崔弘嗣) : 가세(家世)가 외롭고 미천하였다. 젊어서 힘써 배워 과거에 올라 문행(文行)으로 소문이 났다.
일찍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송(宋) 나라에 가는데 홀연히 회오리 바람에 흔들림에 뱃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울지
않는 자가 없는데, 홍사는 신색(神色)이 태연하였다. 송 나라에 이르자 황제가 후하게 대접하고 금과 폐백을 더
주어서 돌려보냈다. 예종(睿宗) 때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옮겨 여러 번 더하여 추성찬화공신(推誠
贊化功臣)이 되었다. 나이 80에 죽었고, 시호는 정경(貞敬)이다.
양원준(梁元俊) : 청렴 검소하고 순진 정직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가 한결같았다. 산업(産業)을 일삼지 않으며
선물을 받지 않으니 문 앞이 쓸쓸하였다. 서리(胥吏)로부터 광주 감무(光州監務)가 되었다. 인종(仁宗) 때 여러 번
옮겨 시어사(侍御史)가 되고, 나가서 상주 부사(尙州副使)가 되었다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승진
하였다.
양문형(梁文熒) : 원준(元俊)의 아들로, 맑고 곧아서 아버지의 풍도가 있었다. 벼슬이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이르
렀다.
최우청(崔遇淸) : 아전으로 과거에 올라 진례위(進禮尉)에 제수되었다. 명종(明宗)의 잠저(潛邸) 때의 관속이므로
중외의 벼슬을 고루 지냈다. 명성과 공적이 있어서 등급을 뛰어넘어 추밀원사(樞密院使)를 제수하였다. 뒤에 사직을
청하니, 수사공(守司空)을 더하여 치사(致仕)시켰다.
최렴(崔濂) : 향적(鄕籍)에서 출신(出身)하여 벼슬이 반주검정승(班主檢政丞)에 이르렀다.
본조 양여공(梁汝恭) : 과거에 올라 여러 번 옮겨 병조 정랑에 이르렀다. 시(詩)를 잘하여 명성이 있었다.
어유소(魚有沼) : 무과에 장원하였고, 적개공신(敵愾功臣)이 되어 예성군(蘂城君)을 봉하였다.
우거 신라 우륵(于勒) : 《고기(古記)》에 가야국(伽倻國) 가실왕(嘉悉王)이 당 나라 악기를 보고 거문고를 만들고,
악사(樂師) 성열현(省熱縣) 사람 우륵에게 명하여 12곡(曲)을 지었다. 뒤에 우륵이 그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거문고를 안고 신라로 갔다.
진흥왕(眞興王)이 국원(國原)에 안치(安置)하고 주지(主知)ㆍ계고(階古)ㆍ만덕(萬德)을 보내어 그 기술을 전수하게
하였다. 세 사람이 11곡을 배우고 나서 서로 말하기를, "이것이 번잡하고 또 음란하니, 아(雅)하게 만들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요약하여 5곡을 만들었다. 우륵이 처음에는 듣고 노하였다가, 그 소리를 듣고나서는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즐거워도 흐르지 않고 슬퍼도 비참하지 않으니 바른 소리라 할 수 있다." 하였다.
왕 앞에서 연주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본조 권근(權近) : 고려 말기에 죄에 연좌되어 이 고을에 귀양와서 주의 남쪽 양촌(陽村)에 살았는데, 이로써 호를
양촌(陽村)이라 하였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양촌은 나의 문인인 영가(永嘉) 권근의 자호(自號)이다. 권근이 말하기를, '제가 선생의
문하에 있어서 나이가 가장 적고 학문이 가장 낮으나, 사모하여 바라는 것은 가까운 데서 멀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字)를 가원(可遠)이라 하였습니다. 천하에 가깝고도 먼 것은 안에서 구하면 성(誠)이고 밖에서 구하면 양(陽)인데,
성(誠)은 오직 군자(君子)라야 실천할 수 있지만 양(陽)은 어리석은 남자와 어리석은 여자도 다 같이 아는 것입니다.
봄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뜨겁고 가을에는 건조하고 겨울에는 따스한 데로 돌아갈 수 있어서, 한 해의 농사가 이루
어지고 민생(民生)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가만히 스스로 생각건대, 성인(聖人)이 인재를 교화하여 이루는
것이 또한 이와 같으니, 시(詩)ㆍ서(書)ㆍ예(禮)ㆍ악(樂)의 가르침이 모두 천시(天時)를 따르는 것입니다.
중니(仲尼)가 일찍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더러 숨긴다고 하느냐. 나는 너희들에게 숨김없이 하노라.」 하였습
니다. 대개 중니는 천지와 같고 일월과 같으니, 천지는 넓고 커서 포용하지 않는 것이 없고 일월은 교대로 밝아서
비추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그 사이에 물건이란 물건은 형형색색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지라,
그러므로 《중용(中庸)》에 이르기를, 「시경에 이른바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못에서 뛰논다 하였
으니, 상하의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말한 것이다.」 하였으니, 오히려 무슨 그윽하고 숨기는 것이 있겠습니까.
비록 그 음험(陰險)하고 간사한 무리라도 또한 모두 그 정상을 숨길 수가 없으니, 부자(夫子 공자(孔子))께서는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감화시키지 못하는 것이 없어서, 소소(昭昭)하게 밝고 호호(浩浩)하게 넓습니다.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바람 쐬고 읊는 것으로도, 오히려 화기(和氣)가 유행하는 것이 당우(唐虞)의 기상과 다름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그 때 맞춰 오는 비처럼 화육(化育)시키는 것이 번영(繁榮)하고 자라나는 것이야 다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하였다.
아, 중니가 종유(從遊)하는 3천 명과 속초(速肖)하는 70명 사이에 천지가 되고 일월이 된 것은 모두 양(陽)의 도(道)
가 발현하여 밝게 드러난 것인데도 보고 아는 자가 심히 적었다. 증자(曾子)ㆍ자사(子思)가 다행히 저술하여 오늘에
이르렀고, 염락(溓洛)의 학설이 행한 연후에야 배우는 자들이 그 글을 읽고 나서 중니의 천지에 노는 것 같고 중니의
일월을 본 것 같았으니, 진(秦) 나라와 한(漢) 나라 이래로 가리고 막히고 아득하고 어두워서 거의 귀신과 물여우가
될 뻔하였던 것이 마치 맑은 바람이 일어나자 흔적 없이 쓸어버린 것처럼 되었으니, 얼마나 시원한 일인가.
10월에는 양(陽)이 없으나 양월(陽月)이라고 하는 것은 성인(聖人)의 뜻이니, 큰 과일은 먹지 않는다.[碩果不食]고
한 교훈을 보면 성인이 양을 붙든 것이 지극하다. 《춘추(春秋)》는 성인의 뜻이다. 기린(麒麟)은 양물(陽物)인데
잡혔으니, 성인이 심히 슬퍼하였기 때문에 《춘추》를 지으면서 춘왕정월(春王正月)이라고 썼는데, 해석하는 자가
말하기를, '일통(一統)을 크게 여긴다.' 하였다. 아,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때를 만나지 못하면 할 수 없지만, 때를
만난다면 천자를 도와 일통을 크게 하여 사해에 양춘(陽春)을 펼 뿐이다.
나는 늙었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가원(可遠)은 스스로 양촌이란 호를 지은 까닭을 생각하여 더욱 힘쓸지
어다. 힘쓰기를 마땅히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반드시 성(誠)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효자 본조 최환(崔環) :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다. 효행으로 정문(旌門)하였다.
임계번(林季蕃) : 어버이 섬기기를 지극한 효성으로 하여, 어릴 적부터 아침저녁으로 안부를 묻고 보살핌을 폐하지
않았고, 아내와 더불어 몸소 반찬을 갖추어 비록 밤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올려 하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자 장사와 제사에 예를 다하고 삼년상을 마쳤어도 그대로 초하루와 보름에 제물(祭物)을 올렸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벼슬로 상 주었다.
말산(末山) : 군기시(軍器寺)의 종이다. 부모를 섬기기를 효성으로 하여 집이 가난하였지만 남에게 꾸어서라도 대고
한번도 뜻을 어기지 않았다. 그 아버지가 병에 걸리자 약과 죽을 반드시 맛보고서 드리고,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죽자 애통하며 예를 다하고 상사와 장례 모든 일을 형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스스로 마련하였
으며, 시묘(侍墓)를 하였다. 그 어머니가 또한 다른 자식한테서 편안하지 못하여 저의 집으로 오니, 아버지를 제사
하고 어머니를 봉양하는 것을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그 아내에게 말하기를, "처자 때문에 상례
(喪禮)에 누를 끼칠 수 없으니, 그대는 우선 친정집에 돌아가서 내가 상을 마치기를 기다리라." 하고 드디어 보냈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문을 세우고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신증 하숙륜(河叔倫) : 어머니가 악한 병에 걸리자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 술에 타서 드렸더니 병이 바로 나았다.
뒤에 어머니의 병이 다시 생김에 또 손가락을 잘라 구어서 드렸더니 그 병이 영원히 낳았다. 금상(今上) 23년에
정문하였다.
열녀 본조 최씨(崔氏) : 최환(崔環)의 사촌 누이동생이다. 부사(副使) 한약(韓約)과 혼인을 약정하였는데, 일본
정벌에 종군하였다가 전사하니 일생을 수절하였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문을 세웠다.
신증 경씨(慶氏) : 도사(都事) 윤준(尹晙)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장사할 때에 스스로 목매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족당(族黨)들이 풀어주어 깨어났다. 장사지낸 뒤 무덤을 어루만지며 슬퍼 곡을 하자 무덤이 두어 자나 갈라졌다.
복을 마친 뒤에도 오히려 조석전(朝夕奠)을 폐하지 않고 잘 때에는 옷을 벗지 않았다. 금상(今上) 14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청산환공수영회(靑山環拱水縈回)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푸른 산은 둘러 있고 물은 돌고 도는데, 베 버선에
짚신으로 몇 번이나 왕래하였던고." 하였다.
월악산고천표묘(月岳山高天縹緲) :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월악산은 높은데 하늘은 까마득하고, 김생사(金生寺)는
오랜데 물은 졸졸 흐른다." 하였다.
맥수치초구(麥秀雉初雊) : 김구용의 시에, "구름을 더위잡고 어지러운 고개를 뚫고, 물결을 횡단하여 긴 내를 걷는다.
보리가 패어나니 꿩이 처음으로 울고, 뽕잎이 드무니 누에가 이미 잔다. 묵은 다리에는 다시 설 판자가 없고, 파리한
말은 채찍을 사양하지 않는다. 가고 가매 해가 서쪽으로 떨어지니, 앞마을에 흰 연기가 난다." 하였다.
정읍소조정미어(井邑蕭條赬尾魚) : 정이오(鄭以吾)의 수령으로 나가는 사람을 보내는 시에, "백성들은 생업을 잃어
먹는 것이 나머지가 없고, 정읍(井邑)이 쓸쓸하니 꼬리 붉은 고기로다. 섣달 눈이 날지 않으니 봄이 또 가물겠다.
공이여, 돌아가거든 모름지기 활민서(活民書)를 보소." 하였다.
월종동악누운생(月從桐岳漏雲生) : 이인전(李仁全)의 시에, "돛은 한양(漢陽)을 향하여 비를 뚫고 가고, 달은 동악을
좇아 구름에 새어 나온다." 하였다.
지근금천주객뇨(地近金遷舟客鬧) : 중 성회(性晦)의 시에, "땅이 금천에 가까우니 배의 손님들이 떠들고, 하늘은 월악
에 나직한데 고개에 원숭이가 운다." 하였다.
박지여염방수사(撲地閭閻傍水斜 땅에 깔려 있는 여염은 물 옆에 비꼈도다) : 노숙동(盧叔同)의 시. 부운원수무심출
(浮雲遠岫無心出)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산 아래 외로운 성 한 띠처럼 비끼고, 푸른 다락이 웅장하게 일어났는데,
채색 노을[綵霞]이 밝도다. 뜬구름은 먼 산구멍에서 무심히 나오고, 꽃다운 풀은 긴 둑에 제멋대로 난다.
해마다 가을 곡식은 풍년이 들고, 촌마다 두레 북[社鼓]은 태평을 즐긴다. 내가 와서 여러 사람의 칭송을 들으니,
자사(刺史)가 어질고 밝아서 아랫사람의 정을 살펴준다네."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는 임나국(任那國)이었는데 백제의 영토가 되어서는 낭자곡성(狼子谷城)이라 하였다. : 낭자성(狼子城)
이라고도 하고,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한다.
명종(明宗) 5년(1550)에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시켰다. : 이홍윤(李洪胤)의 난 때문이다.
선조(宣祖)가 즉위하여 정묘년(1567)에 다시 복귀시켰다 : 무옥(誣獄)으로 하옥되었기 때문이다.
광해주 5년(1613)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 유인발(柳仁發)이 반역하다가 주륙당했기 때문이다.
인조 원년(1623)에 다시 복귀하였다가 6년에 다시 충원현(忠原縣)으로 강등되었다. : 안집중(安執中)이 반역으로
주륙당하였기 때문이다. 15년에 다시 복귀하였다가 25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 채문형(蔡門亨)이 반역으로 주륙
당하였기 때문이다. 효종 3년(1652)에 다시 복귀하였다가 숙종 6년(1680)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 아비를 죽인 죄인
때문이다. 15년에 다시 복귀되었다가 영종 5년(1729)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 이조겸(李祖謙)이 반역으로 주륙당
하였기 때문이다. 14년에 다시 복귀되었다가 15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 지아비를 죽인 죄인 때문이다.
24년에 복귀되었다가 31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 유수원(柳壽垣)이 반역죄로 주륙당하였기 때문이다.
40년에 다시 복귀되었다. 고종(高宗)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남변(南邊) : 끝이 10리. 북변(北邊) : 끝이 10리. 금천(金遷)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
이안(利安) :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 신석(薪石) :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
덕서(德西)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 중니곡(中尼谷) : 서쪽으로 끝이 60리.
복성면(福城面) :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
소탄(所呑) : 옛날 연탄처(淵呑處)인데, 서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90리. 법왕(法王) : 위와 같음.
금목동(金目洞) : 서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80리. 성곡(省谷)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
대오곡(大烏谷) : 본래는 대오곡처(大烏谷處)로써, 서쪽으로 처음이 1백 리, 끝이 1백 10리.
사다산(沙多山) : 서쪽으로 처음이 1백 리, 끝이 1백 15리. 기음(岐音) : 위와 같음.
두의곡(豆衣谷) : 서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90리. 소고(蘇古)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유모곡(柳茅谷)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 불정(佛頂) : 위와 같음.
율지동(栗枝洞) : 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
감물내(甘勿內) : 본래는 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이었는데,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맹동(孟洞) : 서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1백 리. 감미곡(甘味谷) : 서쪽 끝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80리.
거곡(居谷) : 위와 같음.
사을미(沙乙味) : 본래는 광반석부곡(廣反石部曲)이었는데, 동남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50리.
가흥(可興) : 서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 앙암(仰巖) :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
성대양(省台陽) :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금생(金生)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가차산(加次山) :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 엄정(嚴政)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60리.
산천(山天) :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주유모(周柳茅) : 서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
사리포(沙里浦) : 처음이 40리, 끝이 50리. 율동(栗洞) : 처음이 80리, 끝이 1백 리.
덕산(德山) : 본래는 덕산향(德山鄕)인데, 동남쪽으로 처음이 55리, 끝이 1백 5리.
적화현(赤火峴) : 처음과 끝이 60리. ○ 탄촌부곡(炭村部曲)은 남쪽으로 20리.
소잉임부곡(所仍林部曲)은 동남쪽으로 65리. 상하맥곡(上下麥曲)은 서북쪽으로 45리.
진도 포탄진(浦灘津) : 동북쪽으로 25리인데, 제천(提川)으로 통한다.
달천진(達川津) : 서남쪽으로 8리인데, 서울에서 영남으로 통하는 대로로서, 가물면 다리를 개설한다.
신당진(新塘津) : 동쪽으로 25리인데, 청풍(淸風)ㆍ황강역(黃江驛)으로 통한다.
목계진(木溪津) : 서북쪽으로 20리인데, 가흥(可興)에서부터 원주(原州)ㆍ제천(提川)으로 통한다.
청룡진(靑龍津) : 서북쪽으로 40리이다.
북강진(北江津) : 북쪽으로 10리인데, 원주(原州)와 하연진(荷淵津)으로 통한다.
하연진 : 서북쪽으로 20리인데, 가흥(可興) 대로로 통한다. 가흥진(可興津) : 창북(倉北)의 사잇길에 있다.
토산 도미[鯽魚]ㆍ백면지(白綿紙) : 중국의 세폐(歲幣)로 썼다.
사원 팔봉서원(八峯書院) : 선조 임인년(1602)에 세웠고, 현종 임자년(1672)에 사액하였다.
이자(李耔) :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벼슬은 우참찬이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
이연경(李延慶) : 자는 장길(長吉), 호는 탄수(灘叟), 본관은 광주(廣州), 벼슬은 교리였는데,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김세필(金世弼) : 자는 공석(公碩), 호는 십청헌(十淸軒), 본관은 경주이다. 벼슬은 이조 참판이었는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
노수신(盧守愼) : 자는 관회(寬悔), 호는 소재(蘇齋),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벼슬은 영의정이었으며, 시호는 문의
(文懿).
○ 운곡서원(雲谷書院) : 현종 신축년(1661)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1676)에 사액하였다.
주자(朱子)ㆍ정구(鄭逑) :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본관은 청주이다. 벼슬은 대사헌이었는데, 영의정에 추증
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
○ 누암서원(樓巖書院) : 숙종 을해년(1695)에 세웠고, 임오년(1702)에 사액하였다.
송시열(宋時烈) : 문묘에 보인다. 민정중(閔鼎重) : 양주(楊州)에 보인다. 권상하(權尙夏) :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
(遂庵),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벼슬은 좌의정, 시호는 문순(文純).
정호(鄭澔) : 자는 중순(仲淳), 호는 (文巖),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벼슬은 영의정이었으며, 시호는 문경(文敬)
○ 충렬사(忠烈祠) : 달천(達川)에 있는데, 숙종 정축년(1677)에 세웠으며, 영종(英宗) 정미년(1727)에 사액하였고,
어제비(御製碑)가 있다.
임경업(林慶業) : 자는 영백(英伯), 본관은 평택(平澤)이며, 벼슬은 지중추부사였는데, 좌찬성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화상(畫像)이 있다.
성지 천용산 고성(天龍山古城) : 봉황성(鳳凰城)이라고도 한다. 둘레는 6천 1백 21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장미산 고성(薔薇山古城) : 유적(遺跡)이 있다.
영아 후영(後營) : 인조조(仁祖朝)에 두었다. ○ 후영장(後營將) 한 사람.
○ 속읍(屬邑)은 충주ㆍ청풍ㆍ단양ㆍ괴산ㆍ연풍ㆍ제천ㆍ영춘ㆍ음성이다.
본군 양진창(楊津倉) : 숙종 12년(1686)에 양진(楊津)의 동쪽에 세웠다가 16년에 읍내로 옮겨 세우고 군량(軍糧)을
저장한다. 동창(東倉) : 동남쪽 10리. 청풍과의 경계이다. 남창(南倉) : 남쪽 40리이다.
북창(北倉) : 북쪽 10리. 금천(金遷)의 북안(北岸)이다. 내창(內倉) : 서북쪽 30리.
청풍군 淸風郡
동쪽으로 단양군(丹陽郡) 경계까지 39리이고, 남쪽으로 경상도(慶尙道) 문경현(聞慶縣) 경계까지 60리이고,
서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40리이고, 북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3백 5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사열이현(沙熱伊縣)인데,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제군(奈堤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충주(忠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숙왕(忠肅王) 4년에 현(縣)의 중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었으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는데 본조(本朝)에서 인습하였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씩이다.
군명 사열이(沙熱伊)
성씨 본군 유(劉)ㆍ전(全) : 어떤 기록에는 김(金)이라 되어 있다. 장(莊)ㆍ장(張) : 단양(丹陽)
풍속 풍속이 화전(火田)을 숭상한다. : 정추(鄭樞)의 시에, "풍속이 불로 가는 것[火耕]을 숭상하여 조를 많이 심는다."
하였다.
형승 산천이 기이하고 빼어나서 남도(南道)의 으뜸이 된다. : 송처관(宋處寬)의 한벽루기(寒碧樓記). 한 줄기 맑은 강 :
정추(鄭樞)의 시에, "천년 교목(喬木)은 일천 봉우리가 합하고, 한 줄기의 맑은 강은 한 고을로 전한다." 하였다.
산천 인지산(因地山) : 군 남쪽 1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무암산(茂巖山) : 군 동쪽 10리에 있다.
창고(倉庫)의 예전 터가 있는데, 고려 때에 경상도의 전부(田賦)를 이곳에 옮겼다.
삼방산(三方山) : 군 북쪽 3리에 있다. 금곡산(金谷山) : 군 서쪽 26리에 있다.
저성산(猪城山) : 군 동쪽 5리에 있는데, 돌 성이 있다. 병풍산(屛風山) : 군 북쪽 1리에 있는데, 바람 구멍이 있다.
부산(婦山) : 군 서쪽 15리에 있다. 성황산(城隍山) : 군 동쪽 3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 군 남쪽 50리에 있다. 신라에서는 월형산(月兄山)이라고 일컬었다. 소사(小祀)로 되었다.
전산(箭山) : 전산소(箭山所)에 있다. 백야산(白夜山) : 군 남쪽 33리에 있다.
쌍암산(雙巖山) : 군 동쪽 5리에 있다. 취산(鷲山) : 군 남쪽 2리에 있는데, 군창(軍倉)이 있다.
장선현(長善峴) : 군 서쪽 20리에 있다. 가라현(加羅峴) : 군 서쪽 16리에 있는데, 지극히 험하고 막히었다.
북진(北津) : 병풍산 밑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서 금천(金遷)으로 흘러 들어간다.
고교천(高橋川) : 군 북쪽 8리에 있다. 근원이 제천현(堤川縣) 경계에서 나와서 북진(北津)으로 들어간다.
월천(月川) : 군 서쪽 40리에 있다. 근원이 부덕산(夫德山)에서 나와 충주(忠州) 진포(辰浦)로 흘러 들어간다.
신증 엄성천(嚴城遷) : 군 서쪽 20리에 있다.
○ 최숙생의 시에, "산허리에 돌 길이 열렸으니, 말 발이 밟는다. 돌을 포개어 천 길을 임하였고, 구름을 뚫고 만 층을
오른다. 응당 오정(五丁)의 파는 것을 번거롭게 하였으리라. 정히 구천(九天)에 오르는 것 같다. 눈에 가득한 것이
모두 맑은 경치이니, 시를 써서 나의 지난 것을 기록한다." 하였다.
토산 실[絲]ㆍ수철(水鐵) : 군 동쪽 평등산(平登山)에서 산출된다. 송이버섯[松蕈]ㆍ대추[棗]ㆍ봉밀(蜂蜜)ㆍ자초
(紫草)ㆍ석이버섯[石蕈]ㆍ인삼(人蔘)ㆍ복령(茯苓)ㆍ백화사(白花蛇)ㆍ영양(羚羊)ㆍ먹[墨]ㆍ
석류황(石硫黃) : 전산(箭山)ㆍ백야산(白夜山)ㆍ쌍암산(雙巖山)ㆍ논양리(論陽里) 등지에서 난다.
석종유(石鍾乳) : 군 북쪽 풍혈(風穴)과 군 남쪽 저전리(苧田里) 석혈(石穴)에서 산출된다.
신증 청토(靑土) : 군 동쪽 목동(木洞)에서 난다. 녹반(綠礬) : 군 북쪽 전산에서 난다.
봉수 오현 봉수(吾峴烽燧) : 군 남쪽에 있다. 동쪽으로 단양군(丹陽郡) 소이산(所伊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충주(忠州) 심항산(心項山)에 응한다.
누정 한벽루(寒碧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어 큰 강을 굽어 임하였다.
○ 하륜(河崙)의 기에, "내가 옛날에 여러 번 죽령 길을 지났는데, 청풍 군수(淸風郡守)가 매양 길옆에서 맞이하고
전송하였다. 고을의 형세를 물으니, 한벽루(寒碧樓)를 일컫고 또 주 문절공(朱文節公)이 네 구절의 시를 읊었다.
나는 듣고 즐거웠으나 바빴기 때문에 한 번 들어가서 올라가 구경할 여가가 없었다. 지금 정군 수홍(鄭君守弘)이
편지로 내게 청하기를, '이 고을의 한벽루가 한 방면에서 이름나 참으로 기이하니 구경할 만한데, 수십 년 동안 비에
젖고 바람에 깎여 거의 장차 못쓰게 될 지경이었다. 내가 고을에 이르러 다행히 나라가 한가한 때를 만나서 금년
가을에 공장을 불러 수리하여 들보ㆍ도리ㆍ기둥ㆍ마루의 썩고 기울어진 것을 새 재목으로 바꾸지 않은 것이 없으니,
청컨대 그대는 다행히 기를 지어서 뒤에 오는 사람에게 보여라.'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누정(樓亭)을 수리하는 것은 수령으로서 말단의 일일 뿐이다. 그러나 그 흉하고 폐하는 것이 실상
세도(世道)와 서로 관계된다. 세도가 오르고 내림이 있으매 민생이 즐겁고 불안함이 같지 않고 누정의 흥폐(興廢)가
이에 따르니, 한 누각의 흥하고 폐함으로써 한 고을의 즐겁고 불안함을 알 수 있고, 한 고을의 즐겁고 불안함으로
세도의 오르내림을 알 수 있으니, 어찌 서로 관계됨이 심한 것이 아닌가. 지금 이 누각이 수십 년 꺾이고 썩은 나머지
정군이 정사하는 날에 이르러 중수하여 새롭게 하였으니, 세도가 수십 년 전과 다름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군현(郡縣)에 아직 수리하지 않은 누정이 있으니, 또한 어찌 다만 세도의 탓이랴. 정군 같은 이는
세도에 순응하여 다스림을 하는 사람이라 이를 만하다.
내가 옛날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있을 때에 정군은 바야흐로 지안성 군사(知安城郡事)로 있어서 이름이
치적(治績)의 최(最)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비로소 그 사람됨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것을 써서 기(記)를 삼는다.
또 계산(溪山)의 승경(勝景)과 누각의 제도의 아름다움은 눈으로 보지 않으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청풍(淸風)의
칭호와 한벽(寒碧)의 이름은 듣기만 해도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뼈가 서늘하게 한다.
훗날 혹 능히 적송자(赤松子)와 함께 놀 소원을 이루어 다시 죽령 길을 지나게 된다면, 마땅히 군을 위하여 한 번
들어가 올라서 주 문절(朱文節)의 시를 읊어 그 사람을 수백 년 위에 상상하여 보고, 또 군의 유애시(遺愛詩) 한 편을
짓고 가리라." 하였다.
○ 주열(朱悅)의 시에, "물빛이 맑고 맑아 거울 아닌 거울이요, 산 기운이 자욱하여 연기 아닌 연기로다. 차고[寒]
푸름[碧] 서로 엉기어 한 고을 되었거늘, 맑은 바람[淸風]을 만고에 전할 이 없네." 하였다.
○ 양숙(梁肅)의 시에, "다락 밖에 어지러이 붉은 것은 붉은 살구꽃 비요, 시냇가에 연푸른 것은 푸른 버들 연기로다.
한 지경의 밝은 달 맑은 바람 좋은 경치를 세속 사람 향하여 쉽게 전하지 마소."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호남(湖南)의 50성(城)을 두루 다녀 보았지만, 경치 좋은 땅 오늘에야 그윽한 정취에 맞네,
백 척의 푸른 누각 바람을 내려다보아 산뜻하고, 푸른 벽 천 길이나 쇠를 깎아 만든 듯 싶다. 산이 좋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납극(蠟屐)을 생각하게 하고, 강이 맑으니 나를 불러서 먼지 낀 갓끈을 씻게 한다. 도원(桃源)이 반드시 인간
세상 아닌 것이 아니니, 고기잡이 늙은이를 따라 이 생을 보내려 한다." 하였다.
신증 최숙생(崔叔生)의 시에, "산이 컴컴하니 반쪽에 급한 비가 뛰고, 강이 맑으니 한쪽에 가벼운 연기가 덮였다.
괴이하게도 불 같은 더위가 모두 사라져 없어지니, 홀연히 긴 바람이 일만 골짜기에 전하노라." 하였다.
○ 유운(柳雲)의 시에, "산협을 쪼개어 강을 달리는 것이 거령(巨靈)의 힘이라. 피곤하여 서성거리니 손의 혼이 깬다.
여울 소리가 귀를 흔드니 찬 것이 베개에서 나고, 산 기운이 창에 가득하니 푸른 것이 병풍이 되었다. 비가 씻으니
갈매기의 모래는 밝기가 눈 같고, 달이 잠기니 고기잡이 불이 어지럽기가 반딧불 같다.
무단히 만리의 외로운 배 피리 소리에, 한 조각 돌아갈 마음이 동정호(洞庭湖)에 아득하다." 하였다.
신증 명월정(明月亭) : 한벽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군 남쪽 1리에 있다.
역원 황강역(黃江驛) : 군 서쪽 35리에 있다. 수산역(壽山驛) : 군 남쪽 26리에 있다.
안음역(安陰驛) : 옛 이름은 안성(安城)이다. 군 북쪽 5리에 있다. 권일원(權一院) : 군 남쪽 26리에 있다.
논양원(論陽院) : 군 서쪽 33리에 있다. 주병원(酒餠院) : 군 서쪽 25리에 있다.
불우 월악사(月岳寺) : 월악산(月岳山)에 있다. 산방사(山房寺)ㆍ무암사(霧巖寺) : 모두 백야산(白夜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 남쪽에 있다.
여단(厲壇)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목촌소(木村所) : 군 북쪽 1리에 있다. 전산소(箭山所) : 군 북쪽 17리에 있다.
결매소(結買所) : 군 북쪽 2리에 있다.
명환 고려 안종원(安宗源) : 공민왕(恭愍王) 때의 지군사(知郡事).
본조 송처관(宋處寬) : 지군사 신증 김연수(金延壽) : 정치에 맑고 간략한 것을 숭상하였다. 처음에 고을 사람이 나무
로 만든 허수아비를 얻자 신(神)이라 하여 매년 5, 6월 사이에 객사 대청에 받들어 두고 크게 제사를 벌리니,
온 경내가 모두 모여 들어서 폐단이 된 지가 오래었다. 연수가 관에 부임하매 곧 무당과 그 일을 시초한 자를 잡아서
곤장을 때리고, 드디어 그 나무 허수아비를 불태우니 요망한 제사가 끊어졌다. 송담(宋譚).
인물 본조 김길통(金吉通) : 임자년(1432)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성종(成宗) 때에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월천군
(月川君)을 봉하고, 벼슬이 호조 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아들 순명(順命)이 과거에 오르고,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참여하여 청릉군(淸陵君)을 봉하였다.
신증 효자 본조 유자하(柳自河) : 부모를 지성으로 섬겨 아버지 병이 위급하자 똥을 맛보아 죽고 살지를 증험하였다.
일이 조정에 들리매 정려(旌閭)하였다.
제영 도화촌로신선경(桃花村路神仙境)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복사꽃 촌 길은 신선의 지경이요, 단풍잎 시내와
산은 금수(錦繡)의 병풍이다." 하였다.
입운조도통인연(入雲鳥道通人煙) : 안극인(安克仁)의 시에, "물을 끼고 있는 백성의 삶은 곧 신선 지경이로구나.
구름에 치달은 새 길[鳥道]은 인가의 연기와 통한다." 하였다.
대강서주흡운연(大江西走吸雲煙) : 정추(鄭樞)의 시에, "늘어선 멧부리가 동으로 돌아서 해와 달을 맞이하고,
큰 강이 서쪽으로 달아나면서 구름과 연기를 흡수한다." 하였다.
일강미우수생연(一江微雨水生煙) : 김백영(金伯英)의 시에, "9월의 맑은 서리에 산이 비단이 되었고, 한 강의 부슬비
에 물에서 연기가 난다." 하였다.
[비고]
연혁 현종 9년(1668)에 중궁전하 김씨(金氏) : 명성왕후(明聖王后)의 관향(貫鄕)이라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
시켰다.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 충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忠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한다. 한 사람.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읍내(邑內) : 끝이 5리. 근남(近南)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 원남(遠南) : 처음이 20리, 끝이 40리.
근서(近西) : 처음이 5리, 끝이 30리. 원서(遠西) : 처음이 30리, 끝이 55리. 동면(東面)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북면(北面) : 처음이 5리, 끝이 15리. 수화(水化)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성지 고성(古城) : 저성(猪城)이라 칭하는데, 동쪽으로 5리에 있으며, 옛터가 있다.
고성(古城) : 성황산(城隍山)이 있었는데, 유적(遺跡)이 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사열산성(沙熱山城)을 증축하였다.
진도 북강진(北江津) : 북쪽으로 5리에 있는데, 제천(堤川)으로 통한다.
황강진(黃江津) : 역북(驛北)에 있으며, 원주(原州)로 통한다.
토산 누치[訥語]ㆍ쏘가리[錦鱗魚]ㆍ자라[鼈]
사원 봉강서원(鳳岡書院) : 현종 신해년(1671)에 세웠고, 임자년(1672)에 사액하였다.
김식(金湜) : 자는 노천(老泉), 본관은 청풍(淸風), 중종 경신년(1520)에 자살하였다. 벼슬은 부제학 영의정에 추증
되었으며, 시호는 문의(文懿).
김권(金權) : 자는 이중(而中), 김식의 손자. 광해주 임술년(1622)에 귀양가서 죽었다. 벼슬은 이조 판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 김육(金堉) : 개성(開城)에 보인다.
○ 황강서원(黃江書院) : 영종 병오년(1726)에 세웠고 정미년(1727)에 사액하였다.
권상하(權尙夏) : 충주(忠州)에 보인다.
단양군 丹陽郡
동쪽으로 경상도 풍기군(豐基郡) 경계까지 29리이고, 남쪽으로 경상도 예천군(醴泉郡) 경계까지 36리이고,
서쪽으로 청풍군(淸風郡) 경계까지 22리이고, 북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52리이고,
영춘현(永春縣) 경계까지 43리이고, 서울까지 3백 5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인데 혹은 적성(赤城)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내제군(奈堤郡)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단산현(丹山縣)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1018)에 원주(原州)에 붙였다가 충주(忠州)에 옮겨 붙였다.
합단(哈丹)의 난에 고을 사람들이 능히 적을 막았으므로 그 공을 상주어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숙왕(忠肅王) 5년(1318)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승격하여 군(郡)으로 만들었는데, 본조(本朝)에서 인습하였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이다.
군명 적산(赤山)ㆍ적성(赤城)ㆍ단산(丹山).
성씨 본군 장(張)ㆍ지(池)ㆍ이(李)ㆍ우(禹). 매질포(買叱浦) 피(皮)ㆍ이(李)ㆍ지(池) : 모두 원주(原州).
형승 산수기수(山水奇秀) : 이작(李作)의 기(記)에, "단양은 옛 고을이라 산수가 기이하고 빼어났으니, 그 더없이
맑은 기운이 반드시 헛되이 축적되었을 리가 없다." 하였다.
천암만학(千巖萬壑) : 신개(申槩)의 시에, "천 바위와 만 구렁에 한 강이 돌고, 돌을 깎고 언덕을 따라 작은 길로
간다." 하였다. 장강금포(長江襟抱) :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긴 강이 옷깃처럼 싸고 일만 산이 돌았다." 하였다.
산천 올산(兀山) : 군 서쪽 2리에 있다. 혹은 소유올산(所由兀山)이라고도 한다.
가은암산(加隱巖山) : 군 서쪽 17리에 있다. 죽령(竹嶺) : 군 동쪽 30리, 경상도 풍기군 경계에 있다.
건지산(乾止山) : 군 남쪽 15리에 있다. 상악산(上嶽山) : 군 서쪽 13리에 있다.
가은암산(加隱巖山)과 서로 연하여 몹시 험하고 막혔다. 산 꼭대기에 돌 우물 2개가 있는데, 가물면 비를 빈다.
여물진산(餘勿眞山) : 군 동쪽 10리에 있다. 성산(城山) : 군 북쪽 3리에 있다.
계두산(鷄頭山) : 군 남쪽 20리에 있다. 소백산(小白山) : 군 동쪽 35리에 있다.
두혈산(頭穴山) : 군 남쪽 8리에 있다. 객산(客山) : 군 북쪽 30리에 있다. 갑산(甲山) : 군 북쪽 40리에 있다.
연비산(鷰飛山) : 군 서쪽 10리에 있다. 높고 크고 몹시 험하며 상악산과 마주보고 있다. 가운데에는 큰 내가 있어
흘러 지나가는데, 바로 상진(上津)의 큰 물줄기이다. 금수산(錦繡山) : 군 북쪽 20리에 있다.
가문현(加文峴) : 매포현(買浦縣) 동북쪽 10리에 있다. 길이 대단히 험하고 좁다. 또한 영춘현조(永春縣條)에도
보인다.
상진(上津) : 군 북쪽 13리에 있다. 혹은 마진(馬津)이라고도 한다. 근원이 강능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서
흘러 충주(忠州) 금천(金遷)으로 들어간다.
하진(下津) : 군 서쪽 4리에 있으니, 곧 상진(上津)의 하류이다.
소요항탄(所要項灘) : 군 서쪽 5리에 있으니, 곧 하진(下津)의 하류이다.
남천(南川) : 군 서쪽 30보(步)에 있다. 근원이 경상도 예천군(醴泉郡) 작성산(鵲城山)에서 나와서 이요루(二樂樓)
앞을 지나 하진으로 들어간다.
북평천(北坪川) : 군 북쪽 5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죽령(竹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풍기군(豐基郡)
축점(杻岾)에서 나와서 장림역(長林驛) 앞에서 합류하여 상진으로 들어간다.
신증 불암천(佛巖川) : 군 남쪽 20리에 있다. 경치가 좋다. 도담(島潭) : 군 북쪽 24리에 있다. 세 바위가 못 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도담에서 흐름을 거슬러서 수백 보쯤 가면 푸른 바위가 만 길이나 된다. 황양목(黃楊木)과 측백(側柏)
이 돌 틈에서 거꾸로 났고, 바위 구멍이 문과 같아서 바라보면 따로 한 동천(洞天)이 있는 것 같다.
구담(龜潭) : 군 서쪽 20리에 있다.
토산 대[竹]ㆍ대추[棗]ㆍ옥석(玉石) : 군 동쪽 덕상동(德上洞)에서 산출된다.
먹[墨] : 품질이 가장 좋다. 단산오옥(丹山烏玉)이라고 한다.
송심(松蕈)ㆍ해송자(海松子)ㆍ칠(漆)ㆍ자초(紫草)ㆍ봉밀(蜂蜜)ㆍ석심(石蕈)ㆍ복령(茯苓)ㆍ안식향(安息香)ㆍ
백화사(白花蛇)ㆍ오미자(五味子)ㆍ황양(黃楊)ㆍ눌어(訥魚)ㆍ인삼(人蔘)ㆍ신감채(辛甘菜)ㆍ
청석(靑石) : 군 북쪽 약야촌(若也村)에서 난다. 청금석(靑金石) 같은데 금은 없다.
신증 녹반(綠礬) : 군 북쪽 35리, 평동(坪洞)에서 난다.
봉수 소이산 봉수(所伊山烽燧) : 동쪽으로 경상도 풍기군 죽령(竹嶺)에 응하고,
서쪽으로 청풍군(淸風郡) 오현(吾峴)에 응한다.
누정 이요루(二樂樓) : 군 서쪽 30보에 있다.
○ 정탁(鄭擢)의 시에, "다락 밖에는 긴 강이요 강 위에는 산인데, 동풍이 버들을 불어 봄추위를 보낸다." 하였다.
신증 김일손(金馹孫)의 기에, "중원(中原)으로부터 동으로 가서 죽령(竹嶺)을 향하면, 그 사이에 좋아할 만한 산수가
하나가 아니다. 황강(黃江)ㆍ수산(壽山) 두 역을 지나면 청풍 땅이 다 되고, 한 고개를 넘어 단양 지경에 들어서면
장회원(長會院)이 된다. 그 아래에서 말고삐를 늦추면 점점 아름다운 지경으로 들어가는데, 홀연히 쌓인 돌무더기가
우뚝 솟고 총총한 봉우리가 첩첩이 푸르러 좌우가 아득하고 동서로 현혹되어 아무리 교력(巧歷)이라도 셀 수가 없다.
언덕이 열리고 산협이 터지면서 한 강이 가운데로 유유히 흐르는 것이 똑같이 푸르다.
강 북쪽 언덕 옆 낭떠러지 험한 곳을 수백 보 오르면 성이 있어서 사람이 숨을 만하므로 옛 이름이 가은암(可隱巖)
이다. 내가 그 앞에 말을 세우니 연기와 안개에 길이 희미하여 어렴풋이 도끼 자루를 썩힐 생각이 난다.
절경(絶境)이 명칭이 없음을 아깝게 여겨 처음으로 단구협(丹丘峽)이라 이름하였다. 협(峽)을 거쳐 동쪽으로 가니,
산은 더욱 기이하고 물은 더욱 맑다. 10리를 가다가 협이 다 되어 머리를 돌리자 가인(佳人)을 이별하는 것 같아서
열 걸음에 아홉 번 돌아보았다. 곧장 동쪽으로 적성(赤城)을 바라보니 지척도 못 되었다. 강에 나루가 있는데 작은
배가 비꼈으니 곧 하진(下津)이다. 나루를 거슬러 10리쯤 올라가면 또 관도(官渡)가 있으니 곧 상진(上津)이다.
철벽(鐵壁) 천 길이 나루 강을 눌러 서 있는데 떨리고 두려워서 기어오를 수가 없다. 처음으로 서골암(棲鶻巖)이라
이름하였다. 나루의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 구렁과 골짜기를 돌고 돌아서 서쪽으로 멀리
5,6백 리를 달리니, 아무리 가벼운 배라도 그 물줄기를 다 거슬러 갈 수는 없다. 돌이켜서 흐름을 따라 하진에 못미
쳐 남쪽으로부터 오는 내가 있으니, 옛 이름은 남천(南川)이다. 내의 왼편 언덕에 누(樓)가 날씬하게 서 있는데 날
이 이미 컴컴하게 어두워 오를 수가 없어서 드디어 군 관사에 투숙하였다.
이튿날 군수 황린(黃璘)이 누에 오르기를 청하여 드디어 더불어 난간을 붙잡고 올라가 보니, 제비는 날고 닭은 쪼고,
까치는 지저귀고 손[客]은 오고, 영(嶺)의 구름은 상악(上岳)에 연하고 가을빛은 금수산(錦繡山)에 짙어져서 층층
첩첩 푸른 산이 한 다락을 빙 둘렀으며, 남천의 흐름은 난간 밑에 콸콸 흐르고, 상진(上津)의 물결은 숲 사이로 겹쳐
보여 어제 말 위와 배 위에서 보던 것이 모두 술잔과 궤석(几席) 사이에 있으니, 대개 두 눈의 수확이 두 다리의
소득보다 더함이 있다. 벽 사이를 보니 비해당(匪懈堂)이 편액(扁額)으로 쓴 이요루(二樂樓)라는 세 자의 큰 글자가
환하여 마치 명월주(明月珠)와 야광벽(夜光璧) 같아서 광채를 가까이할 수 없고 시내와 산이 빛을 머금었다.
내가 흔연히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여 황후(黃侯)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오직 어진 자인 연후에야 능히 산을 좋아
하고, 지혜로운 자인 연후에야 능히 물을 좋아하나니, 석 달 동안을 어긋나지 않는 자라야 거의 인(仁)이 된 것이요,
백 세를 알 수 있어야 지(智)라고 할 수 있다. 그 지경에 미치지 못하고 한갓 정을 산수에 달리면 스스로 속이는 것
에 가깝지 않은가. 대개 사람이 인과 지의 품성을 갖추지 않은 이가 없으나 능히 그 인과 지의 발단을 확충하는 이는
적다. 능히 그 인과 지를 확충할 수 있음이 나의 분수를 넘는 일은 아니다. 산의 고요하여 옮기지 않는 것을 본받고
물의 흘러서 막히지 않는 것을 본받아서 한 마음의 덕을 안정시키고 만물의 변함을 두루한다면 두 가지의 참다운
즐거움을 내가 얻어 겸할 수 있을 것이다. 황후는 성질이 안존하고 자상하며 또 정치에 통달했다.
부모의 봉양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지방 수령을 자원하여 왔으니 이미 그 부모에게 인하였고 그 효도를 가르쳐
한 경내를 다스렸다. 얼마 안 되는 백성을 부리고 척박한 땅에 조세를 거두는데 조처가 적당함을 얻어서 능히 부서
(簿書)를 처리하고 조세를 이바지하며, 또 남은 힘을 대(臺) 짓는 데에 써 쓰러지고 부서진 것을 수리하고 예전 제도
를 폐함이 없으니, 황후의 어질고도 지혜스러움을 볼 수 있다. 황후가 이러한 작은 데까지 마음을 다하여 학문이
천리(天理)가 유행하는 극한까지 이르러 그 일 없음을 행한다면,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이 곧 나의 인(仁)ㆍ지(智)의
일체(一體)가 될 것이다. 황후는 힘쓸지어다. 만일 술잔이나 희롱하고 관현(管絃)에 취하여 올라 조망(眺望)하는
것으로 낙을 삼아서, 다만 그 은연히 높이 서 있는 것은 산이요 빨리 가는 것은 물임을 보아 그 빼어나고(산 (山))
맑은(물 (水)) 것을 좋아할 뿐이라면, 또 장차 나무신을 신고 산에 높이 오르고 깊이 들어가기를 사강락(謝康樂)같
이 하고, 투금뢰(投金瀨)에서 놀아 공무(公務)를 폐하기를 맹동야(孟東野)같이 함이 있어서 이요(二樂)의 뜻에
더럽힘이 있을 것이다. 무릇 우리 함께 이 누에 오른 사람은 어찌 서로 더불어 힘쓰지 않으랴.' 하였다.
함께 오른 사람은 누구인가? 화산(花山) 권경유(權景裕)와 사집(沙執) 김세영(金世英)과 황후의 아우 위(瑋)ㆍ필
(●)인데 모두 공자를 배우는 사람이다. 드디어 서로 힘쓰고 또 뒤이어 오르는 자를 영원토록 권면하노라." 하였다.
○ 김내문(金乃文)의 시에, "동부(洞府)가 깊고 깊어 푸른 흐름에 안겼는데, 협(峽) 가운데에 또 높은 누각 솟은 것
을 보겠다. 뾰족뾰족한 산봉우리는 아득하게 삼도(三島 삼신산(三神山))을 두르고, 피리 학(鶴)은 어렴풋이 십주
(十洲 신선이 사는 곳)로 내려온다. 물이 시내 구비에 떨어졌으매 생선 가게가 적고, 구름이 골짜기 어귀에 나니
돌 숲이 그윽하다. 깊은 가을에 머물러 지체하는 강남(江南)의 손이, 오늘 아침을 향하여 묵은 근심을 다 씻노라."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군 남쪽 1리에 있는데, 풍화루(風化樓)가 있다. 영락(永樂) 14년(1416)에 지군(知郡)
이작(李作)이 세웠는데, 기(記)가 있다.
역원 영천역(靈泉驛) : 군 북쪽 40리에 있다. 장림역(長林驛) : 군 동쪽 10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 군 동쪽 2리에 있다. 앵원(鶯院) : 군 동쪽 10리에 있다. 용부원(用富院) : 군 동쪽 20리에 있다.
장회원(長會院) : 군 서쪽 20리에 있다. 유덕원(有德院) : 군 서쪽 2리에 있다.
불우 원당사(原堂寺)ㆍ개원사(開原寺)ㆍ자복사(資福寺) : 모두 금수산(錦繡山)에 있다.
법호사(法護寺) : 건지산(乾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올산(兀山)에 있다.
여단(厲壇) : 군 북쪽에 있다. 죽령사(竹嶺祠) : 사전(祀典) 소사(小祀)에 실려 있다.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치제(致祭)한다.
고적 매질포(買叱浦) : 군 북쪽 25리에 있으며, 관사(館舍)가 있다.
금의곡소(金衣谷所) : 군 동쪽 30리에 있다. 가은암산성(加隱巖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3천 18척인데, 지금은
모두 퇴락하였다. 안에 세 샘이 있는데 험하고 막혔다. 고려 말년에 제천(堤川) 청풍(淸風)과 본군 사람이 여기에서
왜적을 피하였다. 성산성(城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1천 7백 68척이다. 안에 큰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인물 고려 이공로(李公老) : 명종(明宗) 때에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다. 문장이 넉넉하고 더욱 사륙문(四六文)에 능
하였다. 고종(高宗) 때에 나가서 경상도 안찰사(慶尙道按察使)가 되었는데, 명령하면 행하고 금지하면 그쳐 관내
(管內)가 잘 다스려지자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승진하여, 임금이 의지하여 복심(腹心)을 삼았다.
죽은 뒤에 집에는 한 섬 곡식도 쌓아둔 것이 없었다.
우탁(禹倬) : 과거에 올라 여러 번 옮겨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되었다. 그때에 충선왕(忠宣王)이 안으로 음행이
있으매 우탁이 흰옷을 입고 도끼를 가지고 거적자리를 메고 대궐에 나아가서 소(疏)를 올려 감히 간하니, 근시(近侍)
하는 신하가 소를 펴들고 감히 읽지 못하자 우탁이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경이 근시하는 신하가 되어 임금의 그릇
됨을 바로잡지 못하고 악을 인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이 그 죄를 아는가?" 하니, 좌우가 벌벌 떨고 임금은
부끄러운 빛이 있었다. 뒤에 물러가 예안현(禮安縣)에 살았는데, 충숙왕(忠肅王)이 그 충의를 아름답게 여겨 두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우탁은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 통하고 더욱 《주역(周易)》에 깊어서 점을 치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정전(程傳)이 처음 들어오니 우리나라에서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우탁이 문을 닫아 걸고 한달이
넘도록 연구하여 이해하고서 생도들에게 가르쳐 주니, 이학(理學)이 비로소 행해졌다.
벼슬이 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이르렀다. 우인열(禹仁烈) : 공민왕(恭愍王) 때에 여러 벼슬을 거쳐 판선공시사(判繕
工寺事)가 되고, 계림 부윤(鷄林府尹)에 이르렀다. 우현보(禹玄寶) : 공민왕 때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우시중(右侍
中)에 이르고,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을 봉하고 뒤에 단양백(丹陽伯)을 봉하였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신증 우거 본조 황계옥(黃啓沃) : 과거에 올라 벼슬이 홍문관 응교에 이르렀다 문명(文名)이 있었다.
효자 고려 지중해(池重海) : 왜적이 동네에 침입하니, 중해는 나이 10세에 어머니와 함께 도망쳐 수풀 밑에 엎드려
손으로 마[薯]를 캐 어머니를 봉양하고, 혹은 밤을 틈타 집에 돌아가서 쌀을 가져다가 봉양하였다.
일이 조정에 들리자 정려(旌閭)하였다.
지몽구(池夢句) : 아버지가 북진(北津)에 빠져 죽으매 시체를 찾아서 부곡(釜谷)에 장사지내고 밤낮으로 울고 뛰며
무덤 앞 한데서 거처하였는데, 하루는 큰 범이 와서 부르짖자 몽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골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함께 초가집을 지어 주었다. 일이 조정에 들리자 정려하였다.
제영 운개자석병(雲開紫石屛) : 이색(李穡)의 시에, "새벽에 단양 길을 향하니, 구름이 자석 병풍을 열었다." 하였다.
한인욕향도원숙(閑人欲向桃源宿) : 이색의 시에, "한가한 사람은 도원을 향해 자려 하고, 역 아전은 다투어 촉 나라 길
[蜀道]이 어렵다고 말한다." 하였다.
여염협간상마밀(閭閻夾澗桑麻密) : 최연(崔沇)의 시에, "여염이 시내를 끼고 있으니 뽕나무와 삼나무가 빽빽하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구름에 솟았으니 동학(洞壑)이 그윽하다." 하였다.
[비고]
방면 읍내 : 끝이 10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남면(南面) : 위와 같다.
서면(西面) :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조산촌(造山村) : 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소야촌(所也村)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북면(北面)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 금의곡소(金衣谷所)는 동쪽으로 30리이다.
성지 독락성(獨樂城) : 군의 동남쪽에 있는데, 서ㆍ남ㆍ북쪽은 몹시 험악하고 동쪽만은 사다리가 만들어져 있지만,
이리저리 돌이 흩어져 험하다. 중턱쯤 올라가면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옛날 난을 피했던 곳이다.
진도 상진(上津) : 마진(馬津)이라고도 하며, 동북쪽으로 20리에 있다. 하진(下津) : 서쪽으로 5리에 있다.
토산 대추[棗]ㆍ칠(漆)ㆍ쏘가리[錦鱗魚]
누정 봉서루(鳳棲樓) : 읍내에 있다. 창하정(蒼霞亭) : 구담(龜潭)에 있다.
서벽정(棲碧亭) : 사인암(舍人巖)의 돌 사이에 있다. 수운정(水雲亭) : 운암(雲巖) 곁에 있다.
사원 단암서원(丹巖書院) : 현종 임인년(1662)에 세웠으며 임신년(1692)에 사액하였다.
이혼(李混) : 문묘 조에 있다. 우탁(禹倬) : 자는 천장(天章), 본관은 단양(丹陽), 벼슬은 성균 좨주이며, 어짊으로
벼슬이 올라 직제학으로는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괴산군 槐山郡
동쪽으로 연풍현(延豐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 청안현(淸安縣) 경계까지 38리이고, 서쪽으로 음성현
(陰城縣) 경계까지 29리이고, 북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2백 9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잉근내군(仍斤內郡)인데 신라에서 괴양군(槐壤郡)으로 고치고, 고려에서 괴주(槐州)로
고치었다. 현종(顯宗) 9년(1018)에 충주(忠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本朝) 태종(太宗) 3년(1403)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승격하고,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규례에 따라
군(郡)을 만들었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이다.
군명 잉근내(仍斤內)ㆍ괴양(槐壤)ㆍ괴주(槐州)ㆍ시안(始安)
성씨 본군 강(强)ㆍ안(安)ㆍ음(陰)ㆍ피(皮)ㆍ방(邦)ㆍ진(秦)ㆍ지(智)ㆍ라(羅) : 모두 속(續)이다.
이(李)ㆍ노(盧)ㆍ신(申)ㆍ점(占)ㆍ백(白)ㆍ율(律)ㆍ택(宅)ㆍ물(物)ㆍ직(直)ㆍ형(刑)ㆍ박(朴)ㆍ안(安) : 모두 일본(日本)
이다. 모갑(毛●) 장(張)ㆍ종(宗)ㆍ석(石)
산천 금산(錦山) : 군 서쪽 2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대원산(大原山) : 군 동쪽 1리에 있다.
원성산(元城山) : 군 동쪽 21리에 있다. 산 남쪽은 바로 경상도 경계이다. 송명산(松明山) : 군 동쪽 12리에 있다.
보광산(普光山) : 군 남쪽 26리에 있다. 산 꼭대기에 작은 우물이 있다. 남산(南山) : 군 남쪽 3리에 있다.
군대산(軍岱山) : 군 동쪽 13리에 있다. 소마산(小馬山) : 군 서쪽 25리에 있다. 목소산(目所山) : 군 북쪽 10리에 있다.
송현(松峴) : 군 서쪽 20리에 있다. 모현(茅峴) : 군 동쪽 20리에 있다. 구을현(仇乙峴) : 군 남쪽 13리에 있다.
도차의현(道車衣峴) : 군 북쪽 20리에 있다. 괴진(槐津) : 군 동쪽 7리에 있는데, 곧 충주(忠州) 달천(達川)의 상류이다.
남천(南川) : 군 남쪽 2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구을현에서 나오고 송현에서 나온다.
북천(北川) : 군 북쪽 1리에 있다. 근원이 도차의현에서 나와서 대원산(大原山) 밑을 지나 남천과 합류하여 괴탄(槐灘)
으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칠(漆)ㆍ자초(紫草)ㆍ인삼(人蔘)ㆍ봉밀(蜂蜜)ㆍ안식향(安息香)ㆍ복령(茯笭)ㆍ백화사(白花蛇)ㆍ눌어(訥魚)
누정 존빈루(尊賓樓)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군수 안요경(安堯卿)이 중수하고, 관찰사 이숙함(李叔●)이 누(樓)의
편액(扁額)을 고쳐 읍취(挹翠)라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장정(長亭)과 단정(短亭)을 지나 다하니, 푸른 산 깊은 곳에 외로운 성이 있다. 높은 다락
이 뾰족 솟았으니 하늘 바람이 내리고, 비가 자욱히 내리니 시내 물이 난다. 버들은 허리를 흔들어 묘한 춤을 보이고,
산은 그린 눈썹을 비끼어 한가한 정(情)을 자아낸다. 사신의 질탕히 노는 것 사람들이 웃는 대로 놔두고, 사롱(紗籠)
으로 내 이름을 보호하게 말라." 하였다.
피서정(避暑亭) : 객관 서쪽에 있다.
학교향교(鄕校) : 군 서쪽 1리에 있다. 신증 지금은 옮겨서 군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인산역(仁山驛) : 군 동북쪽 2리에 있다. 탄제원(灘濟院) : 괴진(槐津) 언덕에 있다.
풍정원(楓井院) : 군 남쪽 13리에 있다. 북암원(北巖院) : 군 북쪽 5리에 있다. 반상원(伴相院) : 군 동쪽 7리에 있다.
익철원(益哲院) : 군 서쪽 34리에 있다.
신증 교량 괴탄교(槐灘橋) : 군 동쪽 7리에 있다.
불우 의상암(義相庵) : 원성산(元城山)에 있다. 성불사(成佛寺) : 송명산(松明山)에 있다.
보광사(普光寺)ㆍ소마사(小馬寺) : 모두 보광산(普光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신증 지금은 옮겨서 군 동쪽 2리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 동쪽 2리에 있다. 여단(厲壇)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유창(柳倉) : 옛날에는 세이창(世伊倉)이라고 일컬었다. 군 동쪽 21리에 있다. 옛날 공세(貢稅)를 거두던 곳이다.
세우처(世于處)ㆍ사량저처(沙良渚處) : 군 서쪽 20리에 있다. 모갑소(毛●所)ㆍ주을장이소(主乙長伊所)
제영 금조모설괴성(今朝冒雪槐城) : 남긍(南兢)의 시에, "지난날에는 양계(楊界)에서 순시풍속을 관찰하였더니,
오늘 아침에는 괴성(槐城)에서 눈을 무릅쓴다. 어찌 이가 남가(南柯)의 태수리요. 또한 동곽 선생(東郭先生)도 아니다." 하였다.
난산취옹고성(亂山翠擁孤城) : 안극인(安克仁)의 시에, "두 줄기 물은 맑아서 비옥한 들판을 돌고, 어지러운 산은
푸르러 외로운 성을 옹위했다." 하였다.
심여청산유소(心與靑山有素) : 이구(李玖)의 시에, "소문은 이미 괴읍(槐邑)을 지났는데, 행색(行色)은 오히려 예성
(蘂城)에 머물러 있다. 마음은 청산과 교분이 있고, 일은 백일(白日)을 따라 다시 생긴다. 거울에 비치느니 눈(雪) 같은
살쩍이 하도 싫더니, 꽃을 보니 풍정(風情)을 금할 수 없네. 스스로 발당(茇棠)의 유애(遺愛) 없거니, 아이야, 누가 오얏[李]을 가리켜 이름을 하리." 하였다.
사산위사층성(四山圍似層城) : 조계생(趙啓生)의 시에, "한 줄기 물은 흰 비단 같이 흐르고, 사면의 산은 층층이 성같
이 둘렸다. 백성이 편안하매 임금의 힘을 알지 못하고, 손 노릇한 지 오래매 고향 생각을 금하기 어렵다. 언덕을 격
하여 둥그런 초가집이 서로 접하고, 담을 연하여 무성한 나무가 질서 있게 났다. 다락에 올라 푸른 병풍을 대하고 앉
으니, 두견새가 달 아래에서 제 이름을 부른다." 하였다.
산색계성구불속(山色溪聲俱不俗)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도롱이를 입고 비를 무릅쓰고 산을 곁하여 오니, 구비
구비 맑은 시내 소리가 우레 같다. 산 빛과 시내 소리 속되지 않아, 일시에 비와 섞여 시(詩) 생각에 들어온다." 하였다.
신증 풍우무단만성(風雨無端滿城) : 최숙생(崔淑生)의 시에, "구름과 연기는 특별히 눈을 막고, 바람과 비는 무단히
성에 가득하다. 마루와 창에 더위 물러가는 것이 참으로 기쁘구나. 베개와 돗자리에 서늘한 기운 남을 갑자기 놀래
노라. 푸른 산은 시흥(詩興)을 돋우려 하고, 흰 터럭은 벼슬에 대한 정이 저절로 희박해진다. 말 위에서 공연히 세월
을 허비하였고, 거울 속에 공명(功名)이 우습구나." 하였다.
[비고]
방면 일도(一道) : 서쪽으로 끝이 5리이다. 이도(二道) :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동상(東上)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동중 : 처음이 10리, 끝이 35리이다.
동하(東下)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상(北上) :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북하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남상(南上) :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5리이다.
남중(南中) : 처음이 8리, 끝이 20리이다. 남하 : 동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 군대산(軍岱山)에 있으며, 백화성(白和城)이라 칭한다.
진도 괴탄진(槐灘津) : 연풍(延豐)으로 통하며, 비가 오면 다리를 설치한다.
토산 쏘가리[錦鱗魚]ㆍ대추[棗]
누정 읍취루(挹翠樓)
연풍현 延豐縣
동쪽으로 경상도 문경현(聞慶縣) 경계까지 11리이고, 남쪽으로 문경현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쪽으로 괴산군
(槐山郡) 경계까지 33리이고, 북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50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3백 6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상모현(上芼縣)이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9년(1018)에 장연(長延)으로 고치고
장풍현(長豐縣)과 함께 충주(忠州)에 붙였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1394)에 두 현(縣)을 합하여 감무(監務)를
두고 장풍현이라 일컬었고, 태종(太宗) 3년(1403)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13년에 규례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만들었다. 세종(世宗) 11년(1429)에 충주의 동촌(東村)을 베어 붙이고,
성종(成宗) 7년(1476)에 또 충주의 수회촌(水回村)을 베어서 붙였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이다.
군명 상모(上芼)ㆍ장연(長延)
성씨 장연(長延) 이(李)ㆍ신(申)ㆍ음(陰)ㆍ애(艾)ㆍ윤(尹)ㆍ김(金)ㆍ석(石)ㆍ안(安) : 모두 외방에서 왔다.
장풍(長豐) 안(安)ㆍ진(秦)ㆍ석(石)ㆍ우(祐)ㆍ시(時)ㆍ김(金)ㆍ우(禹) : 모두 속(續)이다.
산천 계립령(鷄立嶺) : 세속에서 마골재[麻骨岾]라 한다. 현 북쪽 43리에 있다.
고구려의 온달(溫達)이 이른바,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않겠다." 한 것이 이 땅이다.
주정산(周井山) : 현 북쪽 38리에 있다. 조령(鳥嶺) : 초점(草岾)이라고도 한다. 현 동북쪽 15리 경상도 문경현 경계에
있는데, 험하고 막힌 요해지(要害地)이다.
이화현(伊火峴) : 현 동쪽 7리, 문경현 경계에 있다. 공정산(公正山) : 현 동쪽 5리에 있다.
박달산(朴達山) : 현 서북쪽 34리에 있다. 정자산(亭子山) : 장풍현에 있다. 경항산(景項山) : 현 동북쪽 20리에 있다.
희양산(曦陽山) : 현 동남쪽 20리에 있다. 또한 문경현 조에 보인다. 마본산(馬本山) : 현 서쪽 22리에 있다.
만수산(萬壽山) : 현 동북쪽 35리에 있다. 장항산(場項山) : 현 북쪽 37리에 있다. 송현(松峴) : 현 서북쪽 20리에 있다.
우점(牛岾) : 현 북쪽 10리에 있다.
이화천(伊火川) : 현 서쪽 5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이화현(伊火峴)에서 나오고 하나는 조령에서
나와서 합류하여 괴산군(槐山郡) 괴탄(槐灘)으로 들어간다.
온정(溫井) : 현 북쪽 30리, 안부역(安富驛) 서쪽에 있다.
토산 송심(松蕈)ㆍ석심(石蕈)ㆍ신감채(辛甘菜)ㆍ잣[海松子]ㆍ봉밀(蜂蜜)
봉수 마골점 봉수(麻骨岾烽燧) : 동쪽으로 문경현 탄항산(炭項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주정산(周井山)에 응한다.
주정산 봉수(周井山烽燧) : 북쪽으로 충주 대림산(大林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마골재[麻骨岾]에 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안부역(安富驛) : 현 북쪽 28리에 있다. 신풍역(新豐驛) : 현 북쪽 9리에 있다.
신혜원(新惠院) : 현 북쪽 20리에 있다. 온정원(溫井院) : 온정 곁에 있다. 연경원(延慶院) : 현 서쪽 2리에 있다.
불우 각연사(覺淵寺) : 정자산(亭子山)에 있다. 원통사(元通寺) : 장항산(場項山)에 있다.
선정사(禪頂寺) : 박달산(朴達山)에 있다. 심곡사(深谷寺) : 공정산(公正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 북쪽 1리에 있다.
여단(厲壇)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장풍 폐현(長豐廢縣) : 현 서쪽 20리에 있다.
제영 산 빛은 난간 앞에 많다 : 김분(金汾)의 시에, "물 소리는 수풀 밖에서 급하고, 산 빛은 난간 앞에 많다." 하였다.
시내 소리는 땅을 따라 다한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이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15리이다. 고사리(古沙里) : 동쪽으로 처음이 2리, 끝이 40리이다.
수회(水回)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면의(勉義)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5리이다.
장풍(長豐)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토산 대추[棗]
음성현 陰城縣
동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8리이고, 북쪽으로 충주 경계까지 25리이고, 남쪽으로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18리, 청안현(淸安縣) 경계까지 35리이고, 서쪽으로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40리이고, 서울까지 2백 4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잉홀현(仍忽縣)인데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흑양군(黑壤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고려(高麗)에서 충주(忠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규례에 따라
현감으로 만들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이다.
군명 잉홀(仍忽)ㆍ설성(雪城)ㆍ잉근내(仍斤內) : 육익(六翼)
성씨 본현 송(宋)ㆍ윤(尹)ㆍ경(敬)ㆍ정(鄭)ㆍ박(朴)ㆍ채(蔡)ㆍ최(崔)ㆍ이(李)ㆍ신(申) : 모두 속(續)이다.
파천(巴川) 채(蔡)ㆍ경(敬)ㆍ윤(尹).
산천 가섭산(迦葉山) : 현 북쪽 8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정자산(亭子山) : 현 동남쪽 10리에 있다.
품현(品峴) : 현 서쪽 10리에 있다. 사장산(沙將山) : 현 서북쪽 10리에 있다. 수정산(水精山) : 현 동쪽 3리에 있다.
보현산(普賢山) : 현 서쪽 19리에 있다. 밀암(密巖) : 산성(山城) 밑에 있다. 웅암(熊巖) : 현 서남쪽 10리에 있다.
옥천산(玉川山) : 현 남쪽 5리에 있다.
토산 대추[棗].
봉수 가섭산 봉수(迦葉山烽燧) : 동쪽으로 충주 마산(馬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충주 망이산(望夷山)에 응한다.
누정 의송정(倚松亭) : 객관 동쪽에 있다.
○ 권극화(權克和)의 시에, "남주(南州)에 몇 누대(樓臺)를 두루보니, 경치가 하도 많아 내 정취(情趣)를 어지럽힌다.
오늘 설성(雪城)에 서늘한 기운 넉넉하니, 베개를 비스듬이 솔바람 소리 듣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였다.
신증 최운생(崔淑生)의 시에, "깊은 가을 뜨거운 날이 구름 산에 새어나오니, 빛이 푸르고 푸르러 늙은 얼굴에 비친다.
부들과 버들이 서리를 만나 모두 절개를 떨어뜨렸는데, 그대의 풍채를 대하니 문득 돌아가기를 잊었노라." 하였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감원역(坎原驛) : 현 서쪽 1리에 있다. 양혜원(楊惠院) : 현 남쪽 9리에 있다.
장신원(長信院) : 현 서쪽 19리에 있다.
불우 서가섭사(西迦葉寺)ㆍ상봉악사(上鳳岳寺) : 모두 가섭산(迦葉山)에 있다.
성주사(聖住寺) : 보현산(普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 동쪽 2리에 있다.
여단(厲壇)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고산성(古山城) : 수정산(水精山) 위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2백 71척이고, 높이가 10척 남짓이고,
안에는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성 남쪽에 고읍(古邑)의 유지(遺址)가 있는데 관평(官坪)이라고
부른다.
금촌부곡(金村部曲) : 현 서쪽 15리에 있다. 파천부곡(巴川部曲) : 현 남쪽 20리에 있다.
인물 고려 채정(蔡靖) : 현(縣)의 아전이다. 공부에 힘써 경서에 통하여 과거에 올랐다. 동도(東都) 서기(書記)에
재직할 때에 맑은 덕이 있었다. 임기가 차자 국학 학정(國學學正)에 전보(轉補)하였는데 선비들이 공경하고 어려
워하였다. 고종(高宗) 때에 추밀부사(樞密副使)를 제수하였다.
신증 본조 박숙진(朴叔蓁) : 과거에 올라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다.
제영 고목행상인(古木行相引) : 서강(徐岡)의 시에, "닭이 울자 관도(官道)로 향하였는데, 머리를 돌리니 벌써 아침
햇빛이로구나. 고목은 가는 대로 서로 연달았고, 먼 뫼뿌리는 바라보면 다시 에워쌌네. 말은 잔디 풀을 먹으며 서
있고, 제비는 보리 바람에 스치어 난다. 지쳐서 빈 관사에 찾아드니, 정신이 피곤하여 옷을 이기지 못한다." 하였다.
백구겸수정(白鷗兼水靜)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음성(陰城)은 오랜 고을인데, 양지골에는 아침 햇빛이 깨끗하다.
산이 좋으니 병풍이 천 폭이요, 시내가 맑으니 옥(玉)이 한 둘레로다. 흰 갈매기는 물과 함께 고요하고, 누른 학은
구름과 함께 난다. 잠깐 동안 임당(林塘) 울밀한 곳에 앉으니, 푸른빛이 옷에 뚝뚝 들게 맡겨 두네." 하였다.
신증 지벽산장현(地僻山藏縣) : 양희지(楊熙止)의 시에, "땅이 궁벽하니 산이 고을을 감추었고, 숲이 그윽하니 새가
사람을 부른다. 창 바람은 벼루 물을 말리고, 처마 햇빛은 발 티끌을 쏜다. 세월은 쇠한 살쩍을 붙여 주고, 건곤(乾坤)
은 병든 몸을 맡겨 둔다. 임금의 시골이 길이 눈에 있으니, 혼과 꿈이 다시 부산하구나."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1895)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연혁 선조(宣祖) 25년(1592)에 청안(淸安)으로 예속시켰다가 광해주 10년(1618)에 복구시켰다.
군명 설성(雪城) 관원 현감(縣監) : 충주 진관병마절제도위(忠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겸한다. 한 사람이다.
방면 동도(東道) : 끝이 5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근서(近西)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원서(遠西)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영춘현 永春縣
동쪽으로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豐基郡) 경계까지 36리이고, 남쪽으로 단양군(丹陽郡) 경계까지 58리이고,
서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55리이고, 북쪽으로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4백 6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인데 신라에서 자춘(子春)으로 고치고 내성군(奈城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원주(原州)에 붙였다. 본조(本朝) 공정왕(恭靖王) 원년(1398)에 옮겨서
본도(本道)에 예속시켜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고, 태종(太宗) 13년에 규례에 따라 고쳐 현감(縣監)으로 만들었다.
속현 어상천현(於上川縣) : 현 서쪽 37리에 있다. 관사와 군창(軍倉)이 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이다.
군명 을아단(乙阿旦)ㆍ자춘(子春)
성씨 본현 조(趙)ㆍ윤(尹)ㆍ정(鄭)ㆍ진(秦)ㆍ석(石)ㆍ이(李)ㆍ정(鄭) : 모두 속(續)이다.
산천 북우이산(北亏尒山) : 현 동쪽 1리에 있다. 성산(城山) : 현 남쪽 3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아래에 석굴(石窟)
이 있어 높이가 11척 남짓이고, 넓이가 10여 척쯤 되며, 깊숙히 들어가 끝이 없고 물이 철철 나와 깊이가 무릎에
닿는데, 맑고 차갑기가 얼음과 같다. 고을 사람이 횃불 10자루를 가지고 들어갔다가 구멍은 오히려 끝나지 않았는데
횃불이 다되어 돌아왔다.
소백산(小白山) : 현 동남쪽 40리에 있다. 또 경상도 풍기군조(豐基郡條)에 있다. 화산(華山) : 현 서쪽 3리에 있다.
어라산(於羅山) : 현 서쪽 58리에 있다. 가라산(加羅山) : 현 서쪽 33리에 있다.
삼타산(三朶山) : 현 서쪽 38리 제천현(堤川縣) 경계에 있다. 백아곡산(白阿谷山) : 현 남쪽 30리에 있다.
병북산(兵北山) : 현 동쪽 7리에 있다. 별퇴산(別退山) : 현 동쪽 15리에 있다.
성동산(城洞山) : 현 남쪽 7리에 있다. 적고지산(笛古之山) : 현 남쪽 3리에 있다.
비마라산(毗摩羅山) : 현 서쪽 8리에 있다. 아래에 큰 강이 있고 낭떠러지를 따라 석벽을 파서 길을 냈는데, 길이
대단히 위태롭고 험하다.
중현(重峴) : 현 서쪽 45리 제천현 경계에 있다. 적현(赤峴) : 현 서쪽 25리에 있다.
마아현(馬兒峴) : 현 동쪽 30리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경계에 있다.
가문현(加文峴) : 현 서남쪽 48리 단양군(丹陽郡) 경계에 있다.
남진(南津) : 현 남쪽 2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 금천(金遷)으로 흘러 들어간다.
눌어탄(訥魚灘) : 현 북쪽 2리에 있다. 영월군(寧越郡) 금장강(錦障江)의 하류이다.
토산 대추[棗]ㆍ석심(石蕈)ㆍ잣[海松子]ㆍ인삼(人蔘)ㆍ백옥(白玉) : 현 서쪽 우구리산(牛仇里山)과 창전산(昌田山)ㆍ
사고개산(沙古介山) 등 처에서 산출한다. 봉밀(蜂蜜)ㆍ자초(紫草)ㆍ황양(黃楊)ㆍ복령(茯苓)ㆍ안식향(安息香).
신증 영양각(羚羊角)ㆍ석종유(石鍾乳) : 현 남쪽 3리 바위 구멍 사이에서 나온다.
신증 누정 온진정(溫眞亭) : 객관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현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오사역(吾賜驛) : 현 북쪽 48리에 있다. 사원(斜院) : 현 서쪽 18리에 있다.
의통원(義通院) : 현 서쪽 52리에 있다. 덕통원(德通院) : 현 남쪽 54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성산(城山)에 있다.
여단(厲壇)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입석부곡(立石部曲) : 현 북쪽 45리에 있다. 지금은 가개전촌(駕介田村)이라고 일컫는다.
답곡부곡(沓谷部曲) : 현 동쪽 6리에 있다.
소치곡부곡(所耻谷部曲) : 현 서쪽 56리에 있다. 지금은 수출지촌(水出只村)이라고 일컫는다.
택평소(澤坪所) : 현 서쪽 35리에 있다. 성산고성(城山古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5백 23척이고, 높이가 11
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반이 무너졌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25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이 7리, 끝이 30리이다.
대곡(大谷)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가야(加耶) :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어산천(於山川) : 서북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50리이다. 거의곡(車衣谷) : 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40리이다.
○ 입석부곡(立石部曲)은 북쪽으로 45리에 있는데, 지금 가개전촌. 답곡부곡은 동쪽으로 6리, 소치곡부곡은
서북쪽으로 56리인데, 지금 수출지촌(水出只村). 택평소(澤坪所)는 서쪽으로 35리이다.
토산 누치[訥魚]ㆍ쏘가리[錦鱗魚]
제천현 堤川縣
동쪽으로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경계까지 17리이고, 영춘현(永春縣) 경계까지 18리이고, 남쪽으로 청풍군(淸風郡)
경계까지 20리이고, 단양군(丹陽郡) 경계까지 20리이고, 서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43리이고,
북쪽으로 강원도 원주(原州) 경계까지 36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3백 9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내토군(奈吐郡)인데 신라에서 내제(奈堤)로 고쳤고, 고려 초에 제주(堤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14년(995)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1005)에 파하였고, 현종(顯宗) 9년(1018)에 원주
(原州)에 붙였고, 예종(睿宗) 원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1413)에 규례에 따라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현감을 만들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씩이다.
군명 내토(奈吐)ㆍ내제(奈堤)ㆍ의천(義川)ㆍ의원(義原).
성씨 본현 지(智)ㆍ안(安)ㆍ석(石)ㆍ강(姜)ㆍ나(那).
풍속 백성의 풍속이 소박하고 간략하다 : 권근(權近)의 향교기(鄕校記)에 있다.
형승 지세(地勢)가 가장 높다 : 정인지(鄭麟趾)의 시이다.
물은 겹겹이요 산은 거듭거듭이다 : 신개(申?)의 시에, "갈수록 물은 겹겹이요, 또 산은 거듭거듭인데,
약간의 민가는 그림 속이로다." 하였다.
산천 용두산(龍頭山) : 현 북쪽 12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대덕산(大德山) : 현 북쪽 21리에 있다.
박달산(朴達山) : 현 서쪽 35리에 있다. 감암산(紺巖山) : 현 북쪽 40리에 있다.
부곡산(釜谷山) : 현 동쪽 12리 영춘현(永春縣) 경계에 있다. 주유산(舟遊山) : 현 서쪽 15리에 있다.
두모곡산(豆毛谷山) : 현 서쪽 15리에 있다. 주유산과 서로 마주 대하였다.
가질문산(加叱文山) : 현 서쪽 61리 강원도 원주 경계에 있다. 호명산(虎鳴山) : 현 동남쪽 17리에 있다.
말응달산(末應達山) : 현 남쪽 10리에 있다. 벌을산(伐乙山) : 현 동쪽 2리에 있다.
제비랑산(齊非郞山) : 현 서쪽 15리에 있다.
광탄(廣灘) : 현 서쪽 21리에 있다. 근원이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에서 나와서 청풍군(淸風郡) 북진(北津) 아래로
흘러 들어간다.
사계(沙溪) : 현 남쪽 5리에 있다. 부곡산(釜谷山)에서 나와서 또 서쪽으로 흘러 광탄(廣灘)에 들어간다.
둔지천(屯池川) : 현 서쪽 43리에 있다. 가질문산(加叱文山)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청풍군 북진으로 들어간다.
의림지(義林池) : 현 북쪽 10리에 있다. 그 깊이가 헤아릴 수 없고, 관개(灌漑)하는 것이 대단히 넓다.
토산 순채[蓴] : 의림지(義林池)에서 난다. 철(鐵) : 현 북쪽 미고개(未古介)에서 난다.
대추[棗]ㆍ봉밀(蜂蜜)ㆍ송심(松?)ㆍ자초(紫草)ㆍ백화사(白花蛇)ㆍ안식향(安息香)ㆍ복령(茯?)ㆍ신감채(辛甘菜)
신증 영양각(羚羊角)ㆍ방풍(防風)
신증 궁실 치헌(癡軒) :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 김일손(金馹孫)의 기(記)에, "내 벗 권자범(權子汎)이 이 고을을 다스린 지 3년 만에 객관의 서쪽 낭무(廊?)를 수리
하여 헌(軒)을 만들고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자범에게 말하기를, '먼저 이름을 짓고 뒤에 기를 써도 되겠는가?
치헌(癡軒)이라고 이름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자범이 치(癡)의 뜻을 묻거늘, 내가 웃고 대답하지 않자, 자범이
자못 불쾌한 모양이었다.
한참 만에 내가 감히 고하기를, '왕숙(王叔)의 어리석음과 왕연(王椽)의 어리석음은 은덕(隱德)의 어리석음이요,
간사한 어리석음과 투기하는 어리석음은 교활한 자의 어리석음이요, 문(文)으로 해서 서치(書癡)가 되고 무(武)로
해서 호치(虎癡)가 되는 것은 재주가 특이하여 어리석은 것이다. 술을 끊는 자도 어리석은 것이고, 관(官)의 일을
잘하는 자도 또한 어리석은 것이다. 옛날에 어리석음으로 이름한 것이 하나가 아닌데 자네의 어리석음도 또한
하나만이 아니다. 세상 사람은 말에 영리한데 자네는 유독 말에 어리석어서 말을 하면 기휘(忌諱)에 저촉되고, 세상
사람은 모양을 차리기에 능란한데 자네는 유독 행동거지가 어리석어 사람으로 하여금 미움이 생기게 하고,
세상 사람은 출세하는 데에 교묘하여 한 자급(資級)만 얻으면 잃을까봐 근심하는데, 자네는 교리의 청반(淸班)으
로서 스스로 낮추어 궁벽한 고을의 현감이 되었으니, 이것은 벼슬에 어리석은 것이다. 세상 사람은 사무에 응함에
민첩하여 백성에 임하는데는 명예를 우선으로 하고 윗사람을 받드는데는 칭찬을 우선으로 삼는데, 자네는 홀로
아무 일 없이 재각(齋閣)에 앉아 휘파람이나 불고 억센 호족(豪族)과 교활한 자를 탄압하고 불쌍한 홀아비와 과부
를 어루만지는 것으로 마음을 삼으며 부세(賦稅)를 독촉하는 데에는 졸(拙)하니, 이것은 정사에 어리석은 것이다.
세상의 관리된 자가 용렬한 자는 백성을 수고롭힌다는 것으로 핑계를 삼아서 관사가 낡은 것을 보고도 기울고
허물어지는 대로 내버려 두어서 스스로 간이(簡易)한 정치를 행한다고 말을 드러내고, 일에 재간이 있는 자는 높은
집과 아로새긴 담장을 쌓지 않는 것이 없어서, 그것이 토목(土木)의 요망한 것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고 부지런하고
일 잘한다는 명성을 크게 날리는데, 자네는 제천에 있어서 낡은 집을 수리하였으니 이미 용렬한 자가 되지 못하였고
또 능력이 있는 자도 되지 못하였다.
노는 사람을 부리고 백성을 수고롭히지 않으려고 도리어 자기의 마음을 수고롭히니, 이것은 일을 하는데에 어리석은
것이다. 자네의 어리석음을 합하여 이 헌(軒)에 편액(扁額)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자범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것으로 나를 조롱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나의 어리석음으로 해서 공관(公館)에 욕이 되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하자,
내가 말하기를, '아, 천지간의 만물을 모두 조물주가 주장하니, 통달하여 본다면 어떤 물건이 공(公)이 아니며, 만일
한 물건에 집착한다면 사(私) 아닌 것이 없다. 만일 사로 여긴다면 한 고을의 물건이 6기(期) 동안의 사물(私物)이
되고, 공(公)으로 여긴다면 한 몸과 한 집도 백년의 공물(公物)일 뿐이다.
유종원(柳宗元)도 오히려 유주(柳州)의 시내[溪]를 우(愚)로 이름하였으니, 지금 어찌 제천의 헌(軒)을 치(癡)로
이름하지 못하겠는가. 치라는 것은 우(愚)와 비슷한 것인데, 또 바꾸면 졸(拙)이 된다.
안연(顔淵)의 우(愚)와 고시(高柴)의 우(愚)와 영무자(?武子)의 우(愚)가 모두 공자(孔子) 문하에서 칭찬을 받았고,
주무숙(周茂叔)의 졸(拙)은 형벌이 맑아지고 폐단이 끊어지는 데에 이르렀으니, 그렇다면 치로 헌을 이름짓는 것이
헌의 욕이 아니라 바로 헌의 영광이다. 어리석은 현감을 얻었으니 조물주도 또한 이 헌에 대하여 다행으로 여길
것이요, 세상의 지교(智巧)로 이름난 자로 비록 이 헌을 만들고 싶어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하니, 자범이 말하기를,
'좋다. 장차 치(癡)를 지켜 몸을 바치겠다.' 하였다. 한참 있다가 또 고하기를, '고자고(高子羔)가 지름길로 가지도
않고 구멍으로 나가지도 않은 것이 공자가 미복(微服)으로 송(宋) 나라를 지난 것과 어떠한가? 여단(呂端)의 호도
(糊塗)한 것이 어리석은 것 같으나 왕계은(王繼恩)을 가둔 것은 임금을 섬김에 어리석지 않은 것이요, 사마백강(司
馬伯康) 형제가 실지(實地)를 밟아서 평생에 거짓이 없었으나 장사(葬師)에게 뇌물을 주어서 일가 사람들을 속인
것은 어버이를 섬김에 어리석지 않은 것이다. 역(易)은 기이한 것을 숭상하고 예(禮)는 변화를 숭상하나니,
옛날 성현이 변화에 맞추어 능히 통하게 한 이런 종류가 한 가지가 아니다. 자네도 또 오로지 치(癡)만 지켜서는 안
된다.' 하니, 자범이 말하기를, '내가 세상의 교(巧)한 것을 싫어하여 나의 치를 지키려고 하는데, 자네의 말과 같이
한다면 대중(大中)에 이르지도 못하고 나의 치가 뒤섞이게 될까 두렵다.' 하자,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자네는 참
으로 어리석다.' 하니, 자범이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대답하지 않고 난간에 기대어 졸았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2리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에, '제주(堤州)가 양광도(楊廣道)에 있어서 땅이 가장 궁벽하고
백성이 순박하고 간략하다.
관(官)은 감무(監務)이어서 과직이 또한 심히 낮고, 학교는 폐한 지가 이미 오래다. 홍무(洪武) 무진년(1388)에 여러
주(州)의 현령과 감무를 승격시켜 모두 참상관(參上官)으로 임명하게 하고, 또 학교를 일으키라는 명령이 있었고,
금상(今上)께서 즉위하자 더욱 학교를 중하게 여겼다. 기사년(1389) 겨울에 우리 동향(同鄕) 사람 김유(金綏)가
관찰판관(觀察判官)으로서 밭을 측량하여 직무를 잘하였으므로 발탁되어 이 고을의 감무에 보직되었다.
고을을 다스린 지 1년이 넘으매 폐단이 없어지고 백성이 편안하여 공역(功役)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여러 사람들에게 상의하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교화(敎化)로써 근본을 삼는다. 이 고을이 비록 작으나
학교가 없으니 만일 영건(營建)하여 인재를 기르지 않는다면 결코 국가에서 학교를 일으키는 것을 위임한 뜻이
아니다.' 하고, 묵은 터를 살펴보아 가시덤불을 베고 사토(砂土)를 제거하고 재목을 수집하고 기와를 구어서 집 한
칸을 세우고, 전후 좌우에 처마를 달아서 선성(先聖)의 신위(神位)를 봉안하여 석전(釋奠)하는 전(殿)으로 만들고,
동서에 낭무(廊?) 각각 4칸을 두어 여러 생도들의 학업을 강마하는 장소로 삼고, 그 남쪽에 문 한 칸을 세우고 옆에
주방을 두되 또한 4칸으로 하였다. 이어 온돌방을 꾸며 교관(敎官)이 편히 휴식하는 곳으로 만들었으니,
제도가 간단하면서도 위치가 갖춰지고 공역(工役)이 간략하면서도 일이 완성되었다. 신미년(1391) 정월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가을이 되어 끝이 났다. 이에 고을 안의 자제 약간 명을 모아서 가르치니, 재물은 호마다 거두지 않고 힘은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60여 년 동안 폐한 학교를 일으켰으니, 매우 아름다운 일이다.
그 해 겨울에 사람을 양촌(陽村)에 보내어 시말을 기록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내가 사양하다 못하여 배우는 자들
에게 고하기를, '천성 민이(天性民?)는 고금과 먼 변방의 다름이 없으니, 10집이 되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는 것이다. 다만 학문을 강마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다. 다행히 이제 거룩한 임금과 어진 정승을 만나 정치
를 중흥하여 교화가 크게 행해지는데, 김군이 위로 국가의 아름다운 뜻을 본받아 폐한 학교를 영건하여 새롭게 하여
가르치고 기르기를 이렇게 지극히 하니, 너희 제생(諸生)들이 만일 학업에 힘쓰지 않는다면 이것은 스스로를 버리는
것[自棄]이다.
학문을 하는 방법은 책에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그 요법은 다만 심술(心術)을 바르게 하는데 있을 뿐이다.
심술이 바르게 된 연후에야 어버이를 섬기고 임금을 섬기고 공무를 다스리고 백성을 다스려서 온갖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비록 성현의 글을 읽고 화려한 문장을 잘하더라도 마침내는 소인 선비[小人儒]가 되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했다.
역원 천남역(泉南驛) : 현 서쪽 6리에 있다. 보통원(寶通院) : 현 안에 있다. 유원(楡院) : 현 동쪽 15리에 있다.
박달원(朴達院) : 박달현(朴達峴) 밑에 있다. 황간원(黃澗院) : 현 서북쪽 27리에 있다.
신증 둔지원(屯池院) : 현 서쪽 43리에 있다.
불우 소악사(小岳寺) : 대덕산(大德山)에 있다. 공전사(公田寺) : 박달산(朴達山)에 있다.
의암사(義巖寺) : 대덕산에 있다. 감암사(紺巖寺) : 감암산(紺巖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용두산(龍頭山)에 있다.
여단(?壇)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의천루(義泉樓) : 예전에 객관 동쪽에 있었다. 원림부곡(員林部曲) : 현 남쪽 20리에 있다.
양성부곡(陽城部曲) : 현 북쪽 25리에 있다. 소당부곡(小堂部曲) : 현 서쪽 20리에 있다. 지금은 소탕리(所湯里)라고
일컫는다. 산척처(山尺處) : 현 서쪽 41리에 있다. 공재소(空梓所) : 현 서쪽 51리에 있다.
제영 천종무저두(泉從無底竇) : 정인지(鄭麟趾)의 시에, "지세는 가장 높은 곳이요, 백성이 사는 곳은 궁벽한 시골
이로다. 샘이 밑 없는 구멍으로부터 나와 펑펑 솟아서 절로 못을 이룬다." 하였다.
야활전다옥(野闊田多沃)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골짜기 가운데에 네 고을이 열렸는데, 이 고을만이 넓고 평평한
곳을 차지했네. 들이 넓으니 밭이 대부분 비옥하고, 산이 깊으니 물이 저절로 맑다. 관청이 쓸쓸하니 지나는 손이
드물고, 땅이 궁벽하니 백성이 적다. 고을 원은 응당 일이 없어서, 울리는 거문고가 자리 위에 빗겨 있으리라."
하였다.
소경연애일선통(小逕沿崖一線通)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작은 길이 비탈을 따라 한 오라기 실끝같이 통하였고,
돌은 톱니 같아 모양이 뾰족뾰족하다. 말굽은 엎어지기 쉽고 앞길은 먼데, 또 산 서쪽에 지는 해가 붉구나." 하였다.
신증 한계포야류(寒溪抱野流)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고을은 예스러운데 강산은 좋고, 정자가 새로우니 경치도
많다. 연기 빛은 땅 위에 뜨고, 산 빛은 담장 머리에 나온다. 늙은 나무는 하늘에 닿아 서 있고, 찬 시내는 들을 안고
흐른다. 손이 와서 이틀 밤을 머물러 자니, 시 생각이 더욱 유유(悠悠)하도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동면(東面) :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남면(南面) : 위와 같다. 북면(北面) :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현좌(縣左) : 동쪽으로 끝이 10리이다. 현우(縣右) : 서쪽으로 끝이 30리이다.
근좌(近左)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이다. 근우(近右)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원서(遠西) :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70리이다. ○ 원림부곡(員林部曲)은 남쪽으로 20리,
양성부곡(陽城部曲)은 북쪽으로 25리, 소당부곡(小堂部曲)은 서쪽으로 20리인데, 지금은 소탕리(所湯里).
산척처(山尺處)는 서쪽으로 40리, 공재소(空梓所)는 서쪽으로 50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 현의 북쪽이다.
제비랑고성(齊非郞古城)ㆍ대덕산고성(大德山古城)ㆍ감악산고성(紺岳山古城) : 둘레가 2천 6백 척인데 너무 험해서
쌓을 수 없다.
청주목 淸州牧
동쪽으로 청안현(淸安縣)의 경계까지 42리, 같은 현 시화역(時化驛)의 경계까지 44리,
남쪽은 문의현(文義縣)의 경계까지 20리, 회인현(懷仁縣)의 경계까지 24리, 보은현(報恩縣)의 경계까지 22리,
서쪽으로 전의현(全義縣)의 경계까지 54리, 목천현(木川縣)의 경계까지 55리, 연기현(燕岐縣)의 경계까지 38리,
북쪽으로 진천현(鎭川縣)의 경계까지 32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의 상당현(上黨縣) : 낭비성(娘臂城)이라고도 하고,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신문왕(神文王) 5년에 처음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에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
시켰고, 고려 태조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 2년에 목(牧)을 설치하고, 14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전절군(全節軍)이라 불렀고, 중원도(中原道)에 소속되었다.
현종(顯宗) 3년에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로 삼았다가 9년에 8목(牧)을 설치하여 다시 목으로 되었다.
본조에서는 그대로 따르던 중, 세종 31년에 관찰사로써 목의 일을 겸하여 맡아 보게 하다가 이내 폐지하였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청천현(靑川縣) :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옛날에는 살매현(薩買縣)이었고, 청천(靑川)이라고도 하였으며,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이 고을(청주(淸州))에 소속되었다.
주안향(周岸鄕) : 옛날에는 주애(朱崖)라고 했는데, 고을의 동남쪽 60리에 있다.
문의(文義)ㆍ회인(懷仁) 두 현을 지나야 그 땅에 도착한다.
진관 군(郡)이 둘이다 : 천안(天安)ㆍ옥천(沃川). 현(縣)이 열이다 : 직산(稷山)ㆍ목천(木川)ㆍ문의(文義)ㆍ
회인(懷仁)ㆍ청안(淸安)ㆍ진천(鎭川)ㆍ보은(報恩)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청산(靑山)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명이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이 고을 출신의 환관(宦官) 이공신(李公臣)을 죽이고 이 고을을 폐지해서, 땅을 분할하여
이웃 고을에 예속시키고 이 도(道)를 고쳐 충공도(忠公道)로 하였다가 지금의 임금(중종) 초년에 모두 복구하였다.
군명 상당(上黨)ㆍ낭비성(娘臂城)ㆍ서원경(西原京)ㆍ청주(靑州)ㆍ낭성(娘城)ㆍ전절군(全節軍)
성씨 본주 한(韓)ㆍ이(李)ㆍ김(金)ㆍ곽(郭)ㆍ손(孫)ㆍ경(慶)ㆍ송(宋)ㆍ고(高)ㆍ양(楊)ㆍ동(東)ㆍ방(方)ㆍ정(鄭)ㆍ
왕(王)ㆍ황보(皇甫) : 모두 개경(開京).
노(盧) : 포천(抱川). 유(柳) : 목천(木川). 홍(洪) : 회인(懷仁). 김(金) : 경주(慶州). 서문(西門) : 속(續). 박(朴)ㆍ
신(申)ㆍ갈(葛) : 모두 촌(村). 주안(周岸) 하(河)ㆍ오(吳)ㆍ조(趙)ㆍ장(張)ㆍ유(柳). 추자(楸子) 김(金)ㆍ한(韓)ㆍ
필(畢). 배음(拜音) 박(朴)ㆍ이(李)ㆍ필(畢). 청천(淸川) 손(孫)ㆍ전(田)ㆍ문(文). 간신(間身) 이(李)ㆍ전(全)ㆍ
유(兪). 덕평(德平) 신(申). 조풍(調豐) 이(李).
풍속 인다호걸(人多豪傑) : 고려 태조가 말하기를, "청주(靑州)는 땅이 기름지고, 사람 중에 호걸이 많다." 하였다.
형승 동남지주집(東南之走集) : 이숭인(李崇仁)이 이모지(李慕之)를 전송하는 글의 서문에, "청주(靑州)는 실로
동남쪽의 집합지로서, 그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서 사업이 번잡하다." 하였다.
지대민조(地大民稠) : 노숙동(盧叔同)의 <향교기(鄕校記)>에, "서원(西原)은 전도(全道)의 본영(本營)이요, 땅이
넓고 인구가 조밀하다." 하였다.
경양요광(境壤遼曠) : 이영구(李英耈)의 <향교기>에, "구역이 넓고 인재가 많아 실로 다른 고을에 비교할 곳이
아니다." 하였다.
산천 당선산(唐羨山) : 고을 동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인데, 토성(土城) 터가 있다.
낙가산(洛迦山) :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선도산(仙到山) :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검단산(儉丹山) : 청천현(淸川縣)에 있다. 고을 동쪽 64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백제의 중 검단(儉丹)이 살던 곳이
므로 그렇게 이름지어졌다.
저산(猪山) :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용자산(龍子山) : 고을 서쪽 36리에 있는데, 또 전의현(全義縣) 편에 보인다.
미륵산(彌勒山) : 청천현(淸川縣)에 있다. 구라산(謳羅山) : 고을 동쪽 41리에 있다.
상령산(上嶺山) :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속리산(俗離山) : 주안향(周安鄕)에 있다.
기곡산(箕谷山) : 청천현에 있다. 파곶산(葩串山) : 청천현에 있다.
오근진(吳根津) : 고을 북쪽 20리에 있는데, 곧 청안현(淸安縣)의 반탄(磻灘) 하류이다.
진목탄(眞木灘) : 고을 서쪽 35리에 있는데, 오근진의 하류이다.
연기현(燕岐縣)의 동진(東津)을 거쳐 공주(公州)에 이르러 금강으로 들어간다.
청천천(靑川川) : 청천현(靑川縣)에 있으며 그 근원이 셋이 있는데, 하나는 청아현 좌귀산(坐龜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같은 현의 구자은현(仇自隱峴)에서 나오며, 또 하나는 보은현(報恩縣) 속리산에서 나와, 합류하여
괴산군(槐山郡) 괴탄(槐灘)으로 들어간다.
대교천(大橋川) : 고을 남쪽 1리에 있으며, 근원은 적현(赤峴)에서 나와 오근진으로 흘러 들어간다.
초수(椒水) : 고을 동쪽 39리에 있는데, 그 맛이 후추 같으면서 차고, 그 물에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다. 세종과
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행차한 일이 있다.
○ 방문중(房文仲)의 시에, "땅 신령이 서기(瑞氣)를 빚어내어 그 까닭 헤아릴 수 없으나, 아마도 은하수 한 줄기가
통하는가 싶도다. 향기로운 액체가 신묘하게 엉기어 온갖 병을 물리치고, 푸른 물줄기는 흘러흘러 삼농(三農)을
살리네. 고요할 땐 물상(物象)이 잠기어 진경(秦鏡)을 끌어 놓은 듯하고, 움직일 땐 거문고 소리를 내어 순풍(舜風)
을 띤 듯하도다. 봉황 부채[鳳扇]비낀 속에 직녀(織女)를 맞이하고, 난여(鸞輿 임금이 타는 수레)도 아득히 천제
(天帝)가 내려왔네. 탕반(湯盤 은 나라 탕왕이 쓰던 쟁반)인 양 명계(銘戒)가 될 만하거니, 요석(堯腊)을 어찌 약
으로만 다스리리요. 목욕하심을 보고 백성들이 기뻐하던 날, 신하들은 춤추고 다투어 만세를 부르네. 스스로 발을
용납할 만한 땅이 없음을 탄식하니, 어떻게 남은 물결을 얻어 가슴을 씻어 내리.
오랫동안 신초(申椒)를 차고 있음이 도리어 우습구나. 이제까지 3기(紀 12년) 동안을 소중(消中)으로 눕다니."
하였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하늘과 땅이 서기(瑞氣)를 빚어 신령스런 샘이 나니, 세조(世祖)께서 이 해에 수레를
멈추었네. 모든 풍류 소리 임금 계신 곳에 들려옴을 맞이하고, 다투어 고운 해가 우연(虞淵 해지는 곳)에 목욕함
을 우러러 보았도다. 어찌 사람의 일이 뜬구름처럼 변할 줄 알았으랴, 오직 행궁(行宮)에 낙조(落照)만이 걸렸음
을 볼 뿐이로다. 홍문관[玉署]옛 신하들이 와서 말을 쉬면서, 슬픈 눈물을 바람 앞에 뿌림을 금하지 못하노라."
하였다.
토산 푸른 옥[靑玉]: 구라산(謳羅山)에서 나온다.
푸른 옥돌[靑玉石]: 고을 동쪽 30리에 있는 소음리(召音里)에서 나온다.
녹반(綠礬) : 청천현(靑川縣)의 반석천(磻石遷)에서 나온다.
주토(朱土) : 주안향(周岸鄕)의 소흘곶리(所屹串里)에서 나온다. 자기(磁器)ㆍ도기(陶器)ㆍ벌꿀[蜂蜜]ㆍ송이버섯
[松蕈]ㆍ돌 버섯[石蕈]ㆍ지치[紫草]ㆍ인삼(人蔘)ㆍ복령(茯苓)ㆍ안식향(安息香)ㆍ지황(地黃)ㆍ산무애뱀[白花蛇].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6백 48자이고, 높이가 8자인데, 그 안에 우물 13개가 있다.
봉수 거질대산(巨叱大山) 봉수 : 고을 동쪽 11리에 있다.
남쪽은 문의현(文義縣) 소이산(所以山)에 호응하고, 북쪽은 진천현(鎭川縣) 소을산(所乙山)에 응한다.
누정 공북루(拱北樓) : 고을 북쪽 3리에 있다.
○ 백문보(白文寶)의 응제시(應製詩 임금의 명령에 의해 지은 시) 서문에, "때는 신축(辛丑)년, 임금의 수레가 복주
(福州 안동)로부터 상주(尙州)를 거쳐 옮겨와, 행궁(行宮)이 청주(淸州)에 머무르게 되었다.
임인년 가을 9월 19일에 임금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하정표(賀正表)를 청주 교외(郊外)에서 올리고,
이어 공복루에 납시어 일재(一齋) 권한공(權漢功)이 전에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를 보시고, 즉시 지신사(知申事)
원송수(元松壽), 대언(代言) 이색(李穡), 성사달(成士達)에게 명하여 차운하여 바치게 하였다.
이에 좌정승 홍양파(洪陽坡), 이행촌(李杏村)ㆍ황회산(黃檜山) 및 여러 대부(大夫)와 선비들이 모두 화답하는 시를
지어 바쳤다. 백문보는 그때 마침 왕명을 받들고 서울에 가고 없었는데, 이 일을 듣고 매우 부러워 목을 내밀고
바라보면서, 신은 성사(盛事)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부름을 받고 돌아오면서 속으로 생각하기를, 신도
화답하는 시를 지어서 그들의 끝부분에 붙여 놓는 것도 다행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이 고을의 원 김성갑(金成甲)이 유사암(柳思庵 유숙(柳淑))의 말로써 부탁하기를, '임금의 명을 받들어 지은
시가 완성되어 장차 현판에 새기려 하는데, 서문이 없을 수 없습니다.' 하니, 백문보가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다가,
한 번 쓰면 영원히 전할 것으로 여겨 드디어 붓을 들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옛날에 임금과 신하가 함께 노래
를 지어 읊조린 것은, 본래 태평한 시대의 일이었습니다. 지난해에는 난리통에 어지러워, 그런 상황에서 어찌 오늘
같은 성대한 일이 있으리라 여겼겠습니까. 아, 우리 전하께서 대국을 공경하여 섬기는 그 정성이 공북(拱北 북극성을
향한다는 뜻임)이라 이름 지은 이 누각에 잘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고 그 시에 이르기를, '공북의 이름은 비록
오래 되었으나, 우리 임금께서 공경의 뜻을 나타낸 것은 이것이 처음이로다. 먼지는 이제 말끔히 씻겼으니, 풍물을
이제 바로 써야겠도다. 임금 계신 곳 멀리 우러러보고, 시내와 들은 앞 뒤로 훤히 틔었도다.
이 백성들 임금 은혜 느낄 줄 아니, 책임은 나 한 사람[一人予]에게 있으리.' 하였다." 했다.
○ 고려 권한공(權漢功)의 시에, "공북루를 새로 지은 것은 경신년 10월 초순인데, 지은 시는 권찬선(權贊善)부터이고,
공은 윤상서(尹尙書)로부터다. 옛 길은 단풍 든 나무 사이로 뻗었고, 맑은 못에는 푸른 하늘이 거꾸로 비치도다.
머뭇거리어서 해는 지려는데, 산 빛은 나의 시름을 자아내누나." 하였다.
○ 고려 신천(申蕆)의 시에, "고을과 산천이 좋으니, 백성이 태고의 풍속을 즐기네. 좌중의 손님들은 전의 내한(內翰)
이었고, 목사는 옛 중서(中書)로다. 소나무ㆍ참나무 우거진 봉우리가 빼어났고, 뽕나무와 삼을 심은 들판이 툭 트이
었도다. 난간에 의지하여 시를 읊으려 하니, 수풀에 새들이 나를 재촉하는구나." 하였다.
○고려 원송수(元松壽)의 시에, "경치 좋은 이 누에 올라, 맑은 날 처음 응제(應製)하네. 오늘의 총애 기꺼이 받으나,
옛사람의 글을 잇기 부끄럽구나. 길은 남녘으로 곧바로 틔었는데, 산이 머니 북녘은 훤히 비어 있구나.
예천(醴泉)이 즐겁게 놀기 좋으니, 영광이 나 같은 이 없도다." 하였다.
○ 이색(李穡)의 시에, "임금님 수레 이른 새벽에 움직이니, 문물이 태평할 시초로다.
누각이 높아 하늘 보기 가까운데, 임금님 분부 받들어 시를 이루네. 산 빛에 기쁨이 생기고 가을 기운은 충허(沖虛)
를 모으도다. 뒷날 남녘으로 순행(巡幸)하실 때, 함향(含香)이 나에게도 있으리." 하였다.
○ 성사달(成士達)의 시에, "이 해도 다하여 날씨도 쌀쌀해지려는데, 임금님 모시고 누대에 올라 붓을 적시어 옛글에
화답하노라. 가을은 깊어 연꽃 떨어져 버리고, 바람 설레는 나무 그늘도 공허한데, 임금 모시는 영광 속에서도 오히려
나는 부끄러워 망설이도다." 하였다.
○ 홍언박(洪彦博)의 시에, "임금님 모신 수레 동쪽으로 돌아오던 날, 가을 바람에 나뭇잎이 지기 시작하였네.
강산은 나더러 머물러 있으라 하고, 시구는 남의 글을 빌려서 썼도다. 길은 곧아 멀리 남녘에서 조회(朝會)하고,
누각은 높아 허공의 북두성을 향하네. 늙어서도 항상 임금 모시니, 벽 위에 적을 내 이름 잊지 말라." 하였다.
○ 고려 이암(李嵒)의 시에, "옛 고을에 누각이 우뚝한데, 누가 처음 지었을까. 가을 빛은 온 산의 나무들에 짙고,
풍경은 두어 줄의 글에 들어오도다. 멧부리는 서쪽을 바라보기에 좋고, 푸른 구름은 빈 북녘을 메웠도다.
누에 올라 시종(侍從)에 참여하니, 그 영광 스스로 부끄럽네." 하였다.
○ 이제현(李齊賢)의 시에, "나라 남쪽을 두루 살피시던 날, 표(表)를 북루에서 처음 올렸소.
술통 앞에 호탕히 흥이 겨워, 거침 없이 붓을 놀려 글을 쓰노라. 바람은 높아 기러기 물가를 따르고, 구름은 맑은데
학은 허공을 날도다. 늙어가매 이제 병이 많으니, 임금 은혜, 슬퍼하는 나를 저버리려는가." 하였다.
○ 고려 황석기(黃石奇)의 시에, "공북루 좋다고 하나, 임금이 오시긴 이번이 처음이네. 못 경치가 그지없이 좋으니,
어찌 벽 위에 쓸 수 있으리오. 누각에 올라 보니 넓어서 좋고, 쳐다보니 참으로 시원하구나.
예천상(醴泉相) 고맙기도 하구려, 시를 남겨 나를 상기시키네." 하였다.
○ 유숙(柳淑)의 시에, "공북루에 임금 모시고 관상하는 날은, 나라가 중흥(中興)하는 시초로다.
훌륭한 일 장차 전해 보이려고, 굳이 새 시를 스스로 쓰노라. 깃발은 길에 가득 휘날리고, 곤룡포(袞龍袍)는 멀리
허공에 임했도다. 이곳이 비록 즐겁다 하나, 송산(松山 송도)이 안타까이 나를 기다리리." 하였다.
○ 고려 김한룡(金漢龍)의 시에, "강산은 비 갠 뒤요, 운물(雲物)은 첫가을이로다. 속대(束帶 예복을 입음)하고
임금 모시고, 갈림길에서 국서(國書)를 올리네. 누에 오르니 문득 흥이 일어, 황홀하여 허공에 의지한 듯하구나.
중선(仲宣)의 부(賦)를 짓고자 하노니, 옆 사람이여, 나를 비웃지 말라." 하였다.
○ 고려 우길생(禹吉生)의 시에, "임금 모시고 누에 오른 날, 처량한 비 처음 개었도다. 임금이 와서 표를 보내고,
도적(홍건적)은 항복하는 글을 보내왔네. 햇빛이 늦게 떠오르니 산은 그림 같고, 가을은 깊어 물은 허공 같도다.
이 남녘 고을이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나, 하염없이 바라보니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구나." 하였다.
○ 이강(李岡)의 시에, "임금 모시고 남녘으로 순행(巡幸)하는 날, 누에 올라 처음 보는 풍경, 산천은 혼연(渾然)히
그림 같고, 풍경 또한 글로 표현키 어렵도다. 서리 내린 하늘은 고요하기만 하고, 안개 걷힌 들판은 훤하기만
하도다. 바로 알겠네. 천년 뒤에, 이 응제(應製) 반드시 나를 비웃으리." 하였다.
○ 염흥방(廉興邦)의 시에, "이 누각 세운 지 그 얼마인고, 단청(丹靑)이 처음같이 빛나는구나.
늘어선 선장(仙杖 임금의 의장(儀杖))은 햇빛을 가리고, 낡은 현판에 새긴 글씨는 선명도 하구나.
가을이라 바야흐로 추수가 한창인데, 밝은 해는 허공을 넘으려 하는구나. 성사(盛事)를 참으로 기릴 만한데,
주고 받는 시가 나의 차례로구나." 하였다.
○ 고려 전녹생(田祿生)의 시에, "임금께서 이 누에 올라 바라보시는 날, 만물을 기쁘게 보시는 처음이라.
이 아름다운 풍경을 누가 읊을 수 있으리요. 서투른 글은 차마 쓸 수가 없네. 임금님 얼굴 가깝기도 하거니, 북녘에
절하는 뜻은 헛되지 않겠지. 볼수록 산수는 빼어났고, 구름과 안개 또한 나를 반기네." 하였다.
○ 고려 최용(崔龍)의 시에, "남녘으로 순행(巡幸)한 뒤, 누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기 처음이라.
난간에서 옥색(玉色)을 보고, 벽을 쓸어 먼지 낀 글을 찾아보노라. 먼 곳 멧부리는 갠 뒤라 더욱 뾰족하고, 모난
못은 허공처럼 맑네. 이 풍경 완상할 만하니, 시 짓고 읊조리는 데 어찌 빠지리오." 하였다.
○ 고려 권주(權鑄)의 시에, "누각을 돌며 해와 달을 보니, 비로소 이름을 짓는 시초 알겠노라. 증손(增損 시문의
글자를 더하고 줄임)을 누가 교묘히 하리요, 형용하자니 글쓰기 스스로 부끄럽네. 고기를 보니 못에 푸른 물결
일으키고, 학을 타니 길 하늘로 치닫네. 일재(一齋)의 운에 화답하려 하니, 맑은 바람이 문득 나를 깨운다." 하였다.
○ 고려 박중미(朴仲美)의 시에, "누각의 값어치 세 갑절로 늘었구나, 임금께서 처음으로 수레 멈추시네.
구름 안개 뭉게뭉게 일어나고, 풍경은 도서(圖書)에 들어오도다. 들이 넓으니 봉우리 눈썹같이 벌여 있고, 수풀이
성기니 눈앞이 탁 트이도다. 글짓는 신하들 다투어 읊어대는데, 쓸모없는 재목인[樗散] 내가 도리어 서글프구나."
하였다.
○ 고려 김군정(金君鼎)의 시에, "남산 위에 상서로운 기운이 떠도니, 임금 행차 처음으로 이 누에 멈추었네.
성덕은 참으로 그리기 황공하고, 기이한 풍경은 특서(特書)하기 합당하도다. 가을 바람은 늙은 나무에 불고, 구름
그림자는 훤한 시내로 지나가도다. 훗날 다시 말고삐를 여기 돌리거든, 강산 또한 나를 알아보리." 하였다.
○ 고려 화지원(華之元)의 시에, "이 누각 풍경이 좋으니, 임금님 황송스럽게 처음 거둥하였네. 남녘으로 순행하는
깃발 다시 갖추고, 북녘으로 올리는 글을 멀리 전하도다. 흐뭇한 이야기 온 동네에 파다하고, 화기(和氣)는 공중에
까지 가득하도다. 운예망(雲霓望 가뭄에 구름이나 무지개를 바라보는 심정)을 기록함에 있어, 어찌 나만이 뒤지
리오." 하였다. ○ 고려 우현보(禹玄寶)의 시에, "이 누각에 몇 사람이나 올랐던고, 임금이 거둥하신 건 전에 없던
처음 일이네. 이미 시를 기(記)로 삼았으니, 어찌 꼭 역사에 적어야만 하리오. 깎인 언덕은 난간 앞에 트이고,
성긴 버들은 처마를 둘러 훤하도다. 가까이 모심도 내 분수에 넘지마는, 부축하여 오르는데 나를 허락하셨네."
하였다.
○ 고려 이인(李靭)의 시에, "누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는 날, 대궐을 향하여 처음 글을 올렸도다. 임금님 분부로
신하들에게 시를 읊으라시니, 시를 이룸에 임금을 마주 뵙고 쓰는구나. 재 넘는 구름은 오락가락하고, 시내에 비친
달은 몇 번을 차고 또 기울었나. 현종(顯宗)이 여기에서 나라를 크게 회복하였으니, 땅 신령이 도리어 나를 위로
하는구나." 하였다.
○ 고려 한방(韓昉)의 시에, "누각이 서원(西原) 북쪽에서 절하노니, 단청이 처음같이 빛나는도다. 잠깐 새로 행차
[警蹕]를 머무르시니, 다시 옛 거서(車書)를 보게 되도다. 나무는 늙어 천 그루[千章]나 되고, 처마는 높아 사방이
훤히 비라보인다. 글 제목을 나열하기 어려우니, 어려운 운자(韻字)에 나보다 못한 이는 없으리." 하였다.
○ 고려 조계방(曹繼芳)의 시에, "이 누각이 늘 좋기도 하더니, 임금 수레를 처음으로 맞았구나. 이 경치 구경 누가
사양하리오마는, 시를 읊는 데는 오래토록 못하는구나. 저녁 볕은 먼 산길을 비추고, 흐르는 물은 맑은 공간을
끊었도다. 어부와 나뭇군에게 말을 건네니, 한가로운 무리는 그대들과 나뿐이리." 하였다.
○ 고려 허전(許佺)의 시에, "임금 수레 서원(西原)에 머물고, 누에 올라 표문 올리기 처음이라. 오늘의 일을 쓰기
위하여, 지난날의 글을 다시 찾아보노라. 먼 곳 물은 하늘에 이어 맑고, 성긴 숲은 강 언덕을 따라 훤하도다.
성덕을 노래하는 다행한 인연이, 나에게까지 미칠 줄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리." 하였다.
○ 고려 전득량(田得良)의 시에, "임금 깃발이 남녘으로 순행한 뒤, 비녀와 치마를 다시 마련하기 처음이라.
전문(箋文)을 올림은 예의를 지킴이니, 성덕을 그리는 시를 지어 바치노라. 눈에 가득 기이한 풍경이 빼어났고,
머리를 돌리니 지난 일이 헛되기만 하구나. 재주 없는 몸이 외람되이 차운하려 하니, 여러 선배들이여, 나를 나무
라지 말라." 하였다.
○ 고려 이방직(李邦直)의 시에, "임금 타신 수레 순행하여 오는 날, 삼한(三韓)이 옛적으로 돌아가기 처음이라.
임금님 분부 있어 화답하는 시 짓노니, 곧 붓을 놀려 다투어 쓰는구나. 물을 굽어보니 거울인 듯하고, 난간에 의지
하니 황홀하여 허공에 오른 듯하구나. 공 있는 신하가 10대를 지난 뒤면, 남은 경사[餘慶]는 나에게서 시작되리."
하였다.
○ 한상질(韓相質)의 시에, "사신으로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 조선(朝鮮)이 개국한 초기이라. 임금은 성지
(聖旨)를 맞이하고, 부로(父老)들은 첨서(簽書 편지)를 하례하도다. 길에 떠들썩 풍악을 잡고, 깃발은 하늘을
덮었구나. 이런 것이 금의환향이라는 것, 그 영광 누가 나인 줄 알리." 하였다.
망선루(望僊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었는데,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이다. 지정(至正) 신축년(공민왕 10년)에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안동(安東)으로부터 이곳에 옮겨 와 수개월 동안 머물렀었다.
도적이 평정되자 문과와 감시(監試)의 합격자 방을 붙였었는데, 훗날 사람이 그 방을 써서 누각에 게시하였다.
누각은 오랫동안 헐어 있었는데, 천순(天順) 신사년(세조 7년)에 목사 이백상(李伯常)이 새로 중수하고, 한명회
(韓明澮)가 누각의 편액을 고쳐서 '망선루'라 하였다. 신증 이의무(李宜茂)의 부(賦)에, "이 누에 올라 쉬노라니,
먼 변방까지 한눈에 들어오는구나. 그지없이 넓은 하늘을 바라보니, 문득 마음은 넓어지고 정신은 평온해진다.
먼지의 어둡고 흐릿한 것을 지나치니, 초연(超然)히 원대한 생각이 피어오르네. 봉래산(蓬萊山)을 지척에 바라보니,
환패(環珮)의 달그락 소리 들리는 듯하여, 문득 범골(凡骨)이 한 번 허울을 벗으니, 사뭇 바람을 타고 내려오는
성싶구나. 명월(明月 달과 야광주(夜光珠)의 두 가지 뜻)로 꾸며 관(冠)을 만들고,
청운(靑雲 구름과 벼슬의 두 가지 뜻)의 옷을 입고 활짝 꽃을 피우도다. 봉황새로 하여금 먼저 중매하게 하고,
파랑새 를 시켜서 인사하게 하라. 천제의 궁궐에 나아가 머리 조아리니, 진인(眞人)의 풍모를 지녔구나.
뭇 계집이 나의 아리따움을 시기하여, 도리어 나를 가리켜 무지개[蝀螮]라 하네. 이미 이렇게 할 수도 없고, 버리려
하여도 안 되며, 마음을 낮추고 얼굴을 취하려 해도 그것 또한 나의 재주가 아니로다. 해는 져서 장차 함지(咸池)로
들어가려 하니, 꽃다운 것을 모두 잡아서 쉬게 하도다. 노복(奴僕)은 말[馬] 생각을 안타깝게 하여 우두커니 서서
돌아만 보네. 가는 길이 더디고 더딤을 한탄하노니, 큰 들은 아득히 평평하기만 하도다.
짐승들은 바삐 뛰며 무리를 찾고, 새들은 날다가 지쳐 날개를 걷는다. 그윽하고 곧음이 처신할 곳인 줄 깨달았으니,
동서와 남북을 헤매어 무엇하리오. 신선 살이를 바라는 것은 분수가 아니니, 나는 장차 전원(田園)에서 할 일이
있노라. 강산을 어루만지며 노니나니, 풍월을 즐기며 글 읽는 소리로다.
날마다 하는 일 없이 유유자적하노니, 노담(老聃 노자(老子))을 본받고 장주(莊周 장자(莊子))를 소망하도다.
이 즐거움 바꿀 것이 없으니, 어찌 내가 한 고을에서 답답히 지낸다 하리오." 하였다. 쇄(誶 졸장(卒章))에 이르기를,
"기장이 풍년들고 보리가 한 줄기에 두 이삭씩 팼으며, 나의 들과 질퍽한 들에 고기 살찌고 나물 또한 향기로우니,
나의 맛있는 반찬이로다. 진실로 내 여기 삶이 즐거우니, 여기서 늙어 죽은들 무슨 한 있으리. 신선들에게는 따라
미치지 못할망정, 내 스스로 갈천씨(葛天氏)의 태평성대에 비기노라." 하였다.
○ 양희지(楊熙止)의 시에, "마을에 부슬비 내리고, 절에서는 저녁 종소리 울리기 시작하도다. 이끼 낀 벽에 달팽이
지나간 자국 글자를 이루었고, 모래층 뜰의 새 발자국은 전서(篆書)로구나. 못은 깊어 바닥까지 깨끗하고, 누각은
높아서 훤하게 트이었도다. 임금 수레 가신 뒤 소식 없고, 귀뚜라미 울음 소리 나에게 하소연하는 듯하구나." 하였다.
신증 청연당(淸讌堂) : 동헌(東軒)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고을 동쪽 2리에 있는데, 정통(正統) 갑자년(세종 26년) 봄, 세종이 초수(椒水)에 행차하였을 때 서적을
하사하였다.
역원 율봉역(栗峯驛) : 고을 북쪽 7리에 있으며, 본도에 소속된 16역을 찰방(察訪)한다. 장양(長楊)ㆍ태랑(台郞)ㆍ
쌍수(雙樹)ㆍ저산(猪山)ㆍ시화(時化)ㆍ덕역(德驛)ㆍ증약(增若)ㆍ가화(嘉和)ㆍ토파(土坡)ㆍ순양(順陽)ㆍ화인
(化仁)ㆍ회동(會同)ㆍ신흥(新興)ㆍ원암(原巖)ㆍ함림(含林)ㆍ전민(田民). ○ 찰방(察訪) 1명이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밭에 보리는 알이 들고 매화 열매는 여물었는데, 강 남쪽으로 가는 나그네 하염없이
시름 짓네. 작은 못 예나 다름 없이 연꽃도 말쑥한데, 그 시절 술잔 권하던 사람은 보이지 않네." 하였다.
쌍수역(雙樹驛) : 고을 남쪽 16리에 있다. 저산역(猪山驛) : 저산 밑에 있다.
장명역(長命驛) : 고을 서쪽 56리에 있는데, 곧 장지역(長池驛)을 폐지한 자리에다 태조 5년에 새로 설치하였다.
율병원(栗餠院) : 고을 동쪽 44리에 있다. 판교원(板橋院) : 고을 동쪽 45리에 있다.
미원(米院) : 고을 동쪽 38리에 있다. 덕산원(德山院) :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정진원(情盡院) : 성(城)의 남쪽 2리에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사람의 일이란 끝없는 우주(宇宙) 사이에서, 남으로 오고 북으로 가니 어느 때나 한가
할꼬. 이 다리, 정진(情盡)이란 이름함이 마땅하지 않으니, 돌아가는 구름을 따라 옛 산에 이르기 때문이다." 하였다.
포원(蒲院) : 고을 북쪽 37리에 있다. 북원(北院) : 고을 북쪽 7리에 있다. 장명원(長命院) : 장명역 동쪽 5리에 있다.
금원(金院)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조풍원(調風院) : 고을 북쪽 40리에 있다.
인제원(仁濟院) : 고을 남쪽 6리에 있다. 작원(鵲院) :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장원(場院) : 고을 서쪽 39리에 있다. 오근원(吳根院) : 오근(吳根) 부곡(部曲) 옛터에 있다.
신증 초정원(椒井院) : 초수(椒水) 곁에 있다.
교량 대교(大橋) : 바로 정진원(情盡院) 앞 다리이다. 신교(新橋) :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진목탄교(眞木灘橋) : 진목탄 위에 있다. 오근천교(吳根川橋) : 고을 북쪽 20리에 있는데, 겨울에는 다리를 설치
하고, 여름에 큰 물이 나면 배를 이용한다.
불우 공림사(空林寺) : 속리산(俗離山)에 있다.
응천사(應天寺)ㆍ동림사(桐林寺)ㆍ송천사(松泉寺) : 모두 용자산(龍子山)에 있는데, 이색(李穡)이 지은 <나옹진당기
(懶翁眞堂記)>가 있다.
동환희사(東歎喜寺)ㆍ보살사(菩薩寺)ㆍ화림사(化林寺)ㆍ영천사(靈泉寺) : 모두 낙가산(洛迦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당(城隍堂) : 당선산(唐羡山)에 있다.
여단(勵壇) : 고을 북쪽에 있다.
총묘 한명회(韓明澮) 묘 : 고을 서쪽 39리에 있다.
고적 고상당성(古上堂城) : 율봉역(栗峯驛) 북쪽 산에 있다. 돌로 쌓았고 둘레가 7천 7백 73자, 성안에 우물 열 둘이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졌다.
부모성(父母城) : 고을 서쪽 15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는 2천 4백 27자이고, 성안에 큰 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산성(山城) : 고을 동쪽 2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고, 둘레는 5천 22자, 안에 우물 넷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저산성(猪山城) : 돌로 쌓은 것인데, 둘레는 5백 45자,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미륵산성(彌勒山城) : 돌로 쌓았고, 둘레는 5천 7백 79자, 안에 우물 둘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구라산성(謳羅山城) : 돌로 쌓았고, 둘레는 2천 7백 90자, 안에 우물 둘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상령산성(上嶺山城) : 돌로 쌓았고 터가 남아 있다. 안에 큰 우물이 있어 가뭄에 비를 빌면 감응이 있었다.
오근(吳根) 부곡 : 고을 북쪽 30리에 있다. 석곡(錫谷) 부곡 : 고을 서남쪽 25리에 있다.
배음소(拜音所) : 배음(背音)이라고도 한다. 추자소(楸子所) : 초자(椒子)라고도 한다.
덕평향(德平鄕) : 전의현(全義縣) 서쪽을 넘어서 들어간다. 조풍(調豐) 부곡(部曲) : 청안현(淸安縣)을 넘어서 들어
간다.
신은소(新銀所)ㆍ한신(閒身) 부곡(部曲) : 모두 청천현(淸川縣)에 있다.
영모정(永慕亭) : 고을 북쪽 30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다만 그터만 남아 있다.
○ 이색(李穡)의 기문에, "청주 추동(楸洞)에 곽씨(郭氏)의 밭이 있었다. 곽씨가 그 가운데 집을 짓고 살면서 농사를
지어서 손님 접대와 관혼상제의 비용을 장만하고 아침저녁 끼니외에는 남기기를 바라지 아니하였다.
한 때 조정에 벼슬하느라고 농사를 중지하여 땅이 묵어 다시 돌보지 않은 것 같더니, 조금 있다가 처자를 거느리고
가서 밭갈이를 하면서 글을 읽고, 시를 짓는 틈틈이 나무꾼, 농부들과 함께 담소(談笑)하고 권세와 이익에는 관심이
없었다. 곽씨(郭氏)의 대부(大父) 장원공(狀元公)은 지원(至元 원 나라 세조 때의 원호) 무렵에 충직하고 문장을
잘하였다. 세조(世祖) 황제가 천하를 통일했지만 오직 일본(日本)만이 조공(朝貢)하지 아니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먼 나라를 덕으로 회유하는 데는 불러들여 어루만지는 것 만한 것이 없으니, 고려에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어서
나의 뜻을 분명히 가르쳐 주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고려의 임금과 신하들은 황공하게 명을 받고 사신으로 갈 만한
사람을 신중히 물색하였으나 서장(書狀)을 맡을 만한 이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요령껏 피하려 하였으나 오직
장원공만이 가기를 희망하였으므로, 이 사실을 재상에게 이야기하자 재상이 크게 기뻐하여 왕에게 알리고 장원공을
가도록 하였다. 공의 장인 최양(崔●)이 재상을 만나서 잘 아뢰어 공을 가지 못하게 하려 하니 장원공이 분연히 말하
기를, '죽음은 마찬가지입니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처자들의 손에서 죽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하였다.
그가 일본에 간 뒤에 과연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임금과 신하들이 애석하게 여기어 벼슬과 토지를 주었으니,
지금의 추동이 그것이다. 장추(長楸)라는 말은 《이소경(離騷經)》에서 나온 것인데, 풀이하는 이가 말하기를, '
교목(喬木)이라는 말과 같은 뜻이니 고국(故國)을 가리킨 것이라.' 하였다.
그의 아들 정랑군(正郞君)은 종신토록 슬퍼하여 호곡(號哭)하고, 벼슬에 나아가기를 달갑게 여기지 아니하였고,
70살이 넘어서도 아버지를 더욱 간절히 사모하였다. 그의 손자 통헌공(通憲公)이 추동 가운데 정자를 짓고, 물을
끌어들여 연꽃을 심어 놓고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하여서는 하지 아니하는 일이 없었다.
정랑공이 일찍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으니 나의 슬픔을 무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네가 다행히 벼슬에 올랐으니 내 기쁨을 알 것이다. 게다가 내가 병이 없고, 네가 또한 옆에 있는데 문장은
내가 너만 못하니, 네가 문장으로 당대에 붓을 잡을 만한 이를 찾아 뵙고 내가 동쪽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그리워
하는 마음을 기록하여 자손들에게 보이도록 하여라.' 하였다. 이에 정자 이름을 영모정(永慕亭)이라 하였다.
대개 아침에 사모하다가 저녁에 잊어버리면 그것은 영모(永慕)가 아니며, 아들은 사모하나 손자가 잊어버리면
역시 영원한 사모가 못 된다. 아침과 저녁이 한 시각 같고, 아들과 손자가 한 몸 같으니 그 사모함이 영원한 것이
아니겠는가.
통헌공이 나에게 글을 부탁한 지 오래되었다. 통헌공은 나와 동년(同年)인데, 강개(慷慨)하고 의지가 있어서 법사
(法司)에 있어서는 법대로 집행할 뿐이고,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언관(言官)으로 있을 적에는 말해야
하는 것을 거리낌 없이 말하고, 일을 피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행성(行省)에서 힐책할 때에는 기강(紀綱)에
더욱 떨쳤고, 섬으로 귀양갈 적에도 그의 명성은 더욱 자자하였다. 도끼를 잡으면[持斧 어사] 엄정하고 공명할
뿐이요, 가혹하지 않고, 지방의 장관[專城]이 되어서는 백성을 어루만질 따름이었으므로 그 고정하고 부지런함을
칭송하였으니. 장원공의 충직함과 정랑공의 효성을 겸한 것이다.
마땅히 높은 벼슬에 올라 사림(士林)의 으뜸으로 조정에 서는 것이어늘 일찍이 한 해 동안 안정된 적이 없으며,
추동(楸洞)의 거처는 해를 넘기도록 일찍이 그곳을 떠난 적이 없었다. 옛날 삼괴(三槐)를 심은 왕씨(王氏)가 덕을
몸에 닦고, 하늘에 보답하기를 바란 것이 마치 좌계(左契)를 지니고 손을 맞대어 서로 꼭 드러맞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장원공의 충의에 대한 보답이 이러함은 어찌된 일인가.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답할 때는 명성이나 지위나 덕이나 그 귀결은 똑같다. 덕이 있어도 명성이 나타나지 않거
나, 명성이 있으면서도 지위가 걸맞지 않는 것을 군자는 근심하지 않으나 덕이 그 지위에 맞지 않거나, 명성이 혹
그 실정보다 지나치면 군자는 크게 두려워하는 법이다. 지금의 통헌공의 덕과 명성은 하늘이 장원공에 보답한 것
이다. 그 지위가 비록 높다 하지만, 사림의 의론이 탐탁지 않게 여겨 불만이 있다.
그러나 나이가 아직 60[身順]이니 더 높이 쓰이느냐 안 쓰이느냐 하는 것은 미리 알지 못하니 그러므로, 하늘이
지위로써 보답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것은 모두 오늘에 결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늘이 장차 그 보답을
크게 하려고 해서 늦추는 것인지, 어째서 그 보답해야 할 때에 아직도 보답하지 않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늘이 정하고 정하지 않음이 오래된 것을 나는 곽씨 집에서 징험하려 한다. 철원(鐵原)의 최씨가 80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이제 그 후손이 많다고 한다. 곽씨네 집에 후손이 아직 없는 것을 근심할 것은 없다.
하늘이 반드시 곽씨네 집을 후하게 대할 것이다. 곽씨가 후손이 없으니 하늘의 과보(果報)를 반드시 기필할 수는
없고 이제 영모정은 터만 남았으니, 하늘의 과보를 반드시 기필할 수는 없다. 만약 하늘이 기필한다면 곽씨가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 한수(韓脩)의 시에, "지원 천자(至元天子 원 나라 세조)가 황극(皇極 왕위)을 세워서 산에 다리 놓고 바다를 건너
남에서 북에서 모두 조공하였네. 오직 일본만이 복종하지 않기에, 우리가 사신을 보내어 위엄과 덕을 보이려 하였네.
조정의 신하들이 목을 움츠리고 모두 사정을 내세워, 직접 위험한 곳에 달려가기를 원치 않았도다.
우리 고을의 호걸 곽장원공은 가슴의 회포가 하늘과 땅처럼 크고 넓어서, 몸을 잊고 순국함이 평소의 뜻이기에,
명을 받고 기쁘게 서장관이 되었네. 문 앞을 지나면서도 처자들과 이별을 나누지 않았고, 돛을 달고 만리의 파도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바다의 하늘 망망하여 기러기도 날지 않으니, 뉘라서 자경(子卿 소무(蘇武)의 자(字))이 한 나라
부절[漢節]을 가졌음을 알리요. 아들 홀로 집에 남아서, 동녘을 바라보며 밤낮으로 애태우네. 산에 올라 바라 보는
두 눈에는 눈물[玄花]이 떨어지고, 하늘에 울부짖는 마음에는 붉은 피가 맺히네. 어버이를 종신토록 간절히 그리워
함을 하늘이 불쌍히 여겨 슬하에 특별히 기린아(麒麟兒 슬기와 재주가 뛰어난 사나이)를 주었네.
자식의 마음은 다만 어버이 몸을 편케 하려고, 잠자리와 감지(甘旨 맛있는 음식)에 모자람이 없었으나,
그래도 어버이를 기쁘게 하지 못함을 알고, 알아서 더 잘하려고 항상 부지런히 힘써, 새 정자를 알맞는 곳에 지으니,
겨울에 춥지 않고 여름에 덥지 않네. 못도 파서 샘물을 끌어들이고, 아름다운 화초도 심어 새들이 노래하게 하였네.
봄바람에 꽃피고 가을달이 밝으니, 모두 우리들의 슬픔을 달래준다. 백 년 동안 어버이 뜻을 받들어[養志] 즐거움
다해드리며, 충성은 나라에 옮겨 이 고을을 생각하였네. 도를 지킴에 어찌 일찍이 왕척직심(枉尺直尋조금이라도
도의를 굽히다. 하리요. 지금까지 오히려 올바른 방법으로 말을 몰았네. 그러므로 지위가 그 덕을 채우지 못했을 때,
공은 원망치 않았으나, 옆에 사람들이 안타까이 여겼도다.
아, 우리 고장의 자랑으로서, 큰 선비[巨手]가 기문(記文)을 지어 죽백(竹帛)을 빛냈도다. 넓고 넓은 천하의 백억만
이여, 몇 사람이나 신하와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는가. 알겠노라, 영모정의 3대는 천하와 후세가 모두 본받으리."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호탕한 장원랑(狀元郞)이여, 크고 높은 뜻과 절개 기특하여라. 왕명을 받들어 먼 곳으로 사신
을 가니, 나라뿐이라, 사정은 돌보지 않았네. 탄 배가 가고 돌아오지 않으니, 아득하여 마침내 따라갈 수도 없구나.
효자가 길이 그리워하여, 근심과 슬픔에 생각이 많았네. 새벽에 일어나 동녘을 바라보니, 푸른 바다 어이 건너리.
바닷물이 얕다 하리라. 이 한은 끝이 없으니, 바닷물이 마를 때가 있을지언정, 이 한은 끝날 때가 없으리.
어진 손자 이 정자를 지어서, 마음의 슬픔을 붙이려 했네. 슬퍼하며 일어나 부여잡고 울부짖으니, 잣나무도 마른
가지가 많았다네. 해와 달이[居諸] 이 세상을 비추려고, 동쪽에서 나왔지만, 어버이의 음성과 얼굴은 대할 수
없구나. 눈물이 항상 저절로 흐르니, 먼 곳 무덤 위의 풀도 서쪽으로 쏠리어 하늘거린다네.
[스스로 주석하기를, '세상에서 말하기를, 장원공의 무덤이 일본에 있는데, 그 풀이 모두 서쪽으로 향하여 난다.'
하였다.] 원래 충효의 가문에는 남은 경사[餘慶]가 끊이지 않는다는데, 백도(伯道 통헌공)가 아들이 없으니,
천도는 어이 알아 주지 않음인가. 응당 기문(記文)을 읽는 사람들, 천추(千秋)에 탄식을 더하리라." 하였다.
구리 돛대[銅檣] : 고을 성안 용두사(龍頭寺)에 있다. 절은 폐사가 되었지마는 돛대는 남아 있으며, 높이가 10여
길이다. 세상에서 전하거늘, "처음 주(州)를 설치할 때에 술자(術者)의 말을 써서, 이것을 세워 배가 가는 형극을
나타내었다." 한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우뚝 서서 백척이나 높이 솟았으니, 오가는 사람이 방황하는 것 같다고 하네.
누가 구리 기둥을 만계(蠻溪) 위에 옮겨다 세웠는고, 한(漢)나라 동산의 금줄기[金莖]인가 싶구나.
뿌리는 깊이 박혀 지축(地軸)을 이었고, 꼭대기는 구름 밖에 치솟아 은하수를 꿰뚫었네. 옛사람 이를 세운 뜻이
없지 않으니, 큰 고을과 더불어 한 지방을 진압함이라네." 하였다.
은행 나무[鴨脚樹] : 고려 공민왕 때에 왕방(王昉)ㆍ조반(趙胖) 등이 명 나라로부터 돌아와 왕에게 아뢰기를,
"예부(禮部)에서 신들을 불러 말하기를, '너희 나라 사람 파평군(坡平君) 윤이(尹彝)와 중랑장(中郞將) 이초(李初)
라는 사람이 와서 황제에게 호소하기를 고려가 군사를 움직여 장차 상국(上國)을 침범하려 하는 것을,
재상 이색(李穡)과 조민수(曺敏修) 등이 옳지 않다 하여 즉시 모두 죽이고 귀양을 보냈는데, 그 폄직된 재상들이
나를 보내어 천자께 고하고, 친왕(親王)께서 천하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치도록 청하였다.' 하고 윤이와 이초
등이 기록한 이색과 조민수의 이름을 내어 보였다." 하니, 대간(臺諫)이 윤이와 이초의 무리들을 국문하기를 청
하고, 잇달아 이색ㆍ이림(李琳)ㆍ변안렬(邊安烈)ㆍ이인민(李仁敏)ㆍ정지(鄭地)ㆍ이숭인(李崇仁)ㆍ이종학(李種學)ㆍ
이귀생(李貴生) 등을 청주 옥사에 가두고, 문하평리(門下評理) 윤호(尹虎) 등을 파견하여 국문하였으나,
여러 죄수들이 모두 불복하였다. 그때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져 앞에 냇물이 넘치어 성의 남문을 무너뜨리고
곧바로 북문까지 뻗치니, 성안의 물 깊이가 한 길이나 넘어 관사(官舍)가 물에 잠기고, 백성들의 집은 거의 없어졌다.
객관(客館) 문 앞에 은행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는데, 옥관(獄官)들이 정신없이 이 나무에 올라가서 죽음을 모면
하였다. 왕이 수재로 교서를 내리어 죄수를 모두 놓아 주도록 하였다.
○ 권근(權近)의 시에, "유언비어가 불행히도 주공(周公)에게 미쳤더니, 별안간 큰 바람이 곡식들을 쓰러뜨렸네.
이제 서원(西原)에서 큰 물이 넘쳤다고 하니, 천도(天道)가 고금에 같음을 알겠도다." 하였다.
명환 신라 원태(元泰) : 신무왕(神武王) 5년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고, 아찬(阿飡) 원태로서 사신(仕臣)을
삼았다.
고려 이세화(李世華) : 간의대부(諫議大夫 문하부(門下府)의 벼슬)로서 이곳에 나와 지켰는데 한가로이 지켰으나
몽고병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김진(金鎭) : 목의 부사(副使)가 되었다.
유신(柳伸) : 기거사인(起居舍人 문하부의 벼슬)을 거쳐 외직으로 목사가 되었는데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공경
하였다.
김주정(金周鼎) : 목사가 되었다. 이행검(李行儉) : 군수가 되었는데, 청렴결백으로 칭송을 받았다.
권화(權和) : 목사가 되었을 때, 고성(固城)의 요망한 백성 이금(伊金)이 미륵불이라 일컫고 대중을 현혹하여 말
하기를, "내가 석가모니불[釋迦佛]이 될 수 있다. 무릇 귀신에게 빌고 제사하는 사람이나, 말이나 소의 고기를 먹는
사람이나, 재물을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을 것이다. 만일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3월에 가서 해와
달이 모두 빛이 없어질 것이다." 하고, 또 "나는 풀에 푸른 꽃이 피게 하고, 나무에 곡식의 열매를 맺게 하되 한 종자
로써 두 번 수확할 수가 없다." 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믿고 쌀과 명주와 금ㆍ은을 시주하면서 후환을 두려워하고
마소가 죽어도 버리고 먹지 않으며 재물을 가진 사람은 모조리 남에게 주었다.
또 말하길, "내가 산천의 귀신들을 동원하여 내어 보내면 왜적을 사로잡을 수 있다." 하니, 무당들이 더욱 공경하고
믿어서 서낭당 따위를 헐어버리고, 이금(伊金)을 부처님같이 섬기며 복과 이익을 빌었으며, 무뢰배들이 따라다니
면서 제자라 자칭하면서 서로 속이니, 심지어 수령(守令)들도 나가 맞이하여 객관에 두고 대접하기까지 하였다.
그들이 청주에 이르자 권화가 그들을 꾀어서 그 우두머리 5명을 결박하여 가두고 조정에 보고하였더니,
정부[都堂]에서 여러 도에 공문을 보내어 모조리 잡아다가 베어 버렸다. 이모지(李慕之) : 목사로 있을 제 은혜
로운 정치를 베풀고, 재물의 용도를 절약하였다. 정미 20섬, 현미 70섬, 좁쌀 80섬, 메밀 30섬, 베 천 필을 얻어
그것을 밑천으로 이자놀이를 하여 이 고을의 의재(義財)를 장만하였다. 이색(李穡)의 기록이 있다.
최기우(崔奇遇) : 예종(睿宗) 때 통판(通判)이었다.
본조 이원증(李元增)ㆍ이영구(李英耈)ㆍ박효함(朴孝諴) : 모두 목사였다.
신증 윤장(尹璋)ㆍ김휘(金暉) : 모두 목사였다.
인물 고려 총일(聰逸) : 태조 때에 한찬(韓粲)이 되었다.
왕가도(王可道) : 본성은 이(李)씨이다. 성종 때에 장원에 뽑혀서 벼슬이 이부 상서 참지정사상주국 개성현 개국백
(吏部尙書參知政事上柱國開城縣開國伯)에 이르고, 왕씨의 성을 하사하였고, 덕종(德宗)은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시호를 영숙(英肅)이라 하고, 현종(顯宗)의 묘정에 배향(配享)하였다.
곽원(郭元) : 성종 때에 갑과(甲科)에 올라 여러 번 승진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고, 현종 12년에 중추직학사
(中樞直學士)에 임명되었다. 성품이 청렴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대성(臺省)을 역임하였는데, 유능한 관리라고
칭송을 받았다.
곽상(郭尙) : 선종(宣宗) 때에 감찰어사(監察御使)로 뽑혀 임명되었고, 형부 상서ㆍ참지정사(刑部尙書參知政事)를
역임하였다. 시호를 순현(順顯)이라 하였다.
곽여(郭輿) : 곽상의 아들로서 과거에 올라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었다가 금주(金州)로 돌아와 숨어 있었는데
예종(睿宗)이 사신을 보내어 불러 들여 대궐 안에 있게 하고 선생이라고 부르니, 당시의 사람들이 금문(金門 대궐 문)
의 신선[羽客]이라고 하였다. 굳이 물러가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성 동쪽 약두산(若頭山) 한 봉우리를 하사하고,
거기에 집을 짓게 하니 호를 동산거사(東山居士)라 하였다. 정지상(鄭知常)이 산재(山齋)의 기문을 지었다.
이공승(李公升) : 의종(毅宗) 때의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능히 글을 지었다. 인종(仁宗) 때에 과거에 뽑히어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고, 의종(毅宗) 때에는 사신으로 금(金) 나라에 갔었다. 당시 금 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이는
관할하는 부하에게 은 한근을 거두어 들이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공승은 조금도 취하지 아니하니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뒤에 벼슬이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경대승(慶大升) : 힘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일찍부터 큰 뜻을 품고 있어 집안 일은 돌보지 않았다. 음보(蔭補)로 교위
(校尉)가 되었다가 여러 번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다. 아버지 진(珍)은 욕심이 많아서 남의 토지를 많이 빼앗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자 경대승이 토지문서를 모조리 선군(選軍 군사를 뽑는 일을 맡은 관청)에 바치고 하나도 가지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경대승이 일찍이 정중부(鄭仲夫) 등이 세력을 휘두르는 것을 통분히 여겨
그들을 치고자 하였나, 일이 너무 크고 어렵기 때문에 은근히 참고 있었다. 마침 정중부의 아들 균(筠)이 공주(公主)
를 차지할 계책을 하여 명종(明宗)이 근심하는 것을 보고, 경대승이 허승(許升)과 함께 정균(鄭筠)을 직려(直廬)에서
죽이니 궁중이 들끓었다. 경대승이 침전(寢殿) 밖에 이르러 큰 소리로 아뢰기를, "신들이 사직을 호위하니 전하께서는
두려워 마소서." 하니, 왕이 궁문에 거둥하여 경대승을 불러 술을 내리며 위로하였다. 이에 경대승이 청하여 금군(禁軍)
을 출동시켜 정중부를 잡아 목베었다. 대승이 나이 30세에 죽으니, 장사지낼 때 길에서 슬피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월(李軏) : 처음 이름은 재(載)였다. 문장으로 이름이 나고, 벼슬은 수사공 참지정사(守司空參知政事)에 이르렀다.
정의(鄭顗) : 상세한 것은 평양(平壤) 명환 조에 보인다.
곽예(郭預) : 고종(高宗) 때에 제일인(第一人)으로 과거에 뽑혀 벼슬이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평담
하고 강직해서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벼슬하기 전과 같았다. 글을 잘 지었으며, 글씨체가 가냘프면서도 굳세어 일가
를 이루었다. 그가 한림원에 있을 때에 비오는 날이면 맨발에 우산을 들고 혼자서 용화지(龍化池)에 가서 연꽃을 감상
하였는데, 훗날 사람들이 그 풍치(風致)를 높이 여겨 그 일을 가지고 시를 짓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한강(韓康) : 고종 때에 급제하여 국자대사성(國子大司成) 한림학사를 역임하고, 충렬왕 때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가 되었다가 이에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고, 또 중찬(中贊)에 올랐다가 벼슬을 내놓았다. 왕이 한강을 불러 시행
할 만한 시사문제를 진술하게 하니, 한강이 종묘를 수축하고 악기를 갖추어 시절의 제사를 엄숙히 지낼 것과 사냥 등
의 오락을 중지할 것,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절약하여서 몹시 추운 겨울과 여름에 간장과 죽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할 것 등을 청하였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이백겸(李伯謙) : 이공승(李公升)의 4대 손이다. 충렬왕 때에 과거에 올라 여러 차례 승진하여 선부전서(選部典書)가
되었으며, 외직으로 제주(濟州)와 해주(海州) 두 고을의 목사가 되었는데, 가장 유능한 관리로 소문이 났다.
한악(韓偓) : 한강의 손자이다. 충선왕(忠宣王) 때에 대언(代言)에 임명되었으며, 충숙왕(忠肅王) 때에는 선부전서(選
部典書)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제수하였고, 왕을 따라 원 나라에 들어갔었다.
당시에 심왕(瀋王)이 왕위를 넘보는 것을 한악이 기이한 계획을 써서 왕을 재앙에서 벗어나게 했으므로, 공이 1등
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을 봉하고 선력좌리공신(宣力佐理功臣)을 주고 중찬(中贊)에 임명하였다. 시호를 사숙
(思肅)이라 하며, 충혜왕(忠惠王)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정해(鄭瑎) : 정의(鄭顗)의 손자로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온순하고 부드럽고 점잖
았으며, 일을 처리할 적에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정포(鄭誧) : 정해(鄭瑎)의 손자로 18세에 과거에 올랐으며,
충혜왕 때에 벼슬이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 시와 문장이 간결하고 예스러우며 글씨체도 정묘하였다.
문집으로 《설곡집(雪谷集)》이 있다.
정오(鄭䫨) : 정포(鄭誧)의 형으로 과거에 올라 충혜왕 초에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었고, 뒤에 추충진의보리공신
(推忠陳義輔理功臣)을 하사하였다. 시호는 문극(文克)이다.
정추(鄭樞) : 정포(鄭誧)의 아들이며 자는 공권(公權)이다. 공민왕 초에 급제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좌사의(左司議)
가 되었다.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이 나라를 그르치는 일을 극언(極言)하다가 귀양을 가서
동래 현령(東萊縣令)이 되었으며,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항상 권력을 잡은 간사한 무리들이 정권
을 마음대로 하는 것을 미워하고 분개하다가 등창이 나서 죽었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박하며 조심성이 있고 인정이
두터웠다. 당시 가묘(家廟)의 제도가 없어졌으나, 정공권은 제기(祭器)를 별실에 간직해 두고 제사 때는 반드시 몸소
제삿거리를 씻어 개끗이 하기를 힘썼다. 문집으로 《원재집(圓齋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라고 하였다.
곽린(郭麟) :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충직하고 문장이 능하였다. 일찍이 김유성(金有成)과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였다. <영모정기(永慕亭記)>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곽추(郭樞) : 장원으로 뽑히어 벼슬이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에 이르렀다. 대대로 문장을 관장한 집안이며,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이거의(李居義) : 벼슬이 전서(典書)에 이르렀다. 한공의(韓公義) : 한악의 아들로서 청성군(淸城君)에 봉하였고,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한중례(韓仲禮) : 한악(偓)의 아들로서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며, 계성군(繼城君)에
봉하였다.
경복흥(慶復興) : 공민왕 때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다. 홍건적을 쳐서 평정하고,
또 최영(崔瑩)ㆍ안우경(安遇慶) 등과 함께 덕흥군(德興君)을 압록강에서 쳐부수고 싸움에 이긴 글을 올렸으므로
좌시중(左侍中)에 임명되었다. 개선하자 왕이 유사(有司)에 명하여 왕의 행차를 맞이하는 의식과 동일하게 하고,
백관으로 하여금 국청사(國淸寺)의 남쪽 들에서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뒤에 이인임(李仁任) 등이 경복흥의 깨끗
하고 강직함을 시기하여 그가 술만 마시고 정사를 보지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청주로 귀양가서 죽었다. 시호는 정렬
(貞烈)이다.
한수(韓脩) : 공의(公義)의 아들인데, 15세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충정왕(忠定王) 초에
정방(政房)의 필도적(必闍赤)이 되었다. 왕이 강화도에서 왕위를 물려줄 때에 한수가 참여하였으므로 명망이 당시
에 높았다. 공민왕 때에 여러 차례 승진하여 대언(代言)이 되고 인물을 전형하여 뽑는 일을 맡았다.
신돈이 한창 왕의 총애를 받을 무렵에 한수가 비밀리 아뢰기를, "신돈은 올바른 사람이 못 되니 난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신돈이 패망하자 왕이 말하기를, "한수는 선견지명이 있다." 하였다. 신우(辛禑 우왕) 때에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임명하고, 수충찬화공신(輸忠贊化功臣)의 칭호를 주고 상당군(上黨君)에 봉하였다가 뒤에
다시 청성군(淸城君)으로 고쳐 봉하였다. 그가 죽자 사람들이 모두 아깝게 여겼다. 시호는 문경(文敬)이요, 문집
으로 《유항집(柳巷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한방신(韓方信) : 한악의 아들로 대장의 지략이 있었다. 과거에 올라 공민왕 때에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역임하였고, 홍건적의 난에 안우(安祐) 등과 함께 서울을 수복하였으므로 공훈 1등에 책봉하여 서원군(西原君)을
봉하고, 정당문학으로 승진하였다. 나라에서도 홍건적을 평정한 공으로 봉훈대부 비서감승(奉訓大夫祕書監丞)에
임명하였다. 뒤에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본조 정탁(鄭擢) : 정추(鄭樞)의 아들인데, 개국공신으로 태종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시호는 익경(翼景)이라 한다.
정총(鄭摠) : 정추의 아들이다. 장원급제하였고 뒤에 개국공신이 되었다.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고, 서원군(西
原君)에 봉하였으며, 시호는 문민(文愍)이라 한다.
한상질(韓尙質) : 한수의 아들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라 한다.
한상경(韓尙敬) : 한수의 아들이며 개국공신으로 서원군(西原君)에 봉하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라 한다.
한확(韓確) :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벼슬이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절(襄節)이고 세조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덕종(德宗)의 인수왕비(仁粹王妃)의 아버지이다. 아들 치인(致仁)은 서성군(西城君), 치의(致義)는
청양군(淸陽君), 치례(致禮)는 서릉부원군(西陵府院君)이다.
한백륜(韓伯倫) :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벼슬이 의정부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청천부원군(淸川府院君)에 봉하였다.
시호는 양혜(襄惠)이며, 예종(睿宗)의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아버지이다.
한계미(韓繼美) : 정난좌익공신(靖難佐翼功臣)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하였다.
한계희(韓繼禧) : 한계미의 아우이며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다.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의
호를 내리고 서평군(西平君)에 봉하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한명회(韓明澮) : 젊어서 권람(權擥)의 무리와 함께 유학하였다. 나이가 40에 가까워서 비로소 경덕궁직(景德宮直)이
되는 등 처지가 매우 불우하였으나, 계유년에 세조를 도와 큰 난을 평정한 뒤 네 차례나 공훈을 세워 동맹[動盟]에
으뜸이 되었고 세 번이나 영상(領相)이 되었다. 시호는 충성(忠成)이라 한다. 장순왕후(章順王后)와 공혜왕후(恭惠王
后)는 모두 그의 딸들이다. 세조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한언(韓堰) :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신증 한치형(韓致亨) :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질경(質景)이라 하였다.
한세환(韓世桓) :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효자 고려 손유(孫宥) : 이 고을의 아전[吏]이다. 신우(우왕) 4년에 왜구가 그가 살고 있는 동네에 침입하였는데,
어린 아들, 딸들이 옷을 붙잡고 울부짖었으나 손유는 돌아보지 않고 즉시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업고 도망쳐 해
를 면하였다.
본조 경연(慶延) : 천성적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병이 들었는데 한겨울에 생선을 먹고 싶어하므로
경연이 그물을 들고 물에 들어가서 잉어 두 마리를 잡아다 올렸더니 아버지의 병이 과연 치유되었다. 뒤에 부모가
돌아가자 묘 앞에 여막을 짓고 전후 6년 동안이나 시묘살이를 하고, 가례(家禮)대로 제사를 받들면서 아내와 함께
손수 제삿거리를 장만하니, 이웃이 모두 교화되었다. 성종이 그 소문을 듣고 불러들여 선치전(宣致殿)에서 인견
하고 격려하여 특별히 4품 벼슬을 주고 사재주부(司宰主簿)에 임명하였다. 얼마 후에 이산 현감(尼山縣監)으로
나가니,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 경외하면서 사모하였다. 그가 죽자 고을 시람들이 장사지낼 거리와 기름ㆍ꿀 등을
장만하여 그의 아내에게 보내었더니, 아내가 말하기를, "어찌 남편의 깨끗한 덕을 감히 더럽힐 수 있겠는가." 하고
모두 받지 않았다.
신증 김석봉(金石鳳) : 두 아우와 같이 살면서 부모를 봉양함에 있어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자 슬퍼
하고 사모하여 정성을 다하였고 매양, 초하루 보름에는 반드시 술과 음식을 갖추어 아버지를 대접하니, 사람들이
감동하여 옷을 벗어 비용을 도와주는 이도 있었다. 이 사실이 임금께 알려져 그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이천서입금강류(二川西入錦江流)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큰 들판은 남쪽으로 문군(文郡)에 이어서 사라
지고, 두 냇물은 서쪽으로 금강에 들어 흐른다." 하였다.
유녀전두채간빈(遊女田頭採澗蘋)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동풍이 살짝 불어 가는 비를 들판에 뿌리니, 봄빛이
불탄 자리에 아득히 보이네. 산골집에 해가 더디니 꽃이 필 듯하고, 시내에 얼음이 녹으니 물이 힘차게 흐르네.
목동들은 소등에서 갈대 피리를 불고, 유녀들은 밭머리에서 시내의 마름꽃을 따네. 말 위에서 계절에 놀라 읊조리
노니, 고향은 아득하여 내 시름 자아내네." 하였다.
포곡제춘권우경(布穀啼春勸耦耕) : 옛사람의 시에, "아침부터 병(病)을 달래어 동영(東榮 동쪽 처마끝이란 뜻)에
앉았으니, 산빛은 아득한데 비가 잠깐 개었구나. 우거진 먼 숲은 안개에 젖었고, 먼 멧부리는 아스라이 흰구름 비꼈
도다. 수양버들은 땅을 쓸어 떠나는 시름을 자아내고, 뻐꾹새는 봄을 울어 밭갈이를 재촉한다. 바람 시켜 꽃 다 지게
하지 마오, 이 시정(詩情) 붙일 곳 없어 다시금 시름짓네." 하였다.
금방전호공북루(金榜傳呼拱北樓)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임금님 수레 남쪽 나라 순행하니 금방(金榜)을 공북루
에서 전하여 부르네." 하였다.
[비고]
연혁 효종(孝宗) 7년에 서원현(西原縣)으로 강등하였다 : 노비(奴婢)가 주인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현종(顯宗) 8년에 복구하고 숙종(肅宗) 6년 현으로 내려갔다가 15년에 복구하였으며, 영종(英宗) 7년에 현으로
강등하였다. : 무신역란(戊申逆亂) 때문이다. 16년에 복구하였다가 정종(正宗) 원년에 현으로 강등하였다. : 역녀
(逆女) 효임(孝任)의 출생지이기 때문이다. 순조(純祖) 25년 현으로 강등하고 34년에 복구하였다가 철종(哲宗)
13년에 현으로 내렸다. : 김순성(金順性)이 역모를 하였기 때문이다. 고종(高宗)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고읍 동주내(東州內) : 끝이 10리이다. 서주내(西州內) : 끝이 15리이다. 남주내(南州內) : 끝이 10리이다.
북주내(北州內) : 끝이 10리이다. 산외일(山外一) :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산외이(山外二) :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산내일(山內一) :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산내이(山內二)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80리이다. 산내이상(山內二上)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80리이다.
산내이하(山內二下)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서강내일(西江內一)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서강내이(西江內二) : 서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서강외일(西江外一)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서강외이(西江外二)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남일(南一)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남이(南二) : 위와 같다. 남차이(南次二) :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40리이다.
북강내일(北江內一)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북강내이(北江內二) :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북강외일(北江外一) : 처음이 20리, 끝이 50리이다. 북강외이(北江外二) :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수신(修身) :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이다.
청천(靑川) : 이곳이 고읍(古邑)이다. 처음이 60리, 끝이 1백 50리이다.
주안(周岸) : 원래 주모향(周牟鄕)인데, 문의(文義)ㆍ회인(懷仁)의 남쪽 경계 넘어 있다.
○ 남쪽으로 처음이 70리, 끝이 80리이다. 덕평(德坪) : 본래는 덕평향(德坪鄕)인데 천안(天安) 남쪽 경계 너머에 있다.
○ 서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90리이다.
영아 병영(兵營)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최영(崔瑩)의 건의로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이산현(伊山縣)에
설치하였는데 이조 태종(太宗) 2년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으로 고쳤고, 16년에 해미현(海美縣)으로 옮겼
다가 효종(孝宗) 2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관원 충청도 병마절도사ㆍ중군(中軍) : 병마우후(兵馬虞侯)이다.
○ 상당산성(上黨山城)에 유진(留鎭)한다. 심약(審藥) : 각 1명이다. ○ 중영(中營) : 인조(仁祖) 때에 두었다.
○ 중영장(中營將) 1명이다.
○ 속읍(屬邑)은 청주ㆍ천안ㆍ문의ㆍ회인ㆍ청산ㆍ보은ㆍ황간(黃澗)ㆍ영동ㆍ청안(淸安)ㆍ진천ㆍ직산ㆍ목천(木川)
이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병영창(兵營倉) : 모두 읍내에 있다. 군향창(軍餉倉) : 상당(上黨)에 있다.
청천창(淸川倉) : 옛 읍에 있다. 신원창(薪院倉) : 서북쪽 20리에 있다. 금성창(金城倉) : 서북쪽 50리에 있다.
주안창(周岸倉) : 주안에 있다. 오근창(梧根倉) : 북쪽 20리에 있다. 오공창(吾公倉)은 잘못 부른 것이다.
교량 오근진교(梧根津橋)ㆍ작천교(鵲川橋) : 위의 다리는 장마철에 범람하면 배로 건넌다.
토산 철ㆍ감ㆍ대추ㆍ종이ㆍ칠ㆍ소가리[錦鱗魚]ㆍ은어.
묘사 만동묘(萬東廟) : 숙종 갑신년에 세웠는데 매년 3월 9일에 제사지낸다.
신종현황제(神宗顯皇帝) 묘ㆍ의종열황제(毅宗烈皇帝) 묘 사원 화항서원(華巷書院) : 선조 경오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이이(李珥) : 문묘조에 있다. 이색(李穡) : 장단(長端) 조에 있다.
경연(慶延) : 자는 대유(大有)이고 호는 남계(南溪)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벼슬은 이산 현감(尼山縣監)이었는데,
징군(徵君)이라 호를 내렸다.
박훈(朴薰) : 자는 향지(馨之)이고 호는 강수(江叟)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벼슬은 승지였는데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慶)이다.
김정(金淨) : 자는 원충(元冲)이고 호는 충암(冲庵)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벼슬은 형조 판서였는데 영의정으로 추증
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송인수(宋麟壽) : 자는 미수(眉叟)이고 호는 규암(圭庵)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인데, 명종(明宗) 정미년에 화를
당했다. 벼슬은 이조 참판이었는데,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한충(韓忠) : 자는 서경(恕卿)이고 호는 송재(松齋)이며 본관은 청주인데, 중종(中宗) 신사년에 남곤(南袞)에게 살해
되었다. 벼슬은 승지였는데 이조 판서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송상현(宋象賢) : 개성 조에 있다.
이득윤(李得胤) : 자는 극흠(克欽)이고 호는 서계(西溪)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벼슬은 괴산(槐山) 군수였다.
○ 화양서원(華陽書院) : 숙종 병자년에 세우고 그 해에 사액하였다. 병신년에 왕이 친필로 사액하였다.
송시열 : 문묘 조에 있다.
○ 표충사(表忠祠) : 영종 신해년에 세우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이봉조(李鳳祚) : 자는 의숙(儀叔)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인데, 영종 무신년에 충청 병사로 있다가 역적에게 살해
되었다. 벼슬은 훈련대장이었는데 좌찬성으로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남연년(南延年) : 자는 수백(壽伯)이며 본관은 의령(宜寧)인데, 무신년에 청주 영장(淸州營將)으로 있다가 순절(殉節)
하였다. 좌찬성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홍림(洪霖) : 자는 춘경(春卿)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무신년에 병사(兵使)의 비장(裨將)으로 순절하였다.
호조 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천안군 天安郡
동쪽으로 목천현(木川縣)과의 경계까지 13리, 남쪽으로 공주(公州)와의 경계까지 48리, 전의현(全義縣)과의 경계
까지 33리, 서쪽으로 온양군(溫陽郡)과의 경계까지 11리, 아산현(牙山縣)과의 경계(境界)까지 16리, 북쪽으로
직산현(稷山縣)과의 경계까지 20리, 평택현(平澤縣)과의 경계까지 6리, 서울과의 거리가 2백 1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동서도솔(東西?率)의 땅이었다. 고려 태조 13년에 동ㆍ서의 도솔을 합쳐서 천안부(天安府)로 하고
도독(都督)을 두었다. : 이첨(李詹)의 문집을 살펴보니, "왕씨의 시조가 예방(倪方)의 말을 듣고 탕정(湯井)ㆍ대목
(大木)ㆍ사산(蛇山)의 땅을 나누어서 천안부를 설치하였다."고 했는데 옳은 듯하다.
성종 때에 환주도단련사(歡州都團鍊使)로 개칭하였고, 목종(穆宗) 때에 폐지하였다. 현종(顯宗) 때에 다시 천안이라
일컫고 지부사(知府事)를 삼았으며, 고종 43년에 몽고의 군사를 피하여 선장도(仙藏島)로 들어갔다가 뒤에 다시
옛땅으로 돌아왔다. 충선왕(忠宣王) 때에 영주(寧州)로 개칭하였고, 공민왕 때에 다시 천안부로 하였다.
본조(本朝)에 와서는 태종 13년에 영산군(寧山郡)으로 고쳐다가 16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씩이다.
군명 도솔(兜率)ㆍ환주(歡州)ㆍ임환(任歡)ㆍ영주(寧州)ㆍ영산(寧山)
성씨 본군 : 신(申)ㆍ장(張)ㆍ전(全)ㆍ하(河)ㆍ심(沈)ㆍ노(盧)ㆍ경(敬)ㆍ전(田) : 모두 촌(村)이다.
왕(王)ㆍ맹(孟) : 모두 속(續)이다.
풍세(豐歲) : 방(方)ㆍ서(徐)ㆍ경(敬)ㆍ화(花)ㆍ하(河) 돈의(頓義) : 이(李) 모산(毛山) : 박(朴)ㆍ이(李)ㆍ현(玄)ㆍ
김(金)
신종(新宗) : 방(方) 덕흥(德興) 상(尙) 형승 삼국(三國)의 중심이다 :
《고려사》 세속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술사인 예방(倪方)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삼국의 중심으로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입니다. 그러므로, 3천 호의 고을을 설치하여 그곳에서 군사를 조련하게 되면 백제가 저절로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하므로, 태조가 산에 올라 두루 살펴보고 비로소 천안부를 설치하였다.
한 방면의 요충지대이다. : 강호문(康好文)의 《대소원기(大召院記)》에 있다.
산천 왕자산(王字山) : 고을 동북쪽 1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고려 태조가 군사를 이곳에 머물러 두었을 때에
윤계방(尹繼芳)이 이곳을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라고 아뢰어 보루를 쌓고 군사를 조련하며, 왕자성(王字城)
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왕자는 바로 그 산의 모양이다.
화산(華山) : 풍세현(豐歲縣)에 있으며, 고을에서 43리의 거리이다.
유려왕산(留麗王山) : 고을 동쪽 11리 목천현(木川縣)의 경계에 있다. 수조산(水潮山) : 고을 동남쪽 2리에 있다.
쌍령고개[雙嶺峴]: 고을 남쪽 40리이며, 공주(公州)와의 경계에 있다.
차현(車峴): 고을 남쪽 45리에 있다. 자세한 것은 공주 조에 있다.
대천(大川) : 풍세현(豐歲縣) 북쪽에 있으며, 고을과의 거리는 9리이다.
토산 자기(磁器)ㆍ도기(陶器)ㆍ숭어[秀魚]ㆍ조기[石首魚]ㆍ지황(地黃)ㆍ백화사(白花蛇)ㆍ준치[眞魚]ㆍ게[蟹].
봉수 대학산(大鶴山) 봉수 : 고을 남쪽 18리에 있다. 남으로는 공주의 쌍령(雙嶺)에 호응하고,
북으로는 아산현(牙山縣)의 연암산(燕巖山)에 호응한다.
누정 선화루(宣化樓) : 객관 동쪽에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돌아오는 길에 잠깐 옛 영주(寧州) 땅에 쉬니, 객관 동쪽 모퉁이에 작은 누각이 있네.
구름 밖의 푸른 멧부리 상투를 드러낸 듯, 나무 사이의 서늘한 바람 가을을 알리네. 우연히 대자리에 누워 돌아가는
꿈을 꾸니, 이리저리 하염없이 나그네 되었네, 어버이 그리운 마음에 누각에 올랐건만 이 근심 가실 길이 없네."
하였다.
학교 향교 :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역원 신은역(新恩驛)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금제역(金蹄驛) : 고을 남쪽 23리에 있다.
영풍원(寧豐院) : 고을 남쪽 45리에 있다. 대평원(大平院) : 고을 남쪽 35리에 있다.
삼기원(三岐院) : 고을 남쪽 6리에 있다. 안정원(安定院) : 풍세현(豐歲縣)에 있다.
가을원(加乙院)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남원(南院) :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 강호문(康好文)의 누기(樓記)에, "영주(寧州)는 역사가 오래되었다. 옛날 우리 성조(聖祖)께서 견훤(甄萱)을 칠
적에 군사 10만을 주둔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군사를 조련하여 위엄을 드날렸으니, 그 군영을 설치한 곳을 고정(鼓
庭)이라 하고, 그 성을 왕자(王字)라 하였다.
이 고을의 설치는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며 사당의 모습이 온 고을을 비추어 고을 백성들을 복되게 하기 거의 5백
년이다.
지난 계축년 봄에 내가 조정의 명령으로써 이 고을을 지키게 되었는데, 태조의 사당을 배알하고 물러나와 아전과
백성들과 함께 지도와 호적 등을 펼쳐 놓고, 이 고을의 옛일을 물어 보았더니, 이 고을이야말로 삼국의 중간에
위치하여 참으로 일방의 요충지대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전사(傳舍)ㆍ주막ㆍ여관 등의 시설이 다른 고을에 견주
어 더욱 시급하였다. 예전에 고을 남쪽에 원(院)이 있어서 길손들을 접대하였으나, 그것이 왜구에 의해 불타버린
뒤 다시 짓는 이가 없어 길손들이 여간 고통이 아니었다. 내가 이 일을 계획하여 재목과 기와를 모았으나 마침
나라에서 탐라(耽羅)의 역사(役事)가 있어 이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제 군수 임군(任君)이 후임으로 와서 정사가 화평하고 은혜가 미치니, 백성들이 즐겁게 명령을 따라 주어 높이
솟은 원이 한달 남짓 만에 완성하였다. 길손들이 제집에 돌아간 듯 비바람이나 춥고 더움의 괴로움이 없어졌으니
참으로 잘된 일이라 하겠다. 원이 예전에는 동쪽으로 향하였고 누각이 매우 높았던 것을 임군이 풍수(風水)를
보고 지면의 형세를 따라서 남향으로 고쳐 지었는데, 길거리를 가로질러 놓여 있다.
또한 건축이 오래 가도록 하였으니, 대개 누각이 너무 크고 높으면 바람과 비를 지탱할 수가 없어서 기울고 퇴락
하기 쉬우므로, 이 누각을 지을 적에 높지도 낮지도 않게 하여 그 규모와 체제를 고을에 알맞게 하였다.
여름철이 되면 뜨거운 구름이 내려 쪼여 돌과 쇠를 녹일 듯하고 더위와 장마로 무덥고 습기가 차며, 수렁길이
잇달아 부역으로 왕복할 때에 이고 지고 다니자면 온몸에 땀이 흐르고, 목마른 목구멍에서는 먼지가 날 지경이다.
이렇게 지치고 답답할 적에 이 누에 오르면 맑은 바람과 시원한 기운이 저절로 일어나 정신이 넓어지고 시원해
지고 상쾌함이 마치 때묻은 옷을 빨래한 듯, 뜨거운 것을 식히는 듯, 한없이 넓은 곳에서 노니는 듯하다.
북풍이 울부짖고 찬 기운이 매섭게 살을 에는 듯하고 눈보라가 하늘을 덮고 해는 지고 갈 길은 먼데 아득히 사람
사는 집이라곤 없고, 고드름이 수염에 달리고 혀는 오그라들고 손은 시리며, 마소도 얼어서 쓰러질 적에 이 누에
들어오면 땔나무가 쌓여 있어 더운 물로 녹이고 불로 데워서 몸이 녹고 기운이 따뜻해지는 것이 마치 두꺼운 솜옷
을 입고 양지에 앉아 있는 듯하다. 이러한 시절에 남북으로 장사를 다니는 사람이나 동서로 다니는 행인들이 서로
보면서 말하기를, '아, 이 원루(院樓)는 임군수가 지은 것이라.' 하여, 이 원루로 말미암아 그 지은 사람은 생각하게
되고,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면 그의 정사를 사모하게 될 것이니, 이리하여 임군의 은혜는 당시에 더해졌으며,
후세에까지 길이 미칠 것이다. 사관의 붓을 빌리지 않더라도 훌륭한 명성을 남기게 될 것이니, 이 누를 지은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로다.
근래에 풍속이 점점 각박해져서 교대하는 관리들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공적과 재능이
자기보다 나은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다. 진실로 세상에 유익한 일이라면, 다른 사람이
했더라도 내가 한 것처럼 기뻐할 따름이다. 내가 이번에 전라도의 막영(幕營)으로부터 영주(寧州)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이를 위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누에 올라 거닐며 오래도록 관람하였다.
가만히 생각하니, 이른바 고정(鼓庭)과 왕자성은 완연히 예전과 같아서 왕씨를 일어나게 한 공적은 오늘에 있어서
도 힘입음이 있다고 하겠다. 진실로 성조(聖祖)의 창업이 어려웠음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수령이 된 사람은 그 흥망
을 책임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내 마음에 걸려서 하루도 편안히 지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제 임군이 나의 뜻은 잘 이어받아 마침내 이룩한 업적이 있으니 이는 기록할 만한 일이다. 뒤이어 군수가 되는
사람은 나로써 경계를 삼고 임군으로써 모범을 삼는다면 또한 영주 백성들의 행복이 되겠다.
임군의 이름은 군석(君碩)이요, 벼슬은 봉상대부(奉常大夫)이며, 아무 고을 사람이다. 원루를 낙성한 때는 을묘년
가을이요, 기문을 쓴 때는 정사년 봄이다." 하였다.
대소원(大召院) : 고을 서쪽 8리에 있다. 풍천원(楓川院) : 고을 북쪽 6리에 있다.
불우 광덕사(廣德寺)ㆍ개천사(開天寺)ㆍ만복사(萬福寺)ㆍ대학사(大鶴寺) : 모두 화산(華山)에 있다.
유려왕사(留麗王寺) : 고려 태조가 유숙하였으므로 이 이름이 되었다.
성불사(成佛寺) : 모두 왕자산에 있다. 고려 태조가 말을 머물었기 때문에 이름을 마점이라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동쪽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고려 태조묘(太祖廟)ㆍ왕자성(王字城)ㆍ고정(鼓庭) : 모두 왕자산 밑에 있다. 지금은 옛터만 있다.
풍세현(豐歲縣) : 고을 남쪽 27리에 있으며, 자천(秭川)이라고도 한다.
본래 백제의 감매현(甘買縣)이었으며, 신라 시대에 순치(馴雉)로 개칭하여 대록군(大麓郡)의 속현이었던 것을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 이 고을에 예속시켰다. 회고정(懷古亭) : 고을 서쪽에 있다.
○ 이곡(李穀)의 기문에, "지정(至正) 기축년 윤달에 내가 한(韓)으로부터 영주를 거쳐 서울로 가게될 때에 군수
성(成)군이 고을의 정자 이름을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옛날 태조께서 백제를 치려 할 때, 술자의 말이, 왕자성은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의 땅이니 진지를 구축하고 군사를 조련하면 삼국을 통합하여 왕이 되는 것을 당장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여, 풍수를 살펴 이 성을 경영하고 군사 10만을 주둔하여 마침내 견훤을 항복시켰
는데, 그 진영을 쳤던 곳이 고정(鼓庭)이라고 군의 문헌[郡乘]에 이렇게 실려 있습니다.
예전에 정자가 고정에 있어서 거기에서 관도(官道)를 내려다 보면 이른바 구슬을 다투는 형국이라는 왕자산의 산
밑인데, 왕자는 산의 모양입니다. 내가 그 정자가 퇴락하고 좁으며 또 이름도 잃어버렸음을 안타깝게 여겨,
이제 옛 것을 헐어 버리고 새로 확장하여 지었으니, 이제 이름을 지어 주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정자의 지음이
우연이 아님을 알게 하여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나의 고향이 이곳에서 3백 리 남짓한 거리이므로 내가
여기를 지나 다닌 것도 여러 차례이기에 영주의 일을 내가 잘 알고 있다. 백성들이 일정한 직업이 없고, 관리가
일정한 거처가 없다면 어느 겨를에 정자를 중축하였겠는가. 병술년 봄에 내가 사신으로 왔을 때에는 이귀을(李龜
乙)군이 군수로 있었는데, 풀밭을 일구어 밭을 만들고, 가시덤불을 베어내고 길을 열어 주었으니 그가 참으로
훌륭한 관리임을 알았다. 지난해 가을에 근성(覲省)차 돌아올 때는 지금 성군이 군정을 맡은 지 반년쯤인데 이군
의 치적보다도 더 낫다고 하였다. 부임한 지 두어 달 동안에 민정을 모두 알아서 이로운 일은 일으키고, 해로운
것은 힘써 없애버리고, 농사를 권장하고 학문을 힘쓰게 하며, 과세를 고르게 하고 흉년을 구제하는 등 질서 있게
행하므로 백성들이 모두 기뻐 복종하였다. 곧 명령을 내리기를, '너희들은 이곳에 살게 된 유래를 알고 있느냐.
이곳은 왕업을 일으킨 땅으로서 태조의 신궁(神宮)이 있다. 이제 그 건물들이 허물어져서 위로는 비가 새고 벽에
구멍이 뚫려 신령을 모실 수가 없는데도 신령께서 돌보고 흠향하신다고 하겠느냐. 사람이 근본에 보답할 줄을
모르면 이는 공경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또 관사(館舍)와 공해(公廨)는 손님을 받들고 관부(官府)를 위엄 있게
하는 것인데, 이제 모두 황폐하고 수리되지 않았으니 이는 게으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공경하지도 않고 게으른 데
대해서는 적용시킨 떳떳한 법이 있으니, 이는 수령만의 책임이 아니라 너희 백성들도 어찌 벌을 벗어날 수가 있겠
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온 고을 사람들이 지체 높은 집안도 막론하고 집집마다 골고루 부역을 책정하고 재목을 다스리고 기와
를 구워서, 먼저 신궁의 예전(禮殿)과 재방(齋房)을 새로 지어 건물을 모두 다 웅장하고 아름답게 한 뒤에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엄숙히 지냈으며, 다음은 관사와 공해를 수리하여 짓고 백성들을 격려하고 감독하여 금년의 농한
기에는 반드시 공사를 끝내어 일체 완성하지 않은 것이 없게 하려 하였으나,
때마침 나라에서 정사를 새롭게 하기 위해 먼저 관리를 임명한다는 말을 듣고 '나는 가게 될 것이니 너희들은
일단 공사를 중지하라.' 하고, 그 재목과 기와의 수량을 조사하여 기록해 두게 하고, 주관하는 이에게 주의시키기를,
'잃어버리지 말고 새로 오는 원[新官]을 기다려 나의 뜻이 달성되도록 하라.' 하고 또 말하기를, '이 정자는 한 고을
의 명승지를 차지하였으며, 사방으로 통하는 요지에 놓여 있으니 짓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날을 서둘러 성취하였다.
아, 성군(成君)이 이 고을을 조왕(祖王)의 남은 은덕이 있는 곳이라 하여, 나아가서는 태조의 초상은 뵙고 엄연하신
창업의 자세에 대하여 극히 공경하고 황송히 여겼으며, 물러나서는 고정(鼓庭)에 노닐면서 아득한 행군(行軍)의
자취를 길이길이 사모하여, 마음과 힘을 다하여 근본에 보답하고 옛 것을 회복하는 일을 힘쓰지 않았었는가.
그의 행실이 이러하므로 내가 정자의 이름을 회고(懷古)라 하였다. 정자가 작아서 기문을 쓸 만한 것이 못 되지만,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 나머지를 볼 것이므로 아울러 기록하노라. 성군의 이름은 원규(元揆)이며 본관은 창녕(昌寧)
이요, 동한(東韓)의 이름난 집안 동암(東庵)의 외손이다." 하였다.
모산부곡(毛山部曲) : 고을 북쪽 36리에 있다. 이곳을 지나서 아산현(牙山縣) 북촌(北村)에 들어간다
신종부곡(新宗部曲) : 고을 서쪽 80리에 있다. 지나서 예산현(禮山縣) 북촌에 들어간다.
덕흥부곡(德興部曲) : 고을 서쪽 69리에 있다. 지나서 신창현(新昌縣) 서촌(西村)에 들어간다.
돈의향(頓義鄕) : 고을 서쪽 62리에 있다. 지나서 아산현 서촌에 들어간다.
명환 고려 제궁(弟弓)ㆍ엄식(嚴式) : 태조 13년에 대승(大丞) 제궁으로 도독부사(都督府使)를 삼고, 원보(元甫) 엄식
으로 부사를 삼았다. 손변(孫抃) : 판관에 등용되었는데, 정사를 가장 잘하였으므로 승진하여 공역서승(供驛署丞)에
임명되었으며, 고종 때에 여러 차례 승진하여 예부 시랑(禮部侍郞)이 되었다.
성원규(成元揆)ㆍ강호문(康好文). 우거 고려 전신(全信) : 과거에 올라 벼슬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르
렀다. 사람됨이 일을 처리할 적에 엄중하여 청탁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여러 차례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는데,
백성들이 자기들을 버리고 갈까 염려하였다. 평생 살림살이에는 마음을 쓰지 아니하였다.
만년에 스스로 호를 백헌(柏軒)이라 하였다.
효자 고려 양호(梁好) : 젊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어버이를 봉양하였다. 부모가 병에 걸렸을 때에 그
대변을 가져다가 병의 차도를 알기 위해 달고 쓴 것을 맛보았으며, 세상을 떠난 뒤에는 3년 동안 시묘(侍墓)하였다.
아버지가 일찍이 막내아들 순(純)이 토지와 집이 없음을 불쌍히 여겼으므로 양호가 아버지의 뜻을 좇아서 자기의
몫을 아우에게 주었다. 이 일이 임금에게 알려져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빈 뜰 고요하여 만뢰(萬籟)가 쥐죽은 듯한데 : 원나라 절동(浙東)사람 계명숙(季明叔)의 시에, "말탄 길손이
저물녘에 천안에 와서, 문 안으로 들어가 말에서 내려 한가로이 서성거리네. 빈 뜰 고요하여 만뢰가 쥐죽은 듯한데,
낙엽만이 쓸쓸히 난간을 울리네. 푸른 하늘엔 구름 없어 맑게 씻은 듯하고, 밤빛에 맺힌 이슬 반짝이는데,
호상(胡床 큰 걸상)에 홀로 앉아 잠 못 이루니, 달은 날아 오고 바람이 차갑구나." 하였다.
발[簾]에 뿌리는 비바람이 봄 추위를 돌리네 : 이곡의 시에, "허물어진 옛 성 비에 막히니 마음이 답답하고, 가려
하나 갈 수 없어 공연히 서성거리네. 군수는 백성 생각에 밥 먹을 겨를도 없다 하니, 지나는 길손이 어지러이 간여
함을 감당하기 어려우리. 하물며 지난해에는 서리가 일찍 내려, 가을 곡식이 이슬 맛도 못 보았다 하네. 조용히
읊조리느라 해 지는 줄도 몰랐는데, 발에 뿌리는 비바람이 봄추위를 돌리네." 하였다.
달이 밝아 맑은 이슬이 빈뜰에 반짝이네 : 설장수(偰長壽)의 시에, "계공(季公)의 고향이 신안(新安)에 이웃했는데,
가정(稼亭)[이곡(李穀)]의 기상은 아직 꿋꿋하구나. 지금까지 50년 전의 일인데, 웅장한 문장과 어려운 운자를
뉘라서 간여하리. 내 와서 읊조리며 옛일을 생각하노라니, 달이 밝아 맑은 이슬이 빈뜰에 반짝이네. 고금의 재주와
힘이 멀리 미치기 어려운데, 푸르고 푸른 만 리 옛 하늘 바람이 차기도 하구나." 하였다.
밥 짓는 연기는 두서너 집뿐일세 : 강호문의 시에, "늘그막에 황폐한 고을을 얻으니, 밥 짓는 연기는 두서너 집뿐
일세. 백성들은 흩어지고 마을은 없어지고, 왜구의 침략 바다가 멀지 않구나. 보통 방어조차 고생스러운데, 남북
으로 전송하고 영접하는 일이 잦구나. 뉘라서 이 고을 원님되기 즐겁다 하리, 시름 깊어 귀밑털이 희어지네."
하였다.
[비고]
고읍 풍세(豐歲) : 서남쪽 25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감매현(甘買縣)인데 후에 제천(稊川)으로 고쳤고,
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에 순치(馴雉)로 고쳐 대록군(大麓郡)의 영현(領縣)으로 고쳤다가, 고려 태조 23년에
풍세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예속되었다.
방면 상리(上里) : 동쪽으로 끝이 5리이다. 하리(下里) : 서쪽으로 끝이 5리이다. 군남(郡南) : 끝이 10리이다.
대동(大東)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소동(小東) : 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15리이다.
일남(一南) :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이남(二南) :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내서(內西)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일(北一) :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북이(北二) : 처음이 5리, 끝이10리이다.
신종(新宗) : 본래는 신라의 부곡(部曲)인데, 예산(禮山)의 북쪽 경계 너머에 있다. 서쪽으로 끝이 80리이다.
덕흥(德興) : 본래는 덕흥부곡이다. 신창(新昌)의 서쪽 경계 너머에 있다. 서쪽으로 끝이 68리이다.
모산(毛山) : 본래는 모산부곡이다. 아산(牙山)의 동쪽 경계 너머에 있다. 서북쪽으로 끝이 40리이다.
돈의(頓義) : 본래는 돈의향(頓義鄕)이다. 아산 서쪽 경계 너머에 있다. 끝이 62리이다.
○ 신종ㆍ덕흥ㆍ모산ㆍ돈의는 모두 좁은 갯가[浦]의 들판이다.
성지 왕자산고성(王字山古城) : 군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견훤을 정벌할 때에 이곳에 주둔
하여 보루(堡壘)를 쌓아 관병(觀兵)하였다. 산 밑에 유적이 있다.
도리치고루(道理峙古壘) : 도리치에 있다.
고성(古城) : 북쪽 10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은 유적이 있다.
창고 읍창ㆍ모산창(毛山倉) : 아산 시포(市浦)에 있다. 신종ㆍ덕흥ㆍ둔의에는 모두 창이 있다.
토산 감ㆍ대추ㆍ붕어.
옥천군 沃川郡
동쪽으로 보은현(報恩縣)과의 경계까지 51리, 청산현(靑山縣)과의 경계까지 52리, 남쪽은 영동현(永同縣)과의 경계
까지 46리, 전라도 무주현(茂朱縣)과의 경계까지 89리, 같은 도의 금산군(錦山郡)과의 경계까지 73리, 서쪽으로
회덕현(懷德縣)과의 경계까지 21리, 전라도 진산군(珍山郡)과의 경계까지 31리, 북쪽은 청주(淸州)와의 경계까지
37리, 서울과의 거리 3백 8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고시산군(古尸山郡)이었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관성군(管城郡)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현종(顯宗) 때에는 경산부(京山府)에 속하였으며, 인종(仁宗) 때에 현령(縣令)을 두었고, 명종 12년에 아전과
백성들이 현령인 홍언(洪彦)을 붙잡아 가두었기 때문에 유사(有司)가 임금께 아뢰어 관호(官號)를 없애버렸다가,
충선왕(忠宣王) 5년에 지옥주사(知沃州事)로 승격하여 경산부에 소속된 이산(利山)ㆍ안읍(安邑)ㆍ양산(陽山)의
3현을 나누어 속현으로 하였다. 본조에 와서 태종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경상도로부터 본도로 소속시켰다.
속현 이산현(利山縣) :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소리산현(所利山縣)인데, 경덕왕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관성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에 경산부에 소속시켰고, 명종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뒤에
다시 예속하였다.
안읍현(安邑縣) : 고을 동쪽 38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아동혜현(阿冬兮縣)이었는데 경덕왕 때에 안정(安貞)으로
개칭하고 관성군의 속현이 되었으며,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9년 경산부에 소속되었다가 뒤에
다시 예속되었다.
양산현(陽山縣) : 고을 남쪽 59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조비천현(助比川縣)이었는데 경덕왕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관성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에 경산부에 소속되었다. 명종 6년에 현령을 두었고, 뒤에 다시
예속되었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각 1사람씩이다.
군명 고시산(古尸山)ㆍ관성(管城)ㆍ옥주(沃州).
성씨 본군 : 육(陸)ㆍ전(全)ㆍ황(黃)ㆍ신(申)ㆍ표(表)촌이다. 김(金)ㆍ전(全)ㆍ유(柳) : 모두 이주한 이들이다.
이산(利山) : 박(朴)ㆍ임(任)ㆍ방(房)ㆍ전(田) : 촌이다. 심(沈)ㆍ김(金)ㆍ한(韓) : 모두 이주한 이들이다.
양산(陽山) : 명(明)ㆍ장(張)ㆍ박(朴)ㆍ백(白)ㆍ이(李)ㆍ심(沈) 안읍(安邑) : 송(宋)ㆍ주(周)ㆍ강(康)ㆍ장(張)ㆍ
맹(孟)ㆍ종(種).
형승 남기(南紀)의 주집(走集)이다 : 서거정(徐居正)의 <적등루기(赤登樓記)>에 있다. 산은 높고 물은 맑으며,
땅은 기름지고 물산은 풍부하다 : 남수문(南秀文)의 <향교기>에 있다.
산천 마성산(馬城山) :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지방 사람들이 말의 조상에 제사
지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지륵산(智勒山) : 고을 남쪽 53리에 있다.
삼성산(三城山) :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옛 성의 남은 터가 있다. 동림산(東林山) : 고을 남쪽 23리에 있다.
월이산(月伊山) : 이산현 남쪽 5리에 있다. 마니산(摩尼山) : 고을 남쪽 50리에 있다. 또 영동현(永同縣) 조에 있다.
환산(環山) : 고을 북쪽 16리에 있다. 서대산(西臺山) :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차탄(車灘) :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범나루[虎津]: 고을 남쪽 52리에 있다. 근원이 전라도 무주현 덕유산(德裕山)에서 나오고, 하류는 적등진(赤登津)
이다. 적등진(赤登津) : 고을 남쪽 40리에 있다. 그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전라도 덕유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경상도 중모현(中牟縣)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본도 보은현 속리산에서 나온다. 고을 동쪽을 지나서 차탄(車灘)이
되고, 동북쪽으로는 화인진(化仁津)이 되며, 회인현(懷仁縣)을 지나서 말흘탄(末訖灘)이 되고, 문의현에서는
형각진(荊角津)이 된다. 공주에 이르러서는 금강이 되고 곰나루[熊津]가 되며, 부여(扶餘)에 이르러서는 백마강이
되며, 임천(林川)ㆍ석성(石城) 두 고을 경계에 이르러 고성진(古城津)이 되고, 서천군(舒川郡)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화인规(化仁津) : 고을 동쪽 26리에 있다.
토산 무쇠[水鐵]: 안읍현(安邑縣) 지내동(枝內洞)에서 나온다.
지치[紫草]ㆍ인삼ㆍ사향(麝香)ㆍ벌꿀ㆍ안식향ㆍ지황ㆍ복령.
성곽 서산성(西山城) :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천 1백 41자, 높이가 6자로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월이산(月伊山) 봉수 : 동으로 영동현 박달산(朴達山)에 호응하고, 북으로 환산(環山)에 호응한다.
환산(環山) 봉수 : 서쪽으로 회덕현 계족산(鷄足山)에 호응하고, 남으로 월이산에 호응한다.
누정 적등루(赤登樓) : 적등원 옆에 있다.
○ 서거정의 기문에, "옥천은 남쪽 지역의 집중지이다. 서울로부터 충청도로 가고, 충청도로부터 경상도로 가는
길목이어서, 사신과 여행자들의 왕래하는 말굽과 수레가 날마다 서로 연이어 있다. 군의 동남쪽 30리쯤에 속읍이
있으니 이산(利山)이라 하고, 강이 있어 넓이 수십 리를 가로질렀으니 적등이라 한다. 그 위에 원이 있고 누각이
있으니 참으로 큰 길거리의 중요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큰 더위와 몹시 추울 때, 모진 바람과 비오는 괴로운 날에
길가는 행인들이 여기에 와서 머물게 되고, 혹은 물을 건너기 어려울 때나 길이 늦었을 때, 말과 소가 부족하거나
도둑의 염려가 있을 적에는 여기서 쉬기도 하고, 누에 올라 구경하기도 하고 하룻밤 유숙하기도 한다. 추울 때는
따뜻하게 해주고 더울 적에는 서늘하게 해 주니, 사람들에게 덕을 줌이 어찌 적다 하겠는가. 그러나 건물을 지은
지가 오래되어 무너지고 헐어서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정통(正統) 기사년에 화성(和城) 최공이 군수로 온 뒤로는 잘 다스려지고 폐단이 사라졌는데, 어느 날 원의 행차
[星駕]가 들에 나갔다가 적등루가 허물어진 것을 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백성의 장관으로서 어찌 차마 보기만
하고, 수습하지 아니하여, 길 다니는 행인으로 하여금 돌아갈 곳이 없게 하겠는가.' 하고, 분연히 중수할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 지방의 중 무착(無着)이 공의 뜻을 받들어 널리 고을 사람들에게 권허여 재물 약간을 얻었으며,
공도 사재를 내어 그 비용을 돕고, 온갖 실행은 모두 중들을 모아 부역하게 하여 농사짓는 이에게는 실끝만큼도
시끄러움이 미치지 아니하였다. 아무 해에 시작하여 아무 해에 준공하였다. 지은 누각 3칸이 크고 넓고 또한 부엌
이 달려 있어 머물러 잠잘 만한 곳이 된다. 전에 누추하고 좁고 퇴락하였던 것이 이제는 얼마나 우뚝 솟았는가.
이 길로 다니는 행인들이 공의 덕을 찬양하여 마지 않는다. 내가 《주례(周禮)》를 살펴보니,
나라에 10리마다 여(盧)가 있고 30리마다 숙(宿)이 있었는데, 후세에 10리에 하나의 장정(長亭)이 있고, 5리에 하나
의 단정(短亭)을 둔 것은 모두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였다.
나라의 제도에 왕인(王人 왕명을 받들고 온 사람)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하여 큰 길 30리에 한 전사(傳舍)를 두어
관리와 군졸을 시켜 맡아 보게 하였고, 장삿군과 여행자를 위하여서는 길의 멀고 가까움과 산천의 요해처를 보아서
적당히 원(院)을 두어, 백성을 모집하여 맡아보게 하고 토지를 주어 그 일을 맡게 하였다.
이는 상하와 공사의 구분은 있을 망정,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매한가지라 하겠다.
이제 전사(傳舍)에는 주관하는 사람이 있으니 책임이 돌아갈 곳이 있으나, 원에는 주관하는 이가 하나도 없어서
가끔 집이 쓰러져도 돌보는 이가 없으니, 이 어찌 임금께서 은혜를 베푸는 뜻이라 하겠는가.
이제 공이 정사를 하는데 이렇게 정성껏 힘썼으니, 그는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아는 분이라 하겠다.
아, 은혜로운 정사를 시행하여 여행자들이 안심하고 길을 통행하기를 원하는 것은 옛 성현들도 이를 옳게 여길
것이다. 옥천의 부로(父老)들이 공의 덕을 빛내기 위하여 나에게 글을 청하였으므로 삼가 연월을 써서 돌려 보내
노라. 공의 이름은 선문(善門)이요, 자는 아무개이며, 공의 뒤를 이어 군수로 온 이는 사군(使君) 정승조(鄭承韶)
이니 또한 정치를 잘 한다는 명성이 있었다." 하였다.
○ 조준(趙浚)의 시에, "황급한 6월달 3천리 길에, 나루에 사람 없어 혼자서 배에 오르네. 나물 캐고 군사를 내는데
누가 계교를 얻었던가. 적등루 아래의 물이 하늘에 닿았네." 하였다.
○ 이직(李稷)의 시에, "오가는 길손들이 하루에 만명이 넘어, 다투어 강을 건너는데 배는 한 척뿐. 다시 적등루에
올라 시를 지으니, 갈매기도 한가로이 물 가운데 떠 있구나." 하였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스스로 부끄럽네, 이즈음의 군수노릇[石二千] 저 나루에 사람 건너는 배만도 못한 것이.
물새들도 앞에서 호령함을 싫어하는 듯, 쌍쌍이 날아 푸른 하늘을 가르네." 하였다.
학교 향교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 남수문(南秀文)의 기문에, "옥천은 충청도의 이름 있는 고을이다. 산이 높고 물이 맑으며 땅이 기름지고 물산
(物産)이 풍부하며 맑은 기운이 모이는 곳으로서 영특한 인재들이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선비들의 학문이 다른 고을에 으뜸간다. 향교가 높고 시원한 곳에 자리잡고 있으나, 누대(樓臺)가 없어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맑고 넓은 기운을 맞이하지 못하여 무더위에 시달린지 오래다.
정통(正統) 임술년 봄 2월에 군수 여산(礪山) 송선생이 이를 개탄하고 놀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 목재를 다듬고
기와를 구워서, 남루(南樓) 9칸을 세우니, 한 달이 못 되어 준공되었다.
교도(敎導) 이귀통(李貴通)군이 선생의 뜻으로 편지를 보내어 나에게 기문을 청하여 말하기를, '여러 봉우리가
뒤를 둘러싸고, 한 줄기 시내가 앞을 굽이쳐 흐릅니다. 남쪽을 바라보면 산이 푸른빛을 모아 처마 끝에 나지막히
읍하고 서 있는 것이 서대산(西臺山)요, 서쪽으로 5리쯤 가서 흰 무지개처럼 둘러서 난간 밖으로 보일 듯 말 듯한
것이 거천(巨川)인데, 이것이 누각의 뛰어난 경치의 대략입니다.
또한 이 누각을 지은 것은 예전이 아니고 지금의 선생이니 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당신은 이 고을 사람으로,
사관이 되었으니, 이 사적은 기록하여 주시오,' 하였다. 내가 문장이 졸렬하다고 하여 더 사양하지 못하였다.
아, 백성의 장관된 자의 도리는 오직 정치와 교육이니, 교육이 정치의 근본이라면 학교는 참으로 교육을 행하는
수단이니, 그것이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에 관계됨이 매우 크다 하겠다.
그러나, 세상의 관리된 사람은 대개 문서와 장부나 맞추는데 힘쓰고, 주머니를 채우는 것만 살필 뿐, 학문을 일으
키는 일은 등한시하여 마음을 쓰지 않았는데, 선생은 교양을 자기의 임무로 삼고 학교를 급선무로 여겨 학과를
권장한 나머지 또 부지런히 힘써 이 누각을 지어 선비들에게 이처럼 혜택을 주었으니 무엇으로 선생의 은혜를
보답하겠는가. 이제 선비들이 이 누에 올라 번잡한 흉금을 씻고 막힌 생각을 풀어 글을 읽는 여가에 넓은 기운을
끌어들이고 풍경을 관상하게 되었으니, 보고 느끼는 바가 어찌 없으리오.
산의 높은 것을 보고는 주역의 대축괘(大畜卦)의 많은 지식을 생각하고, 물이 흐르는 것을 보고는 습감괘(習坎卦)
의 떳떳한 덕을 생각하며, 고기와 소리개의 날고 뛰는 것을 보고는 도의 체득[道體]을 위아래로 관찰할 줄을 생각
하며, 물상을 보고는 그 이치를 궁구하고, 몸소 반성하여 그 사실을 경험하게 되면 가까운 강석하는 자리[凡席]
에서 천지와 만물의 이치가 이미 갖추어졌을 것이요, 굽어보고 우러러보는 사이에서도 신묘한 이치를 궁구하고
조화의 도리를 아는 묘함이 여기에 있으리니, 보고 듣는 것이 학문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으며, 움직이고 고요한
것이 또한 학문 아닌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를 힘써 실행하여 잠시 놀고 쉴 때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거의 선생의 은혜를 저버리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선생의 이름은 을개(乙開)이며, 장원에 뽑혀 대성(臺省)을 역임한 분이다. 학술이 매우 높아 유림(儒林)에 모범이
되었고, 고을을 다스린 훌륭한 업적은 옛 순리(循吏 법을 잘 지키고 충실한 관리)에 부끄럽지 않다.
이 하나의 작은 누각 같은 것은 선생에 있어서 경중을 논할 것이 못 되지만, 그러나, 이 일을 보아도 정치의 근본을
안다고 하겠다. 사방의 백성을 키우는 관리들이 반드시 그의 풍화(風化 교화)를 듣고서 흥기할 사람이 있을 것인데,
하물며 선생의 뒤를 이은 이에 있어서랴. 멀리 고을의 자제들을 위하여 경하하면서 이것으로 기문을 삼는다."
하였다.
역원 증약역(增若驛) : 고을 서쪽 18리에 있다. 가화역(嘉和驛) : 고을 서쪽 3리에 있다.
화인역(化仁驛) : 안읍현 남쪽 5리에 있다. 순양역(順陽驛) : 양(陽)은 옛날에는 양(良)자로 되었다.
양산현(陽山縣) 서쪽 4리에 있다. 토파역(土坡驛) : 파(坡)는 옛날에 현(●)자로 되었다. 이산현 서쪽 2리에 있다.
화인원(化仁院) : 화인 나루의 기슭에 있다. 증약원(增若院) : 증약역 남쪽에 있다.
금천원(金川院)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우현원(牛峴院) : 이산현 서쪽에 있다.
율현원(栗峴院) : 이산현 남쪽에 있다. 덕수원(德水院) : 양산현 남쪽에 있다.
적등원(赤登院) : 적등 나루 기슭에 있다.
불우 월암(月菴) : 삼성산(三城山)에 있다. 안양사(安養寺) : 환산(環山)에 있다.
감로사(甘露寺) : 증약역 북쪽에 있다. 황정암(黃丁菴) : 고을 북쪽에 있다.
건천사(乾川寺)ㆍ대성사(大聖寺) : 모두 동림산(東林山)에 있다.
영국사(寧國寺) : 지륵산(智勒山)에 있다. 고려 한문준(韓文俊)이 비문을 지은 중 원각(圓覺)의 비가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서쪽 산성에 있다. 여단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양산(陽山) : 신라 무열왕이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국경을 막자, 이를 분히 여겨 정벌하려고 김흠운(金歆運)
으로 장수를 삼았다. 김흠운이 명령을 받고 백제 땅에 다달아 양산 아래 진을 치고 조천성(助川城)을 치려 하였는데,
백제 군사가 밤을 타고 빨리 몰아서 쳐들어오니, 군영이 놀라서 진정시킬 수가 없게 되었고, 백제 군사는 신라군의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더욱 급히 공격하여 왔다.
김흠운이 그때 말을 비껴타고 적을 기다리고 있는데, 대사(大舍) 전지(詮知)가 말하기를, "지금 적이 어두움 속에서
쳐들어오니 공이 죽더라도 누구 하나 아는 이가 없을 것이다." 하니, 김흠운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이미 몸을 나라
에 바쳤거늘 어찌 명성을 구하겠는가." 하고, 곧 칼을 휘둘러 적과 싸우다가 죽었다.
이에 대감(大監) 예파(穢破)ㆍ소감(少監) 적득(狄得)ㆍ당주(憧主)ㆍ보용나(寶用那) 등도 모두 적진에 돌격하여
죽었다. 당시의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양산가(陽山歌)를 지어 부르며 슬퍼하였다.
관성향(管城鄕)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이 고을의 옛터인데 지금은 식률평(植栗坪)이라 일컫는다.
산집암향(酸汁巖鄕)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지금은 은소촌(銀所村)이라고 일컫는다.
초집기소(酢汁器所) : 관성향에 있다. 어모소(於毛所) : 안읍현에 있다.
적현부곡(赤●部曲) : 이 산현에 있다. 마니산성(摩尼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 4천 6백 31자, 높이 5자이다.
명환 고려 배득유(裵得儒) : 다스린 업적이 가장 드러났다.
본조 : 양구주(梁九疇) : 태종 때에 고을 일을 맡아보았는데 법을 시행함에 공정하고 부지런하였으며, 백성들에게
임함에 간명하고 엄정하였다. 서산(西山)에 잣나무 3백여 그루를 심었는데, 지금도 관청에서 그 이익에 힘입고 있다.
신증 양지손(梁芝孫) : 정치에 있어 깨끗하고 간명하기를 숭상하였다.
신증 효자 본조 김건(金建) : 성품이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상을 당했을 적에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준수하고
3년 동안 죽을 먹었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부시경사기곡계(俯視驚蛇幾曲溪) : 서거정의 시에, "높이 뜬 매인 양 천 겹 멧부리를 우러러보고, 놀란 뱀 같은
몇 굽이의 시내를 굽어본다." 하였다.
괴석당두위욕타(怪石當頭危欲墮) : 이승소의 시에, "긴 바람 골짜기를 지나자 마른 잎 소리 우수수하고, 구름사다리
얽히어 아홉 굽이 서려 있네. 괴석은 머리 위에서 곧 떨어질까 위태롭고, 키작은 소나무는 얼굴을 스치어 싸늘하구나."
하였다.
[비고]
방면 군동(郡東) : 처음이 15리, 끝이 30리. 군서(郡西) : 처음이 7리, 끝이 30리.
군남(郡南) : 처음이10리, 끝이 30리. 군북(郡北) : 처음이 15리, 끝이 30리.
이내(利內) : 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
이남(利南)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 위의 두 면은 이산(利山)이다.
안내(安內) : 동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 안남(安南)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
안동(安東) : 위와 같다. 위의 3면은 안읍(安邑)이다. 양내(陽內) : 동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
양남(陽南) : 남쪽으로 처음이 70리, 끝이 1백 5리.
○ 산즙암향(酸汁巖鄕)은 남쪽으로 10리인데, 지금의 은소촌(銀所村)이고, 관성향(管城鄕)은 옛 읍터이며,
적현부곡(赤峴部曲)은 이산(利山)이고, 어모소(於毛所)는 안읍(安邑)이다.
진도 화인진(化仁津)ㆍ적등진(赤登津)ㆍ호탄진(虎灘津) : 위의 3도는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토산 감ㆍ대추ㆍ소가리ㆍ은어ㆍ가물치
사원 표충사(表忠祠) : 광해군 무신년에 세우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조헌(趙憲) : 김포(金浦)에 보인다.
김집(金集) : 대묘에 보인다.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 : 모두 문묘에 보인다.
조완기(趙完基) : 자는 덕공(德恭)이고, 본관은 백천(白川)이다. 조헌(趙憲)의 아들로 선조 임진년에 아버지가
순절(殉節)하여 지평(持平)으로 추증되었다.
문의현 文義縣
동쪽은 회인현(懷仁縣)과의 경계까지 11리. 남쪽은 회덕현(懷德縣)과의 경계까지 17리.
서쪽은 연기현(燕岐縣)과의 경계까지 41리. 북쪽은 청주와의 경계까지 12리.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이었다. 신라에서는 연산군(燕山君)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때에는 청주에 소속되었다.
명종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고종 46년에 위사공신(衛社功臣) 박희실(朴希實)의 고향이므로 현령(縣令)으로
승격시키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충렬왕 때에 가림(嘉林)에 병합하였다가 이내 복구하였고,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계속하였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각 한 사람씩. 군명 일모산(一牟山)ㆍ연산(燕山)
성씨 본현 박(朴)ㆍ조(曺)ㆍ이(李)ㆍ강(姜) :모두 역(驛)이다.
산천 양성산(壤城山) : 현 서쪽 4리에 있다.
누현(漏峴) : 현의 동쪽으로 9리 되는 구소리(九巢里)에 있다. 크고 작은 두 개의 바위 굴[石穴]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장마나 가뭄에도 마르거나 넘치는 일이 없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아홉 용이 살던 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구소라고 하였다."고 한다.
마물성산(摩物城山) : 현 동쪽 18리에 있다. 금방산(金方山)이라고도 한다.
구룡산(九龍山) : 현 서쪽 12리에 있다. 꼭대기에 노인성전(老人星殿)의 옛터가 있는데, 그 화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또 회인현 조에도 보인다.
국사랑산(國師郞山) : 현 서쪽 28리에 있다. 월굴산(月窟山) : 현 남쪽 3리에 있는데, 옥녀봉(玉女峯)이라고도 한다.
저자산(猪子山) : 현 서쪽 5리에 있다. 옥쇄봉(玉碎峯) : 현 동쪽 1리에 있다. 대명산(大明山) : 현 서쪽 29리에 있다.
용혈(龍穴) : 현 동쪽 3리에 있다. 고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들어가는데, 노끈을 매고 들어가 되돌아 나올 표시를
해야 한다. 깊이 들어가도 끝이 없고, 아래에 큰 물이 있어 불을 던지면 불꽃이 반딧불같이 되어서 꺼진다.
이원진(利遠津) : 현 남쪽 15리에 있다. 또 형각진(荊角津)이라고도 한다. 검단연(儉丹淵) : 현 서쪽 20리에 있다.
남천(南川) : 현 남쪽 2리에 있다. 금방산에서 나와 형각진으로 들어간다.
신증 초천(椒泉) : 현 서쪽 30리에 있다. 맛이 후추처럼 맵고 목욕을 하면 절로 병이 낫는다.
토산 벌꿀ㆍ지치[紫草]ㆍ복령ㆍ안식향ㆍ산무애뱀[白花蛇]ㆍ누치[訥魚].
봉수 소이산(所伊山) 봉수 : 현 동쪽 3리에 있다. 남으로 회덕현 계족산(鷄足山)에 호응하고, 북으로 청주 거질대산
(巨叱大山)에 호응한다.
누정 사산루(四山樓) :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덕류역(德留驛) : 현 남쪽 3리에 있다. 다정원(茶亭院) : 현 동쪽 2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 현 남쪽 7리에 있다. 형각원(荊角院) : 형각진 기슭에 있다. 달산원(達山院) : 현 서쪽 37리에 있다.
불우 석암사(石巖寺)ㆍ견불사(見佛寺) : 모두 구룡산에 있다. 묘고사(妙高寺) : 국사랑산에 있다.
유마사(維摩寺) : 대명산에 있다. 봉선암(奉先巖) : 괴방산(槐方山)에 있다. 성불사(成佛寺) : 마물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양성산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연산진(燕山鎭) : 고려 태조가 유금필(庾黔弼)로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을 삼고 백제의 연산진을 공격하다가
장군 길환(吉奐)을 잃었다. 자인부곡(慈仁部曲) :현 동쪽 20리에 있다.
양성산성(壤城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7백 54자, 높이가 한 길이다. 안에 둥그런 못이 있는데 큰 못[大池]
이라 부르며, 둘레가 1백 92자 8치이다. 사면에 모두 돌을 쌓아 섬돌이 되었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장마나 가뭄에도 물이 마르거나 넘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우거 본조 이영구(李英耈)
효자 본조 정시(鄭恃)ㆍ전경생(田敬生) : 모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열녀 본조 박(朴)씨 : 손혁(孫赫)의 아내다. 남편이 죽자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3년이 지나도 슬픔이 가시지 않아
다시 1년을 더 살다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초하루 보름마다 몸소 제사지냈는데 20여 년 동안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동네사람과 찬척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이 일이 임금께 알려져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양(楊)씨 : 이 현 사람 이귀화(李貴和)의 아내다. 19세에 남편을 잃었는데,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전(奠)을 몸소
올렸다. 3년 상이 끝나자 아버지가 개가시키려 하였으나 양씨는 굳게 거부하고 스스로 목을 매려 하였으므로,
아버지가 그의 뜻을 빼앗지 못하였다. 세속 명절을 당할 때마다 몸소 산소를 찾아 갔으며, 늙고 병들어 직접 못
가게 되면, 제삿날에는 반드시 목욕재계를 하고 무덤을 향하여 절을 하였다. 성종 2년에 이 일을 위에 아뢰어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비고]
연혁 선조(宣祖)조에 청주(淸州)에 합병시켰다 : 왜구의 노략질 때문이었다. 광해군 원년에 다시 세웠다.
고종 25년에 청주(淸州)에 예속시켰다가 20년에 현으로 복귀시켰으며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읍내 : 끝이 5리, 동면(東面) : 처음은 5리, 끝은 20리. 남면(南面) : 처음은 5리, 끝은 30리.
북면(北面) : 처음은 5리, 끝은 30리. 서일도(西一道) : 처음은 7리, 끝은 30리.
서이도(西二道) : 처음은 20리, 끝은 20리. 서삼도(西三道) : 처음은 20리, 끝은 35리.
진도 형각진(荊角津) : 이원진(利遠津)이라고도 하는데, 옥천(沃川)ㆍ회덕(懷德)으로 통한다.
토산 감ㆍ소가리ㆍ게.
사원 노봉서원(魯峯書院) : 광해군 을묘년에 세웠고, 효종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송인수(宋麟壽) : 청주에 보임. 정렴(鄭𥖝) :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 본관은 온양, 벼슬은 포천 현감
(抱川縣監)이었다.
송시열(宋時烈) : 문묘(文廟)에 보임.
○ 금담서원(黔潭書院) : 숙종 을해년에 세웠고, 같은 해에 사액하였다. 송준길(宋浚吉) : 문묘에 보임.
권 16 직산현 稷山縣
동쪽으로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33리이고,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21리이다.
북쪽으로 같은 군(郡) 경계까지 25리이며, 남쪽으로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0리이며,
목천현(木川縣) 경계까지 21리이다. 서쪽으로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나라
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에서 이곳을 사산현(蛇山縣)으로 만들었고, 신라에서도 그대로 사산현
(蛇山縣)으로 하고,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고려 초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소속시켰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 2년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김연(金淵)이 명 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신이 되어 귀국하자, 이 고을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
시켰다. 태종(太宗) 원년에 다시 낮추어 감무를 두었고,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경기도로 옮겨서 소속시켰고,
금상(今上) 초년에 예전대로 회복시켰다.
군명 위례성(慰禮城). 사산(蛇山).
성씨 본현(本縣) : 최(崔)ㆍ유(兪)ㆍ백(白)ㆍ조(趙)ㆍ전(全) : 모두 촌(村) 경양(慶陽) :
김(金)ㆍ조(趙)ㆍ백(白) : 모두 속(續).
형승 북쪽으로는 한강(漢江)을 띄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웅거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다 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 : 《삼국사(三國史)》 <백제기(百濟記)> 온조왕(溫祚王)의 옛터 : 이찬(李粢)의
제원루시(濟源樓詩)에, "온조 옛터에 한 누각 있으니, 여기 올라 사방으로 바라보면 뜻이 유유자적하네." 하였다.
산천 사산(蛇山) : 고을 서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 성거산(聖居山) : 고을 동쪽 21리에 있다. 고려 태조(太祖)가
일찍이 고을 서쪽 수헐원(愁歇院)에 거동했다가 동쪽을 바라보니, 산 위에 오색 구름이 있기에,
이는 신(神)이 있는 것이라 하여 제사지내고, 드디어 성거산(聖居山)이라 일컬었다. 우리 태조와 세종이 온천에
갈 적에 역시 여기에서 제사지냈다.
양전산(良田山) : 고을 서쪽 22리에 있다. 휴류암(鵂鶹岩)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양(羊)과 말[馬], 인물의 형상과
같다. 망해산(望海山) : 경양현(慶陽縣)에 있다. 억적포(億賊浦) : 고을 서쪽 60리에 있다.
경양포(慶陽浦) : 경양현(慶陽縣)에 있는데, 해포(海浦)이다.
아주제천(牙州梯川) : 고을 북쪽 23리, 홍경평(弘慶坪)에 있다. 물 근원은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남쪽 청룡산(靑龍山)
에서 나와서 진위현(振威縣) 동하포(冬河浦)로 흘러 들어갔다.
토산 소어(蘇魚)ㆍ수어(秀魚)ㆍ위어(葦魚)ㆍ진어(眞魚)ㆍ안식향(安息香)ㆍ백화사(白花蛇). 신증 황석수어(黃石首魚),
즉어(鯽魚).
봉수 망해산(望海山) 봉수 : 남쪽으로 아산현(牙山縣) 연암산(鷰巖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양성현(陽城縣) 괴태
길곶(槐台吉串)에 호응한다.
누정 제원루(濟源樓) : 객관 동북쪽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 서문에, "사신으로 영남(嶺南)에 갈 때, 직산을 지나게 되었었다. 직산 객관 동북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서 조금 쉬다가 주인에게 묻기를, '이 누각 이름이 무엇인가.' 하니, 주인은 알지 못하여
좌우 사람에게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객들은 제원이란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서거정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濟源)이라 한 것은 백제의 근원
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대개 백제의 시조 온조란 분은 본래 고구려 동명왕 주몽의 아들로서 난
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던 것인데, 역사서에 쓰기를 '온조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살피다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했으니, 이곳을 세상에서 직산이라 한다.' 하였다.
서거정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부아악이란 여기서 2백리나 떨어진 곳이니 어찌 살 만한 곳을 잡을 수 있으리오.
또 이른바 하남(河南)이라는 하(河)는 어느 물을 말한 것인가. 서거정이 이곳을 지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길이 급하여 한 번도 가보지는 못하고, 바라다만 보니, 지세가 편협해서 웅장한 기상이 없으니, 도읍을 세울 곳이
못 되어 맘속으로 깊이 의심하였다. 지난해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상고해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이었던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온조왕의 뒤에 직산으로부터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고,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으니 바로 지금의 한도(漢都)이다.
뒤에 금강(錦江)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공주요, 또 사비하(泗沘河)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다.
백제는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로부터 당(唐)나라 고종(高宗)때를 거쳐 대개 5백여 년이 걸린 터로서 온조왕은
도망하여 파천(播遷)한 중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해서 신라 고구려와 더불어 서로 솔밭처럼 버티어 삼국을
이루었으니, 호걸스럽고 영특하고 위대한 재주가 아니라면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 뒷세대에 와서는 여러 번 그
나라를 옮겨 강한 것을 믿고 군사 쓰기를 좋아하여 순치(脣齒)와 보거(輔車)의 형세를 알지 못하고, 강한 적과
싸움을 얽어 세력이 날로 줄어드는 데다가 더욱이 의자왕(義慈王)은 어둡고 음탕해서 아첨하는 자의 말만 받아
들이고, 성충(成忠)의 간언을 거절하다가 당 나라 군사가 바다를 건너오자 나라가 곧 망했으니, 아, 슬픈 일이로다.
이에 이 누(樓)에 오르니 감개를 이기지 못하여 시(詩)를 지어 조상한다.
시(詩)에, '백제 옛터에 풀이 절로 우거졌는데, 내 여기 오니 감개하여 마음이 상하네. 다섯 용(龍) 천안부(天安府)
에서 싸워 끝나고, 한쌍 봉황(鳳凰) 위례성(慰禮城)에서 울었네. 시조(始祖)의 사당이 깊은데 단풍나무 가리웠고,
성거산(聖居山)이 옹위했는데 푸른 구름 비꼈어라. 누(樓)에 올라 가을 바람에 나는 생각, 어느 곳에서 철적(鐵笛)
소리 들려오는가.' 하였다." 했다.
학교 향교(鄕校) :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성환역(成歡驛) :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 찰방(察訪)하는 본도의 속역(屬驛)이 11이니, 신은(新恩)ㆍ김제(金蹄)ㆍ광정(廣程)ㆍ일신(日新)ㆍ경천(敬天)ㆍ
평천(平天)ㆍ단평(丹平)ㆍ유구(維鳩)ㆍ김사(金沙)ㆍ장명(長命)ㆍ영춘(迎春)이다.
○ 찰방(察訪) 1명이다. 통수원(通水院) : 성환역(成歡驛) 옆에 있다. 말원(末院) : 고을 남쪽 8리에 있다.
수헐원(愁歇院) : 고을 서쪽 7리에 있다.
○ 고려 김지대(金之岱)의 시(詩)에, "꽃은 지고 새 울어 봄 졸음 무거운데, 연기 깊고 들 넓어 말 가기 더디어라.
푸른 산 만리에 옛날 노님 멀어졌는데, 긴 피리 한 곡조 어디서 부는가." 했다.
홍경원(弘慶院)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 고려 현종(顯宗)은, 이곳이 갈래길의 요충(要衝)인 데다가 사람 사는 곳이 멀리 떨어져 있고, 무성한 갈대숲이
들판에 가득해서 행인이 자주 약탈하는 강도(强盜)를 만나기 때문에, 중 형긍(逈兢)에게 명하여 절을 세우게 하고,
병부 상서(兵部尙書) 강민첨(姜民瞻) 등이 일을 감독해서 병진년부터 신유년에 와서 집 2백여 칸을 세우고,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또 절 서쪽에 객관 도합 80칸을 세우고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
이라 하고, 양식을 쌓고 마초(馬草)를 저장해서 행인들에게 제공했다. 이에 비석을 세우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최충(崔冲)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도록 하였는데,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원(院)과 비석만 남아 있으므로 드디어 절
이름을 따서 홍경원(弘慶院)이라고 불렀다.
○ 이색(李穡)의 시에, "큰 들 넓고 넓어 손바닥처럼 평평한데, 뭇 산이 사면에 멀리 뾰족뾰족 푸르네.
중도에 푸른 기와 큰 길에 비치는데, 큰 비석 우뚝 서서 높다랗게 솟았네. 우는 새 바람 따라 위아래로 나는데,
말[馬] 가까이 잠자리들이 나는 것 보겠네. 평생에 멀리 놀아 안계(眼界)가 넓고, 운몽택(雲蒙澤) 가슴속이 시원히
트였네. 학야(鶴野)로부터 달리는 말을 몰았고, 동산(東山)에 올라 노(魯) 나라를 작게 여겨 공자(孔子)의 상달(上
達)을 배웠네. 고향으로 돌아올지로다. 살 만한 남은 땅 있으니, 어찌 이불 가지고 들어가며 종알종알하리.
나는 구름 갑자기 오니, 빗방울 가는데[微], 평택(平澤)에 한 점 저녁 햇빛 비치네. 내 말 왕자성(王字城) 앞을
달리니, 맑은 바람 솔솔 손의 옷에 부네. 흥이 일어 글 읊으며 억지로 꿰맞추니, 다른 날 남의 비방 듣는 것 근심
하지 않네."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詩)에, "말[馬]을 홍경사(弘慶寺)에 쉬게 하고, 다시 옛 비문을 읽네. 글자가 지워진 것은 들
중이 때린 것이요, 이끼가 남은 것은 봄에 들 불탄 흔적일세. 현산(峴山)에는 장차 떨어지는 해요, 진령(秦嶺)에는
정히 뜬구름일세. 현묘(顯廟)께서 효도를 극진히 하여 규모를 후손들에게 남겨 주었네." 하였다.
신증 신원(新院) :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교량 아주천교(牙州川橋)ㆍ대천교(大川橋).
불우 구암사(龜菴寺)ㆍ만일사(萬日寺)ㆍ신암사(新菴寺) : 모두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미라사(彌羅寺) : 양전산(良田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鄕校)에 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 고을 동북쪽 3리에 있다. 우리 세조(世祖) 11년에 비로소 세웠고, 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祝)
을 내려서 제사 지내게 했다.
성황사 : 고을 서쪽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위례성 : 성거산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6백 90척이요, 높이가 8척이며, 성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지금은 반쯤 무너져 있다. ○ 온조왕(溫祚王)은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동명왕이 훙(薨)하자 온조왕은 그 형 비류왕(沸流王)과 함께 유리왕(琉璃王)을 피해서 한수(漢水)를 건너 남쪽
으로 와서, 비류왕은 미추홀(彌雛忽)에 도읍하고, 온조왕은 위례성에 도읍했다. 온조왕은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로 보좌를 삼아 처음에 십제(十濟)라고 일컬었으니,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었다. 뒤에 자기가 여기 올 적에 백성들이 즐겨 추종하였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천흥사(天興寺) : 성거산(聖居山)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당 나라 때 세운 구리로 만든 기둥만 있다.
경양폐현(慶陽廢縣) : 고을 서쪽 44리에 있다. 본래 고려의 하양창(河陽倉)인데,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영(令)을 두고 염장관(鹽場官)을 겸임했으며, 본조 태조 5년에 와서 직산에 예속시켰다.
구실향(救實鄕) : 고을 동남쪽 13리에 있다. 사산성(蛇山城) :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48척이요, 높이가
13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명환 본조 이영구(李英耈) : 맑고 근신해서 정사를 잘
한다는 이름이 있었다.
인물 신라 심나(沈那) :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백제와 싸울 때, 가는 곳마다 부서지지 않는 진(陣)이 없으니,
백제 사람들이 비장(飛將)이라고 일렀다.
소나(素那) : 심나(沈那)의 아들. 웅걸(雄傑)하여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일찍이 아달성(阿達城)을 지킬 적에 말갈
(靺鞨)이 비밀리 군사를 몰아 갑자기 쳐들어와서 늙은이와 어린이를 노략질하니 소나가 칼을 빼들고 크게 외치기를,
"너희는 신라(新羅)에 심나(沈那)의 아들 소나가 있다는 걸 아느냐. 싸우고 싶은 자는 어서 오너라." 하고,
드디어 힘껏 쳐서 적을 무찌르니, 적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다만 소나를 향해서 활을 솔 뿐이었다. 진시(辰時)
부터 유시(酉時)까지 화살이 소나의 몸에 마치 고슴도치처럼 모여 드디어는 죽고 말았다.
그 아내가 울면서 말하기를, "죽은 사람이 항상 말하기를, '대장부가 마땅히 나라 일에 죽어야 하니 어찌 침상 위에
누워서 부인의 손에 죽는단 말이냐.' 하더니 이제 죽은 것은 그 뜻이로다." 했다. 임금이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
기를, "소나(素那)의 부자는 참으로 대대로 충의(忠義)를 이었도다." 하고, 잡손(帀飡)으로 추증하였다.
고려 백문보(白文寶) : 자는 화보(和父)로, 호는 담암(淡庵)인데, 성격이 청렴하고 개끗하며 정직했다. 공민왕(恭愍王)
초년에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을 때, 십과(十科)를 설치해서 선비를 뽑아 쓰자고 청하였다. 신우(辛禑)가 대군
(大君)이 되자 임금이 문보(文寶)를 스승으로 삼았다.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직산군(稷山君)을 봉했
으며,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한다.
효자 본조 봉유지(奉由智) : 효행(孝行)으로 정문(旌門)을 내렸으며, 벼슬이 지군사(知郡事)에 이르렀다.
제영 할계언시희(割鷄言是戲) : 성석린(成石璘)의 시(詩)에, "직산(稷山)이 비록 조그만 고을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나의 인덕(仁德)을 시험해 볼 만하네. 사랑하고 돌보는 것은 불쌍한 외로운 이부터 시작하고, 세(稅)를 받는 데는
부자인지 가난한지를 묻는다. 닭을 잡는다는 것은 희롱의 말이요, 송아지 머물러 둔다는 말 지킬 만하네.
어려서 배운 것, 마침내 어디다 쓰리, 모름지기 혜택을 백성에게 미치게 함이로세." 하였다.
아조고허유(鴉噪古墟幽) : 안숭선(安崇善)의 시에, "소나무 소리 깊은 동산이 고요하고, 가마귀 울어대니 옛터
그윽하도다." 하였다.
[비고]
연혁 본래 백제의 사산(蛇山)이었다.
방면 동변(東邊) : 끝이 5리. 서변(西邊) : 끝이 5리. 일동(一東) :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이동(二東)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삼동(三東) :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일남(一南) :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이남(二南) :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일서(一西) : 서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이서(二西) :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삼서(三西) :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일북(一北) :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이북(二北) :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경양(慶陽) : 처음은 40리, 끝은 45리.
언리(堰里) : 서북쪽으로 처음은 35리, 끝은 45리.
외야곶(外也串) : 수원(水原) 서남쪽 경계에 넘어가 있는데, 진의 북서쪽은 바다와 접해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해창(海倉) : 경양면(慶陽面)에 있다.
교량 아교(牙橋) : 북쪽으로 27리에 있는데, 진위(振威)의 큰길로 통한다.
맹간교(盲看橋) : 아교의 서쪽에 있는데, 평택(平澤)과 통한다.
토산 게.
목천현 木川縣
동쪽은 청주(淸州)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쪽은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19리이며, 서쪽은 천안군(天安郡) 경계
까지 17리이다. 남쪽은 전의현(全義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에서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는 목주(木州)로 고쳐서
청주에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2년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감
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대목악(大木岳)ㆍ대록(大麓)ㆍ목주(木州)ㆍ신정(新定).
성씨 본현 우(牛)ㆍ마(馬)ㆍ상(象)ㆍ돈(豚)ㆍ장(場)ㆍ심(沈)ㆍ신(申)ㆍ왕(王) : 세상에 전하는 말에,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운 뒤에 목주 사람이 여러 번 배반한 것을 미워하여 그 고을 사람들에게 모두 짐승 이름으로 성(性)을
내렸다. 뒤에 우(牛)는 우(于)로 고치고, 상(象)은 상(尙)으로 고치고, 돈(豚)은 돈(頓)으로 고치고 장(場)은 장(張)
으로 고쳤다." 한다.
산천 작성산(鵲城山) : 고을 동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 흑성산(黑城山) : 고을 서쪽 11리에 있다.
추암산(鷲巖山) : 고을 서쪽 12리에 있다. 용혈(龍穴)이 있는데, 비를 비는 곳이다.
세성산(細城山) : 고을 남쪽 8리에 있다. 성거산(聖居山) : 고을 서북쪽 14리에 있으니, 직산현 조에 자세하다.
길상산(吉祥山)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또 진천현조(鎭川縣條)에 보였다.
산방천(山方川) : 고을 동쪽 20보(步)에 있다. 근원은 고을 북쪽 산방동(山方洞)에서 나와서 청주 진목탄(眞木灘)
으로 흘러 들어갔다.
토산 철(鐵) : 산방천에서 생산된다. 자기(磁器)ㆍ꿀[蜂蜜]ㆍ대추[棗]ㆍ자초(紫草)ㆍ안식향(安息香).
누정 동작루(東作樓) : 선덕(宣德) 갑인년에 세웠다.
○ 유사눌(柳思訥)이 이름을 짓고 기문을 지었다. 신증 관찰사(觀察使) 정미수(鄭眉壽)가 소심(小心)이라고 이름을
고쳤고, 최보(崔溥)가 기문을 지었다.
학교 향교(鄕校) : 고을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연춘역(延春驛) :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탑원(塔院) : 고을 동쪽 23리에 있다.
황신원(黃信院)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신원(新院)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혹 남원(南院)이라고도 한다.
정항원(井項院) : 고을 서쪽 14리에 있다. 말원(末院)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신증 불지방원(佛地方院) : 고을 동쪽 35리에 있다.
교량 장명교(長命橋) : 산방천(山方川)에 있다.
불우 전곡사(轉谷寺)ㆍ보문사(普門寺) : 모두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은석사(恩石寺) : 작성산(鵲城山)에 있다. 승천사(勝天寺) : 흑성산(黑城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여단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흑성산성(黑城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2백 90척이고 높이가 6척이며 가운데 못이 하나 있는데, 가물
때는 비를 빈다.
인물 고려 우학유(于學儒) : 활달하여 기개가 있었다. 의종(毅宗)과 명종(明宗) 양대에 왕궁을 숙위(宿衛)해서 충성
되고 근신하였다. 이고(李高) 등이 난을 일으킬 적에 우학유와 함께 모의하고자 하니 우 학유가 말하기를, "공의 뜻은
크도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가 항상 나를 경계해서 말하기를, '무관이 문관에게 굽혀 지내고 있으니, 이 일이 어찌
분하지 않느냐. 그것들을 없애기란 썩은 가지 꺾기보다도 쉬운 일이지만 문관이 해를 당하면 역시 발길을 돌리기 전
에 화가 우리들에게 미칠 것이니 또한 너는 마땅히 삼가라.' 하였는데, 우리 아버지는 비록 돌아갔어도 그 말이 아직
도 귀에 있는지라, 죽어도 따르지 않겠노라." 했다. 벼슬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이르렀다.
신증 효자 본조 서만(徐萬) : 아버지를 효성스럽게 섬겨 초하루 보름에는 반드시 술과 반찬을 갖추어 바쳤다.
아버지가 겨울에 병이 들어 생선을 먹고자 하므로서 서만은 얼음을 두드리면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니,
물고기 네 마리가 뛰어 나와서 갖다가 바쳤다. 아버지가 죽자 3년 동안 여묘하면서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성종(成宗) 11년에 상으로 벼슬을 주었다.
제영 위린산수차중기(爲憐山水此中奇) : 권진(權軫)의 시(詩)에,"나그네 길 봄바람에 말 발굽 더디니, 이 가운데
산수가 기이한 것 어여뻐라. 나무 그늘 땅에 가득하고 뜰은 고요한데, 달이 배꽃 위에 올라오니 저절로 시가 되네."
하였다.
사면산여화(四面山如畫) : 유계문(柳季聞)의 시에, "사방으로 둘린 산 마치 그림과 같은데, 천년 동안 이 땅이 스스로
기이하네." 하였다.
흑산막막운차사(黑山漠漠雲遮寺)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서원(西原 청주(淸州)) 잔치 파할 때 아직도 이른 아침
이러니 목성(木城)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멀고 머네. 흑산이 아득한데 구름은 절을 막았고, 푸른 들판 넓고 넓은데
물이 다리[橋]를 치네, 늙어 가니 자못 벼슬 재미 적은 것 알겠고, 술 깨서 나그네의 혼이 녹아나네. 늦게 공관(公館)
에 들어가니 거처가 고요한데, 떨어지는 버들개지와 나는 꽃 함께 적막하네." 하였다.
[비고]
방면 읍내 끝이 10리. 근동(近東)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일원(一遠)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이원(二遠)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
남면(南面) :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북면(北面) : 처음은 5리, 끝은 30리. 서면(西面) : 처음은 7리, 끝은 20리.
세성(細城)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성지 작성(鵲城)ㆍ세성(細城) : 모두 옛터가 있다.
토산 감ㆍ은구어(銀口魚).
사원 도동서원(道東書院) : 인조(仁祖) 기축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주자(朱子) : 문묘에 보인다.
정술(鄭述) : 충주(忠州)에 보인다.
김일손(金馹孫) :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본관은 김해(金海), 연산군 무오(戊午)년에 화를 입었다. 벼슬은
헌납(獻納),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황종해(黃宗海) : 자는 대진(大進) 호는 후천(朽淺), 본관은 회덕(懷德) 벼슬은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이다.
회인현 懷仁縣
동쪽으로는 보은현(報恩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남쪽으로는 청주(淸州) 경계까지 32리이며, 서쪽으로는 문의현
(文義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북쪽으로는 청주 경계까지 2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미곡현(未谷縣)인데, 신라 때 매곡(昧谷)으로 고쳐서 연산군(燕山君)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때 청주(淸州)에 부쳤다가 뒤에 회덕(懷德)의 겸임관(兼任官)으로
삼았다. 신우(辛禑) 때에 따로 감무를 두었다가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미곡(未谷)ㆍ매곡(昧谷).
성씨 본현 이(李)ㆍ홍(洪)ㆍ장(張)ㆍ신(辛)ㆍ최(崔) : 속(續)
형승 중강복령로요양장(重岡複嶺路繞羊?) : 이승소(李承召)의 시(詩)에, "거듭된 멧부리와 겹겹의 고개 멀리 서로
이어있고, 길은 양(羊)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하니 말[馬]이 나아가지 못하네." 하였다.
산천 하마산(何?山) : 고을 서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호첨산(虎岾山) : 고을 남쪽 9리에 있다.
보리산(甫里山)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구룡산(九龍山) : 고을 서북쪽 25리에 있다.
마산(馬山) : 고을 서북쪽 10리에 있다.
피반대령(皮盤大嶺)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고갯길이 아홉 번 꺾이어 가장 높고 위험한 곳이다.
차의현(車衣峴) : 고을 동쪽 12리에 있다. 목감산(牧監山) :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노성산(老城山)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매곡산(昧谷山)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묵현(墨峴) : 고을 서쪽 13리에 있다. 말흘탄(末訖灘) : 고을 남쪽 19리에 있으니 바로 화인진(化仁津) 하류이다.
웅암천(熊巖川) : 고을 남쪽 1리에 있다. 근원이 구룡산에서 나와서 말흘탄(末訖灘)으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수철(水鐵) : 노성산(老城山)에서 생산된다. 수정석(水精石) : 고을 북쪽 마산(馬山)에서 난다. 봉밀(蜂蜜)ㆍ
잣[海松子]ㆍ자초(紫草)ㆍ복령(茯?)ㆍ지황(地黃)ㆍ안식향(安息香).
학교 향교 :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원우 예대원(禮大院) : 고을 동쪽 10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공대원(孔大院)이라 하였다.
신원(新院) : 고을 북쪽 25리에 있다. 탑원(塔院) : 고을 북쪽 5리에 있다.
불우 웅암사(熊巖寺) : 구룡산에 있다. 묘암사(妙巖寺) : 목감산(牧監山)에 있다. 마전사(麻田寺) : 노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매곡산(昧谷山)에 있으니, 봄ㆍ가을로 본관(本官)에서 제사지낸다. 여단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호점산성(虎岾山城) :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5천 1백 48척이고 높이가 8척이며, 안에 우물 세 개가 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매곡산성(昧谷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백 52척이요, 높이가 8척이다.
인물 고려 공직(?直) : 용맹과 지략이 있었다. 신라 말년에 본읍(本邑) 장군이 되어 드디어 견훤(甄萱)을 섬기다가
견훤이 무도한 것을 보고 그 아들 영서(英舒)와 함께 태조(太祖)에게 와서 있었다. 태조가 대상(大相)을 제수하고
벼슬이 좌승(左丞)에 이르렀으며, 시호를 봉의(奉義)라 했다.
공직달(?直達) : 공직의 아들이다. 아우 금서(金舒)와 함께 후백제에 볼모로 잡혀 갔는데, 공직이 태조에게 투항하자
견훤이 죽였다.
본조 홍윤성(洪允成) : 젊어서 불평객으로 행동이 구속 받지 않았다. 문종조(文宗朝)에 과거에 올랐고, 세조(世祖)를
도와 정난좌익 공신(靖難佐翼功臣)이 되었으며,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에 봉했으며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
렀다. 시호는 위평(威平)이다.
효자 본조 이우(李祐) : 효행이 있어 정문(旌門)을 내렸다.
제영 모령유운기(暮嶺流雲氣) : 고려 조운흘(趙云?)의 시에, "저문 고개에 구름 기운 흐르고 새벽 처마에 빗소리
이어지네." 하였다.
현고괴근노(縣古槐根老) : 조운흘의 시에, "고을이 오래되어 느티나무 뿌리 늙었고, 뜰이 비었으니 풀빛만 깊었어라."
하였다.
만고음추장괴물(萬古陰湫藏怪物) : 이승소(李承召)의 시(詩)에, "만고의 음침한 못에 괴물을 감추었고, 백년 쇠잔한
성엔 거친 연기 잠겨 있네." 하였다. 영두신우소제반(嶺頭神宇少?攀) : 이승소의 시에, "작은 고을 깊숙한데 토지는
넓직하니, 고을 집[邑齋] 깨끗하게 시냇가에 서 있네. 남쪽 추녀에 한낮이 되니 따뜻한 기운 조금 생기고, 그늘진
구렁에 봄이 깊은데 아직도 찬 기운 있네. 두메 산골 백성들의 풍속 검소하며 인색하고, 고개 마루 사당에 올라오는
이 적네. 돌밭엔 해마다 서리조차 일찍 찾아와, 조세(租稅) 바치기가 간(肝)을 베어내는 듯."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ㆍ현내 : 끝이 5리, 동면(東面) : 처음은 3리, 끝은 15리. 남면(南面) : 처음은 5리, 끝은 15리.
서면(西面) : 처음은 10리, 끝은 10리. 북면(北面)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강외(江外) : 서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토산 : 감ㆍ대추.
청안현 淸安縣
동쪽은 청주 경계까지 30리이고, 남쪽은 청주 경계까지 12리이고, 서쪽은 청주 경계까지 22리이며,
북쪽은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9리이고, 또 음성현(陰城縣) 경계까지 19리에 이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3리
이다.
건치연혁 청당현(淸塘縣)이요, 또 한 가지 이름은 청연(淸淵)이다. 고려 초년에 청주에 소속시켰고 뒤에 감무를
두어 도안(道安)을 겸임하게 하였다. 도안현(道安縣)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도서현(道西縣)인데, 신라 때 도서
(都西)로 고쳐서 흑양군(黑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년에 도안(道安)으로 고쳐서 현종(顯宗) 9년에
청주에 소속시켰으며 본조 태종 5년 두 고을이 백성이 적고 땅이 좁다 해서 합치고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감무를
두었다가 13년에 전례에 의하여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청당(靑塘)ㆍ청연(淸淵)ㆍ도서(道西)ㆍ도서(都西)ㆍ도안(道安).
성씨 청당(靑塘) 한(韓)ㆍ신(申)ㆍ갈(葛)ㆍ신(辛)ㆍ박(朴)ㆍ이(李)ㆍ김(金) : 모두 속(續).
도안(道安) 함(咸)ㆍ최(崔)ㆍ백(白)ㆍ이(李)ㆍ신(申)ㆍ차(車) : 속(續). 난곡(薍谷) 신(辛). 염곡(念谷) 신(申)ㆍ신(辛).
풍속 검소하고 인색한 것을 숭상한다 : 《지지(地志)》
산천 두타산(頭陀山) :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또 진천현조(鎭川縣條)에 보인다.
좌구산(坐龜山)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칠보산(七寶山) :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추성산(杻城山)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송현(松峴) :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사현(蛇峴)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초현(椒峴)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구자은현(仇自隱峴) :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반탄천(磻灘川) : 고을 서쪽 27리에 있다. 그 근원이 셋이 있는데, 하나는 진천현(鎭川縣) 북쪽에서 나왔고, 하나는
음성현(陰城縣) 박이현(朴伊峴)에서 나왔으며, 하나는 좌구산에서 나와서, 청주 오근진(吳根津)으로 들어간다.
토산 백옥(白玉) : 고을 동쪽 사산리(蛇山里)에서 생산된다. 꿀[蜂蜜]ㆍ자초(紫草)ㆍ인삼(人蔘)ㆍ지황(地黃)ㆍ
복령(茯苓).
학교 향교(鄕校)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시화역(時和驛) : 고을 서쪽 17리에 있다. 백모로원(白毛老院) : 고을 북쪽 18리에 있다.
수정천원(水精遷院) :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장후원(長候院)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불우 구석사(龜石寺) : 좌구산(坐龜山)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이 고을을 세웠을 적에 이산(離山)이 높은
것을 꺼려서 이 절을 세우고 수족(水族)의 신(神)인 거북의 이름을 따서 구석(龜石)이라고 했는데, 이에 대한 조회
(曺繪)의 기문이 있다.
장갑사(長岬寺) : 좌구산에 있다. 연천사(連天寺) : 추성산(杻城山)에 있다. 수암사(水菴寺) : 칠보산(七寶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 :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여단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고도안(古道安)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정안부곡(靜安部曲) : 도안현(道安縣)에 있다. 곡은곡소(谷銀谷所)ㆍ염곡소(念谷所)ㆍ유통소(游筒所) : 모두 청당현
(靑塘縣)에 있다. 난곡소(薍谷所) : 고을 동쪽 12리에 있다.
제영 석전교각인연소(石田磽确人煙少)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청안(淸安) 땅 다달으니 날이 저무는데, 관청이
쓸쓸하기 절간과 비슷하네. 돌밭 메말라 사람 사는 집 적고, 모점(茅店) 집 거친데 풀과 나무가 많네." 하였다.
경요망산복(逕繞荒山腹) : 신개(申槩)의 시에, "길은 거친 산허리에 둘러 있고, 마을은 푸른 시내 머리에 이어 있네."
하였다. 수영입상두(樹影入牀頭) : 이익박(李益朴)의 시(詩)에, "연꽃 향기는 난간 귀퉁이에 들어오고, 나무 그림자
는 침상 머리에 들어오네." 하였다.
팔경(八景) 용문송객(龍門送客) : 고려 진의귀(陳義貴)의 사(詞)에, "들이 넓은데 산은 그림과 같고, 냇물 평평한데
풀은 자리와 같네. 바가지 술잔 나무 찬합으로 아름다운 손님을 보내니, 이별하는 술 그대여 자주 사양치 마소.
양관(陽關) 곡조 구슬프기도 하니, 말로(末路) 티끌 세상에 미끄러졌네. 떠나려는데 옷깃 잡아 다시 머뭇거리니,
슬픈 눈물 금할 길 없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詩)에, "수레와 말 시끄러이 물가에 모였는데, 양관(陽關) 한 곡조 새 글귀로 바꾸었네.
가련하다, 물가의 가는 버들 긴 가지 낮게 늘어져 이별을 주관하네." 하였다.
귀석심승(龜石尋僧) : 진의귀(陳義貴)의 사(詞)에, "옛 절은 적막한데, 층층 마루 푸른 산을 대하고 있네. 숲을 뚫은
돌길이 연기 속에 들어 가는데, 낮이 고요하니 이끼 낀 문 닫쳐 있네. 벽 향해 앉았으니 중의 입정(入定)을 알겠고,
둥우리 찾는 학(鶴) 돌아가는 것 보겠네. 선탑(禪榻)에 해 기울도록 앉아서 세속 생각 잊으니, 산기운 푸르게 짙어
옷 적시려하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詩)에, "돌길 구불구불 많은 소나무 속으로 들어 갔는데, 짚신 신고 멋대로 게으르게 지팡이
붙드네. 숲 밖 저만큼 절 있는 것 알겠는데, 한 절구[杵] 찧고 나니 저녁 종소리 들리네." 하였다.
난곡목마(薍谷牧馬) : 진의귀(陳義貴)의 사(詞)에, "끊어진 강 언덕에 부들잎 푸르르고, 칭칭한 산마루에 철쭉꽃
붉었네. 좋은 철에 푸른 시내 동쪽에 말을 먹이니, 비 지나가자 풀빛이 하늘에 이어졌네. 세상 밖에 노는 것 자랑
스럽고, 술잔 앞에는 별다른 음식 겹쳐 있네. 술 취해 길게 휘파람 부니 흥이 끝없어, 꽃 날리는 바람에 모자가
비스듬하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시내와 산 곳곳에 꽃다운 티끌로 어두운데, 말을 놓아 한가로이 풀 우거진 봄을 찾네.
동쪽 언덕 지나 다시 서쪽 들로 접어드니, 좋은 경치 뜻이 생기 있어 기쁨이 넘쳐 흐르네." 하였다.
반계포어(磻溪捕魚) : 진의귀(陳義貴)의 사(詞)에, "물이 넓으니 물고기 거품을 불고, 바람 가벼운데 제비는 물결을
스치네. 흐름을 가로 질러 그물 드니 문득 수레에 가득하여, 큰 놈 잡았다고 저마다 자랑하네. 잘게 회쳐서 자주
술잔 들고, 생선 삶는 것 솥에 가득하네. 모래 위에서 종일토록 한없이 마시니, 제멋대로 모자가 비스듬하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詩)에, "반계(磻溪) 물이 따뜻해 쏘가리 살쪘는데, 언덕의 초가집엔 대사립문 닫혀 있네. 서리 비늘
같은 생선 잡고 좋은 술 사오니, 석양에 사람 소리 기석(磯石)에 가득하네." 하였다.
추성백우(杻城白雨) : 진의귀(陳義貴)의 사(詞)에, "뭇 산은 평야(平野)를 둘러 있고, 외로운 성산 머리에 의지했네.
바람이 비를 불어 연기같이 흩어지니, 산기운이 함께 유연(悠然)하네. 무지개 끊어진 곳 어디메인가. 갈가마귀 깃들
이니 해 저물려 할 때로세. 한가한 사람 발 걷고 난간에 의지해 있으니, 가을 물이 앞 내에 가득하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천둥 소리 은은히 구름 속에 싸였으니, 첩첩한 산 비 기운에 어enq네. 문득 부슬부슬 눈을 막고
지나가니 금방 평지에 앞 마을 잃어 버렸네." 하였다. 초령청운(椒嶺晴雲) : 진의귀(陳義貴)의 시에, "첩첩한 산들
은하수를 찌른 듯, 한가한 구름 푸른 봉우리에 끌리네. 솜 같고 눈 같아 온 숲 잠겼으니, 고을이 다시 깊고 깊었어라.
학이 날아가니 부질없이 옛일 생각나고, 원숭이 우니 지금 감회 새로워라. 지팡이 짚고 글 읊어 생각을 금치 못하
는데, 돌아다 보니 해는 장차 저물려 하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수레바퀴와 같고 일산 같고 또 솜과 같아서, 퍼졌다 걷히었다 무심히 자연에 맡기네.
바람 타고 부질없이 산을 가리웠다 말하지 마소. 마침내 비가 되어 하늘에 가득하리." 하였다.
청하계음(淸河禊飮) : 진의귀의 사(詞)에, "버들은 어두워 봄빛 감추었고, 소나무 성기니 빗소리 나는 듯. 산이 깊
으니 대낮에도 자규(子規)가 우는데, 아름다운 절기는 청명(淸明)이네. 물은 띄운 술잔 보내기 급하고, 바람은
춤추는 소매를 불어 가벼워라. 꽃가지 가득 꽂으매 모자가 기우는데, 취한 몸 이끌고 그림 속을 거니네." 하였다.
○ 강희맹의 시에, "청하(淸河)에 봄이 따뜻한데 봄 옷 입고 나서니, 방초(芳草) 가벼운 연기 바로 3월 3일일세.
시내와 산을 향해 지나간 일 물으려니, 회계(會稽)에서 술 마시며 읊던 일 청담(淸談)에 들어오네." 하였다.
황사한음(●舍閑吟) : 진의귀(陳義貴)의 사(詞)에, "산 고을에 아름다운 손을 끌고, 황려(●廬)에 가서 소왕(素王)을
찾았네. 비연(斐然 찬란한 모양)하고 광간(狂簡)하여 문장을 이뤘으니, 서로 읍하고, 함께 당(堂)에 오르네.
뒷고개에는 소나무 푸르르고, 앞 못엔 연꽃 향기로워, 글을 의논하고 앉았노라니 해는 더욱 긴데, 맑은 흥취 호연
(浩然)해서 헤아릴 수 없네." 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강당(講堂) 깊은 곳 옛 경서를 대하니, 공자(孔子)가 일월(日月)처럼 밝음이 상상되네.
은행나무 뜰에 가득히 붉은 잎 반쯤 떨어졌는데, 좋은 바람 때때로 글 읽는 소리 불어 보내네."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고읍 도안(道安) : 서쪽으로 15리에 있는데 본래 신라(新羅)의 도서(道西)였다. 도익(都益)이라고도 하는데 경덕왕
(景德王) 16년에 도서라 고치고, 흑양군(黑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 23년에 도안(道安)이라
고쳤고, 현종 9년에는 청주(淸州)에 예속시켰다가 본조 태조 5년에 청당(淸塘)에 합병시켰다.
방면 읍내 : 끝이 5리. 동면(東面) 처음은 7리, 끝은 35리. 근남(近南) : 처음은 5리, 끝은 10리.
북면(北面) : 처음은 5리, 끝은 20리. 근서(近西) : 끝이 10리. 원서(遠西) : 처음은 10리, 끝은 25리.
○ 정안부곡(靜安部曲)은 도안에 있는데 난곡소(薍谷所)에서 동쪽으로 12리다.
유통소(遊茼所)ㆍ염곡소(念谷所)ㆍ은곡소(銀谷所)는 모두 청당에 있다.
토산 철ㆍ대추ㆍ은구어.
진천현 鎭川縣
동쪽은 충주(忠州) 경계까지 27리이고, 남쪽은 청주 경계까지 28리이며, 서쪽은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38리이고,
북쪽은 경기도(京畿道) 죽산현(竹山縣) 경계까지 3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금물노군(今勿奴郡) : 다른 이름은 만노군(萬弩郡)이요, 혹은 수지(首知), 또는
신지(新知)라고도 한다. 신라(新羅) 때에 흑양군(黑壤郡) : 흑(黑)은 혹 황(黃)이라고도 함. 이라 고쳤다.
고려 때 처음에는 강주(降州)라고 일컬었다가 뒤에 진주(鎭州)로 고쳤으며, 성종(成宗)이 자사(刺史)를 두었는데
목종(穆宗)이 폐지했다. 현종(顯宗)이 청주(淸州)에 소속시켰더니 고종(高宗)은 임연(林衍)의 고향이라 해서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시키고 현령(縣令)을 두었었다.
원종(元宗)이 또 임연 때문에 지의녕군사(知義寧郡事)로 승격시켰더니 임연이 주벌을 당하자 낮추어서 진주 감무
(鎭州監務)를 삼았고,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현감(縣監)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경기도(京畿道)로 이속시켰더니 금상(今上) 초년에 복구했다.
군명 금물노(今勿奴)ㆍ만노(萬弩)ㆍ수지(首知)ㆍ신지(新知)ㆍ흑양(黑壤)ㆍ황양(黃壤)ㆍ강주(降州)ㆍ진주(鎭州)ㆍ
창의(彰義)ㆍ의녕(義寧)ㆍ상산(常山).
성씨 본현 한(韓)ㆍ임(林)ㆍ송(宋)ㆍ심(沈)ㆍ유(庾)ㆍ며(㫆)ㆍ고(高)ㆍ양(梁)ㆍ하(河)ㆍ장(張).
산천 두타산(頭陁山) : 고을 동쪽 21리에 있다. 보련산(寶連山) :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성산(城山) : 고을 서남쪽 7리에 있다.
길상산(吉祥山) : 또 하나의 이름은 태령산(胎靈山)이다.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니, 보련산과 서로 연했다.
○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에 만노군 태수(萬弩郡 太守) 김서현(金舒玄)의 아내 만명(萬明)이 임신한지 20개월 만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유신(庾信)이다. 태(胎)를 이 산에 묻어 두었기 때문에 길상(吉祥)이라고 이름했다.
심곡산(深谷山) :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 대문령(大門嶺) : 고을 서쪽 35리에 있으니 이곳이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경계다. 협탄령(脇呑嶺) : 고을 서쪽 협탄소(脇呑所)에 있으니, 직산현(稷山縣) 경계이다.
주천(注川) : 고을 동쪽 10리에 있으니, 청안현(淸安縣) 반탄(磻灘)으로 들어간다.
우천(牛川) : 고을 북쪽 4리에 있으니 주천(注川)으로 들어간다.
토산 꿀[蜜蜂]ㆍ자초(紫草)ㆍ인삼(人蔘)ㆍ사향(麝香)ㆍ영양(羚羊)ㆍ백화사(白花蛇).
봉수 소을산 봉수(所乙山烽燧) : 고을 남쪽 7리에 있으니, 남쪽으로는 청주(淸州) 거차대산(巨次大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충주(忠州) 망이산(望夷山)에 호응한다.
누정 연정(蓮亭) : 고을 남쪽에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연꽃 사면에서 매우 맑은데, 조그만 누각 가운데 있어 그림자 비추네." 하였다.
관풍루(觀風樓)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 현감(縣監) 이식(李埴)이 세웠다.
학교 향교(鄕校) :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장양역(長陽驛) : 고을 북쪽 22리에 있다. 태랑역(台郞驛) : 고을 남쪽 14리에 있다. 옛 이름은 퇴량(堆糧)인데,
그 터는 지금 역(驛) 남쪽 8리에 있다. 시태원(時泰院) : 고을 안에 있다. 영제원(永濟院) : 고을 동쪽 14리에 있다.
태랑원(台郞院) : 태랑역(台郞驛) 곁에 있다. 광혜원(廣惠院) : 고을 북쪽 38리에 있는데 죽산현(竹山縣) 경계이다.
원(院) 곁에 정자가 있으니 이는 충청도의 신구관찰사(新舊觀察使)가 인장을 교대하던 곳이다.
협탄원(脇呑院) : 고을 서쪽 34리에 있다.
불우 길상사(吉祥寺)ㆍ보적사(寶寂寺)ㆍ선적사(先寂寺)ㆍ편각사(片角寺) : 모두 태령산(胎靈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성산(城山)에 있다.
김유신사(金庾信祠) : 길상산(吉詳山)에 있다. 신라 때에 사우(詞宇)를 세우고 봄ㆍ가을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 고려에서도 그대로 시행하다가 본조(本祖) 태조(太祖) 8년에 이르러 비로소 중지시키고 본 고을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금천향(金泉鄕) : 고을 북쪽 39리에 있다. 천(泉)은 세속에서는 진(眞)으로 부른다.
향림부곡(香林部曲) : 고을 부곡 23리에 있다. 협탄소(脇呑所) : 고을 서쪽 36리에 있다. 신지(新池) 고을 동쪽 10리
에 있으니 도우천(導牛川)이 흘러 들어가고 그 가운데 세 섬이 있다.
도당산성(都堂山城) : 고을 서쪽 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8백 36척이다. 안에 우물 둘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흘산성(伊訖山城) : 고을 서쪽 2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9백 80척이요,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대모산성(大母山城) :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2천 6백 70척이요,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명환 신라 김서현(金舒玄).
인물 고려 임희(林曦) : 흥화군(興化君)에 봉했다. 혜종(惠宗)의 의화왕후(義和王后)의 아버지이다.
송언기(宋彦琦) : 젊어서부터 문장에 능했다. 고종(高宗) 때 과거에 뽑혀 일찍이 몽고(蒙古)에 강화(講和)하는 사신
으로 네 번이나 가서 변방이 조금 안정되었다. 벼슬이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에 이르렀다. 임금이 다시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려 했더니 마침 송언기가 병이 들자 재상이 말하기를, "송언기가 태어난 것은 국가의 복이요, 죽는
것은 국가의 걱정입니다." 하였다. 나이 43세로 죽었다.
송국첨(宋國瞻) : 성품이 강직하고 악한 것을 원수같이 미워하였다. 문장을 잘하고 과거에 뽑히자 사관(史관)에
들어갔다. 고종조(高宗朝) 때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냈고, 형부 상서(刑部尙書)와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냈다.
우거 본조 권도(權蹈).
효자 본조 최사흥(崔士興)ㆍ김덕숭(金德崇) : 모두 효자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했다.
신증 열녀 본조 말질비(末叱非) : 수군(水軍) 정효창(鄭孝昌)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6년 동안 복을 입어 처음과
같이 슬퍼하고, 먼저 찬을 갖추어 시어머니께 바친 뒤에 남편의 묘에 제사지냈다. 금상(今上) 14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제영 산세주조위고읍(山勢周遭圍古邑) : 이승소(李承召)의 시(詩)에, "홀로 책상에 기대어 잠에서 처음 깨니, 여기서
서울까지 가는데 단정(短亭) 몇인고. 산 형세 돌고 돌아 옛 고을 둘러싸고, 소나무 소리 우수수 성긴 창문에 통하네.
지금 곡식의 가격이 비싸 백성들 바야흐로 곤란한데 어느날 풍속 순후하여 밤에도 문 닫지 않을고. 국가의 은혜 갚지
못하고 부모 또한 늙었으니, 돌아갈 기약 아예 저버리지 말자." 하였다.
[비고]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남변(南邊) : 끝이 10리. 북변(北邊) : 끝이 70리.
덕립(德立) :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월촌(月村)ㆍ백곡(柏谷) : 모두 북쪽으로 끝이 20리.
이곡(梨谷) : 북쪽으로 끝이 25리. 만승(万升) : 서북쪽으로 끝이 40리. 재동(齋洞)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산정(山井) :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소답(所沓) : 동쪽으로 끝이 25리. 만평(万坪) : 동남쪽으로 끝이 30리.
문방(文方) : 남쪽으로 끝이 25리. 백락(白洛) : 남쪽으로 끝이 30리. 성암(聖巖) : 서남쪽으로 끝이 30리.
행정(杏亭) : 서쪽으로 끝이 30리. ○ 향림부곡(香林部曲)은 북쪽으로 23리, 협탄소(脇呑所)는 서북쪽으로 36리에
있다.
토산 은구어.
사원 백원서원(百源書院) : 선조 정유년에 세웠고 현종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이종학(李種學) : 개성(開城)조에 보임.
김덕숭(金德崇) : 자는 자유(子悠) 호는 모암(慕庵), 본관은 강릉(江陵), 벼슬은 한산(韓山) 군수, 이조 참의(吏曹參議)
에 추증되었다.
이여(李畬) : 자는 유추(有秋), 호는 송애(松崖)로 종학(種學)의 5대손이며, 벼슬은 교리(校理)이다.
이부(李阜) : 자는 자릉(子陵) 호는 행원(杏園),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벼슬은 교리였는데 부제학(副提學)에 추증
되었다. 지산서원(芝山書院) : 경종 임인년에 세웠고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최석정(崔錫鼎) : 태묘에 보인다.
보은현 報恩縣
동쪽으로 경상도 상주(尙州) 경계까지 44리에 이르렀고, 남쪽으로 옥천군(沃川郡) 경계까지 26리요, 청산현(靑山縣)
경계까지 25리에 이르렀고, 서쪽으로 회인현(懷仁縣) 경계까지 14리에 이르렀고, 북쪽으로 청주(淸州) 경계까지
28리에 이르렀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新羅)의 삼년산군(三年山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삼년(三年)이라고 고쳤으며, 고려 때에 보령
(保齡) : 령(齡)은 뒤에 영(令)으로 변해졌음. 으로 고쳐서 현종(顯宗) 9년에 상주(尙州)에 소속시켰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6년에 보령현(保寧縣)과 음(音)이 서로 비슷하다
해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감(縣監)을 삼았다. 13년에 경상도에서 본도로 예속되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삼년산(三年山)ㆍ보령(保齡)ㆍ삼산(三山)ㆍ보령(保令).
성씨 본현 김(金)ㆍ이(李)ㆍ손(孫)ㆍ박(朴)ㆍ최(崔)ㆍ송(宋)ㆍ한(韓) : 모두 왔음.
임언(林堰) 홍(洪)ㆍ석(石)ㆍ방(方) : 촌(村).
산천 속리산(俗離山) : 고을 동쪽 44리에 있다.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九峯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岳)이라고 일컽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마루에 문장대(文藏臺)가 있는데, 층이 쌓인
것이 천연으로 이루어져 높게 공중에 솟았고, 그 높이가 몇 길인지 알지 못한다.
그 넓이는 사람 3천 명이 앉을 만하고, 대(臺) 위에 구덩이가 가마솥 만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불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뉘어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錦江)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
다가 북으로 가서 달천(達川)이 되어 김천(金遷)으로 들어 갔다.
○ 산 아래에 8교(橋)와 9요(遙)의 이름이 있는데, 산 양쪽 언덕이 빙빙 둘러 넓어져서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다 보면
멀고 멀어서 마치 땅이 끝인 것처럼 의심스럽다가 거기까지 가서 바라보면 또 멀고 멀어서 이렇게 아홉 번 구불어
지다가 비로소 법주사(法住寺)에 닿기 때문에 이름을 9요(遙)라고 한다.
9요 속에 물 한 줄기가 돌고 돌아 굽이쳐 꺾기는데, 한 굽이마다 다리가 있어 그 다리가 도합 여덟이기 때문에 이름
하여 팔교(八橋)라고 했다. 맨 첫다리는 수정교(水精橋)이니, 다리 위에 비각(飛閣)이 있어 사람들이 이 각(閣) 속
으로 다녔는데, 지금은 각은 무너지고 다리만 남아 있다.
중 신여(信如)가 다리 위에 시를 썼는데, "삼청동(三淸洞)에 아홉 겹 요(遙)가 있고, 한 줄기 시냇물에 여덟 다리가
있네. 다리 아래 물 맑은데 붉은 것이 푸른빛을 시기하니, 산에 가득한 단풍잎, 소나무 가지에 의지해 있네."
하였다.
함림산(含林山)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구봉산(九峯山) : 고을 동쪽 43리에 있다.
사산(蛇山)ㆍ와산(蛙山)ㆍ서산(鼠山) : 모두 고을 안에 있다. 금적산(金積山) : 고을 남쪽 25리에 있다.
검단산(儉丹山) : 고을 북쪽 37리에 있으니 청주(淸州) 경계이다. 백제의 중 검단(儉丹)이 살던 곳이므로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오정산(烏頂山) : 고을 동쪽 5리에 있다. 웅현(熊峴) : 고을 북쪽 27리에 있다.
차의현(車衣峴) :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니 회인현(懷仁縣)의 경계이다. 용천(龍川) :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병풍연(屛風淵) : 속리산(俗離山) 아래 있으니 고을 동쪽으로 거리가 25리이다.
토산 송심(松蕈)ㆍ수철(水鐵)ㆍ웅현(熊峴)과 차의현에서 생산됨. 꿀[蜂蜜]ㆍ잣[海松子]ㆍ영양(羚羊)ㆍ안식향
(安息香)ㆍ지황(地黃)ㆍ웅담(熊膽)ㆍ석심(石蕈).
누정 삼산루(三山樓)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원암역(元巖驛) :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복주(福州 안동을 말함)에서 청주(淸州)에
올 적에 이 역(驛)에서 머물렀다.
○ 이색(李穡)의 <칠로연집시서(七老讌集詩序)>에, "옛날 군자는 그 임금을 보좌하는데 있어서 그 의(義)를 다했기
때문에, 그 임금이 그를 예우(禮遇)하는 데 있어서도 지극히 풍성하였다.
예우를 풍성히 하는 것과 의를 극진히 함은 뜻이 같고 기운이 합하여 마치 구름이 용(龍)을 따르는 것과 같고,
물고기가 물에 있는 것과 같다. 늙음에 이르러서는 번갈아 쉬게 하고 번갈아 써서 백발(白髮)의 나이에 한가롭게
놀고 편안히 즐기게 하되, 그 벼슬 자리를 떠났다고 하여 하루라도 국가를 잊지 않고, 의논할 일이 있으면 물어서
결정짓고, 국가에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달려가니,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어찌 이렇게도 사이가 좋았던가.
나는 원암(元巖) 여러 늙은이들의 연집서(讌集序)를 씀에 있어서 세 번 탄식하노라.
임금이 남쪽으로 거둥했을 적에 곡성부원군(曲城府院君) 염제신(廉悌臣)과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이암(李巖),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환(尹桓), 회산부원군(檜山府院君) 황석기(黃石奇),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 홍원철
(洪元哲), 수춘군(壽春君) 이수산(李壽山), 계성군(啓城君) 왕재(王梓)가 임금을 따르니 임금이 심히 가상히 여겨서
또한 극진히 대우하였다. 8월 병술일에 원암(元巖)에 행차하고 정해일에 속리산(俗離山)에 거둥했는데,
이튿날 큰비가 와서 다시 원암으로 돌아와서 하루를 묵었다. 여러 늙은이들은 이미 평안히 집에 있어 또 환도(還都)
할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즐겨하여 이에 술을 들어 서로 권하고 노래를 불러 즐기는데,
대장군(大將軍) 김하적(金何赤)은 피리를 불고 장군(將軍) 김사혁(金斯革)은 쟁(箏)을 타서 창안백발(蒼顔白髮)로
웃으며 이야기하고 수작하는 것이 바라보기에 마치 신선과 같았다.
아, 난리 평정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 태평의 빛남이 이 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여러 늙은이는 이미 늙었으나
임금께서 부소산(扶蘇山) 남쪽 궁궐 속에 계시지 못한 것을 아프게 생각하여 몸소 갑옷과 화살통을 가지고 번갈아
들에서 숙직(宿直)하며 비바람과 춥고 더운 것을 가리지 않으매, 백관(百官)들도 이것을 법으로 본받아 감히 각각
그 직책을 빠짐없이 닦았으니, 조석으로 주선하는 사이에 인심을 감동시키고 국가의 사체에 유익함이 많게 되어,
조정에 앉아 호령을 내는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도연명(陶淵明)과 죽림칠현(竹林七賢)들은 명교(名敎)의 죄인
이로되, 일을 좋아하는 자들이 오히려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읊었거든 하물며 원암(元巖)의 성한 모임이 국가의
원기(元氣)가 됨에 있어서랴. 다만 알지 못하거니와 지금 세상에 그림을 잘 그리는 자가 누구이며, 시를 잘 읊조리
는 자는 또 누구인가.
그림을 그릴 적에 비록 자제(子弟)의 역할을 맡아서 쟁(箏)을 타고 피리를 부는 반열에 끼려해도 이미 할 수 없는
일이나, 시를 읊는 데는 불초한 내가 앞장 서지 않고 누가 하겠는가. 이곳 경치를 보면 속리산(俗離山)은 우뚝 솟아
있어 높기가 하늘에 닿은 것이 우리 후생(後生)들이 우러러볼 바가 아닌가. 여러 늙은이들의 풍류(風流)와 문채
(文彩)가 이 산과 서로 높은 것을 다툰다 해도 옳을 것이니, 어찌 시 짓고 그림 그릴 필요가 있을 것인가." 하였다.
○ 전 사람(이색)의 시(詩)에, "현릉(玄陵)이 남쪽으로 거둥해 멀리 갔다가 돌아올 때, 원암(元巖)에 머무르니 산은
높고 높았네. 나무는 가리울 듯 비칠 듯 들이 넓게 되었는데, 천막집[氈廬] 가운데 솟아서 가는 티끌도 없었네.
당시 일곱 늙은이 좌우에 있었으니, 높은 큰 덕(德)에 웅재(雄才)를 겸했었네.
여러 사람의 마음 여기 주석(柱石)과 같고, 단청(丹靑)이 빛나는 동량(棟樑)의 재목일세. 흔연한 기쁜 빛으로 송악
(松岳)을 향하니, 참으로 능묘(陵廟)를 소제하는 때로다. 즐겁게 술 마시고 노래소리 들으니, 태평(太平)의 환한
기운 한창 밀려오네. 회산(檜山)이 먼저 글 쓰자 주옥이 떨어져, 반짝반짝 금 소반에 무더기로 쌓여 여러 공(公)의
화답하는 글 모두 훌륭한데, 익재(益齋)의 익숙한 붓 삼태성(三台星)에 빛나도다. 곡성(曲城)의 생각 어찌 그리
깊고 장구한가. 그림 그려 전하니 운대(雲臺)와 같네. 목동(牧童)은 피리 부는 반열에 있지 못했고, 서문을 짓자
와부(瓦釜)가 우레 같이 울리네. 그 이름 그림 뒤에 거는 것 또 소원이 아니니, 당세에 글 잘 하는 이들, 아예 시기
하지 마소. 대신(大臣)이란 국가에 원기(元氣)라, 혈맥에 흐르고 통해야 화(禍)의 근본 없애리. 뒷사람들 그림이라
보지 말고, 절의를 지켜 삼강(三綱) 무너지는 것 붙들어 일으키게. 더구나 자제들이야 감히 자기(自棄)하리, 돌아
가서 무성한 뜰 가운데 홰나무를 보게 하소." 하였다.
○ 황석기(黃石奇)의 시(詩)에, "푸른 옥잔은 깊고 술맛 아름다운데, 거문고 소리 느리고 피리소리 길도다.
그 중에 또 가느다란 노래 소리 들리니, 일곱 늙은이 서로 즐기는데 수염은 서리 같네." 하였다.
○ 고려 윤택(尹澤)의 시(詩)에, "소년은 꽃 밑 침향정(沈香亭)에 취하여 청평사(淸平祠) 지어 바치니, 광염(光熖)
이 길게 뻗쳤네. 쇠퇴한 지금에 무고(武庫)를 보니 부질없이 자전(紫電)과 청상(淸霜)만이 남았네." 하였다.
○ 이암(李巖)의 시(詩)에, "가을 바람 임금 행차 길에 벼꽃[稻花] 향기로우니, 당일 백성 생각하던 마음 또한
길었어라. 다시 술 한 잔 대해 성상의 수명을 비니, 앉아서 오골(鰲骨)이 여러 번 서리빛 되는 것 보옵소서."
하였다.
○ 이제현(李齊賢)의 시(詩)에, "국화꽃 철 늦게 향기로운 것 사랑하노니, 잔 들어 서로 권하여 뜻 또한 깊고 길었네.
안위(安危)나 고락(苦樂)은 돌고 도는 것, 아이들에게 말하노니, 서리 밟을 제 조심하라." 하였다.
○ 염제신(廉悌臣)의 시에, "붓에서 구슬이 떨어져 글자마다 향기로우니, 맑은 노래소리에 술잔 길게 드네.
반쯤 취하자 다시 임금의 은혜 중대함을 깨달으며, 밤 늦도록 앉았으니 서리 내릴 듯 밤도 차네." 하였다.
함림역(含林驛) : 함림산(含林山) 밑에 있다. 마분원(馬分院) : 고을 동쪽 13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 고을 동쪽 29리에 있다. 왕내원(王來院) : 구봉산(九峯山) 밑에 있으니 또한 공민왕(恭愍王)이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남원(南院) : 고을 남쪽 1리에 있다.
병원(竝院) : 고을 서쪽 7리에 있다. 문라원(門羅院) : 고을 북쪽 13리에 있다. 추원(樞院) : 고을 북쪽 27리에 있다.
불우 속리사(俗離寺) : 속리산 서쪽에 있다.
○ 김구용(金九容)의 시(詩)에, "달마암(達磨巖) 곁에 들불 하나 밝았는데, 문 열고 향 피우니 마음 다시 맑아라.
혼자 깊은 밤에 앉아 잠 못 이루니, 창 앞에 흐르는 물 솔바람 소리와 섞여 들리네." 하였다.
법주사(法住寺) : 속리산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신라의 중 의신(義信)이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
을 세웠다고 한다. 성덕왕(聖德王)이 중수했는데, 석조(石槽)와 석교(石橋)ㆍ석옹(石翁)ㆍ석확(石鑊)이 있으며,
절 안 산호전(珊瑚殿)에는 금신장육상(金身丈六像 불상)이 있으며, 문 앞에는 구리로 부어 만든 깃대[幢]가 있는데,
모양이 몹시 높고 그 한 쪽에 통화(統和) 24년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또 고려 밀직대언(密直代言) 이숙기(李叔琪)
가 지은 중 자정(慈淨)의 비명(碑銘)이 있다.
○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높다란 사면 푸른 연꽃 같은 봉우리, 장갑(長岬)의 신령스런 근원 몇 겹인고.
문장대(文藏臺)는 천고(千古)의 이끼 그대로 있고, 우타굴(于陀窟) 그늘 만 그루 소나무일세. 용이 탑 속으로 돌아
가니 진골(眞骨)이 남았고, 나귀가 바위 앞에 누웠으니 성종(聖蹤)을 찾네.
길이 삼한(三韓)을 복 되게 하는 건 누가 주인인가. 산호전(珊瑚殿) 위에 자금용(紫金容)일세." 하였다.
○ 함부림(咸傅霖)의 시에, "계원(鷄園)의 한가로운 일월(日月)이요, 안탑(雁塔)에 구름과 연기 자욱하네.
우연히 삼청동(三淸洞)에 들렸더니, 세상일 시끄러운 것 모두 잊었네." 하였다.
복천사(福泉寺) : 법주사(法住寺) 동쪽 7리쯤 되는 곳에 있다. 절 동쪽에 샘물이 있어 돌 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식수
(食水)로 쓰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 천순(天順) 갑신년에 우리 세조대왕(世祖大王)이 속리산에 거둥
했을 때 병풍연(屛風淵)에 잠시 들렸다가, 이튿날 법주사에서 이 절까지 두루 경치를 구경한 다음 호종(扈從)하는
문신(文臣) 김수온(金守溫)에게 명해서 이 일을 기록하게 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 : 속리산(俗離山) 마루에 있다. 그 신(神)이 매년 10월 인일(寅日)에 법주사에 내려
오면, 산중 사람들이 풍류를 베풀고 신(神)을 맞이하여 제사지내는데 신(神)은 45일을 머물다가 돌아간다 한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구석(龜石) : 법주사 서쪽 봉우리에 구석(龜石)이 있는데, 천연으로 하늘이 만든 것 같아 그 등에 사람 50명이
앉을 만하고 그 머리는 우뚝하게 서쪽으로 들고 있다. 속세에서 전하기를, "중국(中國) 술사(術士)가 와서 보고 하는
말이, '중국의 재물과 비단이 날마다 동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나는 무슨 까닭인지 몰랐더니, 이제 알고 보니 이
물건이었구나.' 하고, 그 머리를 잘라 방술(方術)을 하였다." 한다. 마현박석(馬峴薄石) :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고개 위에 얇은 돌이 3, 4리를 깔려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말로는 "고려 태조가 일찍이 속리산에 거둥했을 적에
닦은 어로(御路)다." 한다.
오정산성(烏頂山城) : 고을 동쪽 5리에 있으니, 바로 삼년산성(三年山城)인데, 쌓은지 3년만에 완성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6백 99척이요, 높이가 18척이며, 성안에 우물 다섯 개가 있는데, 지금은 반은 무너졌다.
○ 고려 태조 11년에 몸소 이 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청주(淸州)로 거둥했었는데, 산 아래 군장동(軍藏
洞)이 있었으니, 세상에서 전하기를, "태조가 군사를 주둔시킨 곳이라." 한다.
함림산성(含林山城)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1천 4백 88척이요, 높이가 6척이며, 성안에
큰 못이 있었는데 지금은 반쯤 무너졌다. 임언부곡(林堰部曲) : 혹은 임단(臨壇)이라고도 한다.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명환 신라 열기(裂起) : 삼년산군(三年山郡)의 태수(太守).
우거 고려 한유문(韓有紋) : 우리 태종(太宗)과 동년진사(同年進士)요, 벼슬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이르
렀다.
김타(金沱) : 두 번 과거에 뽑혀 여러 번 요직을 거쳐 벼슬이 청주 목사(淸州牧使)에 이르렀다.
신증 효자 본조 막동(莫同) : 사천(私賤)이다. 자기 집에 불이 나서 자기 어머니와 자기 딸이 모두 불속에 들어
있는데, 막동(莫同)은 급히 들어가 어머니를 업고 나오면서 딸은 돌아다 보지도 않고, 오직 그 어머니 살린 것을
기쁘게 여겼다. 금상(今上) 14년에 정문을 내렸다.
제영 산천방불무릉천(山川髣髴武陵天) : 권진(權軫)의 시(詩)에, "산과 시내가 무릉(武陵)과 비슷하니, 하필 다시
봉래도(蓬萊島)의 신선을 구하리오." 했다. 요양연천휴(沃壤連千畦) : 이맹균(李孟畇)의 시(詩)에, "새벽밥 먹고
회인(懷仁)을 떠나니, 만첩 산을 뚫고 왔네. 갑자기 평평한 들 보이니, 넓적하여 내 마음에 드네. 관사(館舍)는
굉장하고, 여러 봉우리 모두 읍(揖)하는 것 같네. 기름진 땅 천 이랑이 이어 있으니, 백성들 살기 편안하네.
또 듣건대 풍속이 순후하여 불러 음식을 서로 대접한다네. 황홀하게 도원(桃源)에 노는 것 같아서, 다시 찾을 때
길 잃을까 두렵도다. 신라 때 삼년성(三年城)은, 당시에 몇 번이나 습격당했던가. 고려 말년에 바다 도둑이 잦아서,
전쟁이 오랫동안 쉬지 않았네. 지금은 임금의 은택 깊으니, 안심하고 살면서 명절을 즐기네. 왕명(王命) 받들고
와서 무엇하였나, 부질없이 길을 달리네." 하였다.
산원취연부(山遠翠煙浮) : 이정령(李正寧)의 시(詩)에, "뜰은 비었는데 푸른 풀 우거졌고, 산은 먼데 푸른 연기 떠
있네." 하였다.
유협다기빈주마(幽峽多奇頻駐馬)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에, "푸른 산 두 언덕 강물을 끼고 있으니, 나루터에
돌아와 작은 배에 의지했네. 깊은 산골에 기이한 것 많아 자주 말을 멈추고, 석양(夕陽)이 보기 좋아 다시 누(樓)에
오르네. 누런 구름 뭉게뭉게 벼가 처음 익었고, 붉은 비단 나부끼니 단풍이 시름이네. 바쁜 이 한 몸 물에 뜬 나무
토막 같아서, 내일 아침에 또 다시 영남(嶺南) 향해 떠나네." 하였다.
[비고]
연혁 순조(純祖)조에 군수(郡守)로 올렸다. 고종(高宗)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내북(內北) : 처음은 3리, 끝은 30리. 외북(外北) : 동북쪽 처음은 3리, 끝은 30리.
속리(俗離) : 동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5리. 왕래(王來) :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마로(馬老) : 동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5리. 삼승(三升) : 남쪽으로 처음은 17리, 끝은 30리.
탄부(炭釜) :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0리. 서니(西尼) : 서쪽으로 처음은 3리, 끝은 20리.
사각(思角) : 북쪽으로 처음은 4리, 끝은 20리.
토산 대추ㆍ감.
사원 상현서원(象賢書院) : 명종 기유년에 세웠고, 광해군 경술년에 사액했다.
김정(金淨) : 청주에 보인다. 성운(成運) : 자는 건숙(建叔)이고, 호는 대곡(大谷)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벼슬은 사담시(司膽寺)의 정(正)이었는데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성제원(成悌元) : 공주(公州)에 보인다.
조헌(趙憲) : 금포에 보인다. 송시열 : 문묘에 보인다.
영동현 永同縣
동쪽으로는 황간현(黃澗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남쪽으로는 옥천군(沃川郡) 경계까지 15리이고, 서쪽으로는
같은 군(郡) 경계까지 21리이고, 북쪽으로는 청산현(靑山縣) 경계까지 30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길동군(吉同郡)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成宗) 14년에
승격시켜서 계주 자사(稽州刺史)를 삼았다가 목종(穆宗) 8년에 이를 폐지했고, 현종(顯宗) 9년에 상주(尙州)에
소속시켰으며 명종(明宗) 2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고, 6년에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다시 감무
(監務)로 회복시켰고, 얼마 안 되어 폐지했다.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전례에 의하여 현감을 두고,
경상도에서 본도(本道)로 소속시켰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길동(吉同)ㆍ계주(稽州)ㆍ영산(永山)ㆍ계산(稽山).
성씨 본현ㆍ김(金)ㆍ신(申)ㆍ고(高)ㆍ길(吉)ㆍ임(任)ㆍ장(張). 풍곡 공(公)ㆍ손(孫) : 앙암(仰巖)도 같다.
율곡(栗谷) 염(廉).
형승 산과 물이 맑고 기이하다. : 윤상(尹祥)이 금유(琴柔)에게 보낸 글에, "영동은 산수(山水)가 맑고 기이해서
시(詩) 짓는데 도움을 받을 만한 것이 진실로 많다." 했다.
산천 성황산(城隍山) : 고을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박달산(朴達山) : 고을 북쪽 14리에 있다.
마니산(摩尼山) : 고을 서쪽 16리에 있다. 또 옥천군조(沃川郡條)에도 보였다.
남각산(南角山) : 고을 남쪽 16리에 있다. 어리산(於里山) : 고을 서쪽 14리에 있다.
기산(箕山)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침산(砧山) : 고을 남쪽 7리에 있다.
용연(龍淵) : 고을 서쪽 16리에 있으니, 마을 어구 두 언덕에 석벽(石壁)이 깎아 세운 듯하고, 2리쯤 들어가면 두
봉우리가 서로 버티고 서서 바위 산이 높고 가파르다. 가운데에 돌 웅덩이가 있어 못물의 하류(下流)가 여기에
모이는데, 물 깊이를 알 수가 없으니 세속에서는 이것을 기연(妓淵)이라고 한다. 물이 넘쳐 폭포가 되어 수백 척을
날라 흘러내리고 그 아래에는 깊은 못이 있다.
고당포(高唐浦)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송천(松川) : 박달산(朴達山) 아래에 있다.
심천(深川) :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니 고당포(高唐浦)로 흘러 들어간다. 동천(東川) : 성 동쪽에 있다.
토산 송이버섯[松蕈]ㆍ자초(紫草)ㆍ잣[海松子]ㆍ인삼(人蔘)ㆍ오미자(五味子)ㆍ꿀[蜂蜜].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2천 4백 10척이요, 높이가 7척이며, 성안에 우물이 둘 있다.
봉수 박달산 봉수(朴達山烽燧) : 동쪽으로는 황간현(黃澗縣) 소이산(所伊山)에 호응하고, 서쪽으로는 옥천군(沃川郡)
이산현(利山縣) 월이산(月伊山)에 호응한다.
정사 징청정(澄淸亭)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 권진(權軫)의 시에, "눈앞의 산과 물이 바로 새로운 병풍인데, 온종일 시를 읊어 들에 심정 풀어보네.
구구한 경국(經國)의 뜻 스스로 우스워라, 귀밑 흰 실 같은 머리털 거울 보고 놀래었네."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에, "부용산(芙蓉山) 밑 외로운 성(城), 한 줄기 물 잔잔하여 거울처럼 맑네.
교룡(蛟龍)이 못 속에서 들을까 두려워, 시(詩)를 써도 목소리 높여 읊조리지 못하네."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회동역(會同驛) : 고을 성 남쪽에 있다. 금련원(金連院) :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회덕원(會德院) :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심천원(深川院) : 심천(深川) 언덕에 있다.
사읍원(沙邑院) : 고을 동쪽 14리에 있다. 미전원(米田院) : 고을 북쪽 26리에 있다.
건행원(乾行院) : 고을 서쪽 10리에 있다.
교량 심천교(深川橋).
불우 마니사(摩尼寺) : 마니산(摩尼山)에 있다. 적화사(赤化寺) : 고을 북쪽 25리에 있다.
박달라사(朴達羅寺) : 박달산(朴達山)에 있다. 용화사(龍化寺) : 남각산(南角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성안 서쪽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서쪽에 있다.
고적 풍곡부곡(楓谷部曲) : 고을 북쪽 25리에 있다. 앙암부곡(仰巖部曲)ㆍ
율곡소(栗谷所) : 모두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
낙화대(落花臺) : 성 서쪽에 있다. 세속에 전하기를, "계주(稽州) 때 사람들이 서로 전송하고 작별하던 곳으로 기생이
어느 남자와 헤어지기가 서러워서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이름을 지었다." 한다.
마니산성(摩尼山城) : 또 옥천군(沃州郡)에 보인다.
명환 본조 금유(琴柔).
인물 고려 장항(張沆)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고 사람됨이 청렴하고 올바랐다. 충숙왕
(忠肅王)이 참소를 입어 원(元) 나라에 억류 당하여 5년 동안 돌아오지 못했는데, 장항이 충의로써 자신을 잊고
시종하여 공로가 있었다. 그 공로로 철권(鐵券)을 하사했고, 영산군(永山君)을 봉했으며, 시호를 문현(文顯)이라
했다.
김길원(金吉元) : 본래 신라(新羅)의 대성(大姓)으로서 여러 세대를 이 고을에서 살았다. 조정에 공을 세웠으므로
영산군(永山君)에 봉하였는데, 드디어 토성(土姓)이 되었다.
본조 김수온(金守溫) : 과거에 급제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참여하고,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했으며,
벼슬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문장이 웅장하고 깊고 기이하였다.
《식우집(拭疣集)》이 있어 세상에 전해진다.
우거 본조 박연(朴堧) :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중추원사(中樞院事)에 이르렀다. 효행이 있고 또 음률(音律)에 정밀
했다. 세종(世宗)이 아악(雅樂)을 만들 때, 박연이 실상 일을 주관하였다.
신증 효자 본조 채형온(蔡亨溫) : 나이 11세 때 그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고 집이 가난해서 상수리 열매를
주워다가 조석 끼니를 이었고, 어머니가 죽자, 남에게 빌려서 장사지냈다. 아버지가 일찍이 임질(淋疾)을 앓았는데
입으로 빨아서 고쳤다. 아버지가 죽자 시묘(侍墓)하고 3년 동안 죽을 먹었다. 금상(今上) 13년에 정문을 세워 표창
했다.
열녀 본조 정씨(鄭氏) : 민보로(閔普老)의 아내다. 남편이 죽자 시묘(侍墓)하고 3년 마친 뒤에도 아침저녁으로 전
(奠)을 올려 종신토록 중지하지 않았다. 조정에 알려져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제영 유민상행견승평(遺民徜幸見昇平) : 이곡(李穀)의 시(詩)에, "지나는 손 경솔히 희로(喜怒)를 나타내지 말라.
남은 백성들 혹 다행히 태평한 시절 볼 것이다." 하였다.
계산차일무지기(稽山此日無知己) : 이방직(李邦直)의 시(詩)에, "계산 오늘에 나를 아는 이 없으니,
부질없이 당시의 하사명(賀四明)을 생각하네." 하였다.
[비고]
방면 현동(縣東) : 처음은 1리, 끝은 18리이다. 남일(南一) : 처음은 5리, 끝은 30리이다.
남이(南二) : 처음은 20리, 끝은 50리이다. 서일(西一) :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서이(西二) : 처음은 5리, 끝은 40리이다. 북일(北一) : 처음은 10리, 끝은 40리이다.
북이(北二) : 처음은 20리, 끝은 35리이다.
진도 심천진(深川津) : 서쪽으로 15리인 송천(松川) 하류이며, 적등진(赤登津) 대로(大路)와 통하며,
수로(水路)에는 다리를 놓았다.
토산 감[柹]ㆍ신감채(幸甘菜)ㆍ누치[訥魚]ㆍ소가리[錦鱗魚].
황간현 黃澗縣
동쪽으로는 경상도 금산군(金山郡) 경계까지 40리요, 북쪽은 경상도의 상주(尙州) 경계까지 14리에 이르고,
남쪽으로 영동현(永同縣) 경계까지 16리에 이르고, 서쪽으로 같은 현(縣) 경계까지 20리에 이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소라현(召羅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영동현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이 경산부(京山府)에 소속시키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공민왕(恭愍王) 때에 다시 경산부에
소속시켰다. 공양왕 2년에는 다시 감무를 두었고,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본도(本道)에 예속시켰으며,
14년에 청산(靑山)을 합쳐서 황청현(黃靑縣)으로 만들었다. 16년에 각각 다시 복구시키고 전례에 의하여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소라(召羅)ㆍ황청(黃靑)ㆍ황계(黃溪).
성씨 본현 한(韓)ㆍ견(甄)ㆍ곽(郭)ㆍ심(沈)ㆍ전(全)ㆍ손(孫)ㆍ백(白) : 내(來)ㆍ이(李)ㆍ김(金) : 속(續).
김화 임(林) : 속(續).
산천 황악산(黃獄山)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또 경상도 금산군조(金山郡條)에 보인다.
백화산(白華山)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또 상주(尙州) 중모현(中牟縣)에 보인다.
산양암(山羊巖) : 장교천(長橋川) 서쪽에 있다. 극락산(極樂山) : 금화부곡(金化部曲)에 있다.
석천(石川) : 고을 서쪽 4리에 있으니, 근원이 속리산에서 나와서 산양암에 이르러 장교천과 합류(合流)했다.
장교천(長橋川) : 성 남쪽에 있다. 혹 대천(大川)이라고도 일컫는데,
근원이 무주(茂朱) 도마현(都馬峴)에서 나와 황악산(黃獄山) 물과 합류한다.
토산 송이버섯[松蕈]ㆍ자기(磁器)ㆍ인삼(人蔘)ㆍ복령(茯苓)ㆍ백화사(白花蛇)ㆍ꿀[峰蜜]ㆍ돌버섯[石蕈]ㆍ
안식향(安息香)ㆍ신감채(辛甘菜)ㆍ목적(木賊).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1천 6백 46척이요, 높이가 7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 이첨(李詹)의 기(記)에, "옛날 현(縣)이 승격되기 전에는 거주하는 백성들이 적고, 소나무와 참나무가 하늘을
덮어 가장 그윽하고 깊숙한 데다가, 들짐승이 맘대로 뛰놀고 도둑들이 노략질하기 때문에, 여기를 지나는 자는
여럿이 무리를 지어야만 비로소 다니곤 했다. 경오년에 지금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있는 영주(永州) 이언(李訔)
이 전 삼사좌윤(前三司左尹)으로서 비로소 이 고을 감무(監務)가 되어 백성들의 고통스러움을 개탄하고 이것을
힘써 없앴기에 호구(戶口)가 날마다 늘고, 전답은 날마다 개간되고 사람을 해치는 자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나무를 베어내고 돌을 쪼개어 이 성을 쌓아서 며칠 안 되어 공사가 완성되어, 백성들은 성에 보전하게 되고,
성은 덕(德)에 보전하게 되었으니, 이후(李侯)의 공이 더욱 빛남이 있도다." 하였다.
봉수 눌이산 봉수(訥伊山烽燧) :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경상도 금산군(金山郡) 고성산(高城山)에
호응하고, 서쪽으로는 소이산(所伊山)에 호응한다. 소이산 봉수(所伊山烽燧) : 고을 동쪽 13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눌이정산에 호응하고, 서쪽으로는 영동현 박달산(朴達山)에 호응하며,
북쪽으로는 경상도 상주(尙州) 중모현(中牟縣) 소산(所山)에 호응한다.
누정 가학루(駕鶴樓) : 객관(客館) 남쪽에 있다. 불에 탔는데, 성화(成化) 병오년에 현감(縣監) 손번(孫蕃)이 중건
(重建)했다.
○ 이첨(李詹)의 기(記)에, "의성 남공(宜城南公)이 석덕(碩德) 원훈(元勳)으로서 경상도에 관찰사(觀察使)로 있을
때, 마침 하동(河東) 하담군(河澹君)이 이웃 군(郡)에서 정무를 매우 잘하여 황간(黃澗)으로 옮겨와 일을 맡았는데
한달 남짓 만에, 공(公)이 순시(巡視)하러 와 보니 과연 정사가 간략하고 평이하여 백성들을 부릴 만했다.
이에 하군(河君)에게 이르기를, '황간(黃簡)은 산골 고을로서 동서로 가는 사신들이 수십 리를 가야만 위험한 곳을
벗어나게 된다. 이제 이미 큰 언덕에 의지하여 성을 쌓았는데, 성이 큰 시내를 끼고 해자로 백성들과 한계를 지었
으니, 그런대로 사람들을 잘 모았다. 그러나 제도(制度)를 바야흐로 새롭게 하는 터에 공관(公館)이 낮고 비좁은데
왜 증축(增築)해서 올라가 노닐 만한 곳을 만들어 답답한 마음을 통하게 하고, 맑고 시원한 것을 맞아들여 마음을
비워서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지 않는가.' 하였다. 하군(河君)이 말하기를, '이 말씀은 고을의 다행입니다.' 하고,
곧 노는 사람들을 써서 가까운 산에 가서 재목을 취하고 농사 짓는 들에 가서 기와를 구워 운반하는데 수고롭지
않게 하여, 계미년 9월에 공사를 시작해서 이듬해 정월에 완성했는데, 낭무(廊廡)와 당실(堂室)이 모두 크고 아름
다워, 그 누(樓)를 보니 우뚝하였다.
공(公)이 두 번째 순시하러 왔다가 여기 올라가 보니 큰 산, 긴 골짜기의 구름과 달, 거친 터와 들, 물 위에 바람과
연기, 물고기가 냇물에 헤엄치며 흐르고, 새가 구름에 나는 조화(造化)의 묘한 것이 눈에 접하여 정신에 융회(融會)
되고 충만하게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공(公)은 이에 현판을 써서 가학(駕鶴)이라 했으니, 이는 대개 천지의 시초
를 초월하고 도(道)의 본체에 혼합되며 바람을 타고 날개 돋힌 신선이 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특히 공(公)의 우언(寓言)일 뿐이로다." 하였다.
○ 이원(李原)의 시(詩)에, "집이 공중에 높이 솟았으니, 여기 올라와 종일토록 머무네. 경옥(瓊玉)과 같은 봉우리는
난간에 닿아 빼어났고, 금 같은 시냇물은 마을을 안고 흐르네. 길은 긴 숲 밖으로 나갔고, 성은 큰 들판 머리에 임해
있네. 이것은 아마도 선경(仙境) 속에서 학을 타고 바람 따라 노님인가 의심하네." 하였다.
○ 유사근(柳士根)의 시(詩)에, "학의 등은 참다운 선경(仙境)인데, 항아리 속[壺中]에 세월은 머루르네.
도끼자루는 바둑판 때문에 썩었고, 도원(桃源)의 꽃은 동구(洞口)로 흘러 나가네. 나는 새 긴 하늘 가에 사라지고,
구름은 옛 성 머리에 차갑도다. 적막한 천년 뒤에 많이들 와서 계속 노리로다." 하였다.
신증 조위(曺偉)의 <중수기(重修記)>에, "황간(黃澗) 고을은 층층한 산마루를 의지하고, 절벽(絶壁)을 굽어 보고
있다. 동남의 모든 구렁의 물들이 그 아래로 돌아 꺾이어 서쪽으로 가는데, 세차게 흘러 돌에 부딪치면 거문고와
비파, 피리 같은 소리가 주야로 끊어지지 않는다. 고을 서쪽 5리쯤 되는 곳에 두어 봉우리가 우뚝 솟아 섰는데
가운데 청학굴(靑鶴窟)이 있다. 바위골이 그윽하고 깊으며 연기와 안개가 아득하여, 지나는 사람은 인간 세상의
경계가 아니라고 의심한다. 객관(客館) 모퉁이에 성가퀴(성 위에 나지막하게 쌓은 담)가 있어 푸른 언덕에 임해
있는데, 옛적에 여기에 누(樓)가 있었으니 이것이 가학루(駕鶴樓)이다. 영락(永樂) 연간에 귀암(龜巖) 상공 남재
(南在)가 현판을 단 것이다. 그 뒤에 불에 타서 객관과 함께 모두 재가 되고 말았고, 다만 주춧돌만 남아 있은지
40여 년이 되었다.
성화(成化) 병오년에 밀양(密陽) 손번(孫蕃)이 청아(淸雅)하고 통달한 재주로써 교서관(校書館)에 뽑혀 들어갔
다가 어버이가 늙으므로 수령으로 나가기를 청해서 이 고을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부임하자마자 기강(紀綱)이
새로워지고 해가 넘지 않아서 지경 안이 크게 다스려졌다.
이에 아전과 백성들과 의논하여 공인과 역군[工徒]들을 모아서 객관을 중수한 것을 자기의 책임으로 하여 기유년
8월에 공사를 시작해서 이듬해 7월에 완성했다. 먼저 정청(正廳)을 세우고 다음으로 익실(翼室)을 지었으며, 익실
동남쪽에는 옛터대로 누(樓) 세 칸을 일으키고 인하여 가학(駕鶴)이라고 현판을 달았다. 비록 이것은 기왓장과 들
보가 서로 이어서 따로 지은 것은 아니지만 바라다보면 날라가는 듯하다. 난간과 문 가운데 강산을 맞아들이고
책상과 자리 위에 항해(沆瀣)를 일으키는 듯해서 허공에 매달린 듯한 뛰어난 경치가 실로 이 한 도내에서 제일이다.
여기 오르는 자는 표연(飄然)히 낭원(閬苑 선녀 서왕모(西王母)의 동산) 단구(丹丘 신선 사는 곳)를 밟는 듯하다.
현감 손번이 누(樓)의 경치를 글로 적어서 나에게 기문을 청했다.
내 생각건대 경치가 스스로 명승(名勝)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해서 명승이 되는 것이니, 폐하고 흥하는
데 경치와 사람이 만나고 합하는 운수가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우주(宇宙)에 이 강산이 생긴 이후로 반드시
안목을 갖춘 자를 기다려야만 그것을 발휘하고 이름을 드러내 문자에 실려 무궁하게 후세에 전할 수 있는 것이니,
황강(黃岡)이 소동파(蘇東坡)를 만나지 못했으면 적벽(赤壁)이란 이름이 어찌 나타났을 것이며,
무이(武夷)가 주회암(朱晦菴 주자(朱子)의 호)을 만나지 못했으면 운곡(雲谷)이란 이름이 어찌 알려졌으리요.
그러나 소동파의 필력(筆力)과 주회암의 도학(道學)도 반드시 적벽과 무이의 도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니,
경치와 사람이 서로 만나고 서로 도움을 주는 유익함이 어떠한가. 이제 황간(黃澗)의 계산(溪山)과 운물(雲物)은
처음에는 귀암(龜巖)을 만났고, 두 번째는 현감 손번을 만나서 하늘도 숨기지 못하고 땅도 감추지 못해서,
그 맑은 경치를 더욱 더하게 하고 그 정채(精彩)를 발하게 되었으니, 어찌 천고(千古)에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현감 손번이 정사를 보는 여가에 여기 올라가 바라보면 청산(靑山)은 스스로 푸르고 백운(白雲)은 스스로 희어
마음 가운데 조그만 티끌도 일어나지 않아서, 소연히 세상 근심의 시끄러운 것을 잊고, 유연(悠然)히 도체(道體)의
유행함을 보아서 학문이 날마다 고명광대(高明廣大)한 지경에 나아갈 것이, 어찌 한갓 그 문장을 크게 드날리고
그 생각하는 것을 도울 뿐이겠는가. 그러면 이것은 황간의 다행함이겠는가. 또는 현감 손번의 다행함이겠는가.
나는 티끌 속에 파묻혔으면서 남쪽 나라의 강산(江山)을 마음속에는 그리워한지 오래이다. 훗날 무슨 일이 있어
남쪽으로 가게 되면 이곳에 가서 노닐며 누각에 올라 한 번 취해서 임고도사(臨皐道士)의 꿈을 다시 잇고, 구령
자진(緱嶺子晉)의 옷소매를 잡아 당기며 최호(崔灝)ㆍ이태백(李太白)의 시(詩)를 읊고 가학(駕鶴)의 뜻을 자세히
토로하여 평소의 소원을 풀어볼까 하노라." 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에, "황주(黃州)는 참으로 맑으니, 가서 머물고 싶네. 학은 날아 갔어도 누각은 그대로
있고, 산은 높고 물은 절로 흐르네. 나는 새의 등을 굽어보고, 바로 큰 자라 머리에 올랐네. 한없는 등림(登臨)의
흥(興)은, 긴 노래로 멀리 원유편(遠遊篇)을 부르네." 하였다.
○ 이숙함(李淑瑊)의 시(詩)에, "젊었을 때 방랑(放浪)해서 이 땅에 놀았더니, 탄환같이 빠른 세월 몇 가을 지났는가.
옛 누각은 부서졌는데[槌碎] 이제 새로 지었으니, 공이 많은 사군(使君)은 옛 제후(諸侯)로다.
세차게 흐르는 물소리 요란스레 튀고, 멀리 어두운 그늘진 계곡엔 신령스런 바람 메아리치네.
단청한 난간에 의지해 주렴(珠簾) 걷고 있노라면, 삼라만상의 온갖 경치 눈앞에 달려오네. 앉아서 초경(初更) 달
기다리니, 달 그림자 흔들흔들[婆娑] 다시 곱고 예쁘네. 손으로 희롱하면 그 맑은 것 움켜쥘 듯, 발로 은다리[銀橋]
밟는 것 어찌 족히 말하리. 우주(宇宙)에 올려다 보고 내려다 보아 샅샅이 찾아도, 최호(崔灝)는 가버리고 붙들 수
없네. 서리가 방초(芳草)를 말려 죽여 다시 처처(萋萋 무성한 모양)하지 못하니, 다만 역력히 개인 시내만 흐르네.
피리는 어느 곳에서 불어 허공에 사무치는가. 나그네의 시름 불러 일으켜 구름이 멀고 머네. 벽에 쓴 글귀 다시
나를 흥기시켜, 높은 곡조 화답하려고 머리가 학처럼 기웃하네." 하였다.
○ "땅은 옛이건만 구름은 아직 있고, 누(樓)는 비었는데 학은 머물지 않네. 여기 올라 큰 탄식 발하고, 배회하며 긴
강물 굽어보네. 산이 머니 천목산(天目山)인가 의심스럽고, 성이 높으니 바로 석두(石頭)로세.
눈은 창가에 대[竹]소리 나니, 나그네의 맑은 놀음 도와주는 듯." 하였다.
○ 최숙생(崔淑生)의 시(詩)에, "누런 학은 가서 돌아오지 않고, 흰 구름은 지금도 오히려 머물러 있네. 올라보니
푸른 하늘에 이어 있고, 휘파람 불고 읊는 이 몇 청류(淸流)인고. 시내는 꺾여 저절로 다리[股] 나뉘었고,
산은 비껴 다투어 머리를 들었네. 은근히 글 한 구 적으니, 다음날 이 노닒을 생각하리." 하였다.
○ "땅은 이 누(樓)의 경치 만들어 냈고, 하늘은 우리를 머물게 하였네. 산은 아침저녁으로 자태가 다르고,
물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흐르네. 나는 새도 때때로 등을 보겠고, 긴 대나무는 다만 머리만 보이네.
뜰이 한가로워 공사(公事) 적으니, 배회하며 봄놀이하는 격일세."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신흥역(新興驛) : 고을 서쪽 3리에 있다.
○ 이 방직(李邦直)의 시(詩)에, "이 땅 지난지 설흔 봄이 되었으니, 강산(江山)은 예와 같으나 아전과 백성은 새로
워라. 동에서 맞이하고 서에서 전송함이 아침저녁으로 연달았으니, 당시에 안비(按轡)하던 사람 몰라보네." 하였다.
이신원(李申院) : 고을 서쪽 3리에 있다. 서송원(西松院) : 고을 남쪽 9리에 있다.
박차원(朴車院) : 금화부곡(金化部曲)에 있다. 자천원(玆川院)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이현원(李峴院) :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판초원(板草院) :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불우 심묘사(深妙寺) : 절에 팔경(八景)이 있으니, 사군봉(使君峯)ㆍ월류봉(月留峯)ㆍ산양벽(山羊壁 바로 산양암
(山羊巖)이다)ㆍ용연동(龍淵洞)ㆍ냉천정(冷泉亭)ㆍ화헌악(花獻岳)ㆍ청학굴(靑鶴窟)ㆍ법존암(法尊巖)이다.
반야사(般若寺) : 백화산(白華山)에 있다. 건천사(乾川寺)ㆍ쌍림사(雙林寺)ㆍ대평사(大平寺) : 모두 황악산(黃獄山)
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금화부곡(金化部曲) : 고을 동쪽 38리에 있다. 옛날엔 금산(金山)에 붙였었는데, 뒤에 경산부(京山府)로 옮겨
붙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여기에 소속시켰다.
명환 본조 윤상(尹祥), 하담(河澹), 이약동(李約東) : 정사하는 데 청간(淸簡)한 것을 숭상했다.
신증 효자 본조 매한손(梅漢孫) : 그 아버지가 악질(惡疾)에 걸리자 손가락을 끊어 약에 타서 바쳤더니 병이 나았다.
금상(今上) 14년에 정문을 내렸다.
제영 석전관수족농장(石田灌水足農場) : 이첨(李詹)의 시(詩)에, "온종일 거문고 타고 밖에 나가지 않아도, 돌밭에
물을 대어 농장이 족하네." 하였다.
열장탱운용(列嶂撑雲聳) : 고려 이지명(李知命)의 시(詩)에, "여러 봉우리 구름을 받쳐 솟아 있고, 맑은 냇물 돌에
부딪쳐 흐르네." 하였다.
분첩침한류(粉堞枕寒流) : 노숙동(盧叔仝)의 시(詩)에, "붉은 기와 절벽(絶壁)에 임해 있고, 흰 성가퀴는 찬 시내를
가로지르네." 하였다. 독면청초안(犢眠靑草岸) : 윤자운(尹子雲)의 시(詩)에, "송아지는 푸른 들 언덕에서 잠자고,
갈매기는 흰 모래 머리에 앉아 있네." 하였다. 모점의산족(茅店依山足) : 성윤문(成允文)의 시(詩)에, "초가 주막은
산밑에 의지했고, 외로운 성은 산 머리를 베고 있네." 하였다.
[비고]
연혁 선조 26년 청산(靑山)에 병합되었다. : 임진왜란 때 현감 박몽설(朴夢說)이 진주에 부임하였는데,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광해주 13년에 복귀시켰다.
방면 읍내(邑內) : 끝은 10리이다. 오곡(五谷) :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매하(梅下) :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상촌(上村) : 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외남(外南) : 동남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60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은 5리, 끝은 20리이다. ○ 금화 부곡(金化部曲) 동쪽으로 38리에 있다.
본래 금산(金山)에 예속하였는데 경산(京山)으로 이속시켰으며, 공양왕 2년에 예속되었다.
토산 잣[海松子]ㆍ감ㆍ대추.
누정 관덕정(觀德亭).
청산현 靑山縣
동쪽으로는 경산도 상주(尙州) 경계까지 24리이고, 남쪽은 영동현(永同縣)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쪽은 옥천군(玉川郡) 경계까지 20리이고, 북쪽은 보은현(報恩縣) 경계까지 22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3리
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굴산현(屈山縣) : 또는 돌산(堗山)이라고도 하였는데, 경덕왕(景德王)이 기산(耆山)으로 고쳐서
삼년군(三年郡)의 영현(領縣)을 삼았으며,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상주(尙州)에 소속시켰었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더니, 뒤에 다시 상주로 회복시켰다. 본조 태종(太宗) 3년에 다시 감무를
두었고, 13년에 본도에 예속시켰으며, 14년에 황간(黃澗)에 합쳤고, 16년에 각각 복구시켜서 다시 현감(縣監)을
두었다.
속현 주성부곡(酒城部曲) : 고을 북쪽 90리에 있으니 넘어서 보은현(報恩縣) 북촌(北村)으로 들어갔다.
본래 상주에 소속되었는데, 고려 공양왕(恭讓王) 2년에 본현에서 감무를 두고 땅이 협소하다고 하여 분할하여
예속시켰다.
관원 현감(縣監), 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 굴산(屈山)ㆍ돌산(堗山), 기산(耆山).
성씨 본현 김(金)ㆍ박(朴)ㆍ장(張)ㆍ소(邵) : 또는 정(鄭)이라고도 함. 심(沈)ㆍ이(李)ㆍ손(孫). 주성(酒城) 홍(洪)ㆍ
방(方) : 촌(村). 김(金) : 속(續).
계은천(界銀川) 안(安) : 거이동(居尒同). 송(宋) : 속(續).
산천 기성산(己城山) : 고을 서쪽 8리에 있는 진산(鎭山). 덕의산(德義山) : 고을 북쪽 5리에 있다.
천둔산(千芚山) :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도가산(道家山) : 고을 서쪽 11리에 있다.
문수산(文殊山)ㆍ도솔산(兜率山) : 모두 고을 서쪽 19리에 있다. 남천(南川) : 고을 남쪽 2리에 있으니,
보은현(報恩縣) 속리산(俗離山)에서 시작되었다.
토산 녹반(綠礬) : 보리(甫里) 석굴(石窟)에서 생산된다. 잣[海松子]ㆍ자초(紫草)ㆍ꿀[蜂蜜]ㆍ인삼(人蔘)ㆍ
복령(茯苓)ㆍ안식향(安息香).
성곽 기성산성(己城山城) : 고을 서쪽 8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2천 91척이요, 높이가 8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누정 백운정(白雲亭)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의 기(記)에, "우리 고향이 청산(靑山)과의 거리가 겨우 10여리이기 때문에 왕래할 적에는 반드시
그 정자 아래를 지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감무(監務)로 있는 이를 내가 알고 사귀지 않은 사람이 없다.
금년 여름에 최군(崔君)이 청산(靑山)에 와서 정무를 살핀지 마침 2년이 되었는데 괴애자(乖崖子 김수온의 호)에게
글은 보내기를, '이제 동헌(東軒) 위에 있는 조그만 정자를 고쳤는데, 이곳은 공(公)이 일찍이 올라 놀던 곳이니,
어찌 정자의 이름을 부치고 그 뜻을 써서 두 고을 자제들로 하여금 외우게 하지 않습니까.' 했다.
나는 회답하기를, '그대의 정자에 이름을 짓자면 반드시 원이 백성을 사랑하고 다스리는 뜻을 써야겠는데, 백성을
사랑하고 다스리는 것은 그대가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을 자며 여기에 마음을 두어서 실효를 기약하여 장차 감사
(監司)에게 호응하고, 장차 성상의 교화를 받들었으니 그대가 백성을 사랑하고 다스리는 데는 필연 이미 충분하
도다. 또 정자의 이름을 담박(淡泊)한 것을 달게 여기고 맑은 것을 지켜서 염치를 가다듬는 것으로써 하자니, 보잘
것없는 물건을 취하고 주는 것도 오히려 구차스럽게 하지 않으니, 빙벽(氷蘗) 같은 지조는 그대가 넉넉히 하는 바가
아닌가. 정자가 넓은 들에 임하고 가까이는 큰 시내를 띠고 있으며 밝은 달을 붙잡고 맑은 바람을 안아서 조망(眺望)
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진실로 이 정자의 경치이니, 이것으로 정자의 이름을 짓는 것이 좋을 듯하나 이것도 또한
정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대체 고을 이름이 청산(靑山)이니 만일 이름을 짓는데 백운(白雲)이라 하지 않고
딴 뜻을 취한다면 이는 박물군자(博物君子)가 아니로다. 왜 그러냐 하면 청산(靑山)에는 백운(白雲)이 없는 경우가
없고 백운 있는 데에는 청산이 없는 경우가 없다. 옛사람의 시(詩)에, '청산은 백운 밖에 푸르고 푸르며, 백운은 청산
속에 희고 희다.' 한 것이 이를 두고 말함이다.
이 고을은 높은 산과 큰 물 사이에 있어 겹겹한 봉우리와 첩첩한 산등성이 매우 울창하니, 그대가 만일 새벽에 이 누
(樓) 위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면 흰 구름이 유연(油然)하게 생겨 마치 부슬부슬하고 자욱해서 얼마 뒤 하얀 옷과
같고 또 푸른 개와 같이 할 것이다. 그 나오는 것이 무심(無心)하고 그 다니는 것이 자취가 없이 푸른 산은 더욱
푸르고 흰 구름은 더욱 희어 정경(情境)이 흐뭇하여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청산과 백운을
사랑하여 병풍에 그것을 그리는 자가 있다. 그대는 청산의 원으로서 백운정(白雲亭)에 올랐으니.
그대는 어찌 산 그림 속의 한 유선(儒仙)이 아니겠는가. 나는 늙고 병들어 대여섯 번 글을 올려 물러가기를 청하였
으니, 혹 주상의 은택을 입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시어 그대와 함께 이 정자 위에서 술 한잔 마셨으면 창안
백발(蒼顔白髮)로 더욱 청산(靑山)과 백운(白雲)에 마땅할 것이로다."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 고을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오곤원(吾昆院) : 고을 서쪽 8리에 있다. 은천원(銀川院) : 고을 서쪽 19리에 있다.
주성원(酒城院) : 고을 북쪽 72리에 있다.
불우 청량사(淸涼寺) : 천둔산(千芚山)에 있다. 수미사(須彌寺) : 도가산(道家山)에 있다.
신암사(新巖寺)ㆍ문수사(文殊寺) : 모두 문수산(文殊山)에 있다. 망일암(忘日庵) : 덕의산(德義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계은천소(界銀川所)ㆍ거이소(居尒所)ㆍ저점고성(猪岾古城) : 고을 서쪽 9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57척이요,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신증 효자 본조 정동(鄭同) : 사천(私賤)으로서 일찍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후처를 얻었는데 정동(鄭同)은 마음을
다하여 봉양하였다. 아비가 죽자 3년상을 마치고 계모(繼母)를 매우 정성껏 섬겨 금상(今上) 12년에 정문을 내렸다.
[비고]
연혁 선조 26년에 황간(黃澗)과 합쳤다가 광해군 13년에 분할하였다.
방면 현내(縣內) : 끝이 8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은 3리 끝은 15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주성(酒城) : 북쪽으로 처음은 70리 끝은 1백 리이다. 보은(報恩) 북계(北界)를 지나서 있다.
○ 은천소(銀川所) 거이소(居尒所) 서쪽으로 19리에 있다.
토산 대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