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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0년 명문가의 도덕적 원천을 이룬 혁신적 계몽서
[경남에나뉴스 | 이도균 기자] 경상국립대학교(GNU·총장 권순기) 출판부(출판부장 박현곤 미술교육과 교수)는 ‘500년 명문가의 도덕적 원천을 이룬 혁신적 계몽서’로 일컬어지는 '함안조씨언행록-오백 년 명문가의 도덕적 원천'(258쪽)을 출간했다.
함안조씨언행록 표지
이 서책은 고려 말엽의 충신인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 1357-1417)을 파의 시조로 모신 범 덕곡공파 문중에서 1963년에 발간한 '함안조씨세보' 권1에 수록돼 있다.
조선시대에 문중에 따라 한 개인의 직계와 동종의 친족집단 구성원을 아울러 등재한 공동 기록물인 가첩류(家牒類)에 도덕적 관습을 가미시키는 식의 특별한 족보 형식을 추구했는데, 함안조씨 범 덕곡공파 문중에서 간행한 '함안조씨언행록(咸安趙氏言行錄)'이 대표적 사례이다.
'함안조씨언행록'은 고려 말의 절의지사인 조승숙의 행적 묘사에서 시작하여, 해방 정국을 맞이한 1950년 무렵의 후손 죽사(竹史) 조경제(趙京濟, 1901-1949)를 마지막 인물로 선정해 역사적 궤적과 인물 소개를 시도한 문중용 계몽서이다.
'함안조씨언행록'은 제1편 4명, 제2편 16명, 제3편 22명, 제4편 12명, 제5편 14명으로 나눈 가운데, 모두 68명이 선보인 귀감이 될 만한 행적들을 연대별로 나눠서 총괄적으로 서술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했다.
주목되는 점은 '함안조씨언행록'의 편집진이 적용한 인물 68명의 선별 기준과 그 원칙이다. 무엇보다 언행록의 편집진은 문과·무과를 거쳐 고위 관직을 역임한 공직자를 배출한 숫자라든가, 혹은 곳간을 가득 채운 볏섬의 수량 따위로 대변되는 세속적인 부귀의 정도라는 기준을 단호히 거부했다.
대신에 편집진은 '함안조씨언행록'에 수록될 인물 선정의 주된 기준으로 효우(孝友)로운 덕목을 위시해 충절(忠節)·의리(義理)·순절(殉節)·전공(戰功) 등의 척도와 함께, 학문[學]·도덕[行]의 성취 정도와 강학(講學) 활동의 전개 및 관직 근무 태도[居官]와 위민(爲民) 의식과 같은 극히 보편적인 잣대를 일관되게 적용했다.
이 같은 덕목·가치·정신 및 처세(處世)의 태도란, 편집진이 지극히 공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했음을 뚜렷하게 확인시켜 준다. 바로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함안조씨언행록'은 문중적·폐쇄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고, 그 결과 경상우도의 대표적인 사족층으로서의 굳건한 위상을 500여 년 동안이나 누릴 수 있었다.
'함안조씨언행록'의 또 다른 미덕은, 범 덕곡공파 문중의 화합을 상징해 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른바 계묘본 언행록이 발행되기 이전 시기에는 각 분파별로 ‘언행록’이라는 제하의 개별적인 서책을 간행·소장해 왔지만, 1963년에 여러 분파를 통합해 '함안조씨언행록'이라는 단일 서책을 간행함으로써, 첫 번째 인물 선정 기준인 효우의 덕목을 직접 실천해 보인 것이다.
특히 조국이 임진왜란과 같은 위기 사태에 직면한 이후에 범 덕곡공파 후손들이 보여준 일련의 눈물겨운 사연들이란, '함안조씨언행록'이 ‘관감(觀感)·흥기(興起)’라는 두 종류의 교육 목표를 설정한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 충분한 공감을 표하게 한다.
저자 김종수 씨는 “'함안조씨언행록'은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대(代)를 잇는 부단한 성찰과 자기희생이 필요하다는 귀중한 역사적·경험적 사실을 일깨워 준 유의미한 책이다.”라며 “모든 국민이 사장님과 선생님의 나라로 화한 ‘갑을적’ 천민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 정중하면서도 감동적인 전언을 선사해 줄 것으로 전망된다.”라고 말했다.
공은 정묘사화(丁卯士禍, 1507)와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에 연달아 계류된 나머지, 체포돼 대궐 마당에 나아가 국문(鞫問)을 받는 와중임에도, 큰 소리로 거침없이 경서[書]와 사서류[史]를 외우다가 입회한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을 발견하고는 큰소리로 호통을 치면서 말하기를, “너는 소인배거늘, 어찌하여 이 자리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냐? 지난 무오년(戊午年, 1498)에는 김종직(金宗直)과 같은 유(類)의 현량(賢良)한 이들을 무고(誣告)해 함정에 빠뜨리더니, 지금은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거냐? 청컨대 상방검[尙方釼]을 얻어서 네 놈의 머리통을 베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내가 진정 원하는 바이로다!” -121쪽
공은 김시민·정기룡 장군과 연대해 군(軍)을 합쳐서 병력을 한층 강화시켰다. 또 공(公)이 선봉장을 맡아 앞으로 진격해 적을 맞이한 끝에, 금산(金山)[김천]에서 왜적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왜적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그런데 조금 후에 별안간 대포 소리가 굉음을 발하더니, 숨어 있던 복병(伏兵)들이 다투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에 공은 홀로 물러나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서 싸웠으나, 아군의 세력이 너무 약했던 까닭에, 기어이 해(害)를 입고 말았으니, 바로 8월 7일이었다. 공이 태어난 1539년[己亥]으로부터 54세가 되던 해다. 이때 부인(婦人) 정씨(鄭氏)는 두 아들과 함께 난리를 피해 미곡산(薇谷山) 산속에 있다가, 변고를 접하고 곧 피를 토하고 자진(自盡)했다.
또 장남 정연(廷硏)마저 왜적에 의해 살해되자, 차남 석(碩)은 의기(義氣)가 솟구쳐 적을 때려 죽여 부친과 형님의 원수를 되갚았으니, 참으로 그 장하고, 참으로 그 열렬하도다! 어모장군[臣]은 충(忠)에 목숨을 바쳤고, 아들은 효(孝)에 목숨을 바쳤으며, 부인은 열(烈)에 목숨을 바치어, 불과 며칠 동안에 한 가문이 수립한 삼강(三綱)이란, 예전의 공문서[牒]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140쪽
1597년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하자, 다시 의곡(義穀)을 모아 반드시 나라에 보답할 것을 도모한 뒤에야 그쳤다.
그러던 중에 모친의 병환이 갑자기 심해지기 시작했고, 마침 왜적의 칼끝도 바로 눈앞에 임박하려 하고 있었다.
이에 공과 아우들인 광수(光遂)·광건(光建) ·광성(光成)·광덕(光德) 등은 그 모친의 목숨이 온전하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5형제는 일시(一時)에 모두 전사했고, 모친 또한 해(害)를 입게 됐다. 후일 국가에서는 5형제 모두를 아울러 효(孝)로써 정려(旌閭)에 명(命)하였다. -147쪽
김종수 저자는 경남 하동 출신.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윤리교육과 졸업, (구)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과정 수료,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한국철학과에서 철학 박사학위 취득, 강릉대·인천교대·청주교대·한국교원대·한국교통대·한양대·성균관대·세명대 등에서 강의, 현재 충북대학교 우암연구소 객원연구원.
저서 : '서계 박세당의 연행록 연구'(2010), '조선시대 유학자 불교와의 교섭 양상'(2017), '재실의 사회사'(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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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安趙氏世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