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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아함 청정해진 意識
새벽 추천 0 조회 34 22.02.18 07:27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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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2.02.18 11:44

    첫댓글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무색계 선정 언급된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다 여기면 안 됩니다. 이러한 무색처도 ‘심’이 의존하게 되는 ‘명색’이 될 수 있습니다.

  • 작성자 22.02.18 11:43

    https://m.cafe.daum.net/vijja/q7bK/126?svc=cafeapp

    위 링크 경문은 ‘명색에 의존하는 식’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나열되는 것들이 명색들인데, 잘 보시면 무색처가 나열되고 있습니다. 이 무색처 들이 ‘명색’이 될지 ‘법’이 될지는 ‘식이냐? 반야냐?’ 차이이겠지요.

  • 작성자 22.02.18 08:23

    @새벽 [‘청정’해진 의식]으로 ‘알려지는’ 것은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라는 [명(색)]이고…….

    [慧眼]에 ‘알려지는’ 것은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라는 [法]입니다.

    [般若]의 역할은 ‘잘 알기’위해, ‘충분히 알기’ 위해…… 결국은 잘 [알고] 충분히 [알아서] 결국은 [버리기] 위한 것입니다.

    ‘반야’를 통해 ‘혜안’을 얻으니,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는 ‘반야’를 통해 잘 알게 되고 충분히 알게 되고 결국엔 버리게 되는 ‘처’라는 이름의 [法]으로서 ‘혜안’에 알려집니다.

    ‘반야’를 통한 ‘혜안’을 얻지 못하면, 보여지고 알려지는 것은 ‘보는 사람은 名色만을 보고, 보고 나서는 바로 그것들만을 알게 된다는…’ 바로 그 [명색]이’공무변처라는 식무변처라는 무소유처라는…..’ 이름의 [명색]이 ‘識’에 알려집니다.

  • 작성자 22.02.18 08:15

    @새벽 우리는 습관적으로 ‘청정’이나 ‘무색’이 들어가면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삼학체계는 계정에 추가로‘혜’를 세움으로써 성립한 것이고, 지혜에 방점이 있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청정만을 알아서는 곤란 합니다. 깨끗한 것도 알고 더러운 것도 아는 것이 지혜이지 어느 한 쪽 만을 아는 것은 반푼이라고 하지요. ‘청정’만을 이야기할 것 같았으면 ‘계와 정’이 충분히 발달하였던 부처님 당시 인도 수행계에서 새로이 ‘지혜’를 강조하며 불교가 탄생할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 22.02.18 19:17

    와우~!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 듯, 눈 먼자에게 앞길을 보여 주시듯
    고귀한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반야'를 통한 '혜안'을 얻으면,
    '아~, 무색계라는 법도 있구나'라는 것이 '식'에 알려지는 것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요.
    _()_

  • 작성자 22.02.18 21:44

    “(舍利弗이여), ‘般若와 識’이라는 이 法들은 ‘서로 연결된 것(saṁsaṭṭha)’입니까, 아니면 ‘상호 분리된 것(visaṁsaṭṭha)’입니까? 하나를 다른 것과 分離해서 이 法들 사이의 차이점이 알려지는 것이 가능합니까?"
    “벗이여, ‘般若와 識’이라는 이 法들은 ‘서로 연결된 것(saṁsaṭṭha, 썩인 것, 결합된 것)’이지 ‘상호 분리된 것(visaṁsaṭṭha)’이 아닙니다. 하나를 다른 것과 分離해서 이 法들 사이의 차이점이 알려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꿰뚫은 것(pajānāti) 것을 분별하고(vijānāti)하고, 분별한 것(vijānāti)을 꿰뚫어(pajānāti)버립니다. 그러므로 이 法들은 ‘서로 연결된 것’이지 ‘상호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를 다른 것과 分離해서 이 法들 사이의 차이점이 알려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 작성자 22.02.18 21:45

    @새벽 “(舍利弗이여), ‘般若와 識’이라는 이 法들이 ‘서로 연결된 것’이고 ‘상호 분리된 것이 아니라면’ 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벗이여, ‘般若와 識’이라는 이 法들은 ‘서로 연결된 것’이고 ‘상호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般若는 닦아져야(bhāvetabba, 修行되어져야, 修習되어져야)만 하는데, (반하여) 識은 (수행 없이 그냥) 지각할 수 있는(pariññeyya, 알 수 있는)데에’ 그 차이점이 있습니다.”[MN.1, p.292~p.293]

  • 22.02.18 23:03

    @새벽 역시, 전방에 둔 '앎'이 반야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로군요.
    이제 이 고귀한 법이 식(識)에게 적절한 시기에 잘 알려졌습니다.
    감사합니다!
    _()_

  • 22.02.19 08:44

    벗이여, 오근에서 벗어나 청정해진 의식으로 무엇이 알려집니까?
    -벗이여, 오근에서 벗어나 청정해진 의식에 의해 무한한 공간이라는 공무변처가 알려지고, 무한한 식이라는 식무변처가 알려지고, 아무것도 없다는 무소유처가 알려집니다.

    벗이여, 알려진 법을 어떻게 알게 되는 것입니까?
    - 벗이여, 알려진 법은 혜안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벗이여, 반야는 무엇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까?
    -벗이여, 반야는 ‘잘 알기 위해 있고, 충분히 알기 위해 있고, 버리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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