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saṭṭhena h' āvuso pañcahi indriyehi parisuddhena manoviññāṇena kiṃ neyyan-ti? Nissaṭṭhena h' āvuso pañcahi indriyehi parisuddhena manoviññāṇena ananto ākāso ti ākāsānañcāyatanaṃ neyyaṃ, anantaṃ viññāṇan-ti viññāṇañcāyatanaṃ neyyaṃ, na-tthi kiñcīti ākiñcaññāyatanaṃ neyyan-ti. Neyyaṃ pan' āvuso dhammaṃ kena pajānātīti. Neyyaṃ kho āvuso dhammaṃ paññācakkhunā pajānātīti. Paññā pan' āvuso kimatthiyā ti? Paññā kho āvuso abhiññatthā pariññatthā pahānatthā ti.[MN. vol.1. p.293]
벗이여, 五根에서 벗어나 청정(suddha)해진 意識(mano-viññāṇa)으로 무엇이 알려집니까? ―벗이여, 五根에서 벗어나 청정해진 意識에 의해 무한한 공간이라는 空無邊處가 알려지고, 무한한 識이라는 識無邊處가 알려지고, 아무 것도 없다는 無所有處가 알려집니다. ―벗이여, 알려진 法을 어떻게 알게 되는 것입니까? ―벗이여, 알려진 法은 慧眼(paññācakkhu)으로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벗이여 般若(paññā)는 무엇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까? ―벗이여, 般若는 ‘잘 알기 위해 있고, 충분히 알기 위해 있고, 버리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첫댓글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무색계 선정 언급된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다 여기면 안 됩니다. 이러한 무색처도 ‘심’이 의존하게 되는 ‘명색’이 될 수 있습니다.
https://m.cafe.daum.net/vijja/q7bK/126?svc=cafeapp
위 링크 경문은 ‘명색에 의존하는 식’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나열되는 것들이 명색들인데, 잘 보시면 무색처가 나열되고 있습니다. 이 무색처 들이 ‘명색’이 될지 ‘법’이 될지는 ‘식이냐? 반야냐?’ 차이이겠지요.
@새벽 [‘청정’해진 의식]으로 ‘알려지는’ 것은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라는 [명(색)]이고…….
[慧眼]에 ‘알려지는’ 것은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라는 [法]입니다.
[般若]의 역할은 ‘잘 알기’위해, ‘충분히 알기’ 위해…… 결국은 잘 [알고] 충분히 [알아서] 결국은 [버리기] 위한 것입니다.
‘반야’를 통해 ‘혜안’을 얻으니,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는 ‘반야’를 통해 잘 알게 되고 충분히 알게 되고 결국엔 버리게 되는 ‘처’라는 이름의 [法]으로서 ‘혜안’에 알려집니다.
‘반야’를 통한 ‘혜안’을 얻지 못하면, 보여지고 알려지는 것은 ‘보는 사람은 名色만을 보고, 보고 나서는 바로 그것들만을 알게 된다는…’ 바로 그 [명색]이’공무변처라는 식무변처라는 무소유처라는…..’ 이름의 [명색]이 ‘識’에 알려집니다.
@새벽 우리는 습관적으로 ‘청정’이나 ‘무색’이 들어가면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불교의 삼학체계는 계정에 추가로‘혜’를 세움으로써 성립한 것이고, 지혜에 방점이 있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청정만을 알아서는 곤란 합니다. 깨끗한 것도 알고 더러운 것도 아는 것이 지혜이지 어느 한 쪽 만을 아는 것은 반푼이라고 하지요. ‘청정’만을 이야기할 것 같았으면 ‘계와 정’이 충분히 발달하였던 부처님 당시 인도 수행계에서 새로이 ‘지혜’를 강조하며 불교가 탄생할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와우~!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 듯, 눈 먼자에게 앞길을 보여 주시듯
고귀한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반야'를 통한 '혜안'을 얻으면,
'아~, 무색계라는 법도 있구나'라는 것이 '식'에 알려지는 것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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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舍利弗이여), ‘般若와 識’이라는 이 法들은 ‘서로 연결된 것(saṁsaṭṭha)’입니까, 아니면 ‘상호 분리된 것(visaṁsaṭṭha)’입니까? 하나를 다른 것과 分離해서 이 法들 사이의 차이점이 알려지는 것이 가능합니까?"
“벗이여, ‘般若와 識’이라는 이 法들은 ‘서로 연결된 것(saṁsaṭṭha, 썩인 것, 결합된 것)’이지 ‘상호 분리된 것(visaṁsaṭṭha)’이 아닙니다. 하나를 다른 것과 分離해서 이 法들 사이의 차이점이 알려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꿰뚫은 것(pajānāti) 것을 분별하고(vijānāti)하고, 분별한 것(vijānāti)을 꿰뚫어(pajānāti)버립니다. 그러므로 이 法들은 ‘서로 연결된 것’이지 ‘상호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를 다른 것과 分離해서 이 法들 사이의 차이점이 알려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새벽 “(舍利弗이여), ‘般若와 識’이라는 이 法들이 ‘서로 연결된 것’이고 ‘상호 분리된 것이 아니라면’ 그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벗이여, ‘般若와 識’이라는 이 法들은 ‘서로 연결된 것’이고 ‘상호 분리된 것이 아니지만’, ‘般若는 닦아져야(bhāvetabba, 修行되어져야, 修習되어져야)만 하는데, (반하여) 識은 (수행 없이 그냥) 지각할 수 있는(pariññeyya, 알 수 있는)데에’ 그 차이점이 있습니다.”[MN.1, p.292~p.293]
@새벽 역시, 전방에 둔 '앎'이 반야를 갖추어야 하는 것이로군요.
이제 이 고귀한 법이 식(識)에게 적절한 시기에 잘 알려졌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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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이여, 오근에서 벗어나 청정해진 의식으로 무엇이 알려집니까?
-벗이여, 오근에서 벗어나 청정해진 의식에 의해 무한한 공간이라는 공무변처가 알려지고, 무한한 식이라는 식무변처가 알려지고, 아무것도 없다는 무소유처가 알려집니다.
벗이여, 알려진 법을 어떻게 알게 되는 것입니까?
- 벗이여, 알려진 법은 혜안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벗이여, 반야는 무엇을 위하여 있는 것입니까?
-벗이여, 반야는 ‘잘 알기 위해 있고, 충분히 알기 위해 있고, 버리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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