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199
기(旗) 앞에 기죽은 임금과 신하들
황색에 도전하는 자, 용서하지 않겠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바람의 진원지 수강궁(창경궁)의 풍향계는 정중동(靜中動).
정지한 듯 조용했으나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주상이 있는 창덕궁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특히 아버지를 잃은 왕비가 있는 중궁전은 초상집이었다.
또한 태풍급 돌풍을 맞은 장의동 임금의 처가는 쑥대밭이 되었다.
세종 역시 괴로웠다. 세종은 나라의 임금이다.
권력의 상징 용상에 앉아 있으면서도 왕비의 아버지가 죽어 나가는 것을 빤히 보면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졌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맞설 수도 없었다. 이 때 세종 나이 스물 하나였다. 아들 셋을 두었으나 아직 어렸다.
호랑이 같은 아버지와 맞짱을 뜨려면 목숨을 내놓고 붙어야 한다.
허나 아버지와 붙어서 이긴 사람이 없다. 필패다. 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승패가 눈에 보이는 싸움에 도전하는 것은 무모하다.
심온 처형 이후 세종 이도는 부왕 태종에게 바짝 엎드렸다.
수강궁으로 문안 인사드리러 가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으며 하루에 두 번 문안가는 날도 있었다.
심온을 처결한 태종은 이양달을 보내 장사지낼 땅을 잡아 주도록 하고 내관을 보내 장사를 돌보게 하는 한편,
수원부에 명하여 후하게 장사지내주라 일렀다.
이양달은 하륜 이후 궁중 최고의 풍수였다.
살아있는 국구가 눈에 거슬렸지 죽은 사돈은 미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태종은 심온의 잔존세력 제거작업에 나섰다.
의주목사 임귀년을 파직하고 의금부에 투옥한 것을 필두로 상의원별감(尙衣院別監) 임군례, 김을현, 신이,
장합 등을 파면했다.
또한 심온 체포의 기밀을 누설한 조충좌를 눈감아준 심온의 종사관(從事官) 우승범, 하도, 송성립을 의금부에 옥했다.
태종이 병조판서 조말생을 불렀다.
“수강궁에서 직접 군사의 조회를 받을 것이다.”
서릿발 같은 영이 떨어졌다. 궁에서 군사들의 열병식을 갖는다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태종은 자신의 군권을 다시 한 번 만천하에 공표하고 싶었던 것이다.
상왕의 명에 따라 병조, 의금부, 훈련관(訓鍊觀), 군기감(軍器監)의 관원들이 빠짐없이 수강궁에 도열했다.
“황룡기를 높이 올려라.”
병조판서 조말생의 군령에 따라 수많은 황룡기가 하늘높이 올려졌다.
“상왕 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
기수들은 하늘높이 기(旗)를 올렸고 기가 없는 관원들은 두 팔을 치켜 올렸다.
상왕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의식이 수강궁을 진동했다.
황룡기는 태종의 명에 따라 주상전의 청룡기와 차별화 된 군기(軍旗)였다.
이후 황색에 가까운 색옷과 백성들의 단령의(團領衣)를 금했다.
황색은 상왕을 상징하는 신령스러운 색이니 범접하지 말라는 뜻이다.
미리 알아서 기는 부서는 병조뿐만이 아니었다.
사헌부에서는 황색 비단으로 말의 안장을 꾸미는 것을 금지하게 하였다.
황색 유탄은 중견관리들에게도 떨어졌다.
예조좌랑(禮曹佐郞) 김영, 병조정랑(兵曹正郞) 김장, 좌랑(佐郞) 정인지가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명나라 사신이 가져온 고명을 맞을 때 황색 의장(儀仗)을 빼놓았기 때문이었다.
탈출한 양녕대군을 찾아라, 현상금을 주겠다
이런 상황에서 양녕이 말썽을 일으켰다. 경기도 광주에 유배되어 있던 양녕이 유배지를 탈출한 것이다.
깜작 놀란 태종은 내관 최한과 홍득경 그리고 내금위(內禁衛) 홍약을 광주에 보내 양녕을 찾아오라 이르고
전국에 현상금을 걸었다.
양녕 탈출사건의 화살은 모두 어리에게 쏠렸다. 어리가 있기 때문에 양녕이 도망했다는 것이었다.
어리는 근심스럽고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이날 밤에 목을 매어 죽었다.
어리가 자결했다는 보고를 받은 태종은 약장, 가이, 충개를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약장은 양녕의 유모, 가이는 김한로의 비첩(婢妾), 충개는 어리의 몸종이었다.
이들은 양녕 탈출사건의 후폭풍이 자신들에게 떨어질까봐 어리에게 허물을 씌우고 협박하여 죽게 한 것이었다.
광주를 탈출한 양녕은 한강을 건너 아차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평구역리(平丘驛里)에 사는 장의동
본궁(本宮)의 종 이견의 집에 숨어들었다.
화들짝 놀란 이견이 입궁하여 양녕의 은신 사실을 알렸다.
태종은 효령대군과 경녕군 그리고 내관 유실, 엄영수를 보내어 의복과 신발을 가지고 가서 맞아 오게 하였다.
이에 양녕은 땅거미가 질 무렵 흥인문을 통하여 도성에 들어왔다.
양녕은 옷소매로 낯을 가리고 수강궁(壽康宮)에 나아갔다. 태종은 슬픔과 기쁨에 잠겨 양녕을 맞이했다.
“네가 도망했을 적에 대비와 주상이 음식을 전폐하며 눈물이 그치지 아니했다. 너는 어찌 이 모양이냐?
너의 소행이 너무도 패악하나 나는 부자의 정으로써 가련하게 여긴다.”
이튿날 태종은 편전으로 측근 신하들을 불렀다.
병조판서 조말생, 병조참판 이명덕, 지신사 원숙, 좌대언 김익정, 좌부대언 윤회가 입시했다.
세종도 시종하고 양녕도 곁에 있었다.
난생처음 털어놓은 태종의 소회
“나는 여러 날을 두고 양녕을 처우하는 방법을 깊이 생각하여 이제야 단안을 얻었다. 경(卿)들은 다 고금을
통달한 선비들이니 나의 말을 분명히 들으라.
양녕은 반역을 도모한 죄는 없기 때문에 서울 근방에 두고 목숨이나 보존케 하려고 하였는데 또 다시
오늘 같은 일이 있게 되니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젊은 시절에 아들 셋을 연이어 잃고 갑술년에 양녕을
낳았는데 그도 죽을까 두려워 본방댁(本房宅)에 두었었다.
병자년에 효령을 낳았는데 열흘이 채 못 되어 병을 얻었으므로 홍영리의 집에 두었고 정축년에 주상 충녕을
낳았다. 그때 내가 정도전 일파의 압해로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그래서 대비와 더불어 양녕을 안아 주고 업어 주며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자애하는 마음이 두터워 양녕은 다른 자식과 달랐다."
여태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신혼생활과 첫아이에 대한 회상이다.
좌중을 휘둘러 본 태종이 말을 이어갔다.
"나와 양녕은 부자지간이라 인정상 차마 못할 일이 있으나 임금과 신하는 이와 다르다. 신하가 임금에게
명분을 범한다면 죽음을 내리는 법이 있을 따름이니 양녕이 비록 어리지만 어찌 모르겠느냐.
옛적에 당 명황(唐明皇)이 하루에 아들 셋을 죽였기로 사씨(史氏)가 어질지 못하다고 썼지만 이것은 세 아들이
죄가 없는데 당 명황이 남의 중상하는 말을 듣고서 한 일이기 때문이며 만약 그들이 참으로 죄가 있다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내가 전위(傳位)한 것은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한가롭게 지내고자 함에서이다. 유독 군사 관계만은 아직도 내가
거느리고 있는 것은, 주상이 나이가 젊어 군무를 모르기 때문이나 나이 30이 되어 일에 대한 경험이 많아지면
다 맡길 생각에서다.
지난날 만약 여러 아들로 원수(元帥)를 삼아 각도 병마를 갈라 맡기고 장사들을 접견하게 했다면 주상이 어찌
지금까지 군무를 모르겠느냐? 그러나 내가 이와 같이 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 여러 형제들이 각기 병권을
잡는다면 어떻게 서로 우애할 수 있겠느냐?”
그 누구에게도 밝힌 일이 없었던 태종의 진솔한 소회다. 병권을 나누면 말썽의 씨앗이 된다는 소신이다.
신하들에게 말을 마친 태종이 양녕에게 시선을 맞췄다.
“네가 도망해 갔을 적에 나나 대비는 너의 생사를 알지 못하여 밤낮으로 눈물을 흘렸다. 주상도 곁에서 눈물을
흘렸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어리의 죽음은 진실로 슬프고 안타깝다. 이제 너에게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겠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던가. 이제 양녕에게 져주겠다는 것이다.
태종은 어리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있는 양녕에게 어리가 묻힌 곳에 가까이 있게 하기 위하여 양근에 짓고
있던 집을 파하라 명했다.
그리고 양녕에게 매(鷹子) 2연과 말 3필을 주어 광주로 돌려보냈다.
태종에게 황해도 감사가 급보를 보내왔다.
다음. 200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