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월 18일,.. 이날을 맞아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고 잊지 말아야 할건, 반역 사기王 이적매국皇 혹세무민帝 김** 사기꾼놈 따위의 2주기가 아니라 ,, 북한폭적들의 818 도끼만행 살해사건 35주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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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8월15일 조총련의 문세광 시켜 남한의 박정희 대통령을 코앞에서 저격~!,
국가원수 암살 총살테러 시도한 대담무쌍하기 이를데 없는 북한은 그런 대공격 사건에도 한국정부가 대북보복은 엄두도 못내고 일본에만 강력항의하는걸로 그치고 한미가 대북군사액션이나 보복작전이 전혀없이 121 청와대 진격사건에 이어 이번에도 역시 참 잘도 자제하자
북한은 더할수없이 의기양양~~!!
완전히 간댕이가 울트라 부어올라 정확히 바로 2년뒤인 1976년 8월 18일.
이번엔 세계 최강 군사력 미국을 건드리는 완전 초 겁상실 극악살해테러를 저지른다
마치 무슨 끔찍한 호러무비처럼 도끼로 미군을 찍어 죽인것이다
북한의 지령사주에 의해 육영수 여사가 광복절날 살해된지 불과 해가 지난
1976년 오늘처럼 해가 쨍쨍하던 35년전 바로오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던 미군을 북한군이 도끼로 공격했다.
미군장교 2명이 그자리에서 숨지고 8명이 부상을 당했다.
북한의 대남 도발 중 가장 잔혹한 사례로 불리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2011년 8월 18일로 35주년을 맞았다.
미국역사상 전세계 어디에서도
총격이나 폭탄테러도 아닌 이런 대담하고 무식 잔혹한 도끼살인 도발을 당한적이 아마 없을것이다
미국에 대한 이런 잔인한 그것도 군사최전방에서 살해도발은 과거 구쏘련조차도 감히 엄두도 못낼텐데..
818 미군장교 도끼살해사건은 아마 미국역사상
미군과 미국인들 뇌리에 가장 큰 치욕과 공포로 각인됐을것이다.
625때의 고전후퇴 기억과 더불어 어쩌면 이 818도끼만행으로 생성된 미국의 '대북공포감 잠재의식'이
과감한 대북보복이나 대북선제타격을 주저하게 만드는 미군의 '818 트라우마'로 생성되었을수도 있겠다
당시 북한의 도발에 대한 미국은 대응은 고작 ..
문제가 되었던 미류나무 제거하는걸로 대북응징 보복을 대신하는 초소심에 그친다
그 이른바 나무제거작전에서 조차도
'도끼살인'이란, 호러무비에서나 나올법한 초 살벌성과 섬찟함에 바짝쫄은 미군은
북에 잔뜩 긴장타서 단독으로 못하고 한국군 보병1사단 수색중대와 공수특전단의 보호경계를 요청했다
그리고 이와 별도로 어마어마한 항모전단을 파견해 대북압박하는 최강의 대북군사압력을 전개하였지만 실상,,
북에 단 1cm도 못들어가고 단 한대도 대북타격못할것이 뻔한~!!
신중하고 겁이 큰 미국의 무력시위와 한미 대규모 합훈 경계강화가 실상
저들에 얼마나 실질적인 불안이나 공포를 주었을지는 글쎄올시다~?? 이다
도리어 북은 이런 끔찍하고 전격과감한 도발테러로 상대의 심리를 완전히 저하시키고 기 확 죽이고
미국과 한국의 장비 비용 전력 체력만 엄청나게 힘빼게하고 소모 사용케하는 전술전략적 큰 유익이었다
이렇게 결국 북한에겐 이중의 엄청난 소득을 가져다 주게 되는 도발전략은
북한으로선 적대시 선군 호전책을 버리지 않는 한
다른 어떤 선택보다 아주 유효한 일종의 전술정책수단으로 귀결되어지는 결과였고
이 818 도발로 북한 인민과 군부의 대미사기 전에 없이 높이고
김일성체제의 강화및 내부단속까지 대달성 고려하면 북한에겐 일거사득의 대소득을 갖게하였다
한미는 이때 처음으로 김일성의 시인과 북한의 사과받았다고
참 어처구니없이 꼴같잖게 으쓱하고 두고두고 자랑하지만,,
818도끼사건이란 희대의 만행을 미국에까지 저질렀던 초유의 북한의 대미 모험적 도발도
결국 아무런 군사적 보복후과나 큰 별일없이 대충 사과비슷한 유감표명 한마디로
대결긴장 사태수습되면서 도발무마 낙착되게 되자
이후에도 북한은 대남무력기습과 테러암격공작에 아주 단단히 맛들이게 되었고 그에 굴종한
김대중의 햇볕정책이란 조폭 보호비 정기 상납같은 대북조공 상시화 정례화로
그 기습도발 전략의 정책적 성공과 대 유용한 결실을 거두었다고 자평 자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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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휴전이후 주요 대남 암습 테러 무력도발
1958년 창랑호 피랍 사건(위),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아래)
1983년 미얀마 아웅산 테러(위), 1986년 김포공항 폭파(아래)
1996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2010년 3월 천안함 침몰 사건(위), 11월 연평도 포격(아래)
북한은 1953년 정전협정 조인 전쟁휴전 이후에도 협정을 일방적 위반하고
휴전합의 깨고 늘 끊임없이 대남 침투·도발을 전개해 왔다.
2010년 발행된 국방백서에 의하면
북한은 휴전이후 1640여 건의 침투와 1020여 건의 도발을 감행했다.
그 중 지상 침투·도발은 1190여 건, 해상 침투·도발 1430여 건, 공중 침투·도발은 40여 건이다.
북한의 연평균 침투 횟수는 28.8회, 도발 횟수는 17.9회에 달한다.
1954년, 56년, 72년, 88년, 89년 등 단 5년을 제외하고는 매년 한국을 상대로 도발을 시도했다.
2010 천안함 연평도에 이어 2011 올해도
디도스 농협 청와대 사이버공격 방류공격 비방전 표류공작전 국방장관 암살시도 NLL월선포격 등.. 수많다
휴전 직후인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북한은 게릴라 유형의 침투작전에 열을 올렸다.
1958년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대한국민항공사(KNA) 여객기 창랑호가 평택 상공에서 무장공작원에 의해 납치돼 북한 평양의 순안공항에 강제 착륙 당했다.
당시 북한은 언론을 통해 "대한국민항공사가 '의거월북(자신의 의지로 군사분계선을 넘는 것)' 했다"고 거짓 발표했다.
이후 약 한 달 뒤 북한은 총 34명의 탑승객 중 26명만 돌려보냈으며 나머지 인원은 북으로 귀순했다고 주장했다.
'도끼만행사건'처럼 미군을 상대로 한 도발도 서슴치 않았다.
1968년에는 일명 '1.21사태'라고 불리는 청와대 습격사건이 있었다.
북한 특수부대 정찰국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습격을 위해 인근의 서울 세검정파출소까지 진입했다가 불심검문에 걸리자 수류탄과 기관총을 난사했다.
31명의 무장공비 중 29명은 사살, 1명은 북한으로 도주했으며 1명만 생포됐다.
유일한 생포자인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김신조는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침투 목적을 묻는 질문에
"박정희의 목을 따고 수하 간부들을 총살하기 위함"이라고 답해 국민들을 경악케 했다.
1980년대에는 장소나 상황 등을 교묘하게 활용하며 미군의 개입이 어렵도록 한정된 형태의 도발을 보였다.
1983년 북한 무장공비 3명이 미얀마를 방문 중이던 전두환 전 대통령을 노리고 아웅산 묘역을 폭파하는
대담한 테러를 감행했다.
이 사건으로 부총리·장관·수행원·기자 등 17명이 사망했다.
1986년에는 서울아시안게임을 불과 1주일 앞둔 시점에 김포공항 1층 입국장이 폭파되는 사건이 있었다.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 밖 쓰레기통에서 폭탄이 터져 5명이 숨지고 3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1990년대에는 김일성의 후계자인 김정일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대남 도발이 이어졌다.
1996년 강릉시 강동면 동해고속도로를 지나가던 한 택시기사가 바다에서 수상한 물체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북한 무장공작원 26명이 타고 있던 22전대 소속 상어급 잠수함이었다.
당시 이들은 남한 침투 후 모든 방첩 활동을 마친 후 북한으로 복귀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잠수함이 어망에 걸리며 좌초했다.
당시 우리 군은 연인원 150만명을 동원한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펼쳤다.
무장공작원 26명 중 11명은 자살했고 13명은 사살 당했다. 이 과정에서 1명은 도주, 1명은 생포했다.
이 외에도 1999년 6월 북한 경비정의 NLL 접근 및 함포 사격, 20 차례가 넘는 군사분계선 월선 공격이 단행됐다.
2000년대에는 김대중의 햇볕정책이란 대북대대적 협력지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북한의 대남 도발 수위가 더욱 전격적이고 대담하게 최고조에 이르렀다.
간첩은밀 침투전에서 김대중의 대북 교전수칙을 빙자한 말도안되는 대북사격금지 자승자박 명령과
몸으로만 밀어내란 남한 김대중정부의 어이없는 응사불허 틈타 남한이 지원해 준 자금으로 장비 함선 유류 비확충해 대놓고 내려오는 본격적인 함선 해전도발이 시작된게 2002년이고 NLL 시비도발이 시작된게 강정구 고은 리영희 같은 찬북 친북론주의자들의 NLL문제론 방조유도한 김대중정권 때 부터이다
모두의 기억에 생생하다시피 2002 월드컵 3,4위전 하는날 너무나 뜻밖의 연평해전피침으로 우리 아군함선 벌집처럼 피격폭침되고 많은 전사자 발생했고 ,
이 전혀 의외의 충격적 대피습으로 인한 국민적 트라우마였던지,
뭔가 전체적 분위기가 혼이 나간듯한 멍함때문인지 대한민국은 월드컵 마지막경기에서 11초란 세계최단시간 골 내주며 터키에 참패하여 그 뜨겁고 환희로웠던 2002 월드컵에서 유종의 미는 커녕 북에 의해 유종의 재를 맛보게 된다
이것은 며칠전 있었던 한일대표축구경기에서 2002 3,4위전 때처럼 경기시작 하는 날,
김관진취임시 천명한 선조치 후보고 원점폭격론 이후, 첫 NLL월선 대남포격으로 한국을 흔들어 한일전 사상 최초의 3:0 대패 37년만의 3점차 완패란 충격을 안게한 것과 매우 유사한 타격경황 악몽이다
그리고 바로작년 2010년 3월 백령도 해상의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침몰했다.
당시 승조원인 해병 104명 중 58명은 구조됐으며 40명은 전사, 6명은 실종자로 남아있다.
이에 대한 한미의 대응은 항모 조지워싱턴의 서해입구 목포까지만 입역 한미해상훈련 시위가 고작이었다
이 후 8월7일에도 NLL 150발 사격도발하며
한국국방장관 김태영과 대통령 이명박이 천안함때 '다음 도발시엔 절대 만두지 않겠다'
천안함 장례식때 해참총장이 '음도발엔 백배 천배로 응징하겠다' 란
그 천안함 때 각오다짐의 진정성과 반격반응의지 테스트 간 본 후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한국이 전혀 응사도 없이 경고 방송으로만 그치고
천안함 때의 보복응징 다짐들이 실제에선 부질없고 가망없는 식언허언들 임을 확인 확신하자
바로 석달뒤 천안함 격침암격 바로 그해 9~10월 100억 쌀 시멘트 등 수해물자 낼름 받아 먹고선
곧바로 11월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한창이었던 누구도 예상치 못할 때에 북한은 서해 연평도를 향해
625 이후 최초로 내륙포격하는 무차별 포사격을 가해, 우리 군 해병2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2명이 사망하고 연평도 전도민 피난하는등 전쟁 수준의 강도 높은 도발을 감행했다.
■보도편집 재작성 2011. 8.18 JKB Search
첫댓글 원본 글에서 사진이 엑박이라 보충할 수가 없습니다.진정 북한만행은 잊혀져 가는 현실이 안타까워 퍼 왔습니다, 읽어서 다시 한번 그 때를 상기해 보고자 합니다. 그들은 한국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는 데 바보 같은
북 친북 정치인들은 꼴깝떠는 작태를 경계하고 일깨워야 합니다. 한심한 일들이 지금도 눈앞에 전개되려 하는 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