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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1일 금요일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알폰소 성인은 1696년 이탈리아 나폴리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심이 두터웠던 그는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사제의 길을 선택하였다. 1726년 사제품을 받은 알폰소는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를 설립하고, 올바른 그리스도인 생활을 위한 설교와 저술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나폴리 근처에 있는 고티의 교구장 주교로 활동하다가 다시 수도회로 돌아가 1787년에 선종하였다. 윤리 신학의 대가로 존경받던 알폰소 주교를 1839년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
.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Jesus came to his native place and taught the people in their synagogue.
말씀의 초대 레위기는 파스카 축일 날짜를 법으로 정한다. 그만큼 중요한 축일이기 때문이다. 첫째 달 14일 저녁에 시작하라고 한다. 유다인들은 첫째 달을 ‘니산 달’이라고 하였다. 축제가 시작되면 그들은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었다. 레위기는 속죄의 날과 초막절에 대해서도 날짜를 정해 주고 있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가시어 사람들을 가르치신다. 하지만 그들은 겉모습에 매달려 그분의 ‘참모습’을 보지 못한다. 주님께서도 기적을 베푸실 수 없었다. 사람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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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정여립’은 조선 시대 선조 임금 때 역모 사건에 연루된 분입니다. 역사에서는 ‘기축옥사’라고 합니다. 천 명 이상이 죽거나 귀양 간 조선 시대 최악의 사건입니다. 정여립은 누구나 능력이 있으면 임금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 사람입니다. 그의 사상이 ‘조선의 신분 사회’에서 통할 리 없었습니다. 당연히 고발되었고 역모 사건으로 비화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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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십니다. 소년 시절의 추억이 담긴 곳입니다. 마을 한복판에는 시장이 있고, 왁자지껄한 거리를 지나면 회당이 보입니다. 야트막한 언덕 위의 흰 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년 시절을 떠올리셨을 겁니다. ‘어린 시절, 얼마나 크고 화려하게 보였던가!’ ☆☆☆
어린 시절 함께했던 친구가 성공했어도 고향 친구들에게서 인정받지 못하는 모습을 흔히 봅니다. 어릴 때 자신과 크게 차이를 느끼지 못했거나, 오히려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겼는데 더 훌륭하게 된 것을 인정하기가 어려운 모양입니다. 자존심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리 가까이 지내는 친구라도 그의 숨은 능력을 잘 볼 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판단한 까닭에 그 친구의 진면목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재능을 지니고, 또 어떤 능력은 어려서는 잘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과 성공을 인정하는 자세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요? ☆☆☆
편견은 무섭습니다. 한쪽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살면서 숱한 시행착오를 거듭합니다. 우리는 실패의 쓰라림과 좌절을 겪는 가운데 서서히 너그러운 사람으로 바뀌어 갑니다. 편견에 빠져 그릇된 판단을 내린 지도자도 적지 않습니다. 결코 하루아침에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훌륭한 지도자에게는 대부분 좋은 참모가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참모는 지도자의 편견을 지적하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양승국신부-
<10번도 더 바뀌는 인간> 수도자들의 양성담당 직무를 맡아 일하면서 가장 마음이 씁쓸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제가 한때 동반했던 형제들이 다른 공동체로 옮겨가서 제몫을 해내지 못할 때입니다. 수련자 때의 초심, 신선함, 초롱초롱함이, 얼마나 됐다고 벌써 퇴색해버리고, 인생 다 산 사람처럼 살아갈 때, 그래서 다른 형제들에게 짐이 될 때, 내가 공부 헛시켰구나, 내 부덕의 소치로구나, 하며 가슴을 치게 됩니다. 반대로 가장 큰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겠습니까? 제가 동반했던 형제들이 어느새 무럭무럭 성장을 거듭해서 이젠 큰 거목이 되고, 또 다른 스승이 되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큰 그늘 아래 머물며 기뻐할 때, 저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스승의 가장 큰 기쁨은 자신의 수하에 있는 제자들이 늘 자신의 보살핌 아래, 자신의 지도 아래, 자신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제자들이 나를 뛰어넘어 계속 일취월장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스승에게는 제자의 성장이 가장 큰 보람이요 행복입니다. 백지 상태였던 제자들이, 아무 것도 몰랐던 제자들이, 별로 바탕도 없던 제자들이, 그 부족했던 제자들이 내 도움에 힘입어, 각고의 노력 끝에 자신의 꼴을 갖추고, 자신의 몫을 다하고, 또 다른 스승으로 세상 앞에 우뚝 설 때 스승은 제 몫을 100% 다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고향 마을 사람들, 그들은 결정적인 실수 한 가지를 범합니다. 사람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10번도 더 바뀌는데,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가 인간인데, 인간이란 존재는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한없이 성장할 수 있는데, 그래서 하느님에게까지 도달할 수 있는데, 그들은 그 사실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고착되어 있었습니다. 한적한 시골에 파 묻혀 조용조용 살아가던 평범한 나자렛의 총각에만 고착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내재되어 있던 폭발적인 잠재성, 무한한 가능성을 몰라봤습니다. 예수님의 인성 안에 깃들어 있던 신성(神性)을 외면했습니다. 예수님이란 질그릇 안에 담겨져 있던 찬란한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평범함 안에 비범함이, 가까운 곳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의외로 우리 가까이 현존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아는 우리들 사이에 서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 역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마음을 크게 비울 때 사방이 천국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의 문을 활짝 열 때 모든 사람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까지 무기력하게 하는 작은 믿음 -전삼용신부-
제가 마리아론 시험 볼 때의 일입니다. 교수님이 성모님의 평생 동정의 의미를 지금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여기서 현대 젊은이들이라 함은 믿음이 없고 지극히 이성적이어서 처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는 평생 동정 교리를 설명해 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하신 말씀은 기억 했지만 내가 수긍하지 못하는 대답을 하기는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교수님은 수업 때 말씀하신 대로, “성경으로부터 시작 해야지. 성경 안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라는 예언도 있고, 복음에서도 처녀로 그리스도를 낳으시는 이야기가 나오잖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그 말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성경은 믿겠습니까? 하느님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성경도 믿지 않을 것인데 그 사람에게 성경을 대고 거기에 나온다고 믿으라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교수님도 제 말에 대해 대답을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느님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의 고장에 가셨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요셉의 아들 예수만 생각하며 그 예수가 메시아였음을 믿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의 고향에서는 기적을 행하고 싶으셔도 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능력도 발휘하실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저의 동기 신부 중 하나는 첫 보좌 발령을 자신의 출신본당에서 분가한 성당으로 받았습니다. 그 성당에서 첫 미사를 하고 제의를 입은 채 신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는데 한 할머니께서 다가오시더니, “야~ 고추 내놓고 다닐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신부님이 되셨네?”라고 하셨습니다. 그 분은 그 신부 할머니의 친구 분이셨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한 청년 자매가 뛰어오면서 사람 많은데 “오빠~”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년들과 술자리를 하여도 사제로서 인정해주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 사제가 사제가 되기 이전 모습을 더 좋아하였고 그렇게 대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신부는 신자들을 만나는 것보다는 주임 신부님에게 꼭 붙어 있으면서 필요하지 않으면 신자들을 멀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생각과는 반대로 사제가 된 사람은 사제로서 여겨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사제임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사제는 그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사제가 아니고 사제로서의 역할도 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인정하고 믿지 않는 고향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기적도 하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항상 사제 서품 피정 때 제 앞에서 나뭇잎이 떨어진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일주일 동안 피정을 하면서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마지막 날 저녁 산에서 내려오는데 한 조그만 나무에 나뭇잎이 유일하게 하나 달려 있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잎새’를 연상하며 바라보면서 내려오고 있는데 그 앞을 지나가자 바로 제 앞에서 뚝 떨어졌습니다. 저는 온 우주의 시간이 멈추고 지금 그 나뭇잎이 떨어지는 순간에 집중됨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섭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 태초부터 바로 지금 내가 지나갈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해 두신 나뭇잎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고, 이렇게 나뭇잎 하나로 주님의 섭리하심이 가슴 깊이 새겨졌습니다. 성경 말씀대로라면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기에 내가 사제가 되기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이끌어 주신 주님의 섭리까지도 느낄 수 있었고 이렇게 성소를 확신하며 서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게 뭔 대수라고...”하며 비웃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수녀님은 “저는 신부님 하는 이야기는 하나도 안 믿어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분들에게는 더 이상 섭리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저도 말로는 그 때 느꼈던 소름끼치는 기억을 표현해 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야기해봤자 무의미하겠다는 생각에 그 사람들에게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 느끼는 것은 ‘무기력’ 그 자체입니다.
이야기를 할 때 상대가 믿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면 답답하지만 아무 말도 더 이상 해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믿지 않는 마음은 전능하신 하느님까지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하느님도 우리를 통해서 무언가를 하시고 싶지만 우리 믿음이 부족하다면 그만큼 그 분의 활동은 내 안에서 제한됩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하시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의 믿음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사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권능도 보이실 수 없으셨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을 통해서 이 세상에 당신의 권능을 보이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이 세상에 사십니다. 좁쌀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그 분의 권능을 드러나게 하는 통로입니다. 나를 버리고 믿음을 증가시켜 주님께서 나를 통해 이 세상에 더 사시도록 해야겠습니다.
배 아플 때 -황지원 신부-
농담을 좋아하시는 노신부님게서 갑자기 저에게 물으셨습니다.
믿음2 - 보는 것과 믿는 것 - 박후임 목사-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 . 예수님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어디서 태어났는지 또 어렸을 때부터 성장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눈으로 봐왔기에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의 힘이 어디서 왔는지 , 어디서 얻었는지 궁금할 뿐이고 , 자신들에게 없는 것이 있으니 못 마땅할 뿐이다 . 예수님은 고향에서 기적을 많이 행하지 않으셨다 . 이상했다 . 내 생각 같아서는 믿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 기적을 많이 베풀어 생각을 바꾸도록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기적을 일으키시지 않는 예수님을 보면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김찬선신부-
저는 그때 없었지만
새벽을 열며
제 동창신부 중의 한명이 어느 본당의 주임신부로 있을 때 경험했던 일입니다. 그 신부는 항상 긍정적인 말을 하려고 노력을 했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신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데, 어떤 교우가 홍탁(洪濁)을 가져온 것입니다. 신부님께서는 언제나처럼 하나를 집어 먹고서는 “와~~ 너무 맛있어요.”를 반복하여 말하면서 홍탁을 드셨다고 합니다. 사실 신부님께서는 심한 냄새를 내는 이 홍탁을 좋아하시지 않았지요. 하지만 본당신부가 왔다고 홍탁을 들고 오신 교우의 성의에 감사해서 정말로 좋아하는 척을 했던 것입니다.
편견을 버리세요.
빠다킹신부
존중 -임문철 신부- 어느 날 택시를 타고 가는데 그만 택시 기사와 말다툼을 하고 말았습니다. 숨겨진 시간 속의 영적 여행 -이인주 신부- 사람들은 가끔 잠적 내지 잠수를 한다. 이유가 뭘까? 영원한 시간의 신비를 알고자 함이고, 영혼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길 원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히 설산이나 밀림, 우주를 여행한 사람은 그 안에 자신과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낀다. 그 느낌이 바로 영적 여행의 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그분의 숨겨진 시간 속에 내재되어 있는 영의 영역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아는 게 병이다 -서현승 신부-
복음에서 묘사하는 동네 사람들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모두 놀랐으면서도, 그분의 출신을 알아내고는 못마땅해했습니다.
주님을 믿는 마음 - 장용진 신부 -
저희 성당 앞에는 1.5톤 트럭을 가게삼아 여러 가지 과일을 파시는 분이 계십니다. 소규모로 하시는 일이다 보니 그 과일들의 상품 정도는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맛있지도 않은 과일을 맛있다며 판 경우가 여러 번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분을 상인으로서는 신용하지 않습니다.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박혜원-
◆고향은 마음의 안식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을 속속들이 드러내는 곳이다. 고향에서는 누구나 자기 자신의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벗은 몸으로 다니는 것과 같다. 또한 인간은 떳떳하게 설 수 있는 인간이 없다. 음행한 여자를 치려던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이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했을 때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님만 남았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다. 또한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은폐하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어둔 역사에 동참하는 공범자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익명성이 통하지 않는 고향에서 그 누구도 떳떳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그 속에 예수님도 함께 몰아넣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고와 지식 안에서 예수님을 인식하려 했다. 그리고 자기의 범주 안에 예수님을 넣으려 했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동생…. 이것이 우리 인간 인식의 한계다.
- 이영훈 신부 -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고향으로 가신다. 그러나 고향에서의 반응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고향 사람들이 평소에 알고 있던 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예수님의 모든 것 뿐 아니라, 그분의 가족에 대해서도 훤히 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과 다름없는 나자렛 촌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또 대단한 능력을 보이고 있으니 그들에게는 너무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그분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예언자, 구세주로 외쳤지만 그들의 눈에는 그저 30여년을 함께 산 동네청년에 불과했다. 그렇게도 예수님을 잘 아는 그들이 예수님의 참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우리는, 다 아는 것처럼 살면서 오직 자신만이 정답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오만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세상 진리를 다 안다고 하지만 실상 그들은 아는 것이 없다. 물론 학문적인 이론은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뭔지를 모른다. 많은 지식이 오히려 스스로를 오만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모습과 소리를 보고 듣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닫아놓았기에 더 이상의 다른 것을 찾을 수도 없고, 찾을 마음도 없다. 이미 그 사람에게는 그것은 그것일 뿐이다.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의 모든 삶의 의미, 십자가 죽음, 부활, 사랑, 용서 그리고 우리에게 하신 말 한 마디 한 마디, 수 없이 듣고 또 들었던 그 모든 것의 숨은 의미를 알고 있는가? 어쩌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내 자신이 만들어 낸 박제된 예수님은 아닌가? 우주보다 더 넓으신 예수님을 완전히 알고 있다고 자신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분을 더욱 사랑하는데 소홀하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며 끝없는 새로움이시다.
꽃다발 대신 푸대접의 원인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방문기를 들려준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마르 6,1-6)을 옮겨 쓰면서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장황한 비유설교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호수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고향을 떠나 요르단에서 세례를 받고 갈릴래아 전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한 지 3년만에 이루어진 첫 방문이다. 물론 나자렛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향사람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도 들었고, 그래서 예수의 가족들과 친척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서기도 했다.(마르 3,21) 한번은 예수께서 한참 설교를 하고 계셨는데,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예수를 불러달라고 청했지만, 그들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인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 12,46-50; 마르 3,31-35)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물러가야 했었다.
오늘 고향을 방문한 예수님께 나자렛 사람들이 준비한 것은 축하의 꽃다발이 아니라 푸대접과 불신(不信)이었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고향사람들이 처음에는 놀라움을 표하지만 그 놀라움은 예수께 대한 불신과 거부로 변한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라는 인물과 그분의 인격을 서로 떼어놓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예수께서 지니신 지혜와 능력 자체는 인정되지만 그것을 예수라는 인물과 결부시킬 수는 없다는 그들의 고집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예수가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요, 그들과 같은 범인(凡人)이라는 범주 안에만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지식과 지혜와 능력은 객관적으로도 존재한다. 오늘날 첨단 과학이 가져다 준 컴퓨터의 기술이 바로 그렇다. 사람들은 컴퓨터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와 능력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원초적으로는 사람 안에 들어 있었던, 사람의 주관적인 인격이 일구어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물을 배제한 그분의 객관적인 가르침과 업적만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물과 인격, 즉 예수님 전체를 믿는 것이다.
오늘 축일을 맞는 알폰소 성인의 설교를 들은 누군가가 그 자리에서 성인께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당신은 자신을 잊고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입으로만 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알폰소 성인이 자신의 삶으로 가르침을 보여주었듯이 예수께 대한 믿음은 그분의 가르침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긴 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의 직업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의 이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이 누구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알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압니다. 그 사람의 직업을 압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이처럼 그 사람에게 속한 무엇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고 정작 그 사람 자신만이 남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람 자신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는지 모릅니다. 그 사람 자신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비단 누군가 나를 제외한 다른 상대방에 대한 것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바로 나에 대해서도 해당됩니다. 과연 나는 나를 알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의 껍데기들을 바라 보면서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쉽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안에서 살아가면서 자기 편한 식대로 사람들을 만나고, 이 만남을 통해 얻어진 상대방에 대한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그 사람을 자기 틀에 맞추기 쉽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더 잦은 만남을 갖는 사람에게 이러한 모습으로 다가가기가 오히려 쉽습니다. 자기 식대로 사랑하고 자기 식대로 미워하며, 자기 식대로 믿고 자기 식대로 불신합니다.
만남이란 관계맺음입니다. 나와 나와의 만남, 나와 남과의 만남을 통해서 관계를 맺습니다. 참된 관계라면, 믿음의 관계라면 만남의 당사자인 나 뿐만 아니라 만남의 또 다른 당사자인 또 하나의 나와 남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지닌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틀을 고집한다면, 상대방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매여 있다면, 상대방을 알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지닌 무엇을 알려고 끊임없는 노력을 할 수 있겠지만, 상대방 자신을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하는 벗들을 생각해봅니다. 가족일수도 있고, 형제 자매일수도 있고, 친구나 동료일수도 있습니다. 과연 내가 그들에 대해서 무엇을 아는지 생각해봅니다. 과연 내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들 자신을 보고 그들 자신에 대해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나를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그마한 앎이라는 두꺼운 틀을 깨뜨려야 할 것입니다. 그들을 내 안에, 내 관념에 가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고, 자유로워진 그들을 만나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저 사람이 어디서?>(13,54-58)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놀래면서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이 모든 것을 얻었지?" 라고 감탄하며 말하였다.
지혜란 무엇인가? 지혜를 희랍어로 Sofia(소피아)라고 하며, 그 뜻은 "인생의 종합적인 사리판단력"이다. 즉 세상의 모든 일에는 크고 작은 것,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고, 선한 것과 악한 것, 바르고 그른 것이 있다. 그리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에 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바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상황을 잘 판단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먼저하고 나중에 해야 하는지, 등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다고 하고, 나중에 해야할 일을 먼저하고 지금 해야 할 일을 나중에 하는 愚를 범하고 있다. 무엇이 우선 순위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이 지혜는 어디에서 얻는가? 집회서에 보면 지혜에 대한 말씀이 있다. " 모든 지혜는 주님께로부터 오며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다.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법칙이다. 지혜로우신 분은 오직 한 분, 두려우신 분이시며, 당신의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이시다. 그분은 지혜를 만드시고 지켜보시고 헤아리시는 주님으로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과 모든 인간에게 지혜를 너그러이 내리시고 특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혜를 풍부히 나누어 주신다."(집회 1, 1- 10 참조)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러면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또 설상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을 모르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없다.
지혜는 우리가 하는 직업에서, 사도직에서, 학교 공부에서, 활동에서, 자기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지혜를 얻고 싶으면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깊이 묵상해야 한다. 얼마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느냐에 따라서 지혜의 폭은 달라질 수 있다. 말씀을 읽기는 읽되 그냥 읽는 것으로 그치면 지혜를 얻을 수 없다. 지혜는 깊은 샘물을 파듯이 깊이 깊이 말씀을 묵상할 때 얻을 수 있다. 인간의 세계와 사고의 범위를 넘어 하느님의 세계, 신비의 세계에로 깊이 내려갈수록 더 깊고 맑은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이 나를 보고 "참 예뻐졌다. 건강해졌네."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그런 말보다도 "참 성숙해졌네, 굉장히 지혜로워졌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지?"라는 말을 듣는다면 더욱 기분이 좋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지혜로워져야 한다.
그런데 몇 년동안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더군다나 성직자의 삶, 수도자의 삶을 살았는데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다른 진보가 없다면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일반사람들이나 커다란 차이가 없다면 그거야말로 불행한 삶이요 크게 잘못된 삶이다.
신앙은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가 갖고 있는 한계를 넘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점차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길들여 질 때 비로서 가능하게 된다. 신앙은 자기에게서 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다. 신앙은 자기의 좁은 세계에서 나와 넓고 깊은 하느님의 세계에로 들어가는 것이다. 신앙은 인간적인 생각과 능력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의 세계 즉 하느님의 세계, 하느님의 능력을 끌어 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휠씬 지혜롭고, 능력이 있고, 그리고 멀리 내다본다.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그 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고 오늘 복음은 끝을 맺는다.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지혜인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는 사람만이 지혜로워질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으면 우리에게서 아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30, 60, 100배의 결실을 맺을 것이다.
아니면 "저 사람은 저 형편없이 되어버렸네, 저 사람은 옛날 그대로잖아, 아니 저 사람은 더 못되었네, 성질은 더 나빠졌고, 자기 욕심만 차리고, 무척 추해졌구만. 불쌍도 하지!!!"라는 말을 들을 것인가?
인생은 빠스카이다. 시간이 흐른만큼 나는 변해간다는 말이다. 어느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가? 자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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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성당에는 올해 아흔 이신데도 불구하고, 매 주일 미사에 열심히 참석하시는 할머니가 계십니다. 그리고 이 할머니께서는 미사 전이나 또는 미사 후에 제게 박카스 한 병을 비닐봉지에 싸서 주십니다. 너무나도 감사하지요. 그 연세에 성당 나오시는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인데, 제게 매주 선물까지 주시니까요.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이 박카스를 한 병 주시면서 이러한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신부님, 제가 이렇게 사는 것은 박카스 때문이에요. 매일 박카스를 마시니까 이렇게 건강하게 장수하며 산답니다.” 할머니의 장수비결은 바로 ‘박카스’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찮으실 때에는 하루에 한 병 마시던 박카스의 양을 더 늘린다는 말씀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할머니에게 박카스는 만병통치약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박카스’가 만병통치약이 아님을 알고 있지요. 그러나 할머니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약, 어떤 병에도 가장 좋은 효과를 주는 약 중에서 ‘박카스’만한 것이 없습니다. 또 실제로 편찮으실 때 박카스의 양을 늘리면 실제로 병이 낫더라는 것이지요. 그만큼 할머니께서는 박카스에 대한 믿음이 강했고, 또 그 믿음에 의해서 남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효과를 보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가득하다면 어떨까요? 불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룰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다가 고향 역시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곳이기에 고향을 들리신 것이지요. 가족과 친지가 있는 곳. 또한 오랜만에 고향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크게 기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안에서 예수님은 커다란 불신을 발견하십니다.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을 평가절하하면서 이렇게 못마땅해 하고 있지요.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믿지 못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지 않습니다. 기적은 믿음을 통해서만이 그 의미를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기적이란 속빈 강정과 같기 때문이지요. 지금 나의 예수님께 대한 믿음 점수를 스스로 매겨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믿음만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커다란 기적을 가져올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내 믿음 점수를 매겨보세요. †♡†♡†♡†♡†♡†♡†♡†♡†♡†♡†♡†♡†♡†♡†♡†♡†♡†♡†♡†♡†♡†♡†
가짜 소금 †♡†♡†♡†♡†♡†♡†♡†♡†♡†♡†♡†♡†♡†♡†♡†♡†♡†♡†♡†♡†♡†♡†
하느님의 사람과 판단 - 이정석 신부-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연고와 서열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지역, 어느 집안, 어느 학교, 그리고 요즘엔 어느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에 따라서 잘나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합니다. 그렇게 공공연히 인정되는 줄을 잡는 것이 출세의 비결이라는 확신을 갖고 지금도 열심히 그런 사돈에 팔촌, 아니면 이웃사촌이라도 없는지 찾아보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좋은 학교의 기준은 어떤 교육을 시키느냐가 아니라 상급학교의 진학률과 취직이 전부인 사회. 그래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탄탄한 출세 가도를 만드는 것이 모든 학교의 졸업생들에게 주어지는 지상 과업이 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양승국신부- <더 이상 쓸쓸하지도, 허전하지도>
형제들과 한 학기를 마무리하면서 수도공동체 청빈생활에 대해 점검하면서, 저희 살레시안들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신 돈보스코의 말씀들을 묵상해보았습니다.
돈보스코는 평생 얼마나 청빈하게 사셨는지, 그리고 몸소 실천한 청빈생활을 얼마나 자주 형제들에게 강조했었는지, 가끔씩 회원들 사이에서 ‘이거 해도 해도 너무하시는군. 이렇게 먹고 어떻게 견뎌내겠어?’하는 불만이 터져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청빈생활과 관련해서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하신 돈보스코의 몇 가지 권고들입니다.
“한가함이나 논쟁을 피하고, 음식이나 음료 및 침실을 극히 간소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옷이나 음식이나 거처가 가난하다는 것을 세상 모두 인정할 수 있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하느님 앞에서 부유해지며 사람들의 마음의 주인이 될 것입니다.”
“편리함과 안이함과 욕망이 우리 안에 자라날 때 우리 수도회는 그 갈 길을 다 간 것입니다.”
“불편한 방에서, 허술한 가구를 놓고 사는 것, 검소한 의복을 사용하고, 검소한 식사를 하는 것들은 청빈을 서원한 사람에게 오히려 크나큰 영예가 되는 것이니, 이는 그를 예수 그리스도와 닮게 하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로 제대로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사는 것일까요? 갖출 것 다 갖추고 사는 것일까요? 누릴 것 다 누리고 사는 것일까요? 부족함이나 불편함 하나도 없이 희희낙락하며 사는 것일까요?
절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정 반대일 것입니다.
어느 정도 춥고 배고프다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늘 뭔가 부족함을 느끼고, 그래서 허전하고, 아쉽다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쓸쓸하고 외롭고 고달프다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고, 권력자들이나 세력가들로부터 박해를 받으면 수도자로 잘 사는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 예언자이자 모든 수도자들의 모범이신 세례자 요한께서 그렇게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대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청빈하고 당당한 삶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늘 세례자 요한을 보다 편안한 곳으로, 보다 잘 갖춰지고 안락한 곳으로, 보다 빛깔 좋은 곳으로 끌어내리려고 기를 썼습니다만, 그럴수록 세례자 요한은 더 깊은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더 깊은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부패 권력 앞에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다가 순교당하는 영예를 차지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리도 당당하고 의연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철저하게도 하느님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 뜻에 반하는 일과 맞서기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각오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용기의 바탕에는 그 무엇 앞에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는 정도(正道)만을 추구했던 삶이 있었습니다. 청빈하고 티 없이 깨끗한 삶이 있었습니다.
양심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제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은 때로 고독하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성실한 구도자의 길은 언제나 쓸쓸하고 고독하고 외롭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언젠가 주님께서는 그 쓸쓸함, 그 고독함, 그 외로움을 충만한 기쁨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더 이상 쓸쓸하지도, 고독하지도, 외롭지도 않을 것입니다. †♡†♡†♡†♡†♡†♡†♡†♡†♡†♡†♡†♡†♡†♡†♡†♡†♡†♡†♡†♡†♡†♡† 자기 인연에 가두지 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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