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안 합니다. 제가 서툴러서 같은 내용이 두 개가 올라갔습니다.
조선의 마사다
마사다(Masada)는 고대 이스라엘에 있었던 요새로 절벽 위 평평한 곳에 있었다. 사해의 서쪽 20km 에 위치했다. 마사다의 동쪽은 400m 서쪽은 90m의 가파른 절벽이었다.
험난하여 공격하기가 쉽지가 않은 요새였다.
1차 대(對) 로마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자 로마 대군이 침공하여 이스라엘 대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사막에 우뚝 선 마사다 요새는 몇 번의 공격에도 끄떡없었다.
요새의 이스라엘 군은 짬을 보아 하산하여 게릴라 활동을 하여 로마 주둔군을 괴롭혔다.
3년을 이렇게 저항했다. 로마군은 10군단 만 명을 동원하여 암반을 절벽 둘레에 쌓아올려 경사로를 만들어 요새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만 명이 넘는 로마군이었다.
그러나 저항하는 이스라엘 군은 한 명도 없고 960명 모두 자살해 버렸다.
그들은 10명 씩 한 조를 짜서 한 사람이 나머지를 죽이고 마지막에 자기를 찔러 죽는 방법으로 집단 자살을 하였단다. 여자 둘, 아이들 다섯이 생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때가 서기 73년이었다. 지금도 서쪽 절벽의 암반 로는 그대로 있어 걸어서 올라갈 수 가 있다.
이스라엘 각급학생들은 반드시 이곳을 견학하여 조상들의 용감했던 정신과 처절한 애국심과
고귀한 순국의 정신을 기렸고 각급 초급장교들도 이곳 순례는 필수코스라고 한다.
마사다의 불퇴전의 상무정신이 2000년이나 흘렀다. 마사다의 정신이 오늘의 후예들에게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작지만 강한 이스라엘이 되었고 2차 대전이후 주위 아랍 국가들과 4차례에 걸친 전쟁을 하여 전승하였다. 마사다 정신을 계승한 유태인들 남자는 30개월, 여자는 18개월 병역을 필 하여야 한다. 우리는 남자만 18개월, 병력은 60 만 명에서 50만으로 감축 한단다. 북한 남자의 군 복무연한은 10년 여자는 7년이고 병력은 120 만 명. 우리는 질려버린다. 우리병사 한 명이 북한군 두 명이상을 당할 그런 당찬 군대인가? 이스라엘은 인구가 8백 8십만인데 남자는 30개월 여자는 18개월 의무적으로 복무한다. 이스라엘의 정규군이 십육만 8천, 예비군이 사십사만 명이다. 인구 팔백 팔 십 만 명 되는 작은 나라가 주위에 수 억 되는 아랍 제국에 군림하고 있다. 비결은 효율적인 예비군 운용에 있다. 유사시 항상 전투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스라엘 예비군이다. 평화와 복지 천국으로 알려진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여자도 징병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에서 전쟁의 불꽃이 튀면
이에 대응하려고 여성 징집을 시행했다. 복무기간 18개월이면 군 업무를 알다가 내려오는 기간이다. 일본 중국 등 강대국들에 둘러 쌓여있는 남한은 복무기간을 늘이지 못하면 예비군 운용을 이스라엘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안보불감증에 걸려있어 언제고 제 2의 ‘한일 합방’을 만날지도 모른다. 역사를 잊는 민족은 그 역사를 되풀이한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에 대비하여 한다.
조선의 마사다인 광성보 스토리가 안보 불감증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에겐 상무정신(尙武(精神)이라는 이 가슴 저리게 절절한 말이 사어(死(語)가 되어가고 있어 안타깝다.
젊은이들은 병역이라면 치를 떤다. 일반인 병역 면제율 6.4% 재벌들 33%정도 되고 고위 공직자들의 병역면제 받은 아버지와 병역 면제 받은 아들이 92명 그리고 고관대작 아들은 일반 병역의무자보다 무려 7배 내지 30배 더 면제를 받는다.
육군사관 생도들이 여학생 집단 성 폭력 사건
갑 질의 경계를 넘어 사병을 종으로 부린 4성의 철없는 장군
눈만 뜨면 전선으로 달려가야 할 장군들이 골프장으로 달려가는 슬픈 현실
장군들이 방향감각을 잃었기 때문이다.
30억 짜리 군함 부속을 300억에 구매한 해군 담당자들.
영국군에 납품한 소총은 총알이 나가지 않고 폭탄 감지기는 작동을 하지 않았다.
야전 병원용 침대는 대당 130만원에 주고 구입했는데 인터넷에서 6만원 미국에서도 수 십 만원이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이런 방산(防産) 비리가 율곡비리에서 비롯하여 쉬지 않고 않고 터진다는 점이다. 옛 난지도 어마어마한 쓰레기장에 불이 붙으면 별 수를 다 써도 속에서 계속 터져 나오는 불길을 잡기가 어려웠다. 이 방산비리도 난지도 불처럼 끄기가 어렵다. 그 뿌리가 워낙 깊어 여간해서는 꺼지지 않는 이치다. 워낙 깊고 광범위한 군내의 비리. 다른 것도 아니고 나라를 지키는데 쓰는 무기가지고 장난하는 자들은 몽땅 중형에 처해야 한다. 무기를 가지고 부정을 저질러 배를 채우는 것은 나라라는 선체에 구멍을 내는 일이고 이완용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이다.
이 순신 장군 앞에서라면 모조리 처형되고도 남을 만한 인간들이 별을 몇 개 씩 달고 우쭐거린다. 이렇게 썩어가고 있는데 상무(尙武)의 꽃이 피기를 어떻게 기대 하겠는가? 핵무기 생화학 무기 빼고도 우리의 두 배나 되는 120만 북한군을 어떻게 당할 것인가?
우리에게도 마사다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더 처절한 우리 선열들의 희생의 피가 면면히 흐르는 광성보(廣城堡)라는 마사다가 있다. 마사다의 장병들은 로마 군대를 맞아 자살이라는 소극적인 방법을 택했지만 광성보의 조선 군인들은 최후의 일인 까지 결사항쟁하다 옥쇄(玉碎) 하였으니 자결하는 것 보다 더 처절하고 더 몰아적(沒我的)이고 더 비극적이 아니겠는가?
광성보의 그 처절했던 작은 요새에 학생도 성인도 찾아보아 산화하신 분들의 불굴의 투지와 희생의 삶을 음미하며 슬어져가는 상무정신의 불씨를 되 살려야 하겠다.
신미양요(辛未洋擾)....조선의 마사다
미국의 로버트 슈펠트제독은 셔만호의 진상과 통상 가능성에 대해 알아보라는 명령을 받고 1866년 함선을 끌고 황해도 장연 앞 바다에 정박하여 조선 조정에 통상의 문을 열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으나 단호히 거절당했다. 다음 해 군함 셰난도어 호를 보내어 셔만호의 행방과 생존자 인계와 통상 교역의 문을 열기를 요청했으나 조선 정부에서는 여전히 거절하였다. 셰난도에서는 함포 사격을 하며 위협했으나 조선의 해안포도 응사하는 것으로 미국이 요청하는 것을 모두 거절했다.
한편 미국 측에서는 무력 충돌 없이 조선정부로부터 셔만호 자초지종을 알고 궁극적으로는 통상 조약을 맺고자 함이었는데 완강한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그들의 노력이 조금도 진전을 보지 못했다. 더욱이 1868년 오페르트 일행이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 발굴 건으로 대원군의 서양인들에 인식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
대원군은 지난 날 이양선들을 격퇴 시킨 전례가 있었다는 것을 떠 올리면 긴장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사람은 난관에 봉착할 때는 이를 헤쳐 나가는 일이 어렵지만 많은 어려움을 헤쳐 나온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용기가 생긴다. 조선에서도 어재연을 순무중군으로 임명하여 급히
강화도 방어의 임무를 맡긴다. 얼마 되지 않아 어재연 장군의 동생 어재석이 군영으로 들어와 형을 찾는다. 어 재연은 아우를 보고 “어쩐 일이냐?”고 묻는다. “형님이 싸우시는데 가만히 있는 것이 괴로워서 저도 미군과 싸우려고 왔습니다.“ ”아니 우리 둘이 여기서 죽으면 두 집 집안은 누가 돌보냐? 어서 돌아가거라.“ ”이제 형님 장조카가 머리가 커서 제가 없어도 두 집의 대소사를 볼 수가 있습니다.“ 어 재연은 더는 말을 하지 않고 병사를 한 명 불러, “저 자가 내 동생인데 나를 따라와서 싸우겠다고 하는데 병기며 화승총을 지급하고 사용법을 가르쳐 주게.“ ”알았습니다. 장군님.“ 경기도 이천 어재연 형제네 집에서는 부인들이 그들의 신표를 정하여 어재선 에게 알려주었다. 까만 띄는 어재연 장군이 맬 것이고 어재선은 버선을 뒤집어 신는 것이 이 형제의 신표였다. 남편들이 죽을 것을 전제로 하고 남편의 시신을 찾기가 쉽도록 신표를 정할 때의 그녀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동서, 신표를 정하여 시 동생 편에 보내고 나니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어려서 신랑을 만나 25년 이상을 몸과 마음을 섞고 살아 이제는 남으로 만나서 혈육이 되었는데 여기서 헤어지면 나도 살기가 어려울 것 같애.“ ”형님 저도 20년 쯤 그런대로 재미있게 살아왔는데 갑자기 왠 날벼락 이란 말인가요? 아범한테 변이나면 나보다도 아이들이 불쌍해서 어떻게 하나요?“
둘이서 한탄만 하다가 눈물을 흘린다. 하늘이여 아무 죄도 없는 이 동서들의 남편들을 구해 주소서.
대원군은 중국 주재 로우 공사에게 미국이 군함을 보내지 말게 해달라는 편지를 청국을 통하여 날리고 충청도 강화도 주위의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하였다.
1871년 미군은 로우 공사 지휘 하에 5척의 군함을 발진 시켰다. 로우 공사와 로저스 아시아 함대 사령관은 미국이 일본을 포함(砲艦) 외교로 굴복 시켰듯이 조선도 여러 함정의 위용을 과시하며 굴복 시킬 것을 다짐하였다. “로저스 제독님, 셔먼호건도 이번에는 해결하고 우리가 군함 3 척으로 일본의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조선은 일본 보다 훨씬 작은 나라인데 이번에는 꼭 목표를 달성해야겠습니다.”
“저도 공사님과 같은 생각입니다만 조선의 쇄국이 워낙 철저하여 쉽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의 함대와 육전대 해병대로 서울을 점령해야 합니다.” 로우는 청국을 통하여 자기들 뜻을 조선에 알리도록 요청하였다.
조선은 미국의 요구를 거절했다. 박규수가 답장을 썼다, “미국 배가 총포를 백성들에게 쏘아 여러 명 죽어 성난 백성들이 셔만호를 불 지른 것이고 통상 건은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기 때문에 중국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미국은 무력 침공하기로 결정하였다. 침공하기 전 프랑스에게 연합하여 침공하기를 제의 하였으나 프랑스는 거절하면서 병인양요 때 써 먹던 지도를 주었다.
1871년 5월 16일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는 프리깃함인 기함 USS 콜로라도, 알래스카, 팔로스, 모노케시, 베네치아 이상 5척을 지휘했다. 그리고 함대에는 500명의 해군 육전대와 150 여명의 해병대가 승선하고 있었다. 이 함대는 5월 14일 나가사끼를 출발하여 북상하고 있었다. 미군함대는 한 반도 서해안을 따라 북상했는데 남양 부사 신 철구가, “이것들은 어느 나라 배요?” 라고 물으니 “미국 군함들이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당신은 알 것 없고 조선의 대신 급이 오라고 연락 하시오.”
신 철구는 즉각 한양에 보고 하였다. 대원군은 미국 함대와 접촉을 포기했다. 미국 함대는 수심을 재면서 천천히 북상했다.
미 함대가 접근 하면서 조정에서도 강화도에 병력을 증원한다.
훈련도감 보군 2초(硝)......1초는 약 125명
포병 300명 화약 1천근
수노궁 10장.....연발 발사 가능한 발사대임. 화살 300지
금위영 어영청 보군 1초 금위영... 조선후기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해 중앙에 설치되었던 군영.
어영청... 이괄의 난 이후 설치, 효종때 북벌 운동 추진의 핵심 군영 도성방위 임무. 별파진 10명 .... 조선 후기 무관 잡직(雜織)으로 편성되었던 특수병종
총융청 아병 1초...조선 후기에 탄생한 중앙군영
불량기 30문 구환 2000개....화승총과 탄환
대포 3좌 화약 1천근
다음은 미 해병대를 지휘하여 광성보를 점령한 미 해병대의 틸튼 대위가 자기 아내 내니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나라(조선)는 아름다워요; 아름다운 언덕에 둘려 쌓여있고 사방으로 뻗어있 는 계곡이 있고요 또 이 나라는 모든 종류의 곡식이 재배되는데 지금이 (5월인데도) 추수의 색깔로 변하고 있답니다. 모든 것이 아름다운 녹색이고 자그마한 볏짚 지붕을 한 집들은 아늑하고 소나무와 다른 상록수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군함을 타고 서해안을 천천히 거슬러 올라오면서 거칠고 완고한 해병 대위가 수채화 그리듯 조선의 아름다운 풍광을 그려 아내에게 보냈다.
우선 미군 군함 두 척이 천천히 강화해협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조선군이 강화도와 본토사이의 해협 강화도 쪽 끝 손돌 목을 지키고 있었다. 손돌 목 돈대(평지 보다 높고 평평한 땅)의 3개의 대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장군님, 저기 미군배가 두 척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우리해협에 들어오는 배들은 대포를 쏘아 내 쫒아야 한다. “당장 대포를 쏘라.” 어재연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군 함정을 향하여 포탄을 날렸다. . 미군의 함포가 응사하기 시작했다.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어찌나 치열했던지 남북 전쟁에 참가했던 한 함장이, “이것은 남북전쟁 때 보다 더 치열했다.”라고 말 할 정도였다. 미군 함정이 약간 파손 되었고 조선군 1명이 사망했다
조선의 대포는 홍이포(紅夷砲)라 하는데 조선 중기에 만든 대포로 포탄 사정거리는 700m 였고 수 백 년 동안 한 번도 개량하지 않았다. 대포는 나무 기둥에 밧줄로 엮어 대포가 잘 움직이지 않게 하고 쓴 기적(?)의 대포이다. 명중률도 형편없었다. 미군 포탄은 1,000m 이상이었다. 포격전에서도 조선군이 불리했다.
미군은 일방적으로 휴전하고 대원군에게 조선 포대가 사전통고 없이 포격한 것에 대하여 사과하고 미국과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계속 요구하면서 10일간을 기다렸다. 대원군은 거부했다. 이제 미군의 인내심이 다 닳아버렸다. 대원군은 로우 공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 올봄에 중국에서 귀국 편지를 전해 왔기에 우리 조정에서 의논하고
귀하에게 중국을 통하여 회신하였습니다. 귀국은 예의를 중시하고
함부로 군대를 동원하여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어찌하여 함선을 동원 하십니까?
한 나라의 영토에 외선이 들어오면 이를 제어하는 것은 모든 나라의 규범 입니다. 우리나라 바다에 들어온 귀선들에게 포격을 가한 것은 정당한 행위 입니다. 또 우리가 500년 동안 외국과 교역을 하지 않았는데 새삼스럽게 교 역할 수는 없습니다.“
로저스 제독은 즉각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6월 9일
로저스 제독은 다음 날 6월 10일 공격일로 정하고 “사과와 보상을 받아내는 것”을 구실로 하고 전투 지역은 “강화도”에 국한한다는 것이었다.
전투가 끝날 때 까지 이 원칙은 제대로 지켜졌다.
강화도만 점령해도 조선의 한강해운은 마비된다는 것을 미군도 진작 알았다.
6월 10일
미군 상륙작전이 시작 되었다.
포함 모노사끼와 팔로스가 최초로 해안에 나타났고 소형전함 4척 소형단정 20척에서 미 해병대 150명 해군 육전대 500명 도합 650명이 상륙하여 초지진으로 맹렬히 돌진 했다. 미군은 무릎 심지어는 팬티까지 차오르는 갯벌 속에 묻히어 여러 시간을 고전했다. 초지진에는 이렴이 이끄는 수비병 100명과 대포 3문, 소총정도의 병력과 화력이 있었으나 미군의 수륙 양면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덕진진 쪽으로 물러났다. 퇴각했던 조선군은 야습을 감행했으나 잘 경계를 한 미군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로저스 제독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전투원들을 소집하여, “조선이 사과하고 배상하겠다면 전투를 즉시 중지해야 한다.“ ”그리고 민가에 들어가 약탈하지 말 것.“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읍에 들어가 갖가지 보물을 약탈한 것에 비하면 훨씬 규율아 엄하고 신사적이다.
덕진진이 다음 목표였다. 6월10일은 초지진에서 숙영했다. 6월 11일 아침부터 미군의 함포 사격이 덕진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조선군은 견디지 못하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미군들은 덕진진에 입성하여 60문의 대포를 바다 쪽으로 굴러 떨어뜨렸다. 달아나는 조선군들은, “미군들은 프랑스군과 다르네. 저 무서운 포화의 공격을 막는 일이 불가능하단 말일세.“ 라고 말하고 혀를 찼다.
“미군의 화력이 워낙 강력하여 우리의 대포나 화승총으로는 대적할 수가 없더군.”
“그래도 우리가 지금 광성보로 가서 수비하는 병사들과 합류해야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아야지.“ 그들이 광성보에 들어 갈 지음 군함에서 쏘는 포탄 파편이 비오듯 했다. 파편을 머리에 맞고 천천히 뒹굴며 죽어가는 병사, 파편을 넓적다리에 맞고 비명을 지르는 병사, 성벽 밖으로 고개를 내 밀다가 이마에 총탄을 맞은 병사들.
전쟁터에서는 흐르는 핏물 속에 인간의 생명이 흘러서 간다. 처절하게 가 버린다.
조선 병사들은 세계 최초의 방탄조끼를 신미양요에서 착용했다. 광목 13겹으로 허리에 두르면 120m 거리에서 화승총으로 사격하면 이 열 세 겹을 뚫지 못했다. 이것을 면제배갑(綿製背甲)이라 하는데 이걸 착용하면 6월의 여름날 흐르는 땀과 무게를 병사들이 이기지 못하였다. 이 배갑 한 개가 미국 국립 중앙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미군의 마지막 공격 목표는 광성보였다. 이곳에 속한 손돌목에서 미군 함에 대포를 쏜 것이다. 어 재연은 휘하에 4개 초(약 500명)를 거느리고 있었고 143문의 대포가 있었다. 그는 미국군대와의 싸움에서 승산이 없을 것을 진작 생각했지만 병사들에게는 “최후의 일전을 각오하고 나라를 위하여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그들의 성명 하나 하나를 부채에 적었다. 적과의 전투에서 전멸해도 이름은 남는다. 장군의 부하에 대한 사랑이 읽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부하들도 저런 심지가 깊은 장군을 중심으로 하여 일심동체가 되었다.
그 사실을 부채가 증명했다. 이 부채는 미 해사 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다.
미군은 광성보도 초지진이나 덕진진 정도로 쉬운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위기가 달랐다. 우선 높다랗게 펄럭이는 수(帥)자기. 이것은 장수인 어재연 장군을 상징하는 기이다.
광성보 오르는 길은 험했다. 대포를 로프에 매어 끌고 갔다.
전함 모노사끼가 광성보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끌고 온 대포도 포격을 개시했다. 오전 11시 미군은 광성보 공격을 개시했다.
이 때 광성보에서는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들렸고 조선군들도 이상한 소리를 냈다.
생전 처음 저런 소리를 들은 미군들은 잠깐 당황했다.
먼 훗날 1950년 한국 전쟁 때 중공군이 미군을 상대로 피리, 북, 꽹가리를 불고 두들기면서 미군을 얼어붙게 만들었는데 조선군도 이미 1870년대에 이 무기들을 사용한 것이 신기하다.
우리의 화승총은 한 발 쏘고 다음 발을 쏠 때까지 1분이나 걸리는 데 반해 미군이 쓰는 레밍턴이나 스프링필드 소총은 1분에 6발 내지 8발 발사가 가능하다.
양측 소총 성능의 비교 하나만 가지고도 승패는 이미 끝났다.
미군은 3면에서 광성보를 향해 진격했다.
선두는 맥키 중위였다. 그의 아버지도 군인으로 멕시코 전쟁 때 전사하였다.
그는 미모의 약혼녀가 있었는데 최근에 파혼하고 다른 사람과 데이트 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의 가슴은 찢어질 것 같았다. “차라리 사느니 전장에서 죽고 말자.”하는 비통한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중위는 제일먼저 성위에 올랐다. 조선군이 쏜 총은 멕키의 급소를 맞혔다.
쓰러진 맥키를 조선군이 창으로 찔러 살해한다.
그러나 미군은 조금도 굴함이 없이 조선군을 압도했다. 성벽을 넘고 또 넘었다.
광성보의 성의 높이는 도회의 성벽보다 훨씬 낮았다. 그래서 미군들이 쉽게 오르고 보(堡)안으로 뛰어 내릴 수 있었다. 미군은 정면의 언덕으로도 돌진했다.
전세는 일방적이었다.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백전노장들인 미군에게 조선군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미군과 백병전을 하였다. 무시무시한 노래를 부르며 돌격하였다. 다음과 같은 군가를 노래하며 미군들에게 돌진하였다.
“인생(人生)의 목숨은 초로(草露)와 같고
이씨조선 5백년 양양(襄陽)하도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 아~! 이슬 같이 죽겠노라.“
노래 할 쪽은 승전에 취한 미군이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조선 병사들이 불렀다는 것은 자랑스러우면서도 가슴 아프다. 저들은 스스로의 장송곡을 부르면서 죽어 갔다. 조선군이 군가를 부르며 미군에게 달려 들 때 이를 본 한 미군 병사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치열한 접전이 지속되는 가운데 조선군들은 갑자기 이상야릇한 군가를 부르기 시작 했다. 세계의 어떤 음악도 이처럼 소름끼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저절로 몸서리쳐 지게 하는 이 곡조는 총칼이 맞부딪치는 소리보다도 더 오랫동안 우리를 움츠러들게 했다. 그들은 신식 무기 앞에서 돌과 창으로 대항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필사적으로 싸웠다”
창을 찌르면 창이 휘어져 버렸다. 돌과 흙을 던지며 달려드는 조선군. 돌이나 흙이 없으면 화승총알을 던지며 달려들었다. 어느 한 명 달아나거나 항복하는 병사가 없었다. 여름날 나방이가 불을 보고 달려드는 것 보다 더 치열하게 달려들었다.
부상을 입거나 더는 어쩌지 못할 군사들은 광성보 담 넘어 강화해협에 몸을 던졌다. 미군이 항복하라고 손짓하면 목을 찔러 자살하였다.
이 배우지도 잘 먹지도 못한 조선군들 어디서 저런 결기가 생겨 죽음을 초개(草芥)처럼 여기고 미군에게 달려드는가? 무엇이 저들의 결사항전에 불을 지른 것인가?
대문을 잠그고 나라의 경제를 망쳐놓은 대원군을 위해서 인가 아니면 굿과 점에 미쳐 국고를 탕진하는 민비 때문인가? 그것은 답이 아니다. 침략하는 외적을 내 한 몸을 불살라 물리쳐야 겠다는 숭고한 사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도 625 때도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은 이름 없는 민초(民草)들이었다.
그들은 아무리 썩어가는 나라이긴 해도 내가 태어나고 자란 흙냄새 향기로운 조선을 위하여 미천한 몸을 던졌다. 어재연 장군도 그의 아우 어재선도 장렬하게 전사 하였다. 장군의 수(帥)자기는 미군이 내리고 대신 성조기를 높이 올렸다.
미 해군 박물관에 전시된 수자기는 10년대여 조건으로 2007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투는 15-20분 만에 끝났다. 전투에 참여했던 슬라이 소령은 그 처절했던 백병전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광성보 함락에 있어 미군의 작전은 힘겨운 것이었다. 이곳은 강화의 진지 중 가장 요충지였기 때문에 조선 수비군은 결사적으로 싸웠다. 미군은 함성을 지르며 진격 해 들어갔고. 탄약을 갈아 넣을 여유도 없었던 조선군은 창과 칼로 방어했다. 그러 나 대부분은 무기도 없이 맨주먹으로 싸웠으며, 모래를 뿌려 상대방의 눈에 손상 을 주려 했다. 그들은 끝까지 항전했고 수십 명은 총탄을 맞아 광성보 마당에 나 뒹굴었으며, 어떤 자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거나 물속으로 투신했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총을 단 한 자루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으며, 노후한 재래식 무기를 가지 고 미군의 총포에 대항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싸우면서 진지를 사수 하다 장렬하게 죽어갔다.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용감하게 싸운 국민은 다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미군은 조선군의 대포며 장비 등을 불 지르고 본선으로 돌아갔다.
양측 희생자는
미군 3명 사망. 10명 부상
조선군 243명 사망(이 숫자는 미군이 세어서 확인한 것. 추가로 바다에 몸을 던진 조선군 약 100명)
중상자로 포로가 된 조선군 20명
미군은 이 포로들을 미끼로 쇄국이 문을 열어 보려고 시도 했으나
"수치스럽게 살아 포로로 잡힌 이들은 알 바 아니다.“ 조선 정부는 이렇게 잔인하게 답하였다. 이 포로들은 미군이 주는 식사도 내 던지고 대단히 반항적이었다. 미군은 할 수 없이 이들을 강화에 두고 떠났다. 조선 정부는 포로들을 인수하여 치료하고 후하게 대해 주었다.
이건 전투가 아니고 학살이 이다. 미군들도 전투에서 이기고 투지에서 진 전투라고 부끄러워했으며 고국에 돌아가서도 이 전투에 대해서만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이 강화도 전쟁을 “꼬마 전쟁(Little War)"라고 전쟁을 과소평가했다. .
미군은 조선 병사의 시신들의 일부는 땅 구덩이에 수 십 명을 던져 한꺼번에 묻어 버리고 일부는 태워버리고 일부는 땅바닥에 그대로 놓아두었다. 이 구덩이를 파서 어재연 형제와 식별이 가능한 다른 병사들은 따로 매장하였다. 어 장군 형제의 시신은 고향인 음성에 묻혔다. 광성보 전투이후 조정에서는 김 선필을 진무중군으로 임명하고 초지진에 진을 치고 있던 미군을 야간 기습하여 괴롭혔다. 미군은 초지진을 버리고 함정에 승선 했다.
미군은 아직도 통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고 계속 조선 정부에 통상을 요청하였으나 조선은 번번이 거절하였다. 미군은 더는 미련을 갖지 않고 철수해 버렸다.
광성보 전투에 참전했던 미 해병 틸튼 대위가 아내에게 쓴 편지를 번역하였다. 참고로 대위가 쓴 편지는 미 해병대의 역사적 기록물로 지정 되었다.
“ 조선 군인들은 호랑이처럼 싸웠습니다. 그런데 내가 조선의 요새들에서 목도한 것을 말 하자면 몇 명은 그들의 근처에서 폭발한 9인치 포탄에 의해서 석탄처럼 타 버렸거나 심하게 훼손 되었습니다. 40명의 시체가 우리 배의 선미 갑판 보다 크지 않은 곳에 쌓 여 있었습니다.
어떤 군인들은 성벽너머를 바라보다가 총탄이 이마를 맞은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돼지처럼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는 약 200명을 죽였는데 나는 약 50개 시 신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내 눈엔 저들이 죽은 수 돼지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우리 배 갑판장이 동정하는 표정을 짓고 나 보고 심하게 다친 조선군들의 이마를 사격하면 괴로움 에서 헤어 나올 수가 있으니 나보고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 보고 그가 원하는대로 하면 살인이라고 했더니 그는 그대로 가 버렸습니다.....“
틸튼 대위의 이 편지는 우리를 슬프게 그리고 분노하게 만든다.
조선인 시신을 ‘수 돼지’라고 한 그나 심심풀이로 중상을 입고 신음하는 조선군인들 이마에 권총을 쏘겠다고 한 갑판장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두 사람 모두 인간의 존엄에 침을 뱉는 더러운 존재들이다. 전사한 적군의 시신을 보고 수 돼지라고 하는 틸턴 대위의 입은 이성을 모르는 돼지 입이다.
6월 12일
미군은 서둘러 강화도를 빠져 나갔다.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외교전에서는 얻은 것이 없었다. 로저스 제독은 전날 전투에서 조선군이 저항하는 것을 보고강화도 섬 한 개를 점령하는데 그렇게 혼쭐이 났는데 한강을 거슬러 올라 한양을 점령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 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미군이 퇴각하기 전 불에 태운 51개 시신은 형체가 구분이 안 되어 한 번 더 화장한 다음 다른 전사자들과 함께 매장되었는데 이를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라 하는데 광성보 에 있다. 어재연 장군과 어재순의 시신은 신표 때문에 찾아서 충북 음성에 나란히 묻혔고 나라에서는 어재연에게는 병조판서 및 군부사(군사를 맡아 보는 중앙관)가 추서되었고 어재순에게는 이조참의가 추서되었다. 높은 관직을 받으면 무엇 하나? 이제는 이 세상에 있지 아니한 것을.
대원군은 또다시 환희작약(歡喜雀躍)했다. 미국 함정들이 한강어귀에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어 재연이하 젊은이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미군이 한강으로 올라오지 못했는데 대원군은 자기 공으로 돌렸다. 고개를 들던 통상 개화파들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는 또다시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라고 명령한다. 춤추고 척화비를 세우기전에 그는 자기 때문에 순국한 많은 군사들을 생각하여 침묵 했어야 했다. 권좌에서 추락하는 것이 두려워 폐쇄정책에 매달린 대원군. 그로 하여 국가의 근대화 산업화는아주 손도 못 대었다. 역사는 그것을 준엄하게 심판해야 한다.
광성보, 규모는 작지만 조선군대가 미국군에게 전멸한 가슴 아픈 곳이다.
마사다, 이스라엘군은 로마군이 쏟아져 들어갔을 때 전원이 자살하고 말았다.
피맺힌 한으로 말하면 광성보가 마사다 보다 엄청 더할 것이다.
자살하는 것은 타살 당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마사다의 병사들이 나라를 위하여 순절(殉節) 했듯이 조선 병사들도 나라를
위하여 젊음을 바쳤다. 이스라엘 사람들 그리고 세계 도처에 사는 유태인들이
참배하면서 애국심을 갈고 닦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도 광성보를 참배하면서 창고에
들어 있는 녹슨 애국심을 갈고 닦아야겠다.
각급 학생들이 광성보의 전말을 알게 하고 각종 성인 단체에서들도 이곳에 한 번은
들려서 광성보에 어린 참혹한 전투에 대하여 배우고 신미년 전사들을 추모하며 병이든
애국정신을 치유해야겠다.
주한 미국인 학생들이 해 마다 광성보에 소풍 겸 견학을 온다.
미국인들이 미국인 관광객들이 해마다 광성보를 찾아 무명용사 묘인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에
꽃을 놓고 처절하게 가신 조선 병사들의 넋을 위로한다.
적군의 묘지에 꽃을 바치는 미군의 후손들이 아름답고 고맙다.
*신미양요 미국 측 기록
조선군은 창, 칼로 우리에게 끝까지 대항했다.
그것마저 없는 자들은 우리에게 흙을 뿌렸다.
비록 우리가 이긴 전투지만 그 누구도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어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 싸움은 미 해군 역사상 최초의 실패 극이다."
* 미군 병사의 기록
남북전쟁 때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포화와 총알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 블레이크 중령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백여 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강물에 투신자살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 앨버트 가스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신병들 장교들 가릴것 없이 정신무장이 제대로 되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요즈음 기대는 것은 20대들이 이성을 찾는 것 같습니다. 고리 5 6호 원자력 발전소 가동 재개도 20대의 힝이요
지자체 독립강화 방안에도 20대가 절대적으로 반대했습니다. 한 번 기대 해 보아야 지요.
지금 가장 문제되는 것은 상무정신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장교들은 골프치고 사병들은 연약하여 엄마찾고.... 이것은 대통령부터 책임질 일입니다.
북한 사람들이 살기가 힘드니까 전쟁이나 터지라고 노래를 부른답니다. 여기는 정신적인 비만증에 걸려 있는데다가 대통령은 인기를 끄느라
가지가지 중독을 우리에게 심습니다. 북한이 두렵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다 벗고 있는데 쳐들어 오면 어떻게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