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신학교육과 목회자의 현실(오광만 교수)
“새 관점”의 문제는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듯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라는 구원론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론의 주창자들이 제안한 이슈는 사실 이보다 더 거시적인 문제들이다. 그간 교회는 1세기의 유대교를 정당하게 이해해 왔는가? 바울이 당대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율법과 관련하여 주장하려는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구원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타락으로 왜곡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 그리스도 이전 시대의 특징, 그리스도 강림들(초림과 재림)의 종말론적 특징은 무엇인가? 새 관점은 이런 질문들을 직시하면서 그 해결을 바울서신에서 직접, 정확히 확인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관점의 문제는 단순히 구원론의 문제가 아니라 구약과 신약 전반에 걸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성취에 대한 우주론적 이해와 관련된 문제다.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작용한 것이 지난 번 글에서 간략히 소개한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정당한 이해와 바울 서신에 담긴 바울의 논증의 핵심이 실제로 무엇이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런 전문적인 문제는 일반성도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고, 신학을, 좀 더 정확히 말해서 성경 주해와 해석을 전공한 성경학자들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이에 대해 바른 대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그렇게 된 데에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지면 관계상 두 가지만 밝히겠다.
첫째, 가장 간단하게는 새 관점의 논의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는 교수와 목회자들이 많다는 점이다. 처음에 새 관점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가 기존의 구원론에 역행하는 이론을 제시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한 소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점차 그 문제가 구원론의 문제가 아니라 위에서 내가 요약한 것처럼, 1세기 유대교와 그들의 율법 이해라는 것, 그리고 이에 근거하여 구약과 신약에서 일관성 있게 다루는 하나님의 경륜 또는 구원역사에 대한 이해라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러므로 현재 오해가 발생한 것은 원저자의 책을 읽지 않은 것이 첫 번째이며 중요한 이유라고 지적할 수 있다. 초기에 한국의 교수들은 새 관점을 비판하기 위해 외국에서 발표된 논문을 많이 의존했다. 그것도 바울서신을 비평적으로 읽고 확인하는 대신에 존 파이퍼와 같은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의 글을 무비판적으로 인용했다.
둘째,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 이유와 관련이 있다. 교수들과 목사들이 왜 새 관점을 주창하는 사람들의 책을 읽지 않았는지의 문제가 그것이다. 책 읽는 훈련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내가 관찰한 중요한 이유다. 책 읽기 훈련은 학생 시절, 교수들의 엄격한 지도하에 배울 수 있다. 성경을 연구하기 위해 필요한 과목들이 무엇인지, 그간 그 성경은 어떻게 해석되어 왔는지? 왜 그런 학성과 방법론이 제안되었는지를 비판적으로 질문하고 그 대답을 찾아가면서 책을 읽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책들을 자기 주도적 입장에서 평가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문제는 무척 심각한데, 신학교 교과과정(커리큘럼)과 관련되었고 교수들의 실제적인 임무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과목이 무엇인지는 신학교 교과위원회에서 정한다. 다른 분과는 차치하고, 성경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성경 언어(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성경 배경이 되는 역사와 종교, 그리고 당대의 문헌(구약은 근동의 문헌, 신약은 제2성전기의 여러 문헌)을 읽고 성경학에 응용하는 법을 배우고, 이에 근거하여 성경을 해석하는 법(성경 문학, 역사비평학, 성경의 신학 등)을 공부하는 것이다. 이것을 만족스럽게 성취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성경학에 부여되는 시간은 엄청나게 많다.
그러나 한국의 신학교의 현실은 이렇게 시간을 배정할 여유가 없다. 빨리 목회자를 배출해서 현장에 투입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더 컸다. 신학생들도 평생 사용할 수 있는 도구를 배우기보다 당장 사역하는 교회에 써먹을 수 있는 실천신학의 여러 과목이 더 유용하다고 판단한다. 6.25 전쟁 때 학도군이 적당히 훈련받고 전쟁에 투입된 것과 비슷하다. 전쟁의 총알받이로 사용된 것이다.
신학교 교수들 중에 재직 중에 목회를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목회자와 신학교수직을 병행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려는 열심과 딱딱한 학문을 목회자의 심정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이지만, 사실은 학문적인 것을 발전시킬 능력/소양이 부족하거나 부족한 생활비 충당, 자신의 능력에 대한 과신 때문인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신학교 교수로서의 사명이 새로운 방법론을 접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학문적 발전을 꾀하는 데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그러니 새 관점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학문의 전당에서 이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것이고, 다른 사람이 이미 발표한 것 중에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면서 기존의 입장에서 새로운 것을 비판하고 거부하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현재 한국 신학교의 신학 수준을 마치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이 순장(구역)장들을 훈련시켜 순(구역) 회원들에게 전달하라고 가르치는 순장(구역장) 교육 수준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신학 교육 3년간 신학생들이 신학 교육에 헌신하지 않(거나 그러려고 해도 할 수 없)고 많은 시간을 교회의 부교역자 사역하면서 시간을 허비하느라, 정작 신학적 사고를 형성하고 원전을 연구할 여유가 조금도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해서 졸업하여 목회자가 된 사람들(목사들)은 자기 주도적인 설교나 성경공부를 지도할 수 없고 남의 것을 베끼거나 신학교 때 배운 강의안을 그대로 교인들 앞에 내놓을 수밖에 없다. 금세 자원이 동이 날 것이다.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는 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지도하는 담임 목사가 성경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별의별 문제를 다 물어보지만, 목사는 정확한 대답이 아니라 교리에 규명된 원론적인 대답만 할 뿐이다.
이러한 문제로 한국교회에 여러 문제들이 발생했을 때, 교회는 그 문제에 정당하게 답변하지 못하고, 그 문제의 핵심도 파악하지 못한 채 교인들에게 그 문제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는 것을 최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것은 자기 확신이며 성경과 그들이 속한 신학 전통에 충실한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떠오르는 구체적인 실례가 생각난다.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대두한 “가계에 흐르는 저주”에 대해서, 한국의 많은 교회가 그 이론을 적극적으로 교회에 적용한 적이 있다. 문제를 가지고 찾아오는 교인에게 가장 손쉽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을 가르치지 않은 교회가 없다고 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나와 총신대의 고(故) 정훈택 교수가 “가계에 흐르는 저주” 이론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를 밝히는 글을 많이 썼다. 그런데 이번에 새 관점에 대해서는 그때와는 정 반대의 기류가 흐르고 있다. 즉, 새 관점이 교리를 부정하는 이론이라는 언어도단에 가까운 표현을 써가면서 교인들이 그 교훈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모순되는 대응인가.
오랫동안 한국교회가 신학교에서 성경학을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하고(예컨대 성경해석학을 가르치는 시간을 설교학, 기독교 교육학 시간과 동일하게 배정하는 것이 일례), 실천신학에 집중해온 쓰라린 결과를 지금 직시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 공부를 교리 공부로 제한하는 바람에 몇 학기 교리를 익히는 것으로 성경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이 들게 한 것 역시 한국 교회의 실책이고, 이렇게 된 데에도 신학교의 책임이 크다. 학생들에게 성경학, 성경 주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까닭이다. 그래서 성경 66권 저자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교리화된 단일한 목소리로 축약해버린 것이다. 이것은 마치 플라톤이 “동굴의 우상”이라고 표현한 것에 해당하지 않을까. 동굴에 갇힌 사람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입구로 들어오는 빛을 받아 동굴 안에 비친 그림자만 보고 세상을 다 이해한다고 착각하는 것 말이다. 그가 성경을 보는 세계가 이렇게 좁고, 그것이 전부이며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것을 지키려고 결사적으로 노력할 것이고, 그것이 잣대가 되어 자기가 이해한 세계와 다른 것을 모조리 거부하고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다.
해결점은 없는 것인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간 읽었던 부류의 책을 잠시 내려놓고, 제2성전기 유대교 문헌을 읽으라.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바울서신을 읽어보라. “바울이 여기서 어떤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가? 그래서 그 교회에게 말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하면서 읽어보라. 그리고 새 관점 주창자들의 책을 편견 없이 읽으려고 노력하라. 중간에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 그의 논지를 잘 따라가며 끝까지 읽으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책들과 저자들의 논지를 긍정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평가한 글들을 균형 잡게 읽으라. 그러면 이 관점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론에 허점도 있고, 지나친 것과 아직은 수긍하지 못하는 것도 발견될 것이다. 그들이 신이 아니라 독자들처럼 연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그 저자들이 성경학 훈련을 잘 받은 사람들이고, 그들이 진리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놀지도 않고 서재에 앉아 성경의 금광을 파헤치기 위해 땀을 흘린 신실한 신자들이며 우리 시대의 훌륭한 선생들이라는 점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