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安의 一夜]
그날 밤, 영훈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연숙이가 김사장의 부인이라는 것도 꿈 같은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영훈을 괴롭힌 것은 영영 나타나지 않을 줄로만 알았던 백연숙의 출현이었다.
참으로 저 좋을 대로만 하는 백연숙이라고, 마음대로 갔다가 마음대로 온 연숙이가 그지없이 얄미우면서도 끝끝내 미워하지 못하는 감정 하나가 여전히 영훈의 가슴 속에서 살아 있었다는 증거를 백연숙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는 고영훈이었다.
끝끝내 포옹을 거절한 자기 자신을 영훈은 참으로 잘했다고는 생각을 하면서도 십년 전 연숙의 따귀를 갈기던 때와 마찬가지의 심정 같은 것을 영훈은 분명히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심정을 영훈은 또 한편 은주를 위하여 미안하게 여기는 것이다. 될 수만 있으면 연숙이가 살지 않는 머나먼 곳으로 은주를 데리고 가고 싶었다. 자기 눈앞에 연숙이가 자주 보인다는 것은 은주와의 결혼 생활을 자꾸만 좀먹어 들어 갈것만 같아서 영훈은 무서운 것이다.
『제발 연숙이가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영훈은 자기의 결혼 생활을 위해서 절실히 바라는 것이다.
이튿날 오전 중, 영훈은 머리가 떼엥하고 신열이 다소 있어서 오후에야 사에 나갔다.
그랬더니 의외에도 최부장이 사를 그만두었다는 것이었다. 부원이 전하는 말을 들으면 오전 중에 사장이 나타나서 최부장을 사장실로 불러 가지고 약 삼십 분 동안 중얼중얼 이야기를 하다가 최부장이 홱 문을 열고 나왔다고 한다.
『돈 일이십만 환 쯤 당장에라도 마련해 놓으면 되지 않소?』
그런 말을 하고는 사원들에게 사임 인사를 하고 나갔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최부장은 이십 만환을 전차금으로 썼다고 했지만 사장의 결재가 없었기 때문에 무단 사용이라고 사장은 말하면서 모든 원인은 여자관계에 있다고 했다. 그만큼 최씨의 경리가 흐렸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래 사장은 지금 어디 계시오?』
『아마 일한무역에 계실 겁니다. 그리고 내일은 인사이동이 다소 있을 것 같다고 하시면서 좀 일찌감치 출사하라고요. 편즙장이 오늘 결근을 하시면 사람을 보내서라도 연락을 취하라고, 특별한 주의가 있었지요.』
『잘 알았소.』
편즙 일을 끝마치고 영훈은 은주의 명랑한 목소리가 갑자기 듣고 싶어서 샹하이 양재점에 전화를 걸었다. 은주의 음성에 접한다는 것은 하룻동안에 다소 병들어 있는 자기의 마음의 동요를 바로잡는 일종의 진정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전화통 앞에 나온 것은 은주가 아니고 마담·샹하이였다.
『난 또 누구라구?……편즙장 선생이었군요. 그렇지만 은주 아가씨를 못 대 드려서 대단히 미안합니다.』
『어디 나갔습니까?』
『오늘은 결근이래요. 그렇지만 무슨 꿀 같은 이야기람 내가 대용품이 되어서 들어도 무방할 것 같은데…….』
『결근?……어디가 편찮은가요?』
『알만한 양반두 모르고 있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호호호…….』
『어제 나갈 때 무슨 말 없었는가요?』
『암 말두……어제는 점심을 같이 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얼마나 깨가 쏟아졌기로 점심을 먹으러 나갔던 사람이 해질 무렵에야 돌아온담?』
『해질 무렵이라고요?……세시 경이 아니구요?』
『이거 왜 그러는 거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깨만 쏟았나 보구려.』
『아닙니다. 분명히 세시 쯤에 헤어졌습니다.』
『음식이 맛나면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른다는 격으로 얼마나 달콤했기로 그놈의 해가 세시에 졌노?』
『아, 마담! 정말 좀 똑똑히 이야기해 주시오. 정말로 해질 무렵에 돌아왔습니까?』
『글쎄 그렇다는 밖에……세 시는 세 시래도 해는 졌다는 밖에…….』
『알았습니다.』
『김사장 안녕하신가?』
『하시겠지요.』
『왜 이리 무뚝뚝한 대답이야? 내 말 한마디면 편즙장두 없어!』
『영광이 올시다.』
영훈은 전화를 끊었다.
공연히 삭막하다. 그 삭막감이 차차 불안감으로 변해 갔다. 이유는 잘 모르지만 그저 불안하다.
『어디가 아픈가?……』
어제 헤어질 무렵까지는 그런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전차 들창으로 핸드·빽을 나불나불 내졌던 광경이 눈앞에 선하다.
퇴근 시간이 되자 영훈은 사를 나와 동대문 밖 은주의 집을 방문할 셈으로 전차를 탔다.
그러나 삼십 분 후, 창신동 은주의 집에 다달았으나 은주는 없었다. 아침에 은주는 여니 날저럼 천연히 집을 나갔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가끔 그런 일이 있으니까 걱정 말우. 기분이 좀 나쁘면 하루 진종일 영화이기두 하구 그런다우. 애가 원채 성질이 좀 깔끔해서…….』
어머니는 그런 말을 하여 영훈을 안심시켰다.
『어쨌든 내일 양재점으로 전화를 걸어 보겠습니다.』
『무슨 말다툼을 했었나?』
『아닙니다. 말다툼은…….』
『그러구 보니 어제저녁엔 기분이 좀 우울해 보이긴 했지만두…….』
『그랬습니까? 어제저녁은 어느 때쯤 집에 돌아왔었습니까?』
『어제는 좀 늦었지. 통행금지 시간이 거지반 가까운 무렵이었으니까…….』
『그래요?』
『왜 같이 다니지 않았나?』
『아닙니다. 저와 헤어진 것은 세 시쯤이었지요.』
『그래?……』
그러나 어머니는 별반 걱정하는 빛은 없었다.
『어제 아침 집을 나갈 때는 제가 점심을 한턱 한다구 어린애처럼 날뛰며 나갔었는데……참 인사가 늦었구먼. 지어다 준 약을 먹구 이처럼 쾌차했는데…….』
『어머니 다행입니다. 하여튼 제가 다녀갔다고 전해 주시오.』
『또 어디서 영화구경을 하구 있겠지. 그저 제 사람이 되고 보면 별일도 아닌 것을 가지구 저처럼 걱정을 해주니 고마운 일이지 뭐요?』
식구라고는 모녀 두 사람 뿐이다. 사위가 되어 줄 사람이고 보면 눈물이 나도록 이 어머니는 고마운 것이다.
영훈은 다시 골목을 되돌아 나와서 전차를 타고 사직동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영훈은 또 공연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제밤은 연숙의 생각을 하면서 그랬었고 오늘 밤은 은주의 생각 때문에 또 그랬다. 이유 모를 불안이 자꾸만 영훈의 신경을 긁어 쥐었다.
『죄가 있대도 관용을 하지!』
광교 다릿목에서 종각 쪽을 핼끔 핼끔 돌아다 보면서 자기의 애정을 저울질하던 어제를 영훈은 생각한다.
『약혼은 애정의 자유를 속박해서는 안 될거예요.』
헤어질 무렵, 전차 들창으로 얼굴을 내밀며 속삭이던 은주의 모습이 그 어떤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을 가지고 영훈의 가슴을 차츰차츰 굳세게 눌러 왔다.
『아무리 봐두 사무실 앞을 그대로 지나칠 것만 같아요.』
그 모두가 다 명랑한 미소의 면사포를 쓰고 흘러나온 말이었기에 그 말들이 지닌 감정의 말도(密度)를 미처 측량하지 못했던데 자기의 과오가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영혼의 불안은 또 다시 비약을 거듭하기 시작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