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16
1월27일[연중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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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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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0KDjUsC2TE
[살레시오회 신윤민 요셉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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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의인들의 존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드러내는 명확한 표지입니다!>
요즘 자주 듣는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평소 늘 젊잖고 예의 바르던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불리던 사람들 입에서조차 깜짝 놀랄 정도의 욕이 튀어나와 깜짝 놀란답니다. 하도 어이없는 일,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일, 그야말로 웃픈 일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니 벌어지는 에피소드 같습니다.
뿐만아니라 많은분들의 생활 리듬이 깨진 관계로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습니다. 열이 받쳐 새벽 두시 세시까지 잠이 않오니, 자연스레 관련 뉴스를 지속적으로 접하고, 겨우 겨우 아침이 일어나고를 반복한답니다.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만든 장본인들은 저리 실실 웃으며, 말을 돌리고, 별의 별 해괴망측한 스토리를 만들어가며 상황을 즐기는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애꿎은 사람들이 받으니, 이 또한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사탄의 존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사탄이란 노골적으로 하느님 반대편에 서서 인간을 악으로 빠져들게 하는 사악한 무리들입니다.
이 시국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사탄 같은 존재들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실감합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 거짓말이 청산유수처럼 줄줄 흘러나옵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천박한지 듣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름 확고한 의지와 강한 충성심으로 무장해있지만, 그 끝이 죽음이요 멸망인지 모르고 불나방처럼 불속으로 달려드는 사람들이 참으로 가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옵니다.
하도 답답해 이렇게나마 정말이지 지극히 소극적이고 정제된 표현을 시도해보는 저를 보고 사탄의 자식,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마귀라고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토록 나라 전체와 국민 전체를 사분오열 갈기갈기 찣어놓는 사탄의 무리들이 조속히 무대 뒤로 사라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위안이 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난세에 영웅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위기 상황 앞에서 옥석이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부각되었고, 일제강점기때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등등 의인이 출몰했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참담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마냥 죽어라 죽어라 하지 않습니다. 아무 개념 없는 사람들만 윗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와중에 용기있게 진실을 말하는 의인들이 등장합니다. 중차대한 위기 상황이 극적으로 타개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상황을 반전시키는 애국자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요즘 참으로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지내면서도, 이 비참한 우리나라의 현실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제 두눈으로 똑똑히 확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군가의 양심을 건드리십니다. 용기를 내게 하십니다. 진리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도 사탄의 존재를 드러내는 하루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명명백백하게 만천하에 드러내는 의인의 삶으로 엮어가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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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0tm8GLp7qj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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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독한 자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질까?>
오늘 율법 학자들은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듭니다.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과 악령을 구분할까요?
진짜 부모가 주는 것과 가짜가 주는 것의 차이를 알면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요? ‘평화’입니다. 그래야 자녀가 착하게 자라 세상에 적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불안’을 준다면 그것은 창조자에게서 오는 영이 아닙니다. 이것이 영을 분별하는 가장 완전한 기준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거나 마귀가 나간 존재들이 느끼는 것은 기쁨과 평화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이런 결과를 보고도 율법 학자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조심하라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성령은 믿음으로 이ㅣㅣ끄는 하나의 ‘초대’와 같습니다. ‘성령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초대장’입니다.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이나,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난 별들은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성령도 그러한 표징을 통해 사람들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유산은 아들이 아버지를 공경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성령과 같습니다. 이 초대장을 거부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 초대장의 가치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한 아들이 회개는 힘이 들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아버지의 자비를 믿고 회개를 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가 회개하기 어렵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양심’입니다.
우리 안에 양심이 있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그 양심은 ‘정의 시스템’입니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게 만드는 게 양심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들어주며 음식도 흘리지 않게 먹게 되고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여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없다면 어떤 존재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양심 때문에 지옥에도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에 무조건 양심이 발현하여 성장합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사람들은 거짓말과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양심을 속이는 일을 종종 하게 됩니다. 이것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결국 하느님의 초대까지 거부하거나, 심지어 그 초대가 악한 것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양심상 하느님께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초대는 하느님의 피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조롱하였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고 차라리 그분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기보다는 지옥에 가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중요한 갈등 구조는 전과자 장 발장과, 법과 정의를 절대시하는 경찰관 자베르 사이의 대립에서 비롯됩니다. 장 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자비로 새 삶을 살게 되고, 자베르는 “범죄자는 결코 변할 수 없다”고 믿으며 장 발장을 악으로 단정합니다.
그러나 시가전 중 자베르가 위기에 처하자 장 발장은 복수 대신 “이 사람이 악령인지, 혹은 진정한 선인지”를 고민하던 그를 살려 주어, 오히려 ‘자비와 용서’를 베풉니다.
자베르는 이 모순을 견디지 못합니다. “악이라고 믿었던 자가 선행을 한다면, 내가 믿어 온 법과 정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양심의 충돌 속에서 그는 자신이 세운 절대적 틀을 무너뜨릴 자유를 얻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이는 복음서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마르코 3,29)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악령’으로 치부하거나 거부하는 행위는 스스로 구원의 길을 막아버리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의 초대를 뒤늦게 후회하면서도, “나는 용서받을 수 없다.”라는 절망에 빠져 돌아오지 못한 것과도 닮았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용서가 찾아왔음에도 스스로를 옭아매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 자베르의 비극이며, 이는 성령을 거부하는 영혼의 파멸을 경고하는 대표적 사례가 됩니다.
나라에 대한 불만 때문에 국보 1호 숭례문을 방화한 사람은 다시 잘 살아 보자는 나라의 초대에 응해서 편하게 잘 살 수 있을까요? 한국 국민들이 자신을 용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어서 세상에 다시 나오더라도 자신이 움츠러들어 온전히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여성 인권 주의자는 왜 하느님이 남성이어야 하며 성체를 불로 태우고 성체에 욕설을 써서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오늘 복음대로 하면 그녀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떻게 세례를 받고 자신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한 성체를 계속 받아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한 번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계속 당신 피의 용서로 부르십니다. 성령은 “내가 너의 부모야!”라고 하는 부모의 피가 섞인 초대장입니다. 부모를 만나는 길은 평화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여러 번의 초대를 계속 거부하는 것도 결국 그 초대가 악하다고 여기는 것이기에 나중에 양심이 하느님의 마지막 초대에 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양심을 우리 안에서 떼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양심상 되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일이 없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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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592년은 ‘임진왜란’이 시작된 해입니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에 율곡 이이는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습니다. 오랜 내전을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무신정권이 조선을 침략할 수 있다는 예견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태평성대’에 십만의 군사를 모집하는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율곡 이이의 의견을 듣고 십만 명의 군사를 양성했다면 임진왜란은 발발하지 않았을 겁니다. 설사 임진왜란이 있었다고 해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평가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선을 침략하고, 명나라까지 침략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야망가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선을 침략할 만큼 야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일본에 통신사를 직접 보냈습니다.
그런데 통신사로 다녀온 두 사람의 의견이 달랐습니다. 일본을 다녀온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이 선조에게 보고했습니다. “황윤길은 보고하기를,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김성일은 아뢰기를 "그러한 정황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했습니다. 선조가 ‘수길(히데요시)이 어떻게 생겼던가?’라고 물었습니다. 황윤길이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라고 했고,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통신사의 의견이 같았다면 선조는 임진왜란을 대비했을 겁니다. 이때 선조가 황윤길의 의견을 들었어도 임진왜란을 대비했을 겁니다.
한국의 신학교, 성지, 수도원을 생각합니다. 아직은 젊은이가 많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젊은이는 줄고 있습니다. 원인을 알면 치료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원인을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은 어떤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음식이 맛있으면 사람들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교회가 잃어버린 맛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말씀’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중풍 병자, 소경,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치유되었습니다. 다락방에 숨어서 떨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풍요와 발전을 위해서 마르타의 삶에 충실했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한 마리아의 기도가 부족했습니다. 가족이 모여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주한 중에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몸을 위한 여행과 휴가도 좋지만, 영혼을 위한 피정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서적을 가까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영혼의 빈 창고에 세상의 것들이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판단과 행동의 기준에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욕망이 함께 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서적과 신문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넷째는 ‘미사’입니다. 주일미사 참례 자가 줄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만찬을 하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눠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먹으십시오. 이는 여러분을 위해 내어 줄 내 몸입니다.” 미사는 예수님의 희생과 나눔의 재현입니다. 미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다섯째는 ‘나눔과 친교’입니다. 나눔과 친교가 적어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가진 걸 기꺼이 나누었습니다. 가난한 이, 과부, 고아, 병든 이, 노예, 이방인도 친교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천국을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을 함께 묵상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히려 언제나 상호 간에 또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고 애쓰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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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치유하시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십니다. 이를 본 율법 학자들이 말합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 3,22) 무엇 때문입니까? 시기심과 적대감 때문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제 두 눈으로 은혜로움과 기적을 보고도 마음이 불편해지고 꼬여서 진실을 외면하며 거짓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는 그들이 퍼뜨리는 거짓이 얼마나 허황되고 억지스러운지를 깨닫도록 차근히 설명하십니다. 그들을 모두 구원하시고 싶은 것이지요.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3,23-25)
마귀(악마)는 존재할까요? 네, 존재합니다. 악마는 하느님의 사랑과 선하심을 거스르게 하는 유혹자 또는 허공을 떠도는 공중의 악한 세력입니다. 마음이 완고하거나, 그와 반대로 위축되고 나약한 이들의 마음을 병들고 악한 생각으로 꼬드겨 그들의 몸과 입을 빌려 힘을 행사하는 것이 주된 수법입니다. 그렇게 그들을 장악하여 불쏘시개처럼 한바탕 사용하고는 버리지요.
그 악마의 힘이 대단해 보여도 빛이신 예수님께 그들의 꼬임이 통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그 힘센 자를 묶어 놓고 그에게 사로잡힌 이를 구출해 내실 수 있는 것이지요. 사랑은 누군가를 장악하여 지배하고 조종하지 않습니다. 그가 참으로 자기 모습대로 살게 해 줍니다. 시기심과 거짓말에 자신을 맡길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하느님께 향하고, 또 기쁨과 감사와 기도에 맞추어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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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22-30: 성령을 거슬려 지은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베푸시는 기적을 하느님의 은혜로 인정하기보다는 마귀의 짓이라고 헐뜯었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23절) 하신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은 성령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성령께서는 당신 자신을 거슬러 갈라서지도 않으실 뿐 아니라, 모아들이신 사람들이 갈라지지 않게 하신다. 성령께서는 서로 맞서 갈라진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해진 사람들 안에 사신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28-29절) 성령께서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머무르신다. 성령에 참여하기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던 사람이 은총에서 등을 돌릴 때,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토대를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도 오랫동안 암흑 속에서 지내면 눈은 보지 못하게 된다. 오랫동안 누워있는 사람은 걸을 수 없게 된다.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너무나 오래 거절한다면 하느님의 진리를 보게 되더라도 그 진리를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이 곧 사랑이시며 진리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되고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게 된다. 즉, 인간 편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고 하느님 앞에 나아오지 못하기 때문에 용서를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악의 상태에 남아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 인간은 언제나 잘못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죄보다도 더 크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믿고 앞으로만 나아갈 수 있다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으면서 그분 앞에 나 자신이 부족하고 나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면서 용서를 청하는 것이다. 언제나 주님께로 돌아가려는 마음과 용서를 청하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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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지금도 마귀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마르 3,22-30)
1)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율법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고 말한 것은, 단순히 시기심과 적대감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했습니다.(요한 10,33) 마귀는 하느님께만 복종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마귀는 ‘사람의 힘’으로는 쫓아낼 수 없고, ‘하느님의 힘’으로만 쫓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이 생각해 낸 논리가 바로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힘도 아니고 하느님의 힘도 아니라면, 남은 것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뿐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의 억지 논리를 ‘상식적인 논리’로 반박하십니다. 만일에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에 마귀 우두머리의 힘이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사탄의 자멸행위가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반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탄은, 또는 마귀들은 자살을 할 수 없는 존재이고, 자멸행위를 할 수 없는 존재”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들에게는 오직 생존본능밖에 없습니다.>
27절의 ‘힘센 자’는 마귀들이고, 마귀들을 묶어 놓는 ‘더 힘센 자’는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묶어 놓는다는 말은 쫓아낸다는 뜻입니다. ‘힘센 자의 재물’은 마귀들의 억압과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고, 재물을 턴다는 말은, 사람들을 마귀들의 억압과 지배에서 해방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마귀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쫓겨난 것은, 예수님의 명령은 곧 ‘하느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마귀들을 쫓아낼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냈고(사도 16,18),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아내고 있습니다.>
3)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은 ‘일반적인 죄’인데, 그런 죄들은, 무슨 죄든지 간에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부정하는 자들, 특히 구원과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라는 말씀은, “회개해도 소용없다.”는 뜻도 아니고, “회개해도 용서받지 못한다.”라는 뜻도 아니고, “용서받기를 거부하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지옥으로 직행하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그들 자신들이 용서받기를 거부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4) 마귀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유혹하고, 이간질하고,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고, 신앙생활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마귀 들린 현상으로 생각하던 일들이 오늘날에는 대부분 정신병이라고 밝혀지고, 또 의학적으로 치료가 가능한데, 드물긴 하지만 마귀 들리는 일들이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귀가 사람들에게 접근할 때, 자기가 마귀라고 밝히는 경우는 없습니다. 또 마귀의 힘에 물들어서, 또는 마귀의 지배 아래에 있으면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이 “나는 마귀 편에 서서 활동한다.”라고 말하는 경우는 전혀 없습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 그러니 사탄의 일꾼들이 의로움의 일꾼처럼 위장한다 하여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종말은 그들의 행실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2코린 11,14ㄴ-15)
요즘 세상을 보면, 마귀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자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증오심, 탐욕, 이기심 등이 바로 ‘마귀의 세력’이라는 증거입니다. <‘선, 사랑, 자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다고 주장할 때, 그 행동에 선과 사랑과 자비는 없고, 증오심과 탐욕과 이기심만 가득하다면, 그 신념은 신념이 아니라 거짓 선전일 뿐이고, 그자들은 마귀의 세력에 이미 사로잡힌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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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효석 요셉 신부님]
나를 늘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는 성령께 의탁합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3장 22-30절)
<생명의 원천이신 성령>
제가 살고 있는 피정의 집에는 여러 종류의 과일나무가 있습니다. 매실나무, 감나무, 자두나무, 앵두나무, 살구나무 등 많은 양은 아니지만, 계절에 어울리게 꽃피우고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은총입니다. 크게 신경 써서 관리하지 않는데도 어쩜 그렇게 신비할 정도로 생명을 틔우고 성장하는지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이 나무들을 보며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을 발견합니다.
나무는 한 자리에서 붙박여 움직일 수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 나무는 생명을 키워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입니다. 햇빛을 더 받으려고 새 가지의 방향을 틀기도 하고, 가뭄에도 수분을 찾기 위해 뿌리를 넓게 펼치기도 합니다. 세찬 비바람을 견디어내며, 뜨거운 태양빛을 참아냅니다. 나무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 앞에 늘 겸손하게 자신을 맡깁니다.
우리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지키고 삶의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합시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그러니 성령을 거부하거나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면, 우리는 삶의 생동감을 잃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그러니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우리 생명의 원천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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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마르코.3,22,28-29)
잘못된 행동 때문에 받는 비판은 아파도 성장의 발판이 되지만, 잘못된 사람이라고 받는 비판은 상처만 생기고 아프기만 합니다.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은 판단 대상이지만 사람 존재 자체를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기에 누구나 저지르는 실수나 잘못된 말이나 행동은 고쳐야 하지만, 그 사람이 하는 선한 일마저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으로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선한 일마저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면 자칫 성령을 모독하게 됩니다.
사람을 부정적으로 '찍어 놓고' 바라보면 자칫 그 사람의 선한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성령의 활동을 자칫 방해하거나 모독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고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우리가 그 사람 안에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로운 성령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고쳐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존재 자체로 오직 사랑을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잘못된 구체적인 말이나 행동입니다.
실수를 한 뒤에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미숙한 행동보다 미숙한 존재로 판단받기 때문입니다. 미숙한 존재로 다른 사람을 비난 받는 것은 그들의 자존감이 낮아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주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미숙하기에 이웃이 필요합니다. 불완전함과 미숙함은 때로 우리를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잘못된 선택은 하지만 잘못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주님의 영이 계시는 거룩한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불완전함과 미숙함을 모르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존재 자체인 신성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과 행위와 기적을 보고도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하면서 고정관념으로 주님의 활동을 왜곡되게 판단하며 성령을 모독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이나 행위를 보고 식별하여 판단할 수는 있지만 존재 자체를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고정관념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왜곡된 판단을 할 때마다 우리는 자칫 성령을 모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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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모든 것이 풍요로우면 감사하기 힘듭니다. 당연한 것, 당연히 자기가 누려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때, 한 달 피정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대침묵 피정으로 오로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만이 중요했습니다. 어떤 책도 가져갈 수 없고, 성경책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처음 며칠은 괜찮았습니다. 바쁜 일상을 뒤로 하고 기도하면서 큰 편안함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도와 묵상 중에 분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피정이 힘들게만 느껴집니다. 말하지 않는 것도 힘들고, 세상 소식과 완전히 끊는 것도 힘들고, 무엇보다 성경책 외에 어떤 책도 볼 수 없음이 힘들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식사 때 우유를 마시다가 우유갑에 쓰여 있는 글씨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글씨가 우유갑 곳곳에 쓰여 있었습니다. 우유 마시는 것만 신경 쓰다 보니 우유갑 글씨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세상만 바라보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세상 곳곳에 새겨져 있는 주님의 말씀을 볼 수 없습니다.
피정 때, 우유갑의 글씨를 보면서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감사기도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풍요로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족함이 가득할 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은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기득권을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죄로 말미암아 고통에서 신음하는 이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용서하시고 생명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구원 선포를 받아들이지도 못합니다.
세상의 기준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려고 했고, 자기들과 다른 점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기득권만을 누리려는 교만의 마음들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따지고, 세상 안에서만 살려고 하고,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면 찰수록 주님을 찾아볼 수 없게 됩니다. 주님을 진짜 잘 보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진정한 겸손의 삶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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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와 더불어 나>
마르코 3,22-30 (예수님과 베엘제불)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너와 더불어 나>
“그때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마르 3,22)
너와 더불어 나
너를 높다 하니
더불어
나도 높고
너를 낮다 하니
더불어
나도 낮네
너와 더불어 나
너를 크다 하니
더불어
나도 크고
너를 작다 하니
더불어
나도 작네
너와 더불어 나
너를 귀하다 하니
더불어
나도 귀하고
너를 천하다 하니
더불어
나도 천하네
너와 더불어 나
너를 선하다 하니
더불어
나도 선하고
너를 악하다 하니
더불어
나도 악하네
너와 더불어 나
너를 깨끗하다 하니
더불어
나도 깨끗하고
너를 더럽다 하니
더불어
나도 더럽네
너와 더불어 나
너를 있다 하니
더불어
나도 있고
너를 없다 하니
더불어
나도 없네
너와 더불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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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위기는 기회입니다>
소위‘열심하다’고 하는 사람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경우를 봅니다. 본인은 정말로 열심히 복음을 살려고 노력하는데도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처를 받고 또 미움을 낳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성당에서 봉사한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과 경제적인 출혈을 낳으면서 일했는데 인정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비난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오해나 시기 질투하는 마음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혹 복음과 일치된 삶을 잘 살아왔는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겸손함이 없으면 밥맛이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왜 저 모양일까?’하는 생각을 갖는 순간 기도의 효능은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서운한 얘기, 엉뚱한 소리가 들릴 때 상대를 미워하지 말고 자신을 살펴 부족함을 채우는 은총의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혹 교만함으로 비추어진 것은 없는지?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마르3,21).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러 나서기도 하였고, 율법 학자들은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 3,22)고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마르3,30)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문은 진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반대자가 상대하기 거북하고 비겁하다고 해서 그를 악령에 사로잡힌 정신 이상자로 몰아붙여 매장하려는 것은 아주 비열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거짓은 밝혀지고 그 헛된 소문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도 좋은 소문이든 나쁜 소문이든 때가 되면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소문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 온유함으로 자기 몫을 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입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신하느냐에 따라 더 큰 은총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떤 풍문을 통해 자신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상대방의 속을 환히 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위기를 기회로 삼는 지혜를 얻길 바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부러워하고 있다면 우리 마음 안에 이미 악이 활동하는 것입니다. 남을 모함하고 사실과는 다른 소문을 퍼뜨리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방해하며 사람들을 갈라놓고 나를 과시하며,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고 있다면 나는 분명 악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악에 사로잡히면 결국 성령을 거부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됩니다.(마르 3,30)
물론 주님께서는 모든 죄를 언제나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고의로 죄를 범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지 않는 행위, 주님께서는 죄의 용서를 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중죄를 범하여 나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하느님의 자비를 포기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법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 안에서 인간이 선과 생명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자비와 용서를 선물하시는데 이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고의로 거부하고 왜곡하며 그 상태를 즐기는 것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아들여 하느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바르지 못한 마음과 행실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내가 나를 스스로 착하다고 자만하지 말고 하느님 눈에 드는 겸손한 행실을 통해 은총에 은총을 더해가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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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잘생기고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
둘 중에 하나가 부족하면 ‘천만다행’,
둘 다 부족하면 ‘설상가상’이랍니다.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결코,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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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당신께서 성령의 힘으로 마귀 쫓아내는 일을 하신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코 3,29)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다니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속죄양이 되셨는데, 어찌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왜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한 죄”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서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점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그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도 악마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의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의 결함이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 지닌 돌이킬 수 없는 특성 때문”(393항) 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한 죄”라는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도대체 어떤 죄를 말할까? 그것은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혹은 사탄의 일로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는 죄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용서를 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고의적으로 방해하여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새 생명으로 태어지 못한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빛을 주시고 성화시키시는 성령의 활동을 스스로 제외시킴으로써 결국 구원의 가능성이 상실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성령의 활동을 거부한 바람에 용서가 차단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한다면, 주님이 아닌 피조물, 곧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숭배에 빠진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가기 자신을 앞세우다 자칫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거스르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혹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지금 당장, 용서하시는 성령을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용서하시고자 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용서하시는 당신의 자비와 사랑, 당신의 은총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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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샘 기도>
주님!
용서하시는 성령의 숨결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생각과 제 자신이라는 우상에 빠져 구원의 빛을 스스로 차단하지 않게 하소서.
이제는 제 완고함을 꺾으소서. 당신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게 하소서
끊임없이 베풀어지는 당신의 용서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여, 받은 그 용서로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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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 중심의 삶>
-섬김의 자유-
"옳은 길을 걷는 이에게는, 하느님 구원을 보여 주리라. 티없이 걷는 이에게는 좋은 것 아니 아끼시나이다."(시편 50,23ㄴ;84,12ㄴ)
친지가 보내준 ‘MBC 사우회보’중 사장과의 인터뷰기사중 말미, “인터뷰를 마치고, 지향하는 리더쉽을 물었다. ‘서번트 리더쉽(Servant Leadership)이란다. 인터뷰 내내 의장석을 비워둔 채 마주한 까닭이 거기 있었다.”는 기사내용을 잊지 못합니다. 종의 서번트(servant)와 섬김의 서비스(service) 같은 어원입니다. 서번트 리더쉽은 섬김의 리더쉽이요, 그대로 복음의 덕목입니다. 오늘 새벽에 읽은 옛 현자의 지혜도 나눕니다.
“배워서 남 주는 큰 공부를 해야 한다. 나만을 위한 공부는 내 속에 고여 나를 해친다.”<다산>
“아침부터 부지런히 선한 일을 행하면 순임금의 무리요, 부지런히 이익을 추구하면 도적의 무리이다.”<맹자>
결국 예수님 중심의 섬김과 나눔의 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복음이 궁극으로 가르쳐 주는 바도 예수님 중심의 섬김과 나눔의 삶입니다. 율법학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악의적인 폄훼가 도를 넘었습니다. 예수님의 구마행위에 대해 이들은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또는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주장합니다. 무지에 눈먼 율법학자들입니다. 확증 편향의 편견과 왜곡, 무지의 병이 참 깊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보편적 어둔 모습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론입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사실 내적분열보다 큰 적은 없습니다. 나라나 공동체가 망하는 경우도 밖에서의 침략보다도 안에서의 분열에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내적일치의 공동체라면 아무리 약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내적분열로 무너지기 시작하면 공동체도 개인도, 사탄도 속수무책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리하기 이를데 없는 사탄이 자기 동료인 사탄을 쫓아내는 자중지란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은연중 사탄을 쫓아내는 유일한 길은 사탄이 아닌 사탄보다 더 힘 좋은 예수님 당신뿐임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힘센 사탄을 포획하여 쫓아낼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임은 지금까지 무수한 구마사례들이 입증합니다. 악령에 대한 유일한 대책은 성령뿐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유비무환, 사탄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이런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성령에 따른 섬김과 나눔의 삶뿐이며 당대 제자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답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영원한 죄가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바로 너무나 자명한 예수님의 성령에 따른 구마행위를 목격하고도 더러운 영에 들렸다는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폄훼를 지칭하니 무지의 절정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중심을 벗어났을 때 얼마나 무지하고 악해질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이 이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불가사의입니다.
악성 가짜뉴스들의 범람에 악의 오염시대, 악의 보편화 시대요, 악령들린 이들도 날로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상식적이고 정의로운 이가 희귀하게 생각되는 참 괴이한 가치전도의 시대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눈먼 열심의 광신이요 맹신이요 바로 이런 이념이나 사교에 중독된,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이런 무지한 이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무서운 중범죄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말 무지의 광신이나 맹신에는 답이 없습니다. 백약이 무효입니다. 작금의 혼란한 현실을 보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 바로 너무나 자명한 사랑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성령은 예수님 안에, 사람들 안에, 세상 안에 존재하는 선한 모두의 원천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에서 성령을 통해 현존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는 이런 선의 현존을 보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 바로 그러했고 정상인들이 보기에는 전혀 어렵지 않은 성령의 현실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현존에 마음을 닫아버리면 어떻게 하느님이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이 용서하고 싶어도, 접근하고 싶어도 문을 닫아버리면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래서 회개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완고히 닫아 버리면 하느님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그의 길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만일 자유롭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의 자유는 반대까지도 선택할 수 있게 합니다. 바로 율법학자들의 선택이 그러했으니, 마음을 닫아버린 잘못된 자유의 선택이 성령모독의 용서받지 못할 결과까지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니 선택의 자유요, 선택의 은총입니다. 주님을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성령에 따른 섬김의 삶을 사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의 은총인지 또 사탄에 대한 최고의 처방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히브리서가 예수님을 선택한 우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해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그분은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재산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온갖 죄악의 짐에서, 사탄의 사슬에서 자유롭게 해 주실 분은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뿐이요,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광신과 맹신의 무지의 병, 영혼의 암을 치유하여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자, 하느님의 자녀들아, 주님의 빛을 따라 걸어들 가자."(이사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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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죽음보다 두려운 고통 가운데서 사랑하기>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요즘 제가 가끔 저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제가 몇 살 때까지 사랑할까, 사랑하다가 죽고 사랑을 위해 죽을까 하는 것인데 오늘 히브리서가 다시 이런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정말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사랑하고, 사랑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칠 수 있을 것인가?
어려서는 이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고 어떻게 보면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뜻으로 전신을 기증했는데 하지만 그것으로 진정 죽는 순간까지 사랑했다고, 사랑을 위해 나를 바쳤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20대에 전신을 기증했으니 그것은 20대의 사랑이지 죽을 때까지의 사랑이 아니고 죽을 때의 사랑도 아닙니다.
더욱이 전신 기증은 몸뚱이의 기증이지 저를 바친 것이 아닙니다. 썩어 없어질 것을 좀 더 의미 있게 하려는 것이지 진정 저를 바치는 것이 아니며 큰 사랑이라고 하기 어렵겠습니다.
지금 저는 죽음이 두렵고 걱정되는 것보다 죽기까지 겪게 될 고통이 더 두렵고 더 걱정됩니다.
그렇지요. 죽음보다 두려운 고통입니다.
이것은 저뿐 아니고 여러분도 그러실 겁니다. 사랑이 없다면 고통이 죽음보다 두렵고, 사랑이 있어도 사랑이 고통보다 작으면 고통이 죽음보다 두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이 끝날 날만 기다리고, 그날이 오지 않을 것 같거나 쉬이 오지 않을 것 같으면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 삶을 포기하는데 그것이 소위 자살이지요.
그러나 사랑하는 경우는 다릅니다. 사랑해도 고통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두려움을 무릅쓰게 하고 사랑이 강하면 강할수록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왜냐면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는 사도 요한의 말처럼 참사랑은 두려움을 무릅쓰는 힘이고 몰아내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힘이 나이를 먹으면서 그리고 육체의 힘이 쇠하고 갖가지 질병에 시달리고 지치면서 같이 쇠하지 않을까 걱정이고 그래서 고통과 두려움에 갇히거나 매이지 않을까 걱정이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 그것들을 바칠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걱정이나 하고 있으면 될까요?
첫째는 꺾이지 않는 정신이고, 둘째는 불굴의 정신으로 실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반복하여 힘을 쌓는 것입니다.
고통과 두려움의 실제 상황에서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신력으로 사랑의 힘을 키우는 것이고, 늙으면 육체의 힘과 함께 사랑의 힘도 빠질 거라는 패배주의, 그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기로 결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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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마르 3,26)
<성령의 역할!>
오늘 복음(마르3,22-30)은 '예수님과 베엘제불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권한을 갖고, 하느님의 모습으로 이 세상과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반면 '베엘제불은 마귀의 우두머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음식을 드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오고, 그 안에서 많은 치유기적들이 일어납니다. 이 모습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악담을 하면서 나쁜 소문을 퍼뜨린 사람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이런 악담을 합니다.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마르 3,22)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마르 3.30)라고 말하는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마르 3,23ㄴ-24.28-29)
'성령의 역할!'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 있는 이들의 모든 움직임들'은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행하시는 움직임들'입니다.
'성령은 통합의 영'입니다. '공정과 정의의 영'입니다.
그러나 '악령은 분열의 영, 분열로 이끄는 영'입니다.
'한 나라를 분열로 이끄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악령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면, 예수님 안에 깊이 머물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악령을 따라가지 말고, 성령을 따라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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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마르 3, 26)
율법 학자들의
모함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모순된
율법 학자들의
논리를
끝장나는
사탄의 궤멸로
모함과 고발을
조용하게
하십니다.
분쟁과 분열로
공동체는
무너지게 됩니다.
이해받지 못하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고독이
성령을 향하십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은
함부로 모독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성령의 권위를
빌어
사랑과 용서가
끝내 승리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의 힘과
악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새로운 질서인
구원과 해방을
이끌어
내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십니다.
영원한 약자도
영원한 강자도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먼저 억압받는
사회적 약자를
끌어안으십니다.
예수님의
삶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과 용서로
지탱하는
나라입니다.
힘의 논리가
아니라
진리와 상식이
통하는
공동체입니다.
모든 가치의
중심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파괴하는
권위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가치를
세우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삶에
맑은 길을
제시합니다.
맑은 길을
맑은 마음으로
나누는
행복한 설연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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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마르코 3, 23)
예수님을 사탄의 우두머리로 몰아갑니다. 입술을 떠난 말들은 다시 주워 담을 순 없습니다. 반복되는 어리석고 더러운 말장난을 멈추고 삼가해야합니다. 어둠의 세력은 혀와 돈으로 우리를 더럽힙니다. 어찌하여 이 지경까지 왔는지를 묻게 됩니다. 사탄을 쫓아내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도 사탄이 있습니다. 벗어날 수 없는 믿음의 영역입니다. 사탄의 운명은 끝내 끝장이라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주십니다.
갈라서고 거스르고 돌아서는 분열의 관계를 치유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둠의 시간을 벗어나면 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이 중요합니다.
잘못된 간섭과 참견을 멈추어야 합니다. 잘못된 사랑을 몰아내시는 주님 이십니다. 이 시대의 사탄을 쫓아내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마침내 사랑이 다시 온전한 우리로 바꾸어줄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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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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