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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가정은 편안한 포로수용소에 불과”…여성의 마음에 불을 지르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
미국의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심리학자인 베티 프리단은 사회문화적 구성물로서 여성성을 분석해 현대 여성해방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 해결을 요구한 프리단은 1920년대 여성 참정권 쟁취를 위한 제1의 물결에 이어 제2의 물결을 일으킨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서구사회의 역사에서 1960년대는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시대였다. 동시에 새로운 담론들이 넘쳐흘렀던 시기이기도 했다. 서구의 경제적 번영은 문화적 활기를 가져왔고, 이러한 활기 속에서 새로운 지적 도전이 진행됐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지적 도전이 사회운동과 결합해 이뤄졌다는 점이다. 생태학과 환경운동,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었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처한 불평등한 현실을 주목해 여성의 권리를 추구하고 해방을 모색하는 이론 및 실천을 말한다. 서구에서 페미니즘의 기원은 모더니티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은 고전적인 연구였다. 이후 페미니즘은 자유주의·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물론 포스트모던·탈식민주의·에코 페미니즘 등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전후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저작들로는 프랑스 작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과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1921~2006)의 <여성의 신비>(The Feminine Mystique, 1963) 등을 주목할 수 있다. 보부아르는 여성이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점을, 프리단은 결혼과 가정이 여성의 모든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프리단의 책은 미국을 위시해 서구에서 제2세대 여성운동을 촉발시키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앤서니 기든스는 <여성의 신비>가 당시 여성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고 지적했고, 앨빈 토플러는 역사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평가했다.
■‘여성의 신비’ 이데올로기의 비판
<여성의 신비>는 프리단이 대학 동창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해 쓴 저작이다. 프리단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로 시작한다. 1950년대 미국 여성들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로 고통을 겪는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란 남편과 자녀, 가정 말고 다른 무엇을 원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현하지 못하는 내면적 고통과 좌절에서 비롯된 문제를 말한다. 당시 미국 여성들은 자아실현의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위기를 가져온 원인이 ‘여성의 신비’라는 이데올로기에 있다고 프리단은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여성이 겪는 실제 생활과 순응하고 노력하는 이미지 사이에 기묘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 이미지가 여성의 신비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매력적인 아내와 훌륭한 어머니에 대한 이데올로기 또는 신화가 바로 여성의 신비다.
프리단은 이러한 여성의 신비라는 이데올로기가 등장하게 된 두 가지 요인을 주목한다.
1) 하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기능주의 사회과학, 마거릿 미드의 인류학, 여성지향적 교육자들의 영향이다. 이 학자들과 이론들은 여성 생활의 중심이 가정이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2) 다른 하나는 여성 잡지를 포함한 매스 미디어의 영향이다. 각종 미디어는 여성에게 가족과 가정에 최선을 다하는 데서 행복을 느끼는 주부상을 강요했다.
프리단에게 가정이란 한마디로 ‘편안한 포로수용소’에 불과하다. 여성의 신비 속에 사는 여성들은 자신을 가정이라는 좁은 울타리에 가두고 생물학적 역할에 적응하도록 학습된다. 요컨대, 미디어와 남성 중심적 학자 등이 공모해 주조한 여성의 신비라는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가정에 묶어 두고 성인으로서의 주체의식을 부정하게 함으로써 여성 자신의 발전을 후퇴시켰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의 신비에서 깨어나기 위해 프리단이 제시하는 대안이다. 프리단은 여성이 자신의 삶을 위해 가정을 떠나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가사를 남녀가 공동 부담하고, 실제 결혼 생활에 대한 직시 등을 통해 여성 자신에게 부여된 그릇된 이미지를 적극 거부하라고 충고한다. 이렇듯 여성에게 강요된 신비를 과감하게 깨뜨려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저작이 <여성의 신비>다.
■<여성의 신비>의 성취와 한계
여성 문제를 다루는 인문·사회과학에선 성(sex)과 젠더(gender)를 구분한다. 성이 남성과 여성 간의 해부학적 차이를 말한다면, 젠더는 양성 간에 존재하는 사회·문화적 차이를 뜻한다. 중요한 것은 이 젠더가 교육과 사회화를 통한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현모양처’라는 여성상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담론의 하나다.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가 폭발적인 관심을 모은 까닭은 여성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강요되는 역할과 이미지의 허구를 폭로했다는 데 있다. 당시 억압을 ‘억압’이라고 말하지 못했던 많은 여성들은 프리단의 분석과 주장에 크게 공감했다. <여성의 신비>는 1960년대에 2세대 여성운동의 나침판이 됐다. 전미여성조직(NOW·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이 결성됐고, 프리단은 초대 회장에 취임했다. 한 권의 책이 세상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는지를 <여성의 신비>는 생생히 증거했다.
<여성의 신비>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 전통에 놓여 있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1970년대 이후 젊은 세대의 도전에 직면했다. 프리단이 관심을 둔 이들은 결혼한 중산층 백인 여성들이었다. 저소득층과 유색 인종 여성들은 프리단의 시선 밖에 놓여 있었다. 이로 인해 프리단의 분석은 인종과 계급을 다루는 데 기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현재의 시점에서 프리단의 이론은 낡아 보인다. 하지만 한 저작이 놓인 시대적 배경이라는 지식의 존재구속성을 고려할 때, 프리단의 분석은 1960년대 초반이라는 당대적 시점에서 진보적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1960년대 저작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여성의 신비>를 읽으면 이 책은 억압되고 배제된 여성 자신은 물론 남성들을 계몽하는 데 여전히 작지 않은 메시지를 안겨준다.
■한국어판 저작은
<여성의 신비>는 정치학자 김행자(이화여대 교수),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김현우에 의해 각각 우리말로 옮겨졌다. 김현우가 번역한 1997년 개정판에는 출간 이후 프리단의 생각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개정판 서문: 변화된 풍경-두 세대 뒤’가 실려 있다.
■한국사회와 페미니즘 - 호주제 폐지·전문직 여성 비중 확대 됐지만…여전히 미흡한 ‘평등’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이 활발하게 논의된 것은 1970~80년대부터였다. 여기에는 여성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여성사연구회’ ‘또 하나의 문화’ 등을 결성해 서구 페미니즘을 소개하고 한국 페미니즘을 모색해 왔다.
여성학을 선도해온 학자는 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92·사진)였다. 이효재는 2003년 교수신문이 펴낸 <오늘의 우리 이론 어디로 가는가: 현대 한국의 자생이론 20>에서 여성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대표 저작은 1989년에 발표한 <한국의 여성운동: 어제와 오늘>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근대 여성 민족운동부터 분단시대 여성운동에 이르기까지 우리 여성운동이 걸어온 과거와 나아갈 미래를 다뤘다.
이효재의 연구가 갖는 선구적 의미는 한국사회 여성이 처한 다중적 억압에 대한 계몽에 있었다. 그에 따르면, 식민지배, 분단현실, 가부장제적 국가권력, 자본주의 산업화는 여성의 일방적 희생을 강제함으로써 이중·삼중의 억압 아래 여성을 놓이게 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제시한 대안은 가족과 사회의 민주화, 여성운동의 능동적 역할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호주제 폐지, 전문직의 여성 비중 증가에서 볼 수 있듯이 더디지만 꾸준히 향상돼 왔다. 하지만 사회 전반에서 여성은 여전히 크게 소외되고 배제되고 있다.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고 평등을 성취하기 위해선 세 가지가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남녀 차별 해소를 위한 고용정책을 강화해야 한다. 많은 여성들이 일하기를 원하는데도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은 낮고, 상당수 여성 노동자는 비정규직에 종사하고 있다. 정부와 시민사회는 여성들의 안정된 일자리 창출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하며, 이를 위한 보육 및 노인 부양 등 공적 서비스를 개선해야 한다.
둘째, 여성 전문 인력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절반의 인재만으로는 세계화가 강제하는 국가 간 경쟁에 적극 대처하기 어려울뿐더러 이는 인권의 관점에서도 정당하지 않다.
셋째, 가부장제적 문화 또한 바꿔야 한다. 가부장제적 문화가 지속되는 한 여성해방이 요원하다는 점에 주목해 공적 영역은 물론 가족 등 사적 영역에서 새로운 평등의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