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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벨' 가문의 사람들
(사진 / 유진벨 선교사 가족들)
'유진 벨' 가문의 사람들
유진 벨 가문의 한국 사랑, 린튼네 사람들... 스티브.존 린튼 형제
유진 벨 가문의 한국사랑
(사진 /유진 벨 선교사)
한국에 온 선교사 가문 중 특히 두 명문가를 말하는데, 언더우드가(Understand family)와 유진 벨
(Eugene Bell) 가문이다. 언더우드는 북장로교가 파송했던 대표적인 선교사였고, 유진 벨은 남장로
교회가 파송한 대표적인 선교사였다. 이 두 가문의 공통점이 있다면 4대 째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
했다는 점이다. 마침 필자가 광주에 와 있으니 오늘은 전라남도 선교의 개척자이자 광주지부를 개척했
던 유진 벨 가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 남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것은 1892년이었다. 북장로교회는 1884년 알렌을,
이듬해인 1885년에 언더우드, 헤론 등을 파송함으로써 한국선교를 시작했으나 남장로교회는 한국에
선교사 파송을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언더우드가 1891년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한 가지 목적은 한국선교에 대한 보고였고, 다른 한 가지는 한국으로 올 선교사를 모집하는
일이었다.
그해 10월 언더우드는 내쉬빌에서 열리는 전국신학생 선교연맹(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
에 참석하여 한국선교를 호소하였다. 이 호소가 영향을 주어 전킨 등 선교지원자가 생겨났고, 남장로교
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1892년 9월 17일 7사람의
선교사를 한국선교사로 파송하는 예배를 드렸다. 이들이 내한한 한 남장로교회의 제1진 선교사들이
었는데, 레이놀즈(이눌서)목사 부부, 전킨(전위렴)목사 부부, 테이트목사(최이덕)목사와 누이동생
테이트양(최마태), 그리고 데이비스양이었다.
이들은 전라도 지방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전라도 지방 선교의 시작이 된다. 특히 테이트 목사
남매는 1894년 3월 19일 서울을 출발하여 6일간의 여행을 마치고 전주에 도착하였는데, 이것이 전주
지부의 시작이 되었다. 이들에 의해 전주에 첫 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전주서문교회는 전라도 지방의
최초의 교회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말하려는 유진 벨(Eugene Bell, 1868-1925)선교사는 남장로교회의 제2진 선교사로
오웬(A. D. Owen)선교사와 함께 1895년 4월 9일 내한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배유지였다. 전라남도지역에서 개척하도록 위임받은 그는 어학선생 변창연과 함께 나주로
가서 일하기로 하고 1896년 11월 3일부터 6일까지 나주지역을 답사하기도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쳐 거주지도 얻지 못하고 나주지부 설치에 실패하게 된다.
그는 목포로 옮겨가 목포선교부를 설립하고 교회개척과 교육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그의 노력으로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런 선교활동 속에서 서울에서 자동차를 몰고 광주로 향하던
중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한국에서 당하는 첫 시련이었다. 목포지부를 개척한 그는 1904년 광주로
옮겨오게 된다. 먼저 김윤수 집사를 보내 광주에 거처를 확보하게 하고 주택이 거의 완성되자 1904년
12월 19일 유진 벨은 오웬과 함께 광주로 이주하였다.
그해 12월 25일 성탄절에는 유진 벨과 오웬가족, 변창연, 그리고 요리사들이 주민을 초청하여 40여명
이 함께 예배드렸는데, 이것이 광주지방 최초의 교회인 양림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유진 벨은 이곳 광주
에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과 의료활동, 그리고 교회개척에 힘썼다. 그는 한국에서
30년간 일하고 1925년 9월 28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그의 유해는 양림동 뒷산에 안장되었다.
그의 둘째 딸 샤롯 벨(1899-1974)은 두 살 때 어머니를 잃었는데, 당시 한국에는 영, 유아 사망률
이 높아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장성하여 내한하였다. 그는 1912년에 내한하여 군산에서 일하게
된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 1891-1960)을 만나게 된다.
린튼은 21세의 나이로 내한했는데 한국에 온 최연소 선교사였다. 이 둘은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에서 일하게 됨으로 제2대 선교사가 된다.
린튼은 교육선교사로 전주, 이리, 군산 등지에서 활동했는데, 전주 기전여학교, 신흥학교 등에서 교장
으로 일했다.
부인 샤롯은 한복을 즐겨 입었고, 한국을 사랑했던 이국인이었다. 그는 기전여학교 교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학교를 폐쇄하게 되자 린튼 부부는 교장직에서 해임되고 강제
추방되었다. 해방과 함께 그는 아내와 함께 다시 내한하였다. 6.25 전쟁 중에 거의 모든 선교사들은
한국을 떠났으나 그는 부산으로 옮겨가 피난민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안정을 되찾게 되자 대학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대전에
1956년 대학, 곧 대전대학을 설립했다. 그는 본래 건축학을 전공하여 교사건축도 꼼꼼히 챙길 만큼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학교가 1971년 서울의 숭실대학과 합병되어 숭전대학교가 되었다가 1983
년 다시 분리되어 한남대학교로 남아 있다. 그는 1960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생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일했다. 그의 한국어 이름이 인돈이었다.
윌리엄 린튼의 셋째 아들 휴 린튼(Hugh Linton, 인휴, 1926-1984)은 선대에 이어 한국선교사로
일하게 되는데 그가 3대 선교사였다. 그는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마치고
부인 로이스 린튼(1927- )과 함께 아버지와 외조부를 이어 한국선교사로 일하게 된 것이다. 그는 해군
장교로 복무했는데 인천 상륙작전에도 참가했을 만큼 한국과 관련이 깊었다. 그는 순천에 거점을 두고
활동했으나 전라남도의 산간벽지를 돌며 교회를 개척하고 한국인의 친구로 살았다. 특히 1960년대
순천 지방에 결핵환자가 많았으나 병원이 없어 광주나 전주로 이송하는데 불편이 많았고, 이송 중
사망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의 세 아들도 결핵에 죽었을 정도였다.
이런 현실 때문에 린튼의 부인 로이스는 순천에 결핵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웠고, 순천결핵재활원
책임자로 1996년 은퇴하기까지 35년간 결핵퇴치를 위해 일했다. 휴 린튼 목사는 주로 교회개척에 힘썼
는데,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닌다하여 “순천의 검정고무신”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는 고흥에서 간척
사업을 벌이던 중 1984년 교통사고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휴 린튼은 5남 1여를 두었는데, 그 중 둘째가 스티브 린튼(Steve Linton, 인세반, 1950- )이고
막내가 존 린튼(John Linton, 인요한, 1959- )인데, 이들 두 형제가 한국에서 일하게 되어 4대
선교사가 되었다.
이들은 한국에서 출생했고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처럼 스티브 린튼은 유진
벨 재단을 설립하여 북한 돕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동생과 함께 북한 주민의 결핵퇴치를 위해
장비와 의약품을 보내는 등 선한 이웃이 되고 있다.
(휴 린튼)
동생 존 린튼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신촌세브란스 외국인 진료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특히 그는 한국형 응급 구급차량을 직접 설계 제작하여 119 응급구조체계를 마련하는
데도 기여하기도 했다. 이런 시도는 응급처치만 할 수 있었어도 교통사고를 당했던 아버지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또 다른 희생을 막아보려는 일념에서 설계했다고 한다.
유진 벨, 배유지라는 한국어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한 선교사의 거룩한 열정은 대를 이어 이 땅에서
아름다운 결실을 맺고 있다. 이런 경우를 두고, “희생하는 삶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린튼 家의 가계도]
5대째 한국사랑 "린튼네 사람들"
(윌리엄 윈튼)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외국인 선교사들의 이야기다. 민초
들과 함께 뒹굴다가 지엄하신(?) 왕실과 인연을 맺기도 했던 이들은 또 일본 제국주의와 신사참배에
맞서 당당하게 싸우기도 했다.
대전의 한남대학교 안에는 주변의 대학 건물과는 다른 고풍스런 멋을 풍기는 한옥이 한 채 자리하고
있는데, 대학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인돈기념관이 바로 그것. 인돈학술원이 사용하고 있는 캠퍼스
밖의 또 하나의 한옥 한 채는 지어질 당시의 옛 모습 그대로 옛 선교사의 족적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말
로 ‘인돈’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 윌리암 린튼을 기념하는 두 채의 한옥이다.
한남대학의 설립자이기도 했던 윌리엄 린튼과 그의 가족들의 한국에 대한 사랑과 인연은‘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깊고도 깊다. 린튼의 장인인 유진벨(한국명 배유지)에서 시작된
린튼가(家)의 한국 사랑은 5대에 이르고 있어 한국의 역사와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알렌보다 한 해 늦게 미국남장로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온 유진벨은 의술로, 그리고 그의 사위 윌리엄
린튼은 교육으로 한국민에 대한 계몽과 선교사역을 펼쳤다. 여기까지라면 당시의 다른 여러 선교사들
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린튼가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윌리암 린튼 이후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그의 아들 휴 린튼(한국명 인휴)이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부인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와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한국에 대한 사랑을 이어 나간 것.
특별히 휴 린튼은 해군 장교로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전, 한국과의 질긴 인연의 줄을
놓지 않았다. 선교사로 한국을 다시 찾은 휴 린튼 부부는 한국화된 미국인으로 전라남도 일대의 벽지와
섬지방을 돌며 선교를 했다. 현재의 광양제철 자리가 된 땅은 휴 린튼이 미국 등지로부터 받은 선교비로
간척사업을 벌여 얻은 것.
휴 린튼 부부의 한국사랑은 그대로 그의 자녀들에게 전수되어 스티브 린튼과 존 린튼으로하여 또다른
한국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증조할아버지 유진벨을 기념하는 재단(유진벨재단, 이사장:스티브 린튼)을
설립하고 식량난과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북한동포를 돕는 일에 최선봉에 서 있다.
물론 이들의 우리말 실력은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사람과 결혼하고 한국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한국인 친구들은 ‘보세품’이라는 농담으로 설명하고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인데
미국으로 수출됐다가 다시 돌아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별칭은 린튼 가족을 잘 설명해주는 말이다.
보쌈과 곱창전골을 좋아하면서 한국말 잘한다는 이야기에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으면 할아버지께서
웃으실 것”이라는 말로 받아치는 그들은 자칭 한국사람이다.
린튼가의 4대에 해당하는 이들중 한국에서 살고 있는 막내 존 린튼은 그런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한국사람’으로 통한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외국인진료소 소장으로 일하는 그는 국내 의사면허를
가진 유일한 외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형 스티브 린튼을 도와 북한 어린이의 결핵 퇴치에도 큰 공헌을
하고 있다.
또한 그의 자녀들인 한나 린튼과 에스더 린튼이 한국에서 선조들의 한국사랑을 체험하며 꿈을 키워
가고 있다. 1백4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린튼네 사람들’의 한국사랑, 그들이 바라는 통일 이후에도 계속
될것이라는 상상을 어렵지 않게 하고 있다.
“선교사 얼 스민 곳인데…” 노란머리 순천 촌놈의 호소
지리산 기독교 유적지 지킴이 인요한 소장 인터뷰
서울 신촌에 있는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까만 머리 까만 눈동자들 틈으로 노란 머리 파눈의 의사
가 환하게 웃으며 토종 한국인 억양으로 “어서 오라”며 손을 흔든다. 미국인 존 린튼, 한국 이름으로
인요한(47) 소장이다. 전라남도 순천에서 나고 자란 인 소장. 그의 가문은 ‘호남 기독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외증조부 유진 벨 선교사 이래 4대째 한국에 산다.
그를 만난 건 지리산 기독교 유적지 때문이다. 목사였던 아버지 휴 린튼을 비롯해 그의 조상들의 숨결
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런 이곳이 위기에 처했다. 지리산 불교계의 반대로 눈앞에 뒀던 문화
재 지정이 취소되면서 그야말로 ‘버려진 신세’가 됐다. 불교는 불교대로 “우리 머리 위에 기독교 유적지
가 왠 말이냐”며 정색하고, 변변한 유적지 하나 없는 한국 기독교는 또 그들대로 무관심하다.
인 소장에게 지리산 기독교 유적지 이야기를 꺼냈더니 뭐가 그리 화가 나는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문화재로 지정됐어도 벌써 됐어야 했다”며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항상 외국 것, 남들 것 부러워하지
말고 우리 것 귀한 줄 알아야 한다”고 쓴소리를 한다.
“한국교회들이 조금만 힘을 합쳤어도 지리산 기독교 유적지가 이렇게까지 방치되진 않았을 거에요.
무슨 파가 그리도 많은지, 다들 내 교회, 내 교인에만 신경 썼지 이런 선조들의 문화유산에 관심이나
있었나요.”
머리만 노랬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섞어가며 호통치는 걸 보니 영락없는 한국 아저씨다. 그는
“지금 왕시루봉에 있는 수양관은 지금도 얼마든지 선교사들의 안식처로 쓰여질 수 있다”며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교사들의 얼이 스며있는 곳을 이대로 버려 둬선 안된다”고 호소했다. “이곳에
박물관을 지어서 등산객들이 볼 수 있도록 하면 전도도 되고 얼마나 좋겠어요. 이렇게 좋은 게 있는
데…. 왜 모를까요.”
인터뷰를 나눴던 인 소장의 방 한쪽 벽에는 그가 어릴 적 친구들과 함께 찍었던 빛 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방긋 웃고 있는 까만 머리의 두 아이 사이에서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이는 그가
멋쩍은 웃음을 웃고 있다. 그가 사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저게 바로 저에요. 한국사람이죠.
한국사람처럼 말하고, 한국사람처럼 느끼고…. 그래서 더 화가 나요. 왜 우리만의 좋은 것을 제대로
알아볼 줄 모르는지….”
인 요 한 연세대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
4대째 한국에 뿌리를 내린 벽안의 '순천토박이'. 연세대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인요한 소장.
"정서면에서는 100% 한국사람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전라도사람이에요. 순천남자죠. 병원에서도
성질급하고 왜 이래, 이래야 쓰것어 그러는데 전라도사람이지 미국사람입니까. 순천말이 표준어
입니다. 서울말이 사투리죠. 서울 아이들이 우리 어렸을 때 학교에 전학오면 뽀얗고 바보같았어요.
근데 지금은 시골아이들이 무시를당해. 허허허. 저는 은퇴하게 되면 바로 순천으로 내려와 살겁니다.
제게는 우주의 중심이 순천인거죠."
190센티미터의 큰 키에 푸른 눈동자의 서양인.
하지만 인요한 소장에겐 존린튼이라는 미국이름보다 한글이름 석자가 더 자랑스럽다. 47년전 전주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대부분을 전남 순천에서 보낸 인 소장은 주저없이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말한다.
"제 외할머니의 아버지 진외조부님이 1895년 4월에 인천 제물표를 거쳐 서울로 오셔서 한국어를
익혔고 1897년 목표선교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저희 할머니가 목포태생이고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할아버지는 대전에 있는 한남대학을 세우셨습니다. 아버지는 54년 인천상륙작전때 들어와 군대생활을
한국에서 마치고 선교사로 순천에 파송했죠. 저희 어머님은 결핵요양소를 했고 35년간 꾸려왔고,
아버지는 전라남북도 6백여개의 교회를 세우는데 힘을 쓰셨습니다."
11년전부터 한국에 뿌리를 내려온 린튼가의 발자취.
인요한 소장의 진외조부인 유진벨은 일찍이 호남 기독교의 아버지로 불렸고, 할아버지 윌리엄 린튼
(인돈)과 아버지 휴 린튼(인휴)도 역시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갖가지 의료, 선교 사업을 벌였다. 인 소장
은 현재 유진 벨 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 형 스티븐 린튼(인세반)과 함께 북한 지역 결핵퇴치 활동과
의료장비 보급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형님이 유진벨 재단을 만들어 식량지원을 했는데, 북한 사람들이 저희 어머니가 결핵사업을 했다는
얘길 듣고 우리 나라도 좀 도와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도와서 7,8년 동안 북한에 3백억원
상당의 의료 물자를 보냈고 환자도 많이 치료했습니다. 한 5,6년간 정말 바빴는데 거기서 환자를 보기
에는 체류할 수 있는 시간도 한계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북한 의사가 한 명이라도 환자를 더 볼 수 있게
해주자. 그래서 엑스레이 기계 고쳐주고, 구급차를 보내주고 그거 애프터서비스도 해주고 그랬죠.
제가 순천에서 한국형 엠뷸런스를 만들었던 경험도 있고 해서 검진차를 17대 보냈죠."
지난 1995년, 유진벨이 한국땅을 밟은지 백주년을 기려 설립된 유진벨재단.
인요한 소장은 친형인 인세반 유진벨 재단 이사장을 도와 지난 7년간 식량제공과 의료물자 제공 등의
활발한 대북사업을 벌여왔다. 호남지역 한국형 앰뷸런스 보급으로도 유명한 인요한 소장은 특히,
자신의 경험을 살려 대북 의료기기 보급사업에 힘을 쏟았다.
"두만강을 처음 건넜을 때는 긴장됐습니다. 왜냐하면 서류에다가 미국에서 왔고 미국사람이라고
가짜로 썼는데 혹시 이 사람들이 간첩으로 몰면 어쩌지... 속으로 시방 별거 아니여 하면서 들어갔는데
인민군이 막 제 서류를 뒤져보는거에요. 그런데 저랑 몇 마디 해보더니 그 양반 가슴이 녹더라구요.
웃음이 탁 터지면서 조선말 참 잘하시네요 그러는데 그때부터 안심했어요. 마침 창가에서 보니 아이들
이 드럼통에 불을 피고 있었어요. 근데 제가 깊은 추억에 빠졌거든요. 전라도 생각이 나서,
아! 또 하나의 한국이 있구나, 변하지 않는 한국이 있구나 했습니다. 농촌 가보니까 사람들 순박 솔직
하고 전라도에서 제가 알았던 사람들과 하나도 안 다르더라구요. "
50년간 겨레 사이를 가로막은 분단과 불신의 벽.
하지만 인요한 소장은 자신이 본 북한의 모습이 전라도 고향 산천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인소장은 남한의 60,70년대 모습을 간직한 모습을 보며, 북한 주민들도 같이 품고 가야할 동포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토로했다.
"북쪽 의사들과 같이 일할 때가 많았는데 서로간에 하나도 격의가 없었어요. 히포크라테스 선서때부터
적도 도와야한다고 하잖아요. 소위 보건성 일꾼들이라 하는데 약이 없으면 약초를 캐러 다니고
엑스레이필름이 없으면 자기 몸을 던져 방사선을 맞아가면서 환자를 들여다보고 상상을 초월해요.
사실 저는 북한 의사를 존경하게 됐고 저도 과연 환자를 위해 그럴 수 있을 까 반성하게 됐습니다."
약초를 손수 캐러 다니고 방사선을 맞아가며 환자를 진찰하는 의사.
인요한 소장은 부족한 의약품, 열악한 장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환자를 돌보는
북한 의사들을 보고 감동했다고 말했다. 폐쇄적이고 통제된 사회지만 의사들이 펼치는 인술만큼은
배울점이 많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북한 청진가는 길에 호텔에 묶었는데 일주일에 세번씩 10분간만 물이 나온다는 거에요.처음엔 흙탕물
이 나오니까 그걸 바가지로 푸고 세숫대야 놓고 더운물하고 배합하면서 전라도 말로 찌끄러가면서
3분 목욕을 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정전이 된거에요. 땅바닥을 기어다니면서 후레쉬를 찾는데 빠삐용
영화랑 비슷해요. 후레쉬를 찾으리까 너무 고마워서 웃는거에요. 그리고 3주 뒤에 남한 연희동에서
3천5백원짜리 연희동 목욕탕에 갔는데 더운물도, 찬물도 넘치게 나오는겁니다. 그거 보고 누가 볼까봐
울었어요. 북한 생각나서... 야 이렇게 감사할게 많구나. 남을 돕는게 나를 돕는거구나. 혹시 누가
볼까봐 물을 얼굴에 묻혀가면서 울었어요.여기 젊은 사람들이 감사할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에요."
호텔에서도 물을 받아쓰기 힘들정도로 열악한 급수사정.
인요한 소장은 북한에서 씻을 물이 없어 고생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인 소장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풍요로운 생활여건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며, 스스로를 돕는 심정으로 북한동포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북한을 다녀보니 6.15선언 이후 남한 사람을 별로 안 무서워해요. 미워하질 않아요. 남한 사람들이
성공했고 돈이 많고,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질서하고 그런건 있어요. 그러나 정말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느끼기에 좀 변화가 느릴 뿐입니다. 도매급으로 사람을 미워하면 안되요. 관료들은
미운 짓거리를 가끔 하지만 3%밖에 안됩니다. 97%는 순수한 국민들입니다. 마찬가지로 미국 사람들도
다 나쁜건 아니에요. 전 미국 행정부가 약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힘으로 될 일
이 있고 안될 일이 있죠. 하지만 하인스워드 같은 좋은 사람들도 미국사람입니다."
북한 곳곳을 돌아다니며 봉사활동을 벌여온 인세반, 인요한 형제.
인요한 소장은 대부분의 북한 주민은 순진한 동포라며 편견을 버리고 감싸안아야 한다고 말했다.
덧붙여, 한국 사회의 반미감정에 대해서 모든 미국사람을 나쁘게 보는 식의 편견은 없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이분이 바로 유진 벨 재단을 설립하고 운영하고 계시는 4대 유진 벨 가문의 스티브 린튼씨)
저번에 TV보다가 우연히 이분 봐서 찾게됬는데...유진 벨 재단이나 이 가문이나 넘 대단해요.
보고 넘 감동받았음.ㅠㅠ
연대 세브란스 병원 소장인 인요한씨는 순천이 고향인데 거기서 태어나고 거기서 자라서
나중에 은퇴하면 거기서 살고 싶다고 하네요.
한국사람보다 더 한국을 더 많이 알고 사랑하는거 같아서 이분들 수기 읽으면 눈시울이 찡해지네요.
이분들 가문은 원래 선교목적으로 한국을 왔던거기 때문에 유진벨 가문도 언젠간 북한과 남한이
더욱더 교류하고 북한의 의료사정이 더 나아지면 은퇴한다고 하네요.
통일하면 좋겠지만 이런 얘기 들으니까 가슴 아픈게 ㅠㅠㅠ
진정한 선교사에요.
첫댓글 맨에서 두번째분은 티비서 본거 같다
ㅠㅠㅠㅠ 진짜 감사할 따름..울나라 선교사들도 다른나라가서 이처럼만 해주길!!!
쪽
인요한 소장님은 아침마당에도 나오셨어요 ㅋㅋㅋ
어머 너무 감동적이야 ㅠㅠㅠㅠㅠㅠ
이분 말하는거 보니까 진짜 전라도 사람이던데ㅋㅋ
이거 전에 티비에서보고 진짜 눈물났었는데... 저렇게 한국 위해주는 외국인이 있을줄 몰랐는데 북한까지 가서 도와주고 대단한 집안이더라구여
우리학교이름나왔당~ㅋ이런역사가 있는줄 잘 몰랐는뎅..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