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레포트 기독교의 기본진리 7장 그리스도의 죽음 김성주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다. 기독교는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먼저 어떤 일을 행하셨다고 선포한다. 이것은 성경의 주요 주제이다. 죄에는 세가지 중요한 결과가 있는데 구원에는 이것들 모두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포함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쫓겨난 데서 다시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와 그와 화목할수 있다. 또한 우리는 거듭나는 새 성품을 받아 우리의 도덕의 굴레에서 해방될수 있으며, 오래된 불화를 사랑의 교제로 바꿀수 있다. 이러한 구원을 이루신 방법에는 세가지가 있다. 첫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둘째는 성령을 주심으로 셋째는 그의 교회를 세우심을 통해서이다. 이중 첫째를 이 장에서 살펴보겠다.
바울은 예수님의 일을 화목하게 하는 직분으로 묘사하였다. 화목이라는 의미는 화해라고도 하는데, 서로 반목하고 있는 두편이 하나로 되는 행위 또는 그 하나됨이 표현되고 향유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값없이 선물로 받은 것이다. 죄는 분리를 낫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인간을 하나되게 하였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큰 간격을 만들었지만 십자가는 그것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았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을까?
구약때에는 하나님께 예배할때 짐승을 죽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보여주는 예표였다. 아벨로의 제사로부터 시작해서 구약성경의 여러곳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예언이 포함되어있다. 구약의 제사에 관한 내용이나 시편과 예언서등에도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내용을 볼수 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 이미 자신의 운명을 알고 계셨다. 특별히 고난에 대해서 더욱 그러했다. 주님의 가르침에 계속 나타나는 것이 “~ 해야 한다”(must)의 내용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성경의해 그에게 부과된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세례를 받거나, 십자가에 가실때도 때가 이르지 않았다던지, 때가 이르렀다는 표현이 여러번 나온다.
구약뿐 아니라 신약성경 기자들도 십자가의 절대적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다. 복음서는 주님의 고난과 죽음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2/5 마가복음 3/5 누가복음은 1/3 요한복음은 거의 절반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승천 사이의 사건에 할애된다. 바울서신에도 오직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던지, 자기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표현이라던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강력한 표현들이 말씀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계시록에서 요한은 그분은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표현하며 십자가를 표현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먼저 우리는 사실 이것을 온전히 한꺼번에 다 알수는 없다. 필자는 베드로 전서에 나온 표현을 설명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표현하였다. 그가 베드로의 글을 살펴보는 이유는 세가지다. 먼저베드로는 핵심적인 세명의 제자중 한 사람이었고 주님과 밀접한 교제를 가졌다. 또 그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극구 말렸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고난에 대해 설명했다. 셋째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십자가에 대한 언급은 비의도적인 것이다. 베드로전서에 나온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당시 상황은 네로의 박해가 심했다. 베드로에 여기에 충고한다. 바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치욕을 감수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다고 말씀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다. 학생이 글씨를 따라 쓰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가나다를 배우려면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모범에 맞추어야 한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자기가 그렇게 할수 있다고 했다가 실패하고 나중에 다시 주님이 부르셔서 회복된 사람이다.
이러한 도전은 21세기에도 1세기처럼 편안하지 않다. 또한 그것은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아마 복종하고 대항하지 않으며 불의한 고난을 참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이 명령보다 우리 본능에 반대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맞아 넘어지면 벌떡 일어나서 당한 만큼 갚을 준비를 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 피해를 그대로 받고, 원수를 사랑하며, 이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은 단순히 이러한 삶의 본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단순히 모델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구주가 필요하다. 모델은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고 우리의 이상을 불타게 하며 또 결심을 굳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전에 지은 죄를 씻어 우리의 상한 양심에 평화를 가져오거나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도록 하지는 못한다.
사도들은 신약에서 반드시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의 죄를 연결시키고 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부지중에 죄를 범하여도 그가 벌을 당할 것이라는 레위기와 연결된 구절이 나온다. 누구든지 자기 죄의 결과 다시 말해서 죄의 형벌을 담당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때로는 다른 사람이 죄인의 죄를 대신 책임질수 있다는 것이 구약에는 시사되어 있다. 그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 바로 구약의 속죄제사다. 황소와 염소의 피를 흘려 그 죄를 대신 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 대안에도 불구하고 동물의 피는 죄를 없이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에는 한나이 보내신 어린양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신다는 예언이 나온다. 그리고 마침내 오랜 기간 준비 끝에 예수님이 오셨다. 세례 요한은 공공연하게 그분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언급했다. 히브리서는 그분이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죽으셨다고 말씀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전혀 과분한 사랑으로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시지 않은 것이다. 구약에 그들은 자신의 죄악을 담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하지 않으셨다. 대신 하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 자신은 아무 죄가 없었지만 우리 죄로 인하여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죄가 가 되신 것이다. 온세상 모든 역사의 죄가 모두 그에게 지워졌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전 세시간동안 온땅에 어둠이 임했다. 그는 자원하여 죄를 자신의 몸으로 담당하셨다. 그 죄를 자신의 죄로 삼으신 것이다.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셨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영혼이 비참하게 버림을 받았다.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절규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영혼의 고통을 맛보셨다. 우리의 죄가 가로막고 있던 하나님과의 사이, 그 버림과 지옥을 그분은 당하셨다.
그리고 그 깜깜한 어둠으로부터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외침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에 손에 부탁하고 숨을 거두셨다. 그가 목적하고 왔던 일이 이루어졌다. 세상의 죄는 담당되었다. 구원이 달성되었다. 이제 이 구주를 믿고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화해할수 있게 되었다. 그 증거로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36시간후 그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자신이 헛되이 죽지 않았음을 증명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일을 먼저 시작하셨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죄로 삼으신 방법을 인간은 설명할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베드로 전서는 구약과 서로 교차되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사야 53장에서 다섯구절이나 대구가 되듯이 비슷한다. 그 핵심은 그리스도가 피를 흘리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과 죄의 속박에서 구속하시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 일이 이루어지려면 반드시 이 피가 우리 각각의 마음에 뿌려져야 한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언급하는 중요한 또 다른 곳은 베드로 전서 3:18절이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써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고 했다. 한번에라고 하셨다. 즉 그가 이루신 일은 반복될 수도 없고, 개선될 수도, 그리고 보완될 수도 없다. 이 의미를 몰라서는 안된다. 우리는 어떠한 종교적 행위를 하거나 선행을 한다 해도 죄 사함을 얻을수 없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고 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모욕하고 있다. 기독교의 복음과 다른 종교의 교리와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전혀 다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살던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십자가의 메시지는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거리끼는 것이요 미련한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의 양심에 평화를 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 말을 할수 있다. 그가 상하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그가 죽으심으로 생명을 얻었고, 그가 고통받으심으로 용서를 받았고, 그가 고난을 당하심으로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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