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 영웅적 인간에게 그의 본보습보다는 자기 생각에 맞는 부분만을 확대하여 어울리지도 않는 동상을 만들어 세운다. 어설픈 동상이나 정치적인 외침보다는 안중근의 한마디를 되새기는 정신이 필요하다" (338쪽)
『안중근, 하얼빈의 11일』은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다시 한 번 살펴 볼 수 있는 책이다. 「안응칠 역사」를 통해 안중근 의사의 생애에 대한 일대기를 살펴보면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지만 그가 이토를 저격한 후 순국하기 전까지남긴 말 한마디, 가족들(어머니, 동생들, 아내)에게 쓴 편지, 뤼순 형무소에서 검사와 간수에게 남긴 대화의 흔적들을 통해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정신과 삶의 목표를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얼빈에서의 11일 간은 숨막힐 정도로 긴장감이 도는 기간이었다.
한 치의 오차 없이 거사를 성공적으로 해내야 했던 안중근 의사에게 있어서는 하루 하루가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자금이 없어 창춘행을 포기하고 다시 하얼빈으로 돌아와야했던 사연, 거사를 위해 지인(김성백)에게 돈을 빌려야 했던 사연, 거사일 당일 이토를 어디에서 저격해야 하는지 등의 모든 결정은 오로지 안중근 의사 본인에 의해 진행되어야만 했다. 거사 후에도 그가 자결하지 않았던 이유도 명백하다. 세계 만방에 대한 독립의 정당성과 동양 평화를 위한 목소리를 내야했기 때문이다. 순국하는 그날까지 안중근 의사는 죽음과도 싸워야했던 나날을 보내야했다.
이토가 저지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내가 이토를 동양 평화의 적으로 삼게 된 결정적 단초였다. _27쪽
나는 이제 도마(안중근의 호) 안중근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것이다. _28쪽
장소에 의해 삶이 결정된다. 안중근에게는 하얼빈이 그러했다. _60쪽
만주 벌판에 떨어지니 한 인간의 존재가 신과 연결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_66쪽
로맹 롤랑은 영웅이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자" 라고 했다. _92쪽
이순신 장군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를 미리 알고 준비를 하는, 즉 이겨 놓고 싸우는 그 정신이다._104쪽
역사란 참으로 사소한 일로 위대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_140쪽
상하이에서 안중근은 두 개의 큰 벽을 만나게 된다. 안중근의 눈에 비친 중국에 사는 동포들은 조국의 운명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먹고살기에 급급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조국은 '먼 나라' 일 뿐이었다. _210쪽
문은 걸어 잠그면 벽이 된다. _ 202쪽
민영익과 같은 고관대작이 결코 문이 될 수 없음을 절감하고 길을 떠났다. _203쪽
뤼순 지방법원으로 결정한 이유는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점령한 뤼순이 국제 여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고, 단독판사 제도를 시행한 탓에 일본 정부의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_210쪽
뤼순은 일본과 멀리 떨어진 곳이고 단독판사가 재판을 진행하기 때문에 안중근 사건을 일본 정부의 뜻대로 끌고 갈 수 있었다. _211쪽
뤼순 감옥은 안중근 의사와 더불어 민족의 선각자 단재 신채호와 우당 이회영이 옥사한 곳이기도 하다._241쪽
삼흥학교(안중근 의사가 가산을 팔아 진남포에 세운 학교)는 훗날 오성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_231쪽
안중근 의사가 수감되었던 독방은 다른 옥사에 비해 매우 특별한 장소였다. 형무소장의 집무실과 거의 같은 규모였다._244쪽
일본에서 특수 제작된 호송용 마차가 바로 일제가 안중근 의거에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증거물이다._260쪽
두려움은 욕심에서 오는 거지요. 내가 동양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도 그런 맥락과 이어집니다. 욕심을 버리면 두려움도 없습니다. _264쪽
위이불맹, 위엄이 있으되 사납지 않다. 정치를 하기 위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 논어. _264쪽
조국의 현실을 외면하는 친일파와 하루하루 살림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의 무관심에 안중근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외로웠다. _276쪽
단지 동맹을 정천 동맹이라고 명명하고. 1909년 3월 5일이었다. 당시 엔치야 하리 마을에서 결성된 '바른 하늘 아래 맹세'인 '정천 동맹'은 대부분 의병 출신 동지들이었다. _279~2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