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영박물관展 관람기]
'그리스의 신과 인간'
눈부시도다 生의 頌歌(송가)여…
원반 던지는 사람은 오직 자신을 바라보라 할 뿐… 어떤 미학적 해설도 용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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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신한 전시장, 조명이 떨어지는 곳에 히부윰한 대리석 조각들이 보인다.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이른 저녁 올림포스 산의 이파리 무성한 올리브나무 그늘 속으로 신(神)과 인간들이 천천히 거닐고 있다. 선(線)이 부드러운 튜닉을 입거나 나신(裸身)을 드러낸 채로인 그들이 신인지 인간인지, 혹은 중간자인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흐린 대기의 탓만은 아닐 것이다.
"…황금빛 안뜰에 자리 잡은 제우스의 주변에 신들이 앉아있고 테베 여신이 그 사이를 걸어 다니며 넥타르를 따라주었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구절처럼,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과 떨어져 천상(天上)에 살지 않았다. 만찬과 오찬을 즐기며 세속 도시 가까운 올리브숲에 살았던 것이다. 결코 두루 전능하지 않을뿐더러 인간만큼이나 성격적 결함을 가진 존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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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타이틀이 《그리스의 신과 인간》이라니. 참으로 매혹적인 주제가 아닌가. 그리스 문명은 고대라는 시대적 구분이 무색하게 인문과 과학, 시와 음악, 건축과 미술 등 삶의 모든 국면이 난만하게 꽃피었다. 인류 문화사의 프롤로그를 열었던 그리스의 유물들이 첫 나들이를 했다.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리스 유물 중에서도 엄선한 것들이라니 기대가 컸다. 화집(畵集)으로만 보아도 가슴이 설레는 작품들을 실제 눈앞에서 보니 지난 생(生)의 연인을 마주친 듯 그 표정과 태도에 마음이 붙들리고 섬세한 디테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을 지경이다.
헤라클레스, 헤라, 아프로디테, 디오니소스 등 그리스 신화의 신과 영웅들, 그리고 이름 모를 소년, 소녀, 청년들. 유사 이래 인간의 벗은 몸에 이토록 집중하고 탐닉했던 시기가 또 있었을까. 그 눈꺼풀과 콧날, 단정한 입술은 지금도 눈을 깜박이거나 막 웃음을 터뜨릴 듯 생기가 돌올하다. 돌이 아니라 떡을 주물러 빚은 듯한 유연함이라니. 신도, 인간도, 괴물마저도 오래전에 사라진 존재가 아니라 지금 막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시간을 초월한 아름다움이다. 인체해부도를 3D로 재현한 듯한 사실적인 것부터 데포르마시옹(변형) 기법, 움직임의 역동성을 도드라지게 강조한 것 등 표현기법도 다양하기 짝이 없다. 절대음감(音感)과도 같은 절대미감(美感)의 세계를 고대 그리스인들은 조각과 도자기 등에서 고스란히 구현해 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후세인에게 자긍심과 함께 콤플렉스도 안겨준 셈이다. 수천 년의 역사가 흘러도 넘어서기 어려운 완벽의 경지를 이미 까마득한 기원전의 시기에 이루어버린 까닭이다.
당시 사람들의 삶과 일상, 복식, 전쟁, 성과 욕망 등이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진 암포라(몸통이 불룩하고 양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와 부조(浮彫)들도 대단한 볼거리이다. 그림으로 그려진 고대인들의 삶의 서사시라고 할 수 있을까. 최고의 미학적 완성도를 자랑하는 이 유물들을 이 정도 규모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유난히 눈길을 끄는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영원한 젊음'이라는 제목의 그 부조상 옆에 적힌 글귀가 역설적이다. "젊은 날의 짧은 기쁨 속에서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이 밝을지 어두울지 알지 못하네." 무덤에서 출토됐다는 그 해맑은 청년 앞에 서 있자니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육체의 덧없음이 뼈저리다.
섹션별로 잘 정리된 실내를 따라 거닐다 마침내 그 유명한 '원반 던지는 사람'과 만났다. 원형경기장을 재현한 공간 속에 서 있는 형상은 압도적이었다. 더할 수도 덜 수도 없는 비례와 균형으로 잡아낸 젊고 건장한 남자의 육체는 운동선수라기보다 무용수처럼 보였다. 그는 오직 자신을 바라보라고 할 뿐 어떤 미학적 해설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불멸의 존재인 신을 선망했고, 절정의 젊음을 조각함으로써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달아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인간에게 신의 풍모를 덧입혀 불멸과 완전성의 아우라를 훔치고자 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남자를 쳐다보고 있는 동안,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올림푸스의 신들은 인간이 꽃피운 불후의 아름다움을 지켜보며 오히려 그 유한성을 질투하지 않았을까.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신들의 삶에 바친 송가(頌歌)가 아름답다.
김병종 교수 ,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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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리스의 신과 인간" 눈부시도다 生의 頌歌(송가)여..... 좋은글과 음악들 마음속에 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