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몰트만의 신학
- 희망과 종말, 종교인은 종말을 어떻게 실존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그로부터 도출되는 '지금'의 방향성
I. 들어가면서 : 위르겐 몰트만의 신학적 위치
보통 개신교인들이 아는 '사람'으로 성서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라면, 루터나 칼뱅, 쯔빙글리 정도일 것입니다. 몇 명 더 나온다면, 어거스틴이나 웨슬레, 많이 아신다면, 후스와 위클리프 정도일 것입니다. 사실 위의 열거한 인물들의 이름 정도나 알 뿐이고, 무엇을 이야기했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나 현대신학으로 넘어오는 부분에 있어서는 모르는 분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유럽의 신학에 있어서는 신학도들 외에는 찾지 않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최근 들어 유럽의 신학에 관심을 갖는 평신도들이 많아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20세기의 신학의 흐름은 자유주의와 복음주의의 대결이기도 했지만,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대결이기도 했습니다. 불트만의 비신화화와 바르트의 교의학, 틸리히의 조직신학론, 그리고 당대의 비슷한 시기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까지를 살펴보면 20세기 현대 신학의 주요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몰트만 박사입니다.
몰트만 박사의 논제들은 한국의 신학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안병무 박사의 '민중신학'입니다. 남미의 해방신학과 유사하지만, 한국적인 성격이 강한 부분이 있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접점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II. 내가 이해한 그의 신학 : 종말의 실존적 이해와 희망, "종말은 희망 그 자체가 된다."
제가 이해했던 몰트만 박사의 신학은 '현재와 카이로스'이며, '종말의 실존적 해석'이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라고 축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마지막 때'라고 이야기하는 종말에 대해서 사실 우리는 아는 바도 없고, 잘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개인의 종말에 대해서는 가끔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세상의 끝날과 개인의 끝날은 실존적인 의미에서 고찰해본다면 동일할 것입니다. 개인의 종말은 곧 그 개인의 세계가 종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실존적 해석>이라는 것은 종말을 '지금 이 자리에서' 고민해보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덧붙여 '희망의 신학'이라는 표현을 함께 음미하여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도에게 있어서 '끝날'은 종말임과 동시에 가장 환희에 가득 찬 순간입니다. 즉 '종말'은 곧 '희망'입니다. 종말은 기본적으로 예수의 재림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몰트만 박사의 <종말의 실존적 해석>이란, 예수의 재림(이라기 보다는 미래 현존現存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이 지금 현재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우리 삶을 되돌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종말의 의미는 환희의 순간이고, 그 환희의 순간이 단순히 저 멀리 시간의 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순간에도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예찬한다기보다는,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죽음을 실제적으로 이해하고, 그 죽음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기독교적으로 다시금 곱씹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와 카이로스라는 이야기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와 더불어서 시간을 이야기하는 주제 중 하나입니다. 대체로 카이로스를 '개입하는 시간'이라고 부르면 될 것이고, 크로노스를 '기계적 의미의 시간'이라고 부르면 충분할 것입니다.
몰트만 박사의 신학에서 현재는 위의 의미에 비추어 볼 때 반드시 '항상' '카이로스'입니다. 여기에 덧붙일 것이 주기도문의 한 장면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야기에 개신교도라면 모두가 동의할 것입니다.
종말의 실존적 해석을 추구하는 몰트만 신학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 성취는 미래의 어느 한 때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의 하나님 나라가 성취 '되었으며,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종말을 실존적으로 이해한다면, 마땅히 '거듭난 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른바 '하나님 나라'가 지상에 이룩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하나님 나라는 종전의 제정일치의 국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공의, 공동체와 나눔의 정신이 꽃 피는 세계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이후에 공동성찬의 중요성과 에큐메니칼(교회일치운동)을 지지하며 위와 같이 공동체적인 교회와 공동체적인 세계 이해를 추구하는데에 힘썼으며, 지금까지도 20세기 신학의 한 기둥을 세운 인물로서 평가받고 있습니다.
III. 나가면서
항상 이런 이야기를 끄적거릴 때면 아주 조심스러워 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것보다도 알지 못하는 부분들 특히나 오늘의 경우에는 '종말'이라는 키워드는 종말론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원체 쓰기를 기피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내면적으로도 아예 이야기를 꺼리는 부분이기도 하다는 방증일 것입니다.
나가면서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은 '몰트만은 종말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미래만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몰트만 신학의 핵심은 다름 아닌 지금 현재입니다. 그는 결코 죽음이나 종말을 예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과 종말' (즉, 예수의 현존)이 지금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 그것이 가치있다라고 해석한다면 그것은 몰트만에 대한 지나친 오해(誤解)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으어...역시 신학은 어렵군요~_~;;
그냥 사이비들 종말론 팔이 하지 말라는 경고 같네요
그리고 종말과 이상사회 도래를 동일시 해 이타적인 삶 좀 살자고 호소하는 듯
살짜쿵 달자면, 종말과 이상사회를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타당한 해석이 아니라고 봅니다. 몰트만을 잘못 보게 되면 통상 그런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몰트만의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 실존적 성격이 강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현재의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종말의 의미는 신의 재림과도 같습니다. 즉, 종말을 지금에 곱씹는다는 것은 지금 신의 현존 하에 산다는 것을 곱씹는 것입니다.
@europasi 인간은 결국 죽는 존재입니다. 하이데거인가요? 잘은 모르는 부분입니다만, 잠깐 끌어온다면, 하이데거는 인간이란 없음 가운데 있음이라고 이해합니다. 즉, 죽어야 하는 것인데 사는 것입니다. 즉 죽음 속에 사는 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는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전제하에서 기독교인 역시 벗어날 수 없습니다.(물론 실존적인 차원에서요.) 따라서 기독교인 역시 현실적으로는 죽음을 직시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기에 존재로서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죽음은 이런 의미를 갖습니다.
@europasi 기독교인에게도 죽음은 현실적인 것이며, 개인의 죽음은 곧 세계의 종말과 동치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종말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종말의 의미가 문제됩니다. 기독교인에게 종말이란 이른바 새하늘과 새땅 즉, 예수의 현존, 다름아닌 신의 현존과 체험입니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기독교인은 종말이 곧 희망입니다.
@europasi 그러한 종말이 현재에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라는 의미는 기독교인에게 현존하는 신의 이미지를 가지고 옵니다. 결과적으로 '신국'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몰트만은 그 의무에 대해서 공동체적 의미 즉 '교회'를 중시했고, 상호 공존과 넓은 교회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europasi 유념할 것은 마지막에도 기재하였습니다만, 지금 신께서 함께 계시니 기뻐하고 서로를 향해 구제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구태여 종말을 따로 찾을 것이 아니라 이미 종말을 맛본 자로서 신의 의지대로 나아가자는 담론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됩니다. 종말을 현실적으로 인식하자는 것이지 종말을 예찬하는 것은 아닙니다.
@europasi 본문에 '사랑과 공의, 공동체와 나눔의 정신이 꽃 피는 세계'가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타적인 삶을 통해 종말이라는 공포의 허상이 아닌 종교적이며 실질적인 이상사회로 이끌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자고 읽어 댓글을 달았습니다.
종말이 곧 현존하는 신의 재림이며, 신의 재림은 종말의 공포가 아닌 축복의 때를 말하며, 이러한 축복의 때인 '하나님 나라'가 지상에 이룩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한다. 여기서 '행동'은 모든 신도(나아가 모든 인류)의 이타적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마하반야 몰트만이 그 점에서 '교회의 확장부터'라는 취지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긴 했지만, 성과는 크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런 사상적 기반이 남미의 해방신학에도 영향을 주긴 했다고 봅니다. 드디어 '압제에서 건지는 예수'를 보기 시작한 것이지요.
@마하반야 하지만 굳이 종말과 신의 재림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말을 거론하는 데는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본래 그리스도라면 이타적인 삶이 중요하다 알고 있습니다. 즉 본래 신실한 그리스도에게 전하는 바라면 3번째 단락은 다른 말로 채워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3번째 단락은 다시 한번 '몰트만은 종말을 강조하지 않습니다'라고 적고 있죠.
해서 비 신도에게 종말의 공포와 파괴성 만을 드러내 면죄부를 파는 사이비 목사들과 이에 쉽게 경도 되는 마음 약한 존재들에게 좀더 종말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유도하고 '종말 팔이를 경계하라'라고 전하는 내용에 무게를 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하반야 그것은 몰트만이 이야기한 '종말이 곧 희망'이라는 표어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죠. 말씀하신대로 일응 타당합니다. 다만 굳이 종말팔이보다는 그 때까지의 종말론이라는 것이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이니, 재림과 휴거라느니 이런 단어들로 점철되어 교의의 다른 부분에 비해서는 상당히 유리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독 종말에 대해서 만큼은 근대적 시선이 도달하기 어려웠죠.
근 반년 만에 봤는데 위르겐 몰트만에 대한 개론을 잘 풀어 올려주셨네요. 특히 '지금까지도 20세기 신학의 한 기둥을 세운 인물로서 평가받고 있습니다.' 라고 작성하신 부분은 더더욱 가슴에 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