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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게시판 철학 위르겐 몰트만Moltmann / 종말, 그리고 지금
europasi 추천 0 조회 316 17.06.04 20:40 댓글 1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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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7.06.05 01:52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 17.06.10 18:56

    으어...역시 신학은 어렵군요~_~;;

  • 17.06.11 23:54

    그냥 사이비들 종말론 팔이 하지 말라는 경고 같네요
    그리고 종말과 이상사회 도래를 동일시 해 이타적인 삶 좀 살자고 호소하는 듯

  • 작성자 17.06.12 00:12

    살짜쿵 달자면, 종말과 이상사회를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타당한 해석이 아니라고 봅니다. 몰트만을 잘못 보게 되면 통상 그런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몰트만의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 실존적 성격이 강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현재의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종말의 의미는 신의 재림과도 같습니다. 즉, 종말을 지금에 곱씹는다는 것은 지금 신의 현존 하에 산다는 것을 곱씹는 것입니다.

  • 작성자 17.06.12 00:15

    @europasi 인간은 결국 죽는 존재입니다. 하이데거인가요? 잘은 모르는 부분입니다만, 잠깐 끌어온다면, 하이데거는 인간이란 없음 가운데 있음이라고 이해합니다. 즉, 죽어야 하는 것인데 사는 것입니다. 즉 죽음 속에 사는 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는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은 전제하에서 기독교인 역시 벗어날 수 없습니다.(물론 실존적인 차원에서요.) 따라서 기독교인 역시 현실적으로는 죽음을 직시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습니다. 죽을 수 밖에 없기에 존재로서는 이미 죽은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죽음은 이런 의미를 갖습니다.

  • 작성자 17.06.12 00:17

    @europasi 기독교인에게도 죽음은 현실적인 것이며, 개인의 죽음은 곧 세계의 종말과 동치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종말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기독교인들에게 종말의 의미가 문제됩니다. 기독교인에게 종말이란 이른바 새하늘과 새땅 즉, 예수의 현존, 다름아닌 신의 현존과 체험입니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기독교인은 종말이 곧 희망입니다.

  • 작성자 17.06.12 00:20

    @europasi 그러한 종말이 현재에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라는 의미는 기독교인에게 현존하는 신의 이미지를 가지고 옵니다. 결과적으로 '신국'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몰트만은 그 의무에 대해서 공동체적 의미 즉 '교회'를 중시했고, 상호 공존과 넓은 교회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작성자 17.06.12 00:22

    @europasi 유념할 것은 마지막에도 기재하였습니다만, 지금 신께서 함께 계시니 기뻐하고 서로를 향해 구제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구태여 종말을 따로 찾을 것이 아니라 이미 종말을 맛본 자로서 신의 의지대로 나아가자는 담론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됩니다. 종말을 현실적으로 인식하자는 것이지 종말을 예찬하는 것은 아닙니다.

  • 17.06.12 00:31

    @europasi 본문에 '사랑과 공의, 공동체와 나눔의 정신이 꽃 피는 세계'가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타적인 삶을 통해 종말이라는 공포의 허상이 아닌 종교적이며 실질적인 이상사회로 이끌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자고 읽어 댓글을 달았습니다.
    종말이 곧 현존하는 신의 재림이며, 신의 재림은 종말의 공포가 아닌 축복의 때를 말하며, 이러한 축복의 때인 '하나님 나라'가 지상에 이룩할 수 있도록 '행동'해야한다. 여기서 '행동'은 모든 신도(나아가 모든 인류)의 이타적 '행동'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 작성자 17.06.12 00:34

    @마하반야 몰트만이 그 점에서 '교회의 확장부터'라는 취지로 에큐메니칼 운동을 지지하긴 했지만, 성과는 크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런 사상적 기반이 남미의 해방신학에도 영향을 주긴 했다고 봅니다. 드디어 '압제에서 건지는 예수'를 보기 시작한 것이지요.

  • 17.06.12 00:44

    @마하반야 하지만 굳이 종말과 신의 재림이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말을 거론하는 데는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본래 그리스도라면 이타적인 삶이 중요하다 알고 있습니다. 즉 본래 신실한 그리스도에게 전하는 바라면 3번째 단락은 다른 말로 채워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3번째 단락은 다시 한번 '몰트만은 종말을 강조하지 않습니다'라고 적고 있죠.
    해서 비 신도에게 종말의 공포와 파괴성 만을 드러내 면죄부를 파는 사이비 목사들과 이에 쉽게 경도 되는 마음 약한 존재들에게 좀더 종말에 대한 올바른 접근을 유도하고 '종말 팔이를 경계하라'라고 전하는 내용에 무게를 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작성자 17.06.12 00:55

    @마하반야 그것은 몰트만이 이야기한 '종말이 곧 희망'이라는 표어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죠. 말씀하신대로 일응 타당합니다. 다만 굳이 종말팔이보다는 그 때까지의 종말론이라는 것이 전천년설, 무천년설, 후천년설이니, 재림과 휴거라느니 이런 단어들로 점철되어 교의의 다른 부분에 비해서는 상당히 유리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독 종말에 대해서 만큼은 근대적 시선이 도달하기 어려웠죠.

  • 17.12.09 18:30

    근 반년 만에 봤는데 위르겐 몰트만에 대한 개론을 잘 풀어 올려주셨네요. 특히 '지금까지도 20세기 신학의 한 기둥을 세운 인물로서 평가받고 있습니다.' 라고 작성하신 부분은 더더욱 가슴에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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