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말이 없는 충청도가 고향이신 부모님 슬하에 오빠,남동생,늦둥이 여동생
그러니까 둘째로 난 아내는, 내가 연애를 건네고 3년 후 결혼해서 살아오던 어느날
독백 처럼 하는 말이.. 자기가 살아오면서 잘 한 일 하나는 부모님을 떠나 나와
결혼한 일이라 했어요. 서울토박이 우리 집안은 일찍 개화된 집이라 항상 명랑하고
웃음이 넘치는 분위기가 좋았다는거죠. 시아버님이 어느 저녁에 머루포도를 한 박스
사오셨길래 안방에 몇 송이 들여드리고 ..자고 나서 보니 그 한 박스가 다 초토화
되어있더라는거죠. 자기 친정에서도 같은 경우가 있었는데 부자간에 서너 알 떼
잡숫고는 마신다던데..
이 신랑은 바람돌이랍니다. 특히나 자전거를 차츰 좋아하게 되면서 말이죠.
첨엔 쫄바지에 울긋불긋한 복장을 보곤 꼭 저래야 자전거 타는 맛인가..하던 때가
있었는데 어느새 인천~부산 을숙도 국토종주를 비롯 해남 땅끝, 거제도 향일암,
강원도 해안도로 포항~속초, 등 어지간한 데를 자전거로 누벼본 저로서는 한 가지
여망이 있었어요. 노후의 삶의 길에 우리 엄처님(하도 내게 올바른 말만 하셔서
엄처시하에 사노라니 엄처님이라고 속으로만 별명 지었답니다)-을 저와 취미로서
동반자도 되어주길 바램이었죠. 근년에 우리는 7년간 지구 반대편에 견우직녀로
기러기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큰딸의 결혼 일로 다시 한국에 다 합류하게 되었지요.
기어코 내 말을 들어주기로 한 엄처님은 춘천행 시외버스에 자전거 두대를 싣고
춘천호반 - 팔당 90킬로 라이딩의 장정에 올랐답니다. 호수를 돌고 의암댐을 지나
강촌에 이르러 차도 옆을 긴장하며 따라오던 사람이 기어코 첨으로 넘어졌네요.
10미터 앞에서 그 장면을 돌아서서 보던 저는, 걸음마 아기도 아니니 잠시후 다시
일어서려니..바라만 봤는데 여기 까지가 30 킬로 지점. 앞으로 북한강변을 따라
오르내리며 가야할 남은 거리가 60킬로.. 어두워진 중간 지점에서 식사하는데
줄곧 시큰거린다는 팔목을 손수건 두 장으로 묶고는 마침내 팔당에서 전철에 싣고
자정이 되서 김포공항 부근의 집에 귀가했고 저는 이튿날 새벽 버스로 일터인 대전엘
내려왔는데요. 점심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마이갓! 두 곳이 복합골절이었다네요.ㅠ
일년이 지난 지금, 수일 전 카페를 가입하고 삶의 얘기 뭔가를 저도 올려야 점차
카페인으로 적응도 할듯 하여 그 에피소드를 이렇듯 적어봅니다. 엄처님이 저를
맞춰주며 사느라 왕왕 에너지 오버를 하는 일이 있어서 군소리도 듣습니다만 어느날
엄처님의 폰에 카스토리를 한줄 봤는데, 자전거 독사진 아래에 적어 놓았기를,
자전거친구 된 남편과 ~ 라 했더군요. 두번 다시 장거리는 안간다는 사람이지만
그 후에도 서울~안산 왕복 100킬로를 비롯 , 오기 충천으로 함께 라이딩하
곤 했답니다.
아~ 옛날이여~~ 노래.ㅎㅎ 지금은 국제선 비행 다니는 승무원 딸의 외손녀를
전업으로 기르고 있는유급 외할머니로 주저앉은 우리 엄처님! 언제나 해방되어
제2의 신혼으로 우리 둘만이 살 날 오겠습니까.. 늘 미안하고 고마운 엄처님, 파이팅입니다!!
첫댓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재미있게 감상했습니다.글 잘쓰시네요.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