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吉한 誘惑]
불안의 하룻밤은 밝았다.
조반을 일찌감치 먹고 영훈은 사로 나갔다. 사원들도 모두 출근해 있었다.
『사장께서 부르십니다. 빨리 들어가 보셔요.』
편즙 부원 하나가 영훈을 보자 사장실을 힐끔 바라보았다.
『사장이 벌써 나오셨어?』
『네, 지금 막 나오셨습니다.』
붙여 물려던 담배를 다시 갑에 집어넣고
『나한테 어디서 전화 온 데는 없었소?』
은주의 소식이 궁금하여 영훈은 물었다.
『없는데요.』
영훈은 사장실로 들어갔다.
김석호 사장이 이처럼 일찌감치 「신여인」사에 나온 것은 근래에 드문 일이었다.
김사장은 테에불 위에 두 팔꿈치를 올려놓고 담배를 피우면서 들어오는 영훈을 물끄럼이 바라보고 앉았다.
『거기 좀 앉으시오.』
아침 인사를 하고 영훈은 사장과 마주 앉았다.
이 사나이가 바로 연숙의 남편이다. 이 사나이가 바로 내 손으로부터 연숙을 끌어다가 마음대로 안아 보고 마음대로 학대를 할 수 있는 그 어떤 권위를 가진 사나이다. 그리고 지금도 내 위에 군림(君臨)하여 나를 사회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사나이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영훈에게 있어서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무엇인가 헤아릴 수 없는 운명의 실마리가 연숙이라는 한 여성을 끄나풀로 하여 자기와 김석호의 대결을 끝까지 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거지처럼 초라해진 연숙의 감정을 끝끝내 거부한 자기의 태도가 어쩐지 위선자의 그것과도 같이 생각키워지는 것이었다. 그러한 연숙을 생각하면 마음이 알끈했고 은주를 생각하면 마음이 가뜬했다. 그 알끈한 심정과 이가뜬한 심경 속에서 영훈의 불행의 싹은 차차 움트고 있었다.
『이형도 아다시피 내가 다소 바쁜 몸이어서 「신여인」에 전력을 기울일 수가 없소. 그래서 구상을 좀 달리해 보았소.』
김사장은 우선 담배 한 대를 영훈에게 권하며
『그래서 나로서는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이형이 「신여인」사의 총책임을 맡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은 벌써부터 갖고 있었지요.』
『사장의 호의는 감사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 책임이 너무 무겁습니다. 저는 그저 편즙만을 전적으로 맡아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영훈은 사양했다.
『알법한 이야기지만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지요. 편즙자란 일종의 기술잔데, 이 사회에서는 기술자로서만은 성공하기가 힘든다는 것이오. 기술자는 어디를 가나 기업자의 지배를 받아야 하거든요. 그런 의미에 있어서도 사람 위에 서는 통솔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오.』
벌써부터 들어온 이야기이기에 영훈은 잠자코 있었다.
『다소 바쁠지는 모르지만……그 대신 이형의 보조자를 한 사람 배치하도록 하겠소. 알기 쉽게 말을 하면 나는 당분간 「신여인」에서 손을 떼고 나를 대신할 새로운 사장이 들어 오게 되었소.』
『아 그러면 「신여인」의 운영체가 바뀌어집니까?』
『아니오. 내용에 있어서는 마찬가진데 내가 다소 바쁜 몸이어서 하는 말이오.』
『그러면 그 사장되실 분은 어떤 분인가요?』
『내가 잘 아는 사람이오.』
김석호는 거기서 잠간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으며
『실은 내 아낸데……』
『에?……』
『이형은 잘 모를지 모르지만 이북에 있던 내 아내가 이번 일·사후퇴 때 월남을 했지요. 지금 아현동서 살고 있지만……문과 출신이라, 그 방면에도 다소 소질이 있는 것 같고……지금은 별거 생활을 하고 있지만 멀지 않아서는 한데 모여야만 될 형편인데……그때까지는 무슨 발붙일 사업 하나를 장만해 줘야겠고……명목은 사장이라지만 결국은 이형의 보조자가 되겠지요.』
실로 뜻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이러한 사태가 자기 배후에서 버러지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 그렇습니까!』
주권자의 의견이니 반대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명목이 사장이지 실권은 어디까지나 이형에게 있을 거요. 잘 협조해서 「신여인」사의 발전을 도모해 주시오.』
『잘 알았습니다.』
영훈은 가슴 속이 설레어 견딜 수가 없었다.
『영업부장 최성진은 내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기에 그만두라고 했소. 당분간 이형이 겸임을 해 주시오. 부원이 모자르면 적당히 보충을 해도 좋고 편즙 기술자를 따로히 채용해도 무방하오. 둘이서 잘 의논해서 적당한 발전책을 강구해 주시오.』
『힘 자라는 데까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대답은 했으나 영훈의 감정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허둥지둥 허공에 떠 있었다.
무엇인가 꼭 지적할 수는 없었으나 그 무슨 불길한 운명이 자기를 차츰차츰 학대 할려고 노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 그것은 확실히 불길한 예감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딘가 감미로운 일면을 지닌 예감이기도 했다. 아무런 것도 모르고 있는 김석호 사장의 이야기는 하나의 불길한 유혹을 의미하고 있었다.
운명이 자기에게 지금 하나의 가혹한 시련을 주고 있는 것이라고 영훈은 생각하였다. 그 시련에 쓰러지지 않고 그 불길한 유혹에 이겨 나갈만한 굳세인 의지력이 영훈에게 필요했다. 자신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고, 없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이 있는 것도 같았다.
녹크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여기자 한 사람이 연숙을 인도해 가지고 사장실로 들어왔다.
『아, 마침 잘 왔소.』
여기자는 나가고 김석호는 연숙을 맞아 들였다.
새로이 웨이브를 한 파아마에 윤이 반지르니 돌고 있었다. 보오얀 분가루가 유달리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회색 양단 저고리에 깜정 벨벳트 치마가 대학생들처럼 짧다. 자색 하이·힐이 유달리 놓다. 고무신에 긴 치마를 입었던 이틀 전보다는 사오 년이나 애티가 있어 보였다.
『인사를 하시오. 이분이 편즙장 고영훈씹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영훈을 향하여
『내 아내요.』
했다.
어색하기 짝없는 장면이었다. 사장의 소개로 인사는 바꾸었으나 그것이 영훈에게는 무슨 죄를 짓는 사람처럼 거북스러웠다.
그러나 연숙은 태연하게
『아내라는 건 지난날 이야기고 지금은 자유로운 몸이니까, 김사장의 말을 곧이 들으시면 서운해요.』
그러면서 요염한 웃음을
『호호호호……』
하고 유쾌히 웃었다.
『허어, 이러다가는 집 안 내용이 다 드러나겠는걸! 어쨌든 이북에 있는 내 호적에는 백연숙이가 김석호의 배우자로서 등록되어 있는 것만은 사실이오.』
『그렇지만 고선생, 사장의 말재주에 넘어가서는 안 되셔요. 이북 법률이 남한에서 발효(發效)하지는 못하니까요. 그렇지 않아요, 고 선생님?』
연숙의 눈꼬리가 곱게 웃어 왔다. 지난날의 학생티를 거지반 회복하고 있는 연숙의 명랑한 어조가 그의 짧은 치마와 함께 영훈의 눈에는 지나치게 부시다.
영훈은 당황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후딱 들창 밖으로 외면을 했다. 을지로 네거리에 인파는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 흐느적거리는 인파와도 같이 영훈의 감정은 흔들리고 있었다.
『어쨌든 백사장, 좀 앉으시오.』
김석호는 연숙을 그렇게 부르며 싸이드·체어를 권했다. 연숙은 앉으며
『고선생님, 잘 좀 지도해 주세요.』
그러면서 영훈의 모습을 말끄럼이 바라보았다. 비밀의 속삭임을 향락하는 것과 같은 윤택있는 눈동자였다.
『힘자라는 데까지는 해 보겠습니다.』
연숙의 그 윤이 반지르니 도는 두 눈동자가 영훈은 차차 무서워졌다. 오늘의 이러한 인사이동의 배후에는 연숙의 의욕이 숨어 있는 것이라고, 영훈은 그것을 명확히 느끼며 결코 단순하지않은 이 여성의 삼십 대의 연륜을 생각하고 있었다.
『사원은 모두 몇 명이나 되죠?』
사장으로서의 권위를 연숙은 세워 오기 시작하였다.
『편즙부에 여섯 명, 영업부에 세 명. 그리고 사환애가 하나 있습니다.』
『이 달 편즙은 어떻게 됐어요?』
『끝마치어 인쇄소에 넘겼습니다. 내달 원고를 수집하고 있지요.』
『재미있겠어요, 잡지 일이란……』
『해 보시면 아시지만 재미만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애로가 많습니다.』
『거야 그렇겠지요. 인생에 애로가 있듯이 잡지 편즙에도 그런 대목이야 물론 있겠지요.』
의미 깊은 한 마디를 연숙은 던져 보며
『아마 김석호 사장보다는 제가 다소 이 방면에는 안목이 있을 거예요. 여자라고 지나치게 깔보지는 마세요.』
웃지도 않고 하는 연숙의 다짐을 영훈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김석호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됐어! 그만하면 사장으로서의 관록이 상당하오. 그늘에서 자란 콩나물쯤으로 알아 왔었는데 이처럼 턱 사회에 내놓고 보니 예상 밖으로 믿음직하오.』
그리고는 혼자서 유쾌히 하하 웃었다.
『고형, 이 여성은 부드러운 것 같으면서도 깔끔한 데가 있고 꿈이 많으면서도 계산은 밝지요. 계산이 밝은 것 같으면서도 또 어두운 데가 있고 현실의 행복을 추궁하다가도 하늘의 별만 쳐다보는 여성 ── 길을 보지 않고 걸어가다가 가끔 돌뿌리를 차고 넘어도 진답니다. 넘어지고 나서는 쳐다보던 별만 원망하지요.』
영훈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그쯤 알아 두고 고형이 잘 협조해 주시오. 지나치게 별을 쳐다볼 때는 고개를 좀 눌러도 주고 지나치게 땅만 보고 걷다가 전선 때 같은데 부딪칠 염려가 있을 때는 턱 밑을 좀 밭혀도 주고……』
그러나 연숙은 마이동풍 격으로 들창 밖 푸른 하늘만 내다보고 있었다. 내다보는 연숙의 눈 위에 금방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무게를 가지고 헤리콥터 한 대가 할딱할딱 날아가고 있었다. 김석호는 이윽고 사장의 인계 서류를 두 사람 앞에 내주고 상세한 설명을 하고 났을 때는 이미 정오가 가까운 무렵이었다. 신구 사장의 퇴임 인사와 취임 인사를 사원들에게 하고 세 사람은 김석호의 인도로 점심을 먹으러 거리로 나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