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한길벗 글쓴 날짜: 2003-09-16 오후 10:08
감자 기근(飢饉)과 아이리쉬
마침내 토니 블레어(Tony Blair) 영국 수상이 1997년에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1백만명이나 굶어 죽었던 아이랜드의 감자 기근(the Potato Famine)은 대영제국의 식량 정책의 태만이었다고 앵글로 색슨(Englo-Saxon)의 역사적 과오를 회개했다.
흉년(凶年)은 천재지변(天災之變)이지만 기근(飢饉)은 인재(人災)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1845-50년에 아이랜드(Ireland)에 그 감자 흉년으로 그 당시 8백만의 인구 가운데 죽은 이들과 이민간 사람들로 인하여 절반인 4백만이 그 섬을 떠나가야 했던 무서운 재해가 대영제국이 만든 비극이였다는 것이다.
그 때 감자는 아이랜드의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살았던 주식이었으며, 거진 감자만 먹고 살 정도로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1845년에 알지 못하던 감자 고사병(枯死病/Blight)이 생겨서 굶주리게 되었고, 이로서 기르던 가축과 가산을 다 팔아도 입에 풀칠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살던 집 마져도 차압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은 길거리와 언덕에 굴을 파고 살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관도 없이 시체들을 한 구덩이에다 파묻어야 했었다.
그로 인하여 1백만은 죽었고, 1900년 까지 아이랜드를 떠나간 사람은 3백만이었다. 새 희망을 찾아서 캐나다와 영국, 그리고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지만 허기진 사람들은 병에 걸려서 항해 중에도 수없이 죽어 갔다. 그리하여 그 배의 별명은 "널 배"(Coffin Ships) 였고, 간신히 건너 간 사람들 조차도 도착하자 곧 죽어야 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아이리쉬 감자 기근(The Great Irish Famine)은 수많은 문학 작품과 서양 역사에 되풀이 하고 또 되뇌이고 있는 모양이다. 그 때에 건너온 아이리쉬 후예들이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천시를 당하면서 미국에 정착하여 오늘의 빛나는 아이리쉬 미국인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케네디와 레건 같은 이가 있다.
북한에 지금 굶어 죽는 사람들도 그만하지 않을가 나는 몹시 마음이 아프다. 세상에는 남아 도는 식량이 산더미 처럼 쌓여 있지만 그들은 처참히 아사(餓死)에 허덕이어야 하니 말이다. 양식이 없어 죽는 게 아니라, 양식의 나눔이 없어 죽는다. 19세기의 아이랜드에도 감자 말고는 다른 곡식들은 풍년이 들 정도로 잘 되었고, 백만이 굶어 죽던 아이랜드의 항구에는 1847년만 해도 영국과 스코틀랜드로 실려 갈 4천 척 배에 실을 곡식들이 하늘 높이 쌓여 있었다니 말이다. 자기 땅에서 생산된 곡식 더미를 바라다 보고 죽어 갔을 사람들을 상상한다면 그 눈 못감고 죽었을 한이 또 얼마이었겠는가.
아이랜드는 수백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 16, 7세기에 걸쳐 "아이랜드 식민 정책"(The Plantation of Ireland)을 채택하여 영국은 법령을 선포(The Penal Law) 하고서 아이랜드의 천주교인들의 땅을 몰수하여다가 영국/스코틀랜드 개신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법령으로 본토인들인 아이리쉬는 땅을 소유할 수도 없고, 투표도 못하고 공직을 맡을 수도 없게 했으며, 마침내 우리네 한일 합방과도 같이 1800년에는 아이랜드 의회를 해산하고 완전히 대영제국에 합방해 버렸다.
이로서 땅은 모두 빼았기고 갠신히 영국인들로 부터 소작농으로 빌린 땅에서 소득의 대부분을 임차료로 주어야 했고, 그나마도 대부분의 아이리쉬들은 노동자들로 전락하여 죽어라고 농장에서 일을 해주고서 그 품삯으로 귀퉁이의 짜락 토막의 땅에다가 감자를 심어서 연명하기도 힘들게 살아야 했었다. 그 가난한 사람들은 감자 말고는 거의 먹을 게 없었다. 감자를 먹고 사는 사람들을 천하고 비열하게 보았고, 영국인들은 감자를 주식으로 살지 않고 밀과 고기로 살았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감자가 없어 죽었을 때, 영국의 지주들은 감자만 먹고 살았기 때문에 천하게 천벌을 받았다고 조소를 하였다고 한다.
일본이 20세기 초두에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우리 조상들을 단발령에 상투를 깎고 양복을 입혔을 때, 가난한 우리들도 "와라지 주제"로 떨어지게 되었던 때가 있었다. 가난하고 가련한 사람들은 구두를 살 수가 없어 "짚신"을 신을 수 밖에 없었고, 짚신 신은 불쌍한 조선 사람을 업수이 여겨서 일본인들을 "짚신"(와라지)이라고 천시했었다. 일본이 만주에 팽창 정책으로 제국주의를 확장하려던 야심에 불타던 때 불쌍한 우리는 허기진 배를 안고 농사를 지으러 만주로 갔던 이들이 지금도 한족(韓族)으로 중국 동북성에 남아 있는 후손들로 살고 있지 않는가.
내가 자랄 때에 나이든 순박한 농부들은 나락을 거두어 정부에 벼가마를 실어다 파는 것을 "공출"(供出) 대러 간다고 하던 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공출이란 일본의 전쟁 야욕으로, 일본 자국민들에게 우리 나라의 쌀을 강제로 거두어다가 가져가는 행위를 말하던 것이었다. 좋은 쌀은 일본이 빼앗아 가고 우리는 보릿고개에 배가 고파서 울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제국주의의 횡포는 일본이나 대영제국이나 잔인한 폭군이었다. 북한의 식량 정책도 현대의 어느 정부의 정책도 인재(人災) 되지 않게 해야 역사에 한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수천년 넘어 오던 우리의 보릿고개를 완전히 넘었던게 아직 30년도 안된다. 70년대 중반 까지도 우리는 배고픈 사람들이 많았었다. 남한은 지금 굶어 죽지않게 되었으니 부자이지만, 북한은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니 이 얼마나 뼈아픈 비극인가. 150년이 지나간 뒤에서야 내키지 않는 맘으로 영국 수상이 아이랜드를 향하여 사과를 했는 데, 오늘의 잘못된 정책이나 일본의 지난 날의 사과는 언제가 바로 할가?
-끝-
*본 글은 msn의 늘 푸른 쉼터에 올라온 글입니다.
현재 미국 동부지역에 거주하는 분이며 글의 내용이 좋아 우리세상 회원들께 소개하고 싶어 옮겨왔습니다.
글 쓴분의 허락은 받았으나 우리세상 관리자 분들께는 미처 허락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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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에 가르침을 흘려버리지 않으면 좋은데요 그쵸?
감자는 미래식품인걸...미래는 식량전쟁이래요. 쌀 한 톨도 아끼던 그 시절은 어디가고 풍족함과 빈곤이 함께하는 요즘, 반성하며 생각해 볼 일 입니다.
세이브 더 칠드런(기관)
http://durl.me/53gcz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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