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누르하치는 후금의 건국자이자 초대 황제이며, 곧 중국 최후의 왕조인 청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그는 또한 1583년부터 건주 여진족을 통솔했다.
참고로 그의 성인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애신각라])를 풀이하자면 만주어 '아이신(愛新)'은 '쇠'을 뜻하고, '기오로(覺羅)'는 당시 여진족 부족 가운데 국조 6조(六祖: 닝우타 버이러)의 후손 부족들 홍색 직물로 짠 허리띠를 맬 수 있는데, 이런 여진족 부족들을 기오로(覺羅)라고 했다. 즉, '아이신기오로'를 직역하면 '쇠 부족'이라는 뜻이다. 추가로 이름인 누르하치(努爾哈赤[노을가적])의 뜻은 만주어로 `멧돼지 가죽'이라는 뜻이다.
2. 생애
그는 건주 여진 출신으로, 조선 초 오도리부의 먼터무(孟特穆)의 6대손이다 1583년, 아버지 탁시와, 할아버지 기오창가가 이성량이 이끄는 명군을 도와 반명 성향의 여진족 마을을 치는 과정에서 명군에게 오인 사살된 후, 그 뒤를 이어 푸순 동쪽 지방의 수러 바투루로써 자신의 부족을 다스린다. 명의 이성량은 그의 부친과 조부를 죽인 것에 대해 말과 토지를 하사하는 등 상당한 특혜를 베풀어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여진족을 통합하기 시작해 1606년, 수러 바이러에서 수러 쿤둘언 한이 되었고, 1618년 1월 1일, 그는 주위 여진족들을 정복하여 만주 지방의 대부분을 수중에 넣은 후에 랴오양, 묵던(Mukden, 지금의 랴오닝성 선양시)에서 나라를 세워 수러 겅옌 한으로 즉위하였고, 4월에 거주지를 근거로 자신과 온이안(完颜) 아쿠타(阿骨打), 천조제와 만력제를 동일시하며 1115년, 생여진의 온이안(完颜)부가 세웠던 암반 안취운 구룬(大金國)를 계승해 국호를 암바 아이신(大金)으로 정하고, 연호를 압카이 풀링가(天命)라 하였다.
여진을 통합하고 청이 세워지는 과정을 더 자세히 말하자면 명의 이성량을 도운 일부터 올라가야 하는데 이 이성량이라는 인물은 '요동왕'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당대에 뛰어난 장군이었다. (참고로 이 이성량의 아들이 바로 임진왜란때 조선에 파견된 이여송이다.) 실제 여진인들은 이성량을 두려워했고 누르하치조차 이성량이 좌천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세력을 키웠어도 눈밖에 나지 않게 뇌물을 보냈다. 그러나 이성량은 군비를 마음대로 쓰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등 타락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는 이성량을 좌천시키고 새로운 관리를 요동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 선택은 결과적으로 명나라의 섣부른 판단이었는데 이성량이 아무리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누르하치와 그 세력을 제압하고 섬멸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명은 이성량을 좌천시키고 경험도 없는 사람을 보내버린 것. 새로운 인사들도 본국에서 들었던 것과 달리 예상외로 강한 누르하치의 세력에 놀랐고 함부로 제압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서 누르하치의 선택은 대적도 아닌 뇌물이었다. 이성량과 싸운 여진족들이나 니탕개처럼 힘이 생겼다고 힘으로 대결하거나 경고한 것이 아닌 뇌물과 약한 모습을 보이면서 적대를 하지 않았다. 새로온 요동으로 발령난 사람으로서는 예상밖에 큰 누르하치의 세력과 구태여 적대하며 싸우기를 꺼렸고 재보를 보내주니 이성량처럼 누르하치의 여진 통합 과정을 눈감아 주었다. 여기서 누르하치의 능력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뇌물을 보낸다고 해도 이대로라면 결국 명의 본국에 이 일이 들킬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되면 명이 본격적으로 누르하치를 막기 시작한 것은 불보 듯 뻔할 수밖에 없는데... 이때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터졌다. 이 임진왜란은 누르하치에게 있어서는 천재일우로 이후 명의 시선은 전부 조선에 집중되어 누르하치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버렸다. 그 이후 명의 시선을 거리끼지 않고 전력으로 여진족들을 통합하기 시작했고 결국 전부 모든 여진족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성량의 요동 관리와 누르하치의 여진족 통합 과정은 사르후 전투 문서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여담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 지원을 두 차례나 제시하기도 했다. 1592년 8월에 "조상의 나라 조선에 원병을 보내겠습니다"라고 제안을 했고 당시 명나라에서 원군 지원에 대해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라, 조선에게는 가뭄의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지만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거절했다. 이어 임란이 거의 종료될 시점인 1598년 1월에도 "조상의 나라 원병?"이라며 제안해서 전투보다는 화친에 주력했던 명나라의 모습에 분개해 "원군 받아서 왜놈들 때려잡읍시다."라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지만 결국 거절했다. 당시 누르하치는 조선을 '조상의 나라'라는 존칭까지 써가며 원군 파병을 제안했다. 물론 누르하치가 순수한 뜻에서 조선을 도우려 했을 리는 없고,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이 쑥대밭이 된 틈을 타서 원군이란 명목으로 조선 영토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
누르하치는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를 물리치고 요동을 장악하였는데, 이때 명나라에 파견된 강홍립 휘하의 조선군과도 담판을 벌였다. 인조 반정 이전에는 광해군의 기미책으로 인해 조선과 후금 간의 충돌은 없었으나, 그 후 인조 반정으로 인해 후금에 부정적인 정권이 들어섰음을 알고 조선 배척 정책을 시행하였다. 1626년 영원성 전투 도중 홍이포에 맞아 부상을 입은 뒤에 상태가 호전되지 못하자 사망하였고 그의 뒤를 여덟번째 아들인 홍타이지가 이었다. 1636년, 홍타이지는 후금의 국명을 청으로 개칭하였고 누르하치는 청나라의 태조로 불리게 되었다. 사후 홍타이지는 누르하치를 복릉(福陵)에 안장하였다.
현재 중국에선 누르하치는 원래 명나라 하급 관리 출신이라는 논리로 같은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당시 누르하치의 관직의 의미는 주변 여진족을 순화시키고 명나라에 복속시키는 임무로, 실질적인 임무를 가진 관료가 아닌 부족장으로서 받은 벼슬이라는 걸 감안하면 중국에서 무리수를 띄우는 셈.
3. 죽음
문서 참조 (누르하치가 아예 홍이포에 맞지도 않았다는 내용이다.)
누르하치는 1626년 1월 영원성 전투 이후 동년 8월 11일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일반적으로 영원성 전투에서 입은 홍이포 부상으로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엄연히 청나라의 기록에는 '병으로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 7개월이란 기간 동안 누르하치는 4월에 직접 군을 이끌고 몽골 칼가 부족 원정에 떠났다. 또한 5월에 몽골 귀족인 오오바 훵 타이지가 찾아오자 직접 걸어나와 맞이한 행적도 있다. 홍이포에 부상을 입었다면 즉사하거나 아예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고조 같은 케이스를 보면 죽음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부상을 입고 멀쩡히 다니다 죽기도 한다. 더구나 홍이포에 입은 부상이 본래는 그렇게까지 치명적이지 않았거나 치료를 받아 완화되는 도중 당시 나이로는 고령이여서 갑자기 덧나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홍이포에 부상을 입었다고 즉사하거나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논리로 삼기에 부족하긴 하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아예 홍이포에 맞지도 않았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에 누르하치가 진짜 홍이포로 인한 부상으로 죽었는지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이다.
다만 <만주 실록> 등의 기록에서 누르하치는 영원성 전투 패배를 자책하는 걸 보면 그에게 심리적인 타격을 입힌 것은 확실한 것 같다.
4. 업적
여진족 특유의 제도이자 경제&사회 단위 겸 전쟁 당시 분대의 역할에 해당하는 팔기군을 편성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또한 어르더니 밬시와 가가이 자르쿼치로 하여금 몽골 문자의 형태를 빌어서 만주 문자를 창제하였다.
5. 전설
야사에 따르면 아버지가 수달이라고 한다. 수달이 누르하치의 어머니를 사모해서 밤에 찾아와 누르하치가 태어났다고 한다. 덕분에 누르하치는 수영을 매우 잘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한 도인이 찾아와 천자가 될 명당 자리를 알고 있는데, 물속 깊은 곳이라 자신이 들어 갈 수가 없으니 누르하치에게 묻어달라고 부탁하고 부탁을 들어주면 누르하치에겐 왕이 될 명당 자리를 알려주겠다고 한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천자의 자리에 자기 조상의 유골을 묻어 결국 누르하치가 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여담으로 누르하치의 후손인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의 황제였던 선통제 아이신기오로 푸이가 피난길에 오를 때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건국한 장소에서 간단한 회의를 소집하고 이 회의에서 만주국의 해산을 선언했다. 만주국을 억지로 청나라의 후신이라고 할 경우 국조가 세운 나라를 후손이 건국한 장소에서 해산한 드문 사례가 되겠지만, 청나라는 이미 멸망했고 만주국은 외세에 의한 괴뢰국에 불과하므로 실제로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