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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묵상글 ( 부활 제5주간 화요일. - “좋은 만남 있어 좋은 떠남이다”.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12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 아직 / 05:27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16:0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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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떠남의 여정
“좋은 만남 있어 좋은 떠남이다”
“주님은 자애롭고 불쌍히 여기시며,
역정에 더디시고 사랑이 지극하오이다.”(시편145,8)
떠남의 여정은 역설적으로 만남의 여정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만날 때가 있으면 떠날 때가 있습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입니다. ‘열흘 붉은 꽃이 없으며, 권세는 10년을 못가니’ 한없이 겸손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떠남이 있어 삶이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좋은 만남, 아름다운 만남이 있어 좋은 떠남, 아름다운 떠남입니다. “내가 삶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 공자의 지극히 겸손한 말씀처럼, 참으로 살았을 때 비로소 참으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잘 살지 못하면 마지막 떠남인 죽음도 제대로 잘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막교부들의 공통적 삶의 목표는 단 하나, “참으로 사는 것”, “진짜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제45주년 5,18민주화운동기념식중 참석자들이 애국가 4절까지 부르는 모습에서 저절로 눈물이 났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으면서 또 눈물이 났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중 숱한 만남과 떠남의 사람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제 생애 세분의 교황들이 떠났습니다. 성인이 된 요한 바오로 2세, 베네딕도 16세, 그리고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모두가 좋은 만남의 선물을 남기고 아름답게 살다가 아름답게 떠난 분들입니다. 놀랍고도 고맙게 프란치스코 교황의 떠난 자리에 새 교황 레오14세가 바톤을 터치하여 달리듯, 좋은 만남을 선물하면서 멋지게 교황직을 수행하고 있으니 언뜻 프란치스코 교황이 환생한듯한 생각도 듭니다. 오늘 새벽 홈페이지에는 레오14세 교황의 눈부신 활동과 말씀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4월21일 세상을 떠나기 전날인 4월20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안젤로 코마스트라 추기경이 대독한 강론이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영성이 고스란히 반영된 내용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떠남의 죽음을 요약한듯한 강론 일부를 나눕니다.
“그분은 살아 계시며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을 통해 함께 하시고,
우리 각자가 행하는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삶을 아름답게 하십니다.
그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의 어둠을 이기시며,
세상의 그늘까지도 이기셔서,
기쁨 가운데 당신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그리스도교는 곧 그리스도다. 아니, 진정으로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다.’<앙리 드 뤼박>
형제 자매 여러분, 부활 신앙의 경이로움 안에서, 평화와 해방에 대한 모든 기대를 마음에 품고,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새로워집니다. 주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됩니다.’”<2025.4.20. 부활 주일 낮미사 강론>
부활의 희망과 기쁨이 넘치는 말씀을 남기시고 아름답게 떠나신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하면 늘 만면의 미소입니다. 25년전 제 나이 51세, <선물>이란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요즘 무수히 폈다지는 꽃들을 보면서 삶은 선물이란 생각이 더욱 또렷해집니다. 영원히 계속되는 꽃이라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죽음 있어 삶이 선물임을, 떠남 있어 만남이 선물임을 더욱 또렷이 깨닫습니다.
“꽃처럼 환한 웃음보다 더 좋은 선물 있을까?
삶은 순전히 선물이다.
꽃같은 삶이다.
눈여겨 보지 않으면 순식간 사라져 가는 꽃들
바로 선물 인생 아니던가?
얼마나 그 많고 좋은 선물들 놓쳐 버리고 살았는지
살아 있는 동안은 그대로 꽃인 인생인 거다.
어제의 꽃 폈다지면 또 오늘의 꽃 폈다 지고...
평생을 그렇게 꽃으로 사는 거다.
끊임없이 폈다 지면서 떠나는 삶이다.
파스카의 꽃같은 삶이다.
잘 떠날 때 아름답지 않은가?
길이길이 향기로 남는다.”<2001.4.23.>
요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기전 고별사가 계속됩니다. 예수님의 떠남이 참 아름답습니다. 평화의 선물을 남기시며 떠나는 유언같은 말씀이 참 은혜롭고 감동적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주님께서 선물로 남기고 떠난 평화의 은총이, 고통과 시련중에도 우리 믿는 이들 모두가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고 마침내 행복하고 아름다운 선물같은 떠남의 죽음도 맞이하게 합니다. 참 많은 성인들의 삶과 죽음을 통해 목격하는 진리입니다. 성령은 바람입니다. 성령따라 살 때 아름다운 만남, 아름다운 떠남의 삶이요 죽음입니다. 옛 현자의 말씀입니다.
“바람을 거스르는 풀은 없기에 모든 가르침은 바름이어야 한다.”<다산>
어제 들은 시대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분이 정치가들에 바라는 한가지 당부, ‘거짓말하지 마라’란 말마디가 내내 잊혀지지 않습니다. 정직하라, 회개와 반성을 하라는 것이니 이게 바로 바른 가르침입니다.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백성은 풀이다. 바람이 불면 풀은 바람을 따라 눞는다.”<논어>
지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지향해야 할 성령에 따른 성덕聖德의 삶에 성화聖化의 여정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떠남의 여정도 참 아름답습니다. 선교여행에 최선의 노력을 다한후 떠날 때의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정말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된 성령에 따른 삶이자 떠남임을 보고 배웁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성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의 성령에 따른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주도면밀(周到綿密)하고 철두철미(徹頭徹尾)한 삶과 떠남이 참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날마다 주님과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만남”의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아름다운 “떠남”의 삶을, 주님 파스카의 꽃같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당신께 비옵는 누구에게나,
진정으로 비는 누구에게나,
주님은 가까이 계시나이다.”(시편145,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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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5.20 04:56
- 영적 미각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는 저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환난을 겪어야만 하는가? 이런 반문을 하게 됩니다.
환난 없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것이지요.
그런데 가치 있는 것일수록 얻기 힘들기 마련이고,
또 ‘No Pain, No Gain’이라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도 미성숙하면 할수록 힘들지 않고 얻으려고 하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을 꿈꾸고 노립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과 관련하여 더 큰 문제는
힘들이지 않고 들어가려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들어가는 것 자체에 관심이 아예 없거나 별로 없는 경우입니다.
영적 미성숙입니다.
영적 무미각입니다.
그런데 영적 무미각이란 무슨 뜻입니까?
제가 만들어낸 말로서 영적인 면에서는 미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으라고 시편은 노래하는데
하느님 나라의 좋음을 한 번도 맛본 적이 없고
그래서 맛보려고도 하지 않는 미각 상태입니다.
심심할 때 저는 통각과 관련하여 재미 삼아 얘기 나눕니다.
제가 매운 것을 즐겨 먹는 것과 관련하여 여러 사람이
그것은 미각이 아니라 통각이라고 제법 과학적으로 얘기합니다.
매운맛이 미각이 아니라 통각이라는 것이 과학적으론 맞습니다.
그러나 고들빼기처럼 쓴맛이 입맛을 돋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통각도 미각의 일종이고 심지어 성숙한 미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입장에서 매운맛을 모르는 사람은 매운맛을 들이지 못한 미성숙함입니다.
단맛만 맛 들이고 쓰거나 매운맛은 아직 맛 들이지 못한 미성숙이라는 뜻입니다.
아기의 입맛을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요?
영적인 미각에서도 이것은 같은 이치입니다.
이 세상에 맛 들인 사람은 천상의 맛을 본 적도 없고,
그래서 찾지도 않고 천상 미각을 가지고 있지 않지요.
이는 아직 이유식을 먹지 않은 갓난아이가 젖만 찾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의 젖에 길들고 젖 맛만 들인 갓난아이에게 어른의 음식을 주면
처음에는 극구 싫어하고 뱉어버리지요.
그때 엄마의 지혜는 젖에 담뱃진을 발라 단맛이 쓴맛이 되게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맛을 받아들이게 한 뒤 이 맛 저 맛을 들이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 입맛을 영적으로 성숙하게 하시기 위해
이 세상의 단맛을 쓴맛으로 바꾸도록 고통이라는 묘약을 주십니다.
큰 고통과 환난을 겪고 난 뒤에 천상 미각을 갖게 하시는 겁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그것이 나환자와의 만남이었고 그래서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를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죄 중에 있었기에 나에게는 나병 환자들을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는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나는 그들과 함께 자비를 실행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서 떠나올 무렵에는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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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존중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숨
2025.05.19. 19:21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5월 19일 월요일 - 스물한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신앙이라는 세발자전거
우리는 내면과 외면의 권위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신앙의 세발자전거의 은유에 토대를 두고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고 또 거기에서 배우고자 할 때 영적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성서와 전통이라는 두 개의 바퀴는 외면의 권위의 원천일 수 있는 반면, 우리 개인의 경험은 우리 내면의 권위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저는 우리에게 이 두 가지 권위가 다 필요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오직 내면과 외면의 권위가 함께 올 때 비로소 우리는 영적인 지혜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 대부분에 있어 그리스도교는 대개 공적인 권위 혹은 외면의 권위에 의존해 왔지만, 우리는 이제 내면의 권위의 가치에 대해 진솔해져야만 합니다. 물론 내적인 경험은 항상 어떤 역할을 해왔지만, 그다지 신뢰받지는 못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외면의 권위로부터 주어지는 정보(information)는 반드시 변모(transformation)에 이르지는 못하기에, 우리는 오늘날 그저 답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순수하게 변모된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저는 제가 지은 책들이나 이런 묵상 글들에 담긴 말들이 누군가를 자신의 놀라움에서 떼어놓거나 자신의 내적 경험을 대체할 만한 것을 제공하기를 전혀 바라지 않습니다. 신학(그리고 권위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너무 많은 이들에게,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그런 역할을 해왔습니다. 오히려 제 글이 독자들로 하여금 내면의 여정을 대체하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여정으로 초대하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저는 믿는 이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 신심 깊은 어떤 것이 된 "기도"라는 말이 내면의 체험으로 초대해 주는 말이라는 것을 점차로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영적 스승들이 우리를 "기도"로 초대할 때 그들은 실제로 "내면으로 들어가서 그대 자신에 대해 아십시오!" 하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기도와 내면의 여정, 그리고 의식을 성숙시키는 것에 대한 가르침은 없이 외면의 권위만을 고수해 왔습니다. 이로 인해 세상과 종교에는 재앙이 닥치게 된 것입니다. [1]
우리의 세발자전거 안에는 경험이 끊임없이 성서와 전통에 의해 균형을 이루어 왔고, 또 비평되었습니다. 이 세 개의 "바퀴들"이 모두 함께 작동할 때 우리는 매우 현명한 사람을 얻게 됩니다. 가장 쉽게 표현하자면, CAC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행함에 있어 참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논쟁적이거나 의로운 사람들이 아니라, 자비롭고 지혜로운 사람들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목표입니다. [2]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은 경험이 성서와 전통을 창출해 낸 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우리가 성서와 경험, 그리고 전통을 다 같이 놓고 따져 본다면 이들은 모두 사실상 경험일 뿐입니다. 성서는 아주 먼 옛날, 아주 다른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전통은 오랫동안 그 첫 번째 그룹의 사람들이 말한 것을 해석해 온 또 다른 사람들의 경험인 것이고요. 그런 다음 저는 제 자신의 경험과 다른 모든 경험을 가져다주는 지금의 공동체와 함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집단의 경험을 우리가 좋아하지 않거나 불편하다고 해서 그 경험을 수정하거나 삭제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과오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는 제가 제 경험에 갇혀 있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이것 또한 아주 제한적인 것입니다. 저는 성서와 전통에서 나오는 경험을 필요로 합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람들의 경험들과 그 경험들에 대한 해석을 모두 다루어야 하므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우리는 다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매일 묵상은 무너져 가던 제 결혼 생활 30년 동안 제 삶과 끊임없이 함께해왔습니다. 저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삶에서 온 상실감 때문에 화와 슬픔을 겪기도 했지만, 또 이를 통해 역설적으로 저는 위로를 받았다고 느낍니다. 저는 이제 제가 저의 결혼 생활보다 더 큰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끌어안기 시작했고, 그래서 저는 다른 사람들과 저 자신에게 줄 것이 참 많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화와 슬픔이 제 삶의 그림자 속에서 저를 집어 삼키려고 도사리고 있지만, 받아들임과 은총이 계속해서 저를 지탱시켜 주고 있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Tom C.
References
[1] Richard credits spiritual director Rev. Carolyn Metzler for this helpful “tricycle” analogy. He considers it a dynamic improvement upon the traditional Wesleyan “quadrilateral,” or four-legged stool of Scripture, Tradition, experience, and reason.
[2] Adapted from Richard Rohr, Yes, And…: Daily Meditations (Franciscan Media, 2013, 2019), 5; and “The Sacred Importance of Our Own Experiences,” Daily Meditations, June 20, 2021.
[3] Adapted from Brian McLaren, “Commentary on the Tricycle Metaphor,” CAC’s Living School: Essentials of Engaged Contemplation,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February 202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Taylor Heery,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역동적인 움직임은 - 세발 자전거를 타듯이 - 끊임없이 바뀌는 균형점에 맞추어 계속적인 학습과 지속적인 성장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에 균형과 존중을 필요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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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 삶이라는 비행기의 기장은 우리를 너무도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숨
2025.05.20. 05:25
어제는 [대지]라는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 벅(Pearl S. Buck) 여사가 1960년대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시골 마을에서 해질 무렵에 어떤 농부가 소 달구지에도 볏단을 실었지만 자기 지게에도 많은 볏단을 지고 소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고는 그 농부에게 물었답니다. "어째서 소 달구지에 짐을 다 싣고 타고 가지 않으십니까?" 농부가 "에이... 나도 무겁지만 소도 볏단이 무겁지 않겠소? 저도 하루 종일 일했지만 오늘 이 소도 저를 위해 하루 종일 일했으니 서로 짐을 나누어 져야지요...."
이 장면 하나로 펄 벅 여사는 자기가 한국에서 보고 싶은 것을 다 보았다고 말했고, 나중에 미국으로 돌아가서 이 장면이 자기가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기술했다고 하지요.
어제는 이 글을 보면서 우리 곁에서 우리의 짐을 나누어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당신과 함께 우리 삶의 여정을 걷자고 제안하시지 않습니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9).
예수님의 이 말씀과 오늘 요한 복음에서 하시는 말씀이 참 비슷하게 들립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성경에서 말하는 평화는 언제나 적개심이 중단된 상태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경의 평화는 바로 하느님과는 물론이고 다른 존재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느님의 올바른 관계로 인해 다른 존재들과도 올바른 관계에 있게 되는 상태가 바로 성경의 평화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없다면 평화가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싸우지 않을 때 평화롭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평화가 모든 존재를 함께 살아가도록 이 세상을 창조해 주신 평화의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전쟁이 일어날 때 "전쟁이 발발했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사실 이 표현은 일본식 표현이고 그 뜻도 전쟁에 대해 쓰기는 좀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합니다. '발발'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식자층에서 쓰기 시작해서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본래 뜻은 "떠는 것"이나 "기어다니는 것" 혹은 "바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모양"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전쟁이라는 살벌한 분위기를 연상케 하는 말이긴 하지만, 본래 우리 말에 "전쟁이 터졌다." 혹은 "전쟁이 일어났다."라는 표현과는 다른 의미를 지니는 말인 것이지요. 한 마디로 이 말은 잘못 쓰고 있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전쟁이 터졌다."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디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던 것이 터져 나오는 것을 연상케 하지 않습니까?! 이와 비슷한 영어 표현이 바로 "War broke out!"이라는 말입니다. 이것도 우리말 표현처럼 어디에 숨겨져 있다가 터져 나오는 모양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화가 터졌다."라는 말은 쓰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평화가 본래 우리 내면에 깊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라는 무의식 때문에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우리가 이 평화를 온 마음, 온몸으로 받아들여 '내' 것으로 한다면 우리는 참된 평화를 나누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평화는 내 안에 주님의 현존이 늘 의식될 때 주어지는 것이고, 이 평화가 우리 존재 안에 차곡차곡 쌓여간다면 우리는 참으로 평화의 존재요 평화의 관계성을 살아가는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이야기로 오늘의 복음 나눔을 마치겠습니다. 실제 있었던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느 흐린 날 오후에 비행기가 막 이륙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비행기에서 콰다당 소리가 나면서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사람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모두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묵주를 꺼내 기도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팔걸이를 꼭 붙들고 긴장 속에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난 이런 게 너무 싫어!..." 하고 중얼거리도 했고요....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서 어느 작은 소녀가 자기 자리에 평화롭게 앉아서 자기 책에 색연필로 색을 칠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차분했고, 정신이 색칠에 완전히 빠져 있는 듯해 보였습니다. 그 아이의 얼굴에는 걱정하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옆에 앉아 있던 한 아줌마가 그 아이에게 가까이 몸을 기울이고는 물었답니다. "아가야, 괜찮니? 무섭지 않아?"
그러자 그 아이가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아니요. 제 아빠가 기장이거든요....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에 아빠가 저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다 준다고 말해 주었어요...."
이게 바로 오늘 우리가 화두로 삼아야 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 모두 우리 삶이라는 비행기의 기장은 우리를 너무도 아껴 주시고 소중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셔서 우리의 이 여정을 책임져 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겨 보는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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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5.20 06:30
우리 뇌는 그리 뛰어나지 않습니다. 뇌로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본능을 따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강사는 자신이 제시한 글자의 색깔을 청중에게 곧바로 대답하라고 했습니다. 먼저 파란색으로 써진 ‘개’라는 단어를 제시하자, 곧바로 청중은 ‘파란색’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노란색으로 써진 ‘고양이’라는 단어를 제시했습니다. 이번에도 청중은 ‘노란색’이라고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녹색으로 써진 ‘빨강’이라는 단어를 제시하자, 청중은 ‘빨강’이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문자 인식으로 무의식적으로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이 실험을 통해 실수하지 않으려면 의도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본능만을 따르는 삶은 오답으로 기울어 지기가 쉽습니다.
주님의 사랑도 우리가 의도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본능만을 따르게 되면 사랑하기보다 사랑받는 데 더 집중하게 됩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 관점으로 살게 됩니다. 참 행복의 삶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세상 안에서 허우적거리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그냥 본능적으로 ‘그런가 보다’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맞추어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주님의 평화는 세상의 논리에서 말하는 전쟁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아무 일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본능적으로 세상의 평화만을 생각하다 보니 주님의 말씀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주님을 따른다고 생각하는데, 세상 안에서 실패의 경험을 하면서 마음의 평화가 이루어지지도 않고 또 이웃과의 만남에서도 평화가 없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본능적으로 따를 수 있는 평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주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잠시 침묵하며 사랑을 키워 분노를 가라앉히는 일, 욕심을 멈추고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는 일,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일 등등…. 따라서 세상의 본능을 따르는 것을 멈추고, 주님의 말씀에 다시금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좌절의 시간은 잊어라. 그러나 그것이 준 교훈은 절대 잊지 말라(하버트 S. 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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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주님께서는 단지 ‘평화’를 남기고 가신 것이 아니라,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시며, 분명히 우리에게 상속재산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평화롭지 못하다면, 무슨 까닭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평화를 뜻하는 ‘샬롬’은 어원상 ‘완전하다’는 뜻으로 부서지거나 흠이 난 상태에서 온전한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상태로 복구되어 가는 움직임을 나타낸다.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이 세상에 정의와 진실을 성취를 추구하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말한다. “평화는 단순히 힘의 불안한 균형으로 전쟁만 피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 더 완전한 정의를 인간사회에 꽃피게 하는 질서를 따라 하루하루 노력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219항; 민족들의 발전 179항 재인용)
<성경>에서 “평화”란 단지 외적으로 갈등이 없고 내적으로 고요한 상태, 혹은 전쟁이 없는 조약이나 힘의 균형 상태나 평온하고 태평스러운 안정된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반면, 그리스도교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현존의 결과로 나타난 그분 다스림의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는 평화로서,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있고, 그리스와의 일치 안에 있을 때 충만해지는 평화로, 사랑과 정의와 진리의 실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평화’를 선물로 받은 우리는 마땅히 ‘평화’를 지켜야 하고, ‘평화’의 파괴를 막아야 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게 됩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타인을 위해 자신이 죽음으로써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자신의 것을 타인에게 내어주고 비워짐으로써, 타인을 떠받들고 자신이 낮아지고 작아짐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주신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기에, 오히려 세상의 평화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기만적인 안전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오히려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
이처럼, 우리가 ‘평화를 얻는 길’은 새로운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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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4년 동안 쓰던 블루투스 이어폰이 금이 가고, 깨졌습니다. 지난 4년 동안 저를 위해서 수고해 준 이어폰이 고마웠습니다. 순간 접촉제로 붙여 다시 사용하려고 했지만, 어려움이 있어서 새로운 이어폰을 구하려고 아마존을 검색했습니다. 전에 사용하던 이어폰은 후배 신부님이 추천했던 정품 이어폰이었습니다. 검색하니 겉모습은 멀쩡한데, 전에 사용했던 이어폰 가격의 십분의 일인 이어폰이 있었습니다. 가성비가 좋아서 선뜻 클릭해서 구매했습니다. 이어폰이 와서 기분 좋게 열었습니다. 소리는 예전 이어폰만 못했지만 그래도 가격이 좋으니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10분만 있으면 꺼지는 문제였습니다. 답답해도 가격이 좋으니 사용하려고 했는데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예전에 후배 신부님이 추천했던 그 제품을 다시 구매했습니다. 가격은 좀 있지만, 역시 소리도 좋았고, 충전하면 오랜 시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싼 이어폰은 회사의 브랜드도 없었습니다.
예전에 종교를 선택하려면 4가지를 꼭 보라고 했습니다. ‘창립자, 경전, 사회성, 내세관’을 보라고 했습니다. 사회성이 없거나, 폭력적인 종교는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할 수 있습니다. 내세관이 없는 종교는 친목 모임처럼 변질될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 인류의 지혜를 찾을 수 없다면, 경전에서 참된 진리의 이정표를 찾을 수 없다면 그리고 경전을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면 이 또한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할 수 있습니다. 창립자의 가르침과 표징이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창립자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가르친다면,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체계를 부정한다면 이 또한 참된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이비 종교에 현혹되어서 직장을 잃어버리고, 가족과 헤어지고, 영혼마저 병들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어폰은 새로 사면 되지만 한번 선택한 종교를 다시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종교를 선택하려면 오래된 브랜드의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창립자의 가르침과 표징이 보편적인 인류의 지혜와 함께하면 좋습니다. 경전을 통해서 어둠을 벗어나 빛으로 나갈 수 있으면 좋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이웃을 사랑하고, 현세의 삶이 마쳐지면 영원한 생명으로 나갈 수 있으면 좋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또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잠깐입니다. 값싼 이어폰처럼, 잠깐은 괜찮아 보입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흔들림을 넘어서는 평화입니다. 불안 속에서도 견디게 하고, 슬픔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게 하는 평화입니다. 참된 종교, 참된 신앙, 참된 평화는 겉모습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더욱 깊어집니다. 고통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인생의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끝까지 비추는 빛이 됩니다. 좋은 이어폰을 선택할 때도 신중했는데, 우리의 영혼을 맡길 신앙은 더욱 신중히 선택해야 합니다. 창립자의 표징을 보고, 경전의 지혜를 살피고, 이웃 사랑의 정신을 찾고, 영원한 생명을 향한 내세관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신앙을 굳건히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를 마음속에 간직하면 좋겠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간은 모든 진실을 드러낸다. 거짓은 덧칠할 수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벗겨진다." 예수님의 진리와 평화는, 시간이 지나도 빛을 잃지 않는 참된 진실입니다. 그 빛을 붙들고 우리도 흔들림 없는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면 좋겠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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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보물찾기’ 해보셨나요? 어릴 때 자주 한 것 같은데 어느샌가 잊어버린 놀이인 것 같습니다. ‘보물찾기’는 보물을 숨겨 두고 그것을 빨리 찾는 게임입니다. 물론 진짜 보물은 아닙니다. 대부분 종이쪽지입니다. 분홍색, 노란색, 파란색, 흰색……. 의 종이를 우리는 보물처럼 아끼고 눈이 동그래져 찾아 나섭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라고 말입니다. 꼭, 보물을 숨겨 두고 멀찍이 서서 바라보시는 선생님처럼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평화를 찾아 돌아다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찾는 평화와 우리가 찾는 평화는 조금 다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다. 그러니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주님의 말씀에서 조금 이상한 부분을 발견합니다. 평화는 산란한 마음과 겁을 없애 주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오히려 평화를 얻으려면 산란해지지 말고 겁을 내지 말라로 들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나에게 무엇이 부족할 때 그것을 채움으로써 얻어지는 평화입니다. 산란하거나 겁이 날 때 그것이 해소되는 순간 우리는 세상의 평화를 느낍니다. 그런데 주님의 평화는 산란함과 겁을 극복할 때 즉 주님을 믿는 마음으로 극복할 때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가득한 마음이 평화라는 말을 주님께서는 들려주십니다.
세상의 평화는 다시 산란함과 겁이 찾아오면 깨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주님의 평화는 그것을 극복하는 믿음이기에 절대로 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평화를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고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믿음이라고 적힌 보물을 찾을 시간입니다. 어릴 때처럼 열심히 뛰어다니며 이 구석, 저 구석 뒤적뒤적하며 찾아 나설 시간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찾으면 우리는 환하게 웃을 것입니다. 평화로 가득한 웃음을 지을 것입니다. 주님의 웃음과 같은 웃음을 말입니다.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
사제로 살다 보면
자신을 드러내려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자기 생각이 맞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거나
자신은 선한 마음으로 말한 것처럼 포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상은 모두 자신이 드러나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일 뿐이지요.
이런 사람은 자기의 꼴(생김)을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모든 곳에서 자신이 중심이 될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자기 얼굴에 두꺼운 가면을 쓰고
자기 이익과 영광을 위해 사람들을 이용할 뿐입니다.
자기 말은 옳고 다른 이의 말은 ‘탁상공론’이라 말하며 가벼이 여깁니다.
선함의 탈을 쓰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사람….
교회 안에도 그런 선동자들이 있습니다.
순명과 다른 길을 걷는 그런 사람들을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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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분의 평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메마른 이들에게
기꺼이 스며드시니
그분의 평화는
스미는 평화
어두운 이들을
환하게 밝히시니
그분의 평화는
밝히는 평화
갈라진 이들을
정성껏 이으시니
그분의 평화는
잇는 평화
흩어진 이들을
하나로 모으시니
그분의 평화는
모으는 평화
버려진 이들을
애틋이 돌보시니
그분의 평화는
돌보는 평화
쓰러진 이들을
힘차게 일으키시니
그분의 평화는
일으키는 평화
길 잃은 이들을
바르게 이끄시니
그분의 평화는
이끄는 평화
굶주린 이들을
든든하게 먹이시니
그분의 평화는
먹이는 평화
작고 여린 이들을
오롯이 섬기시니
그분의 평화는
섬기는 평화
죽어가는 이들을
새로 나게 하시니
그분의 평화는
살리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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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그리스도인의 특징인 평화
실로 평화는 정신의 평정이며 영혼의 평온, 마음의 순박함, 사랑의 유대, 자애로운 친교입니다. 평화는 미움을 없애며 전쟁을 그치게 하고 분노를 억제하며 교만을 짓밟고 비천한 이들을 사랑하며 불화를 잠재우고 원수들과 화해하게 합니다. 평화는 모든 이가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남의 것을 가지고자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평화는 사람들이 사랑하도록 가르칩니다. 평화는 화낼 줄도 자신을 칭찬할 줄도, 교만으로 부풀어 오를 줄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안식과 평온을 지닌 평화는 모든 이에게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평화를 실천할 때, 그 평화는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됩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를의 카이사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9
버림의 열매는 지혜와 불타는 사랑이지 억압이 아니다
얘야, 일어나거라(루카 8,54).
이 짧은 셜교에서 엑카르트는 예수가 회당장 딸에게 행한 기적, 곧 죽음에서 소생시킨 기적을 우리에게 적용한다. 설교 8에서 살펴본 대로, 그는 이와 통일한 성서 구절을 인용해 영성은 깨어남이라는 주제, 곧 첫째 오솔길에 딱 들어맞는 주제에 적용했다. 이제 그는 깨어남이라는 주제를 둘째 오솔길에도 적용한다. 여기서 그는 우리가 만물을 여의고 하느님처럼 혼자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첫째 오솔길. 곧 긍정의 길이 깨어남의 길이듯이, 부정의 길도 잠에서, 죽음에서. 풀죽은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아이의 손을 붙잡고 ‘얘야, 일어나거라’ 하셨다. 그러자 곧 영이 되돌아와 아이가 일어섰다”(루카 8.54-55). 성령이 그녀를 깊은 잠에서, 무의식에서 살려 내고 깨웠다.
우리를 깨우는 첫째 사실은 하느님의 사랑이 불타는 사랑이자 열정적인 사랑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열정적이거나 아니면 냉랭하다. 하지만 냉랭한 마음은 죽은 마음일 뿐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불타는 사랑이다. 그러하기에 영혼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느님의 불타는 사랑과 하나가 되지 않는 영혼은 죽을 수밖에 없다. 하느님이 떠난 영혼은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음은 차갑고, 차가운 것은 죽은 것이다. 무의식, 곧 죽음에서 깨어나는 것은 온기를 되찾아 다시 불타오르는 것이다.(391)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성심에 대한 묵상
첫 번째 시리즈
첫 금요일 신심
IV. 신성한 마음의 감정들
세번째 요점: 예수의 마음의 소망들
성찰:
예수님의 가슴을 채우고 있는 많은 소망들 중, 특히 세 가지가 있습니다. 이들은 내가 그분의 신성한 마음과의 관계에서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1) 그리스도는 내가 성화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의 신성한 마음에 대한 헌신이 그분의 시각에서 더 수용 가능하고 기쁘게 여겨지며, 내가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서 이 헌신을 전파할 더 적합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합니다.
(2) 그분은 내가 내 영혼 안에 신성한 마음에 대한 매우 참되고 확고한 헌신을 심어주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이 헌신으로 높은 정도로 움직이지 않으면, 다른 이들에게 이 헌신을 피울 가능성은 없기 때문입니다.
(3) 그러므로 그분은 내가 단순히 그분의 신성한 마음에 열렬히 헌신해야 할 뿐만 아니라, 접촉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도 그 마음의 사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적용:
나는 속죄해야 할 죄가 있으며, 샘솟는 은총과 수많은 은혜에 감사를 표해야 하고, 여기에서 세상과 육체, 악마에 대한 세 가지 전투를 싸워야 하며, 영원한 유산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목적은 신성한 마음에 대한 헌신을 통해 크게 증진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속죄하며, 그 모든 실천은 하느님의 사랑의 실천이며, 신학자들이 가르치듯이 속죄의 힘을 지닙니다; 그것은 감사를 표하는 수단이며, 이는 보상과 함께 헌신의 두 주요 목적입니다; 또한 그것은 내가 이곳에서 싸우고, 이후에 면류관을 얻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 효과는 영혼을 미온한 상태에서 열렬한 상태로 격상시키고, 나른한 영혼에 영적 에너지와 활력을 주는 것입니다.
애정과 결심:
오 주님, 당신의 신성한 마음의 슬픔, 기쁨, 소망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하나는 줄이고 다른 것들은 늘리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대화:
영적 독서: 「준주성범」, 제1권, 제25장.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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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 것과는 다른 것
박윤식 [big-llight] 2025-05-19 ㅣNo.182310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선종하시면서 남기신 이 말씀은 아직도 생생하다. 삶에서 죽음으로 마지막 길을 넘어설 때가 가장 두렵고 고통스럽다는데 어떻게 교황님은 그 경계선상의 순간에 이렇게 스스로 행복하다 하시는지! 그분은 폴란드 출신으로 아우슈비츠와 전쟁의 처참함을 경험하셨다. 그래서 늘 세상 평화가 화두이셨다.
종교 갈등, 군비 경쟁, 착취, 빈곤, 환경 파괴 등 평화를 위협하는 문제에서 그분은 선종하시는 그날까지도 편안하실 날이 없으셨으리라.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온다.’ 라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니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분명히 일러주지만 그분께서는 나보다 더 위대하시다.”
세상 평화를 그토록 갈망하셨던 교황님은 어쩌면 죽음의 경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느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를 맛보고 행복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평화라는 그 말에 교황님 말씀이 종종 기억난다. 예비자들의 입교 동기 일 순위가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나. 늘 ‘평화를 빕니다!(샬롬!)’라고 인사하는 우리도 평화의 갈구가 일순위일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세상 것과는 자연 다르다는 데에 있다는 것을, 무두가 인지하는 양상이다.
문제는 그분께서는 당신 평화를 주신다고 말씀하시지만, 평화가 아닌 칼을 주러 오신 분이라고 이해하는 게 어쩜 더 옳아 보인다. 사실 세상은 평화를 위해 돈, 무기, 강력한 통치 같은 게 필요하단다. 그래야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가 사라진다나. 그러나 예수님의 평화는 오직 하나, 곧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필요하다. 거기에는 온갖 고통을 녹이는 강한 힘이 스며있기에.
진정한 평화는 가끔은 상당한 고통을 수반한다. 십자가가 주는 그 평화를 다 함께 되새겨 보자. 세상 논리로 따지자면 평화롭고 행복한 삶에 환난과 고난은 당연히 피하고 싶을 게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세상에서 피하고 싶은 그 고난의 감내라고 하니 참 모순이여 아이러니하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끝내는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신다. 그분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평화를 얻어내려는 야망적인 방식을 되돌아보면 금방 알게다.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더 강력한 무기로 무장하는 게 정녕 올바른가? 경쟁 사회에서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 이기적인 이가 되는 게 과연 옳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 건강, 재산을 지키려 쉼 없는 일로 오로지 성공만을 얻고자, 이웃의 가난과 타인에게 미치는 고통은 아예 아랑곳하지 않는 자신만의 아집 등은 진정 어떤가? 이런 것들이 평화를 지켜 주는 것이라고 믿는 그 순간 우리 곁에는 하느님이 없다. 그러기에 그분께서 주시는 평화는 다르다.
잠시 분노를 접고 침묵하자. 일 욕심을 멈추고 가진 것에 감사하자. 내 곁에 없으면 안 될 사랑하는 이들의 소중함을 깨닫자. 그리고 하루를 마치며 ‘이 밤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자. 이런 게 예수님께서 약속해 주시는 평화이리라.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는 분명 다르다. 영혼 깊은데서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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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
그런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 곧 전쟁이 없는 상태나 힘의 균형과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사랑이 지극하신 아버지에게서 비롯하고,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물며, 그 뜻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이기십니다.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라는 기도문처럼 말입니다.
교회가 드리는 “아침 기도”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의 이름과 그 뜻이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봉헌 기도’를 바치며 비록 저희에게 허물과 부족함이 많지만 “주님께 받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도로 바쳐,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살고자 다짐합니다.
이어지는 기도는 이렇습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 권능과 영광, 지혜와 굳셈이 있사오니, 찬미와 감사와 흠숭을 영원히 받으소서. 아멘.
전능하신 하느님, 오늘도 저희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 아멘.”
세상의 권력자가 아니라 사랑이신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 달라 청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옵니다. 그분의 뜻을 따르고 그분의 길을 걷는 여정에서 우리는 그분께서 주시는 참평화를 만나고 또한 세상에 그 평화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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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슬로우 묵상] - 존재에서 솟아나는 평화
서하 [nansimba] 2025-05-20 ㅣNo.182319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길을 걷기 전 제자들에게 남긴 고별의 말씀.
그 말씀을 부활시기에 다시 듣습니다.
죽음을 지나 생명의 이르는 길을, 내 삶에서 살아내라는 초대처럼 들립니다.
세상은 평화를 말하지만,
그 평화를 이루기 위해 힘을 동원하고, 통제하며,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다릅니다.
그것은 비폭력의 평화,
존재 깊은 곳에서 샘솟는 단단한 자유의 힘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요한 14,30)
그 말은 곧, 세상의 억압과 악의 구조가 실제로 존재하지만
예수님의 존재 중심에는 흔들림 없는 자유와 평화가 있다는 선언입니다.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
내면의 정직함과 존재의 단단함, 사랑의 용기를 선택하는 길.
그 길이 진짜 평화의 길임을 예수님은 당신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나도 그 길을 걷고 싶습니다.
외적 무기 대신 내면의 단단함으로,
자유롭게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오늘 다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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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제자들의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을 내는 일이 없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당신께서 떠나가시면서
제자들의 마음이 곧 산란해지고
겁에 질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 가신다는 표현을
지금 당장 제자들이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제자들은 어렴풋이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떠나실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별이 슬픈 것이 아니라
제자들은 공동체의 중심을 잃게 되는 것이며
그것으로 공동체는 흩어질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제 막 시작한 공동체이기에
밖에서 오는 저항들, 특히 유다인들의 박해는
중심을 잃은 공동체에게 더 큰 위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말에
겁부터 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것은
제자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오시겠다는 약속으로 그것을 알 수 있지만
평화를 남겨 두시는 것으로
더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른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화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제자들이 지금 당장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실 때
그 평화를 살게 됩니다.
스승님의 죽음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그 두려움은 이제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그 누구도 제자들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스승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스승님과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틀렸습니다.
돌아오시겠다는 약속은 이렇게 한 번 이루어집니다.
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세상의 평화와 다른 것은
우리가 언제든 그것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이며
그 희망은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도 그 평화를 꿈꿀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셨다가
우리에게 돌아오신다는 약속을
우리도 간직할 수 있습니다.
평화의 선물을 통해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려는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삶이 주는 어려움에도
평화를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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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평화!
우리네 인생이란 것, 돌아보니 혼란과 불안, 부침과 우여곡절의 연속이더군요.
그래서 사람들은 꿈꾸는가 봅니다.
보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정말이지 평화로운 상황을 꿈꿔봅니다.
완만한 흐름의 맑은 강가, 멀리 강 건너 편에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있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남향 시골집, 철따라 피고 지며 꽃 잔치를 벌이는 형형색색의 꽃나무들, 비옥한 텃밭, 거기에 항상 내 곁을 떠나지 않고, 항상 나만 생각해주는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수시로 변하고 또 변하는 것이 세상 만물의 이치입니다.
장마철에 집중호우라도 한번 내리면 맑고 잔잔한 강물은 어느새 토사가 뒤섞인 흙탕물로 돌변합니다.
계절이 넘어가면서 한 폭의 그림처럼 화사하던 주변 풍경들은 어느새 쓸쓸하고 삭막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그리도 깊이 의지하던 든든하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순식간에 늙고 병들고 약해집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의 평화는 ‘반짝’하며 지나갑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평화, 참된 평화는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할 참된 평화는 영원한 보루이자 든든한 성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 27)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 지상적인 평화,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평화와는 비교가 안 되는 한 차원 높은 평화, 격이 다른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폭풍우 속에서도 내적인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보다 차원 높은 평화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갈등과 시련, 고통과 슬픔, 다양한 인생의 부정적 경험 속에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평정심을 간직할 수 있는 적극적인 의미의 평화입니다.
우리 인간들 삶이라는 것 언제나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때로 잠잠하다가도 어느새 우리는 폭풍우 한 가운데 서게 됩니다.
때로 만사형통하는가 하면 어느새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곤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하느님께서 든든히 자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되고 지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그 어떤 외적인 바람에도 좌지우지 되지 않는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내면에 간직한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먹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세상을 이기셨으니 우리 역시 그분과 함께 승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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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성체성사를 남겨 놓으셨는가?
오늘 예수님께서는 ‘평화’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우선 평화와 반대되는 상태는 이것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낼 필요도 없는 평화를 남기고 가십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결국 자녀들을 집착과 자기뿐인 존재, 곧 모기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평화는 ‘아버지’가 나오지 않으시면 안 됩니다.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곧 예수님께서 남기시고 가시는 평화는 당신보다 더 위대한 아버지에게 받는 ‘보호’라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엄마는 아이에게 평화를 줍니다.
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평화를 얻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혼자 남겨집니다.
엄마는 아빠에게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엄마를 통해 아이를 보호하는 분입니다. 그러니 엄마가 주는 평화는 아빠가 주는 평화를
받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어려울 게 없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아빠의 평화를 받아 주기 위해서는 아빠에게 순종해야만 해야 합니다.
바람 피우는 아내에게 줄 평화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을 사탄의 손아귀에 맡겨 죽음으로 향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평화는 결국 ‘피 흘림’으로 전달됩니다.
아버지의 피 흘림인 돈을 어머니가 받고,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그 피를 흘림으로써 평화를 전해줍니다.
죽음이 아니면 그 평화가 전달되지 않습니다.
평화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엄마가 나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분이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아무리 엄마가 돈이 많더라도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믿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해리 포터’는 이마에 번개 모양의 흉터를 가진 소년입니다.
해리는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을 여읜 고아입니다.
그의 이마에 남은 흉터는 어둠의 마법사 볼드모트가 남긴 죽음의 흔적이었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품고 있었습니다. 바로 해리의 어머니 릴리 포터가 자신의 목숨을 던져 어린 아들을 지켜낸 ‘피 흘림’, 그 숭고한 희생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해리는 성장하면서 이 흉터의 의미와 부모님의 희생을 깨닫게 됩니다.
비록 부모님은 곁에 계시지 않았지만, 그분들이 목숨과 맞바꾼 사랑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는
깊은 믿음을 마음속에 간직하게 됩니다.
이 믿음은 해리에게 세상의 어떤 마법보다 강력한 힘, 바로 내면의 평화를 선물합니다.
그 평화의 힘은 해리가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마주하는 존재, ‘디멘터’ 앞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디멘터는 사람들의 모든 행복한 기억을 빨아들이고 깊은 절망과 공포만을 남기는 어둠의 존재입니다.
해리는 유독 디멘터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부모님의 사랑과 희생을 떠올리며 '익스펙토 패트로눔'이라는 강력한 방어 마법을 시전합니다.
이 마법은 가장 행복한 기억과 사랑의 힘을
원천으로 하는데, 해리에게 그것은 바로 자신을 위해 죽음도 불사한 부모님에 대한 기억과
그 사랑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주신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내면의 평화가 두려움의 현신인 디멘터를 물리치는 빛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그분이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아버지를 사랑하셔서 순종하시고 또 우리를 위해서도 죽으실 수 있은 분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평화를 지니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평화가 없으면 나뿐인 사람, 곧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요한복음은 ‘평화’를 위해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부활하셔서 그 평화를 제자들에게 주셨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소중한 평화를 ‘믿음’으로 잘 간직해야 합니다.
이 믿음을 위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예절이 ‘미사’입니다.
미사는 평화를 가져가는 시간입니다.
중국 쓰촨성 대지진 때 무너지는 집을 온몸으로 막으며 아이를 보호하여 자신은 죽고 아이는 살린 어머니가 있습니다.
아이의 평화는 엄마의 죽음으로 보호되었고,
앞으로도 그 사실을 엄마가 핸드폰에 남긴 “사랑하는 아기야, 네가 살게 된다면 이것만을 꼭 기억해 주기를.
엄마는 너를 사랑했단다.”라는 말을 기억하면 하늘에 자신을 위해 죽은 엄마가 자기를 보호하신다는 생각으로 평화를 보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악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주어진 성체는
바로 믿음으로 이 평화를 얻으라고 주신 생명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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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4,27-31: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27절)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상속재산으로 주셨다. 이 평화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 평화는 그분 안에 있고 그분에게서 온다. 그것은 당신의 현존에서 오는 것이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평화이시다. 우리의 평화는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는 유언형식으로 사도들에게 이 평화를 남기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하느님이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28절)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 좋은 일이라 하신다.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오셨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되살아나시고 아버지께 올라가시는 것을 그들이 볼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실히 믿게 하려고 하신 것이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30절) 세상의 우두머리는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하는 권세와 권능들을 말한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들은 그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분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에게 속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를 말하는데, 그분에게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아버지의 뜻을 어긴 일이 없으신 분이시기에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분이 돌아가신 이유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31)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분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 목숨을 바치시면서까지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언제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을 바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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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사랑’ 없이는 ‘참 평화’도 없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27.31ㄱ).”
1) ‘평화’가 무슨 물건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물건을 주듯이 평화를 주시고, 우리가 무슨 물건을 받듯이 예수님에게서
평화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나의 가르침대로 충실하게 생활하면 ‘참 평화’를
누릴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 자체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참 평화를 얻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참 평화를 얻어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참 평화’를 얻어 누리는 방법은 ‘믿음, 회개, 사랑’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 그리고 ‘내가’ 능동적으로 실행하는 ‘회개’, 그리고 사심 없이 진실하게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서 참 평화를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사람은,
작은 위기에도 금방 흔들리고 평화를 잃어버립니다.
또 회개하지 않고 죄 속에서 사는 사람과 사랑 없이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참 평화가 없습니다.>
2) ‘나’와 ‘세상’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춰서,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라는 말씀을,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5-27).”
힘으로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기 혼자서만 편안함을 누리면서 그것을 평화라고 착각하는 자들입니다.
그 착각이 바로 ‘세상의 평화’이고, ‘거짓 평화’입니다.
‘나의 편안함’을 위해서 남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죄입니다.
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평화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자들에게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평화가 있을까?
인내하면서 영적이고 내적인 평화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 그 억압과 압박이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면 결국 전쟁 상태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면, 섬기는 쪽과 섬김을 받는 쪽 모두가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물론 섬김을 받는 쪽도 함께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면서 본을 보여 주신 것처럼 ‘낮춤’과 ‘섬김’은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 없이는 평화도 없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면서(루카 16,19),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착각한 자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착각에 빠져 있는 부자들이 많습니다.>
그 부자는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 있는(루카 16,20) 가난한 라자로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혹시 오며 가며 눈에 뜨이는 라자로를 가엾게 여겨서 빵 부스러기를 조금씩 던져 주었을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관심과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부자가 죽어서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는 상황은, 그가 살면서 누리던 편안함이 평화가 아니었다는 것과 라자로에게 사랑 실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일과 같습니다.
그러면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서 위로를 받게 된 라자로는 이승에서 사는 동안 평화를 누렸을까?
라자로 자신은 “나는 그래도 참 평화를 누렸다.” 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라자로가 아니라
부자 쪽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비유를 말씀하신 취지는 “라자로처럼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그런 부자처럼 살면 안 된다.”입니다.
나는 지금, 나의 삶이 그 비유에 나오는 부자의 삶과 같기를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거짓 평화라고 해도 좋으니 사는 동안에 그렇게 편안하고 즐겁게 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는 동안 거짓 평화에 취해서 산다면 나중에 내세에서 참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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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4,27-31ㄱ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어제 복음이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가르침과 계명들을 충실히, 그리고 꾸준히 지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첫번째 원동력인 ‘사랑’에 대한 말씀이었다면, 오늘 복음은 그 두번째와 세번째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참된 평화와 믿음에 대한 말씀인데, 이 세 원동력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먼저 두번째 원동력인 참된 평화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가 강력한 힘으로 외부의 요인들을 억누름으로써 강제적으로 유지되는 안정상태라면,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그 효과가 안에서부터, 즉 우리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지닌 분이셨지만 힘으로 우리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우리보다 낮은 위치에서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당신의 뜻과 가르침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우리에게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먼저 행동과 삶으로 그것을 실천하는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 마음 속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분을 따르고 싶다는, 그렇게 하여 그분을 닮고 싶다는 자발적 의지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대로 실행하면 어떠한 세속적인 어려움과 고통에도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고 담대하게 임할 수 있는 내적 강인함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신 참된 평화의 본질이지요.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참된 평화를 주신다고 해서 곧장 그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분에 대한 믿음을 지녀야만 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더라도 그분께서 언제나 함께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부활하여 승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참된 구원과 행복의 나라로 이끄시기 위해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오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분명히 우리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을수록, 주님께 대한 믿음이 깊고 단단할수록, 우리는 주님 덕분에 마음이 든든해지고 편안해집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해서 당장 내가 사는 세상이 달라지는 게 아니지만, 그 세상을 바라보는 내 마음가짐이 달라지기에 달라진 그 마음가짐으로 내가 사는 자리부터 조금씩 변화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만 그런 믿음을 지니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당신께 맡기신 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구원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바람을 담아 우리에게 이렇게 부탁하시지요.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 즉 예수님은 당신이 먼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모범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셨듯이, 우리도 당신의 뜻을 실천하는 모범으로 아직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변화시키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그분은 그러려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분으로부터 받은 큰 사랑과 참된 평화를 기쁘게 이웃과 나누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주님을 참으로 믿음으로써 그 힘으로 하느님 보시기 좋은 모습으로 변화되도록 이끌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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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평화는 우리에게 친숙한 말마디입니다. ‘안녕하세요?’ 또는 ‘안녕히 계세요.’ ‘안녕히 가세요.’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평화라는 의미의 샬롬(שָׁלוֹם)은 전쟁과 전쟁, 타 민족의 지배에서 더욱 그 의미가 살아납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도 깨닫지 못하는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외아들은 순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은 뿔뿔히 흩어져서 도망갈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29절)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통과 슬픔으로 표현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순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본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31절)
다가오는 수난의 때에 당장은 권력을 쥔 세상의 우두머리가 힘이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안티오키아와 이코니온에서 몰려온 유다인들이 군중을 설득하여 바오로에게 돌을 던지게 합니다.
그리고 바오로가 죽은 줄로 여기고 도시 밖으로 끌어다 내다 버립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오자 바오로는 다시 일어나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돌아갑니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데르베로 갔다가 여러 도시를 다니며 복음은 전하고 수 많은 사람들을 제자로 삼은 다움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다시 안티오키아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용기를 북돋아주고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를 보냅니다.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후에 그들이 주님께 의탁하게 합니다.
그리고 다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디시아를 지나서 팜필리아로 해서 이탈리아로 내려 갑니다. 그들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믿음의 공동체 형제 자매들을 불러서 자기들이 한 일들을 보고하며 그곳에 오래 머뭅니다.
사도들의 복음선포를 전하는 초대 믿음의 공동체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안정과 가족같은 분위기를 희망하는 우리의 마음에 선교는 늘 안일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김대건, 최양업신부님께서 목숨을 걸고 방문하시던 이 땅의 복음화 시절도 우리는 잊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사도들이 겪는 박해, 이것이 복음선포의 바탕입니다.
안일무사에 길들여지는 우리의 삶에서 복음선포가 소극적이고 하나의 이론으로 흐를까 걱정입니다.
우리의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남기시는 평화를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 사랑과 열정을 간직하며 이 멋진 성모성월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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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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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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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520.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최종적 승리를 믿으며 기쁨을 누리는 삶
<2025.5.20> 아침을 여는 묵상 (에 8:1~17절)
❝최종적 승리를 믿으며 기쁨을 누리는 삶❞
❚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최종적 승리를 믿으며, 그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 우리의 삶은 어떠한 것이어야 합니까?
➲ 절망이 아니라 중보기도로 승리를 기대해야 합니다(1~8절).
하만의 계략이 드러나자 왕은 하만을 나무에 매달아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의 처분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하만이 소유했던 모든 재산을 에스더에게 주었습니다. 또한 에스더가 모르드개와 사촌 관계임을 왕에게 밝히자 왕은 모르드개를 자신 앞에 나아오게 하여 왕의 반지를 하만에게서 거두어 모르드개에게 주어 나라를 다스리는 지위와 권세를 주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왕의 반지를 가지고 하만의 집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1~2절). 에스더는 다시금 왕 앞에 엎드려 울며 유다 민족에게 내린 조서를 철회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3,5절). 에스더는 ‘...내 민족이 화 당함을 차마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있겠습니까?’(6절). 왕이 이미 내린 조서를 취소하는 일이나 변개하는 일이 매우 어려운 일임에도 에스더는 자신의 제안을 왕이 받아들이도록 위해서 취소해야 할 이전 조서가 철저하게 하만의 악한 의도와 계획에서 비롯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왕은 아무런 부담 없이 사랑스러운 에스더, 눈물 범벅이 되어 애절하게 호소하는 왕후의 간청과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하나 더 만들어 왕의 인장 반지를 찍도록 명령하였습니다(7~8절).
왕의 이름을 쓰고 반지로 인을 친 조서를 누구도 철회할 수 없듯이 만물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과 권세로 이루어진 구원은 취소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만유의 주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 나라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이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고, 누구도 철회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법 앞에서 그들은 곧 죽을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은혜가 온 세상에 미치도록 더욱 간절히 간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며, 우리를 통해 그것을 이루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딤전 2:1~4절)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빚진 자의 마음으로 더욱 간절히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적을 위하여...’ 즉, 세상 모든 사람의 구원을 원했던 바울의 기도를 떠올려 절망이 아니라 중보기도로 승리를 기대하며 기쁨을 누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방관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승리를 전파해야 합니다(9~14절).
왕의 권세로 확정된 조서가 작성되었고, 모든 지방의 언어로 번역되어 준마를 타는 역졸들에 의해 모든 지방으로 전해질 것입니다(9~10절). 몰살 위기에 처한 유다인들을 구원하는 이 조서는 그 무엇보다도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왕의 조서의 내용은 유다인이 대적을 공격하고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11절). 왜냐하면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내린 조서에 왕의 인장이 찍혔기에 철회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아달 월 곧 십이월 십삼일 하루 동안으로 규정하였습니다(12절). 이날은 하만이 제비를 뽑아 유다인을 몰살 시키기로 결정한 날이었습니다(3:7,13). 새롭게 작성된 왕의 조서가 각 지반에 반포되었습니다. 이는 유다인에게 대적의 음모를 알리고 대비하도록 하는 조서였습니다. 이전에 내려진 왕의 조서를 따라 대적들이 유다인들의 생명을 위협했기에, 또 다른 왕의 조서만이 대적의 위협에서 하나님의 백성 유다인들의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왕의 어명이 매우 급하게 전달되어야 했기 때문에 역졸들은 왕의 일에 쓰는 준마를 타고 빨리 나가고 그 조서가 도성 수산에도 반포되었습니다(14절).
우리는 대적들과 싸워 승리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승리, 곧 십자가 복음을 믿는 우리는 이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은 조금도 지체할 수 없는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가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기 전에 우리 자신이 비참하고 절망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부요함과 상속받게 될 하나님 나라의 영광으로 인하여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삶을 ‘달려갈 길’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지체하지 않고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달려가는 삶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좌절이 아니라 확신 가운데 승리를 기뻐해야 합니다(15~17절).
모르드개가 보라색과 흰색으로 된 궁중 예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고운 모시로 짠 붉은 겉옷을 입고 왕 앞에서 나오자 수산 성에서는 즐거운 잔치가 벌어졌습니다(15절,새번역). 하만이 조서를 반포했을 때 수산 성은 당황하며 혼란에 빠졌던 때(3:15)와 대조를 이룹니다. 이날이 유다인들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 날이었습니다(16절). 이 또한 하만의 조서가 반포되었을 때, 유다인들이 보였던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4:3)와 대조를 이룹니다. 왕의 조서가 각 지방에 도달하자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래서 그날을 명절, 곧 축제의 날로 삼아 자손들에게 길이 전하고자 했습니다. 이 날은 나중에 유다인의 공식적인 명절, 곧 부림절로 정해지게 됩니다(9:20~32절). 놀랍게도 그 땅에사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유다 사람이 되기도 하였습니다(17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뻐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왕의 조서로 유다인들은 신분이 극적으로 회복되었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현재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넘어야 할 많은 장애물들이 우리 앞에 있지만, 승리를 주시는 우리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또한 매일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나 삶의 현장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여 살아간다 할지라도 때로 넘어져 실패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좌절이 아닌 확신이 있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비록 우리 자신의 환경이 ‘승리’와 거리가 있을지라도 그 속에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승리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좌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승리를 기대하며 기쁨을 누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기에 더 이상 이기적으로 살지 않고 남을 위하여 희생하며 사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승리를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철저하게 대적과 싸워 나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에 8:1~17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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