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탐험사 100장면 47- 우주 시대가 열리다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19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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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3.20. 03:12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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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시대가 열리다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1961년)
요약 1961년 4월 12일, 소련이 보스토크 1호에 유리 가가린을 태우고 우주로 쏘아 올려 미국이 충격에 빠졌다. 인류 사상 최초의 우주인이 된 가가린은 지구 궤도를 한 바퀴 돌고 1시간 48분 만에 지구로 귀환했다. 이후 가가린은 소련 정부로부터 ‘영웅’이라 불리며 최고 영예인 레닌 훈장을 받았다.
'스푸트니크 충격(Sputnik shock)'이라는 말이 있다. 1957년 소련이 처음으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쏘아 올린 일로 미국이 큰 충격에 휩싸였을 때 나온 말이다.
1957년 10월 4일 밤 모스크바 방송은 '소련이 처음으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지구 궤도에 쏘아 올렸다'고 보도하고, 이 일을 계기로 소련은 세계의 과학 · 문화에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자랑했다.
미국이 스푸트니크를 처음 감지한 때는 그 날 오후 8시 7분. 여러 곳의 천문대와 물리학연구소들이 관측했다. 스푸트니크는 지름 58cm 무게 83.6kg의 원구형에 안테나 4개를 달고, 측정기와 송신기를 1개씩 실었다. 그것은 미국이 1955년부터 만들고 있던 인공위성보다 훨씬 컸다. 이 쇳덩이가 수소폭탄이라면 미국이 공격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미국 정부는 몹시 당황했다.
스푸트니크 충격이 채 가시기 전인 11월 3일 오전 8시 45분. 모스크바 방송은 임시 뉴스로 스푸트니크 2호를 발사했다고 보도했다. 더욱이 여기에는 우주선(宇宙線)과 자외선 측정 장치말고도 라이카 종 개 1마리가 타고 있었다.
젖먹이 동물이 우주 여행에 나섰다는 사실은 온세계를 깜작 놀라게 하고도 남았다. 소련이 개를 우주로 보낸 것은, 가속(加速) 상태와 무중력이 동물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고, 동물이 캡슐 안에 배출한 탄산가스를 처리하는 기술과 우주선을 막는 방법을 연구하여, 장차 인간에게 우주 여행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소련이 우주 개발을 내세워 군사 기술을 개발할까 봐 두려워한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8년 육 · 해 · 공군의 미사일 개발 계획을 통합해 미국항공우주국(NASA)을 만들고, 서둘러 익스플로러 1호를 쏘아 올렸다. 그러자 소련은 1959년 벽두부터 또다시 미국의 기를 꺾였다. 그들은 1월 2일 루나 1호를 발사했는데, 이 위성은 지구 궤도를 벗어나 달로 날아간 첫 인공 물체였다.
그 해 5월 27일 미국은 원숭이 2마리를 캡슐에 태워 로켓으로 쏘아 올렸다가 다음날 거두어들였다. 9월에는 소련의 루나 2호가 달 거죽에 다다랐고, 10월에는 루나 3호가 달의 뒤쪽을 찍은 사진을 전송해 왔다.
보란듯이 앞서가던 소련은 1961년 4월 12일 또다시 온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큰 뉴스를 터뜨렸다. 그들이 4월 12일 오전 9시 7분에 쏘아 올린 보스토크 1호에는 소련 공군의 유리 가가린 중위가 타고 있었다. 인류 사상 최초의 우주인이 된 그는 지구 궤도를 한 바퀴 돌고 1시간 48분 만에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다.
"하늘은 무척 어두웠지만 지구는 파란 빛이었습니다."
가가린의 말이 세계로 퍼져 나가자, 인류는 공상 과학 소설을 읽으며 꿈꾸어 오던 '우주 여행'이라는 환상에 부풀기 시작했다. '달나라 여행'은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꿈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왔다. 소련 공산당 기관지 〈이즈베스티아〉는 '세계를 뒤흔든 108분간'이라는 제목을 대문짝하게 달았고, 〈프라우다〉는 호외를 찍었다.
소련의 라디오 방송국들은 모두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끊임없이 소련 국민들이 기뻐하는 모습과 과학자들의 해설을 내보냈다.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낙하산부대 교관인 스물일곱 살 먹은 가가린은, 소련 정부로부터 '영웅' 칭호를 받았다. 최고 영예인 레닌 훈장도 받았다(그는 7년 뒤 제트기 훈련 중에 사고로 죽었다).
첫 우주인 유리 가가린과 첫 여성 우주인 발렌티나 테레슈코바는 소련에서 '영웅' 칭호를 받았다.
'스푸트니크 충격'에 이은 '보스토크 충격'에 미국인들은 망연자실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웃으면서 소련에 축하 메시지를 보냈지만, 자꾸 소련에 뒤지는 사실을 애써 믿지 않으려는 미국인도 많았다. 나흘이 지나서도 유인(有人) 우주 비행은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하원 의원이 있을 정도였다.
1961년 5월 5일 미국은 머큐리 우주선에 앨런 셰퍼드 중령을 태워 14분 47초 동안 유인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11월 29일에는 침팬지를 태운 머큐리를 쏘아 올렸고, 이듬해 2월 20일에는 존 글렌 중령을 태운 우정 7호가 5시간 동안 지구 궤도를 세 바퀴나 돌았다. 미국은 비로소 자존심을 약간 세우는 듯했다.
그러나 소련은 얄미우리만큼 미국을 따돌렸다. 1962년 8월 11일 소련은 유인 우주선 보스토크 3호와 4호를 하루 걸러 쏘아 올려 우주에서 랑데부시키는 실험에 성공했으며, 1963년에는 여자 비행사 발렌티나 테레슈코바 소위가 보스토크 6호로 지구를 마흔여덟 바퀴나 돌았다.
1965년에도 소련은 여전히 앞서갔다. 알렉세이 레오노프가 3월 18일 처음 우주 유영에 성공한 것이다. 미국도 질세라 석 달 뒤에 에드워드 화이트가 제미니 4호를 타고 올라가 21분간 우주 공간에서 유영했다. 1966년에는 2월 3일에 소련이 역추진 로켓을 분사해 루나 9호를 달에 착륙시키자, 미국도 뒤따라 서베이어 1호를 달에 착륙시켰다. 그야말로 불꽃이 번쩍번쩍 튀는 경쟁이었다.
마침내 미국이 앞선 기술을 선보일 때가 왔다. 1966년 9월 12일 제미니 11호가 아틀라스 로켓과 우주에서 도킹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1968년 12월 24일에는 프랭크 보먼이 이끄는 아폴로 8호가 달 궤도를 돌며 달의 모습을 텔레비전에 생중계했다.
'도킹'과 '달 궤도 비행'의 의미는 자못 크다. 달에 자선(子船, 착륙선)을 보낸 뒤 모선(母船)이 달 궤도를 돌며 기다렸다가 자선과 도킹한다는 것은, 달에 사람이 착륙했다가 다시 지구로 돌아올 수 있음을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먼과 제임스 라벨, W.A. 앤더스는 12월 21일 지구를 떠나 69시간 동안 38만km를 날았다.
"달은 잿빛 사막 같더군요."
달을 가까이에서 본 첫 인간 라벨의 소감이었다.
60년대가 다 가기 전인 1969년 7월 12일, 미국은 케네디 대통령이 약속한 대로 인간을 달에 보냈다. 우주 개발의 주도권을 소련으로부터 넘겨받은 결정적인 승리였다.
▼ 관련 기록은 * 1961년 / 보스토크 1호 최고 속도(시속 2만 8,260km) * 1968년 / 아폴로 8호 시속 3만 8,988km * 1969년 / 아폴로 10호 시속 3만 9,897km [네이버 지식백과] 우주 시대가 열리다 -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1961년) (세계 탐험사 100장면, 2002.7.18., 이병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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