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18
1월29일[설/연중 제3주간 수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www.youtube.com/watch?v=z4VtyRN3lLs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백남일 요셉(새남터 순교성지 주임)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찰나같은 이 세상, 섬광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한달전 이미 지난 해와 작별인사를 하고 새해를 맞이했지만, 오늘 설날을 통해 다시 한번 새로운 마음, 새로운 각오로 새출발을 할 수 있으니 참으로 좋습니다.
새해 벽두를 맞이할 때 마다 드는 한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야속하게도 세월이 어찌 이리 빠른지, 돌아보니 그야말로 활시위를 떠난 화살같이 빠르게 건너온 세월입니다. 다들 한분 한분 먼저 떠나가시니, 이제 곧 내차례겠지, 하는 생각에 인생의 덧없음을 온몸으로 깨닫습니다.
그래서 설날 때 마다 새롭게 마음을 다잡습니다. 꽃같이 좋은 시절 만끽했으니, 미련이나 아쉬움 내려 놓고 이제 남은 날들 하루하루에 감사하면서,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주님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겠다는, 그런 마음.
그래서 길고 긴 황금연휴지만, 어디 멀리 휴가라도 가고 깊은 생각을 멀리 떨치고 한 송이 어여쁜 꽃 같은 아이들 위해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짜장 소스를 만들고 탕수육을 튀깁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인 야고보 서간은 우리 인간 존재의 실체요 본질을 단 한 문장으로 아주 정확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특별히 설날 아침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추모하는 분들, 제삿상 건너편에 앉아계신 분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들, 나라며 가문, 공동체나 가정 전체를 쥐락펴락, 좌지우지했던 사람들...
그 권세, 그 위세가 백 년, 천 년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30년, 50년 지나가니, 그 모든 분들, 마치도 한 줄기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우리네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우리 역시 불과 10년, 30년, 50년 후면 어쩔 수 없이 그분들 뒤를 따라나서겠지요.
생각할수록 참으로 아름다운 명문장입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어찌 보면 야고보 서간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강력한 경고장입니다.
이 세상 일에만 목숨 거는 사람들, 영혼이나 상위 가치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 순식간에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지위나 명예, 권력이나 재산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장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 세상 안에서, 인간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는 모든 일들은 다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확실하십니다. 세상 모든 확실성은 오직 하느님께만 기인합니다.
뭐 엄청나고 대단한 것 같지만 우리네 인생 참으로 덧없습니다. ‘한 줄기 연기!’ 참으로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번 뿐인 우리네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전투적으로도 살지도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팍팍하게 살아서도 않되겠습니다.
찰나같은 이 세상, 섬광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해만 뜨면 사라지는 새벽 안개 같은 우리네 삶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시계로 보면 너무나 짧아 아쉬운, 수학여행 같은 우리네 지상 여정입니다. 최대한 기쁘고 신나게,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흥미진진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설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마주한 가족들, 친지들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이 세상 소풍의 둘도 없는 동반자들입니다.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때 까지 서로 배려하고 서로 도와주라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오랜 만에 가족 친지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설 명절은 서로를 향한 더 많은 배려와 지지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내 목소리는 좀 많이 줄이고, 상대방의 말을 더 많이 경청해야겠습니다. 공동체가 좀 더 살아나기 위해, 내가 좀 더 작아지고 겸손해지며, 좀 더 부드러워지고 온유해져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gCBDJAPQE8
++++++++++++++++++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삼는 방법>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언제 오든 준비하고 있으라는 뜻은 ‘꾸준하여라’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또한 우리 집의 주인이 당신임을 명확히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의 집과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명령하는 주인을 모십니다. 처음에는 자아인 뱀을 모시고 삽니다. 그러니 뱀의 소굴이 됩니다. 그다음엔 주님을 모십니다. 성전이 됩니다. 내가 나의 주인인 것 같지만, 실제로 나는 집입니다. 집이 주인을 정하는 방법은 그 주인을 위해 꾸준히 하는 일을 정하는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사탄을 위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을 꾸준히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주인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영화 ‘옥토버 스카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호머 히컴은 1943년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작은 탄광 마을 콜우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에서는 거의 모든 젊은이가, 호머의 형을 포함해, 아버지를 따라 탄광에서 일하게 되리라 기대되었습니다. 호머의 아버지 존 히컴은 광산의 감독관이자 지역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지요.
1957년 10월, 소련이 쏘아 올린 인공위성 스푸트니크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광경을 본 호머는 우주 탐험의 가능성에 강렬한 매력을 느꼈습니다. 아버지는 줄곧 “탄광에서 일하는 게 뭐가 나쁘냐, 호머. 훌륭한 직업이야.”라고 말했지만, 호머는 로켓에 대한 열정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호머의 재능을 꿰뚫어 본 과학 교사 프리다 라일리 선생님이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주었습니다. 호지킨병으로 건강이 악화하고 있었음에도, 라일리 선생님은 학생들을 향한 열정과 헌신을 절대 놓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선생님은 호머를 바라보며 “때로는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말고, 네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현실적이고 단호한 태도를 지녔던 존 히컴의 말, 곧 “계속 로켓 장난만 하다간 결국 탄광에서 일하게 될 거다.”라는 경고와 선명한 대조를 이뤘습니다.
호머의 초기 로켓 실험들은 실수투성이였습니다. 한 번은 실험 로켓이 산에 불을 내는 바람에 마을 전체와 아버지의 신뢰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호머는 실망을 안기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로켓을 아예 포기하고, 아버지를 따라 광산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아침 갱도로 내려가면서, 과연 이 길이 자신의 운명일지 모른다고 체념했지만, 라일리 교사의 말과 스푸트니크를 보았을 때 불타오른 우주에 대한 열망은 절대로 잊히지 않았습니다.
한편 라일리 선생님은 자신의 건강 문제가 악화하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어떤 가능성이 숨어 있었는지 영영 알 수 없잖니.”라는 말로 호머를 다시금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에 자극받은 호머와 친구들은 로켓 제작을 재개했고, 수많은 실패와 연구 끝에 마침내 성공적인 발사에 이르렀습니다.
전국 과학 경진대회에 참가해 호머는 큰 주목을 받았고, 장학금 기회가 열리면서 탄광 밖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결국 호머 히컴은 끊임없는 노력과 라일리 선생님의 변함없는 믿음을 바탕으로 콜우드의 탄광을 벗어나, 우주로 나아가는 로켓을 만드는 NASA에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거는 기대가 과연 그들의 꿈을 살리는지, 아니면 억누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적절한 스승의 응원과 끈질긴 열정이 만나면, 불가능해 보이던 꿈이라도 현실로 바뀐다는 것을 호머의 삶이 여실히 보여 주지요. 또한 누군가의 인정을 당장 받지 못하더라도, 매일 깨어 있으면서 자신의 가능성에 충실할 때 진정한 성공에 다다를 수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매일 준비하고 일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준비하고 있음은 매일 멈추지 않고 하는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매일 멈추지 않고 강론을 써서 사람들과 나누는 것도 사실 깨어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해 시작인 오늘 교회를 위해 무언가 매일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할 일을 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일본 도쿄 시부야역 앞에는 하치코 동상이 있습니다. 하치코는 주인이 매일 기차를 타고 출근할 때마다 역까지 배웅하고, 저녁 퇴근 시간에 맞춰 귀가하는 주인을 맞이하던 개였지요. 어느 날 주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는데도, 하치코는 무려 10년 가까이 매일 같은 시각에 역에 나와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사람들은 하치코를 기념하기 위해 동상을 세웠고,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충성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새해 하루 다만 1분이라도 주님을 만나기 위해 매일 할 무언가를 정한다면 그것이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일일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가위바위보 할 때 ‘삼세판’이라는 말하곤 했습니다. 한 번에 결정하면 아쉽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에서 무승부가 되면 세 번째에서 결정합니다. 이렇게 하면 아쉬움도 덜어내고, 지더라도 깨끗하게 승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세 번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첫 번째는 교회 전례력으로 시작되는 새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4주 전을 대림 제1주일로 정하였습니다. 교회는 대림 제1 주일을 새로운 한 해로 시작합니다. 대림초는 4개를 준비합니다. 대림초 4개는 ‘춘하추동, 동서남북’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심을 뜻합니다. 대림초는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니 ‘희망’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높은 산은 깎아내리고, 골짜기는 메우시며 굽은 길은 곧게 펴시는 분입니다. 참된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공정’을 세우시는 분이기에 ‘기쁨’이 됩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품어주시는 아버지처럼,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처럼 하느님의 아들은 죄인까지도 품어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기에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십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면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양력으로 시작하는 새해입니다. 1월 1일입니다. 이 양력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올해가 2025년이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지 2025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양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국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의 기준이라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사회의 모든 조직은 양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운전면허증, 여권과 같은 신분증은 모두 양력으로 표기됩니다. 졸업장과 같은 학력 증명서도 모두 양력으로 표기됩니다. 회사에서 급여를 정할 때도 양력을 기준으로 합니다. 비행기, 기차, 호텔을 예약할 때도 그 기준은 양력입니다. 생일, 결혼기념일, 서품 기념일, 축일도 그 기준은 양력입니다. 세 번째는 음력으로 시작하는 새해입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시작하는 새해의 첫날 ‘설’입니다. 음력의 기준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로 시작하는 열두 동물입니다. 저는 토끼띠입니다. 올해는 뱀띠의 해입니다. 올해는 ‘을사년(乙巳年)’ 뱀의 해입니다. 뱀은 다양한 문화권과 종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뱀이 탈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동물, 지혜로운 동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동양 철학에서 뱀은 뱀이 자연의 순환, 지혜, 그리고 생명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12지신 중 뱀은 날카로운 통찰력과 결단력을 가진 동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서는 뱀에 대해서 두 가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유혹의 상징입니다.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뱀이 독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뱀에게 물리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어쩌면 그런 점에 착안해서 인간을 유혹한 상징으로 ‘뱀’을 나타냈을지 모릅니다. 저도 산행 중에 뱀을 만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뱀을 피해서 돌아갔습니다. 뱀이 저를 피해서 가는 예는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뱀은 구원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구리 뱀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구리 뱀을 만들어 높이 들었고, 그 뱀을 본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유혹과 시련을 겪지만, 이를 통해 성장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뱀은 인간의 연약함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지혜와 재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뱀에 대해서 성서는 양면성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을사년 새해에는 악의 유혹은 과감하게 물리치면 좋겠습니다. 을사년 새해에는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을사년을 맞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공동체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더 큰 영적, 지적 성숙을 이루면 좋겠습니다.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2025년에는 모두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께로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다. 당신 하신 일을 당신 종들에게, 당신 영광을 그 자손들 위에 드러내소서.”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 민족은 해마다 두 차례, 새해 첫날과 음력 1월 1일인 설날에 이렇게 인사합니다. 축복을 갈망하는 우리이기 때문이겠지요.
복받은 사람들은 어떤 이들일까요?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에서 말미암은 존재’임을 아는 이들입니다. 지금의 자신이 있기까지 기막힌 우연과도 같은 다른 이의 수고와 은혜로움이 있었음을 아는 이들 말입니다. 오 년 동안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를 겪으면서 우리가 분명하게 배운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서정주 시인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봄부터 소쩍새는 / 그렇게 울었나 보다 /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국화꽃 한 송이가 거저 피어나지 않았음을 노래한 것이지요.
우리에게 생명과 시간을 주신 하느님, 그 덕분에 우리는 오늘 살아갑니다. 돌보아 주신 부모, 나를 감내해 준 형제자매들, 이끌어 가르쳐 준 고마운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무대가 되어 준 아름다운 초록 별 우리 공동의 집 지구가 스스로는 황폐해지면서도 지금까지 버텨 주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이렇듯 수많은 연결 고리가 합쳐져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건져 올리는 그물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올 한 해를 시작하며, 우리는 은혜를 잊지 않고 살겠다고 마음 깊이 결심해야 하겠습니다. 은혜로운 하느님께 경배와 찬미를 드리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자녀, 이웃들의 다정한 친구로 살아가는 그런 한 해가 되도록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35-40: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은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이다. 우리가 설을 맞이하여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생명을 전해주시고 이 땅에 살게 하신 우리 선조들에게 감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는 이 날, 복음은 종말론적인 가르치심이면서 또한 순간순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고, 한 해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님은 매 순간 우리에게 오시고 계시다. 그러기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값진 보물을 차지하는 것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 여기서 사용하는 비유는 옛날 일반적이다. 여행을 떠날 때는 기다란 옷을 무릎까지 올려 전대를 묶는 튼튼한 가죽 띠로 묶고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여행은 캄캄한 밤에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밝은 등불을 밝힐 필요가 있다.(35절) 다음 말씀은 전혀 반대이다. 여행이 아니고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만나기 위하여 나가는 것이다.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리고 그에게 즉시 문을 열어 주기를 원한다(36절). 오시는 주님은 행복하다고 한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즉시 잔칫상을 차리고 거기서 그들에게 시중을 들어줄 것이다(37절). 종들이 깨어있다면, 주께서는 밤중의 어느 때에라도 오실 수 있다. 깨어있는 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한밤중이나 새벽녘에 오실 수도 있다. 어떻든 깨어있는 종들을 만나면 영원한 행복의 종말론적인 명칭인 “행복한” 자들이라고 해 주실 것이다.(38절)
예수께서는 일상생활에서 확실히 깨어있을 것을 함께 말씀하신다. 가정의 훌륭한 아버지는 확실히 깨어 강도의 침입으로부터 집을 지키기 위하여 강도가 오는 때를 알고 싶을 수 있다(39절). 제자들에게 있어서도 오시는 사람의 아들이 언제까지 늦어지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어떻든 오실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시각에, “강도처럼” 오실 것이다(40절).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은 언제나 오신다. 그분은 나의 아내를 통해서, 나의 남편을 통해서, 나의 자녀들을 통해서, 부모님을 통하여,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오신다. 쉽게 말하면, 이웃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이웃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이웃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 때문에도 그 이웃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이 사랑이 바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웃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정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웃이라는 이정표를 잘못 읽을 때, 우리는 엉뚱한 길로 갈 수 있다.
주님이 오시는 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항상 오시고 계시지만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깨어있을 때만이 우리는 그분을 뵙고 함께 살 수 있다. 설날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이 모두 항상 깨어있는 삶을 통하여 언제나 주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살며 그분을 닮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신앙인에게 ‘복’이란,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5-40)
1) 신앙인에게 ‘복’이란, 하느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입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알아보는 것이 ‘신앙인의 지혜’입니다. 반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은총을 안 주신다고 불평하기만 하고 원망하기만 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내가 원하는 것’과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떻든 하느님은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그런데 하느님께서 주신다고 해서 그 은총이 자동적으로 나의 것이 될까? 은총은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받는 법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받으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신앙인답게 살면서 ‘선’과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은총을 잘 받는 방법입니다.
2) 쓸데없는 것들과 허무한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일도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잘 판단해야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면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 해도 되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잘 구분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바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선한 희망’인지, 그냥 나의 욕심과 집착일 뿐인지도 잘 반성해야 합니다.
욕심을 희망으로 착각하고, 자기 혼자만의 뜻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우기고, 은총을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그것은 모두 어리석은 일입니다.
3) 신앙인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은 뒤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 1,21)
하느님께서 주셨다가 하느님께서 가져가신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입장에서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소유한 것이 아니고, 그것이 없어진 다음에는 그것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여기서 ‘돈’을 ‘권력’으로 바꿔 생각해도 같은 가르침이 됩니다. 권력은 원래 ‘나의 것’이 아니고, 소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사랑하는 것도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권력을 따라다니다가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불행을 겪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그것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습니다.>
4) ‘설날’이 ‘서러운 날’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을 서러워하는 이들, 또 하느님 앞으로 갈 날이 더욱 가까워진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설날을 서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인생을 잘못 살고 있다는 표시일 뿐입니다.
신앙인은 ‘설날’을 ‘설레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깨달을 기회를 조금 더 얻은 날, 또는 주님께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얻은 날로 생각해야 합니다. 기회를 얻었음을 믿는다면,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한 해가 새로 시작하는 설날입니다. 모두가 설레는 마음으로 새로운 한 해의 첫날을 맞이합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들은 어떤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하여야 할지 알려 줍니다.
무엇보다 먼저 서로 축복을 빌어 주면 좋겠습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사제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을 축복하라고 이르십니다. 주님께서는 사제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와 평화를 베푸실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받으면 보편 사제직을 수행하게 됩니다. 보편 사제직을 수행하는 하나의 방법은 아론처럼 다른 이를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이웃의 성화를 위해서, 그들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을 청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로 이 모든 시간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는 생명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전합니다. 우리 삶에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을 우리 힘으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누구도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모든 시간과 일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께서 바라시고 허락하시기를 청하면서, 우리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일 것입니다.
세 번째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우리의 마지막 날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이가 없습니다. 언제 세상을 떠나도 좋을 만큼 오늘 하루를 열심히 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야 합니다. 한 해를 시작하는 날이지만, 역설적으로 마지막을 옆에 두고 살아가는 종말론적인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기억합니다.
올 한 해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언제나 함께하고, 진정한 기쁨과 깊은 평화 속에 머무르기를 빕니다. 또한 소망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은 마치 하나의 비유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두 비유가 결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비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내용입니다. 당시 혼인 잔치는 열흘 정도 이어지는 큰 축제였기에 그 사이 언제라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비유의 의미가 조금 더 명확해집니다. “허리에 띠”를 매라는 말씀은 구약 성경에서 옷을 차려입는 것을 말할 때 쓰였으며, 띠를 매는 것은 무엇인가를 바로 할 수 있는 준비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비유의 마지막에는 ‘행복하여라’라는 행복 선언이 반복됩니다. 주인을 맞이하려고 늘 준비하고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두 번째 비유는 도둑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 비유는 사람의 아들이 도둑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비유의 핵심은 “준비하고 있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곧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집주인이 도둑에 맞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늘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두 비유는 모두 종말을 배경으로 삼습니다. 종말은 생각지 못한 때에 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전하는 가르침은 ‘준비’입니다. 마치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 호시탐탐 빈 집을 노리는 도둑에 맞서는 집주인처럼 종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종말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표상들로 묘사되지만 오늘 비유는 다른 면을 알려 줍니다. 곧 종말은 주인이 종에게 봉사하는 것처럼 기쁨과 행복의 때이기도 합니다.
=====================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루카.12.40)
오늘은 우리나라의 명절 음력 설날입니다. 제가 있는 이곳 태평양 섬나라 피지에서는 설날이 없어서 그냥 평소처럼 지냅니다. 어쩌면 현재 불안한 정치 상황때문에 한국에서의 올해 설날도 그다지 기쁜 날만은 아닌듯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폭설로 인해 고향가는 길이 혼란스럽고 어렵지만 기꺼이 가는 것은 회귀 본능을 가진 연어처럼, 우리에게도 고향은 사랑하는 가족과 마음이 편한 친구들과 익숙한 고향 풍경이 주는 행복을 그리워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우리의 삶 또한 영원한 본 고향을 향해 가는 영적 여정입니다. 가는 길이 어렵더라도 최초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주님이 계시고 영원한 안식이 있는 본고향으로 우리는 되돌아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떠나 영원한 안식을 주는 고향을 향해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수도자로 살겠다고 고향을 떠나, 이제는 정든 조국마저 떠나 멀리 태평양의 외딴 섬나라에서 선교사로서 지내니 그래도 오늘 같은 설날은 영원한 순례길보다 잠시나마 정든 고향을 생각하며 웬지 괜한 감상에 젖기도 합니다.
세월이 흘러 이미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형제들도 결혼해서 난 조카들마저 또 결혼을 해서 난 조카 손주들이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시나브로 세월이 그렇게 흘렀나 봅니다. 고향의 친척들을 찾아가던 좀 더 젊은 날과는 달리, 외딴 섬나라에서 조용한 설날을 지내니 이제는 정말 ‘집 떠난 수도자’가 되어 주님을 향한 길만 남은 듯이 느껴집니다.
부족한 수도자로 살면서 좀 더 나은 수도자의 삶을 갈망하는 나에게 주님께서는 지난 날 내가 “생각 하지도 않은 때에” 은총으로 부족한 나를 채워 주셨고,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못난 나를 돌보고 이끌어 주셨음에 문득 감사의 정이 느껴집니다.
단지 간절히 원하고 기다리면 선이신 주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시는 “그 때와 시기”에 우리가 원하는 바를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때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때가 따로 있기에 우리는 그저 준비하는 삶이 요구될 뿐입니다.
고향을 떠난 예수님처럼 우리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나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고 자신마저 떠나야 비로소 우리는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된다는 것을 압니다.
설날인 오늘 고향을 찾아가지만, 우리는 고향을 다시 떠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모두가 되돌아 가게 될 하늘의 본 고향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설날 아침에 수도자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녀야 할 정체성과 사명, 그리고 언젠가 모두가 되돌아 가야 할 하늘의 본 고향에서 뵙게 될 주님을 그려봅니다. 그리고 그 여정 길에서 특히 오늘 설날은 우리 모두가 축복받는 날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민수기 6.24-25)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음에도 전쟁이 끝났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자기 자리에서 무기를 들고 있었던 남태평양 제도의 일본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들은 종전 후에도 수십 년이나 자기 자리를 지키며 무기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전쟁 끝났다는 말을 들어도 믿지 않았고, 그들은 모두 속임수이고 가짜 뉴스이니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서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전쟁이 끝났음에도 남의 나라에서 무기를 들고 힘들게 사는 그 일본군이 자유를 얻게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자기들의 힘을 더해서 그 지역을 점령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루빨리 백기를 들어야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으며, 지금의 삶을 보다 더 의미 있는 삶으로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 백기를 들어야 현명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무기를 들고 그 자리를 지키려고만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불쌍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은 무기를 들고 전쟁을 벌이는 사람입니다. 전쟁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불쌍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즉, 그 상대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하고 특히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에 집중하는 사람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백기를 든 것 같고, 그래서 상대에게 진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짜로 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 전쟁터에서 빨리 빠져나오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입니다.
오늘은 새해의 첫날인 설날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올해는 지난해와 다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게 되고, 새롭게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정하면서 힘찬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과거에 계속 매여 있다면 어떨까요? 과거의 일에 연연하면, 현재에 충실할 수 없으며 동시에 밝은 미래를 만들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버려야 할 과거의 일은 무엇입니까? 백기를 들고서 떠나야 할 과거의 일들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뜻에 맞지 않는 삶이 아닌,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를 이야기합니다. 바로 주님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올해는 세속의 시간에 머무르기보다 거룩한 하느님의 시간에 더 많이 머무르는 우리가 되면 어떨까요? 진정한 평화 안에서 참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설에 드리는 기도>
민수기 6,22-27 (사제의 축복)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야고보 4,13-15 (자만하지 마라)
사랑하는 여러분,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루카 12,35-40 (깨어 있어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설에 드리는 기도>
새해가 서는 설!
겸손하고 정갈한 몸과 마음으로
나를 세상에 보내신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하소서.
지난 날 낡은 허물 말끔히 털어버리고
나날이 새롭게 완성을 향해 나아가게 하소서.
사리고 삼가야 한다는 설!
항상 깨어 스스로를 살피고
더불어 함께하는 벗들을 보살피게 하소서.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게 하소서.
낯설어서 설!
익숙함에 머물러 웅크리지 않고
새로 만날 모든 이와 모든 것 품게 하소서.
두려움 없이 낯섦과 벗함으로써
온 누리 품을 만큼 나를 키워가게 하소서.
한 살 더 먹는 설!
한 살 더 먹는 만큼
더 사람다울 수 있게 하소서.
사랑하고 섬기고 베풂으로써
참으로 사람이게 하소서.
늙어가니 서러워서 설!
온갖 서러움에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한걸음 내딛게 하소서.
서러움에 짓눌린 벗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축복이 되게 하소서.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복을 빌어주는 사람>
구정 명절을 맞이하여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설은 본디 신일(愼日)이라고 하여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데에 근신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우선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이날 조상님께 차례를 올리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조상의 묘를 찾아 성묘합니다.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설빔을 해 주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큰절을 받고 세뱃돈을 주며 가정의 화목과 평화, 부와 안녕을 기원하였고 한 해를 살아갈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덕담은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축원의 말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덕담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2014년의 모토를‘사랑에 사랑을 더하여’로 정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다시 한 번 더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지난 설 명절에 하느님의 복을 풍성히 받으시길 기원하며 ‘통통,통통’복을 받으시라고 했습니다. 1.의사소통, 2.운수대통, 3.만사형통. 4.쓰레기통입니다. 서로의 의사소통을 잘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마음과 마음이 통해야 합니다. 가족은 물론 이웃과도 통해야 합니다. 잘 통하면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하지 않으면 아픕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과의 소통을 잘하시길 빕니다. 하느님과 잘 통하면 모든 것이 잘 풀립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열어주신 길에 장애가 없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길을 가는 데 있어서 하는 일마다 잘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울러 좋은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나 모든 것을 담고 품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되시길 다시 한번 기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는 것을 공짜로 언제든지 주십니다. 알맞게 주십니다. 그러나 내 잣대로 재고는 받았네, 못 받았네 하면서 투덜댑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알맞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지금 받은 것에 감사하면 감당할 수 있는 축복이 또 주어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명절의 의미는 바로 감사하는 생활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고향을 방문하여 조상들을 기리며 차례를 지내고 부모형제, 친척과 어른들을 찾아뵙는 것은 감사드림의 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는 감사의 원천인 하느님께로 먼저 눈을 돌려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두를 마련하시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혈족만이 아니라 모든 이웃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이요, 사랑받는 존재이고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 민수기(6,22-27)를 보면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빌면 주님께서 몸소 복을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복을 받는 일은 먼저 복을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달라고 하기 전에 이웃을 위해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베푸는 몫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명절의 두 번째 의미는 복을 빌어주는 생활입니다. 어르신께 세배를 하면서 한 해의 건강과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덕담을 받고 이웃형제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인사하는 것이 오늘 하루만의 인사 치례가 되어서도 덕담으로 끝나서도 안 되겠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만큼 삶의 모범으로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하고, 복을 받는 사람도 복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축복하는 삶, 생활로써 복을 함께 나누고 지켜주면서 감사의 마음을 키워갈 때 우리 주변은 더욱 빛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는 아름다운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감사와 축복의 날에 주님께서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를 통해서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루카12,40)고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켜고 주인을 기다리는 충직한 종처럼 감사와 축복으로 매일을, 순간순간을 늘 깨어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상을 위해 기도하고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며 이웃과 더불어 만남을 기뻐하는 날, 정월 초하루! 모두 모두 주님의 복을 많이 받으십시오.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가면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다섯 가지의 복을 오복(五福)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유교의 5대 경전 중 하나인 서경(書經) 1편인 홍범(洪範)에 나오는 오복(五福)을 보면, 오복의 첫 번째는 수(壽)로서 천수(天壽)를 다 누리다가 가는 장수(長壽)의 복(福)을 말했고, 두 번째는 부(富)로서 살아가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풍요로운 부(富)의 복(福)을 말했으며 세 번째로는 강령(康寧)으로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한 상태에서 편안하게 사는 복(福)을 말했습니다. 또, 네 번째로는 유호덕(攸好德)으로서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고 돕는 선행과 덕을 쌓는 복(福)을 말했고 마지막 다섯 번째로는 고종명(考終命)으로서 일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고통없이 평안하게 생을 마칠 수 있는 죽음의 복(福)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큰 행복으로 여겼던 이 오복(五福)을 염원하기 위해 새 집을 지으면서 상량(上梁)을 할 때는 대들보 밑에다가 "하늘의 세 가지 빛에 응하여 인간 세계엔 오복을 갖춘다"는 뜻의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 비인간지오복(備人間之五福)"이라는 글귀를 써 넣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서민들이 원했던 또 다른 오복(五福)으로는 1. 치아가 좋은 것 2. 자손이 많은 것 3. 부부가 해로하는 것 4. 손님을 대접할 만한 재산이 있는 것 5. 명당에 묻히는 것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 세상에서 끝나고 맙니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복을 받았다 해도 일시적입니다. 믿는이들은 영원한 복을 추구합니다. 참으로 복 중의 복은 하느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복을 주관하시고 천상의 복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세성을 넘어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주시는 복은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기뻐하십시오, 이미 하느님을 차지하시고 섬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 복을 결코,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신명기에는 “너희가 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이 모든 복이 내려 너희 머리위에 머무를 것이다. 너희는 성읍 안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의 광주리와 반죽통도 복을 받을 것이다. 너희는 들어올 때에도 복을 받고 나갈 때에도 복을 받을 것이다”(신명28,2-6).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복을 받으시길 희망합니다.
시편에서는“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고 하였습니다. 만사형통하려면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살아야 합니다.
시편저자는 말합니다.“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주님을 신뢰하여라. 주님은 도움이며 방패이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시어 복을 내리시리라. 이스라엘 집안에 복을 내리시고 아론 집안에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낮은 사람들에게도 높은 사람에게도 복을 내리시리라. 주님께서 너희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시리라. 너희는 주님께 복을 받으리라.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분께”(시편 115,11-15). 복을 주시는 분은 주 하느님이심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복은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느님의 복을 충만히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마누라의 3金 ? 현금, 지금, 입금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중요한 ‘세 가지 금’이 있다.
돈을 상징하는 황금. 음식을 상징하는 소금. 그리고 시간을 상징하는 지금. 이 세 가지다.
남편이 마누라에게 이 말이 너무 멋있어서 문자 퀴즈를 냈다. “여보야… 세상 살아가는 데 중요한 3가지 금을 뭐라 생각하노??”
잠시 후 마누라한테서 답문자가 왔다. “현금, 지금, 입금.”
이 문자를 보고 남편이 허덕거리며 다시 문자를 보냈다. “방금, 쬐금, 입금.”
=====================
[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오늘은 음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첫날인 ‘설날’입니다. 설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새로운 날이 ‘낯설다’는 의미에서 낯설다의 어근인 ‘설다’가 변해 설이 된 것으로 보는 견해와,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되는 날을 의미하는 ‘선날’이 설날로 변했다는 견해가 대표적이지요. 저는 둘 다 신앙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삶을 멋지게 그려보라고 흰 도화지와도 같은 ‘새 날’을 주신 건 참으로 감사하고 기쁜데, 그 새 날들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그 중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날 지를 부족한 인간은 알 수가 없으니 그런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이라는 ‘낯 섬’이 두렵고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래서 그런 점을 최대한 줄여보고자 설날에 서로에게 복을 빌어주는 전통이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건강운, 성공운, 재물운 같은 세속의 복을 손에 쥐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든든하고 덜 불안해진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새로운 날을 의미있게 잘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런 세속의 복이 아닙니다. 새 날을 주신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께서 베풀어주시는 축복을 직접 받는 게 훨씬 더 중요하고 또 효율적이기도 하지요. 그래서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해를 시작할 때 ‘욤 키푸르’라는 속죄 예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합니다. 내 마음 안에 담긴 죄와 욕망, 부정적인 생각들을 깨끗이 비워냄으로써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축복을 담을 준비를 하는 겁니다. 그런 준비를 미리미리, 제대로 해두지 않으면 새해를 의미 있고 보람차게 보낼 수 없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이에게 인생은 하루 하루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벅찬 ‘생존’이 될 뿐이지요. 그렇게 하루 하루를 생존하는 것에 그치면 말년이 비참해집니다. 비전도 목표도 노력도 없이 우물쭈물하는 사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주어진 시간이 다 지나가 버리고 뒤늦게야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없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살아온 날들로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받고 누리는 것들에 감사하지 못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교만이 우리를 우물쭈물 살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인이신 하느님을 깨어 기다리는 ‘종’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내가 ‘주인’이라고 착각하면 욕심부리고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모든 일에 대가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주인이신 하느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비천한 종과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면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게 되고, 나를 부르시고 소명을 맡겨 주신 주님의 뜻을 헤아리게 되며 하루 하루를 충실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조금씩 변화되어 완성에 이르는 삶, 후회할 일들보다 기뻐할 이유를 만드는 삶, 참으로 의미 있고 보람된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바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과정에 동반되는 불편함과 어려움을 기꺼이 감수한다는 뜻입니다. 등불을 계속 켜둔다는 건 주님께서 붙여 주신 신앙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사랑과 자비를 열심히 실천함으로써 기쁨이라는 기름을 꾸준히 보충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준비된 모습으로 사는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든 참으로 행복합니다. 2025년 한 해가 우리에게 그런 행복한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축복받은 삶>
-“감사하라, 겸손하라, 깨어 있어라”-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편 90,14)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새해 가장 많이 주고 받는 인사말 입니다. 올해 설날 29일, 우리나라 대부분 지역이 눈내린 말그대로 눈 ‘설(눈)’자 ‘雪날’이 되었으니 웬지 모를 좋은 느낌이 듭니다. 순수의 축복으로 빛나는 흰눈덮인 수도원 주변의 산야를 보니 혼란의 진통을 겪어내고 있는 우리나라도 새롭게 웅비하는 한해가 되리라는 희망이 샘솟습니다. 작년 후반부터 불암산앞에 설 때 마다 저를 행복하게 하는, 수없이 나눴던 고백시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삶도 행복도 선택입니다. 누구나 축복받은 삶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음이 축복이요, 이렇게 살아있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석할 수 있음이 축복입니다.
찾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축복을 받고 있는지 삶인지 말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정의는 축복받은 존재요,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합니다. 성공의 길은 다양하지만 실패의 길은 포기 하나뿐입니다. 하나의 길이 막혔다거 해서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축복의 길을 찾아, 다시 희망차게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침 인터넷에서 유익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설날의 다짐, 뇌를 썩게 하지 않겠다. 소셜 미디어 중독의 폐해...저급한 온라인 콘텐츠에 매몰되지 않고 외로움에 익숙해 지련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출판부가 2024년 단어로 ‘Brain rot’(뇌 썩음)을 꼽았다. 이 단어는 저급한 온라인 콘텐츠, 특히 소셜미디어의 과잉소비로 초래되는 영향에 대한 우려를 표현하는데 사용된다. 사소하거나 하찮게 여겨지는 자료를 과도하게 소비한 결과, 정신적 지적 상태가 퇴보하는 현상이다. ‘뇌썩음’(Brain rot) 이란 표현은 1854년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저서 <월든>에서 사용됐다.”
참 중요한 깨우침입니다. 소셜미디어의 중독으로 아까운 축복인생 손실을 끼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 하느님의 기쁨은 우리가 축복받은 존재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제1독서 민수기 말씀대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민수기 6,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민수기 6,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기 6,26)
얼마나 멋진 하느님의 축복인지요. 어떻게 하면 축복받은 존재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답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감사하라!" 입니다.
하느님 축복에 대한 당연하고 자연스런 응답이 반응입니다.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입니다. 믿는 이들의 우선적 특징이 감사입니다. 감사하는 자체가 축복이요 감사할 때 축복도 계속 받습니다. 감사의 발견, 감사의 선택, 감사의 축복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감사로 가득한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입니다. 감사에서 샘솟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감사를 강조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감사할 때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이지만 불평할 때는 부정적 비관적 인생관입니다. ‘아직도 이렇게 남았네!’ 하면 낙관적 만족의 사람이요, ‘벌써 이렇게 썼네.’ 부정적 불만의 사람입니다.
둘째, "겸손하라!" 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겸손입니다. 영성의 잣대가 겸손입니다. 침묵, 경청, 겸손, 순종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흙(humus)에 어원을 둔 사람(homo)이자 겸손(humilitas)입니다. 흙같이 겸손해서 사람입니다. 사람됨의 본바탈이 겸손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겸손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겸손이 지혜입니다. 무지의 교만이요 지혜의 겸손입니다.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몰라서 교만의 자랑이지 알면 겸손히 감사합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겸손할 것을 촉구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연기처럼, 안개처럼, 구름처럼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덧없는 인생입니다. 모사는 재인이요 성사는 재천입니다. 일을 계획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자랑하려가든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요, 우리가 할 일은 다만 하루하루 날마다 최선을 다하고 결과가 어떠하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감사하는 일뿐입니다.
셋째, "깨어 있어라!" 입니다.
깨어 있음의 은총이자 축복입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감사요 겸손입니다. 깨어 있을 때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감사하며 겸손히 살 수 있습니다. 과연 제정신으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깨어사는 자 몇이나 될까요? 아마도 자기를 잊고 사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성당 뒷벽의 양쪽 올빼미 눈 역시 깨어 있음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도 온통 깨어 있으라는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막연히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찾아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 우리를 깨어 있게 합니다. 아니 주님은 끊임없이 알게 모르게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도대체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기쁨은 없습니다. 깨어 주님을 기다릴 때 나이에 상관없이 설레는 기쁨입니다. 깨어 있을 때, 비로소 깨끗한 마음이요, 깨달음의 연속입니다. 깨어 있음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도 참 좋은 영성생활의 방법입니다. 향심기도, 명상기도, 비움기도,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 매일의 공동전례기도등 모두가 깨어 있음의 참 좋은 영성훈련입니다.
우리는 모두 축복받은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인답게 감사하는 삶, 겸손한 삶, 깨어 있는 삶을 삽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축복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옵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우리 손이 하늘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 90,17)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올해 새해맞이 잘 하시나요?>
새해맞이.
2025년 새해를 나는 어떻게 맞이할까?
설빔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오래 못 보던 가족과 만남을 기대하며 설레고 들떠서 맞이하던 옛날 아이들과 같이 맞이하지는 않겠지요?
새해맞이는 애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무덤덤합니까? 그래서 새해 소망도 결심도 없이 맞이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묻습니다. 새해가 됐는데도 새해를 맞아들이지 않아 새해가 아닌 사람이 행복할까, 새해를 맞아들여 새해가 새해인 사람이 행복할까?
이것은 어리석은 질문이지요. 새해맞이를 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압니다.
그것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요. 죽은 사람은 새해맞이를 하지 않지요.
그리고 새해맞이를 하지 않는 것은 과거를 그대로 살겠다는 것이고, 새롭게 한 해를 살겠다는 것이 아니지요.
일종의 자포자기요 발전이나 성장/성숙이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새해 들어 복권이라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확천금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 수도 있지요.
매주 살 때마다 꿈, 희망을 지니고 살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부적을 몸에 지닌 것처럼 복권이 안 주머니에 있으면 한주가 왠지 뿌듯하고 든든하다고 하는데 말하자면 작은 희망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인이 아닌 사람은 새해 아무 소망 없이 살기보다는 하다못해 이런 소망이라도 갖고 사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에게는 확실한 복권이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올해 결심을 하나 하는 겁니다.
곧 올해 나는 행복하기로 결심하고 제가 자주 얘기하듯 무조건 행복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무조건 행복하다는 것은 조건에 따라 행복하기도 불행하기도 하지 않겠다는, 조건에 좌우되는 행복을 살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돈이 있건 없건 행복하고, 고통이 있건 없건 행복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느님이라는 복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복권은 돈 주고 살 필요 없고 얻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주시기에 다른 복권은 원하지 않고 하느님 복권을 원하기만 하면 됩니다.
로또라는 복권과 하느님이라는 복권 가운데
하느님이라는 복권이 더 행복을 확실히 보장한다는
오래 숙성된 확신과 새해 들어 새로워진 확신만 있으면 됩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12,40)
<행복한 설명절!>
오늘 복음(루카 12,35-40)은 '깨어있어라.'는 말씀입니다.
민족의 큰명절인 설명절입니다. 먼저 아론의 축복(민수6,24-26/제1독서)으로 새해 인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복(은혜와 평화) 많이 받으시고, 영육의 건강이 함께하는 을사년 새해가 되시길 빕니다."
뉴스를 통해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설명절이 편안하지 않아!" 참으로 우리나라가 극도로 혼란한 가운데 설명절을 맞이했습니다.
오늘 만큼은 조상님들과 부모님과 사랑하는 가족들을 기억하면서, 서로 싸우지 말고, 시끄러운 마음들 잠시 다 내려놓고, 가족 친지들과 형제자매들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설명절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설명절에 들려오는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크게 일깨웁니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까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4,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오늘 복음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루카 12,36-37ㄱ)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39-40)
모든 사람은 죽음이라는 결정적인 때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또 하나의 결정적인 때인, 그리스도의 재림(다시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결코 알 수 없는 때입니다.
함께 깨어 있도록 합시다!
사람답게, 그리고 그리스도인답게.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루카 12, 40)
설날에
눈사람을
봅니다.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을
기억하는
우리의
설명절입니다.
소중한
길 위의
시간 안에
우리의
설명절이
있습니다.
설명절은
우리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이
서로를 기억하는
소중한 마음임을
깨닫습니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는 것은
마음입니다.
소중한
마음과 마음이
만나
서로를 맞잡는
것이 사람의
길입니다.
사람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준비가
되어 있고
깨어있는
사람만이
마음의 길을
따라갑니다.
준비가 된
사람은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것은
마음입니다.
사나운 시간들을
지나
깨닫게 되는
반듯한
마음입니다.
반듯한 마음이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불행의 시간을
이제 접고
다시
행복해지는
설명절이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설날의
새 아침으로
좀 더 행복하고
좀 더 기쁜
새날들을
맞이하시길
또한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현실을
위로하며
우리의 삶에
소중한 것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2025년의
새해
설명절입니다.
"새해엔
더 좋은 일들로
가득하소서."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