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토요일 강론
송영진 모세 신부 ・ 22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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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간 토요일 강론>(2024. 7. 20. 토)(마태 12,14-21)
<사랑한다면 끝까지 희망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14-21)”
1) 신앙인의 희망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이 복음은 여러분에게 다다라
여러분이 그 진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듣고 깨달은
날부터, 온 세상에서 그러하듯이 여러분에게서도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콜로 1,3-6).”
‘희망’은 믿음과 사랑의 ‘근거’이기도 하고,
믿음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기도 합니다.
<희망이 없으면 믿음을 가질 이유가 없게 되고,
사랑을 실천할 힘도 잃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희망의 관계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6-8)”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는
희망과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하나입니다.
믿으니까 희망하고, 희망하니까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올바른 판결’이라는 말은,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모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청하는 그것을 청하는 그대로
다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7-8.11)”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청하지 않으면 받지 못하고,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입니다.
주시는데도 받지 않으면 못 받는 것입니다.
<외면하거나 관심이 없거나 거부하면 그렇게 됩니다.>
2)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지금 청하는 이것이
정말로 좋은 것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모른다고 해도 고민하지 말고,
기도하기를 망설이지도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주변에서 “그런 기도는 기복신앙이다.” 라고
핀잔을 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눅 들거나 열등감에 빠질 이유는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그것이, 또 그것을 간청하는
나의 기도가, 수준이 조금 떨어진다고 남들이 비웃는다고
해도, 주님께서는 나의 간절한 심정을 알아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거창한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나에게는 아주 큰 일이
있고, 그것을 주님께 간절하게 빌고 있는데, 기복신앙 같은
모습이 조금 섞인다고 해도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께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우리는 ‘다른 사람의’ 믿음과 희망을 존중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보기에는 부러진 갈대처럼 구제불능으로 보이는
사람이라도, 다시 살아나서 성인 성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눈에는 박해자 사울이
부러진 갈대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 박해자가 나중에 위대한 사도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예외가 되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합니다.
배반자 유다가 바로 그 사람인데, 최후의 만찬 시점에서
그는 이미 부러진 갈대였고 연기 나는 심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그를 회개시키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만일에 그가 마지막 순간에라도 회개하고 돌아섰다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죄를 모두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떠나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유다 자신이 스스로 믿음과 희망을 버린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