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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대 문종(3)
3. 문종시대를 이끈 양대 산맥
동방의 해동공자 최충 (984-1068)
최충(崔沖)은 984년에 태어났으며 호는 성재, 월포, 방회 등을 사용했고, 자는 호연이다. 해주 최씨 온의 아들인 그
는 22세 때인 1005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우습유에 올랐으며, 1013년 황주량 등과 함께 ‘칠대실록’ 편수작업
에 수찬관으로 참여하였다.그 후 한림학사, 예부시랑, 간의대부, 형부상서 등을 역임하고 문종 즉위 후에는 평장사로
있다가 곧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문하시중에 임명된 그에게 가장 먼저 부여된 일은 형법을 제대로 세우는 일이었다.1047년 6월 왕은 최충과 율사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법률이란 형벌을 판단하는 규정이다. 그것이 분명하면 형벌에 억울하고 지나친 것이 없을 것이요, 분명치 못하면 죄
상에 대한 경중이 옳게 처리될 수 없을 것이다. 현행 법률에 어떤 것은 잘못된 것이 많으므로 내 이를 못내 가슴아프
게 생각하는 바이다. 시중 최충으로 하여금 여러 법관들을 모아 상세한 교정을 하도록 하되 타당하게 할 것이며, 몇 번
이나 교정을 하였는지도 기록하여 철저하게 고증, 시정토록 하라.’
시중 최충은 왕의 명령을 받고 율사들과 함께 형벌 검토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당시까지 허술하게 되어 있던 많은
법규들이 고쳐지고, 죄수에 대한 신문을 할 때, 반드시 형관 3인이 함께 들어가도록 하는 삼원신수법(三員訊囚法)이 마
련되었다.
문종은 이외에도 많은 법제를 신설하고 개편하는데, 여기에는 최충의 조언이 많이 작용한다. 문종은 즉위년 8월 경
신일 아침 조회를 마치고 당시 시중으로 있던 최제안과 평장사 최충을 불러 정치적 당면 과제를 질문한 바 있다. 아마
이때 최충은 법제도의 확립이 정치의 관건이라고 역설했을 것이다.이는 시중 최제안이 죽고 최충이 시중으로 오른 후
곧바로 법제 개편 작업에 돌입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시중에 올라 있던 최충은 한때 도병사로 북방에 나가 있었던 적이 있는데, 이때 그는 문종에게 다음과 같은 건의를
한다,
‘동여진의 추장과 그 부하들 86명은 자주 변방을 침범한 자들인데 지금 그들을 붙잡아 개경 관아에 가둬둔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랑케란 원래 사람의 외모에 짐승의 마음을 가진 자들인즉 형벌만으로는 버릇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인의로도 교화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억류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제 집을 그리워하는 심정도 깊을 것이며, 이로 인해 반드시 원한을 품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많은 비용을 들이며 굳이
그들을 잡아둘 이유가 없다고 판단되니, 그만 돌려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최충의 이 같은 건의에 따라 동여진의 추장을 비롯한 86명은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최충의 이 건의문은 그의 사상과 가치관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해준다. 비록 약한 적이라고 해도 힘으로 누르는 것
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그이 판단에서 아주 심리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또 인간을 형벌로만 다스리는 것은 자칫
원한을 사게 할 수 있으니 차라리 풀어주어 고마움을 느끼게 하는 편이 적을 만들지 않는 길이라는 생각 역시 아주 현
실적이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은 자세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회체제에 대한 그이 시각은 매우 보수적이고 원리원칙에 충실하였다. 그가 식목도감사로 재직할 당시에 내
사시랑 왕총지와 함께 왕에게 진언한 내용 속에서 최충의 그런 일면은 여실히 드러난다.
최충의 진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과거에 급제한 이진석은 씨족을 등록하는 절차를 밟지 않았으니 관리로 등용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충의 진언은 당시 문하시랑으로 있던 김원충과 판어사 김정준에 의해 논박당한다.
’그가 씨족 등록이 아니 된 것은 그의 조부나 부친의 과실이지 본인의 죄는 아니며 또한 그가 다년간 글 공부에 노
력한 공으로 과거에 급제하는 영예를 얻었으니 그 스스로에게는 어떤 허물도 없습니다. 그러니 관직을 주는 것이 마땅
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종은 이 두 의견 중에서 후자를 택했다. 문종은 최충과는 달리 가끔 예외를 인정하고, 인품과 실력을 중시하는 성
격이었기 때문이다. 문종은 다소 원칙주의자인 최충과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최충을 가장 신임했다. 그것은 자신이 혹 가질지도 모르는 편견을 객관적으로 잘
지적해줄 수 있는 신하가 최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종은 나이 일흔이 되어 퇴직을 청하는 최충을 극구
만류하여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시중 최충은 누대로 내려오며 선비들의 영수이며 우리나라의 덕망 높은 장로다. 이제 비록 은퇴를 청원하나 내 어찌
그의 청을 허락하겠는가? 주관 부서에서는 마땅히 전래하는 예법에 의거하여 그에게 안석(安席,앉을 때 기대는 방석)과
지팡이를 주고 국사를 돌보게 하라.‘
하지만 최충은 연로하였고, 국법으로도 나이 일흔이면 퇴임하도록 되어 있었으므로 결국 태사 겸 문하시중에 임명되
면서 동시에 치사(致仕,벼슬살이를 중단하는 것.퇴직)가 허락되었다. 이때 문종은 다시금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
고 있다.
’어진 신하를 얻는 것은 성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요 임금은 8명의 인재를 중용했고, 선비를 얻는 나라는 융성했던
것이다. 또한 그 때문에 주나라 왕실에서는 네명의 현인을 맞아들이자 않았던가. 그들에게 재상 자리를 주고 그들의 충
직한 계책을 채납(의견을 채택하여 받아들임)하여 왕정을 빛나게 하였으며 그들로부터 현명한 보좌를 받아 임금의 지모
를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백성들을 바로 다스리고 평화롭게 만들었으며 영원무궁한 국운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만일 우
리나라에서 이런 현철(어질고 밝음)한 옛사람에 견줄 자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짐은 그런 사람을 얻었다고 대답할 것이
다.‘
이렇듯 최충을 존경한 문종은 그가 퇴직한 이후에도 국가에 대사가 있으면 어김없이 사람을 보내 그에게 문의하도록
하였다.
정치 일선에서 은퇴한 최충은 시중 시절부터 꾸준히 추진하고 있던 육영사업에 몰두했다. 총 9개의 서재(書齋.책을
갖추어 가르치고 배우는 집)로 이뤄진 구재학당을 세움으로써 최초의 사립학교 설립자가 되었던 것이다.
구재학당에 대하여 <고려사> ’열전‘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체 과거 보려는 자들은 먼저 그의 학도로 입학하여 공부하는 것이 상례로 되었으며, 매년 여름에는 귀법사의 승방
을 빌어 여름 학습을 집행하였다. 학도 중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학력이 우수하면서도 아직 관직에 취임하지 않은 자들
을 선발하여 교사로 삼아 9경(시경,서경,역경(주역) 예기 춘추 논어 효경,맹자 주례)과 3사(史)(사기.한서,후한서)를 교수
하게 하였다.
또 간혹 선배들이 참관하려고 오면 촛불로 시간을 정하고 시를 지어 그것을 평정하여 성적에 따라 우수한 시는 방을
붙이고 동시에 성적순으로 호명하여 죄석을 정하고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술상 좌우편에는 기혼자와 미혼
자가 마주보며 정렬하여 앉아 술잔을 돌릴 때면 모든 행동에 예절이 묻어나고 어른과 아랫사람의 질서가 정연했으며,
서로 시를 읊으며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러다가 해가 저물면 모두가 낙생영(洛生詠. 일종의 시낭송)을 하며 자리를 파
하니 보는 사람마다 칭찬과 감탄을 쏟아내지 않은 자가 없더라.‘
이것이 구재학당에 다니던 학생들의 모습으로, 이러한 전통은 물론 최충이 마련했을 것이다. 학문과 담소, 술과 예
의, 그리고 낭만과 절도를 지킬 줄 아는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구재학당 설립으로 최충이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자 고급 관료 출신 학자들이 대거 사립학교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개경에 12학당이 생겼는데 그것을 일러 ’사학십이도‘라고 하였다.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 중 역시 으뜸은 최충의 ’문헌공도‘였다.최충의 시호(죽은 후에 붙여진 이름) 붙여진 이 학도의
수는 수백 명에 이르렀고, 이들 주도하에 개경뿐만 아니라 지방에까지 대대적인 유학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학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인 최충의 행적이 흡사 중국의 공자에 비견된다 하여 그에겐 ’해동공자‘라는 별칭이
붙었다.
해동공자 최충의 선구적 역할로 고려 사회 전반에 사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고, 급기야 사숙(私塾,개인 글방)중심
의 사학은 관학을 압도하고 고려 학문의 중심에 선다. 하지만 구제학당의 학도들이 절을 빌려 학문의 장으로 삼았던
것을 볼 때 이 당시의 학자들은 결코 불교에 대해서도 배타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70세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나 구재학당을 세워 고려사회에 사학의 열풍을 일으킨 최충은 1068년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최충은 유선, 유길 두 아들을 두었으며, 최유선은 벼슬이 상서령에 이르렀다.그는 뛰어난 학자로서 최충을 계승하여
유림의 영수로 지냈으며, 사추, 사제 등 그의 아들들 또한 문재가 뛰어나고 명망이 높았다. 이렇듯 최충 가문은 학문과
정치를 주도하며 고려 선비사회의 구심점이 되었다.
최충은 많은 책들을 남기긴 하였으나 무신정변 시절에 거의 사라졌고, 몇 절의 시구와 금석문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문종의 오른팔 이자연(1003-1061)
문종시대부터 인종 때까지 최대의 권문세가를 뽑으라면 당연히 경원이씨 집안이다. 경원이씨를 권문세가의 지위에
올려놓은 사람은 이자연(李子淵)이라는 인물이다.
이자연은 인주(경원) 사람으로 이허겸의 손자이며 좌복야를 지낸 이한의 아들이다, 1003년에 태어난 그는 당시의 권
문세가였던 현종의 장인 김은부의 처조카였기에 이미 막강한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1024년 3월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1031년 우보궐이 되었다. 그후 이부낭중, 어사잡단, 우승선을 거쳐
지중추원사,중추부사 등을 지내다가 문종대에 들어와서 1047년에 이부상서 참지정사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050년 마
침내 평장사에 올라 정계의 핵심인물로 부상한다.
내사시랑 평장사에 오른 그는 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다. 그리고 세 딸을 모두 문종에게 시집보냄으로써 조정의
실세가 된다. 임금의 장인이자 실무직 최고위직인 평장사에 오른 그와 권력을 견줄 만한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입궁한 그의 큰딸이 1052년에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면서 그는 다시 문하시랑 평장사를 거쳐 1055년에는 재상직인
시중에 오른다. 최충의 뒤를 이어 그가 시중에 오른 것이다.
최충이 물러나고 이자연이 시중이 된 뒤부터 문종의 왕권은 한층 강화된다. 최충이 유림을 이끌었던 데 비해 이자연
은 불교 쪽 인사들과 가까웠고, 그것은 문종의 행동반경과도 일치했기 때문이다.
이자연이 시중이 된 다음에 문종은 두 가지 면에서 강한 의욕을 보인다. 하나는 불교를 융성시키기 위해 흥왕사를
짓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송과의 국교를 성립시키는 일이었다.
이자연이 시중이 된 1055년 10월 문종은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옛날 제왕들이 불교를 숭상하여 왔음을 문헌들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우리의 태조 이후는 대대로 사원을 세워 행복
과 경사를 축원하여 왔다. 그런데 내가 왕위를 계승하여 어진 정치를 실시하지 못한 관계로 재변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는 부처의 힘을 빌어서 나라를 행복하게 하려 하노니, 해당 관리로 하여금 적지를ㄹ 선택하여 사원을 건설
하게 하라.’
문종의 이 같은 명령이 있자, 문하성 관료들은 산천의 기맥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며 강력하게 반대한다. 하지만 문
종은 그들의 말을 묵살하고 거대한 사찰 건립 작업을 명령한다. 이렇게 해서 세워지는 것이 흥왕사다. 대궐에 비견할
만한 크기에 주위에 성를 쌓고 가운데 금탑을 세운 어마어마한 사찰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묘하게도 이것은 이자연이 실세로 등장한 것과 같은 시기에 이뤄졌다. 더군다나 이자연은 사원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의 아들 소현이 이미 출가해 금산사의 주지로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후에는 그이 손자, 증손자까지
출가 행렬이 이어졌던 것을 보면 이자연의 사원에 대한 투자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그의 손자
이자겸이 사원세력을 등에 업고 반란을 도모하게 되는 것도 이자연의 사원에 대한 투자와 무관하지 않다.
이자연과 문종이 사원세력을 키울 당시 사회 전반은 최충의 선도로 유학열풍이 일고 있었다. 따라서 문종이 사원세
력을 성장시킨 것이 단순한 신앙심의 발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문신들이 유학도를 중심으로 힘을
형성하자 문종과 이자연은 불교를 융성시켜 그들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
문종이 또 하나 집착하고 있던 일은 송과의 국교정상화였다. 송과의 국교정상화에 대한 열망은 문종 집권 초기부터
엿보이지만 그것이 직접 언급되는 시기는 1058년(문종 12년)이다. 문종은 원래부터 거란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1055년에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성을 쌓고 압록강에 다리를 설치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난 다음부터 문종은
거란에 대해 강한 적의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내 3년 뒤엔 정식으로 송나라와 국교를 맺으려고 한다. 하지만 내사
문하성 관료들의 강력한 반대에 밀려 이 일은 미뤄진다. 그러나 10년 뒤에 송나라가 정식으로 국교 재개를 요청해오
자 그는 강력하게 밀어붙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다.
문종의 이 같은 대송 국교정상화 의지를 부채질한 사람은 이자연이었을 것이고, 이자연의 힘이 뒤에 버티고 있지 않
았다면 문종은 감히 이 같은 관단성있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송과 국교를 정상화하던 시기에는
이미 이자연은 죽고 없었다. 하지만 그의 11명이나 되는 아들들은 건재하였다. 또한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사원세력과
경원이씨 가문이 문종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자연과 그의 자식들은 문종 집권 후반기를 주도한다. 경원 이씨 집안의 권력장악은 1061년 이자연이 59세
를 일기로 세상을 뜬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거기에는 문종에게 시집간 세 왕비의 역할이 지대했다. 이자연의
맏딸 인예태후는 순종, 선종, 숙종 등을 낳았기 때문에 적어도 이 시기에 경원이씨 세력에 필적할 정치세력은 없었다.
그러나 경원이씨 세력의 팽창은 너무 지나친 나머지 왕권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기까지에 이른다. 그리고 급기야 왕
이 자신들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자 반란까지 서슴치 않는다. 이것이 인종 때 일어나는 ‘이자겸의 난’이다.
이자겸의 난으로 경원이씨는 완전히 위축되고 이자연이 형성해놓은 경원이씨 가문의 정치적 아성도 점차 사라진다.
*.문종시대의 세계약사
문종시대 중국에서는 강한 기세로 일어난 서하(西夏 1038-1227)에 송이 굴복하여 군신관계를 맺은 상태였다.
서하는 강족이 세운 국가로 강족은 오호16국시대(304-439)에 한때 화북 서쪽지역을 차지한 후진(後秦)(384-417)을
건국하기도 했다.
서하는 탁발선비족출신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세운 국가라는 주장도 있으나,의문스럽다. 송과 서하 사이에는 이미
세 차례의 큰 전쟁이 있었으나 송이 수세에 몰려 서하와 화의조약을 맺고 신하의 입장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송은 요
나라에 연운15주를 잃고 또한 문치주의 때문에 국력이 강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종이 죽고 영종이 즉위하면서 송은 북
진정책을 감행하는 한편 고려와 국교를 재개하고 거란을 압박한다.
이 시기에 유럽에서는 신성로마제국과 로마교회 사이에 패권다툼이 더욱 치열해진다.신성로마제국(독일영방국과 이탈
리아 지배)의 황제로 오른 하인리히 4세는 교황과의 싸움에서 패해 카놋사의 굴욕을 당하고(1077년 1월경), 이에 따라
교황과 황제의 싸움이 더욱 치열해져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서로 파문과 폐립으로 맞대결을 벌이게
된다. 한편 영국에서는 덴마크왕 크누트가 영국까지 지배했는데 그가 죽자 참회왕 에드워드가 왕이 되어 앵글로색슨
왕으로 재개했다.그런데 그가 죽자 헤럴드2세가 왕이 되자 노르망디 공 윌리엄1세(노르만족 롤로의 후손)가 자기의 왕
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잉글랜드를 침입 정복하고 윌리엄 1세로 즉위함으로써 앵글로 색슨 왕국이 멸망하게 된다.
첫댓글 해동공자 최충
이자연의 실세는 조선시대에
안동김씨의 권세와 견줄만 하군요
문종은 인덕이 많은 임금이었습니다
최충과 이자연같은 충신을 곁에 두고
막중한 왕권을 강화 할수 있었으니까요
인류가 태여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수천만년의 시간속에
기록으로 남겨져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사람은 겨우 몇몇 숫자에
불과한데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 입니다
존재조차 없이 먼지로 사라지는 인간들의
숫자에 비하면 말입니다
문종시대의 양대산맥
해동공자 최충과 이자연에 대해 잘 읽었습니다.
학교다닐때 역사시간이 참 재밌고 관심이 많았었는데~~
추일슬풍님의 글은 한가한 시간에 정독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