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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느티신부님>
■마르코 6,7-13
+ 찬미 예수님
오늘 미사 초대받으신 분들은 전라방 35분, 또 전라방 가운데는 개신교 신자분들 네 분이 오셨다는 반가운 소리를 들었습니다.
제가 은퇴한 후 이곳을 만들 때는 천주교 신자들만을 위해 만든 건 아니죠.
힘들고 지쳐 기도하고 싶은데 기도할 데가 없는 분들 누구나 머물다 갈 수 있는 장소입니다.
열려 있는 공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는 얘기가 나오죠.
퀴즈 하나 낼게요.
맞히면 스와로브스키에서 나온 크리스탈 팔찌 묵주를 받으시게 됩니다.
아주 쉬운 거예요.
예수님이 파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세 가지 능력을 줬다고 그랬죠.
마귀 떼는 능력, 치유시키는 능력, 말씀을 선포하는 능력.
어둠과 싸울 수 있는 영적 무기를 주셨다는 얘기죠.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그 세 가지를 다 쓰는 게 나오는데, 제자들이 제일 먼저 쓴 게 뭐예요?
여러분들 학교에서 선생님이 물을 때 정답을 확실히 알면 그냥 손을 들고 대답하죠.
우리 개신교 신자한테 물어볼게요.
우리 자매님 4년 동안 내 강의 들었다고 하는데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경이 좀 차이가 나죠.
개신교는 총 몇 권이고, 천주교는 몇 권이에요?
구약과 신약이 천주교는 46권, 27권이고, 개신교는 39권, 27권으로 구약에서 차이가 나죠.
개신교에서는 그리스어로 쓴 것은 외경이라 하고, 히브리어로 쓰인 것만 진짜 성경이라 하죠.
마카베오 상하서 같은 것들은 전부 그리스어로 작성된 성경입니다.
천주교는 그것을 모두 인정해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신 후 오늘 제자들이 제일 처음 한 것이 메시지를 선포하는 거예요.
치유도 아니고 구마도 아니죠.
예수님으로부터 열두 제자로 불림을 받고 파견된 자들이 첫 번째 한 미션은 뭐냐?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에요.
또 사도들이 신자들에게 설교하러 갔을 때 사도들은 자기가 만든 메시지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만들어 준 메시지를 전달하러 가는 거예요.
본인의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에요.
솔직히 십이사도 거의 다 무식한 사람들이었잖아요.
어쩌면 예수님이 그런 사람들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가 그걸 거예요.
머릿속에 든 것이 많은 사람은 무엇을 전달하면 꼭 자기 생각을 붙여서 전달해.
그런데 애초부터 다 비어 있어서 예수님이 집어넣고 네 입으로 이것만 전달하고 오라 하시면,
십이사도는 그 메시지를 전달할 때 메시지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그 메시지는 듣고 이미 안에 들어와 있고
‘이것은 잊어버리면 안 돼, 잘 전해야지’ 하고 가지고 갔을 뿐이에요.
여기에서 중요한 법칙이 나와요.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 저도, 수녀님도 그렇죠.
천주교 신자나 개신교 신자나 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위치에 있어요.
그런 사람들의 제일 첫 번째 지켜야 할 것이 나오죠.
자기 생각을 전하려는 거예요, 아니면 메시지를 전하려는 거예요?
그렇죠, 그 메시지가 어떤 때는 너무 맛이 없을 때도 있어요.
‘나 말 잘하는데, 감칠맛 나게 이렇게 하면 좋은데’. 그것 걱정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예언자들은 어떻게 시작해요?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면서 전해요.
모든 선지자는 하나같이 ‘주께서 나에게 이리 말씀하셨으니, 너희들은 이리 알아들어라.’
내가 얘기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말씀하셨으니 이 말은 권위가 있고 힘이 있다, 이거죠.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힘 있는 메시지를 전하려면 먼저 그 메시지를 하느님으로부터 받지 않으면 안 되겠죠.
내가 꾸며낸 게 아니에요. 그건 메시지가 아니죠, 그건 말씀 선포가 아니에요.
그래서 사제들은 열심히 하느님의 메시지를 먼저 귀담아듣고 묵상해야합니다.
사제 쪽에서 해야 할 기술적인 것을 하나 집어넣는다면, 어떻게든지 이유식으로 만들어서 사제 입을 통해서 전달하는 것이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많이 배운 사람한테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데 못 배운 사람들은 뭔 말인지 못 알아듣는다면
이것은 메시지의 보편성이 아니에요.
그래서 사제가 해야 할 일은 뭐냐?
정말 기도와 묵상 끝에 전하는 말씀이 모든 사람한테 각자의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게끔 하는 것, 그것이 사제의 중요한 몫이죠.
책에서 배우는 것은 지식이지만, 성령께 배우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거죠. 아멘
사제나 수도자나 교리 교사나 전교하는 신자들이나 잊지 말고 명심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가르침,
즉 교리를 전파해야 하는 것이지 자기 사상을 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교리 상식이라든지 성경 공부가 필요합니다.
그릇된 하느님의 개념이 한 사람을 망칠 수 있어요.
무서운 하느님, 두려운 하느님, 벌만 주는 하느님 밑에서 우리는 살아갈 수 없잖아요. 그렇죠?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한 30여 년 전에 어느 할머니 수녀님이 나한테 면담하러 찾아왔어요.
그 수녀님의 면담 거리는 뭐냐, 자기는 수도 생활 이렇게 오래 했어도 기쁘지 않대요.
그 수도원에서는 성녀 소리 듣는 수녀님이 기쁨이 없대.
그래서 내가 수녀님께 심리적인 여러 측면에서 접근 해봤어요.
가정사를 들어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 할머니는 시골 공소 출신인데, 공소에서는 신자들을 리드해야 하는 사람이 공소회장이죠.
아버지가 공소 회장이셨어요.
옛날에 꼬마 때는 뛰어놀 데가 공소 앞마당밖에 없었단 말이에요, 마루방이랑.
그런데 아버지가 그렇게 무서웠대요.
이놈의 자식, 어디 공소에서 뛰냐고, 지옥 간다고 벌 받는다고.
그러니 자기 어렸을 때부터 공소 회장인 아버지 입에서 들은 것은 ‘지옥 간다’라는 말이래요.
그렇게 해서 그 잘못된 하느님 모습을 가지고 수녀원에 들어갔어요.
그 수녀님은 간호사였는데, 환자들이 치료받고 ‘수녀님 감사합니다.’ 하면 기뻐야 하잖아요.
그런데 기쁨이 오면 ‘나 기뻐하면 안 돼. 이것은 교만이야.’
어릴 때부터 잘못된 하느님으로 내 안에 들어온 것이 나를 지배하고 있던 거야.
정말 하느님은 여기 계시는데 엉뚱한 우상을 만들고, 함부로 내뱉은 엉뚱한 하느님 밑에서 얼마나 그 세월이 답답했겠어요.
그래서 내가 그 수녀님이랑 한 1년 정도 면담을 하면서 완전히 다 바뀌었지.
제일 먼저 성직자 수도자 성령 세미나 보냈어요.
나도 그때 세미나 강사를 하니까 특별히 유심히 보았더니 한 60년 쌓인 눈물을 다 흘립디다.
그리고 하느님이 이렇게 좋은 하느님인 줄 몰랐대요.
그래서 여러분들 자식들한테나 누구한테나 하느님 알릴 때 잘 알려야 해요.
‘그러지 마. 너 하느님 벌 받아’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말보다는 벌줘.
정의의 하느님, 무서운 하느님. 하늘에서 틈새로 우리를 보고 무슨 죄지었는지 기록하고 있는 하느님 밑에서는 못 살아요.
십이사도가 제일 처음 행한 것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인데, 만들어서 전하는 게 아니었죠.
그리고 만들어서 전하지 않으려면 제일 먼저, 내가 교리 공부도 확실히 해야 하고,
어설픈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면 안 돼요.
얼치기로 알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아요.
나는 지금도 교리 공부해요. 틈만 나면 교리 책 꺼내서 읽어요.
지난번에 어디 가서 강의했는데 뭔가가 자신 없이 얘기한 게 있어, 그러면 찾아봐야 하죠.
찾아보고 잘못되었으면 또 정정해 줘야지요. 유튜브를 통해서라도 정정해 줍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 옆구리에 손가락 찔러봐야 자기는 믿겠다고 그랬죠.
어쩌면 지금 시대는 그 자세가 필요할지도 몰라요.
성실한 회의 속에 확신을 찾는 거예요.
일단 토마 사도는 믿기까지 그 과정이 이렇죠.
성격 자체가 ‘난 내가 확인해야 해.’, 그런데 예수님이 나타났었죠.
‘토마야, 어떻게 너는 나를 보고 해야 믿느냐 어디 찔러봐라.’
토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뭐라 그래요? 긴 얘기 안 하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그리고 그때보다 더 많은 물불 안 가리고 사셨죠, 인도에서 순교했잖아요.
요즘은 궁금하면 휴대폰에서 검색하면 여러 학자 얘기도 너무 잘 나와요.
노력을 안 해서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궁금한 것 찾을 수 있죠.
아무튼 오늘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파견하실 때 말씀을 주시며 파견한 것이지,
너희가 알아서 좋은 말 생각해 아무튼 해 봐 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재료를 다 주신 거예요. 연장까지 다 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은 그것을 공부해야 해요.
저는 본당 신부 할 때 제일 신경 썼던 게 주일학교 교사들이에요.
얘네들 입에서 하는 말에 따라 꼬마들이 한평생 어떤 하느님 밑에서 살아갈지 결정이 돼.
그래서 어떤 때는 주일학교 교리 가르칠 때 옆에서 몰래 들어봐요.
어떤 교사들은 정말 준비를 잘 해와서 애쓰고 어떤 교사는 준비 하나도 안 해서 와.
그러니까 엉뚱한 얘기만 해.
무슨 만화책에 나오는 얘기, 지옥 얘기, 그냥 흥미 위주로만 떠드는 거야.
애들이 무섭다고 무서워요, 무서워요.
교사들을 난 교육을 무지하게 많이 시켰어요.
‘너희들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모른다.’
주일학교 교사들은 가르치는 입장이잖아요.
그릇된 하느님의 개념이 한 인간을 망칠 수 있어요.
그래서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해야 해요. 그러려면 정확히 알고 가야 해요.
어설프게 알고 가면 안 돼.
말주변이 없다 해도 정확한 핵심을 알고 가면 나머지는 성령께서 덧붙여서 이해시켜요.
‘주님, 제 입을 가지세요. 지금 냉담자 회개시키러 왔는데 알다시피 제가 말을 못해요.’
노크하니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물으면, ‘회개하세요.’ 그 말만 하셔도 돼요.
그리고 문을 닫고 가면 망치를 맞은 것 같겠지.
긴 얘기 안하고 딱 한 마디 문밖에서 ‘자매님, 회개하세요. 기도할게요.’ 그리고 돌아갔어.
‘이게 무슨 일이지?’
그때부터 속에서 막 파도가 치고 난리가 난 거야.
그때 성령이 쫙 그 사람한테 내려오시지.
‘아까 그 자매가 천사였구나.’
그리고 그 주에 미사를 하러, 성사 보러 나간단 말이에요.
그다음 이제 두 번째로 제자들이 전달한 메시지의 내용이 무엇인가?
‘회개하라.’
오늘 다른 얘기한 게 아니야.
‘잘 먹고 잘살아라. 아프지 말아라.’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회개하라.’
이것이 십이사도 입에서 나온 첫 번째 메시지에요.
‘치유시켜 줄게’ 그게 아니에요.
사탕발림 얘기를 한 게 아니에요.
‘예수님 믿으면 아무 걱정하지 마.’ 그게 아니라 ‘회개하라.’
다시 말하면 이 회개가 없이는 다른 것이 이루어지질 않아요.
십이사도들은 격려나 위로보다는 회개를 강조했어요.
회개를 선포했다고 오늘 나오죠.
복음에 회개는 무엇인가요?
마음과 행위를 변화시키는 것을 뜻하죠.
어떤 이들은 반쪽만 해요.
마음은 회개했는데 하는 꼬라지를 보면 회개하는 인간이 아니야.
또 어떤 인간들은 체면 때문에 행동은 바뀐 것처럼 보여.
하지만 속은 지금도 어둠이 잔뜩 있어.
‘내가 지금은 쪽팔려서 착한 척하지만, 나중에 너 가만 안 놔둬!’
이건 회개가 아니죠.
그런데 여러분들 회개하기 어려워요. 쉬워요?
왜 어려울까요?
교만해서 그렇다, 행동으로 옮겨지는 게 힘들다.
또 뭐 다른 것 또 혹시 있으세요? 고집, 그렇죠.
회개가 어렵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스스로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살을 찢어야 해요. 무슨 얘긴지 이해되시죠?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고 회개할 수 있다? 불가능해요.
왜냐하면 자기가 걸어온 길이 잘못된 길이었다는 것을 통렬하고 솔직하고 냉정하게 자아비판 해야 하기에
자존심 다 잃어버리는 것 같고,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 같고, 또 내가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았죠.
그래서 회개하기가 어려운 거예요.
이제껏 살았던 모든 것, 전부 다 무너뜨려야 해. 무너져야 해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건데 주님이 보실 때 너 잘못 살고 있는 거야.
나 이러고 이게 옳게 산 거 아닙니까?
아니야. 너만 몰라. 다른 사람이 너한테 손가락질하는 거 너만 모르고 살아.
너 혼자만 성당에서 제일 잘 났지. 너 혼자만 똑똑하지.
너 혼자만 베푸는 척하지. 너보다 훨씬 더 착한 사람 많아.
무너져야 해.
두 번째로 회개하기 어려운 이유는 뭐냐?
큰 동요가 일어나요. 잔잔했던 바다가 갑자기 풍랑이 일기 시작해요.
회개는 인생의 완전하고 전체적인 역전을 뜻해요, 역전.
전혀 다른 길로 가야 해요.
몸뚱어리만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머리도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가야 해요.
몸뚱어리는 하느님이 갔지만 머리를 돌리다가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 이야기 아시죠?
우리들은 많은 경우에 몸은 성당을 향하여 주일에 가요.
아침에 일어났더니 다리가 벌떡 일어나 양말도 자기가 챙겨 신어.
어디 가나 봤더니 성당 쪽을 향해 가더니 성당에 들어가서 내가 늘 앉는 자리에 앉아.
이렇게 몸은 이미 성당에 와 있고 눈도 제대로 향해있지만, 머릿속은 전혀 준비를 안 하고 왔기 때문에
미사 시간 끝나기만 기다리죠.
그러면서 점심 뭐 먹어야 하나, 오후에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여러분들 하다못해 시장을 만나러 간다고 해도 전날부터 아마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잠 제대로 못 잘 거예요.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고 그래봐요.
때 빼고 광내고 제일 좋은 옷에 마사지도 하고, 예쁜 구두 신고 청와대 갈 거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성당 와서 예수님 만나는 것을 대통령 만나는 거에 비합니까? 아니죠.
그런데 하고 다니는 것은 왜 동네 아저씨 만나러 오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하고 와도 주님은 다 이해하시잖아요.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회개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회개하는 사람은 적어요.
예수님 그러셨잖아요?
‘회개하려고 하는 자는 많은데 실제로 회개하는 사람은 적다.’
그래서 천국 문이 좁다는 얘기죠.
실제로 문이 작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갈 사람이 없어요.
제가 여러분께 참 중요한 이야기인데, 고해 성사 볼 때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이 있습니다.
후회와 회개의 차이예요.
정말 많이 얘기했죠?
대개 사람들은 회개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후회하고 나가는 거예요.
그러면 후회와 회개의 차이가 뭐라 그랬어요?
후회는 자기중심적인 것이고, 회개는 하느님 중심적인 거예요.
후회는 죄지은 자기가 미울 뿐이죠.
고백성사 보러 들어가서 ‘쪽팔려 또 들어왔어. 3일도 안 됐는데 또 같은 죄에 떨어졌어.’
죄지은 자기가 미운 거예요.
이게 후회예요.
‘넌 창피하지도 않냐? 그렇게 고백소를 들락날락하고 그 죄지은 지 며칠 됐다고 또?’
회개는 뭐냐? 하느님 아픈 마음을 헤아리는 거예요.
내가 죄에 떨어졌을 때 하느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냉담하는 동안에 성모님이 얼마나 피눈물 흘리시며 내 뒤를 따라다니며 전구해 주셨을까?
내가 그렇게 못된 생각 하고 있을 때 내 안에 계신 성령이 얼마나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안타까워하셨을까, 이게 회개예요.
사제가 고백소에 앉아서 신자들이 죄를 고백하는 걸 들어요.
10명 가운데 요즘은 거의 10명이 후회하고 나가요.
하느님 마음 아프다는 얘기는 한마디도 안 해요.
옛날 교우들은 고백소에 들어오면은 어떻게 고백하는 줄 아시죠?
‘신부님 제가 이러이러한 죄로 인하여 예수 성심을 아프게 했나이다. 용서해 주소서.’
‘내가 이런 죄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나이다.’
‘제가 이러이러한 죄로 인하여 성모 성심을 거슬렸나이다.’
‘신부님 제가 이러한 죄로 인해서 제 안에 계신 성령을 모독했나이다.’
중심이 하느님한테 가 있어요. 이게 회개죠.
내가 저 어른들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가?
후회는 같은 죄에 떨어진 자기 자신이 자존심이 상한 것뿐이죠.
시커먼 때 빨리 지우고 나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대부분 사람이 회개한다고 하면서 후회만 하다 끝나요.
물론 과정은 후회, 그다음에 회개로 넘어가야 해요. 그런데 후회에서 끝나죠.
성사 보실 때 정말 눈물 흘리면서 ‘하느님 저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프셨습니까?’ 하는 성사 몇 번이나 보셨어요?
옛날 내가 아주 초짜 신부 때, 그때는 다 구교들이었어요.
그때는 정말 아름다운 고백을 많이 들었어요.
할머니들이 들어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볼 때는 손주랑 싸운 것 죄도 아니야.
‘신부님 제가 손주한테 손찌검을 한번 해서 성모님 마음에 피눈물 나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펑펑 울어.
그런데 지금은 하느님 마음 아프게 했다는 얘기 듣기 어려워요.
그냥 죄만 쭉 고백하고 나가는 거예요.
주일 몇 번 빠졌다는 것, 주님 그것 들으시려고 사제 옆에 서 계신 것 아니죠?
정말 나는 수도 없이 이 얘기를 했어요.
‘제발 후회하지 말고 회개까지 이르러라.’
그래서 아예 고백소에 들어가서도 그런 식으로 고백하라는 말이죠.
‘신부님 제가 이러이러한 죄로 인하여 예수 성심을 거슬렸나이다.’
‘제가 이러이러한 죄 때문에 성모님의 마음을 몇 번 아프게 했습니다.’
‘제가 이러이러한 죄로 인하여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내가 모른 척하고 살았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용서 청합니다.’
그런 고백을 들으면 사제는 눈물이 핑 돌아요.
고백소 안에서 하느님 만나러 왔구나.
그냥 형식적으로 들어와서 ‘주일 몇 번 빠졌어요.’
‘더 없어요?’, ‘신부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뭘 알아서 해 줘요?
‘성사 본 지 얼마 됐어요?’,
‘한 10년 넘었어요. 그런데 기억나는 것이 없어요. 그냥 사는 게 다 죄죠.’
사죄경을 해주기는 해주는데, 과연 이 사람이 사함을 받고 나갔을까 생각이 들죠.
그래도 ‘주님, 지금은 저렇게 고백성사도 엉터리로 보고 나갔지만, 저 사람도 나중에는 주님의 제자로 쓰실 겁니다.
이게 바로 시작입니다.’ 하면서 그 뒤에 강복 한 번 더 주죠.
여러분들 ‘쿠오바디스’ 아시죠?
젊은 로마인 비니시우스가 크리스천 소녀 리기아를 사랑하게 돼요.
그런데 비니시우스는 크리스천이 아닌 로마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소녀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어느 날 그 소녀가 기도회를 간다고 하는 곳을 몰래 쫓아가요.
그게 어느 장소냐? 베드로 사도가 설교하는 곳이었죠.
몰래 베드로의 설교를 뒤에서 들었을 때 이 비니시우스는 속이 막 울렁거리기 시작해요.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죠.
갖고 있던 모든 가치관, 사상, 종교관들이 막 무너지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그는 저 사람이 누군지 모르지만, 저 설교에 순종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해요.
그리고 이제껏 가졌던 모든 생각 습관, 성격 성질까지도 그냥 불타오르는 장작 위에 다 내던지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될 그런 충동을 느껴요.
완전히 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혼으로 충만하게 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을
베드로 설교에서 듣고 느끼는 거야.
그러면서 눈물을 흘려요.
이게 바로 회개예요.
다른 말로 ‘개인 혁명’이라 그래요.
그래서 적은 사람밖에 회개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새로 시작하기 때문에요.
아는 사람들은 ‘이건 내가 놓치기 싫어. 이건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해.’
그렇기에 제대로 된 회개를 못 하는 거지.
그래서 이 비니시우스는 완전히 크리스천으로 바뀌죠.
잘 나가던 로마 장교인데 귀족인데 하찮은 유대 소녀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거죠.
쿠오바디스는 10번을 봐도 참 명화예요.
그래서 아무튼 제자들은 말씀을 전달했고, 그 전달한 내용이 ‘회개하라’ 였습니다.
그런데 그걸로만 끝난 건 아니었어요.
제자들은 하느님의 사랑과 연민도 같이 전했어요.
회개하라고 한 것만이 아니라 병 고침과 마귀를 쫓아내서 육신의 해방을 가져왔어요.
그리스도교는 영혼 구원만을 목적으로 한 종교가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을 목적으로 해요.
그리스도교는 도덕적 파괴로부터 구원하는 것만이 아니고, 육체가 파괴될 때 마음이 파괴될 때 그것으로부터 건져내는 것도
또한 그리스도교의 목적이에요.
그래서 아픈 사람을 예수님은 끊임없이 치유시켰잖아요.
조금도 싫은 내색 안 하고 수도 없이 많은 사람한테 시달리고 얼마나 기운을 다 뺏겼겠어요?
제자들은 도우미 하다가 해만 지면 그냥 코 자, 얼마나 피곤한지.
그래도 예수님은 안 잤잖아요.
산에 올라가서 혼자서 성부께로부터 ‘주님 힘 좀 주세요. 저도 이제 지칩니다.’
성부로부터 힘을 받아, 그 힘을 가지고 다시 벌 떼처럼 몰려드는 환자를 일일이 치유하시죠.
나병 환자한테 가서 직접 가서 손도 다 대주십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치유할 때 도매금으로 치유하신 적 없죠.
한 사람 한 사람 너무너무 섬세하게 치유하셨죠.
왜냐하면 예수님은 얼굴만 보면 이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로 여기 왔는지 아셨죠.
‘아이고 너는 참 먼 데서 왔구나. 죽기 살기로 각오하고 여기까지 기어 왔구나.’
다 아시는 분이죠.
여러분들이 성당에서 성체 영하시죠?
그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다 알고 계세요. 아멘
감곡에 가면 임 가밀로 신부님의 말씀 ‘나는 여러분들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 있죠?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도 여러분들을 그렇게 얘기할 거예요.
‘나는 너희들이 여기 오기 전부터 사랑했단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네 발로 온 것이 아니라 내가 오늘 너를 일로 불러냈단다.’
아멘
불러냈으니까 하실 일이 있는 거예요.
치유의 은혜가 내려가고 어둠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한테는 구마의 은혜를 내려줄 거예요.
비록 이 자리에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하다못해 유튜브를 통해서 지금 전 세계 신자들이 듣고 있는 바로 자기 집에서도
역사는 분명히 일어날 거예요.
십이사도들은 하느님의 메시지도 가져왔고요.
그리고 치유와 구마라고 하는 사랑도 가져왔어요.
이 십이사도들을 대신해서 오늘도 영원히 교회의 일은 계속될 거예요.
넓은 의미로 여러분 다 제자예요. 맞죠?
예수님이 열두 제자한테 맡겼던 그 일은 이 세상 끝나기까지 교회도 신자도 사제에게도
영원히 권리이면서 의무로써 죽을힘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저도 은퇴 신부지만은 열심히 일하잖아요. 놀지 않잖아요.
은퇴한 다음 날부터 유튜브 방송을 계속해서 지금까지도 하고 있죠.
나중에 병이 들어 몸을 못 움직여도 입만 살아있으면 할 거예요.
머리가 망가져 입도 움직이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 그냥 눈만 껌뻑껌뻑해도 알아듣겠지.
그러니 촬영하는 스테파노, 나 병석에 누워서 눈만 깜빡깜빡해도 다 내보내란 말이에요.
오늘 이 아름다운 곳에 불러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요.
그리고 미사 후 2층 경당으로 올라가셔서 잠깐 성인 유해 앞에 조배하고 내려오세요.
성인 유해 앞에서 사진도 찍으실 수 있습니다.
인원이 많아서 음악 피정은 오늘 못 하고, 대신 영성체 후 바로 안수 드리겠습니다.
안수 예절로 끝나는 것이고, 남사스러운데 오늘 제 생일입니다.
사실 신학교 들어간 이후 생일을 잊고 살아요.
그리고 또 언제부턴가는 생일날부터 나이를 하나씩 줄여가기 시작해요.
내가 줄여나가기 시작한 지가 한 20년 되어서, 지금 아직도 40대 중반이에요.
어저께 누가 카톡으로 ‘신부님 100세까지 건강하게 잘 사세요. 아프지 마세요.’ 하길래,
내가 답으로 ‘걱정하지 말아라. 100세 넘어서도 바이크 타고 전국을 돌아다녀 기네스북에 올라갈 거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제발 그렇게 되기를 바란대요.
아무튼 사제도 건강해야만 메시지를 잘 전하죠.
정신이 올바러야만 헛소리를 안 하고 정확히 전달하겠죠.
그리고 또 힘이 있어야만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가 있어요.
그리고 힘이 있어야만 그런 힘 있는 사제의 손을 통해서 치유의 기운이 내려갈 수 있는 거죠.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제자 된 것 하느님한테 감사드리면서,
오늘 중요한 메시지는 전달하는 것이고 내가 만들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머릿속에 있는 걸 마음대로 해석해서 이상한 하느님을 전달하지 말라.
사이비 교주들은 그렇게 하잖아요. 그죠?
자기가 만든 하느님을 가지고서 돈도 뺏고 몸도 뺏고 다 뺏어요.
우리는 정통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올바른 하느님을 제대로 전달하고, 제대로 전달이 됐을 때
비로소 거기서 제대로 전달한 사람한테는 치유의 힘이 나오고 구마의 힘이 같이 나온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아멘
♣2024년 연중 제15주일 (7/14)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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