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몰랐던 놀랍고 감동있는 인천상륙작전 !!!
"인천상륙작전"영화 7월 대개봉
우리는 인천상륙작전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인천상륙작전은 세계3대 상륙작전 중에 하나입니다.
세계3대 상륙작전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갈리폴리 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할 확률은 5000분에 1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영화가 7월에 대개봉합니다.
인천상륙작전 영화가 개봉하기 전 우리가 몰랐던
놀랍고 감동있는 내용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시다.
6.25전쟁 당시에 열세에 몰려있던 우리가 전세를 역전 시켰던
가장 대표적이고도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상륙작전에 얽힌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때는 1950년 6월25일이었습니다.
새벽 4시였습니다.
T-34 탱크 소련제 탱크로 무장한 김일성 부대는
38도 선 전역에서 남침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단 사흘 만에 우리의 서울인 북한군에게 함락당했고
한달만에 낙동강 동쪽을 제외한
전 지역이 북한군의 손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시 미국 트루만 대통령은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16개국 군인들로 구성된 유엔군을 이끌고
부산항으로 입항하였습니다.
당시 유엔군 총 사령관이 맥아더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여기서 전면전을 펼칠 경우에 적의 주력부대가
강하다 보니까 아군에게 피해가 클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생각한 것은 돌아서 은밀하게 위대하게 남해와 서해를 돌아서
인천을 빵하고 쳐 버리고 상륙을 하는 인천상륙작전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맥아더 장군은 왜 인천으로 상륙할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번째 서울하고 가깝습니다.
바로 서울을 수복하면 수도를 회복하는 것이니까
적의 주력부대에게 심리적 타격감을 주게 됩니다.
두번째, 모든 길은 어디로 나 있습니까?
서울입니다.
이 도로를 차단하면 이들의 보급로를 끓어 버리니까
식량과 탄약이 공급이 안 될 것 아닙니까?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미 해군에서는 반대의견을
냅니다.
반대 이유는 첫번째 인천으로 들어가는 수로가 너무 좁습니다.
당시 유엔군 함정이 261척에 7만명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수로가 좁으면 신속하게 그 군함들이 이동할 수 없읍니다.
거기다가 북한군이 물에 떠 있는 지뢰, 즉 지뢰라도 띄워 놓으면
이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엄청나게 큰 수로간만의 차입니다.
우리나라 갯벌은 전 세계 5대 갯벌에 들어갑니다.
바닷물이 들어 왔을 때 밀물 때 신속하게 상륙을 해야 하는데
그 밀물이 차 있는 시간이 2시간 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 북한군이 격렬하게 저항을 하면 상륙할 수 없고
점점 물이 빠집니다.
그러면 약 4키로미터나 되는 엄청난 갯벌이 앞에 펼쳐지게 되는데
그 질퍽질퍽한 땅에 어떻게 군인들과 물자를 내려놓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만이 승리를 위한 길임을 확신하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확률은 5000분의 1이었습니다.
정말 황당한 숫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 장군은 인천을 고집하는데
그 이유는 아리러니컬하게도 확률이 5000분의 1밖에 안되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왜?
적이 가장 방심하는 지역이 아니냐는 거였습니다.
인천상륙작전 날을 잡았습니다.
밀물이 가장 많이 들어와서 인천 항구에 수심이 가장 깊을 때
날짜를 계산하였습니다.
9월15일, 10월11일, 11월3일 단 3일뿐이었습니다.
그런데 10월이나 11월로 가면 아무래도 지금 전략으로 다급하고,
겨울이 가까워 오기 때문에 기후적으로 좋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은밀하게 9월15일 은밀하게 진행하는 야심한 시간 밤
12시로 정한 것이었습니다.
상륙작전 시간은 단 2시간뿐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작전을 어떻게 성공되었을까요?
맥아더는 두 가지의 미션을 던지게 됩니다.
첫번째. 성동격서(聲東擊西)입니다.
동쪽에서 소리를 쳐서 적군의 시선을 쏠리게 한 다음에
적의 허점이 되는 서쪽을 쳐 버린다는 것입니다.
당시 맥아더 장군은 마치 상륙할 것처럼
거짓정보를 적에게 흘리게 하였습니다.
즉 평양서쪽, 남포로 상륙한다는 것이죠
원산,주문진,울진 등 정신없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어디로 상륙할지 모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게 하기 위하여 폭격을 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예 병력을 상륙시키기까지도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장사상륙작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상륙한지 아십니까?
772명의 중고등학생들이 뽑혀갑니다.
총을 쏘는 훈련도 약 보름 밖에 받지 못한 10대 소년들이
차출돼서 문산호를 타고 인천상륙직전에 하필이면 이 때
태풍을 만나서 배는 좌초되었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10대 소년들은 육지로 헤엄쳐 갑니다.
그들은 용감하게 폭풍우를 헤쳐가면서 나아가게 됩니다.
당시 포항과 영천 방면으로 잇는 국도를 점검하고 적의 북상을 저지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여기 있는 동쪽으로 쏠리게 된 것이죠
안타깝게도 구조선이 출발했지만, 우리 소년병들은 그곳에서 교전하다가
대부분 전사하게 됩니다.
두번째 맥아더의 미션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X-RAY작전입니다.
X-RAY작전은 상륙작전을 원활하기 위하여
이때 구성된 첩보부대가 해군 첩보부대가 되겠습니다.
이 해군첩보부대는 은밀히 지역으로 잠입을 합니다.
적의 해안포의 위치, 병력규모, 그리고 수로에 배치되어 있는 기뢰의
위치와 제거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이 때 하나의 부대 "켈로부대"라고 있었습니다.
특수부대입니다.
그들은 인천 앞바다에 있는 팔미도 섬으로 상륙해서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 끝에 등대를 점령하였습니다.
상륙 당시 불빛을 켬으로 당시 그들이 켰던 불빛은
전쟁 승리의 불빛이었고 미래였습니다.
이렇게 작전은 성공하였습니다.
서울을 9월28일 수복하고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였습니다.
주력부대는 오합지졸이 되었습니다.
결국 압록강과 두만강 지점까지 밀고 올라가게 된 것이
바로 여기 있는 인천상륙작전의 결과가 되었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대부분 맥아더 장군, 유엔군이라고 답을 하실겁니다.
하지만 그들이 승리를 역사에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이름 모를 학생들, 그리고 지역주민,그리고
우리 국군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지켜 준 바로 그 당시의 우리 선배님들에게 감사합니다.
오늘 6월25일에 6.25를 생각하면서 공산화를 막기 위하여
즉각즉으로 미군과유엔군을 보낸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
대한민국이 어디 붙었는지도 모를 이 한반도에서
피를 흘린 수많은 16개국 유엔군의 젊은 군인들,
인천상륙 작전을 생각해 낸 맥아더 장군,
어린 학도병들,
해군첩보부대,
등대를 점령한 켈로 부대,
자유대한민국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수한 이승만 대통령,
부산에서 마지막 남은 낙동간 방어선 앞을 바라보면서
모여 합심하여 부르짖은 목사님들의 울부짖는 기도 등이 있었습니다.
낙동강 방어선은 6.25전쟁의 최남측 방어선이었습니다.
미군을 중심으로 대한민국국군, 영국군, 유엔군 등이 이 방어선을
지켜 내기 위하여 한 달 가량 혈투를 벌렸습니다.
이 방어선에서 끝까지 버팀으로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대한민국에 자유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http://blog.naver.com/sano153
쌍문동산소망교회 김 목사
첫댓글 예. 쉽지 않았던 상륙 작전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이런 스토리가 있었군요.
주여! 어렵게 지켜진 이 나라가 끝까지 잘 지켜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