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83년12월 14일
소련, 세계최대 군용수송기 개발 1983년 처음 비행한 An-124는 4개의 터보팬 엔진을 사용해 150t의 화물을 싣고 1만5700㎞를 날아갈 수 있다.
동급인 미 공군 C-5A
대형 수송기와 유사하나 조종계통 등
일부 분야에서 앞선 기술이 적용됐다.
비포장 활주로에서도 운용할
수 있으며 전차 수송도 가능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의 군용물자 수송도 맡고 있다.
An-124를 개량한 항공기는 An-225다.
2004년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기로 기
네스북에 기록된 An-225의 날개폭은
약 88m, 이륙 가능한 최대 중량은 640
t으로 로터 등을 접거나 분리하면 헬기도 수송할 수 있다.
후방 램프가 있어 일반적인
군 수송기로도 사용할 수 있다.
적재능력은 미 공군 전략수송기 C-5A
의 5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미국 등 서방국가들도 중동지역에 방력과 장비를 파견할 때 An-225를 종종 사용한다.
6개의 엔진과 32개의 바퀴를 장착하며 4000㎞ 이동 시 급유를 받는 등 운영
유지비가 엄청나 비행모습을 보기가 매우 힘들다.
지난달 16일 호주 퍼스 국제공항에
이 비행기가 도착하자 비행기를 보려는 인파가 몰리면서 교통정체가 빚어지기도 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높은 비행기다
보니 영화에서도 종종 등장한다.
007 시리즈 중 ‘어나더데이’와
지구 멸망을 그린 영화 ‘2012’에서
주인공을 태우고 비행한바 있다.
An-225는 1980년대 소련 우주왕복선 ‘부란’ 운송을 위해 1대가 제작됐다.
그러나 소련 붕괴로 부란
계획이 중지되자 운행을 정지하고
우크라이나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2001년부터
안토노프와 영국 에어포일사가
공동으로 화물운송에 쓰고 있다
▶2010년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총리
재신임 반대 시위 발발
▶2010년거가대로 일반에 공개
2010년 12월 13일 오후 거가대로의 개통식이 열린 후 14일 오전 6시부터 거가대로가 일반에 공개되었다. 거가대로의 개통에 따라 부산~거제 간 거리는 기존 140㎞에서 60㎞로 단축되었으며, 소요 시간도 2~3시간에서 40분대로 단축되었다.
거가대로의 핵심구간인 거가대교는 부산쪽 접속도로인 이 ‘거가대로 가덕구간’(8㎞)과 침매터널인 ‘가덕해저터널’(3.7㎞), 사장교 구간인 ‘거가대교’(4.5㎞), 거제쪽 접속도로인 ‘거가대로 거제구간’(16㎞) 등으로 나뉜다. 이중 거가대교의 침매(沈埋)터널은 국내에선 처음 시도되는 방식으로, 길이 180m·높이 9.97m·너비 26.5m·무게 4만5000~5만t의 속이 빈 콘크리트 덩어리인 함체 18개를 바다속에서 연결하여 만든 해저도로이다.
거가대로의 개통은 녹산·신호공단 등 서부산권 개발과 거제 관광·조선 산업의 연계체계 구축 등 부산·경남 지역의 경제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할 전망이다. 개별적으로 부산은 거제와 통영 시민의 유입으로 유통업계 고객·교육수요 증대와 부동산 가격 상승 등의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거제의 경우 부산지역 관광객의 유입이 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거가대교의 하루 예상 통행량은 3만4700여대이며, 통행 요금은 편도 1만원이다. 한편 거가대로가 일반에 공개된 첫날인 14일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부산에서 거제방향으로 1만6000여대 이상의 차량이 몰려 정채를 빚었으나, 2010년 12월 말까지 무료이용에 따른 일시적 현상으로 판단된다.
▶2008년‘1조원대 피해’ 12개
다단계업체 적발
▶2002년여중생 사망 추모 전국
60여곳에서 촛불집회
▶1995년보스니아 평화협정 서명
▶1993년국방부,
프랑스 무기상에 55억 사기 당해
▶1993년세계최대인
중국 삼협댐 공사 시작
▶1992년미국 로스엔젤레스
흑인폭동으로 비상경계령 선포
정의
흑인 로드니 킹(Rodney Glen King)을 집단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1992년 4월29일 재판에서 무죄로 풀려난 것을 계기로 촉발된 인종폭동.
개설
LA폭동은 흑인인 로드니 킹을 백인 경찰들이 집단 구타한 사건이 도화선이었지만 폭동이 발생하자 흑인 시위대가 한인타운으로 몰려가 약탈과 방화를 일삼으면서 한인 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사건이다.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당시 미국 사법당국과 지역 언론들은 무자비한 경찰과 빈부격차, 인종차별 등 미국 사회에 잠복한 근본문제보다는 한흑(韓黑)갈등에 초점을 맞춤으로서 한인들이 입은 정신적 상처는 물질적 피해 못지않게 컸다는 점이다.
4월 29일 시작하여 5월 3일에야 진정국면으로 들어간 LA폭동은 사망자 53명, 부상자 4천명이라는 인명피해와 함께 7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피해(이중 약 40%가 한인업소들이 입은 피해)를 남기며 미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보여준 대표적 폭동으로 기억되고 있다.
역사적, 사회적 배경
LA폭동의 최대 피해자가 한인 이민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문제를 한흑갈등이라는 측면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한인 이민자들은 정착 초기 미국 노동시장에서의 불리함을 자영업과 근면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흑인 및 히스패닉과 같은 소수민족들과의 갈등을 빚었다. 당시 미국 사회에는 인종적 편견과 흑백갈등이 만연해 있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로드니 킹 사건은 흑인사회를 자극함으로서 인종간의 갈등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불행하게도 로드니 킹 구타사건이 발발한 1991년의 비슷한 시점에 한인마켓에서 흑인소녀를 한인주인이 살해 한 ‘두순자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 두 사건은 1992년 폭동이 일어날 시점까지 언론의 집중조명을 받았다. 그런데 폭동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언론은 1년 전인 1991년 3월 16일 흑인 빈민지역인 남부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이른바 ‘두순자 사건’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갈등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다시 말해 이는 흑인들의 공격의 화살을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도록 작용하였던 것이다. 특히 미국 내 KABC방송은 한인들을 한흑갈등의 피해자가 아닌 원인제공자인 것처럼 보도했고, 이 밖의 여러 방송들도 흑인 소녀 나타샤 할린즈가 두순자에게 총을 맞는 장면을 여러 차례 방영했다.
이에 더하여 코리아타운이 백인 거주지와 흑인밀집지역 사이에 끼어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이 역시 백인들을 향한 흑인들의 분노를 한인들에게 쉽게 돌리도록 작용했다. 즉 백인 거주지와 흑인 거주지 사이에 위치한 한인 타운은 인종폭동의 피해를 흡수할 완충지대로 이용될 여지를 안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폭동이 진행되는 동안 부유한 백인거주지역인 웨스트우드(Westwood))나 비벌리힐스(Beverly Hills)에는 경찰력이 일찍 배치되었으나, 정작 흑인가에 가까운 한인타운에서는 경찰들이 초기진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는 의심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치안을 책임진 당국은 흑인들이 그들의 분노와 갈등을 한인들을 향해 표출하도록 그대로 방치한 셈이 되었다.
경과
LA폭동의 주요 경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991년 3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몇 명의 교통경찰관이 과속운전을 한 흑인청년 로드니 킹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이 뉴스에 방영되었다.
○ 흑인인권이 심각히 침해되었다고 분개하는 가운데, 1년 후인 1992년 전국적인 시선이 집중된 상태에서 열린 재판에서 구속된 경찰관들에게 12명의 배심원이 무죄평결을 내렸다. 이러한 판결에 분개한 빈민층의 흑인사회(라틴계도 상당수 포함)가 폭발, 시위로 번졌고 급기야는 폭동으로 비화되었다.
○ 이 때가 1992년 4월 29일 오후 3시였고 평결이 내려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경청하던 LA 남부지역의 흑인들이 거리를 뛰쳐나와 마침 노르만디와 플로렌스 교차로를 지나가는 백인 트럭운전자를 끌어내려 구타하기 시작했다.
○ 헬리콥터에서 생중계하는 TV를 통해 이 장면을 본 흑인들이 신호를 받은 양 일제히 주변의 주유소와 가게를 약탈하기 시작하여, 순식간에 LA 한인타운을 비롯한 도시의 대부분이 폭도들에게 약탈당하고 불타는 폭동이 일어났고, 폭동은 5월 4일에 가서야 완전히 진정되었다.
결과
LA폭동은 한인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안겼다. 약 2,300개의 한인 업소가 약탈당했거나 전소되어 재산 피해액이 4억 달러에 달했으나, 피해를 당한 한인들의 대부분은 지방정부나 연방정부로부터 응분의 보상을 받지 못했다.
이를 통하여 1.5세와 2세들은 소수민족으로서 그들의 부모세대가 겪는 고통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였고, 언어문제와 정치력 부재 때문에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부모세대를 도울 수 있는 젊은 세대를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폭동 직후 5월1일 코리아타운 중심부에 주로 젊은 세대 중심으로 1,000명이 자발적으로 모여 평화집회가 열었고, 그 다음날인 5월2일에는 1.5세와 2세들이 평화대행진을 주도하고 1세들이 적극 호응함으로써 하루 만에 무려 10만 명의 대인파가 코리아타운 한 복판에 있는 아드모어(Ardmore) 공원에 집결하는 기적을 연출하였다.
의의와 평가
LA폭동은 재미한인들의 권익은 한인 스스로가 보호해야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미주동포사회에서도 소수민족운동의 성격을 띤 권익운동과 정치력 신장운동이 점차 본격화 되었다. 특히 당시 부모 1세대들이 흑인들에게 당하고도 주류사회에 대하여 강력하게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본 1.5세와 2세들이 한인권익운동에 적극 나서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90년대 이후 한인 1.5세와 2세들이 중심이 된 권익운동, 민권운동, 소수민족 연대운동이 한인사회의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1991년이집트 사파가항 부근에서
여객선 좌초. 4백60여명 사망
▶1989년프로야구 MBC 청룡야구단,
럭키금성(LG) 그룹에 매각
▶1989년소련 반체제 물리학자
사하로프 사망
사하로프 [Sakharov, Andrei Dimitrievich, 1921.5.21~1989.12.14]
소련의 수소폭탄을 개발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나 그후 핵무기의 파괴력에 가슴아파하며 반체제운동과 인권운동에 평생을 바친 사하로프 박사가 1989년 12월 14일 사망했다.
1921년 5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사하로프는 모스크바 국립대에서 26세때 박사학위를 받을 만큼 비범했다. 1948년 핵무기를 다루는 연구팀에 가담, 수소폭탄개발의 핵심역할을 했다. 이 공로로 그는 젊은 나이였던 32세때 소련과학아카데미 사상 최연소 정회원에 선출됐으며, 스탈린상을 비롯해 소련국민의 최고영예인 노동훈장을 3개씩이나 받기도 했다. 미국과의 핵무기 개발경쟁에서 뒤져 있던 소련이 1953년 수소폭탄을 개발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그는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며 국가의 영웅적 존재가 됐다.
그러나 핵무기의 윤리성에 회의를 느끼게 된 그는 소련이 핵무기 개발을 중지할 것을 주장하며 반체제운동에 가담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으로 불린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운동이 소련군에 의해 무력탄압되자 사하로프는 반체제발언의 강도를 더욱 높여 소련정부를 비판해왔다. 소련당국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인권운동을 전개한 그는 국제적 인권운동가로 알려졌으며 1975년에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정부의 박해로 출국하지 못했다.
그후 1980년 모스크바에서 추방돼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채 고리키시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그가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온 것은 1986년 고르바초프의 배려에 의해서였다. 1989년 4월 인민대표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어서도 이날 사망할 때까지 체제내 개혁세력으로서의 활동을 계속해왔다.
▶1988년삼성전자 256K EEP롬 개발
▶1984년스페인 시인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사망
▶1983년소련, 세계최대 군용수송기 개발
▶1981년이스라엘, 골란고원 합병
▶1979년유네스코서 경주를 세계 10대
유적도시로 지정
▶1977년이집트-미국-유엔-이스라엘,
중동평화회의 카이로서 개최
▶1973년`외교관 등 국제적 보호인물에
. 대한 범죄 및 처벌에 관한 협약` 채택
▶1969년국제통화기구(IMF), 한국을
.. 특별인출권(SDR) 통화공여국으로 지정
▶1967년스탠퍼드 대학 콘버그-굴리안,
. DNA 인공합성에 성공
▶1961년필리핀 대통령에 마카파 칼 당선
▶1960년이디오피아에 쿠데타 발생
▶1960년유엔총회 아시아-아프리카
43개국의 식민지해방선언안 가결
▶1959년영국-그리스-터키, 키프로스
. 독립협정
▶1959년재일동포 제1차 북송
▶1953년한미합동경제위원회협정 조인
▶1950년유엔, 한국정전위원단 설치 결의
▶1949년애치슨, 대만 불간섭방침 언명
▶1946년유엔총회 군축대헌장 결의
▶1946년유엔본부 뉴욕에 설치 결정
▶1939년`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개봉
▶1939년국제연맹, 핀란드 침공 이유로
소련 제명
▶1937년북경에 중화민국임시정부 수립
▶1926년김구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
▶1918년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 수립
▶1911년아문센, 인류 최초로 남극점 도달
아문센(Amundsen, Roald), 인류 최초로 남극점 도달
로알드 아문센은 선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북극탐험을 꿈꾸었다. 오슬로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아문센은 극지 탐험에 대한 열망으로 항해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1903년부터 1906년까지 대서양에서 북극해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북서항로 항해에 사상 처음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1909년 4월 6일 미국의 로버트 피어리가 북극점에 도달하자, 눈길을 돌려 남극 탐험에 나섰다.
당시 남극점에 먼저 도달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문센이 이끄는 노르웨이 탐험대와 영국 해군 소속 로버트 스코트의 영국 탐험대가 그 경쟁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은 영하 40도의 추위와 초속 30미터의 강풍을 견뎌 내며 한 발 한 발 극점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1911년 12월 14일 마침내 아문센이 어떤 생명체의 발길도 닿지 않았던 곳, 남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1911년 10월 19일, 아문센은 웨일즈 만의 기지에서 에스키모 차림을 한 네 부하와 개들이 끄는 설매를 이끌고 남극점을 향해 출발했다. 출발 당시 52마리의 개를 데리고 떠났는데 돌아올 때는 썰매를 끌 12마리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죽였다. 동력원은 그 자리에서 식량으로 변했다. 이는 애초에 식량무게를 줄이기 위한 것이었고 아문센이 성공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스코트도 한발 늦게 남극점에 도착했고, 귀환 도중 조난을 당해 차가운 빙하 위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세계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한 아문센은 다시 북극으로 관심을 돌려 비행선을 타고 북극해를 횡단할 계획을 세웠다. 1926년 5월 11일 이탈리아의 노빌레, 미국의 엘즈워스와 함께 세 나라의 공동 탐험대가 비행선 노르게 호를 타고 킹즈 만을 출발, 다음 날 1시 25분 북극점에 도달하고 비행을 계속해 알래스카에 도착, 북극해 횡단 비행에 성공했다. 그 2년 후인 1928년 5월, 아문센과 함께 북극횡단 비행을 했던 노빌레가 다시 북극 탐험에 나섰다가 행방 불명이 됐다. 아문센이 그를 구출하기 위해 수색에 나섰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조난사했다.
남극탐험의 역사.
남극점 최초 도달을 위한 '아문젠과 스콧'의 대결!! 결정적 승리 요인은?
https://m.blog.naver.com/kordipr/221017034869
▶1906년독일, 잠수함 U보트 1호 진수
▶1900년막스 플랑크, 양자론 발표
▶1882년독일인 묄렌도르프
외교고문으로 초빙
▶1825년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데카브리스트의 난` 발생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1825년 12월 14일, 페테르부르크의 원로원 광장에서 일어난 청년장교들의 반란. 카 코리만 작. 1830년대
나폴레옹 전쟁 후 알렉산드르 1세는 전 육군장관 아락체예프에게 국내정치를 일임하고 국제정치에 몰두하면서 신비주의에 탐닉한다. 아락체예프는 자유주의자들을 물리치고 반동정치로 일관하여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나폴레옹 전쟁 때 유럽에 출진하여 자유의 공기를 흠뻑 쐬고 돌아온 청년장교 등 일부 젊은 귀족들은 이 같은 반동정치를 그대로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여기서 입헌정치와 농노제 폐지를 목표로 하는 데카브리스트(12월 당원) 운동이 생겨난다. 애국 청년귀족들은 프리메이슨 결사의 영향을 받아 비밀결사를 만들었다.
1816년 니키타 무라비요프, 트루베츠코이 등의 근위대 장교들이 최초의 비밀결사 '구제동맹'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한 장교들로서 전쟁 중에 농민출신의 병사들과 접촉하면서 비참한 농촌실정을 알았고, 유럽 원정 중에 러시아보다 훨씬 앞선 서유럽 사회를 보면서 뒤떨어진 조국을 '구제'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투철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페스텔도 곧 이에 가담한다.
2년 후인 1818년에 구제동맹은 '복지동맹'으로 발전했다. 이 결사에는 2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들은 농노제와 전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장래의 러시아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할 것인가 공화제를 시행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갈라졌다. 또한 무장봉기의 채택 여부, 봉기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서도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양한 견해들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당국의 스파이에게 결사에 관한 정보가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1821년 그들은 동맹을 해산하고 제2군관구가 있는 남러시아 툴친을 본거지로 하는 '남방결사'와 페테르부르크를 본거지로 하는 '북방결사'로 갈라졌다.
공화주의자들이 많았던 남방결사는 페스텔 대령의 지도하에 장래 러시아 공화국이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루스카야 프라브다〉를 결사의 강령으로 채택했다. 페스텔 자신이 기초한 것으로써, 농노해방, 신분제 폐지, 공화제 등이 그 근간을 이루었다. 뒤에 이 결사에 슬라브 민족들의 연방을 목표로 하는 '통일 슬라브 결사'와 '폴란드 애국 동맹'이 합류한다.
북방결사에서는 니키타 무라비요프가 입헌군주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초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1823년에 들어서면서 북방결사에도 시인 릴레예프와 베스투제프 형제 등, 공화주의자들이 가입하여 의견이 갈라진다.
1825년 11월 19일 알렉산드르 1세가 흑해 연안의 요양지 타간로크에서 급사했다(일설에는 신비주의에 빠져 은둔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18세기 말 파벨 치세에 제정된 제위 계승법에 따르면, 바로 아래 동생 콘스탄틴이 제위를 계승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전에 가톨릭 교도인 폴란드 백작의 딸과 재혼한 뒤 제위 포기 의사를 비쳐 형 알렉산드르의 승인을 받은 바 있었다. 따라서 제위는 다음 동생 니콜라이가 계승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이 중대한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 당사자인 니콜라이도 몰랐고, 국가평의회도, 장관들도 몰랐다. 임종에 입회한 측근들도 아무 말을 듣지 못했다.
이로 인해 혼란이 일어났다. 국민들은 콘스탄틴의 즉위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원로원과 군대는 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바르샤바에 있던 콘스탄틴이 제위 포기 의사를 거듭 확인하고 1822년에 쓴 알렉산드르의 비밀성명이 공표된 후 니콜라이가 제위를 수락하기까지 약 3주일 동안, 황제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1826년 봄에 거사할 계획이었던 모의자들은 이 혼란을 틈타 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계획을 숙의했다. 현재 동원 가능한 3개 연대가 각기 다른 한 연대씩을 끌어들여 모두 6개 연대가 반란을 일으키면 남은 군대들은 압도되어 행동에 나서지 못할 것이다. 그 뒤 공격에 나서 니콜라이를 체포하고 정부기관을 장악한 다음, 니콜라이에게 헌법제정의회를 소집케 하고 그 사이에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다른 의견들이 속출하여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한 장교의 배신으로 거사계획이 니콜라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주모자들은 다급해졌다.
시인 릴레예프는 거사의 지도자로 뽑힌 트루베츠코이 공에게 지금 곧바로 행동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차피 실패한 것이라면 앉아서 당하느니 무기를 들고 나가 싸우다가 죽자."
옆에 있던 동료가 릴레예프를 얼싸안으며 외쳤다.
"우린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광스런 죽음이다."
마침내 즉각 봉기를 하기로 결정이 났다.
12월 14일 니콜라이 1세에 대한 충성 선서식 날, 베스투제프 형제는 근위대 병사들에게 권력을 찬탈한 니콜라이에 맞서 콘스탄틴을 지키자고 호소하여, 약 3,000의 병사를 이끌고 원로원 광장으로 왔다. 소수의 다른 군대와 민간인이 합류했다. 이들은 전제정치 타도와 농노제 폐지를 주장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자 했다.
그러나 최고 지도자 트루베츠코이 공이 나타나지 않았다. 지도자가 없는 반란군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선 채로 광장을 지켰다. 몇 배에 달하는 정부군이 광장 주위를 포위했다. 양군은 몇 시간 동안 그대로 서서 대치했다.
새 황제는 자신의 통치 첫날을 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대주교를 보내 반란군을 설득했다. 그러나 효과가 없었다. 진무에 나선 밀로라도비치 장군은 민간인 카호프스키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겨울의 짧은 낮은 벌써 저물고 있었다. 이윽고 니콜라이가 발포명령을 내렸다. 한 시간 만에 광장은 깨끗이 정리됐다.
남러시아에서도 페스텔 등 지도자가 체포된 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와 류민의 지도하에 봉기가 일어났으나 곧 진압됐다.
니콜라이는 반란 관여자 약 600명을 체포하여, 그중 페스텔, 릴레예프, 세르게이 무라비요프, 류민, 카호프스키, 이렇게 5명을 교수형에 처하고 120여 명을 시베리아에 유형 보냈다.
이로써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12월(러시아어로 '데카브리')에 일어났다고 해서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고 불린 이 운동에는 엘리트 귀족청년이 대거 참여했다. 두 개의 헌법 초안에서도 보이듯이 그들은 통치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민중을 무시했다. 거사에 민중을 끌어들이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신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뜻을 이루려 했다. 그러나 하급장교가 주축을 이루던 이들은 군대를 확실하게 장악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 데카브리스트 운동은 '고립된 귀족청년들의 무모한 항의'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그러나, 헛수고를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농노제를 폐지하고 차르의 전제체제를 타도하고자 했다. 공화제 또는 입헌군주제가 전제체제를 대체해야 했다. 이런 뜻에서 데카브리스트 운동은 러시아 최초의 혁명운동이었다. 이들의 봉기와 처형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일생을 전제정치에 대한 투쟁에 바쳤던 러시아 혁명운동의 선구자 게르첸은 항상 '다섯 명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순교의 죽음으로 찬양했다. 또한 그는 정치적 계획을 가지고 일으킨 이 첫 번째 혁명운동의 의의와 도덕성을 이렇게 지적했다.
"이론은 확신을 불러일으키고 본보기는 행동을 불러일으킨다."
데카브리스트들은 귀족의 특권과 보장받은 입신출세의 길을 버리고 조국 러시아와 인민을 위해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데카브리스트 운동은 이후, 푸시킨과 네크라소프의 시에 등장하여 널리 애송되고, 러시아의 뜻 있는 지식인들 사이에 본받아야 할 귀감으로 깊이 각인되면서 러시아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친다.
▶1824년프랑스의 벽화가 퓌비 드 샤반
출생
▶1812년1858년 인도의 초대 부왕
영국의 정치가 존 캐닝 출생
▶1799년‘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 사망
▶1791년아일랜드의 시인 찰스 울프 출생
▶1788년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3세 사망
▶1739년중농주의 학파 이론의 프랑스
경제학자 피에르 사무엘 뒤퐁 출생
▶1730년청나일강 원류에 도달한
스코틀랜드 탐험가 짐 브루스 출생
▶1636년인조, 남한산성으로 피난
▶1503년르네상스 시대 최고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 출생
르네상스 시대 최고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라틴어: Nostradamus) 프랑스 프로방스 에서 출생( ~ 1566년 7월 2일 프랑스 파리 에서사망)프랑스의 천문학자, 의사, 예언가이다. 노스트라다무스는 라틴어
이름이고 ‘성모(聖母)의 대변자’라는 뜻이며 본명은 미셸 드 노스트르담 (프랑스어: Michel de Nostredame)이다. 1555년에 처음 출판된, 운을 맞춘 4행시를 백 편 단위(Centuries)로 모은 《예언 집》
(Les Propheties)으로 유명하다.
1990년대 후반, 적지 않은 사람들이 99년 7월이 다가오면서 불안에 떨었다. 이때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이 실현될 것이라는 공포 때문이었다. 다행히 예언은 빗나갔다. 1503년 오늘은 바로 이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가 태어난 날이다.
역사 속에는 많은 점술가·예언가가 있지만 노스트라다무스만큼 많은 예언을 정확하게 한 사람은 없었다. 유능하고 두뇌가 비상한 의사였던 그는 다른 분야에서도 다재다능했지만 앞날을 예측하는 능력에서 비상한 면모를 드러냈다.
훗날 교황이 되는 젊은 수도승 앞에 무릎을 굽히고 “당신이 미래의 교황”이라며 예를 다했다는 일화는 작은 에피소드에 불과할 정도다. 그가 시의 형태로 남긴 예언들은 난해한 비유와 상징으로 돼 있어 해석이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놀라울 정도로 많은 적중률을 보였다는 데에는 많은 이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프랑스혁명 발발,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출현, 자동차 발명, 케네디 암살, 그리고 스페인 내전과 히로시마(廣島)·나가사키(長崎)에의 원자 폭탄 투하까지.
제3차 세계대전의 예언이 빗나가면서 잊혀지는 듯했던 그의 예언은 그러나 금세기 들어 되살아나고 있다. 2001년 미국 뉴욕의 9·11 테러나 최근 ‘카트리나’ 참사가 그의 종말론적 예언의 실현이 아니냐는 것이다.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절에는 신비스러운 예언에 기대게 되는 법. 세상이 평화로워지지 않는 한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사후인 1568년에 완간된 예언시 [백시선]의 속표지. 이 난해한 예언시는 오늘날까지 숱한 해석과 논란을 낳고 있다.
일각에서는 노스트라다무스의 [백시선]에 나폴레옹(왼쪽)과 히틀러(가운데), 그리고 9/11 테러(오른쪽)가 정확히 예언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사전이 아니라 사후에야 인지된 것이며, 그나마도 억지로 끼워 맞춘 내용에 불과하다. 가령 히틀러에 관한 예언 가운데 상당수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나폴레옹에 관한 예언으로 공인된 바 있었다. 이처럼 “사후약방문”과 “견강부회”의 해석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시는 갈수록 신빙성이 떨어진다.
https://m.terms.naver.com/entry.nhn?docId=3573574&cid=59014&categoryId=59014
https://youtu.be/bhuLTTtvntA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