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지가 앉았다. 벌써 한 달째 귓불에 진물이 나오고 딱지가 생기고 뜯어내면 도로 진물이 나오고 딱지가 생기고 한다. 수그러들 줄을 모르는 딱지에는 은근한 금속성이 배어 있다. 순금이 아니었을까? 밑지는 장사지만 어쩔 수가 없다며 안타까이 눈살을 찌푸리던 장사치. 그녀에게 우리는 감쪽같이 속았는지도 모른다. 어딜 가도 이렇게 싼 가격에 이런 좋은 물건 구입하기는 힘들 거예요. 그와 함께 고른 귀고리를 카운터 앞에 디밀자 주인여자는 순금이 분명하다고 묻지도 않은 말에 호들갑을 떨었었다.
한 달 전, 피에 섞여서 처음 진물이 나오던 날 벌써 귀고리를 빼내고 헌 자리에 소독을 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나는 소독은커녕 귀고리를 빼지 않았다. 되레 귀고리를 살짝 들어내고 진물이 굳어 생긴 껍질을 번번이 뜯어내고 있다. 진물이 굳지 않으면 상처가 아물 수 없음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나는 딱지가 앉아있는 걸 잠시도 배겨내지 못한다.
그러다가 멈칫할 때도 있다. 사흘만 만지지 않고 두면 나을 거야. 아니, 이틀만이라도. 마음을 다잡고 책장을 넘기면서, 핸드폰 문자를 보내면서, 자판기에 커피를 누를까 율무차를 누를까 손으로 저울질도 하면서 오른 손이 미처 귓불로 올라갈 새를 주지 않으려고 부산한 척을 해본다. 어떤 것도 도무지 소용은 없지만……. 이건 마치 중독과 같다. 손끝이 저리고 근질거려서 어느새 내 오른 손이 머리카락을 헤집고 귓불에 가 있고 말았다. 긴장이 되면 머리를 배배 꼬거나 입술을 물어뜯는 소녀의 제어할 수 없는 습관처럼 내 오른손도 그랬다. 때문에 상처는 내내 아물지 못했다. 점점 더 곪아 가는 자리에 아픔도 따라 나날이 더해가고 있다.
오늘은 내 검지에 와 걸리는 딱지가 쉽게 뜯기지 않는다. 어제 저녁 샤워를 마치고 새로 흐른 진물이 금세 단단히도 굳었다. 눈을 감고 손톱 끝을 예민하게 세운다. 귓바퀴 밑에 달린 볼록한 귓불을 더듬는다. 딱지가 펼쳐 앉은 마지막을 만나자 경계선을 긁어 세운다. 나는 조만간 다시 흐를 진물을 느끼려고 신경이 곤두서 있다. 오른손 검지 손톱 끝이 아닌 모든 감각은 순간 멈춰 선 채로. 예사롭지 않은 아픔이 느껴진다. 구멍을 교묘히 덮은 껍질을 벗겨내려 힘을 줄수록 코끝이 시큰해진다. 끈적한 진물이 흐른다. 구멍에서 걸쭉한 눈물이 꾸역꾸역 흐르기 시작한다.
'초특가 세일'이라고 크게 써 붙인 귀금속 가게 안으로 그가 나를 잡아당겼었다. 생일 선물이야. 조금만 참으면 될 거야. 수한아, 이전부터 죽 선물하고 싶었어……. 내 귀에 반짝이는 별이나 하트를 달아주고 싶다는 그에게 나는 어설프게라도 반항을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싫어. 끔찍해. 사람의 몸에 어쩜 구멍을 뚫어? 소름 끼쳐……. 결국 소리가 되지 못한 채 속에서만 웅얼대던 나의 두려움. 동조를 원하는 그의 눈빛이 간절해질수록 숨이 가빠졌다. 나지막하던 심장 소리는 조금씩 쿵쾅대다 신경질적으로 높아지고 있었다.
피어싱을 즐기던 같은 과 동기를 기억했다. 주인여자가 익숙한 솜씨로 내 오른 쪽 귓불을 몇 번 비벼 주물럭거렸고 이내 얼얼해지자 그 녀석 하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살을 뚫는 쾌감은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 코, 눈썹, 유두나 음부까지 위험 정도에 따라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만 간단한 것은 내가 직접 시술해. 이것 봐. 내 첫 작품이야. 녀석이 입술을 동그랗게 벌리자 깊은 어둠의 동굴로 내 두 눈이 뽑혀질 듯 빨려들었다. 통과해야 하는 살이 두꺼워서 혀는 사선으로 뚫는 게 좋아. 혓바늘 돋은 사이로 시술 바늘이 살을 뚫고 들어가 아래쪽으로 나오는 거지. 사선이니까 직선보다 더 긴 터널을 지나치는 셈이야. 몇 초의 순간이지만 시술 바늘이 살을 빠져 나올 때 아픔이 더욱 질겨져. 다른 부위에 비해 통증이 심한 것도 아닌데 내가 많이 아팠던 건 아마 이 사선 때문이었나 봐. 자, 봐. 나는 눈을 떼지 못하고 녀석이 말하는 사선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녀석의 검은 동굴 가운데 연분홍 두툼한 혓바닥 가운데 상아 뼈 모양의 흰색 피어싱 가운데 보랏빛 운석이 단단히 박혀 있었다. 그 팔각형의 운석은 아픔이 빚어낸 녀석의 쾌감을 대신해 처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 날 오래 전부터 이어온 두려움 때문에 왼쪽 귀를 마저 뚫지 못했다. 귀를 주무르던 주인여자의 동작이 날쌔게 오른 쪽 귀에 구멍을 만들던 순간, 전설처럼 묻어둔 슬픔이 제멋대로 뛰어댔다. 눈물이 우박처럼 쏟아져서 그도 더 이상 내게 뭐라 하지 못하고 뒷걸음을 쳤다. 조금씩 더 큰 피어싱을 끼워가며 구멍을 늘리던 녀석. 뚫는 것보다 구멍의 크기를 늘리는 것이 훨씬 더 아프다며 왜 그 짓을 멈추지 못하는지 나는 녀석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로 인해 사선으로 뚫려 내 안에 도사린 구멍이 소용돌이를 치게 될까봐, 그래서 나를 갈아 먹을까봐 무서웠기에. 굳이 잊으려고 했었다. 녀석의 구멍 따위는.
그가 떠난 후 오른 쪽 귓불에서 진물이 멈추지 않는다. 왼쪽 귀를 마저 뚫을 수 있을 만큼 슬프지 않았다면 그는 떠나지 않았을까?
*
점심께. 일요일이지만 나는 학교에 가려고 느릿느릿 준비를 하고 있다. 눈뜨자마자 한 일은 세면대 앞에 서기. 세수를 하면서 푸아 푸아 들리는 소리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 다음 순간 나는 물방울이 튄 거울 앞에서 한참 귓불에 앉은 딱지를 뜯느라 정지해 있었다. 딱지가 뜯기고 진물이 흐르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이제 어젯밤의 흐트러짐을 감쪽같이 다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 되어 집을 나선다. 꼭 이렇게 머리카락 하나 구겨지지 않은 채 잠들었다 방금 일어나 문을 여는 사람처럼.
요즘은 4학년 졸업 작품을 구상하느라 학교에 매일 들른다. 수업도 없는데 집에 웅크려 있자니 마음이 불 속 같아 나는 저절로 학교로 향하게 되었다. 작업 중인 동기들 옆에 있으면 나을까 싶어서. 그러나 졸업 작품 제출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오니 마음이 편치 않은 건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제법 마무리가 되어 가는 동기들의 작품 때문에 더욱 죽을 맛이 되고 말았다. 종일 작업실에 앉아서 아무거나 스케치를 해보다가 결국 허탈해져 집에 돌아오기가 벌써 한 달이 넘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떠나버린 이후 죽 그랬다. 내가 제대로 하는 일이라곤 귓불에 앉은 딱지를 뜯는 일 뿐이다. 스케치하던 연필을 잡은 손으로도 그 짓은 멈추지 않는다.
사실, 오늘 학교에 가는 것은 매일 들른다는 이유 하나 때문은 아니다. 그것뿐이었다면 일요일 하루쯤 거르고 종일 이불을 싸고 누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젯밤 잠들기 전에 절름발이 남자를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만나자는 약속을 한 건 아니지만. 남자는 오늘도 학교 가는 길, 유창 아파트 담벼락에 있을 거라 했었다. 내가 사는 작은 방은 학교까지 10분 거리고, 10분을 걷는 동안 주위엔 몇 채인지 세지도 못할 회색 아파트가 무더기로 펼쳐있다. 그 중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유창 아파트 담벼락에서 그 절름발이 남자는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으리라.
어제 학교 작업실을 향해 가던 길, 땅을 보고 걷는데 갑자기 페인트 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발을 디딘 앞으로 녹색 페인트, 조금 더 앞으로 걷자 노란색 페인트, 조금 더 앞에 파란색 페인트, 그 다음엔 녹색과 노란색을 섞었을 법한 연두색 페인트 통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연두색 페인트 통 옆에 절뚝대며 움직이는 두 발이 보였다. 비로소 고개를 들어 담벼락을 올려다보니 절뚝대는 남자는 숲을 그리고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연둣빛 나무가 사는 아름다운 숲이 절반쯤 그려져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나무들이 서로 서로 어깨를 기대서고 아름다운 숲이 될 거란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단지 숲뿐이었다면 나는 결코 그 절름발이 남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저기, 무슨 그림을 그리세요? 나는 대뜸 바쁘게 붓을 움직이는 남자에게 말을 시켰다. 뒤에서 그림을 가만 지켜보다가 놀란 토끼 눈을 하고서. 숲 한 가운데 있는 분화구 같은 것을 보게 되었을 때였다. 묘연하게 생긴 검은 분화구 같은 것이 내 눈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무어라도 일단 떨어지면 절대로 헤어 나올 수 없어 보이는 깊고 유구한 구멍이었다. 무엇 때문에 숲 가운데 구멍을 그리는가 물었던 건데 남자는 내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삭막한 회색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싶어서요. 덧붙여 남자는 앞으로 토요일 일요일을 이용해 학교 주변 아파트를 차근차근 돌며 그림을 그릴 거라고 했다. 유창 아파트를 시작으로 세상의 자연을 몽땅 옮겨 놓을 거라던가? 웬일인지 나는 채 완성되지 않았던 그림에 대한 궁금함으로 어젯밤 누운 몸을 자꾸 뒤척거렸다. 꼭 다시 한번 남자를 찾아가야 할 것만 같다. 약속한 건 아니지만 남자가 어제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겠지. 이제 골목 하나만 돌면 유창 아파트가 보일 것이다. 남자는 숲을 다 완성하고 구멍을 마저 그리고 있을까?
남자가 보인다. 허름한 옷을 걸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아직 서른 살이 채 되지 않아 보이던 남자의 뒤통수에 드문드문 새치가 자라 있다. 숲이 시작되는 담벼락 끝에서 남자가 절뚝대며 뒷걸음을 친다. 호통을 치는 노인 때문이다. 삿대질을 하는 노인은 군청색 제복을 입었다.
"누구 허락 받고 담벼락에다 낙서를 하는 거요? 내, 참. 아파트 사무실에서 알게 되면 난 모가지요! 어서 썩 꺼지란 말이요."
"죄송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사무실에 가서 허락을 받을 테니 그 동안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 그리고 나면 주민들이 아주 좋아할 겁니다."
"이거 정말 말로 해서 안 되겠네. 허락이고 뭐고 어서 이것들 챙겨서 꺼지라니까!"
노인이 던진 페인트 붓 두 개가 내 머리 위로 후딱 날아간다. 하나는 파란색, 하나는 빨간색이 묻은 채로. 날아간 붓을 주우러 뛰어오는 남자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심하게 절뚝대며 뛰는 모습이 딴따 딴따 강약으로 바뀌는 4분의 2박자를 닮았다. 남자가 붓을 주워 들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다가가 페인트 통을 챙겨 차에 싣는 것을 돕는 나를 눈치 채지 못한다. 드디어 마지막 파란색 페인트 통 앞에서 둘 다 손을 내밀었을 때 남자는 나를 보고 눈을 끔벅거린다.
"저도 그림을 그리는 학생이에요.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고 싶어요……."
남자가 웃는다. 울음을 삼키는 웃음이 슬프지 않고 아주 씩씩해 보인다. 뜬금없이 남자를 돕겠다니. 나도 모르게 돕겠다는 말이 튀어 나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남자가 말하는 도시의 생기에 대해선 전혀 관심이 없다. 다만 숲 속의 구멍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저 남자를 따라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도 갑작스레 돕겠다니. 차 옆으로 다가서는 남자의 절뚝거리는 발이 자꾸 눈에 밟힌다. 남자가 내가 한 말을 쓸데없는 동정으로 오해할 지도 모르겠다. 노인은 도구들을 죄다 차에 싣는 것을 보고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손을 탁탁 털며 돌아간다. 유창아파트 경비실로 들어간 노인이 우리 둘을 계속 쳐다보고 서있다.
"오늘은 다른 동네로 가보는 게 좋겠군요. 경비 아저씨가 저렇게 흥분을 하시니. 그렇다고 이걸 그리다 말고 여기서 가까운 아파트에다 또 그림을 시작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정말 도와줄 수 있겠어요? 나야 두말 않고 환영이지만 종이에 그리는 것과는 달라서 작업이 힘들 수도 있을 겁니다."
남자는 한 번 더 씩씩하게 웃는다. 그 웃음이 나의 괜한 걱정을 한꺼번에 몰아낸다. 나는 숲 가운데 그리다 만 아득한 구멍을 돌아보면서 남자를 따라가리라 다짐한다. 남자가 부추긴 것도 아닌데 얼른 차 문을 연다. 그리고 차에 올라타자 덜컹대는 움직임만큼이나 정신없이 가슴이 뛴다.
이대로 남자를 따라가면 짐작도 못할 일을 겪게 될 것이다. 그림에 대해 조금 궁금했던 것이 결국 이렇게 예고도 없이 남자의 차에 올라타게 만든 것처럼. 이 절름발이 남자를 따라가는 것 때문에 내게 갑작스러운 일이 벌어질 것 같다. 나의 예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오른 쪽 귀를 뚫던 날, 귀금속 가게를 나오면서도 그랬다. 나의 눈물을 본 그가 머지않아 떠날 거라는 분명한 느낌.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대로 되었다. 어느새 그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너는 틈을 주지 않는구나. 언제나 그렇게 반듯하고 좋은 모습 말고, 너의 진짜 속마음을 보여줘. 너에게는 항상 더 이상 다가갈 수 없는 선이 느껴져. 그 선 건너편에 있는 것만은 가까스로 손을 뻗어 봐도 도저히 만질 수 없는 그런 느낌말이야……. 그가 말할 때 나는 고개만 주억거렸다. 너무 잘 알고 있다. 그가 나를 떠난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떠나게 하고 말았음을. 그러나 알면서도 모르고 싶다. 사랑했기에 끝내 보여주지 못한 나의 두려움.
"사실, 이 동네 말고 보아둔 아파트촌이 하나 더 있거든요. 오늘은 거기로 가서 허락부터 맡아야겠네요. 역시 거저 되는 일은 없나 봐요. 다리를 절며 세상을 사는 것도 그랬고, 서른이 가까워 그림을 배우는 것도 그랬고, 이젠 꼭 해보고 싶은 이 일마저 호락호락하지 않군요. 전 박경만이라고 염주동 나눔의 집에서 사무를 맡아보고 있습니다. 장애인들을 돌보는 복지시설이죠. 언제 한 번 우리 나눔의 집에 놀러올래요? 그 곳엔 제가 그린 그림이 벽마다 가득해요. 아름드리 나무도 많고, 예쁜 아이들도 많고, 기린 코뿔소 얼룩말 가지각색 동물에다, 선녀랑 천사랑, 비행기 로켓, 달과 별까지 없는 게 없죠. 그러다가 생각했어요. 도시 곳곳에 이런 그림을 그려야겠구나. 그러면 사람들이 조금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박경만이라는 절름발이 남자는 언제 노인에게 쫓겨왔던가 싶을 만큼 밝은 표정이다. 옆에서 풀이 죽었던 내가 도리어 무안할 만큼.
"그렇지 않아도 함께 일할 동료를 찾고 있었어요. 좋은 일이니까 뜻 맞는 사람을 금방 찾겠지 했지만 이렇게 우연히 만날 줄은 몰랐네요. 이름이?"
"수한이에요."
"수, 한? 성이 수? 이름은 한?"
"아뇨, 이름만 수한이에요. 성은 쓰지 않아요. 그냥 부르고 싶지 않아서요."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모두들 수한이라는 이름을 말할 때 성이 수씨냐고 묻는다. 그리고 지금처럼 성을 사용하고 싶지 않아 그냥 이름만 수한이라고 대답하면 이 남자와 같이 고개를 갸우뚱대며 다시 묻는다. 왜 부르고 싶지 않은데? 아니면 그래도 가르쳐 줘, 궁금하잖아…라고. 그러면 나는 성이 너무 촌스러워서 그런다고 절대 가르쳐 주지 않을 거라고 잘라 말한다. 그 말까지 들으면 나를 몇 번 더 추궁하는 사람도 있고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다. 아! 너, 구씨지? 아무래도 좋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나는 성을 버렸다. 다시는 내 이름 앞에 아버지의 성을 붙이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남자가 한 번 더 물으면 성이 촌스러워서라고 단박에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수한이라고 부르며 그 이상을 묻지 않는다.
"수한씨는 좋은 사람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어요. 이런 일에 선뜻 나서기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죠. 어제 나한테 말을 걸때는 그냥 지나가다가 궁금해서였거니 했는데 어젯밤 곰곰이 생각했던 거죠? 정말 고마워요. 내 일을 도와주겠다니."
"저, 좋은 사람 아니에요. 몰라서 그래요."
내 말을 듣고 겸손하기까지 하다며 하하 웃는 저 사람, 나더러 좋은 사람이란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절름발이 남자가 점찍어둔 어딘지 모르는 아파트촌으로 차가 움직인다. 갈수록 가슴이 심하게 뛴다. 신경질적으로 이내 발작이 일어날 것 같다.
*
차가 다다른 곳은 내가 사는 동네에서 멀리 고가도로를 건너 있는 도시의 끄트머리다. 도시 안에선 벽촌인 셈이라 거창한 높이의 아파트는 눈에 띄지 않고 허름한 3,4 층 건물이 많이 보인다. 건물마다 경계를 짓고 있는 담벼락은 더욱 허름해서 마지못해 서 있는 것만 같다. 거뭇한 벽면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태세다. 그림을 그려놓으면 동네 분위기가 정말 많이 달라지겠죠? 내 생각엔 하얀 연기를 뿜으며 꿈을 향해 달리는 기차를 그려볼까 하는데 수한씬 어때요? 하던 남자는 동사무소에 먼저 들러야겠다고 그 앞에 차를 세운다. 그림을 그리는데 허가는 어디서 얻어야하는지 절차는 따로 있는지 알아볼 심산일 것이다. 옆에 달린 차 유리로 동사무소 안을 휘 돌아본다. 동네 어른들이 몇, 늦여름 더위를 피해서 동사무소 한켠 작은 공터 나무그늘에 어울려 있다. 남자가 차에서 내려 문을 탁 닫았을 때 나도 따라 문을 열고 나왔다. 텁텁한 에어컨 바람에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서. 차를 타는 순간부터 쿵쾅대던 심장소리는 멈추지 않고 여전히 크게 들린다. 두려워져서 저절로 오른 손이 귓불로 올라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에 새로 떼어내 아직 채 굳지도 않은 딱지를 뭉그러뜨리듯 뜯어내고 말았다. 아픔을 견디다 조금 두려움이 누그러진 것도 같았지만 다시 더 높게 가슴이 뛴다. 진물까지 짓이기며 오른 손을 내리지 못한다. 남자는 알아볼 것을 다 알아보고 언제 나올까?
나는 이 동네 담벼락마다 무슨 그림을 그려야 할까? 남자는 기차를 그린다니 나는 그 밑에 기찻길을 그리면 될까? 아니다. 아주 다른 것을 그려야지. 남자가 그리는 기차는 꿈을 향해 달릴 텐데 내가 그리는 검은 레일은 죽음을 향해 가는 저승사자 같을 테니까. 아니면 순한 짐승은 어떨까? 토끼나 새끼 고양이처럼. 아니다. 눈이 빨간 짐승은 금세 피눈물을 흘릴 테고 야옹대며 우는 짐승은 몹시도 을씨년스러울 것이다. 이것들 역시 남자의 꿈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남자의 기차에 어울리는 무엇을 그릴 수나 있을까? 아니면 페인트 통을 나르거나 새로 색을 섞는 일 따위나 해야 할까? 나는 그 어떤 것을 그린다 해도 자신이 없다. 남자는 들어간 문으로 아직 나오지 않는다. 남자가 없으니 점점 불안해진다. 남자를 따라온 낯선 이 동네에서 무슨 일이 곧 일어날 것만 같다.
공터에 가까이 가자 대충 보이던 동네 어른 몇에 아이도 하나 끼어있다. 이제 막 돌이 지났을법한 아이가 어른들 품에서 품으로 돌아다니며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다. 살이 올록볼록하니 건강한 사내다. 조그마한 반 팔 티 아래 팔뚝 살이 지나치게 희어서 가서 꼭 만져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가고 말았다. 어디서 이런 잘생긴 늦둥이가 나왔을꼬? 세 번째로 아이를 받아든 어른이 비행기를 태우며 그 고물고물한 것을 까르르 웃게 만든다. 네 번째로 아이를 받은 사람도 질세라 까꿍 소리로 더욱 웃게 만든다. 아이가 목을 뒤로 젖히며 즐거워한다. 귓불을 만지는 손가락의 힘이 더욱 거세져서 이제는 피가 흐르는지도 모르겠다. 구멍이 찢겨서 더욱 넓어졌을지도 모른다. 아픔이 나를 한 걸음 더 나가게 한다. 웬일인지 더 자세히 아이를 보게 만든다.
이제 아빠한테 가거라. 세 번째 어른이 한참 데리고 놀아주다가 아이를 마지막 어른에게 넘겼을 때 높게 뛰던 심장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최고속도로 고동친다. 이럴 수가. 목까지 숨이 막힌다. 피가 정신없이 휘돌아 온몸이 붉어진다. 새로 공기가 들어오지 않으면 나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 아, 아버지다. 자기 아빠에게 가서 지금까지 중에 제일 크게 웃는 아이에 가려서 언뜻 언뜻 보이는 저 사람. 아이의 아빠는 나의 아버지다.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나는 얼른 돌아선다. 몸은 돌아섰는데 온몸의 신경 줄은 아직 뒤를 보고 있다. 까르르 웃는 아이의 소리가 머리를 어지럽힌다. 오동포동 희게 오른 살에 가까이 가서 예리한 칼로 구멍을 뚫어주고 싶다. 그것도 몇 개쯤 뚫어서 구멍마다 검붉은 피가 철철 흐르게 하고 싶다. 아이가 웃는 걸 그만 그치고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트릴 것이다. 흰 살이 멍울 진 핏방울로 온통 뒤덮여 결국 슬퍼지고 말겠지……. 기억 속의 아버지. 나는 당신을 몰라봐야 맞았다. 우연히 어디선가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하게 모든 것을 잊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방금 전 아버지를 본 것이다. 이제 나는 오늘 본 것까지 합해서 다시 아버지를 잊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러나 잊으려고 하자 그렇게 되지 않고 덩달아 어머니와 함께 있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어머니는 아무리 맞아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술에 취해 재떨이며 화분을 집어던지는 아버지에 맞서서 되레 상이나 라디오, 배로 더 큰살림을 마구 집어 던졌다. 어머니가 욕지기를 해대면 아버지는 얼굴이 푸르락누르락해졌다. 들이부은 술로 붉어진 얼굴빛이 싹 바뀌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야! 이 개만도 못한 인간아! 젊어서 그리 두들겼으면 됐지, 어디서 또 행패야! 내 나이 40줄에 더 맞으려도 이제는 골병이 들어서 더는 못 맞아! 몇 십 년 동안 아버지에게 맞아오면서 어머니가 점점 강해졌음을 묻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나는 방문을 붙잡고 슬그머니 틈새로 내다보았다. 괴물처럼 싸우는 두 사람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절정은 아버지가 어머니 악다구니 앞에서 말을 잇지 못할 때였다. 갑자기 어머니가 문을 박차고 사라지는 것이다. 어디가, 이년아! 쫓아가는 주정뱅이에게 어머니는 끝끝내 잡히지 않고 어딘가 꼭꼭 숨어버렸다. 외삼촌 집에서 며칠씩 은거하거나 숨겨둔 돈으로 여행을 다녀오거나 했다. 돌아온 어머니는 한결 강해진 모습이었다. 몇 년 만 더 지나면 반대로 어머니가 아버지를 흠씬 두들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 날 어머니를 낚아채 양껏 패지 못하고 돌아와 화를 이길 수 없었던지 악마처럼 변해갔다. 술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던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는 갑자기 방문을 벌컥 열고 부들거리며 떨고 있던 나에게 달려들었다. 내 옷을 마구 벗겼다. 어머니를 휘두르지 못해 풀리지 않는 욕망을 내게서 채우려 했다. 어머니처럼 악다구니를 부리다 아버지를 피해 달아날 수 있었으면……. 그러나 내가 속으로 웅얼대던 기도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술에 취해 발기된 사내의 힘에 비하면 나는 음모가 늦게 자라기 시작한 아이에 불과했으므로. 내 몸에서 떨어지자 배를 다 채운 하이에나처럼 잠에 곯아떨어진 아버지. 술이 깨어 일어난 다음 날,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평소처럼 밥상을 차리라고 내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어머니는 삼일 뒤에 피신을 마치고 돌아왔다. 변산에 가서 채석강을 보고 왔다고 했다. 저녁노을 지던 모습이 장관이더라고. 어머니가 다시 아버지와 함께 밥상 앞에 앉는 걸 보고 나는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또 금세 그들은 밥상머리에서 티격태격하기 시작했지만 나는 이리저리 밥알을 튀기는 그 둘의 입이 마치 TV에서 본 속사포 같구나 하면서 자꾸만 딴 생각을 했다. 얼마 가지 않아 아버지는 제 지배욕을 채워 줄 과부댁을 만나 새 살림을 차렸다. 나는 그 때부터 한참을 어머니와 단둘이 살게 되었지만 한 번도 그 날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그 날에 대한 것이 아니라도 어머니는 충분히 죽을 만큼 피곤하고 지쳐 보였기에.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던 마지막 날, 거칠게 숨을 몰아쉬면서 어머니는 내 손을 부여잡았다. 수 한 아 못 난 이 어 미 를 용 서 해 라. 가까스로 밖으로 나온 어머니의 진심을 듣고 나 역시 어머니 앞에서 그 날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했다. 그러나 끝끝내 쓴 침만 삼켰다. 째깍째깍 탁상시계 초침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꼴딱 꼴딱 쓴 침을 어렵게도 넘겼다. 숨을 거둔 어머니의 뼛가루는 바다도 아닌 강도 아닌 어머니와 살던 마을에 흐르던 개울 위로 흩어졌다. 돌 사이로 굽어드는 물줄기를 타고 으스러진 어머니의 인생이 똘똘똘 흘러갈 때 나는 아버지의 성을 버렸다. 다시는 내 이름 앞에 성을 부르지 않으리라 한 번 더 쓴 침을 삼키고 삼켰다.
나는 뒤돌아 어딘지 모를 방향으로 그냥 달리기 시작한다. 오른 손을 아직 귓불에서 떼지 않은 채로. 진물보다 미끈한 무언가가 줄줄 흐른다. 아, 남자를 따라올 때의 나의 예감이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9년만에 아버지를 보았다. 과부댁이 낳았을 늦둥이를 껴안은 나의 오래 전 기억 속의 아버지. 어렴풋이 절름발이 남자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수 한 씨 어 디 가 요. 그러나 나는 돌아보지 않으리라. 짐작할 수 없었던 한번으로 족하다. 굳이 잊으려 했던 사람을 돌아보고 다시는 슬픔 이상의 슬픔을 얻지 않으리라. 이미 곪을 대로 곪은 상처에서 슬픔 같은 것이 하염없이 흐른다. 뛰느라 오른 손이 흘러내리자 내 손가락에 붉은 피가 묻었다. 손톱 밑에 피가 배인 것이 보인다. 나는 집에 돌아가 오래 오래 이 핏물을 닦아내야 할 것이다.
*
내가 어떤 길로 집까지 돌아왔던지 기억하지 못하겠다. 처음 가본 동네라 지리도 몰랐는데, 그렇다고 택시를 잡아 탄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자 나는 집에 돌아와 있었다. 점심께 집을 나설 때와 똑같이 집 주변은 매우 한산하고 변한 것이 없어 보였다. 다만 해가 중천이던 것이 벌써 산 뒤로 넘어가고 어둠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나는 열쇠로 문을 열자마자 이불 위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가끔씩 눈이 떠지면 시계바늘이 한 바퀴를 더 돌아 10시가 되고 또 다시 눈이 떠지면 한 바퀴를 더 돌았는지 두 바퀴를 더 돌았는지 다시 10시가 되어 있었다. 며칠 간 물도 먹지 않은 채 둥글게 몸을 말고 슬픔을 숨기려고 자꾸 눈을 감았다. 확실히 잠이 깼을 때 핸드폰을 켜자 벌써 사흘이 지나있었다.
눈을 막 뜨고 한꺼번에 퍼뜩 생각난 것은 세 가지나 되었다. 하나는 귓불에 난 상처. 사흘이 지난 셈이니 아문 것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오른 손 검지로 슬그머니 귓불을 더듬자 피에 엉겨든 귀가 퉁퉁 부어 있었다. 손끝만 대도 아파서 더 이상 만져볼 수 없었다. 또 하나는 절름발이 남자였다. 사흘 전, 나를 부르며 쫓아올 때도 딴따 딴따 4분의 2박자로 절뚝대며 뛰었을까? 남자의 그 독특하고 경쾌한 리듬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지막은 나의 졸업 작품 제출 시기가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방안에서 사흘을 보내고 말았으니 늦어도 너무 늦어버렸다. 몸을 일으켜야 했다. 가까스로 일어나 냉장고에 유일하게 들어있는 찬물을 들이키자 이내 허기가 진다. 삼일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것이 생각난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 무어라도 먹어야 할 것 같다.
맘에 드는 모습으로 꾸미고 싶지만 그럴 수 있기엔 오늘 나의 모습이 너무 초췌하다. 거울 앞에 비친 얼굴. 눈 밑이 거뭇하고 볼이 쏙 들어갔다. 살갗까지 푸석푸석해서 그냥 집안에만 있을까 싶다. 그러나 너무 허기가 진다. 나는 최대한 단정한 차림을 하고 집을 나선다. 학교까지 가려면 10분을 걸어야 한다. 나는 길을 갈 때 고개를 들지 않는다. 누가 나의 슬픈 얼굴을 훔쳐 볼까봐 두렵다. 바닥을 보고 걷는 사이 어느 새 남자가 그리던 그림 밑에 다다랐다. 붓이 날아가 떨어졌던 자리, 페인트 자국이 나를 멈춰 세웠다. 고개를 들자 그림은 우리가 떠나던 때 그대로 멈춰 있다. 반쯤 그리다 만 숲 속에 깊고 유구한 구멍이 나를 빨아들이려고 한다. 누구 하나 지나간 흔적이 없고 새도 아직 울지 않는 고요한 숲이다. 아무리 봐도 저 아름다운 태곳적 숲 안에 구멍은 좀체 어울리지 않는다. 다시 남자를 만나야 한다. 꼭 물어야 했다. 저것이 무어냐고. 이번엔 내 뜻을 제대로 알 수 있게 손가락으로 쿡 집으며 말하리라.
아무 거라도 먹어 요기를 한 뒤에 작업실로 향할 생각이다. 그런데 무엇을 그릴까? 아직도 뾰족한 것이 떠오르지 않으니 나는 오늘도 허탈해져서 집으로 돌아오고 말 것이다. 남자를 만나기 전에는 아무 것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 토요일까진 이제 삼일이 남았다. 토요일이 되면 아침부터 나가 유창 아파트 담벼락에서 남자를 기다려야지. 아아, 자꾸만 허기가 진다.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전력을 쏟은 것이다. 여분의 에너지마저 고갈되었다.
*
남자는 지난 주 토요일에 나타나지 않았다. 토요일 아침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내내 남자를 만나려고 유창 아파트 주변을 서성였는데 말이다. 경비를 보는 노인에게 혹시 절름발이 남자가 다시 찾아오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극구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아파트 사무실이 이번 주까지 휴가라면서 휴가 끝나거든 그 쪽에 가서 말하라고. 늦여름 더위가 나를 지치게 만든다. 후욱 불어대는 습한 공기는 남자가 그리다 만 페인트 그림을 주르륵 녹여 버릴 것 같았다. 그 뒤로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오늘은 그림을 마저 완성하러 그가 오지 않을까…반쯤 접어버린 기대를 들고 집을 나선다. 오른 손을 귓불에 올리고 주물럭대면서. 이젠 병원에 가야지 싶다. 이대론 도저히 나을 것 같지 않다. 곪은 상처에서 썩은 내가 나는 것 같으니.
가는 길에 털이 뭉친 더러운 개 한 마리가 어슬렁댄다. 광견병을 옮길 것처럼 몸 안에 세균이 득실거려 보인다. 더러운 개가 나한테서 썩은 내를 맡았는지 가까이 다가온다. 살이 썩는 냄새는 마치 고깃덩어리의 비릿함과도 같을 것이다. 후각이 예민한 짐승이라 킁킁대며 나에게 온다. 슬쩍 주머니 속에 박힌 껌 하나를 꺼내든다. 껌을 던져주고서 얼른 뛰어가면 개도 나를 더 이상 어쩌지 못할 텐데. 나는 껌을 내밀고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 개가 손에 쥔 것을 어서 내 놓으라고 혀를 날름댔을 때 나는 껌을 더 손안으로 몰아 쥐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이댄다. 침이 흥건한 개의 송곳니가 허옇게 와 닿는 것이 느껴진다. 개가 눈을 부라리며 입을 크게 벌린다. 내 손을 콱 물어 피가 흐른다. 나는 정말 광견병이 옮았는지 모른다. 물린 곳이 저릿하니 아픈데 실없이 웃음이 나오는 걸 보면. 피를 보더니 개가 뒷걸음을 친다. 나는 껌을 휙 던져주고 다시 바닥을 보고 걷는다. 피가 몇 방울씩 내가 걷는 것보다 먼저 떨어진다. 그대로 피를 흘리면서 10분쯤 걸어 유창 아파트에 다다른다.
앗, 절름발이 남자가 있다. 남자가 숲을 다 완성하고 쭈그려 새로 페인트 색을 조합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툭 친다. 남자가 놀래며 돌아본다. 나는 남자가 저리도 놀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것 때문만은 아니리라. 수 한 씨 그 피 는 뭐 예 요. 어깨를 툭 치던 손가락이 아직 내려가지 않고 쭈그려 앉은 남자의 눈높이 허공에 매달려 있다. 남자가 두 손을 모아 떨어지는 피를 받아든다. 금세 손바닥 위에 피가 흥건하게 고인다.
"구멍에서 상처가 끝나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요. 중독 된 것처럼 멈출 수가 없어요."
바보 같은 소리가 튀어나온다. 남자를 보자마자 남자와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그 동안 속에서 웅얼대던 것을 나도 모르게 꺼내놓고 말았다. 더 이상 숨기면 나는 상처가 곪아서 죽고 말 것 같다. 남자는 내 앞에서 늦여름 더위에 땀을 비질 비질 흘리고 있다. 남자의 땀을 정성스레 닦아주고 싶지만 나의 손이 성치 않다. 오히려 남자가 자신이 입은 흰 티를 찢어 나의 피를 닦아내고 지혈을 해 준다. 피가 이내 멈출 것이다. 남자가 천 조각으로 감싼 내 손을 꼭 쥐고 있기에. 남자의 찢겨진 흰 티 아래로 속살이 보인다. 검게 그을린 남자의 속살이 그가 살아온 절름발이 인생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른다. 두 팔을 걷어 부치다 못해 웃통을 통째로 벗어 던진 날도 수백 번 되었을 것이다. 찢겨진 그의 흰 티 아래 뱃살이 홀쭉하다. 홀쭉한 속살이 드러난 부분, 어딘가를 가리키며 남자가 말한다. 남자는 나에게 구멍에 대해 이야기해줄 것이다. 숲 속에 그려진 구멍에 대해 굳이 묻기도 전에 먼저 설명할 것이다. 눈이 희미해진다. 그럴수록 남자가 말하는 소리 하나 하나는 또렷하게 들린다.
"사람은 누구나 구멍을 가지고 있는 법이에요. 단 한 사람도 구멍이 없는 자는 없어요. 왜 인줄 알아요? 그렇지 않으면 태어날 수가 없거든요. 엄마 뱃속에서 나오던 때를 상상 해봐요. 환하게 빛이 보이는 순간, 너무 기뻐서 안간힘을 쓰죠. 그 때의 고통은 세상으로 나오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두 견뎌낼 수 있어요.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죠. 이제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구멍이 생기죠. 두렵고 아픈 일이지만 절대 피해 갈 수 없잖아요. 우리는 엄마의 탯줄에서 잘리던 순간부터 일찍이 슬픔을 알게 된 셈이에요. 수한씨 자학하지 말아요. 누구나 구멍을 가지고 살아요. 누구나 제 슬픔을 부둥켜안고 살아요."
나는 차안에 눕고 싶다고 말한다. 남자가 그렇게 해 준다. 쓰러져 자는 줄 알겠지만 나는 실눈을 뜨고 남자의 그림을 마저 지켜볼 것이다. 숲 안에 분화구 같은 것이 남자가 새로 섞어 만든 소라 빛 페인트 때문에 점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갈 것을 나는 예감할 수 있다. 이대로 남자의 구멍이 무시무시하게 아득한 채로만 끝나지 않을 거란 걸. 구멍은 완성된 태곳적 숲 사이에 가장 잘 어울리는 무언가가 될 것이다. 소라 빛 페인트가 한줌씩 칠해진다. 남자의 붓이 한 방향으로 곱게 움직인다. 물방울이 여러 개 그려진다. 아, 무언가 출렁댄다. 하늘보다 맑고 나무 잎새보다 영롱한 소라색 무언가에 빛이 담겨있다. 반짝거리는 물결마다 아주 심오한 생명력이 출렁댄다. 이제 숲 속의 그 누구도 목마르지 않으리. 아름다운 옹달샘. 구멍을 통해서만 고일 수 있는 청량한 물방울. 남자의 구멍은 이미 어느 것이라도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할 함정이 아니라, 어느 것에게도 살아갈 힘이 되어줄 삶의 원천이 되어 있다. 숲과 어울려 옹달샘이 아주 완성되기 전에 나는 스르르 눈이 감긴다. 꿈을 꿀 것이다. 숲 속 옹달샘으로 가서 목을 축이는 사슴이 되어 내 얼굴을 물위에 비춰볼 것이다. 그리곤 굳이 오래 전 잊었던 것까지 떠올려야지. 오랫동안 지치고 피곤한 얼굴 그대로를 보고 눈물이 흐르면 나는 그냥 슬픈 대로 그렇게 슬퍼할 것이다.
*
졸업 작품 제출 기한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작업실에 나오는 동기는 이제 두 명뿐이다. 어느새 다들 작업을 마쳤고 나머지 두 명도 마무리를 하는 수준이다. 기한 내에 작품을 마칠 수 있을까? 그러나 마음이 급하지는 않다. 나의 그림은 아려오는 손끝을 타고 아주 느린 속도로 점점이 번져갈 것이다. 서서히 캔버스 위에 스케치를 시작한다. 맨 먼저 왼 쪽에서 오른 쪽으로 깊고 유려한 곡선을 그린다. 화면을 거의 가득 채우는 커다란 중심선이다. 중심선을 따라 형체는 유유히 생겨난다. 물감을 기름에 갠다. 터치를 통한 재질감을 살리기 위해 나는 유화 물감을 사용할 생각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무광택의 효과를 십분 활용하기 위해서다. 철저하게 빛이 차단된 어둠 속에서 색이 펼쳐지도록 하기 위해. 어두운 회색으로 선 아래를 채워간다. 섬세하고 꼼꼼한 동작으로 간혹 모스그린을 섞어가면서.
뭐였더라? 절름발이 남자의 이름은. 아, 박. 경. 만. 경만은 유창아파트 사무실 휴가가 끝나던 날, 그림을 그려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고 사실 그림을 거의 마쳤다. 그런데 내가 피를 철철 흘리며 나타난 것이다. 차안에 뉘어 주고 그림을 마저 그리다가 조금 뒤에 보니 흔들어도 깨지 않았단다. 내가 아니었다면 경만은 그림을 아예 마치고 다른 아파트 사무실을 찾아가 다음 허락을 얻어냈을 것이다. 걱정했던 광견병은 아니었다. 의사가 신경과민에 피로가 겹쳐서 몸이 한계에 이른 상태라고 했다. 뒤이어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두 번이나 힘주어 강조하자 나는 더 이상 괜찮다고 말하지 못했다. 이틀 입원해 있는 동안 경만은 이틀을 다 찾아왔다. 그리고 그림을 마저 그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파트 주민이 지나가다가 음료수를 한 병 건네더라면서. 이번엔 유창 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태영 아파트 담벼락에 푸른 강을 그리고 있다 말했다. 씩씩하게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강이 아름답게 흐르기 위해 경만은 지난 세월 얼마나 많은 슬픔을 사야했을까?
빛이 없는 나의 그림 속에 순색은 없다. 선명하고 밝은 이미지는 배제하고 계속해서 무채색이나 중간색으로 점에 점을 이어갈 것이다. 어느 새 무언가 휘돌아 감기는 소용돌이가 생겼다. 그림 안에서 쉭 쉭 모진 바람 도는 소리가 들린다. 나의 심연. 손을 집어넣으면 몸이 통째로 끌려 들어가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구멍. 눈을 떼지 않으면 영원히 꼭 감겨서 잠들게 될 것 같다. 차라리 질끈 감아 버릴까?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두려워진다. 쿵쾅 쿵쾅 심장 소리가 더 높게 뛴다. 나는 그만 붓을 내려놓았다. 이어 귓불에 손이 올라가고 만다. 붓기가 다 가라앉은 귀에 아직도 딱지가 앉았다. 손톱을 세우려다 나는 그냥 어루만져 본다. 스치는 곳이 쓰라리고 그 안의 구멍이 내 손가락을 잡으려고 움찔대기 시작한다. 눈을 감으면 견딜 수 없으리란 걸 안다. 이내 진물이 흘러나오겠지? 또 굳어서 딱지가 앉겠지? 나는 그 때 딱지를 뜯기 위해 다시 견디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참을 망설이게 된다. 나는 귓불을 어루만지며 동시에 초점 흐려진 눈으로 계속 그림을 응시하면서 자꾸 망설이게 된다. 경만은 지금쯤 혼신을 다해 강의 하류를 그리고 있을까? 상류부터 흐른 물이 굽이치며 강가에 나무를 키우고 짐승의 목을 축이게 하고 있겠지. 나는 2주 동안 졸업 작품을 마치고 다음엔 경만을 따라 그림을 그릴 것이다. 담벼락마다 조심스레 꿈꾸는 것들을 그려볼 테다. 떨리는 손으로 붓을 들어 그림 속 구멍 사이에 점 하나를 찍는다. 미네랄 블루로 작은 물방울을 그린다. 온통 어둠 속인 구멍 안에서 물방울은 도드라지게 튀어 보인다. 생기가 있어 산채로 파닥 움직일 것 같다. 그것은 허공에서 떨어지는지 구멍 밑에서 솟구치는지 알 수가 없다. 구멍 사이 어느 메에 달랑 떠 있는 미네랄 블루 물방울 하나가 이제 신비한 힘을 부릴 지도 모른다. 심장 박동이 잦아들자 나의 몸속에서 숨소리가 들린다. 새삼스레 내가 살아있음을 알겠다. 후아…… 세상에 나와 내 힘으로 처음 쉬었던 그 때 그 숨이 지금껏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던 것을. 캔버스 위에 그림을 나는 그윽하게 바라본다. 깊고 유구한 구멍 속에서 솟아나는 사람의 숨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원고지 92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