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사회는 이제 ‘건강’과 ‘경제’라는 요인을 기준으로 새로 구성된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흠이 생기면 과거와 후회만 득실거리고 미래와 희망이 없는 노인정이다. 서로 어울리는데 움직일 수 있는 건강과 필요한 돈을 충당할 수 있는 부류들은 새로운 공동체에 모여든다.
노인들이 공동목표로 모이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운동이나 취미동호회다. 그렇다고 매일 매시간 모이는 것도 아니다. 다음에는 동창이나 친구모임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 대로 “세월없이는 사람들이 친구가 될 수 없다”. 친구는 세월이다. 친구는 세월 속에서 고집과 습관이 서로 녹아드리어서 상상 만나도 마음의 부담이 없이 항상 편안하고 포근하다.
그러나 친구도 건강할 때 만날 수 있고 매일 매시간 만나는 것도 아니다. “혼자서도 잘해요”시기가 지나가면 사회적 인연은 끓어진다. 혼자 걷고 혼자 지갑을 열 수 있는 시기가 지나가면 집이나 요양원에 홀로 남게 된다. 이 무렵부터는 소통이나 교류는 불가능하다.
의식주와 병치레 삶이 목적이다. 결국 인간은 혼자다. “사람이란 고독한 존재다”. 오스트리아 시인인 릴케가 1903년에 카푸스에게 보낸 편지에 남긴 유명한 말이다. 카뮈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쇠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자신이 불완전하며 고독한 존재임을 자각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고독은 노인이 마주한 거울이다. 거울은 내가 고독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거울의 나에게서 시인 조병화가 노래하는 ‘고독’이 보이는가?
“고독 하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소망이 남아있다는 거다. 소망이 남아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삶이 남아있다는 거다. 삶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나에게 그리움이 남아있다는 거다. 그리움이 남아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아직도 너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고독이 고독이 아니라 소망이고 삶이고 그리움이고 그리워하는 사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면 고독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내 삶의 지주이다. 그러나 삶의 지주로서의 고독은 저절로 한 여름날의 눈송이 처럼 오는 것이 아니다. 고독이 노년의 시너지가 되려면 관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젊은 사람처럼 살아가려면 관조하고 사유하고 지식을 쌓아 가면서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輪廻)다. 윤회가 사람이 죽으면 버러지나 짐승 또는 재벌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윤회는 두 가지다. 하나는 자신이 자식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스스로 젊음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소품집에서 “평범한 인간은 시간을 보내는 데에만 집중하지만, 재능을 가진 사람은 시간을 활용할 줄 안다”고 말한다. 노인들은 인생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들이다. 이 백전노장들이 적군이 없는 군대처럼 진격의 방향을 잃고 있다. 결국 혼자가 되는 상황, 남은 인생을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다시 쇼펜하우어의 말을 옮긴다. “눈앞에 동기가 없으면 의지는 휴면에 들어가고 지성은 멈춰버린다” 노인들도 노인정에서 서산의 해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이제 동기를 가져야 한다. 어떤 동기인가?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가야 한다. 일견 노인의 삶이 건강과 돈이 좌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꺼풀을 벗기고 들어가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여기에서 돈은 천박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 능력은 바로 관조의 능력이다. 이 관조력은 바로 홀로 지내는데 가장 큰 무기다.
첫댓글 수고해주신
좋은글
아름다운글
공감해요^^ 회장님
토요일에도
좋은날씨
따뜻한날씨에...
건강하시고....
좋은분들과...
행복한시간...
기분좋은하루...보내세요...!! 회장님